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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리우스

last modified: 2019-05-28 20:09:23 Contributors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
포카스 헤라클리우스 콘스탄티노스 3세
없음 헤라클리우스 왕조 헤라클리우스 왕조

가장 고귀한 신이며, 이 세상의 왕과 주인이며, 위대한 호르미즈드호스로의 아들이 천하고 무지한 노예 헤라클리우스에게 고하노라.
너는 우리의 지배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군주라고 칭하고 있다. 너는 우리의 보물을 빼앗고 우리의 하인들을 속이고 있다. 도적 떼 같은 군대로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 내 어찌 너희 그리스인들을 멸하지 않으리? 너는 신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신은 어이하여 내 손에게 카이사레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를 빼앗아 가지 않느냐?…… 내가 콘스탄티노플까지 파괴하지 못할 줄로 아느냐? -호스로 2세가 622년경에 헤라클리우스에게 보낸 편지-
참십자가를 가져오는 헤라클리우스

Contents

1. 개요
2. 황제가 되기까지
3. 막장제국
4. 성전이다!
5.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6. 전쟁의 끝
7. 말년
8. 공용어 전환 조치에 대하여
9. 최초의 비잔티움 황제란 견해
10. 창작물에서

1. 개요

  • 라틴어: 플라비우스 헤라클리우스 아우구스투스 Flavius Heraclius Augustus
  • 그리스어: 플라비오스 이라클리오스 Φλάβιος Ἡράκλειος
  • 생몰년도: 575~641

610~641년에 재위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로 헤라클리우스 황조의 창건자이다. 사산조 페르시아에게서는 제국을 구하는데 성공했으나 아랍 제국의 흥성을 막는 데는 실패한 황제로, 이는 그 당대부터도 찬사와 비난이 교차했었다.

한때는 고대 로마 제국의 전통을 끝내고 중세 그리스 제국을 열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현대 그리스에서도 이 견해를 지지하지만[1] 이는 후기 로마 제국에 대한 이해가 미비했던 아주 과거의 견해에 불과하다.

하지만 로마 제국이 7세기 이후로 어떤 형태로든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띄게 된 계기를 제공한 황제임은 분명하다.

2. 황제가 되기까지

헤라클리우스는 아르메니아 혈통의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카르타고 총독으로 같은 이름을 가진 헤라클리우스였다. 그는 카르타고의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는 엑사쿠스였으며 황제 포카스의 횡포가 심하자 608년 제국의 곳곳을 다니며 2년 동안 반란 세력을 규합했고 마침내 610년 휘하 병력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당시 포카스는 하나 밖에 없는 사위마저도 의심하여 체포하려 들었을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으며 이런 황제 밑에서는 제국이 망할 게 분명하다 여겨 모든 귀족이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헤라클리우스는 무혈입성하여 포카스를 폐위하고 610년 황제로 등극한다. 이 때 포카스를 붙잡은 헤라클리우스는 그에게 "그대가 바로 제국을 이 꼴로 만든 자인가?"라고 물었는데, 이에 포카스는 "그대가 나보다 더 잘 통치할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했다. 이에 헤라클리우스는 크게 분노하여 그 자리에서 직접 포카스의 목을 베어버렸다. 처형당한 포카스의 시체는 여러 조각으로 잘려 사냥개들에게 던져졌다고 한다.

3. 막장제국

하지만 전임 황제 포카스가 너무 많은 사람들을 숙청하면서 제국의 방위 체계를 모조리 망가뜨려 놓았던지라, 사산조 페르시아호스로 2세가 진격했을 때는 제대로 방어가 가능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611년에 시리아, 아나톨리아를 정복당하고, 613년 막기 위해 군사를 보내지만 안티오크에서 이마저도 격파당하며 다마스쿠스도 점령당하고, 614년에는 예루살렘마저 빼앗겨 제국의 최고 성유물인 참십자가마저 빼앗긴다. 뒤이어 호스로 2세는 616년에는 이집트도 정복하고 617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보스포루스 해협 바로 건너 편의 칼케돈마저 정복한다. 619년에는 전염병까지 도는데다가 거기다가 622년에는 로도스 섬마저 함락당하는 초유의 위기 상황이 되었다.

대단히 임팩트가 큰 이 상황 때문에 헤라클리우스가 무력하게 영토를 잃고 있었다는 오해가 있었으나, 그에게는 남은 야전군을 끌어모아 회전에서 도박적인 승부를 벌이는 방법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헤라클리우스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일단 후퇴는 하더라도 시간을 벌어가면서 후퇴하는 대신 잔여 병력을 철저하게 훈련시켜 전투력을 끌어올리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622년, 영토를 절반 넘게 잃은 상황에서도 동방 방면 야전군들은 그래도 건제와 병력을 상당 부분 온존하여 병력은 2/3 넘게 건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제국 서쪽에서 슬라브바르에게 호스로 2세의 페르시아군에게 입은 것보다 훨씬 더 큰 타격을 입어 일리리쿰군이 거의 궤멸되고 말았다. 훗날 아랍인들과의 전투에서도 야전군 전체가 통째로 날아가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을 돌이켜 볼 때, 이 참사가 헤라클리우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안겨주었을 진 상상이 어렵지 않다.

때문에 이래도 저래도 방법이 없겠다 싶은 헤라클리우스는 카르타고로 수도를 옮길 생각까지 하지만, 카르타고로 가려는 배가 악천후로 침몰한 데다가 총대주교의 만류로 그는 다시 생각을 고쳐 먹는다.

4. 성전이다!

심기일전한 헤라클리우스는 622년 이콘을 앞세워 군사들을 격려해 성전을 주장하며, 교회에서도 많은 기부를 받아 하기아 소피아의 금까지도 벗겨가며 돈을 충당하여 드디어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걸게 된다. 그래서 이것을 최초의 십자군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면 비잔티움 연대기라든가... 앞서 봤듯 헤라클리우스가 그동안 했던 치밀한 준비를 보면 그렇게 아주 놀라운 기적이라고까진 할 수 없으나, 헤라클리우스에게 비범한 조직력과 장군으로서의 천부적인 자질이 함께 있었던 건 분명하다. 조직력이라면 몰라도 헤라클리우스는 그전까진 야전에서 제대로 된 전투를 경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본인이 직접 군대를 통솔해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은 높이 사줄만한 동시에, 제국에 다른 믿을만한 장군이 없었다는 암울한 점도 시사한다.


헤라클리우스가 이끄는 군대는 샤흐르바라즈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둬 아나톨리아를 위협하는 페르시아 군대를 어느 정도 처리하는데 성공하였다. 623년 수많은 배신 행위에도 불구하고 아바르와 강화를 맺은 헤라클리우스는 2만 명만의 군사를 이끌고 페르시아의 중심부로 출발한다.


놀랍게도 헤라클리우스는 계속 승리를 거둬 아르메니아의 수도를 점령하고 호스로의 군대를 상대로도 승리를 거두었으며 유명한 조로아스터교 사원인 성화(聖火) Ādur Gušnasp의 사원을 부수는 등의 활약을 한 뒤 티그레니커트에서 페르시아의 세 부대를 각개격파 하는 놀라운 전과를 세운다. 625년 반호수 북쪽에서 겨울을 보낸 헤라클리우스는 빼앗긴 도시들을 수복한 뒤 아다나에서 황제가 직접 진삼국무쌍을 찍으며 트레비존드로 퇴각하는데 성공한다.

5.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626년 호스로 2세는 아바르족과 힘을 합쳐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다. 하지만 제국의 우월한 해군력에 아바르족과 페르시아의 해군은 궤멸당하고 공략은 실패로 돌아간다.

이 때 헤라클리우스는 군대를 세 부대로 나누어 하나는 콘스탄티노플로 향하게 하고 하나는 동생 테오도루스에게 주어 사힌의 군대를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가장 적은 수의 부대를 이끌고 페르시아로 진격한다. 사힌의 부대를 상대한 테오도루스가 승리를 거두고 콘스탄티노플의 전투도 승리였는데다가 투르크족의 일파마저 끌어들여 페르시아를 공격하게 하니 황제는 아무 것도 걱정하지 않고 페르시아로 진격할 수 있었다.

6. 전쟁의 끝


니네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2] 궁전까지 약탈하게 되자 호스로 2세는 궁정 반란으로 축출된다. 부친을 몰아내고 새로운 샤가 된 카바드 2세는 로마 제국의 노예를 자처하면서까지 화친을 요청하였고, 헤라클리우스는 모든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 참십자가 등의 성유물을 가져와 한니발스키피오 이후 가장 대담하고 놀라운 일을 해냈다고 칭송받으며 국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게 되었다.

여기서 만약 그가 이쯤에서 죽었다면
1. 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망가트리던 폭군을 내쫓고
2. 멸망 직전의 나라를 구원하였으며
3. 제국 역사상 한 번도 제대로 이기지 못한 최대의 적을 멸망직전으로 몰아 넣어 데꿀멍 모드로 만들었고
4. 최고 성유물 참십자가를 되찾은

한 마디로 위대한 업적을 달성한, 그야말로 비잔틴 제국의 전성기를 구가했다는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와 나란히 평가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오래 살았고 거기에 제국의 변방에서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세력이 태동하고 있었다.

7. 말년

625년까지만 해도 이슬람은 1,000명이 싸웠다 하면 300명이 도망칠 정도의 오합지졸이었다. 하지만 헤라클리우스가 사산조 페르시아에게서 힘들여 수복했던 영토 중 상당 부분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를 앞세운 이슬람의 공세에 모두 빼앗기고 만다. 지금까지 싸웠다 하면 이겼던 황제였지만 숫적 우세를 가지고도 할리드에게서 단 한 번의 승리도 거두지 못한 건 참으로 제국에 큰 불운이었다. 물론 비잔티움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이었던 헤라클리우스 본인이 노쇠와 병마 때문에 직접 전투를 지휘하지 못하긴 했지만...

이렇게 온갖 패배를 거두고 백성들로부터는 조카딸과 결혼해서 신의 천벌을 받은 것이라는 온갖 비아냥을 들었으며 온갖 병마에 시달려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널 때도 온갖 이상한 방법을 동원해서 겨우 건넜다.[3] 또 대관식을 겨우 끝낸 다음에 640년에는 알렉산드리아까지 공격당했다는 소식과 641년에는 새로운 로마 교황 한 4세가 단의론을 반대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실감에 빠져 죽고 만다. 거기다가 그는 죽으면서 저서 진술의 내용을 부정하며 "모든 게 세르기우스의 거짓말"이라는 단의론을 인정하는 말을 하고 죽는다. 그의 마지막마저 누구나도 알 만한 뻔한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죽고 나서도 3개월 뒤에 그의 계승자였던 장남 콘스탄티누스 3세의 명령에 따라 석관을 열고 함께 매장된 보석 제관을 벗겨내게 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비록 예루살렘, 다마스쿠스, 안티오크, 에메사, 알레포, 마라시, 알렉산드리아 등 동방영토의 모든 땅을 다 잃었지만 헤라클리우스는 사산조 페르시아에게서 효과를 본 전략을 다시 가동하여 제국에 생존할 수 있는 기회와 역량을 부여했다. 아랍 제국은 제국에게 그렇게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제국의 핵심 야전군 다섯 중 그 어느 야전군도 제대로 궤멸시키질 못했다. 아바르와 슬라브족이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하며 일리리쿰 야전군 자체를 골로 보내버린 것에 비하면 생각보다는 놀라운 결과며, 이는 헤라클리우스가 어느 순간부터 영토는 잃어도 군대만은 보존한다는 방침을 고수하며 방어적 전략으로만 일관한 데 이유가 크다. 물론 영토는 카에사레아 앞 마당까지 다 뺐겼지만

또 군관구제와 둔전병제를 최초로 실시하여 무너져가는 제국의 군대와 행정을 개편하고 라틴어 대신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는 등 제국을 민심에 맞게 변화시켰다. 열강과 이민족의 침략으로 풍전등화 상태였던 비잔티움 제국이 그가 창안하고 정착한 군사·행정조직 덕분으로 이후 800년이나 더 존속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졌다.

헤라클리우스 환생설이 나왔다. 1300년이 넘는 시간을 뛰어넘어 스티브 잡스로 환생했다 카더라. 물론 믿으면 골룸

8. 공용어 전환 조치에 대하여

제국의 공용어를 그리스어로 바꾼 조치가 이상할 정도로 과대 평가되어 있으며, 이런 오해는 대부분의 한국 서적[4]에서 되풀이하고 문제 많은 로마인 이야기도 예외가 아니지만, 로마 제국은 본디 공화정 말기부터 서부가 라틴어, 동부가 그리스어였다. 다만 군사 용어만은 라틴어만 썼으나 헤라클리우스가 그걸 그리스어로 바꾸고, 라틴어의 공용어 사용을 배제했을 뿐이다.

제국의 영토가 옛 전성기에서 동쪽 절반으로 줄어든 지 이미 여러 세기가 지났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이런 조치는 너무 늦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후에도 법률이나 군사 쪽에서는 라틴어의 잔재가 강력하게 남게 된다.

황제의 공식 직함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에서 바실레우스로 바뀌게 된 건 헤라클리우스 때부터지만,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는 호칭이 완전 폐기된 건 아니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본디 기원전부터도 제국 동방에 살던 민족들에게는 바실레우스로 불렸던 것을 상기하자. 자세한 내용은 바실레우스항목 참고.

9. 최초의 비잔티움 황제란 견해

비잔티움 제국 자체가 중세까지 지속된 로마 제국을 편의적으로 일컫는 명칭에 불과하기에, 어디부터가 비잔티움 제국인지 구분하는 건 학자마다 다르며, 엄밀히 말하자면 틀린 구분이라고 할 수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 기준으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서로마 제국 멸망 후로 보면 제논, 유스티니아누스의 서로마 제국 영역 전토 수복 실패 이후 기준으로 보면 유스티누스 2세, 그리스어 공용화 및 테마 제도로 보면 헤라클리우스 등....이 되는데.

애초에 제도 개편이나 중요한 행정적 조치를 기준으로 어느 나라의 시초를 따진다는 것 자체가 매우 무리 있는 시도인 것이기에 이런 얘기들은 학문적으론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헤라클리우스 황제 때부터 동로마와 비잔티움을 가르는 특징이라 전해지는 1. 테마 제도의 실행과 정착, 2. 그리스어 공용화, 3. 수도를 중심으로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 지방을 아우르는 원형의 영역도 생각보다 큰 구별의 의미는 없다.

1의 경우 이미 마우리키우스 때부터 단초가 보이던 것을 헤라클리우스가 비상 방편으로 확대 개편했던 것에 불과하며, 진정한 정착은 그의 손자 콘스탄스 2세 때 이뤄졌고 이후 시기에도 여러 차례 제도 개편이 있었다. 2같은 경우 바로 위 항목에서 설명하듯 그다지 큰 의미는 없는 조치며, 3 같은 경우 헤라클리우스 왕조 때는 그나마 카르타고와 시칠리아, 사르데냐를 보전하고 있었으나 이후 시기엔 북아프리카 지역까지 다 날리고 남이탈리아도 잠시 빼앗기는 반면, 소아시아 지방에서는 꾸준히 조금씩 이슬람 제국측을 밀어내서 적어도 9세기 시기가 되면 시리아와 아르메니아 지역까지 호시탐탐 넘보고 있었다. 10세기 때는 예루살렘 바로 위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모조리 빼앗아서 몇 년 동안 점령을 유지했고, 적어도 북시리아 지역은 꽤 오랫동안 유지했다.

10. 창작물에서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역대 비잔틴 제국 소유 목록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평범한 능력치지만 무력은 높은 편이고 최초의 십자군이라는 의견이 있는 것처럼 십자군 트레잇을 가진 최초의 인물. 죽을 때 기준 능력치지만 살찐을 포함한 나쁜 트레잇들은 없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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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는 주로 정치적인 이유가 크다. 민족주의 사관으로만 잘못 이해하면, 비잔티움 제국이 로마 제국일 경우 그리스인들은 무려 마리우스와 술라 시대 이래로 19세기에 독립하기 전까진 자기 나라를 가져본 적이 없는 족속이 되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은 보편 제국이었기에 그 제국이 그리스어를 쓰든 라틴어를 쓰든 구성원에 더 이상 이탈리아인이 있든 없든 그게 큰 문제는 아니지만, 투르크 제국 아래에서 힘겹게 독립한 그리스인들 입장에선 약간 아닐 수도 있다.
  • [2] 전해지는 바로는 이 전투에서 헤라클리우스는 페르시아 장군 라자테스와 일기토를 벌여 승리했다고 한다.
  • [3] 다리를 만들었다는 설 또는 배를 꾸며서 육지처럼 해놨다는 설이 있다.
  • [4] 이상하게도 번역자들이 일껏 번역 잘해놓곤 후기에다가 이상한 자기 견해를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