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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대첩

last modified: 2018-08-19 14:23:02 Contributors

이순신의 전투 목록
포 해전
(1592년 6월 7일)
한산도 대첩
(1592년 7월 8일)
안골포 해전
(1592년 7월 10일)

한산도 대첩
날짜 1592년 7월 8일(음력)
장소 조선 견내량 한산도 앞바다
교전국 조선 쇼쿠호 일본
지휘관 충무공 이순신
이억기
원균
권준
정운
어영담
김완
이영남
송희립
와키자카 야스하루
와키자카 사헤에†
와타나베 시치에몬†
마나베 사마노조†
병력 전선 56척전선 73척
피해규모 사상 13여 명[1] 함대 궤멸[2]
결과 조선 수군의 대승 및 남해 제해권 확보


Contents

1. 배경
2. 전개
3. 결과
4. 기타
5. 미디어 창작물


1. 배경

1592년(선조25), 5월과 6월 사이 2차 출동을 통해 전라좌수사 이순신 함대를 주축으로 한 조선 수군은 사천,당포,당항포,율포로 이어지는 일본의 육군 수송부대와 수군을 상대로 일방적인 토벌전에서 승리하게된다.

이에 해안의 수군부대가 조선 수군에 의해 동쪽으로 밀려나가는 것을 염려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6월 23일자 명령을 통해 용인에서 육군과 호응하던 수군부대인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다시 해안으로 급파하고, 오다 노부나가 시절부터 수군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키 요시다카와 그 외 가토 요시아키등 3인을 소집하여 잔존 수군과 규합하여 조선 수군을 토벌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조선 수군은 8월 12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더불어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등 총 55척이 노량에서 합세하게된다

2. 전개

6월 14일 일본 수군은 키 요시다카를 중심으로 부산포에 집결했지만 이미 용인 전투에서 조선군이 약체임을 증명한 와키자카는 7월 7일, 자신의 함대만을 이끌고 거제도로 단독 출격을 개시했다,

그 날 저녁 무렵에 왜선 70여척이 견내량에 머무르고 있다는 첩보를 확인한 조선수군은 8일 한산도 근해에서 이를 확인하게 된다.

왜군의 세력은 대선이 36척,중선이 24척,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으로 구성된 함대로 견내량 주변이 협소하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이 서로 부딪힐 가능성을 확인한 조선군은 한산도 근해에서 적들을 유인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5~6척으로 구성된 소규모 함대를 미끼조로 투입하여 일본 수군을 전체를 건져내는 유인책을 시작으로 작전이 전개되었다. 식견이 있는 지휘관이라면 당연히 매복을 의심 할 수도 있는 상황이였지만 와키자카 본인은 이미 휘하의 1500명으로 조선군 5만을 격퇴한 용인전투를 경험한 인물이였기 때문에 조선군을 일본군 이하의 존재로 평가하고 있었으므로 왜군의 70여척 상당한 함대는 손쉽게 조선 수군이 던진 미끼를 물며 한산도 근해에 진입하게 된다,

어느 정도 물러나던 이순신의 함대는 해협을 지나 복병을 배치해둔 작전지역까지 진입하게 되자 마침 내 한산도 양옆의 섬에 배치시켜놓았던 전선들을 약 3개의 부대로 나눠 학익진의 날개를 길게 펼친채 일본 수군을 완전한 형태로 타격하게 된다.

마침 해협의 해류가 바뀌어 조선 수군이 해류를 타고 총통과 화기를 쏘며 전진하자 와키자카 부대 내의 주요 가신들과 부대들이 녹아 흐르는 듯 줄줄이 무너지게 되고 와키자카 야스하루 본인도 지휘선 내에서 화살에 맞는 등 부상의 위기를 당하게 되지만 속도가 빠른 다른 관선을 타고 김해로 구사일생 빠져나가게된다

이후 와키자카의 잔존 부대는 400~200여명 정도가 한산도에 배를 유기한채로 섬으로 도망쳤으며, 대선 1척,중선7척,소선 6척등은 멀리서 해전을 관망하다가 일본군의 주요부대가 모두 격침당하자 방향을 바꾸고 김해로 도망쳤다,

3. 결과

사실상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진출을 향한 야망에 사형을 선고한 전투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격파당한 일본군은 16일 안골포에서 뒤따라 출격한 키 요시다카의 함대까지 각개격파를 당하게되자 수군의 주력부대를 모두 손실하는 피해를 입게된다.

이에 더 이상 해상전투에서 큰 의미를 두기 힘든것을 알아차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 병신들 존나 못싸우네 그냥 육지에 조선 수군오면 해안 방어나 하셈"라는 뜻에서 '해전금지령'을 선포하면서 사실상 남해의 재해권을 조선 수군이 되찾게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로 인해 조선의 서해를 통한 수운으로의 진입에 실패함과 더불어 이순신 함대의 4차 출동에는 조선과 일본을 이어주는 부산까지 습격당하게되자 해상요격능력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일본군은 명나라의 남하와 함께 전쟁에서 패배하게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고 만다

4. 기타

와카자카 야스하루가 영지 규모(약 3만 석고)및 동원전력(1500명)으로 큰 규모의 함대를 운용하는 것은 과장이라는 논란이 존재한다.

다이묘들의 영지 규모는 1만석당 250명에서 무리하면 최대 500명정도의 병력을 동원하는것이 가능한데, 실제 와키자카의 동원병력은 일본사료의 군역장에서 약 1500명 정도이며, 이는 이전에 참전했던 오다와라 포위전등에서도 엇 비슷한 병력을 동원하기때문에, 와키자카가 갑자기 수천에서 만단위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나타날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의 사료에서는 일본 수군이 1만을 이끌고 나타났으나 한산도에서 약 9000명을 손실했다는 소문이 있다는 실록의 기록과 더불어 이순신 휘하에서 일본의 포로가 된 제만춘이 증언한 기록 '병량조발건기'를 참고해서 9000명의 손실을 증언한다. 이를 두고 해당 사료는 일본에서 찾을 수 없다는 지적이 있으나, 일개 포로가 기록한 개인의 기록물이 그대로 일본측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것부터가 비상식적인 생각이다. 애초에 명량 해전 이후 일본군의 포로로 명량해전에 종군한 전풍상의 증언 또한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으나, 당연하게도 일본측 기록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다.

해안에 남하하기 전 같이 경기도에 주둔하던 우키타 히데이에에게 일부 병력을 양도받았다는 설도 있지만 일본의 사료에서는 그러한 언급이 없다, 다만 구키 요시타카는 오다 노부나가의 지원으로 키즈가와 구치 해전에서 대단위의 해상 병력을 전개한것을 상정할때 지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확실한것은 와키자카가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의 병력이 합쳐서 전개된 안골포에서보다도 많은 함대를 이끌고 한산도 근해에 나타났다는 것을 보면 수군의 주력을 와키자카가 이끌게 되었고, 기타 용인에서 잡은 조선인 포로들과 스가다이라 등 소수의 병력이 와키자카에 합세한것을 확인하면 최소 2000~3000 이상의 병력을 움직이게 되었다고 보는 것은 확실하며,[3] 수부들은 따로 일본 본토에서 징발하여 선박에 태워 보낸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것을 보아, 비전투원(선원,노꾼)들을 합쳐 대단위 병력을 동원했다는 설도 있다.

5. 미디어 창작물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에서 옥포, 당포 해전에 이어서 다루었다. 그런데 앞의 해전의 장면을 너무 짜깁기한 느낌에 이순신의 거짓퇴각 후 학익진을 펼치는 전략 표현이 미흡한 점이 흠이다. 더구나 이 드라마에서 원균이 용장을 가징한 민폐캐릭으로 묘사되는 만큼 이순신의 전략을 따르지 않고 멋대로 출격해 정면돌파를 시도하고 이순신이 원균이 적선에 다가가기 전에 재빨리 본래 세운 전략을 밀고나가는 모습으로 나와서 실제 기록과 맞지 않는 모순이 나온다. 애초에 원균은 개전초에 전함을 자침하는 바람에 정면대결을 하고 자시고 할 전력이 없어 그냥 이순신을 따라다니기만 했는데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73회 후반 ~ 74회에서 나왔으며 임진왜란의 전투신 중 가장 훌륭한 묘사로 꼽힌다. 위에서 언급된 소규모 함대를 통한 도발-유인, 일자진으로 가장한 뒤 거짓 후퇴하는 장면, 연합 수군의 쌍학익진 구성 등을 CG로 잘 표현했다. 이순신 역의 김명민과 함께 와키자카 야스하루 역의 김명수 역을 맡은 재완의 열연 또한 각각 인상적이다.

2014년 7월에 개봉한 영화 명량의 프리퀄 격으로 바로 다음에 제작 예정인 영화의 배경이 바로 이 한산도 대첩이 될 예정이다. 가제는 한산 : 용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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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전사 3 명, 부상 10여 명.
  • [2] 침몰 47척 , 나포 12척
  • [3] 의외로 병력수가 적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3만석의 다이묘치고는 꽤 많은 수이다. 예로, 수십만석의 다이묘들이 일본 전역에서 병력을 끌어모아 벌인 세키가하라 전투는 약 17만명이 동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