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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운동

last modified: 2015-02-15 11:16:33 Contributors


프랑스어: Mai 68 (68년 5월)
영어: May 1968 events in France (프랑스의 1968년 5월 사태)

Contents

1. 개요
2. 영향
2.1. 보수주의자들의 평가
2.2. 진보주의자들의 평가
3. 후폭풍과 결과


1. 개요

지식채널e "68혁명"

제 1부 - 주동자가 없는 혁명
제 2부 - 실패한 혁명

1968년 5월 프랑스 낭테르 대학에서 남학생의 여학생 기숙사 출입 규제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된 시위가 5월 한달간 프랑스 전역의 대학생 시위와 1,000만 노동자의 파업으로 확산된 전례없던 반체제, 반문화 운동으로, 이 파리의 시위는 냉전베트남전 등의 시대적 문제와 결부되면서 그 해 미국, 독일, 체코, 스페인, 일본 등 세계의 젊은이들을 저항과 해방의 열망으로 들끓게 했다.

사실 프랑스의 5월 혁명은 60년대 전체를 아울러서 유럽(특히 서유럽)과 미국에 흐르던 운동이 분수령을 이룬 것이다. 60년대 초반부터 미국과 독일 등지에서 대학생의 열렬한 움직임은 꾸준히 이어졌다. [1]

68운동의 특징은 바로 운동의 주축이 대학생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시대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과 미국은 경제적으로 부흥하기 시작하였는데, 전쟁동안 이를 악물고 소위 '하면 된다'는 악바리 근성으로 살아온 기성세대와는 달리 풍족한 소비생활과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당시 젊은이, 특히 대학생들은 지금은 60대들이라 자기 자식들이 그짓하는거 보며 말세로다 한탄 중 슬슬 삐딱선을 타는데 발동(...)을 걸기 시작하였다.[2] 특히, 6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는 경제성장의 혜택이 대다수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돌아간지라 노동자들의 자녀들도 대학의 문을 두드릴 수 있게 될 정도로 대학생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데 비해 대학 수는 변함없이 부족했고 시설도 뭐같았으며 대학 교육의 수준도 형편없이 질이 낮은 편이었고 무엇보다 굉장히 보수적이었다. 이러한 시궁창스런 현실속에서 "씨발 내 등록금", "고등교육이 뭐 이따위야?"하던 학생들이 뭉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판철학에도 눈을 떴다. 사실 68운동의 사상적 흐름은 굉장히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사상을 주도했던 대표적인 철학자는 르쿠제. 도르노도 처음에는 68운동을 지지했으나 과격한 68운동의 움직임을 보고 등을 돌렸다. 나중에는 학생들 진정시키려 강단에 섰다가 전천후로 조롱을 당하고 끌려내려진 경험이 있다(...).

이 대학생들은 전체적으로 좌파이지만, 스스로를 '신좌파'로 여기며 이전의 좌익/공산계열 '구좌파'로 구획짓고 비판 대상으로 삼는다. 프랑스의 5월혁명이 분수령이 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구좌파의 대표계급인 노동자가 가담했기 때문이다. 이후 구좌파+신좌파 연합은 이탈리아로 이어진다.

무자비하고 권위주의적인 권력을 혐오하기에[3] 대학생들은 저항의 움직임으로 곳곳에 자유대학을 세우면서 모두가 선생이고 학생이고자 하였다.

언론과 미디어에도 관심이 많았다. 60년대 전체를 아우르는 의미에서의 '68운동'에 강력한 영향을 준 요소들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바로 베트남 전쟁과 미디어의 발전이다. 베트남 전쟁을 통해 전쟁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거대권력에 대한 혐오가 대학생들 사이에서 극도로 끓어올랐는데, 여기에 불과 기름을 끊임없이 공급해준게 바로 미디어였다. 안방곳곳에서 베트남의 참상이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68운동의 특징 중 하나로서 전 세계가 이 거대한 움직임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인데[4] [5] 이 연결고리를 미디어가 톡톡히 해줬다. 일본전공투역시 프랑스의 5월혁명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당시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던 중국문화대혁명이 유럽과 미국에 알려졌지만, 마오의 쩔어주는 능력(이라기 보다는 외부 유출 통제 사실 이시기엔 중국에 대한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아서 기념일에 천안문에서 봤던 특정인이 보이지 않으면 숙청되었다고 추측했던 시절이었다.)으로 실상은 철저하게 가려진 채로 홍보되어[6] 마오는 훌륭한 사상가이자 운동가로서 찬양의 대상이 되었고[7] 마오파 학생단체가 마이너 중에서는 메이저로 상당히 활동하였던 것은 흑역사일지도. 베트남 전쟁 규탄을 위해 각국의 학생 지도자가 독일의 베를린에서 모여 토론회를 가졌던 적이 있는데, 토론회가 끝나고 열린 평화가두시위에서 학생들은 "호!호!호치민!!"을 외쳤다. 오오 세계는 하나 흐름을 보면 알다시피 68운동의 거대 흐름 중 하나로 미국의 히피 역시 꼽힌다. 68운동의 움직임이 미국에서 크게 터진 사건이 바로 우드스톡 페스티벌이다.

68운동은 국가가 그럭저럭 먹고 사는 궤도에 올랐을 때, 대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촉발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한국은 그럴 여력마저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 게다가 먹고 살기 위해서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 상황과 함께 지독한 반공 레드컴플렉스에 빠져 있었던 한국은 오히려 베트남 전쟁의 정당하다는 명분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사실 한국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시아, 아프리카가 그러했다. 이후 87년 6월 항쟁은, 20년 늦었지만 국내외에서 한국의 68운동이라 비유되기도 한다. 물론, 궤도가 다른 면도 많았지만.

‘금지만이 금지된다’ ‘구속 없는 삶을 즐겨라’ ‘혁명을 생각할 때 섹스가 떠오른다’(...) 등 당시 슬로건에서 보이듯 기존 정치체제와 도덕 관습에 대한 전면적인 반란이었다는 점에서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입장에 따라 열광과 혐오라는 극단적인 반응을 아직도 보이고 있다. 프랑스에서도 "혁명은 개나발, 무조건적인 기성세대 부정과 지독할 정도의 혼란만 존재했다."와 "진정으로 민주주의와 자유를 추구할 수 있었던 새로운 혁명"이란 관점이 대립하고 있다. 68혁명의 전개과정을 다룬 68혁명이란 만화가 2012년에 정발된 적이 있으니 현대 프랑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엿보길 원하는 사람들은 참고하는 것이 좋다.

2. 영향

이 혁명으로 결과적으로 샤를 드 골 정권이 붕괴되었다.[8] 그러나 1981년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 선거에서 51.7%의 득표율로 당선될때까지 보수정당이 계속 집권해있었고 심지어 오일쇼크로 경제가 어려워졌을때조차도 동거정부를 구성하지 못했다.(...) 다만 지방의회와 기초단체장은 좌파가 장악하긴 했다.[9] 하지만 정치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어도[10] 대학 평준화[11]가 이루워지는 등의 개혁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2.1. 보수주의자들의 평가

보수파에게 ‘68년 5월’은 바로 ‘무질서와 파괴’의 끔찍한 악몽으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해 대선에서 68년 5월을 도덕과 권위, 국가 정체성 위기의 근원으로서 청산돼야 할 유산으로 지목, 이 같은 입장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영국 철학자 로저 스쿠루턴도 최근 한 월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당시 차를 불태우던 젊은이들은 책임감이 없었다”며 “도덕과 정신의 재앙이었다”고 평가절하했다.

진보적 신학자였던 베네딕토 16세를 지금의 보수적인 인물로 만든 사건이기도 했다. 실제로 68운동을 전후해서 유럽의 교회와 성당 출석률은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당시 운동을 주도하던 세대들 중에는 대놓고 "예수에게 저주를!", "성경은 대중을 기만하는 비인간적인 책이다!"라며 대놓고 기독교 자체에 거부감을 드러내던 사람들도 많았었다. 거기에 비트닉과 히피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대안종교랍시고 힌두교불교[12]같은 동양종교에 관심을 갖던 사람들도 있었다.때문에 가톨릭개신교를 막론하고 보수성향 기독교인들 중에는 안 그래도 몰락해가던 유럽의 기독교가 이때를 기점으로 해서 완전히 망했어요가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2.2. 진보주의자들의 평가

진보적 입장에서 68년 5월은 정치혁명이라기 보다 억압적이고 고루한 사회 관습을 뒤바꾼 문화혁명의 분수령으로 기억된다. 프랑스 역사학자 필립 아티에르는 호주의 일간 ‘에이지(The Age)’에서 “변화가 하루 밤새 일어나지 않았지만, 학교와 가정 직장 등에 걸쳐 프랑스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고 주장했다. ‘나의 68혁명’을 펴낸 가이스마르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혼 경력 등의 화려한 사생활에다 유대계 뿌리가 있는 사르코지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68혁명이 만들어 놓은 문화적 변화 덕분이었다”고 주장했다. [13]

68운동의 큰 의의 중 하나는 당시까지 입을 열 수 없었던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 등의 소수자들이 전면에 나설 수 있는 큰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68운동 당시 새로움, 평등한 연대를 부르짖으며 학생단체들이었지만 그 내부에서도 여전했던 성차별에 제대로 빡친(...) 여성들은 자신들끼리 연대하여 페미니즘 운동을 시작해갔다. 대표적인 슬로건으로는 내가 춤출 수 없다면 그건 혁명이 아니다

사실 리버럴한 서양의 이미지는 이때부터 자리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68년 5월이 진보진영에서 무턱대고 환영 받는 것은 아니다. 개인주의를 부추겨 80년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지적과 함께 히피와 마약 문화만을 남겼다는 냉소도 없지 않다. 실업과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고 있는 프랑스의 현 젊은이들에게 68세대가 보보스(BOBOSㆍ부르주아 보헤미안)라는 허울뿐인 자유주의자로 비쳐지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14]
뿐만 아니라 당시의 과격했던 68운동은 68운동 자체가 태동할 수 있는 배경과 보호막을을 제공했던 온건 자유주의자(liberal)을 공격해 타격을 줌으로서 커다란 공백을 만들고, 그 뒤 신좌파의 과격함에 질린 사람들이 가져온 반동과 함께 그 빈자리를 신보수주의가 메우게 되었다는 로버트 니스벳같은 학자의 설명도 있다.출처 즉, 달리 보자면 68운동은 잠재적 아군이었던 리버럴의 무덤임과 동시에 네오콘의 요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대 유력한 리버럴이었던 위르겐 하버마스나 마루야마 마사오같은 지식인들이 68운동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점을 보자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말이다. 특히 마루야마 마사오 같은 경우는 당시 68운동세력에 대해 '나치군국주의자보다 더한 놈들'이라고 깠을 정도.

순수하게 좌파적 시각에서 보더라도 68운동에는 명확한 비전도 기반도 없었기 때문에 비판받기도 하였다. 일례로 미국의 도시 빈민 운동가 사울 알린스키는 "그들은 사회를 바꾸는 데엔 관심이 없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일과 자신을 발견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폭로(revelation)일 뿐 혁명(revolution)이 아니다"라고 68운동을 비판하였다. 한마디로 선진국 중산층 대학생의 불장난이라는 것.

이점은 한국의 386 세대에 대한 지금의 20대의 견해와 비슷하다.[15]

거기다가 많은 수의 히피들이 80년대 이후 히피 문화가 죽어버리자 극단주의 기독교로 전향한 것도 논란거리가 되었다. 왼쪽으로 신나게 삽질하던 녀석이 "이건 아니야아아아!"라고 비명 지르기에 정신 차린줄 알았더니, 다시보니 오른쪽으로 방향만 바꿔 삽질하는 꼴이니 그럴만도 하지만.

간단히 줄이면 이는 거대한 학생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이 운동은 젊음의 해방구로써 분출구로써 그 역할을 한 시대의 조류였다. 그러나 아직도 "고루한 사회관습을 바꾼 분수령", "무질서와 파괴의 끔찍한 악몽"이란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상기하다시피 첫째, 벌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생생한 현대사인데다 둘째, 이른바 문화혁명으로서 아직도 삶에 직접적인 영향과 그 흔적이 여실하게 남아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연구와 판단이 매우 까다롭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 수 있겠다.

3. 후폭풍과 결과

존 레논은 이 때 영국, 미국의 반전 운동, 폴란드의 시위, 문화대혁명과 이 운동을 보고 느낀 점으로 폭력 혁명에 반대하는 'Revolution'이라는 곡을 썼다. The Beatles 앨범에도 수록.

한편, 체코에서는 프라하의 봄을 비롯한 친소 공산정권에 반기를 드는 사회운동이 벌어졌다. 동구권의 보수파인 소련 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신좌파'의 또다른 갈래로 보기도 한다. [16]또한, 체코 말고도 다른 공산권에서도 이러한 반소, 반독재 운동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폴란드. 물론 프라하의 봄처럼 국가적 개혁 분위기를 탄것은 아니었고, 일반적 학생 운동의 규모? 또 유고슬라비아에서도 학생들이 시위를 해서 티토가 학생들의 요구안을 일부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물론 현실은 시궁창... 알렉산데르 두브체크의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는 소련의 탱크에 처절하게 짓밟혔고 이후 두브체크 후임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서기관이 된 구스타브 후삭이 이전 시대로의 회귀(status quo)를 주장한 정상주의(Normalization)가 1987년까지 지속됐다. 하지만, 10여년이 흐른 뒤 80년대 초반 폴란드 레흐 바웬사의 자유노조운동이나 헝가리의 온건적인 자유주의 성향의 개혁, 그리고 소련 말기 체코의 벨벳 혁명의 시점이 됐다는 평이 있다.

그 밖의, 멕시코, 아르헨티나, 브라질, 일본, 독일,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파키스탄, 심지어는 강철의 공산주의 제국 소련에서도 1월달에 시위가 있었다고 하니,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할만 하다. 이들 나라의 또다른 68혁명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이 찰지게 추가바람.

결국 68혁명은 베트남 전쟁소신공양으로 시작해 프라하의 봄, 프랑스 5월 혁명으로 정점을 맞았지만, 프랑스 총선에서 드골파의 초압승[17][18] 소련군의 프라하 진입과 그 해 말에 있었던 리처드 닉슨의 당선, 미국의 파워를 상징하는 사건인 아폴로 8호의 달 선회 비행과 함께 끝났다.-조금 심하게 말하면 혁명은 끝나고 68년은 전세계 보수세력의 승리로 마무리 되었다.

좌파 사상가인 슬라보예 지젝은 이를 두고 2011년뉴욕 월가 점령 시위에서 "한가지만 약속해달라. 여러분은 수십년 후 맥주나 홀짝이면서 그때 우리는 순수하고 아름다웠지라고 말하지 말아달라"라고 부정적으로 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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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하의 글에서는 68운동을 '60년대 전체를 아우른 움직임'을 지칭한다.
  • [2] "그럭저럭 배부르고 등따신 세상이지만 우리들은 여기에 불만이 있음." 62년 미국의 포트 휴런선언의 내용이다.
  • [3] 셸 푸코도 68의 영향을 받은 철학자 중 한 명이다.
  • [4] 한국 빼고(...) 왜냐하면 당시 남한은 1.21사태,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등 제2의 한국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무장간첩 침투와 휴전선 교전이 잦았던 시기다. 이 시기 반공분위기가 강화되는 등 68혁명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오히려 68혁명의 붐을 북한에서 잘못 읽고 "이러한 세계적인 분위기를 몰아서 남한에 침투하면 봉기가 성공하지 않겠냐"라는 판단 하에 극렬분자들이 침투를 결행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5] 하지만 다른 시각도 있다. 한국의 4.19 혁명이 68혁명의 시초를 열었다는 것. 사실 당시 한국은 서구언론으로부터 "한국에서 민주주의 꽃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꽃이 피어나는 것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까지 혹평받는 상황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민주 혁명이 일어났으니... 서구언론들도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고, 많은 서양인들에게 잔잔한 충격을 일으켜 4.19 혁명이 68혁명에 영향을 끼쳤다는 시각이 일정 존재한다. 그만큼 4.19 혁명이 세계적으로도 꽤 인정받는 사건이라는 반증이기도하다.
  • [6] 홍위병의 조리돌림이나 린치는 감춰지고 구습을 타파하는 문화운동으로 홍보되었다.
  • [7] 1968년 5월 혁명당시 파리 소르본 대학교에는 체 게바라마오의 사진이 동시에 걸렸다.
  • [8] 정확하게는 68년 6월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기성세대들의 불안감으로 보수파가 압승하였지만 이후에 샤를 드 골이 자기 자신의 입지를 강화할려고 국민투표를 시행해먹었다가 투표에서 빠꾸먹어서(...) 물러난 것.
  • [9] 사실 1974년 대통령 선거에서 프랑수아 미테랑이 1차 선거에서 43.3%의 득표율로 여러모로 조건이 불리했음에도(풍피두가 사망하여 선거가 치러졌다.) 보수후보를 압도했지만 토론회에서 발리고 보수층이 대거 결집하는 바람에 2차선거에서 1.6%차로 석패했고. 1978년 총선에서도 2차 선거에서 보수층이 결집하면서 우파가 근소한 차이로 과반수를 점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 [10] 다만 독일에선 기민/기사-사민당간의 대연정체제에서 사민-자민당의 연립정권으로 바뀌는 등의 변화가 있었긴 했다.
  • [11] 다만 글랑제꼴은 제외
  • [12] 때마침 당시에는 유럽과 미국에 티베트식과 일본식 선(禪)불교가 유입되고 있었다
  • [13] 하지만 생각해보면, 원래 프랑스 쪽은 68년 이전부터도 이미 정치인 섹스스캔들에는 상당히 너그러웠으며, 진보적 입장과는 정반대로 이를 왕정에서 왕의 사생활은 묻지 않는다는 주의에서 이어져온 것으로 보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정치인 스캔들을 더 너그럽게 봐주기 시작한 가장 큰 계기는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의 사생아 스캔들이 더 크다. 뭐 그 경우엔 숨겨둔 딸이 들통나자 아예 자신의 사생아와 함께 국가행사나 가족행사에 같이 참석하는 비범하기 그지없는 대인배 행각을 벌였으니. 섹스스캔들에 대해서는 상당히 너그러운 프랑스 기준으로도 기가 막히기 짝이 없는 대인배적 행각인지라, 문자 그대로 전 프랑스가 기겁했다.(...) 물론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유대계 헝가리 이민자들의 자식이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판단은...
  • [14] 사실 80년대 히피 문화에게 치명타를 날린 여피 문화를 본격적으로 널리 퍼뜨린 장본인이 유명한 히피 운동가 제리 루빈이었다는 걸 보면 뭐...
  • [15] 2000년대 초반만 해도 20대들은 386세대에 대해 인지를 하고 비판을 하거나, 견해를 애기했지만, 2010년대에 들어오면서 386세대에 대해서 제대로 인지하기 보다는 진보라고 뭉뚱그려서 알고있는 20대들이 늘어나고 있다. -2010년대 20대면 386세대가 부모이기까지한 세대가되기도해서..-
  • [16] 물론 1968년 이전에 체코 뿐만 아니라 헝가리에서 소련의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이 벌어졌으나 당시 소련 서기관이었던 흐루쇼프에겐 성가신 일일 뿐이었다. 헝가리 반공시위 역시 진압을 명령한 사람은 다음아닌 흐루쇼프다.(참고로 헝가리 반공시위가 일어난건 1956년의 일로, 스탈린이 죽은지 3년 뒤의 일이다.) 물론 흐루쇼프도 처음엔 용인하려 했긴했는데(동 시기 폴란드에서 고무우카의 집권을 용인한걸 보면 아예 헝가리에 군대를 보낼 가능성이 없었었을수도 있다. 이에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항목 참조. 다만 고무우카도 나중에 루이 필리프처럼 기대에 못미치는 정치를 펼치고 이게 경기침체하고 겹쳐 지지도가 급속히 떨어져서 인민들에 의해 사실상 쫏겨나게 되었다.) WTO(바르샤바 조약기구)탈퇴 구호가 나오자 바로 때려잡기로 결정했다고(...)
  • [17] 485석중 394석을 우파(득표율 58.1%)가 차지했고 좌파는 단 91석(득표율 41.9%)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 [18] 동시기 이탈리아에서도 총선이 치러졌지만 기독교민주당주도의 연립정권이 계속집권하는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