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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사건

last modified: 2017-09-05 21:19:56 Contributors


二・二六事件. 일본어로는 니・니로쿠 지켄이라고 읽는다.

Contents

1. 개요
2. 배경
3. 쿠데타로 향하는 길
4. 2.26 사건
5. 삼일천하
6. 평가
7. 여담
8. 관련 항목


1. 개요

1936년(쇼와 11년) 2월 26일에 일본 육군의 황도파 청년장교들이 1483명의 병력으로 일으킨 반란 사건이다.

2. 배경

도파일본 육군의 청년 장교 파벌 가운데 하나였다. 이들은 사악한 일본 정부의 중신들이 천황을 등에 업고 권위를 침탈하여 민생의 피를 빨아먹고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는데 급급할 뿐 일본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데에는 무관심하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원로들을 살해한 뒤 쇼와 덴노에게 권력을 돌려주는 '쇼와 유신'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일본은 부정부패와 미국이나 영국과 관계악화 등으로 혼란한 상태였는데, 이를 빌미로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한 것. 이들과 대립해 "군은 군인에게, 정치는 정치인에게"를 주장한 파벌이 바로 통제파(通制派).

이들은 몇 년 전부터 이런 낌새를 보였고 육군 고위층과 헌병 등은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이런 성향의 인물을 찾아내고 체포하기도 하였다. 츠지 마사노부는 당시에 이런 인물들을 찾아내 고발했다. 이들의 사상적 배경엔 기타 잇키(北一輝) 같은 자도 있었다.

3. 쿠데타로 향하는 길

육군이 민정당과 마구치 오사치 내각을 뒤엎고 군사 독재를 현실화하기 위해 계획했던 3월 사건 당시, 육군 중진들의 정권 탈취 시도를 비판하며 종국에는 음모 자체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던 황도파는, 이후 10월 사건 [1] 등을 거치면서 민정당 정권이 붕괴하고 정우회의 이누카이 츠요시 내각이 들어서자 라키 사다오 장군이 육군상에 임명되는 등 육군의 중심세력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황도파에 모든 권력이 집중되고 자파 위주의 인사가 지속되자 이에 반발한 세력들이 제파를 구성하며 아라키 등을 실각시키는데 성공, 이후 황도파의 거두들이 차례로 거세당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4. 2.26 사건

1935년이 되자 황도파 숙청은 본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황족으로서 무력한 허수아비 역할에 불과했던 간인노미야 참모총장까지 황도파 숙청에 가담하자 황도파 내 청년 장교 세력은 더이상 통제파의 '전횡'을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 쿠데타를 본 궤도에 올렸다. 근위보병 제3연대, 보병 제1연대, 보병 제3연대, 야전중포병 제7연대가 주축병력이 되었다. 이들은 살해할 주요 고위관료의 목록을 작성하고 결국 1936년 2월 26일에 도쿄의 주요 정부기관을 점거했다.

내각의 총리였던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가 가장 큰 목표였지만 군인들이 착각하여 의형제인 마츠오 덴조를 살해하고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내대신[2](전직 조선 총독, 전 총리)과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장관(전 총리), 와타나베 조타로(渡邊錠太郎) 육군교육총감[3]을 살해했다.


오카다 총리와 그의 자부인 육군 대령 마츠오 덴조(松尾傳藏). 반란군이 들이닥쳤을 때 총리 관저에 있던 오카다는 총리관저에서 일하는 하녀의 빨래 모으는 데에 숨었고 경찰 넷이 반란군에 응전해 권총 사격을 했으나 곧 사살되었다. 총리의 비서이자 경호담당인 마츠오가 나가자 군인들은 오카다와 외모가 닮은 그를 오카다로 오인하여 살해하였다. 다른 총리 비서관들은 총리의 생존을 알고 관저의 빈소에 사람들이 조문하게 하면서 오카다를 탈출시킨다.


다카하시 고레키요와 사이토 마코토. 반란군은 다카하시의 사저를 기습하여 응전한 경찰을 제압하고 군도로 다카하시를 찔러 살해하였다. 사이토는 사저에 있었는데 반란군이 와서 47발을 그의 몸에 발사했다. 사이토의 부인도 반란군의 총검에 부상 당했으나 목숨을 건졌다.[4]

마키노 노부아키 옥쇄관은 손녀딸 가즈코(和子)와 아타미의 유가와라 온천에서 휴가를 즐기던 도중 군인들이 습격하자 아타미 언덕으로 도주하는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추격해오는 군인들과 총격전을 한 가즈코는 훗날 아소 다카키치(麻生 太賀吉)의 부인이 되는데 그녀가 낳은 아들은 바로(...)


나카타초를 점령한 병사들. 나카타초는 일본 국회가 있는 길 이름이다.


일본군 군부측에서 반란군에게 투항하라고 올린 애드벌룬.

5. 삼일천하

당일 내각과 군부의 주요 요인이 넷이나 살해당함에 따라 일본 정가는 충격을 받는다. 일본군 군부는 23,841명의 군인을 투입하여 이들을 진압하려고 했다. 반란군은 덴노가 직접 통치할 것을 요구했지만 정작 쇼와는 이들에게 원대복귀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사흘 동안 회유와 무력 시위가 잇따랐다. 특히 부사관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장교들에게 끌려온 터라 불안해했다.


사진사를 겨누는 반란군들. 결국 이들은 투항했다. 병과 부사관들이 먼저 투항하고 장교들 중 주모자 노나카 시로 대위와 안도 대위는 자결하고 나머지 현역 장교 17명과 예비역 장교 3명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2월 29일 오후 다섯시가 되면 상황은 완전히 정리되었다. 그 해 7월에 현역장교 16명은 사형 판결을 받고 형이 집행되고 민간인으로 참가했던 기타 잇키도 처형되었다.

6. 평가

비록 이 사건은 실패로 끝났지만 덴노를 중심으로 한 전쟁 수행은 곧 대본영태평양 전쟁으로 나타나게 된다. 5.15 사건[5]과 더불어 일본군이 얼마나 정치에 개입하려고 애썼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고 결국 일본은 군부의 폭주로 파멸에 이르게 된다. 황도파는 소멸되었으나 군부는 이를 근거로 문민정부를 겁박했고, 결국 군부의 수장들이 직접 총리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황도파의 반대파였던 통제파 도조 히데키였다.

7. 여담

당시 영친왕은 일본 육군 대령이었는데 근처에 있던 우츠노미야 59연대 연대장이었다. 2월 28일엔 반란군 진압을 위해 혼성대대를 이끌고 상경해 29일 0시에 신주쿠 역에 도착하여 호텔에 주둔하고 반란군 진압을 위해 대치했다. 2월 29일에 반란군이 와해되었으니 그리 길게 끌진 않았다. 남의 나라 쿠데타에 동원되었던 망국의 왕족이었던 셈이다.

참고로 미야베 미유키모우 저택 살인사건은 이 사건이 중심이 된다.

이 사건과 5.15 사건에는 아주 골 때리는 공통점이 있는데, 법화경을 중심으로 하는 니치렌종이라는 불교종파가 사상적으로 깊숙이 개입해 있다는 것이다. 2.26 사건의 사상적 지도자 취급을 받으며 총살당한 기타 잇키와 5.15 사건의 배경이 되는 혈맹단 사건의 이노우에 닛쇼와 그 스승격인 다나카 지카쿠가 일련종 신도로 시작했고, 법화혁명을 주장한 경우였기 때문이다. 다만 다나카 지카쿠는 니치렌을 강조하면서 불교와 국가의 통합을 주장한 극우파 사상가가 되었고, 기타 잇키는 사회주의 혁명의 영향을 받아서 니치렌을 벗어나서 독자적인 위치를 확립하면서 좌익 법화혁명 드립을 쳤다는 차이가 존재하긴 하다. 덤으로 만주사변을 일으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이시하라 간지 역시 다나카 지카쿠의 열렬한 숭배자로 거의 오컬트 수준의 국가전략을 꺼내들었으니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닫는데에는 일련종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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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만주에 전개한 관동군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이를 빌미로 육군이 정권을 전복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쿠데타 시도.
  • [2] 內大臣. 일본 율령제 시기부터 설치된 조정 소속의 대신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시종장과 더불어서 일본 궁내성의 업무를 맡아보던 자리가 되었다. 내각이 가진 현실 권력과는 다르게 덴노의 최측근이라는 점에서 권위를 가지던 직책. 내대신이라는 미묘한 어감으로 인해 흔히 내무장관으로 인식되지만, 당시나 지금이나 내대신과 내무상은 궁정과 내각이라는 다른 조직에 속한 다른 직위였다. 2.26 사건 당시 오카다 내각의 내무상은 고토 후미오였다.
  • [3] 일본 육군의 3대 수장 중 하나이다. 육군총감, 육군장관과 더불어.
  • [4] 기존 문서에는 남편의 시신을 지키다가 칼로 난도질을 당해 죽었다고 작성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1971년 사망하였으며 사망당시 나이는 97세였다
  • [5] 해군 장교들이 현직 총리였던 이누카이 츠요시를 암살한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