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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 베어스 항명파동

last modified: 2017-10-13 12:15:39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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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개요
2. 사건의 구체적 내용
2.1. 원인
2.2. 사건의 시작
2.3. 수습&사회적 반향
3. 여담&후일담

1. 개요

1994년 9월 4일, KBO리그OB 베어스 선수 17명이 집단 이탈한 사건이다.

2. 사건의 구체적 내용

2.1. 원인

1993시즌 의외의 돌풍을 일으키면서 준PO에도 올랐던 윤동균 감독 체제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는 모양새였다. 문제는 이 젊은 감독(당시 45세)이 우승에 도전해 보겠다고 생각했던 1994년에 경기가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만년 꼴찌인 쌍방울 레이더스야 늘 그랬듯이 망했지만(...), 같은 잠실 야구장을 쓰던 LG 트윈스는 사상 최고의 성적을 내면서 인기몰이 중이었고, 여기에 원래 동네북 신세였던 태평양 돌핀스까지 정말 잘 나가자 초조함에 자주 무리수를 연발했다. 여기에 원년 멤버로서 큰 형에 가까웠던 윤동균은 초조함으로 비롯된 권위적인 면모로 인해 선수들과 갈등을 빚게 된다. 큰 형으로서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을 가졌던 윤동균과 당시 프로적인 마인드가 부족했던 팀의 고참 선수들의 갈등은 심했다. 그렇다고 중견&신인급 선수들의 마음을 확실하게 사로잡은 것도 아니었다. 당시 신인급 주전선수 가운데 항명 파동 당시 자리에 남은 선수는 윤동균 감독에게 직접 픽업된 김민호장원진 정도였으니...

다행히 두산그룹의 고위층과 친밀했던 윤동균 감독은 1992년과 1993년의 공로를 인정받아 재계약이 사실상 확정된 상황이었고, 이를 배경으로 더욱 선수단을 강하게 장악하려고 나섰다. 함께 가기 어려웠던 고참 선수들은 대규모로 트레이드 시장에 내놓고, 처리할 구상이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는 선수들도 슬슬 감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럼 잘 하던가 그래야 하는데, 여전히 술 먹는 문화가 남았다는 점. 물론 그렇다고 소통에 소홀했던 윤동균 감독도 딱히 잘 한 것은 없었다. 대표적으로 슬럼프였던 김형석의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을 두고 중단시킬까 말까를 두고 은근한 압력을 넣었던 것이 좋은 사례다. 김형석은 선발로 뺐다가 9회 대수비로 넣는 사례가 많았다.

2.2. 사건의 시작

이렇게 외줄타기를 하고 있었던 윤동균 감독과 선수들과의 불안한 관계는 1994년 9월 4일, 군산시 명 야구장에서 OB 베어스쌍방울 레이더스에 패한 후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발단은 박철순김형석이 밖에 나가서 술을 먹고 들어온 것이 윤동균 감독에게 적발되면서부터였다. 팀 패배에 팀 분위기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고참이 술을 먹고 들어오자 윤동균 감독이 폭발했다. 그리고 미팅 자리에서 급기야 배트를 들고 "오늘(9월 4일)은 매를 들어야겠다" 라고 말하면서 선참부터 차례로 나와서 소위 말하는 '줄빠따'를 맞을 것을 요구했다.[1] 이에 반발해 주장 김상호가 "최선을 다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감독님의 지도방식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맞고는 야구를 할 수가 없다." 라며 항변하면서 갈등이 폭발했다. 이에 격분한 윤동균 감독은 수석 코치 최주억에게 '최 코치! 이 새x들 명단 적고 저녁 먹여서 서울로 올려 보내시오. 내가 책임질 테니까. 이런 새x들하고는 도저히 같이 야구 못해!' 라고 말하고는 방망이를 들고 김상호에게 다가가려다 코치진의 만류로 뒤돌아서서 씩씩거리며 자기 방으로 올라가 버렸고, 주장인 김상호를 비롯해 총 17명은 숙소를 나와 선수단을 이탈해 버렸다. [2]

전주에서 빠져나와 흩어진 선수들은 대전역으로 속속 모여들었고 이 와중에 주장인 김상호를 비롯해 이탈 인원 전원이 최선참인 박철순의 뜻에 따르겠다는 압박 아닌 압박을 가했는데, 심사숙고한 박철순은 결국 대표로 짐을 떠맡게 된다. 다음 열차를 타고 자정 즈음에 서울에 도착하여 잠실 야구장에 주차해놓은 승용차를 빼고, 9월 5일 경기도 양평군 플라자콘도에 집결했다. 그리고 그 날은 나이트클럽에서 논 후 (...), 9월 6일 기자들에게 자신들이 이탈했음을 알린 후, 윤동균 감독의 퇴진을 요구하는 기자 회견을 연다. 리더격인 박철순은 자신의 선수 생활을 여기서 마감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고, 프로 원년 동료 선수로 함께 야구한 형님같은 사이인 윤동균 감독이 떠나면 자신도 야구를 할 수 없으니, 깔끔하게 둘이 책임지자고 말했다. “윤 감독이 옷을 벗으면, 나도 같이 벗겠다”고 선언했다.


사실 OB 베어스 프런트는 그들의 이탈을 당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우유부단하게 미적거리다가 사태를 키우고 말았던 것. 예나 지금이나 이 팀 프런트는 하는 짓이 하나도 안 변했다이에 대해서는 고위층의 신임을 받고 있던 윤동균 감독을 퇴진시키기 위해 고의로 방관시켰다는 가설이 있다. 이 가설을 제기한 사람이 스포츠 서울의 고(故) 이종남 기자. 사실인지는 몰라도, OB 프런트가 다소 수수방관하고 어정쩡하게 나온 것은 사실이었다. 선수들을 대규모로 방출 또는 임의탈퇴시키던지 해서 강하게 수습하던, 아니면 윤동균 감독의 퇴진을 빨리 이끌던 했어야 했는데 모든 문제가 결정이 된 것은 9월 14일이었다. 그 사이 사장이 책임지고 사표를 냈다가 반려되고, 윤동균 감독의 신임을 천명하기도 했다.

2.3. 수습&사회적 반향

결국 구단과 선수들 사이에서 일종의 합의가 이뤄진 것이 윤동균 감독의 사임과 항명을 이끈 선수들의 복귀. 단, 항명을 이끈 선수들 중 고참 5명의 경우 원래 방침은 방출이었다. 그러나 새롭게 부임한 김인식 감독이 김형석, 김상호의 잔류를 강력히 요청했기 때문에 이 둘은 잔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박철순의 경우, 방출시킬 경우, 도저히 사태가 수습되기 곤란하기 때문에 결국 잔류시켰다. 여기에는 당시 처음 등장한 하이텔 PC통신에서의 의견도 일정 부분 수렴되었다고. 또, 오프라인 상의 여론도 결코 구단에게만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영수는 웨이버로 방출 되었지만 곧바로 태평양 돌핀스에서 영입하였다. 사실 항명 주동자 중 강영수의 혐의가 가장 가벼웠음에도 그를 방출하는 것에 대해 찜찜해 하던 OB는 태평양에서 강영수 영입의사를 밝히자 "아이고 어서 데려가십시오" 라는 심정으로 강영수를 웨이버 공시했다고 한다. 그렇게 태평양 유니폼을 입은 강영수는 이듬해인 1995년 중심 타선을 꿰차고 21개의 아치를 날리며 홈런더비 4위에 오르는 활약을 보였다. 타율은 0.243으로 좀 좋지 않았지만(...)

가장 문제를 일으킨 것은 장호연인데, 구단과 매번 연봉 협상 과정에서 마찰을 일으킨 장호연을 구단에서 내보내기 위해 온갖 수를 썼다. 하지만 그룹 고위층에서 강영수 방출에 대해 구단을 강하게 질책하며 "(장호연을)공짜로 내보낼 생각 말라"는 지시를 내려 무상 트레이드나 방출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급기야 장호연을 대만 프로야구 준궈 베어스로 트레이드 시키려는 꼼수도 쓰려 했지만, 당시 대만은 미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양국간 선수계약 협정을 체결하지 않았기 때문에 트레이드 자체가 위법이었던 지라 OB는 여론의 뭇매만 실컷 맞았다. 장호연 또한 "내가 유니폼을 벗으면 벗었지 OB에서는 죽어도 못뛴다" 라고 강하게 나오며 구단과 장호연의 사이는 악화되었고... 결국 스포츠서울 이종남 기자가 장호연을 설득하고 학교 선배인 경창호 사장과 장호연 사이를 직접 중재하면서 장호연은 다시 OB와의 인연을 유지하기에 이르렀다. 대신 그 대가로 연봉은 25% 삭감했지만(...). 여담으로 장호연은 모교인 충암고에서 개인훈련을 하면서 후배들을 지도해줬는데, 이 때 그에게 배운 선수가 바로 박명환.

잔여시즌 경기는 선수 17명이 한 번에 빠져나가 꾸려 나가기 어려웠지만, 2군에서 급히 선수를 끌어다가 간신히 메웠다. 한 때, 잔여경기 몰수패 이야기도 나왔지만, 결국 이것만은 막아내는데 성공.

그리고 윤동균의 후임 감독으로 김인식이 취임했는데[3], 이 사람이 9년이나 두산의 지휘봉을 잡게 될 줄은 당시로서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윤동균 감독만 피해를 본 셈이다. 물론 원인제공자 중 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김인식 감독은 이 막장으로 간 팀을 다음 시즌인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면서 일약 명장의 반열에 오른다.

당시 이 사건은 스포츠계에 만연한 폭력문화의 한 사례로 지목되어 상당한 이슈가 되었고 윤동균 감독은 졸지에 프로선수에게 매질을 한 폭력감독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사실 윤동균 감독이 종종 흥분을 못이겨 선수의 따귀를 때리거나 한 일이 몇 차례 있긴 있었지만, 당시 스포츠계의 문화라는 것이 거기서 거기였고 프로야구계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구타나 기합 문화가 공공연하게 남아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윤동균 감독이 유난히 심한 케이스라고 보기도 어려웠던 것이다.[4] 물론 그랬다고 윤동균 감독에게 문제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남들 다 하니까 나도 해도 된다 같은 건 어린애들한테나 통하는 변명이고 팀을 잘 관리했어야 하는 감독이 선수들의 일탈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 사건이 선수들에 대한 동정론으로 흘러간 데에는 '체육계의 폭력문화'라는 매스컴의 이슈화 덕이 컸고, 애초에 윤동균 감독을 끝까지 감싸려던 두산 구단도 여론에 밀리면서 결국 윤동균 감독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 일 때문이겠지만, 이후 윤동균은 2001년 이광환 감독 휘하에서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를 잠시 지낸 것 이외에는 현장과의 인연은 거의 없는 상태이다.

3. 여담&후일담

복귀한 주축 선수들은 대부분 연봉을 백지위임하거나 장호연처럼 대폭 낮춘 액수로 계약하면서 몸을 낮추었다. 아무래도 '감독을 짜르고 살아남은 하극상의 주역들'이라는 선배 야구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을테니... 다만 장호연 못지 않은 막가파 스타일이었던 김상호만은 "그동안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 만큼 이번만큼은 올려 받아야겠다. 안 올려주면 은퇴하겠다."는 폭탄선언으로 다시 한번 프런트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결국 신임 감독의 '원만한 처리'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던 프런트는 부글거리는 속을 다스리며 김상호의 연봉을 조금 올려주는 선에서 재계약했다.[5]

그 이듬해인 1995년, 항명 파동의 주축 선수들은 대부분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쳤고, 13년만의 우승으로 체면을 살렸지만, 베어스 프런트는 이 때 가담한 선수들을 끝까지 잊지 않았다(...)

  • 박철순 : 영구결번에 화려한 은퇴식까지 해서 대우받은 거 같지만, 2군 코치 시절 구타를 옹호하다가 짤린 후, 다시는 야구계로 복귀하지 못했다.이후 스포츠용품 사업을 하다가 2015년 스리랑카 야구 국가대표팀 코치가 되었다. 그래도 아래의 다른 가담자들 보다는 대우가 훨씬 나은 것이 원년 한국시리즈의 주역이기도 하고 당시 박철순의 팬이었던 OB아재들이 그대로 두산팬이 되었기에 구단에서 시구등의 각종 행사를 할때마다 꾸준히 초청받는다.
  • 김형석 : 1997 시즌이 끝나고 방출되어 삼성으로 건너갔다. 그 뒤 홍익대와 구리인창고 감독을 거쳐 현재 미국으로 이민가서 개인사업 하고 있다. 2017 시즌부터 kt wiz 2군 타격코치로 합류.
  • 장호연 : 두산에서만 109승을 거둔 선수지만, 은퇴식 없이 은퇴해야 했다. 순천효천고와 신일고 감독을 거쳤으나 메이저리그 진출 문제를 둘러싸고 일으킨 문제로 인해 아마야구계에서 무기한 자격정지를 당했다. 2010년 무렵 자격정지가 해제됐으나 현장과의 인연은 없는 상태.
  • [김상호 : 이듬해 두산의 우승을 이끌며 MVP를 차지하지만, 노쇠해진 후 1999년 류택현과 함께 현금 1억에 LG로 트레이드되었다. 결국 2000년 시즌이 끝나고 방출되어 은퇴했다.
  • 영수 : 1995년에 21홈런을 치면서 화려한 시즌을 보냈지만, 그걸로 끝. 1996년 부진에 빠진 후, 결국 쌍방울로 가서 거기서 선수생활을 끝냈다.(아래의 강영수와 달리 1965년생)
  • 김상진 : 팀의 에이스로 1995년 우승의 주역. 하지만, 1998년 삼성으로 현금 트레이드된다. 2011년 현재 SK 와이번스 코치.
  • 권명철 : 역시 1995년 팀의 선발 투수로 우승의 주역. 그러나 군복무 후 기량이 쇠퇴했다. 결국 1998년 최훈재와 트레이드되어 해태로 건너갔다. 그 뒤 두산에 잠시 복귀해서 코치까지 지냈다가 1년을 LG 투수코치로 보낸 뒤 다시 두산 투수코치로 복귀했다.
  • 이광우 : 제법 오래 2001년까지 두산에서 선수생활했지만, 2001년 방출. 결국 LG에서 선수 생활을 마쳤고, KIA에서 코치 생활을 했다. 2011년 화순고 감독. 2014년 현재 두산 투수코치로 복귀했다.
  • 길룡 : 1999년까지 뛰다가 조용히 은퇴. 2013년까지 경기고 감독으로 재직.
  • 익재 : 1995 시즌 끝으로 방출. 그래도 현대 유니콘스로 건너가서 왼손 원포인트로 1999년까지 뛰었다.
  • 임형석 : 1990년대초 OB의 주전 3루수였지만, 안경현에 밀리며 1996년 방출, 1997년 롯데에서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 현영 : 이도형의 원조 유형의 포수라고 생각하면 된다. 1997년 이정훈의 트레이드 상대로 삼성으로 건너갔다. 이 때 같이 건너간 강영수라는 선수가 있지만, 위의 강영수와는 동명이인.(1973년생) 여하튼 그리고 나서 쌍방울로 다시 가서 거기서 은퇴.
  • 김종성 : 그 다지 활약한 선수가 아니라 1995 시즌 후 바로 방출.
  • 김종석 : 1루수였는데, 우즈에 밀리면서 결국 1루 자리는 잡지 못했다. 2000년 한화로 현금 1억원에 트레이드.
  • 추성건 : 아마야구 최고의 강타자였지만, 프로의 나무배트에 적응하지 못하며 밀렸다. 결국 1999년을 끝으로 SK로 이적.
  • 이종민 : 이듬해인 1995년 무면허 운전으로 의경을 치여 숨지게 한 교통사고로 구속되어 2년간 공백기를 가졌다. 복귀해서 2003년까지 뛰었지만, 은퇴식이나 코치는...
  • 안경현 : 두산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했기 때문에 안경현만은 다른 16인과는 다른 운명이겠거니 했는데, 결국 그도 2009년 방출되어 SK로 이적해야 했다.

보면 알겠지만, 두산에서 대접받으면서 은퇴한 선수도 거의 없고, 심지어 두산에서 잠시라도 코치를 맡았던 사람은 박철순, 권명철 단 두명. 박철순은 위의 사건으로 인해 야구계를 떠났고 권명철은 한번 두산을 떠난 적도 있었다... 두산 프런트는 이 때의 일을 정말 끝까지 잊지 않고, 제대로 갚았다.[6] 당시의 두산 프런트들이 지금도 구단의 중역에 포진하고 있는 이상 앞으로도 이들이 예우받을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2011년 각 구단들이 프랜차이저들을 우대해주는 바람이 불면서 두산에서도 2011년 8월 21일 김상호를 시구자로 초청하기도 했다. 이것을 계기로 달라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더군다나 김상호는 항명 파동 멤버 중에서도 가장 구단 속을 썩이던 선수였다.

그리고 2011년 시즌 후, 두산 베어스는 김진욱 신임 감독을 선임하면서 코칭스태프를 새롭게 바꾸면서 권명철 LG 투수코치를 다시 영입했다. 특히 권명철은 오랫동안 두산 코치로 있는데다 항명 파동에 연루된 인물이라 두산이 이를 영입한다는 것은 항명파동 멤버들과 화해한다는 의미가 있다는 분석이다. 베어스 팬들은 반색하는중.

그리고 감독직에서 사퇴한 윤동균은 사건 이후 세차장에서 우연히 만난 박철순"형님, 죄송했습니다" 라며 고개숙여 사과하자 윤동균 자신도 "좀 더 빨리 보고 싶었는데 왜 이제야 만나게 되었느냐. 나도 미안하고 내 잘못도 컸다. 더 이상 우리 얼굴 붉히지 말고 살자" 고 흔쾌히 받아들이며 눈물 어린 화해가 이루어졌고, 박철순의 은퇴식에도 참여하여 자리를 더욱 감동적으로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 외 다른 사건 주동자들과도 화해하며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야구 선후배로서 잘 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두산 베어스의 역대 감독 소개에서도 윤동균에 대해서 악의적인 멘트는 없다.[7] 두산의 역대 감독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좋은 소갯말을 적었지만, 단 1명은 대놓고 깐다(...).

여담이지만, 항명파동이 일어난 곳은 전주시군산시에 원정 경기를 오는 팀들이 묵는 숙소인 전주 코아호텔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2년 전인 1992년에 OB 선수들 사이에서 귀신을 보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1992년에 귀신을 목격했다고 하는 선수가 김상호와 박현영.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이들은 항명파동에 가담한 선수들 사이에 끼어있었다. 이래서 항명파동의 뒤에 귀신의 장난질이 있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이야기가 돌았다나...

그리고 20년후 다른 구단에서 이를 뛰어넘는 사건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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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2011년에 당시 신인급 선수였던 안경현은 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줄빠따는 과장이고 그냥 윤감독이 얼차려를 시키고 겁을 줬던것일 뿐이라고 회상했다. 이게 실상인지 안경현의 쉴드인지는 모를일이지만.
  • [2] 이명수의 경우 처음엔 항명에 동조했으나 결국 이탈한 17명과 동행하지는 않았다.
  • [3] 처음엔 선수 장악에 있어서 강성 타입인 백인천이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인화력이 있는 김인식이 낙점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베어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 중 하나가 되었다.
  • [4] 대표적으로 김응용 감독은 그의 현역 감독시절을 기억하는 팬은 다 알 정도로 구타나 얼차려가 꽤 있었고, 김성근 감독도 쌍방울 시절까지 간혹 구타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김 감독의 수제자인 외야수 심성보가 자신을 격려하기 위한 "사랑의 매"라고 표현하기는 했다). 또 김성한 전 감독의 경우, 2004년에 선수 구타 때문에 감독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사실 지금도 '체육계 폭력 심각' 운운하는 기사가 나오는데 당시에는 오죽했을까.
  • [5] 사실 김상호를 꼭 막무가내라고만 할 수는 없었던 것이, 당시 OB 구단의 연봉협상은 더 가난했던 해태 타이거즈보다도 짜기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김상호가 "지금 받는 연봉보다 더 깎이느니 그냥 지금 벌여놓은 개인사업에 전념하는게 낫겠다."고 했을까.
  • [6] 그런데 사실 항명 파동에 가담한 선수들의 그 후 이력을 보면 다른 사고를 친 전력이 있는 선수도 꽤 보인다는 점에서 오히려 다른 사고 때문에 예우를 못받는 선수도 꽤 있다.
  • [7] "베어스 간판 선수 출신으로서 코치 수업을 받고 있던 윤동균 제 5대 감독은 부임 후 무명 선수 발굴 등 부족한 환경 속에서 팀의 경쟁력을 키워내며 베어스의 팀 재건과 상위권 토약의 기틀을 마련했다" 라고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