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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3세

last modified: 2015-03-29 13:02:21 Contributors

역대 잉글랜드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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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헨리 3세
(Henry III
에드워드 1세
(Edward I)

헨리 3세(1207년 ~ 1272년)는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조의 왕이자 존 왕의 아들이다.

Contents

1. 생애
2. 평가
3. 그외에


1. 생애

아버지인 존 왕이 무능한 정치로 내외의 악평만 쌓은채 급서하자 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초창기 프랑스 왕태자 루이 8세가 왕위를 노린 침공을 감행하기도 하였으나[1] 잘 물리치고 섭정인 펨브룩 백작 윌리엄 마샬 등 정신(廷臣)의 보좌를 받다가, 20세로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프로방스 백작의 딸 엘리너와 결혼하고 처가쪽 사람들을 중용하여 잉글랜드 귀족의 불만을 샀다. 거기다 더해 아버지때 잃은 영토를 회복하려고 다량의 증세를 감행하고 무리하게 전쟁을 시도하였다가 별다른 이득도 얻지 못하고 위신만 깎고 말았다.

뿐만아니라 차남 에드먼드를 시칠리아 왕으로 삼게 하려는 공작도 감행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2]

더해서 동생 콘월공 리처드를 대공위시대의 혼란속에 빠저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위에도 올리려 했으나 스티야 국왕 폰소 10세와의 대립을 이기지 못하고 독일왕으로만 머물렀다.[3]

또 귀족들의 마그나카르타의 강요와 섭정기간 동안 강해진 귀족들의 권세를 꺾으려고 로마 교황에게 신종하고 교회를 이용해 귀족들을 견제하여 아버지 때 잃은 절대권력은 어느정도 회복하였으나 내부의 불만이 크는건 막지 못했다.

결국 헨리 3세의 매제였던 몽 드 몽포르가 앞장서서 귀족들의 요구서인 스포드 조례를 왕에게 전달하였으나 왕은 지킨다고 말만 할 뿐 실제론 지키지 않았다. 그리하여 1264년 시몽 드 몽포르를 지도자로한 대대적인 귀족들의 반란이 터젔다.[4]

왕은 장남인 에드워드 1세와 함께 용감히 맞서 싸웠으나 크게 패하여 둘 다 포로로 잡히고 최초의 의회를 여는데 동의하였으며 의회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그러나 이듬해 맏아들 에드워드가 극적으로 탈출, 왕을 따르는 귀족들의 지원을 얻어 다시 군사를 일으켜 몽 드 몽포르를 이브샴 전투에서 패사시킴으로써 권력을 회복하였으나 이미 고령인데다가 위신이 많이 깎여 아들인 에드워드 1세에 국사를 맡겼다.

그 후 1272년 11월 사망하여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묻혔다.

2. 평가


인품은 뛰어나고 교양과 신심이 깊어 개인적으로는 모자람이 없다는 평을 받았으나 독선적이고 무능한 대내외 정책으로 인하여 귀족들의 반란을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아들 에드워드 1세가 워낙에 뛰어난 명군으로 평가받아 실정을 상쇄한 셈이다.

3. 그외에


시몽 드 몽포르가 왕을 포로로 잡고 귀족들의 의회를 최초로 연것을 영국 민주주의사의 중요한 발전으로 보기도 한다.

징기스칸 4에서 시나리오 2,3에서 국왕으로 등장. 능력치는 기대하지말고 아들인 에드워드 1세와 부하인 롱스워드을 기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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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1차 바론 전쟁이라고 불린다. 좀 더 부연 설명하자면 존 왕이 억지로 서명한 마그나카르타에 대해 불만을 품고 후에 추인을 거부하자 귀족들이 아예 존왕을 폐위시키고자 프랑스 왕태자 루이 8세를 초빙해 잉글랜드의 왕위에 앉히려 하였다. 당시 플랜테저넷 왕조는 프랑스와 매우 가까웠고 이리저리 혈연으로 프랑스 왕실과 얽혀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가능했다. 루이 8세는 옳다구나 침공을 감행, 런던을 점거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에 존 왕은 도주했으나 상당수의 제후들이 루이를 지지하여 위기에 빠젔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될려는 찰나에 존 왕이 급서하고 어린 헨리 3세가 즉위하자 귀족들은 새로운 왕 헨리3세와 싸울 명분도 없었고 강대한 프랑스의 루이가 왕위에 오르기보다는 어린 헨리가 왕위에 오르는것이 더 낫다고 느꼈다. 헨리 3세와 섭정 윌리엄 마샬이 약간 수정된 마그나 카르타를 추인하자 결국 다시 태도를 바꿔 루이 8세에게 철군을 요구했으며 도중에 붕떠버린 루이는 결국 잉글랜드 왕위를 포기하고 약간의 대가를 받은 뒤 프랑스로 철군하였다.
  • [2] 시칠리아 섭정 만프레디가 왕위를 찬탈하자 교황은 그를 파문하고 헨리 3세와 프랑스왕 루이 9세에 접근해 시칠리아 왕위를 제안했는데 헨리의 둘째 아들 에드먼드와 루이 9세의 동생 앙주-프로방스 백작 샤를이 경쟁하여 최종적으로 샤를이 시칠리아 왕위를 가질 명분을 받게 되었다.
  • [3] 나중에 시몽 드 몽포르와 싸우다가 동생과 함께 포로로 잡히면서 리처드는 자동으로 독일왕자리에서 폐위되고 만다.
  • [4] 2차 바론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