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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누스

last modified: 2015-06-29 11:24:54 Contributors


이름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Publius Aelius Hadrianus)
출생지 로마제국, 이탈리카
생몰년도 76년 1월 24일 ~ 138년 7월 10일
재위기간 117년 8월 9일 ~ 138년 7월 10일

로마의 평화와 제국의 영원 (Pax romana et Aeternitas imperrii)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의 황제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세 번째 황제이다.

정식 명칭은 Caesar Traianus Hadrianus Augustus

Contents

1. 개괄
2. 즉위 이전
3. 즉위 이후
4. 유대인 문제
5. 성격 및 기행
6. 창작물에서의 등장

1. 개괄

본명은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속주 히스파니아(지금의 스페인)의 도시 이탈리카[1]에서 태어났다. 전임 황제인 트라야누스와 동향인데다가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는 외사촌관계였다.[2]

트라야누스가 사망한 후 의심스러운 과정[3]을 통해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는 재위기간의 절반이 넘는 기간동안 속주 전역을 돌아다니며 통치 상태를 점검하고, 공공 건축물을 새로 세웠다. 하드리아누스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부분[4]에까지 손을 댄 선견지명이 있는 황제였다. 하드리아누스의 예방조치 덕분에 로마는 흔들리던 시기에도 그럭저럭 버텨낼 수 있었다.

그는 그리스 문화에 열렬히 심취[5]해 있었고, 동성애자였으며, 까탈스러운 성격으로 유명했다. 사생활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트라야누스에 비해, 하드리아누스는 한 인간으로서도 흥미로운 면모들을 많이 갖고 있다. 때문에 그는 늘 후세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2. 즉위 이전

하드리아누스는 서기 76년 1월 24일에 이탈리카에서 출생했다. 하드리아누스 가문은 오랜 세월동안[6] 히스파니아에 정착했던 가문이지만, 아버지 푸블리우스 하드리아누스는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자 법무관이었다.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트라야누스에게 그의 미래를 부탁했고, 트라야누스는 그 부탁을 받아들여 하드리아누스의 후견인이 되었다. 당시 트라야누스는 대대장에 불과했고, 그가 황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결과론적으로 하드리아누스의 아버지는 대단한 선견지명을 발휘한 셈이다.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가 14살 되던 때 그를 이탈리카에서 로마로 불러들였고, 그는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7]

도미티아누스가 죽고 제위에 오른 네르바트라야누스를 양아들로 삼는 동시에 후계자로 임명한 후 병사했다. 이로써 하드리아누스는 단숨에 로마 황제의 최측근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트라야누스는 다키아(지금의 루마니아)전쟁을 치루었는데, 하드리아누스는 전쟁에 참가하여 큰 공적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그는 트라야누스의 측근들과 대립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전쟁에 참가하여 능력을 발휘했음에도 확장정책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져 확장정책을 의도했던 측근들과 대립했기 때문이다.[8] 결국 트라야누스치세 후반에 일어난 파르티아 전쟁에서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 측근들의 견제로 후방인 시리아 속주 총독 직위에 머물러야 했다. 그나마 이것도 트라야누스의 아내였던 플로티나의 적극적인 지지로 얻어낸 자리였다. 그러나 파르티아전쟁은 실패로 돌아갔고, 병을 얻은 트라야누스는 로마로 돌아가다 서기 117년 8월 9일에 셀리누스 항구에서 병사한다. 죽기 직전 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하여 하드리아누스는 제위에 오르게 된다.

단, 이 과정에 대해 많은 의문이 제기된다.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여러 차례 내비쳤으나 후계자로 삼겠다는 의지는 보여준 적이 없었으며, 하드리아누스가 끊임없이 트라야누스의 측근들과 대립했음에도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동시에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임명한다는 명령을 내릴 때 동석했던 인물들이 다 하드리아누스를 지지한 사람들이었다. 트라야누스의 명령이 진실이었냐는 점에 대해 의문점이 드는 대목이다. 이 의혹은 하드리아누스 재위 초반 트라야누스의 측근들이 일으킨 반란 기도로 이어지며 하드리아누스는 이들을 진압하는데 꽤 어려움을 겪었다.

3. 즉위 이후

즉위 이후 하드리아누스트라야누스의 확장정책을 중단하고 방위 우선 정책으로 제국의 기본기조를 변동시킨다. 그는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수도 로마에 머무르지 않고 곳곳을 돌아 다니며 제국의 방위체제와 행정체계를 재정비했다. 121년부터 시작된 그의 순행은 제국 곳곳에 발을 미쳤다. 대표적으로 영국에 건설된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들 수 있다. 트라야누스가 시행한 확장정책은 제국의 판도를 상승시키는데 큰 공헌은 하였으나, 공격 위주의 정책 시행으로 말미암아 제국 내부의 이완과 균열이 가시화 되고 있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제국 곳곳을 순행했고, 행정을 바로잡고 군단을 시찰하며 문제점을 바로잡아 나갔다. 이러한 그의 공적은 당대에는 별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이후 로마 제국이 위기에 빠져들었을 때 강화된 군단과 잘 정비된 행정 체계로 인해 제국의 위기를 어느 정도 지연시키는 데 기여하게 된다. 나름 선견 지명이 있었던 셈.

또 전임 황제인 트라야누스가 브리타니아(브리튼 섬)의 스코틀랜드를 제외하고 정복했으나 스코틀랜드의 켈트족이 자주 내려와서 깔짝대자 그 경계에 거대한 장성, 즉 하드리아누스 장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성을 쌓았다. 이 장성은 하드리아누스 대제가 122년 브리타니아 시찰 도중 내린 명령에 따라 5년여의 공사 끝에 완성한 폭 3m, 높이 5m의 장대한 성벽이다. 섬의 동쪽 끝인 뉴캐슬에서 서쪽 끝인 칼라일(까지 장장 118km를 거의 일직선으로 건축됐다. 장성에는 모두 15개의 요새를 설치했고, 요새마다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500∼1000명의 병사를 주둔시켜 북방의 동향을 살피게 했다. 또 성벽 바깥으로는 폭 8m, 깊이 2.5m의 해자까지 둘러 적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로마제국 쇠퇴 후에는 잉글랜드가 이 장성을 17세기까지 스코틀랜드에 대한 방벽으로 이용했는데,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스코틀랜드는 오랫동안 정치적 독립을 향유했고 전통문화도 지켜냈다. 그렇긴 하지만 하드리아누스 장성은 그 원형이 대부분 보존돼 있어 로마시대의 축성술과 군제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 구실을 하고 있다.


하지만 오랜 시찰과 여행은 그의 체력을 빼앗아 갔다. 40대의 한참 나이에 즉위했고 사자 사냥을 취미로 여길 정도로 강인한 체력을 자랑했으나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제국 변경 시찰에 쏟다 보니 자연히 가혹한 자연 환경에 노출되었고[9], 그것은 그의 체력을 확실히 약화시켰다. 결국 재위 기간 발생한 유대 분쟁 직후 티볼리의 황제 별장으로 돌아왔고, 138년 후계자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지명하고 티볼리에서 병사했다.

4. 유대인 문제

하드리아누스는 즉위 직후 전임자인 트라야누스 시절 일어난 유대인 반란을 해결해야 했다. 하필이면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에 원정을 나가있을 때 뒷통수를 친 유대인의 반란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으며, 무척 강경하게 반란을 진압했다.

예루살렘 지역의 유대인들은 132년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하드리아누스는 134년 이를 진압한 이후 이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을 차단할 겸 예루살렘 지역의 유대인들을 모조리 강제이주시켰다. 그렇다고 유대 전체에서 유대인을 몰아낸 것은 아니고 예루살렘에서 추방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유대인에 적대적인 분위기가 되어가면서 많은 유대인이 외지로 이주한 것은 사실이다.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의 이름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고 바꿔버렸는데 아일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성이고 카피톨리누스 언덕은 유피테르(제우스)를 기리는 신전이 있는 로마의 언덕이었다. 비유하자면 일본이 서울을 점령하고서는 서울의 이름을 아마테라스 진구로 바꿔버린 꼴인데, 이는 로마 입장에서 유대인에 대한 인내심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결국 이후 유대인이 고향을 잃고 유럽 지역을 떠돌아 다니는 계기는 하드리아누스가 만든 셈이다. 하드리아누스의 조치는 길게 보아 현대의 중동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유대 문제는 오히려 근대의 반유대주의로 인해 촉발된 부분이 훨씬 크므로 이에 대한 책임을 하드리아누스에게 묻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5. 성격 및 기행

그의 언행을 기록한 황제 실록에 따르면 '성격은 복잡하고 변덕스럽다'했다고 한다. 나중에 늙었을 때는 '노친네 성격 한번 드럽게 까칠하다.'라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10] 가까이 하기 어려운 성격임에는 분명한 듯. 사실 어렸을 때 트라야누스의 측근들과 대립했던 것도 그의 까칠한 성격이 한 원인이었다. 이런 성격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엄청난 실력이 기반이 되어있었다. 문학, 수학, 기하학, 회화, 악기 등에서 초일류였고 무예에 굉장히 능했다. 무기 다루는 것에도 뛰어났다.[11]

건축가로도 뛰어났다. 지금까지도 로마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남은 판테온은 그가 착안해 설계한 것이며[12] 티볼리에 지은 광대한 별장에도 그의 취미나 미적 감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뒤에서 설명하듯 하드리아누스는 엄청난 그리스광이었는데, 황제 권력을 이용해서 아테네에 도시 하나를 지어서 바쳐버렸다.[13]이 신도시지역은 오늘날에도 아테네의 대표적인 부촌으로 꼽히는 플라카 지역으로, 이곳에 그가 만든 개선문과 아고라의 유적이 남아있다. 하지만 고대 아테네의 아고라와 가까워서 사람들은 이곳도 그냥 고대 그리스때 도시려니 하고 그냥 지나친다. 안습;; 아드리아노플[14]도 그가 지어 그의 이름을 딴 도시이다.

한마디로 진정한 엄친아. 제국 내 최고 대학인 알렉산드리아 무세이온에서 학자들과 학술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당연히 하드리아누스의 승리.[15] 이런 먼치킨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기 수준으로 대단할 것을 요구하며 엄격하게 굴었던 것이다. 이 남자, 가까이 하기 정말 위험한 인물이다.[16]

취미 역시 특이해서 로마 엘리트 중에서 가장 그리스 문화에 심취했던 인물이었다. 그리스 문화의 상징인 수염을 기른 최초의 황제이기도 하다.[17] 이를 보면 네로처럼 예술가적 기질이 다분한 황제였지만, 네로는 취미에 매몰되어 국정을 소홀히 한 반면 하드리아누스는 초일류 황제였으니 비판을 할 수도 없다.[18] 이후 로마 황제들은 수염을 기르는 황제들이 많아지게 된다.

또 여기에 대해서 콘스탄티누스 대제부터 수염을 기르지 않았고 이것이 그리스 문화의 소실과 기독교의 대두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콘스탄티누스가 딱히 반헬레니즘적이었던 건 아니며 기독교적 전통과 구레나룻 사이에는 별반 상관 관계도 없다.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1세와 막시미누스 다이아도 수염을 기르지 않았는데 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수염을 길렀다. 수염을 기르고 마는건 그냥 개인 취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도 로마 황제들 중에도 수염 기른 사람은 많다. 당장 예수도 수염장발이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흔하다. 사소한 데 너무 큰 의미를 두진 말도록 하자. 정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반헬레니즘적이었다면 로마의 새수도를 헬레니즘 문명권 정중앙에 위치한 비잔티움에 세웠겠는가.

더불어 위에서도 말했듯이 사냥, 그중에서도 사자 사냥을 특히 좋아했다.

그리스 문화를 좋아해서 인지는 몰라도 동성애를 즐기기도 했다. 가장 좋아한 사람이 안티노스라는 18살짜리 소년이었는데 이집트에서 그가 죽었을 때 하룻동안 여자처럼 엄청 울었다고 한다.[19]

동성애를 즐겨서인지 자식이 없었는데 '자식 새끼 있어봤자 머리만 아파'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6. 창작물에서의 등장

프랑스의 여류 소설가 르그리트 유르스나르가 하드리아누스의 생애를 그린 소설 드리아누스의 회상록을 지었는데 이 책 한 방으로 그녀는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95년 세계사에서 출판된 1권짜리였으나 현재는 절판되었고, 지금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간행된 2권짜리 번역본을 구할 수 있다. 또 그만큼 과감하면서도 불문학 특유의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좋은 작품이니 시간이 있으면 일독을 권한다.

만화 테르마이 로마이에 등장하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바로 이 사람이다. 위에 언급된 건축가로서의 자질, 동성애를 즐기는 것 모두 가감없이 나온다. 성우오오츠카 아키오.

사실은 로리라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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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지금의 세비야 근처의 마을로, 지금까지도 같은 이름의 마을이 존재한다. 전형적인 로마 식민도시의 예를 잘 보여주는 유적. 이탈리카는 당연히 이탈리아에서 나온 이름이고, '하드리아누스'는 아드리아 해에서 따온 이름이다. 하드리아누스 가문이 빼도박도 못하는 이탈리아 출신임을 보여주는 것.
  • [2] 한국의 촌수 기준으로 따지면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의 촌수는 5촌인 셈.
  • [3] 트라야누스가 죽기 직전까지도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의 후계자가 아니었다. 죽으면서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는데, 알다시피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하드리아누스와 가까웠던 트라야누스의 아내, 플로티나를 비롯한 측근들이 짜고 하드리아누스를 제위로 올린 것이 아닐까 의심받고 있다.
  • [4]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들은 이탈리아 바깥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우구스투스의 히스파니아 원정, 동방 순방, 칼리굴라의 갈리아 방문,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원정 정도이다. 플라비우스 왕조의 황제들 역시 속주 방문을 자주 한 편은 아니었다.
  • [5] 당시만 해도 로마에서는 별종으로 여겼다. 하드리아누스 이후 더 이상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 [6]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히스파니아를 정복할 때 정착했다.
  • [7] 때문에 이탈리카 출신들이 제국 요직을 차지하는 것과 같은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직도 이탈리아 출신의 귀족들이 서슬퍼렇게 살아 있었을 때니 조심스러웠겠지만 말이다.
  • [8] 심지어 하드리아누스는 전임황제인 트라야누스가 정복한 다키아지방조차 포기하려 했었다. 반대가 심해서 결국 그만두긴 했지만, 이 황제가 얼마나 확장정책에 부정적이었는지를 가늠하는 초석은 될 수 있다.
  • [9] 로마는 위로는 독일, 아래로는 이집트에 이르는, 서로 정반대의 기후대에 놓인 거대한 나라였다. 거기에 더해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제국의 향방을 결정하는 막중한 결정을 계속해서 내려야 했음으로 심리적인 스트레스도 상당했을 것이다. 아무리 황제라 마차나 수레에 기대서 편하게 간다고 해도 고대의 마차는 롤스로이스가 아니다.(...) 거기에 더해 여행 중 그의 심신을 위로하던 동성의 애인도 잃었으니...
  • [10] 이건 젊어서 제국 곳곳을 돌아다니느라 심신을 혹사시킨 탓에 말년에 몸이 망가지면서 만성적인 고통에 시달렸고 게다가 후계자까지 지명해 둘 정도로 할 일도 다 해놓아서 뒷 일 걱정할 필요도 없어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어진 탓도 컸다.
  • [11] 로마 황제들 중에서 종합적으로 봤을 때 닥치고 가장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나 싶다. 정말 존내 비범하다는 말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 [12] 구체적인 실무야 건축가들에게 맡겼겠지만, 어쨌든 돔형 지붕이라는 아이디어는 그가 냈다. 판테온은 원래 아그리파가 지은 건축물이지만, 불탄 후 하드리아누스가 완전히 다시 설계해 재건했으므로 그가 지은 건물이라 봐야 한다.
  • [13] 이후 자기가 지은 신도시와 원래 도시를 구별하는 지점에 여기까지는 테세우스의 도시, 여기서부터는 자기의 도시라는 개선문을 만들어 버렸다. 허영심도 어느 정도 있었던 듯.
  • [14] 현재의 터키 에디르네
  • [15] 물론 거기에 있었던 학자들 중에서 "30만명이나 되는 군대를 뒤로 둔 사람을 상대로 누가 이기겠나"라고 볼멘소리를 하긴 했다.
  • [16]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자면, 말년 어느날 괴로움을 더는 참지 못해 호신용 단검으로 자살하려고 시도하려는 걸(로마인들은 늙어 심신이 다 소모되면 추하게 사느니 자살하는 게 낫다는 마인드였음.) 주변 사람들이 단검을 빼앗아 막자 그 다음엔 자신을 존경해 온 그리스 출신 주치의에게 독약제조를 명령했다. 제조하자니 위법행위고, 제조하지 않자니 진심으로 존경해온 사람의 명령이라 거부할 수도 없었던 이 불쌍한 의사는 결국 조제한 독약을 자기가 먹고 자살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이 사건에 충격받아 그후 다시는 자살 시도를 안했다. 그 대신 땡깡이 한층 더 심해짐으로서(...) 주변 사람들의 고생은 더 심해졌다.
  • [17] 정확히는 네로가 턱수염을 슬쩍 기르려고 시도한 적이 있긴 하다. 평이 안 좋아서 그만뒀지만.
  • [18] 굳이 흠을 잡자면 티볼리에 엄청난 돈을 들이부어 별장을 지은 정도, 그런데 그가 얼마나 제국을 건실하게 운영했고 얼마나 제국을 돌아다녔는지를 생각하면 노인네가 말년에 좀 호화로운 별장을 지어서 틀어박히겠다는데 뭐라고 하기도 그렇고... 그 별장을 지어도 로마 재정은 끄떡없었다. 칭찬받을 만한 행동은 아니지만 까기도 애매한 일.
  • [19] 안티노스는 악어에 물려 죽었는데, 마침 이집트에선 악어에 물려 죽은 사람은 신이 된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걸 안 하드리아누스는 즉시 안티노스를 신으로 삼아 신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도 안티노스 신앙은 이집트에만 퍼뜨렸을 뿐 그 외 지역에는 퍼뜨리지 않았다. 다만 안티노스를 조각한 동상은 제국 전역에 뿌렸다. 제국 전역을 시찰할 때마다 보기 위해서 였던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