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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킴 올라주원

last modified: 2015-04-03 17:44:24 Contributors


이름 Hakeem Abdul Olajuwon[1]
생년월일 1963년 1월 21일
2m13m
체중 116kg
포지션 센터
드래프트 1984년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휴스턴 로켓츠에 지명
소속팀 휴스턴 로켓츠(1984~2001)
토론토 랩터스(2001~2002)
등번호 34번
수상내역 정규시즌 MVP(1994)
NBA Finals MVP 2회
NBA Defensive Player of the Year 2회
All-NBA First Team 6회
All-NBA Second Team 3회
All-NBA Third Team 3회
All-Defensive First Team 5회
All-Defensive Second Team 4회

휴스턴 로키츠 영구결번
No.34

1994년 NBA 정규시즌 MVP
찰스 바클리 하킴 올라주원 데이비드 로빈슨

1994년 ~ 1995년 NBA 파이널 MVP
마이클 조던 하킴 올라주원 마이클 조던

1993년 ~ 1994년 NBA 올해의 수비수상
데이비드 로빈슨 하킴 올라주원 디켐베 무톰보

1990년 ~ 1991년 NBA 올해의 블락왕
누트 볼 하킴 올라주원 데이비드 로빈슨
1993년 NBA 올해의 블락왕
데이비드 로빈슨 하킴 올라주원 디켐베 무톰보

Contents

1. 개 요
2. 휴스턴 대학 시절
3. NBA 커리어
3.1. 트윈타워의 결성 그리고 홀로서기
3.2. 귀인 루디-T와의 만남, 2개의 반지, 내리막
4. 이것저것

1. 개 요

NBA선수. 1990년대 4대 센터 중 한 명이며, NBA가 선정한 위대한 50인의 농구선수 이다.

그는 아프리카나이지리아 라고스에서 여섯남매중 셋째로 태어났다. 올라주원이라는 이름은 요루바족 언어로 늘 정상에 서라.라는 뜻이라고. 어린시절부터 축구를 좋아해서 15살까지 골키퍼를 했다. 즉 15살까지는 농구공도 잡아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휴스턴 대학의 감독인 가이 루이스라는 사람이 큰 키에 뛰어난 운동능력을 갖춘 아프리카 청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미국으로 데려왔다.

2. 휴스턴 대학 시절

대학 동문인 클라이드 드렉슬러와 함께 휴스턴 대학을 정상으로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 과정은 힘들었다. 농구를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성장이 더딘것. 그러자 학교에서는 당시 휴스턴 로켓츠에서 뛰던 모제스 말론을 그에게 붙여주어 그에게 많은것을 가르치게 했다.

그 덕분에 올라주원은 2학년때부터 폭풍성장을 하면서 드렉슬러와 함께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신나게 득점을 했다. 이 두 콤비에게 휴스턴 포스트지의 토마스 본크라는 사람이 PHI SLAMA JAMA 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휴스턴 대학은 82-83년에 31승3패라는 좋은 성적을 바탕으로 NCAA파이널에 올랐지만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에 패해 우승에 실패한다. 다음해에는 드렉슬러가 NBA로 떠났지만 올라주원의 활약으로 다시한번 파이널에 올랐지만 이번에는 패트릭 유잉이 이끄는 조지타운 대학교에 패해 또 우승에 실패했다. 올라주원이 나중에 유잉에게 복수하는 날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3. NBA 커리어

3.1. 트윈타워[2]의 결성 그리고 홀로서기

올라주원은 1984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순위로 휴스턴 로켓츠에 지명됐다. 이때 당시는 센터가 우대받던 시대였고, 올라주원의 당시 주가는 말이 필요없을 정도였다. 센터는 발만 뺄줄 알면 연봉 1억라는 말도 있었으니 말이다. 또 그때 휴스턴에는 한해 먼저 역시 대학에서 최고의 센터로 명성을 날려대던 랄프 샘슨이 버티고 있었다. 둘 다 센터로서 뛰어난 스킬을 보유했고 또한 기동력도 뛰어났기 때문에 이 둘에 거는 기대는 매우 컸다. 올라주원은 루키시즌에 20.6점 11.9 리바운드 2.7 블록슛을 기록했다. 하지만 신인상은 마이클 조던의 몫이었다.

2년차 시즌이 되어서는 랄프 샘슨과의 콤비 플레이가 완성되어갔고, 51승31패를 기록, 당시에 팀 역사를 통틀어 가장 높은 승률을 기록했다. 그리고 플레이오프에서도 당시에 서부의 강자였던 LA 레이커스를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물리치고(!!!) NBA파이널에 올랐다.[3] 하지만 상대는 또 하나의 끝판대장인 보스턴 셀틱스였다. 하지만 보스턴은 너무 강했다. 올라주원은 이 파이널을 두고 "어른과 아이의 대결"이라고 회고했다.

86-87시즌. 랄프 샘슨이 휴스턴 구단과 사이가 안좋아지면서 트레이드를 통해 팀을 떠나면서 자연스럽게 올라주원이 리더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팀은 그냥 강팀정도의 위치에만 머물렀다. 올라주원 개인은 89-90시즌에 쿼드러플 더블을 기록하기도 하고[4] 또한 NBA에서 그동안 단 3명만 기록한 경기당 평균 2.0 스틸 이상 2.0블록슛 이상을 다섯번이나 하기도 했다.[5] 하지만 올라주원의 성공이 팀의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6] 한동안 계속해서 플레이오프 1라운드 탈락만 계속되었고, 1992년에는 아예 플레이오프에 올라가지 못하자 올라주원도 팀에 불만을 표출하면서 팀과 불화가 생기면서 위기가 찾아오는 듯 했다.

3.2. 귀인 루디-T와의 만남, 2개의 반지, 내리막

92년에 감독 대행을 맡았던 루디 톰자노비치가 정식으로 휴스턴 로켓츠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루디는 올라주원의 활용도를 더 끌어올리는 방법을 구상했다. 올라주원의 넓은 시야와 패싱능력을 더욱 극대화 시켜서 외곽슈터들을 활용하는 것. 올라주원이 92-93 시즌에 공을 팀원에게 돌리며 3개 이상의 어시스트를 기록하기 시작하니 본인의 득점도 더 쉬워져서 평균득점도 상승했다. 팀 역시 55승으로 새로운 기록을 달성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2라운드에서 시애틀 슈퍼소닉스와 만나 7차전까지 가는 승부 끝에 100-103으로 석패.

93-94시즌에는 드디어 노력의 결과로 정규시즌 MVP를 차지했고,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 피닉스 선즈, 유타 재즈를 차례로 꺾으며 NBA파이널에 올라가게 된다. 상대는 과거 대학시절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던 패트릭 유잉이 이끄는 뉴욕 닉스였다. 뉴욕은 평균 91.5실점밖에 하지 않았던 당대 최고의 수비팀이었고, 유잉뿐만 아니라 찰스 오클리, 앤서니 메이슨, 찰스 스미스 등 터프가이들이 모두 올라주원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잉이 공격에서 죽을 쓰고 있는동안 올라주원은 매 경기 20득점 이상을 쌓아주었고, 6차전에서 이날 27득점을 퍼부으며 휴스턴을 위기에 몰아넣었던 존 스탁스의 마지막 슛을 막아내며 휴스턴의 승리를 지켰으며 7차전에서도 25득점에 성공하면서 첫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당연히 파이널 MVP는 올라주원에게 돌아갔다.

94-95시즌은 위기였다. 올라주원을 필두로 많은 휴스턴 선수들이 부상을 당했기 때문. 선수수급이 안되어서 CBA선수까지 데려다 쓸 정도였다. 결국 휴스턴은 트레이드 데드라인에 클라이드 드렉슬러를 데려오는 강수를 뒀다. PHI SLAMA JAMA 콤비가 다시 재건된 것이다. 아무튼 휴스턴은 서부전체 6위라는 낮은성적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도 쉽지 않았다. 1라운드에서 유타에게 3-2로 힘겹게 승리한 휴스턴은 세미파이널에서 찰스 바클리와 케빈 존슨의 피닉스 선즈와 재회, 4차전까지 1-3으로 털리며 끝장나는 듯 했으나 기적적으로 내리 3경기를 잡아내는데 성공했다.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정규시즌 MVP였던 데이비드 로빈슨이 있던 샌안토니오 스퍼스와 만났다. 서부 결승에서 휴스턴은 접전 끝에 샌안토니오를 4-2로 눌렀는데, 올라주원은 정규시즌 MVP 데이비드 로빈슨을 상대로 우위를 보이며 맹활약을 펼쳤다.[7]

결승전 상대는 젊은 패기의 올랜도 매직. 샤킬 오닐앤퍼니 하더웨이 콤비가 버티고 있는 동부의 신흥 강호였다. 특히 이들은 동부 컨퍼런스 세미파이널에서 복귀한 마이클 조던이 이끄는 시카고 불스를 꺾는등 상승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전문가들도 휴스턴 보다는 젊은 올랜도 매직의 우세를 점쳤다. 하지만 휴스턴은 그런 전망을 철저히 비웃으며 4전전승으로 올랜도를 스윕하고 2번째 우승을 차지한다. 올라주원은 4경기 평균 32.8득점 11.5리바운드라는 미친 기록을 찍고 다시 파이널 MVP를 먹었다.

95-96시즌에 시카고 불스가 조던-피펜-로드먼을 앞세운 빅3로 정규시즌 최다승과 NBA우승을 거머쥐자 휴스턴도 전력보강을 위해 뛰어다녔다. 그러다가 찰스 바클리가 눈에 들어오게 되고, 휴스턴은 기존의 올라주원과 드렉슬러에 바클리로 이어지는 빅3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바클리를 영입하면서 팀의 주죽선수를 너무 많이 내어주었다. 특히나 로버트 오리와 샘 카셀의 이탈은 팀의 로스터를 얇게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래도 96-97시즌에 57승 25패의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플레이오프에 올랐고 천적이었던 시애틀도 물리쳤지만[8] 서부 컨퍼런스 결승전에서 유타에게 패해 파이널 진출에 실패한다. 이후 올라주원은 헤르니아 탈장을 비롯한 각종부상에 시달리면서 기량이 많이 하락하게 된다. 출전시간도 줄어들었다. 팀도 서서히 팀의 중심을 스티브 프랜시스와 쿠티노 모블리에게로 가져가면서 자연스럽게 올라주원의 입지도 줄어들었다.

00-01시즌이 끝난후, 휴스턴은 올라주원에게 3년간 1300만달러의 계약을 제시했다. 이미 예전의 기량은 기대도 하지 않고, 곧 마흔을 바라보는 노장선수에게는 상당한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계약이었다. 휴스턴 로켓츠를 두번이나 우승시키고 강팀으로 만들어준 프렌차이즈 스타에 대한 그들의 최대한 예우였다.

하지만 올라주원의 에이전트 댄 패건[9]"저딴 계약조건은 우리 고갱님에게 어울리지 않은다능!" 이라고 말하면서 휴스턴과의 협상을 중단해버렸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올라주원은 토론토 랩터스와 3년간 1650만달러에 계약했다. 이를 두고 댄 패건은 올라주원이 자신에게 직접 휴스턴과 협상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고 했지만 팬들 대부분은 이 인간의 말을 안 믿었다. 지금도 몇몇 팬들은 댄 패건을 "돈에 미쳐서 역사상 위대한 센터의 말년을 초라하게 만든 천하의 개쌍놈"이라고 까대고 있다.


당시 벌어졌던 안습 라이벌리 한 컷.[10]

결국 올라주원은 토론토에서 계약기간도 다 못채우고 1년뛰고 바로 은퇴했다.(...)

은퇴후에는 요르단에서 가족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 이슬람 공부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틈나는대로 미국으로 돌아가서 후배빅맨들을 가르치고 있다. 또 자신의 모국팀인 나이지리아 대표팀을 개인교습하기도 했다. 하지만 패트릭 유잉과는 달리 지도자가 되기위해서 표면적으로 행동하지는 않는 듯.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NBA 모든 팀 선수들이 앞다투어 그를 찾아오는데... 이는 아래 서술.

2008년 9월 6일에는 유잉과 함께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4. 이것저것

정규시즌에도 대단한 센터였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더욱더 파워업해서 괴수가 되는 남자였으며, 4대 센터중에서 가장 먼저 우승반지를 끼우는 데 성공했다. 그것도 유잉, 로빈슨, 오닐과의 맞대결에서 모두 완승하면서 얻은 반지이다! 따라서 4대 센터중 샤킬 오닐이 반지 갯수와 누적 스탯이 가장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이때의 맞대결에서 모두 승리한 임팩트 때문에 4대 센터 중 올라주원이 가장 뛰어나다고 여기는 팬들도 있다.[11] 비교적 늦게 농구를 시작했지만 더 뛰어난 선수가 되기위한 본인의 노력과 의지 덕분에 탑의 위치로 오를 수 있었다.

별명은 The Dream. 동료들은 그를 이렇게 부르지만 상대팀에게는 그야말로 Nightmare 악몽이었다. 또 하나 유명한 별명은 그의 날렵한 몸놀림을 비유해서 나이지리아 흑표범이 있다.

거의 예술적인 경지에 이르렀다는 풋워크는 후배선수들과 전문가들이 호평하는 부분이다. 발을 주로 쓰는 축구선수 출신이었기 때문에 풋워크가 상대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축구 골키퍼 출신으로서 코트를 보는 시야가 넓고 이것은 뛰어난 패싱센스로도 이어진다. 운동능력은 느린 선수가 많은 빅맨 중 상대적으로 매우 뛰어난 운동능력을 지녀 스몰포워드 소리를 듣기도 한다.[12] 하킴 올라주원 하면 떠오르는 것은 바로 유명한 드림 쉐이크. 이때문에 은퇴후 코치 활동을 특별히 하고 있지 않음에도 코비 브라이언트저베일 맥기같은 NBA선수들이 그의 농구 스킬을 전수받기 위해 알아서 몰려온다. 거의 마이스터취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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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F image (Unknown)]

전성기 하킴의 드림 쉐이크

일명 드림스쿨이라 불리는 하킴의 개인 교습은 특히 상대를 등지고 플레이하는 포스트업과 이때의 풋워크 스킬을 늘리고자하는 선수들이 앞다투어 참가하고 있다. 커리어 중후반부터 베이스라인의 포스트업으로 쏠쏠한 재미를 본 코비 브라이언트나, 포스트시즌때마다 강력한 포스트업 스킬로 재미를 본 르브론 제임스는 물론이고 지역방어의 부활과 대학농구의 원앤던 일상화로 8~90년대와는 다르게 일부 개인기로 체득하는 선수 빼면 대학경기를 뛰는 센터들이 팀 시스템에 필요가 없던 포스트업 스킬을 제대로 배우지 않은채 NBA에 입성했다가 이를 공략당해서 어려움을 겪고, 뒤늦게 포스트업 스킬을 장착하려는 선수들이 줄서서 대기중이다. 현시대 최고의 센터라고 평가받는 드와이트 하워드부터 주목받는 신인 센터 유망주인 코네티컷 허스키스출신의 안드레 드러먼드(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소속)같은 선수들까지 포스트업 배우려고 올라주원을 찾는 통에 오프시즌 올라주원은 쉴 틈이 없다. 드와이트 하워드는 휴스턴 로케츠로 이적하면서 아예 재수강을 받을 예정이다. 올라주원이 휴스턴 레전드로써 하워드의 영입전에 참여했기 때문. 3년전 올라주원에게 빡시게 과외받고 좀 나아지나 했더니 쓸일이 사라져 다시 원위치하는 바람에...
르브론 제임스가 하킴에게 트레이닝을 받는 영상. 2011년의 영상으로 이때 하킴은 48세.

프로생활동안 슈퍼스타로서 지위를 누렸지만 의외로 농구화는 저가형을 신었다고 한다. 이유는 (내가 그걸 신으면 아이들도 그걸 따라 신으려고 할텐데) 부모들이 120달러나 되는 농구화를 어떻게 감당하겠느냐. 그래서 범죄가 생기는 것.[13] 이라는 본인의 생각. 정말이지 훈훈한 인간미가 느껴진다. 거기에 35달러짜리 저가형 농구화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것도 허락했다고 한다.

미국 국적 취득 후 드림팀의 멤버로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 출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지리아의 여론은 올라주원의 국적을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고 한다. 참고로 대회 결과는 결승전에 올라온 팀을 30점차로 깨버리고(...) 우승.

현역, 은퇴선수들 간에 센터로써의 능력도 자주 회자되지만 개그소재로 쓰이곤 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샤킬 오닐의 경험담처럼 어눌했던 그의 발음은 선수들 사이에서 꽤 유명했던 듯. 근데 오닐 당신 발음도 만만치 않아 은퇴한 NBA 선수들이 패널로 나오는 'Open Court'라는 프로그램에서는 로켓츠 시절 팀 동료였던 고정패널 케니 스미스 덕에 자주 회자되며 개그성 일화에 단골로 언급된다.공통적으로는 정말 코트 위에서 '착하고 좋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역시 같은 팀동료이자 반지의 제왕인 로버트 오리의 경우에는 하킴의 승부욕이 그를 챔피언으로 만들었다고 평한다. 특히 두고두고 회자될 95년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데이빗 로빈슨을 무력화시킨 그의 모습은 사실 데이빗 로빈슨의 MVP 시상식을 경기에 앞서 한 것에 화가 나서 그랬다고. 역시 위대해지려면 쪼잔해야 되는듯[14] [15] 여담으로 로버트 오리는 자신과 함께한 선수중에서는 오닐이나 던컨보다도 올라주원이 가장 위대한 선수로 여기고 있다.

"감히 나를 앞에 두고 MVP 시상식을 해?"라고 말한 후.....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포스트무브와 풋워크가 원체 좋은 선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해당 시리즈에서는 동료들도 보지 못했던 플레이들을 쏟아냈다고 한다.(...) *Grantland 인터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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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원래는 Akeem인데, 1991년에 이슬람식 표기에 맞추기 위해 Hakeem으로 개명했다. 올라주원은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이다.
  • [2] 랄프 샘슨과의 트윈타워
  • [3] 이 때 휴스턴은 4대1로 레이커스를 꺾었는데 최종 5차전에서 기막힌 플레이가 나왔다. 당시 종료 1초를 남겨두고 레이커스가 앞선 상황에서 인바운드된 공을 센터 랄프 샘슨이 골대를 등진 상태에서 점프해 공을 잡았고, 공중에서 뒤로 냅다 공을 던졌는데, 이게 결승점이 된 것. https://www.youtube.com/watch?v=yXOts9kaiLQ 그러나 "뽀록으로 올라갔다"고 폄훼할수도 없는게, 당시 휴스턴은 레이커스를 대부분의 항목에서 앞서고 있었으며 설령 이 경기를 져도 3대2로 앞선 상황에서 6차전을 홈에서 치르는 유리한 상황이었다.
  • [4] 1990년 3월 29일 밀워키 벅스와의 경기에서 18득점 16리바운드 10어시스트 11블록슛을 기록했다. 쿼드러플 더블은 NBA역사를 통틀어 단 네명만 기록했는데 올라주원은 그중 한명
  • [5] 나머지 두 명은 데이비드 로빈슨, 제럴드 월러스. 그 이전에도 있을것으로 추정은 되나 NBA가 블록슛과 스틸개수를 집계한 시기가 오래되지 않아서 현재는 저 세명만 저렇게 인정된다.
  • [6] 이때까지 올라주원은 "내 필드골 성공률이 50%가 넘는데, 왜 40%인 팀원에게 공을 내줘야하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입문을 늦게하고도 뛰어난 능력덕분에 개인 플레이는 월등했지만, 전술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떨어졌던 탓. 이후 루디-T가 부임하면서 여기에 대해 심도있게 대화과외한 후에야 비로소 팀의 중요성을 인식했다고. 그 분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걸 보면,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위대한 선수가 되기 위해선 명장을 만나야 하는 듯 싶다..
  • [7] 특히, 로빈슨을 상대로 선보인 드림 쉐이크는 올라주원을 상징하는 하이라이트가 되었고, 요새도 틈만나면 해당 장면을 틀어줘 스퍼스팬들을 두 번 죽인다(...) 한편, 당시 스퍼스와 불화를 일으키고 있던 데니스 로드먼은 플옵 탈락 후 로빈슨은 리더의 자격이 없다며 맹비난을 했고, 결국 다음 시즌 때 시카고로 이적한다.
  • [8] 올라주원 데뷔 이후 97년 전까지 플레이오프에서 시애틀과 4번 만났는데 모두 졌다.
  • [9] NBA팬들 사이에서는 계약 종결자(...)라 불릴 정도로 악명이 자자한 에이전트다. 협상 질질 끌고 꼬장부리기의 최강자(...)
  • [10] 이 당시 라이벌이었던 패트릭 유잉은 뉴욕 닉스의 GM 스캇 레이든에게 팽당하는 바람에 십수년을 뛰어온 뉴욕을 등지고 시애틀과 올랜도 등지를 전전해야 했다. 올라주원이야 그나마 휴스턴이 계약 제시라도 했지, 유잉은 그야말로 안습.
  • [11] 물론 94-95년 당시 올라주원은 최전성기였고 오닐은 아직 최전성기가 찾아오지 않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 [12] 가장 유명한 일화가 마이클 조던을 인터뷰하던 어느 기자가 조던에게 올 시즌 최고의 센터가 누구일까라고 물어봤는데 조던은 패트릭 유잉이라 답했다. 이에 기자가 올라주원은요? 하고 되묻자 조던 왈 '그 친구는 포워드고'조던이 유잉과 친한 친구사이라는건 비밀
  • [13] 영어 위키에 실려있는 원문은 다음과 같다. How can a poor working mother with three boys buy Nikes or Reeboks that cost $120?...She can't. So kids steal these shoes from stores and from other kids. Sometimes they kill for them."
  • [14] 사실 데이비드 로빈슨은 90년대 4대 센터 중 하나로 꼽히는 대선수이며 하킴 상대로도 절대 약하지 않았다. 하킴을 털어먹은 경기도 제법 있을 정도. 하지만 이 시리즈를 비롯해 몇 번 임팩트 있게 털리는 바람에 하킴 하이라이트 동영상이 나올 때마다 하킴 본인 외에는 최다출연자 자리를 도맡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평범한 센터 상대로는 하킴이 딱히 힘들일 필요도 없었겠지만 역대급 수비수인 로빈슨을 뚫기 위해서 작정하고 온갖 화려한 기술을 동원한 것이니 이건 하킴이 이렇게까지 하게 만든 로빈슨의 위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정신승리.
  • [15] 실제로 당시 데이비드 로빈슨이 이끄는 샌안토니오 스퍼스는 당시 리그 최고 승률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었고, 정규시즌에서 휴스턴과의 대결 역시 시리즈 스윕을 거두었기 때문에 로빈슨이 MVP를 받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하필 올라주원 앞에서 시상식을 해버리는 바람에 자존심 강한 그의 승부욕을 제대로 자극해버린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