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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세이

last modified: 2019-05-11 23:25:46 Contributors

Contents

1. 연호
1.1. 용례
1.2. 헤이세이 시대 인물들
2. 덴노 아키히토
2.1. 어린 시절
2.2. 황태자 책봉과 결혼
2.3. 즉위와 재위기간
2.4. 개념언행
2.5. 고령으로 인한 건강 문제
2.6. 퇴위
2.7. 그 외에

1. 연호

일본의 역사
쇼와 시대 헤이세이 시대 레이와 시대

1989년에서 2019년 4월 30일까지 사용된 일본의 연호. 한자로 쓰면 平成(평성), 한 글자(일본어 2바이트)로 압축하면 [1].


헤이세이 시대로 넘어갈 때 당시의 특별프로그램들
(1989년 1월 7일~8일).[2]
어떤 이가 캠코더로 찍은 영상.
1989년 1월 7일 새로운 연호 헤이세이를 발표하는
오부치 게이조 당시 관방장관.
쇼와 시대에서 헤이세이 시대로의 전환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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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平成'은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의 "内内成''9(안이 다스려짐에 바깥의 일이 이루어진다)"와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의 "地成'''(땅이 다스려짐에 하늘의 일이 이루어진다)"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연호를 정할 당시 <서경>의 해당 부분이 청나라 고증학자들의 연구로 위서라는 사실이 고증되었고, 헤이지(平治, 1159~1160) 연간이 전란으로 혼란스러웠기에 이후 平으로 시작하는 연호를 피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平에는 干(방패)이 있고 成에는 戈(창)이 있으니 곧 '방패와 창'은 전쟁을 의미한다고 해서 다른 걸로 고르자는 반대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 연호 결정시 최종안에 올라왔던 후보인 헤이세이(平成), 슈분(修文), 세이카(正化)[3] 중 슈분과 세이카는 직전 연호인 쇼와와 알파벳 이니셜이 겹치기 때문에 만장일치로 헤이세이로 결정되었다.[4] 그밖에 올라왔던 또 다른 후보는 분시(文思), 텐쇼(天章), 코쇼(光昭)가 있었다.

헤이세이(平成)란 연호 안은 이미 에도시대 말기 케이오(慶應)로 개원했던 1865년 당시 연호의 후보로 거론된 적이 있었다. 그 전거 역시 <사기>와 <서경>이었다.

참고로, 간혹 현임 덴노인 아키히토를 일컬어 헤이세이 덴노라 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틀린 것이다. 아키히토가 사망하면 일세일원의 원칙에 따라 추존 시호로 헤이세이 덴노가 되는 것이 확실하지만, 이렇게 부르는 것은 사후 명칭이 되므로 아직 살아 있는 덴노의 명칭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심각한 결례가 되기에 일본인은 금상(今上)이나 덴노 헤이카(천황 폐하) 등의 경칭으로 부르지만 외국인이 존대를 해 줄 이유는 없기에 다른 유럽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이름만을 불러 아키히토라고 칭하는 것으로 충분. 후술되는 생물학 논문에서도 저자 명의로서 'Akihito'로 표기된 예가 있다. 더군다나 한국인 입장에서 덴노 헤이카라고 부를 이유는 더더욱 없다(...) 다만 혹시라도 일본인들과 동석한 자리에서 일본어로 대화할 때 그냥 이름을 부른다면 물론 외국인이라 일본인들이 이해는 해 줄 수 있겠지만 다소 불쾌해 할 가능성이 있으니 그럴 땐 '헤이카' 정도로 칭하는 게 예의다.[5]

1.1. 용례

서기 1989년이 헤이세이 원년(元年, 간넨)이다. 즉, 1989년 = 헤이세이 1년(원년), 1990년 = 헤이세이 2년 식으로 진행 중. 서기 2010년은 일본 연호로 헤이세이 22년. 그래서 일본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2010년 2월 22일에 다양한 이벤트가 있었다. 콩은 까야 제 맛이지.

그러나 안습하게도 헤이세이 연호가 사용 개시된 1989년이 지난 지 얼마 안 되어 일본 버블이 꺼져버렸고, 그래서 헤이세이 연호가 들어간 일반명사 중 가장 먼저 유명해진 건 헤이세이 불경기/헤이세이 불황이다. 안습... 지금은 잃어버린 10년을 넘어서 잃어버린 20년도 넘고, 잃어버린 30년을 다 채웠다.

보통 라이더나 건담 같이 오래 시리즈를 이어온 작품들이 쇼와와 헤이세이를 기점으로 호불호가 엇갈리곤 하는데, 이를 버블경제에 의해 팬 층이 보다 가볍게 즐기는 것을 선호하게 되어서라는 주장도 있다.

연호가 바뀐 시점이 새해 벽두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던 탓에, 이전 연호였던 쇼와와 현재 연호인 헤이세이를 세대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쉽게 말하자면 1988년까지의 출생자를 쇼와세대, 1989년부터의 출생자를 헤이세이세대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쇼와덴노가 사망한 것은 1989년 1월 7일로, 1989년 1월 1일부터 7일까지의 일주일간은 쇼와 64년으로 계산되기 때문에 연도만으로 세대를 나누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처사이다. 그러나 일본 현지의 민간 홈페이지나 매체 대부분이 1989년을 쇼와 64년이 아닌 헤이세이 원년으로 계산하는 곳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쇼와시절에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은 구세대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이 되어 있을 정도로 쇼와와 헤이세이 두 시대의 간격은 현격하게 드러나는 것이 사실이다. 88년생은?

쇼와 64년에 발행된 500엔 주화
1989년에 발행된 일본 주화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데, 1월 1일부터 7일까지 쇼와덴노의 재위기간 동안 발행되어 유통된 쇼와 64년 발행주화와 1월 8일부터 12월 31일까지 발행되어 유통된 헤이세이 원년 발행주화가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쇼와 64년 발행주화는 그다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발행, 유통량이 적었기 때문에 한정판과 다름없는 희귀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심지어 일본 내에서까지도) 실제 그렇게 귀한 편은 아니다. 일본 내에서도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즉 미사용의 소화 64년 500엔은 우리나라 돈으로 해봐도 고작 1~2만 원 정도다.(언뜻 봐서는 높은 것 같지만 500엔의 액면가를 생각하자.)흔한 건 아니지만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구할 수 있는 정도로 생각하면 되며, 이따금 운이 좋으면(?) 자판기 거스름돈 등으로 쉽게 발견할 수도 있다. 이렇게 쇼와 64년의 주화가 많은 이유는 쇼와 64년으로 찍힌 주화가 실제로는 1989년 3월까지 주조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싼 주화는, 발행량이 적은 쇼와 62년(1987년)에 주조된 500엔 주화이다.

1.2. 헤이세이 시대 인물들

헤이세이 시대에 태어난 인물들은 헤이세이 시대/출생 문서 참고.

2. 덴노 아키히토

일본의 역대 덴노
124대 쇼와 덴노 125대 아키히토 덴노[6] 126대 나루히토 덴노

제호 아키히토 덴노 (明仁天皇)
이름 아키히토 (明仁)
생년월일 1933년 12월 23일 ~ 현재[7]
출생지 일본 도쿄 황거 산전
재위기간 1989년 1월 8일 ~ 2019년 4월 30일
즉위식 1990년 11월 12일
Hey! Say! Jump![8]

2.1. 어린 시절

아키히토(明仁) 덴노는 1933년 12월 23일생으로, 히로히토 덴노와 나가코 황후의 2남 5녀 중 장남이자 5번째 자녀이다. 칭호는 쓰구노미야(繼宮). 2살 때인 1936년부터 부모와 떨어져 동궁에서 지냈다. 본래 일본 황족의 자녀들은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떨어져 양육되는 것이 전통이었으나, 너무도 소중한 아들이었기에 관례를 깬 것이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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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누나 요리노미야 아츠코 공주, 여동생 스가노미야 타카코 공주와 함께. 히로히토 덴노의 딸들은 막내 타카코 공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불행한 삶을 살았다.

본래는 왼손잡이였는데 이걸 그냥 둘 리가 없다 어렸을 때 양손잡이로 교정했다. 1945년 당시 13살 때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쿄(도쿄 대공습 참조.)를 보면서 평화를 다짐했다고 회상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전쟁 중 피난처에서 전황을 설명 받던 중 가미카제에 대해 "그저 병력을 소모하는 것 뿐 아닙니까?"라고 되물어 담당 장교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고. 패전 이후에는 서양의 사상과 생활 방식을 배우게 하려는 아버지의 의향에 따라 미국 태생의 엘리자베스 바이닝 부인이 가정교사로 초빙되었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이커 교도 중 하나로, 퀘이커 교도와의 친분은 쇼와 때부터 전통이었다.

2.2. 황태자 책봉과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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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결혼 당시. 2013년의 모습.

1952년 11월 10일 성년식과 함께 황태자 책봉식이 거행되었으며 다음해에는 아버지를 대리해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는 등 반년에 걸쳐 14개국을 순방했다.

1957년 가루이자와에서 테니스를 치던 도중 평민 쇼다 미치코와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어, 어머니와 숙모 등의 반대를 물리치고 1959년 결혼하여 화제가 되었다. 메이지 덴노 이후 최초로 평민 출신을 황실로 맞아들인 결혼이었기 때문. 젊은 시절의 미치코 황후는 사진에서 보듯 미인으로 매우 유명했지만, 엄청난 시집살이에 시달린 바람에 황후가 되었을 때는 남편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10] 미치코도 말이 평민이지 실은 대 재벌가의 딸[11]이었는데도 황실 내부에서의 대접이 이랬다는 것이 더 흠좀무다.

나가코 황후신적강하된 황족 여인네들은 입방아를 찧다 못해 집단 괴롭힘에 나섰다. 쇼다 미치코아키히토 황태자가 사귈 때부터 달라붙어 둘의 사이를 훼방 놓았으며, 그들의 결혼을 극우단체까지 동원해가면서 필사적으로 방해했다. 게다가 그렇게 힘들게 결혼했음에도 끝내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고 시종일관 가혹행위를 자행했다. 공식석상에서의 집단따돌림 행위도 일삼았다니 흠좀무. 나가코 황후를 포함한 나머지들은 신분의 벽 운운하기엔 너무나 품위 없는 행동으로 며느리를 괴롭힌 것이다.

지금이야 다 나이 먹은 할아버지, 할머니. 이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2남 1녀인 나루히토, 후미히토, 구로다 사야코 모두 평민과 결혼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마사코 황태자비. 이와 관련한 사항에 대해서는 헤이세이/가족관계 참조 바람.

1959년의 결혼식은 전 일본에 중계되어 일본의 흑백TV보급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2.3. 즉위와 재위기간

1989년 1월 7일 장기 투병 중이던 쇼와 덴노가 세상을 떠나자 일본 역사상 2번째로 고령인 55세에 즉위해 헤이세이로 개원했다. 1999년2009년 각각 즉위 10주년과 20주년 축하 행사가 있었다.

2.4. 개념언행

아키히토 덴노가 '일본의 황족에 백제인의 피가 섞여 있다'라는 발언을 했을 때 한국의 소위 재야사학계에서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그 근거가 고사기에서 무령왕 - 간무 덴노가 모계 방향으로 먼 연관이 있다고 한 문구 수준이었으므로 확대 해석은 삼갈 필요가 있다. 여진족 신라인설이 학술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지 않듯, 약 300년간 떨어진 이러한 머나먼 혈연관계는 고대 백제와 왜국의 관계가 가까웠음을 일정 부분 보여줄 수는 있어도 덴노가의 혈통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볼 근거가 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단지 현 덴노가 외교적 수사를 구사하였을 뿐이며, 오히려 저 발언을 악용해서 한국 침략에 대한 정당화를 주장할 수도 있다는 떡밥도 있었다. 실제로 일본 제국의 악명 높은 '내선일체'가 그 떡밥에서 피어난 곰팡이이기도 하고.

정치관은 밑에 쓰여있는 발언들에서 알 수 있듯이 꽤 개념인이다.

대표적인 발언으로는...
"우리 국민은 다시는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깊은 반성과 평화국가가 되겠다는 굳은 결의를 했다." (1992년 10월, 중국 수교 20주년 차 방문 때)

"한때 우리나라가 한반도 사람들에게 지대한 고통을 주었다는 깊은 슬픔이 항상 내 기억 속에 있다."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 방일 때)

“제국헌법 시대의 천황의 지위와 비교하면, 현행 헌법 아래의 천황의 지위가 오랜 역사에서 볼 때 전통적인 천황의 지위에 맞다고 본다.”(2009년 4월, 결혼 50주년 기념 기자회견에서) #

(일본에 장래에 대한 걱정이 있느냐는 질문에) "내가 오히려 걱정인 것은 차츰 과거 역사가 잊혀 지는 것이다.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말도 못하는 고생과 희생 위에 지금의 일본이 세워진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후 태어난 사람들에게 제대로 (역사를) 전달해 나가는 것이 국가 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 (2009년 11월, 즉위 20주년을 하루 앞두고.)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지려 하고 있는 오늘, 일본이 지나온 역사를 반복해 배워서 평화를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2011년 12월 23일 생일 기념 감상문을 통해서)

"정부가 희망한다면 물론 방한하고 싶다. 나는 양국의 우호를 위해서라면 현지에서 사죄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겠다." (2012년 9월 4일, 이명박 대통령의 일왕 사과 요구 발언을 두고 양국 간의 감정이 악화된 가운데, 외무성 종합외교정책국장과의 진강(進講)에서 이러한 발언을 했다는 보도가 있다) 기사

"전후 연합군의 점령하에 있던 일본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소중한 것으로 삼아 일본국 헌법을 만들고 다양한 개혁을 실시해 오늘의 일본을 일궜다." (2013년 12월 23일 팔순을 맞아 발표한 인사말 중에서)

"만주사변으로 시작한 전쟁의 역사를 충분히 배우고, 앞으로 일본의 존재 방식을 생각하는 것이 지금 무척 중요하다." (2015년 1월 1일 궁내청을 통한 신년사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 당시,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다"란 말도 아키히토 덴노가 한 말이다. [12] 특히 아키히토 덴노는 즉위 이후 단 한 번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일이 없다. 극우 세력 일각에서는 꾸준히 참배를 권유하고 있지만, 아키히토 덴노는 이에 대해 일체 함구 중.

결국 위 발언들도 극우 세력을 의식해 표현을 다소 완곡하게 했을 뿐이지 실제 아키히토 덴노의 성향은 반(反)극우 성향이라고 볼 수 있다.
왕은 이렇게 제정신인데 아랫대가리가 참...

2011년 3월 15일 토호쿠 대지진과 관련한 영상 메시지를 발표했는데, 메시지가 방송되는 도중 긴급 뉴스가 발생하면 메시지 방송을 중단하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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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들 : "덴노 헤이카 반자이!" / 아키히토 : '이런 천하의 간신배들을 봤나(...)'
란란루!

2013년 4월 28일, 아베 신조 총리가 주도한 '주권 회복의 날' 행사에 참석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행사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행사 폐막 직후 퇴장하는 도중 참석자들이 '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라고 외치자 사뭇 당황하는 표정을 보였다.

당연히 이런 짓을 하면 할수록 일본 왕실까지 덩달아 이미지가 안 좋아지는 건 둘째치고서라도, 히로히토조차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A급 전범이 합사되자 매우 불쾌해하며 이후로는 근처에도 안 갔었다는 사실[13]을 감안하면 아키히토 덴노의 이 날 모습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야마모토 타로원자력 발전소 관련 문제 등으로 황거에서 열린 행사에서 편지를 건넨 적이 있는데 야마모토의 안전을 위해서 읽지 않고 바로 시종장에게 넘겼다. 만약 읽었으면 야마모토가 위험할 수도 있었다. 일본의 상징이지만 정치적인 권력은 극도로 제한된 일본 국왕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2.5. 고령으로 인한 건강 문제

2011년 11월 폐렴으로 입원해 19일 만에 퇴원했고 그동안의 공식 업무는 장남나루히토 황태자가 대신했다. 아키히토 덴노가 77세의 고령이지만 현행 황실 전범 상 양위하고 상황이 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효심야심 높은 걸로 유명한 차남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덴노 정년제를 주장하기도 했다. 2012년, 1년 전에 발견된 관상동맥경화를 치료하기 위해 약물요법을 받았으나 호전되지 않고 증세가 악화됨에 따라 2월 18일에 바이패스 수술을 받기로 결정되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나 다시 공식 업무에 복귀했다.

2.6. 퇴위

2016년 8월에 건상상의 이유로 처음 퇴위 의사를 내비친 이래 이에 대한 논의가 오갔다. 결국 황실전범에는 손대지 않는 '특별법'의 형식을 취해 2017년 6월 9일 일본 국회에서 '천황퇴위특례법'이 통과되었고, 같은 해 12월 1일에 황실회의에서 2019년 4월 30일에 퇴위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이로서 일본 역사상 202년 만에 생전에 퇴위하는 덴노가 다시 나오게 되었으며, 5월 1일에 나루히토가 제126대 덴노로 즉위하게 되었다.

퇴위 후 아키히토 덴노는 상황(上皇)이라 불리기로 결정되었는데, 주의할 것은 이전에 퇴위한 덴노들은 공식 명칭이 태상천황(太上天皇)이고 태상천황의 줄임말인 싱황으로도 불렸던 건데 아키히토 덴노는 상황이 공식 명칭이라는 것. 그래서 미치코 황후는 상황후라 불리게 되었다.

2.7. 그 외에

아버지 쇼와 덴노처럼 어류학자로서 일본 어류학회 회원이기도 하고, 사이언스네이처 논문을 포함한 28편의 논문을 발표했다[14][15]. 오랫동안 망둥 어 연구를 한 것을 기려 그의 이름이 들어간 종이 2개나 있다. Platygobiopsis akihitoExyrias akihito가 그것. 외국 방문이 3차례/4차례 뿐(미국, 영국, 네덜란드, 중국)[16]이었던 히로히토와 달리 해외순방이나 지방순례, 지진현장 방문도 흔해서 인기가 높은 편이라고. 참고로 2003년에 이르러 일본의 도도부현을 모두 방문했다.

김대중 대통령 방일 당시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아키히토가 김대중에게 악수를 제안했으나 무시당한 적이 있다. 하지만 임기당시 일왕이 아닌 천황으로 불러야 한다고 하고 일본문화개방을 지시한 김 대통령의 행적을 생각해보면 고의는 아닌 듯하다. 악수는 오른손으로 오른손으로 인사하고 있는데 악수하자 할 줄 몰랐겠지 1990년대 이후에 한일관계가 그나마 좋았던 때가 김대중 정부 시절이긴 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고이즈미 총리가 극우노선을 타기 시작하자 양국관계는 급격히 악화됐고, 이명박 정부 들어서 분위기가 반전되는 듯 했으나 독도방문과 결정적인 덴노 사과발언으로 일본 좌파 진영조차 충격 먹고 결국 틀어졌고 박근혜 정부에서도 거의 바뀐 건 없다. 천황 호칭도 노무현 정부에서 다시 일왕으로 돌아갔고...[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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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태평양 전쟁의 격전지 순방을 검토 중에 있다고 NHK에서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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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외에 선대 덴노인 明治, 大正, 昭和를 압축해 2바이트 규격의 한 글자로 만든 것이 유니코드에 등록되어있다.(㍾, ㍽, ㍼) 비슷하게 가타카나로 단위를 쓴 것을 2바이트에 우겨넣은 환경의존문자(같은 것. 40mP의 명의가 이 글자를 쓴다.)나 株式会社를 2바이트에 우겨넣은 ㍿가 존재한다. 또한 한국의 ㈜에 해당하는 ㈱도 존재한다. 로마자 IME입력에서 かぶ를 변환하면 출력되기도 한다.
  • [2] 45초 경에 일본제국 시절에 관한 KBS 보도가 나오는 일본 방송이 잠깐 나온다. 덧붙여 그 당시 한국과 일본의 방송 화질 차이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 [3] 의도적인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부에 의한 미디어 탄압이 소재가 되는 소설 도서관전쟁에서 연호로 사용되었다.
  • [4] 일본에서는 일세일원제가 확립된 이후의 연도표기에서 연호를 알파벳 이니셜로 표기하는 관습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쇼와 56년은 S56, 헤이세이 23년은 H23 식으로.
  • [5] 그 외에도 입헌군주제 국가 사람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다가 그 나라의 군주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면, 이름으로 부르지 말고 존칭을 취하는 게 좋다. 예를 들어 평소엔 그냥 '엘리자베스'라고 칭하더라도, 영국인들과 동석한 자리에서는 'Her majesty'라고 칭하는 게 그들에 대한 예의다.
  • [6] '메이지'나 '쇼와' 등 연호를 붙여서 호칭하는 것은 해당 덴노가 죽은 뒤에 통용된다.
  • [7] 2014년 12월 23일 부로 81세, 2019년 현재 한국 나이로 87세
  • [8] 실제로 몇몇 일본 가수들이 이 드립을 친 전례가 있다.(...)
  • [9] 그간 나가코 황후는 딸만 낳는다고 비난을 당해 왔고, 심지어 측실 제도의 부활까지 거론되기도 했다. 히로히토 덴노가 이를 거부하여 시행되지 않았다고. 황실에서 대놓고 세일계를 깨드릴 수는 없잖나!?
  • [10] 특히 시어머니나가코 황후는 그녀가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혹독한 시집살이로 괴롭혔고, 큰며느리를 2000년에 죽기 전까지 대놓고 무시했다고 한다. 총 42년간 시집살이를 한 셈. 그 때문에 1993년 10월 20일, 미치코 황후가 만 59살 되던 해에 실어증에 걸려 고생을 했을 정도이다. 이 탓인지 본인은 두 며느리와 대체로 사이가 좋은 듯하다. 다만 큰며느리 마사코 황태자비와는 태어나지 않는 손자 문제로 고부 갈등이 있었으며, 이 영향으로 한동안 황태자 부부와 덴노 부부 사이가 엄청 악화되었던 적이 있다. http://blog.daum.net/spekqj/9593455 참조.
  • [11] 닛신제분 쇼다 히데사부로(正田英三郞) 회장의 장녀. 중국계 이민이 창업한 라면 메이커 닛신 식품과는 다른 기업이다.
  • [12] 그런데 이른바 "통일운동가"라는 정경모는 이것을 백제의 아신왕에게 광개토대왕이 쓴 표현이란 이유로 "내 땅인데 지금 못 되찾아서 아쉽다"라는 뉘앙스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 그런데 설령 이게 사실이라도 직역 자체는 "유감이다"로 해석되는 것으로 보아 아키히토 덴노가 그런 깊은 의미를 알아서 쓴 건 아닌 것 같다. (정경모도 세지마 류조 씨의 개입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 [13] 히로히토 본인이 전쟁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를 논하기 이전에 일단 전쟁의 결과 히로히토가 어떤 일을 겪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이런 반응이 정상적일 수밖에 없다. 참고로 A급 전범 합사 이전에는 8번 정도 참배했다고.
  • [14] 그런데 저 사이언스 논문은 과학 연구논문이라기보다는 일본 과학사에 관련된 에세이에 가깝고, 네이처 논문은 런던 린네 학회(분류학회) 연설을 글로 옮긴 것이다. 저자는 'His Majesty the Emperor of Japan'.
  • [15] 2008년에는 차남인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과 사이좋게 1,2저자를 먹으며 논문을 냈다.# 저자 목록을 살펴보면, Akihito, Fumihito A et al. 이라고 되어 있는데, 일본의 황실은 성(姓)이 없기 때문에, 저자 목록에 그의 '이름'만 올라가 있는 특이한 경우이다. 후미히토 친왕은 일종의 경칭인 '아키시노노미야'를 '성'으로 등재. 참고로 저자 주소는 Imperial Residence. 몰라 뭐야 이거 무서워
  • [16] 사실 중국도 방문하고자 희망했지만 중국의 애국단체들과 좌익 세력들이 강하게 반발하여 결국 방중하지 못했다. 다만 대만에는 방문한 사실이 있다.
  • [17] 사실은 언론이나 일반 발표를 대상으로 일왕이라고 하는 것이지, 정부에서 외교문건 등에 쓰는 공식 호칭은 여전히 천황이다. 외왕내제의 반대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