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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last modified: 2018-11-02 21:41:50 Contributors

Contents

1. 後漢(B.C. 23 ~ 220)
1.1. 개요
1.2. 지방관의 권한 강화와 국가의 공중분해
1.3. 완전한 멸망
1.4. 역대 황제
1.5. 추존 황제
2. 後漢(947~951)
2.1. 개요
2.2. 역대 황제 목록


1. 後漢(B.C. 23 ~ 220)

중국의 역사
후한(동한) 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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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개요

신나라의 멸망 이후로 혼란기를 거쳐서 세워진 국가. 건국자는 광무제 유수(劉秀). 수도 낙양의 위치가 전한의 수도 장안보다 동쪽에 있기에 동한이라고도 불린다. 현대에 나온 중국 서적에는 아랫 항목에 있는 오대십국시대 후한과의 구별을 위해 동한이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원래 신나라가 멸망하고 후한이 나오기 전에 현한이 있지만 기간이 너무 짧아서 그런지 잘 언급이 되지 않고 있으나 사실상 신나라가 23년에 멸망한 다음에 한나라가 다시 재건이 되었기 때문에 개국이 25년이 아닌 23년이라 봐도 상관는 없다.

현한의 황제 유현의 밑에 있었던 유수는 유현의 밑을 지나 하북 지방에 정착하며 세력을 넓혀 25년 6월에는 국가를 건국해 도읍을 낙양으로 하고 연호는 건무(建武)라 하였다. 그 뒤 적미군을 격파하고 36년에는 중국을 통일한다. 통일 후 유수는 백성들을 위해 노비를 해방하고, 죄인들을 석방시키고, 수리사업을 일으키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비록 유수는 한경제의 6대손이었지만 세력이 약해서 자신의 근거지였던 남양 인근의 호족들과 연합 정권을 세웠다. 이는 전한 건국할 때와 달리 숙청이 없었고 외척의 힘이 강화되는 원인이 된다.

후한 시대에서는 채륜세계 최초종이인 채후지를 만들고, 장형이 혼천의와 지동의를 만드는 등 문화가 매우 번창했다. 그리고 반초가 서역 여러 나라와의 교역길을 열어서 실크로드를 다시금 개척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 4대 황제인 화제부터는 외척과 환관의 세력 다툼이 심해지면서 정치는 점점 타락해 갔으며 사회 전반의 침체가 뒤따랐다. 화제 이후로는 어린 황제가 즉위했다가 일찍 붕어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정치적 권위가 불안정해진다. 이 같은 어린 황제 현상의 시작은 상제 유융이었는데, 그는 태어난지 몇 달 만에 황제가 되었다가 즉위한지 몇 달만에 감기로 죽고 말았다(…).

이처럼 황제가 자주 바뀌는 와중으로 환관과 외척이 권력을 잡다가, 결국 환관이 위세를 얻으면서 정치는 더욱 타락하고, 당고의 금등으로 유학자들에게 까지 신망을 잃으며, 게다가 암군인 영제가 국고를 채우기 위해 군주가 스스로 매관매직을 하는 등 망조가 보이니까 민심이 피폐해지고, 마침내 장각황건적의 난을 일으킨다.

1.2. 지방관의 권한 강화와 국가의 공중분해

후한의 지방관제가 이 망조를 가속시켰는데, 태수(太守)에게 군(郡)의 모든 치안, 군사, 행정 권한이 비중된 반면에 태수를 감찰할 주(州)의 자사(刺使)는 권한이 미약했다. 본래 진나라에서는 군(郡)에 행정과 재판을 맡는 태수(太守), 치안과 군사를 맡는 도위(都尉), 군의 업무를 감찰하는 감어사(監御史)의 3명의 지방관이 부임시켰다. 후한의 관료제는 이 체계가 점점 간략화 된 것인데 전한에서는 군의 감어사가 폐지되어 상부 행정 단위인 주(州)에 부임하여 각 군을 순시하며 감찰하는 자사(刺史)로 바뀌었고, 후한에서는 도위도 폐지되어 태수가 군의 행정, 재판, 치안, 군사를 모두 겸하게 된다.

이렇게 태수의 권한이 너무 강해지자 자사의 감찰이 무력해지는 폐단이 나타나는데, 자사가 호족과 결탁하여 반 군벌화된 군 태수에게 맞아죽거나 쫓겨나는 일도 빈번하게 벌어졌다. 명목상으로는 상급자인 주자사가 실제로는 하급자인 군 태수에게 호구로 취급 받게 된 것이다.[1] 사실 자사와 태수의 상하관계가 좀 애매해서, 자사는 태수보다 활동 범위가 넓지만 어디까지나 '감찰' 역할이고, 후한은 구품관인법 같은 명확한 관직 상하관계가 없어 녹봉의 석고에 따라 많고 적음으로 관직의 상하를 파악해야 하는데 자사가는 태수보다 녹봉도 적었다.; 애초에 진에서 한으로 이어지는 지방관직의 간략화 과정에서 체제적 모순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이걸 막으려고 자사에게 주의 광범위한 군사 행정 권한을 몰아주고 자사를 주목(州牧)으로 강화시켰지만 오히려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 주목(州牧)이 주(州)라는 거대한 단위의 전권을 틀어쥘 수 있게 되면서 지방관이 군벌처럼 되는 문제가 더 심해져버린 것이다. 애초에 이 제안을 한 유언 자체가 익주를 사유화 할 생각으로 진언한 것이었으니 이 제도가 적용된 다른 지역도 동시에 막장으로 치닫는 것이 당연했다. 사실상 각 주의 주목과 태수가 봉건제의 영주나 다름 없는 강력한 권한을 쥐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과 동시에 후한은 황건적의 난, 십상시의 난 등을 거치면서 중앙의 윤리적 명분과 실질적 통제 능력이 악화되면서 점점 더 악화일로를 걸었다.

황건적을 난을 시작으로 민란이 자주 일어났는데, 후한 조정이 직접 진압할 능력이 없다보니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지방관들의 자율성을 크게 인정해 줄 수 밖에 없었고 이들은 각지에서 독자적인 권력을 쌓으면서 사실상 군벌화가 이루어졌다. 황건적의 난이 겨우 진압될 무렵에는 거의 중앙 통제가 불가능한 수준이었지만 아직도 각지가 혼란스러웠으므로 그나마 조정에 우호적인 반군벌 지방관들에 대해서는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후한 조정은 황제의 '권위'를 바탕으로 하여 국가 통제가 이루어지는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십상시의 난으로 중앙정치가 혼란스러워 지게 된다. 정치는 혼란스럽게 했지만 그나마 성인 군주로서 최소한의 권위는 있었던 영제가 죽고, 외척이자 대장군으로서 청류파의 명분을 모아 국가를 보위하고자 하던 하진이 십상시들에게 살해당하고, 지방 군벌 출신의 동탁이 소제를 시해하고 헌제를 멋대로 보위에 올리는 혼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중앙 조장의 분란은 중앙 조정에게 복종해야 할 윤리적 명분을 상실하게 만들었고, 어린 아이이며 동탁이 멋대로 보위에 올린 헌제는 '권위'라고 할 만한게 없었다. 결국 이러한 중앙정치의 혼란을 명분으로 하여 거의 모든 지방관들의 이반으로 국가가 공중분해되는 대참사가 터지고 만다.신나는 삼국지 아하!

이 같은 후한 말기의 막장 상황이 삼국지연의의 초반부 배경이기도 하다.

1.3. 완전한 멸망

을 얻은 군벌 중 하나동탁이 정권을 잡다가, 동탁이 살해되자 그 졸개였던 이각곽사가 잠깐 정권을 잡다가, 마침내 조조가 정권을 잡기에 이른다. 이미 동탁이 전권을 휘두를 때 후한 황실은 그저 명목상의 존재에 불과하였으며, 이각 곽사에서 이탈했을 때는 지방관들이 물자를 보내주지 않아 극도로 궁핍하여 조정으로서 정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조조의 보호 아래 들어감으로서 겨우 안정을 되찾았으나 이번에는 조조의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다.

조조는 천자를 명분으로 삼아 각지의 군벌을 차례차례 하였지만, 각지의 군벌들은 오히려 조조가 천자를 위협하는 역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대항하였다. 결국 조조가 지배한 북중국, 유비가 지배한 사천성 일대, 손권이 지배한 강남 일대로 지배 영역이 나뉜 상태로 고착되었다.

조조 지배 지역에서 식물인간 상태에서 유지되는 후한 조정은 이 상황에서 전혀 영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허수아비 신세가 되었다. 조조는 위공, 위왕(魏王)으로 봉해지면서 후한과는 독립된 위국(魏國)의 '조정'을 세우고 위나라는 실질 통치력에서 후한 조정을 완전히 대체하게 된다. 오랫동안 후한 조정은 실질적인 통치능력 없는 허울 뿐인 상태로 존속하다가 결국 220년, 헌제가 조조의 아들조비에게 제위를 선양하면서 멸망한다.

1.4. 역대 황제

  • 비록 전한의 황족이 특권을 상실하기는 하였지만 전한과 후한은 나라 이름도 같고 국성(國姓)도 같으나 왕망 때문에 잠시 끊어져서 전/후로 나누어 부르는 것 뿐이다. 그래서 광무제 또한 왕조를 새로 세운 게 아니라 다시 일으킨 황제로 여겨서 묘호가 세조이고 대수도 16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그 앞의 황제를 알고 싶으면 전한 열성을 참고

  • 광무제를 제외하면 전한과 마찬가지로 시호에서 '효(孝)'를 빼면 된다. 예시) 효영황제 = 영제, 효헌황제 = 헌제

대수 묘호 시호 이름 출생 사망 연호 재위기간 능호
16대 세조(世祖) 광무황제(光武皇帝) 유수(劉秀) BC 5.1.15 57.3.29 건무(建武, 25 ~ 56)
건무중원(建武中元, 56 ~ 57)
25 ~ 57 원릉(原陵)
17대 현종(顯宗) 효명황제(孝明皇帝) 유장(劉莊) 28.6.15 75.9.5 영평(永平, 58 ~ 75) 57 ~ 75 현절릉(顯節陵)
18대 숙종(肅宗) 효장황제(孝章皇帝) 유달(劉炟) 57 88.4.9 건초(建初, 76 ~ 84.8)
원화(元和, 84.8 ~ 87.7
장화(章和, 87.7 ~ 88)
75 ~ 88 경릉(敬陵)
19대 목종(穆宗) 효화황제(孝和皇帝) 유조(劉肇) 79 106.2.13 영원(永元, 89~ 105.3)
원흥(元興, 105.3~105.12)
88 ~ 105 순릉(順陵)
20대 - 효상황제(孝殤皇帝) 유융(劉隆) 105 106.9.21 연평(延平, 106) 105 ~ 106 강릉(康陵)
21대 공종(恭宗) 효안황제(孝安皇帝) 유호(劉祜) 94 125.4.30 영초(永初, 107 ~ 113)
원초(元初,114 ~ 120.4)
영녕(永寧, 120.4 ~ 121.6)
건광(建光, 121.7 ~ 122.3)
연광(延光, 122.3 ~ 125)
106 ~ 125 공릉(恭陵)
22대 - 소황제(少皇帝)
북향후(北鄕侯)[2]
유의(劉懿) ? 125.12.10 - 125 -
23대 경종(敬宗) 효순황제(孝順皇帝) 유보(劉保) 115 144.9.20 영건(永建, 126 ~ 132.3)
양가(陽嘉, 132.3 ~ 135)
영화(永和, 136 ~ 141)
한안(漢安, 141 ~ 144.4)
건강(建康, 144.4~144.12)
125 ~ 144 헌릉(憲陵)
24대 - 효충황제(孝沖皇帝) 유병(劉炳) 143.2.26 145.2.15 영희(永憙, 145) 144 ~ 145 회릉(懷陵)
25대 - 효질황제(孝質皇帝) 유찬(劉纘) 138 146.7.26 본초(本初, 146) 145 ~ 146 정릉(靜陵)
26대 위종(威宗) 효환황제(孝桓皇帝) 유지(劉志) 132 168.1.25 건화(建和, 147 ~ 149)
화평(和平, 150)
원가(元嘉, 151 ~ 152)
영흥(永興, 153 ~ 154)
영수(永壽, 155 ~ 158)
연희(延熹, 158 ~ 167)
영강(永康, 167)
146 ~ 167 선릉(宣陵)
27대 - 효령황제(孝靈皇帝) 유굉(劉宏) 156 189.5.13 건녕(建寧, 168 ~ 172)
희평(熹平, 172 ~ 178)
광화(光和, 178 ~ 184)
중평(中平, 184 ~ 189)
167 ~ 189 문릉(文陵)
28대 - 소황제(少皇帝)
홍농회왕(弘農懷王)
유변(劉辯) 176.9.27 190.3.6 광희(光熹, 189.4.13 ~ 189.8.27)
소녕(昭寧, 189.8.28 ~ 189.8.30)
189 -
29대 - 효헌황제(孝獻皇帝)[3]
산양공(山陽公)
유협(劉協) 181 234.4.21 영한(永漢, 189.9.1 ~ 189.12)
중평(中平, 189.12)
초평(初平, 190 ~ 193)
흥평(興平, 194 ~ 195)
건안(建安, 196 ~ 220.2)
연강(延康, 220.3 ~ 220.10)
189 ~ 220 선릉(禪陵)

1.5. 추존 황제

  • '황제(皇帝)'가 아니라 '황(皇)'으로 시호가 끝난다.

시호 이름 생몰기간 능호 비고
효덕황(孝德皇) 유경(劉慶) 78~107 감릉(甘陵) 안제 추숭. 안제의 부친
효목황(孝穆皇) 유개(劉開) ?~131 낙성릉(樂成陵) 환제 추숭, 환제의 조부
효숭황(孝崇皇) 유익(劉翼) ?~? 박릉(博陵) 환제 추숭, 환제의 부친
효원황(孝元皇) 유숙(劉淑) ?~? 돈릉(敦陵) 영제 추숭, 영제의 조부
효인황(孝仁皇) 유장(劉萇) ?~? 신릉(愼陵) 영제 추숭, 영제의 부친

2.1. 개요

오대십국시대에 후진(後晉)이 거란에게 멸망하고 세워진 국가.

건국자는 유지원. 후진 왕조가 거란에게 멸망할 때 후진을 섬기며 절도사로서 진양(晋陽)에 주둔하던 유지원은 후진을 돕지않고, 형세를 관망하다가 요나라군이 돌아간 뒤 카이펑에 입성해 948년 카이펑(개봉)에서 황제가 되어 나라이름을 한(漢)이라 칭하고 후진을 대신해 왕조를 열었다. 그 후 유지원은 낙양(洛陽)을 점령하고 중원을 지배하여 오대(五代)의 명맥을 이어간다.

거란군이 유지원과 전투를 벌이지 않은 이유는 거란이 카이펑의 통치에 실패하여 거란인 병사들이 북쪽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고, 또한 거란의 남진은 후진에 대한 징벌과 약탈이 목적이었기에 유지원의 군대와 싸울 의미가 없었던것이 아닌가 생각이 되고있다.

그 후 유지원이 10개월 만에 죽고, 차남 유승우(劉承祐)가 황제가 되었다. 유승우 때는 내분이 잇따라 일어나 국가가 어지러웠다. 이에 노장 곽위가 반란을 모두 진압하였다.

하지만 유승우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중신들을 제거하였고, 자신에게도 위험이 닥치는것을 느낀 곽위는 분노하여 군사를 위주에서 일으켜 유승우를 공격했다. 곽위의 군대가 카이펑에 육박하던 도중 950년 유승우는 곽윤명(郭允明)에게 살해당한다.

그 때 중원 근처에서는 유지원(劉知遠)의 두 동생 유숭(劉崇)과 유신(劉信), 그리고 유숭의 아들 유빈(劉贇)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곽위는 일단 유빈을 옹립하였으나, 부하들의 추대로 스스로 제위에 올라 후주(後周)를 건국했다. 이로써 후한은 4년이란 오대(五代)중 최단명왕조로써 막을 내렸다.

하지만 후한의 잔여 세력인 유숭이 산서지역에서 북한(北漢)을 창건하고 지역에 할거하였으며, 북한은 공식적으로는 후한의 정통성을 이었다고 천명하였으며, 거란의 도움을 받아 송의 태종에게 망할때까지 버텼기 때문에 일부 사서에서는 후한과 북한을 동일국가로 본다. 이럴 경우 후한은 오대십국의 오대중 가장 오래 존속한 국가가 된다. 어떻게 본다면 아이러니중 하나.

2.2. 역대 황제 목록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능호
- 문조(文祖) 명원황제(明元皇帝) 유단(劉湍) - - 의릉(懿陵)
- 덕조(德祖) 공희황제(恭僖皇帝) 유앙(劉昻) - - 패릉(沛陵)
- 익조(翼祖) 소헌황제(昭獻皇帝) 유선(劉僎) - - 위릉(威陵)
- 현조(顯祖) 장성황제(章聖皇帝) 유전(劉琠) - - 숙릉(肅陵)
1대 고조(高祖) 예문성무소숙효황제(睿文聖武昭肅孝皇帝) 유지원(劉知遠) 천복(天福) 947
건우(乾祐) 948
947 ~ 948 예릉(睿陵)
2대 - 은황제(隱皇帝) 유승우(劉承祐) 건우(乾祐) 948 ~ 950 948 ~ 950 영릉(潁陵)
임시 - - 유빈(劉贇) - 950 ~ 9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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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아예 자기 주의 자사를 잡아다 쳐죽여버린 손견, 공손찬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 [2] 안제의 황후 염씨가 옹립시켰는데, 염씨 일족이 몰살당한 후 북향후로 격하되었다. 재위기간 200일.
  • [3] 촉한에서는 민제(愍帝)라는 시호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