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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

last modified: 2015-03-24 19:52:10 Contributors


(이준, 이상설, 이위종)

헤이그 특사 / 헤이그 밀사

1907년, 을사조약으로 인해 빼앗긴 외교권과 일본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고종이 비밀리에 네덜란드 헤이그(Den Haag-덴 하흐) 시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보낸 3명의 특사들을 가르킨다. 그 멤버는 이준, 이상설, 위종. 여기에 헤이그에서 미국인 헐버트까지 합세했다.

이들의 동정은 실로 치밀했는데, 고종은 은밀히 이준을 에 불러서 특사로 임명한뒤에 이상설과 이위종을 각각 다른곳에서 만나게 해 합류하는 방식으로 일본의 감시를 피하고자 했다. 세 사람은 러시아에서 합류한 후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러시아를 거쳐 헤이그까지 도착했다.

허나 정작 헤이그에서는 데꿀멍 하고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헤이그에서 일본은 특사들이 희의장 입장을 요구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특사가 파견됐음을 알아챈다. 이들은 한국에서 헐버트를 감시했는데 헐버트가 일본까지 이동하며 일본의 눈길을 끄는 동안 특사 셋이 러시아를 거쳐 헤이그로 간 거였다. 당시 조선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는 헤이그에서 특사가 목격됐다는 전보를 받고 노발대발하며 고종에게 찾아가 따졌다. 결국 나중에 헤이그 특사를 구실로 고종을 폐위한다.

헤이그에 간 것까진 좋았는데 그들은 입장이 거절된다. 그래서 그들은 만국평화회의 의장인 러시아 공작에게까지 찾아갔고 러시아 공작은 개인적으로는 이들을 동정했으나 이미 러시아 본국에서 대한제국 특사들은 절대 받아들이지 말라라고 밀명을 내려놓은 상황이었던 터라 결국 유야무야 말을 돌리면서 이들의 회의참석을 막아버렸다.[1]

상황이 이리되자 특사들은 언론전으로 방향을 돌렸다. 영어불어, 러시아어에 능통했던 이위종이 세계 각국의 기자들에게 을사조약의 부당함과 일본의 조선 침략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이것이 각국 언론들의 주목을 받긴 했으나 상황이 달라지진 않았다. 게다가 이 때, 이들이 친조선파 언론인이라 생각해 가능한한 모든 정보를 알려줬던 일본 특파원은 직함이 언론인이었을 뿐 실은 일본 대사의 첩보요원 노릇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행동은 실시간으로 일본에 유리하게 왜곡되어 조선에 전달되었다.

그 후 안타깝게도 별다른 진전 없이 이준이 호텔에서 사망했다. # 동영상 초반에 호텔방이 나온다. 이것을 보고 후에 변절한 황성신문장지연이 위암문고에서 "할복 자살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자 화끈하게 배를 따서 내장을 꺼내 던졌다더라" 라고 기술했다. 장지연 자신의 변절 행위가 민망해서 그랬나 이건 결국 지금에 와서는 국사 교과서에서도 호텔에서 단순 객사했다고 하기에는 좀 뭐한지(...) 그냥 "이준 열사는 헤이그에서 순국했다" 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조국의 주권을 항변하기 위해 이역만리까지 찾아가 객사한 것은 분명 의미있는 순국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준의 사인에 대해선 이런 저런 추측들이 많이 있었으나 헤이그의 문서 보관소, 사망 당시의 신문 등을 살펴보아도 사망 사실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 정확환 원인은 나와 있지 않아 현재 사인은 불분명하다. 실패로 인한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홧병에 걸려 병사했다는 설이 강하나 정설은 아니다.

밀사들은 서양 들이 그냥 지나칠리 없다고 판단했겠지만, 그 당시 일본은 이미 손을 써서 영국과 1차 영일동맹을 맺고, 미국과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그리고 러시아와 청나라는 이미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깨져서 데꿀멍. 그로 인해 나중에 고종 황제가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밀약을 맺은게 있는지라 미국은 찬바람만 쌩쌩 날리고, 결국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합병당했다.

어처구니 없는 사실은 이 만국평화회의에 공식적으로 한국의 자리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47개국 가운데 12번째로. 더군다나 회담 내내 "참석국은 47개국"이라고 언급되었다. 데꿀멍의 원인은 흔히 알려진 외교권 박탈에 따른 무시나 초청장의 부재가 아니라, 일본의 방해와 대표성의 부실 때문(…). 주최국이었던 네덜란드도 대한제국의 회의참석에는 이의를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나중에 일본 대표가 네덜란드 정부에 일본 국가 명의로 항의하여 조선'은 대일본제국의 속령지역이니만큼 귀국(네덜란드)께서는 조선 대표의 회의참가를 불허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은밀히 압박을 놓았기 때문. 그렇다고 주최국인 네덜란드까지 친일성향을 보였다고 보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네덜란드가 조선과 친분이 있던 관계도 아니고, 설사 있었다고한들 동양의 실세인 일본과 척을 지면서까지 조선을 도와줄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외교란 철저한 실리에 움직이지 감정이 끼어들 틈은 없다는 걸 명심하자.

이미 1907년의 상황은 이미 나라의 군사력은 거의 궤멸상태고 황제는 일제의 감시아래 손발이 다 묶인 상황이었는데 사실 할 수 있는 카드는 외교적인 수단밖에 없었다. 고종으로서는 나름 최선을 다한 것이다. 더구나 3국 간섭으로 일제가 물러난 기억도 있는 상황이었다.

일본이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상황에서 달리 해볼 수 있는 방법은 그때 상황에서는 전혀 없었다. 헤이그 특사는 고종에게 있어서 최후의 몸부림일 뿐이었다. 고종이 비판을 받을 부분은 이거 아니라도 많으며, 그래도 나름 큰 위험을 감수하고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는 최후의 저항을 선택한 것은 나름대로 평가를 받을만한 일이지, 안일했다고 비판받을 일은 아니다.

여하튼 이 사건을 계기로 고종은 이완용송병준에게 위협당해 강제 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하게 된다.

아키야마 요시후루도 이 헤이그 회의에 참석했는데, 이때 한국의 헤이그 특사들을 저지했을 것이란 추정이 있다. 그런데 그는 정작 회의에서 열심히 졸고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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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일제의 견제가 없었더라도 들어갈 확률이 희박하다. 일본과의 늑약으로 인해 대표가 일본이나 마찬가지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