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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회

last modified: 2015-04-12 16:58:26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구성
3. 역사
3.1. 결성과 성장
3.1.1. 야전군 지휘 경험의 부족
3.1.1.1. 이로 인한 병크
3.1.2. 박정희 대통령의 비호
3.1.3. 윤필용 사건
3.2. 노태우 대통령 취임 이후
4. 12.12 사태 당시 핵심 인물
4.1. 보안사
4.2. 수경사
4.3. 육군본부
4.4. 사단
4.5. 공수여단
4.6. 청와대
5. 숙청
6. 부작용과 이에 대한 반론
7. 기타
8. 서브컬쳐에서의 하나회
9. 관련 항목

1. 개요

대한민국 국군에 존재했던 육군불법 사조직.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무시한 불법 무력집단.

전두환노태우를 중심으로 육군사관학교 동기들과 후배들이 비밀리에 결성한 불법 조직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암살되고, 정국이 혼란한 와중에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전두환이 정권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들은,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앞선 하나회의 선배가 맡았던 요직을 하나회 후배가 대물림받는 식으로 끌어주고 후배들은 선배들을 적극적으로 돕는 식으로 밀어주며, 주요 자리를 차지했기에 제5공화국 이전부터 이미 하나회 가입은 곧 출세와 같은 의미였다. 특히 당시 출세의 지름길이었던 국군보안사령부(現 국군기무사령부)와 육군 특수전사령부는 하나회 출신이 거의 장악하다시피 했고, 결국 보안사와 특전사는 전두환이 권력을 장악하는 최고의 도구가 되었다. 이들의 위세가 절정에 이른 5공화국에서 6공화국에 이르는 시기가 되면 하나회 출신이 아니면 육군참모총장이나 기무사령관 같은 최고 요직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하게 됐을 정도.

오직 국가에만 충성해야 할 군 내부에서 불법으로 사조직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일단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고 하나회 회원들의 요직 독점으로 말미암아 하나회 군인들 VS. 하나회가 아닌 군인들로 나누어져 심각한 갈등이 벌어지게 됨으로써 하나로 뭉쳐야 할 군이 반목과 갈등을 거듭하게 하는 등 존재 자체가 대한민국 국군 덩어리고, 앞으로도 절대 존재해서는 안 될 불법조직이다. 하나회는 당연히 육군 장교들만의 클럽이었으므로, 안 그래도 세력이 미약했던 해군과 공군은 여기 출신 두 대통령 시기에 더욱 심한 박탈감을 느꼈다고 한다. 세간에 하나회의 존재가 알려졌을 때 "군 내의 사조직이 무슨 소리야?"라며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군필 남성들의 경우가 그랬는데 그만큼 비상식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최강의 똥별들 모임령관급들은? 예비똥별

2.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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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군사반란이 성공하고 군 수뇌부 인사가 발표된 뒤인 1979년 12월 14일, 쿠데타 지휘부와 행동대장들이 국군보안사령부 건물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사진상의 배치대로 정렬한 해당자들의 이름과 당시 계급이다.
남웅종
김호영
●●
신윤희
●●
최석립
●●
심재국
●●●
허삼수
●●●
김진영
●●●
허화평
●●●
이상연
●●●
이차군
●●●
백운택
박준병
★★
이필섭
●●●
권정달
●●●
고명승
●●●
정도영
●●●
장기오
우국일
최예섭
조홍
●●●
송응섭
●●●
장세동
●●●
김택수
●●
이상규
최세창
박희도
노태우
★★
전두환
★★
차규헌
★★★
유학성
★★★
황영시
★★★
김윤호
★★
정호용
★★
김기택

셋째줄 왼쪽부터 보안사 대공처장 겸 합수부 수사단장 준장 남웅종, 2기갑여단 16전차대대장 김호영,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중령 신윤희, 수경사 33헌병대장 중령 최석립, 심재국, 보안사 인사처장 대령 허삼수, 수경사 33경비단장 대령 김진영, 보안사 비서실장 대령 허화평, 보안사 감찰실장 대령 이상연, 이차군, 71방위사단장 준장 백운택

둘째줄 왼쪽부터 20사단장 소장 박준병, 9사단 29연대장 대령 이필섭, 보안사 정보처장 대령 권정달, 청와대 경호실 작전담당관 대령 고명승, 보안사 보안처장 대령 정도영, 5공수여단장 준장 장기오, 보안사 참모장 준장 우국일, 보안사 기획처장 준장 최예섭, 수경사 헌병단장 대령 조홍, 30사단 90연대장 대령 송응섭, 수경사 30경비단장 대령 장세동, 중령 김택수.

앞줄 왼쪽부터 30사단 2기갑여단장 준장 이상규, 3공수여단장 준장 최세창, 1공수여단장 준장 박희도, 9사단장 소장 노태우, 보안사령관 소장 전두환, 수도군단장 중장 차규헌, 국방부 군수차관보 중장 유학성, 1군단장 중장 황영시, 육군보병학교장 소장 김윤호, 50사단장 소장 정호용, 수경사 참모장 준장 김기택.

전술된 김윤호, 김기택, 권정달, 우국일, 최예섭, 조홍, 송응섭, 남웅종, 김호영, 심재국, 이상연, 이차군은 하나회 출신이 아니지만, 쿠데타 관련자이거나 보안사 소속인물 자격으로 사진촬영에 임했다. 그리고 백운택은 육사 11기로 전두환, 노태우와 동기인데 뒷줄에 있는 것도 이상하거니와, 무엇보다 백운택이 찍힌 부분이 합성 티가 나는 이유는 사진 찍을 당시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합성해서 넣어줬다고 한다.

3. 역사

3.1. 결성과 성장

1963년 전두환이 '일심회(一心會)'라는 이름으로 영남 출신 육군사관학교 정규 11기 동기생인 손영길, 노태우, 김복동, 정호용, 권익현 등과 만들었다. 육사 11기는 4년제 육사의 첫 졸업생이었다[1] 이들은 육사 졸업생 중에서 기수별로 10여 명을 선정하여 거의 스토킹에 가까운 설득과 강요로 가입시켰다. 선정 조건은 영남 지역 출신, 성적 우수, 정치색이었다. 성적 우수가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기 때문에 육사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이들은 자의에 관계없이 거의 강제로 하나회에 가입되기도 했다. 장세동과 같은 非영남 출신으로 하나회에 가입된 인물들은 대게 육사를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장세동(전남 고흥 출신) 같은 非영남 출신도 간간히 있긴 하나 대체로 구색맞추기에 가까웠고, 하나회 회원의 80% 이상은 영남 출신이었다. 非영남 회원중에 장세동은 호남 출신이라 하나회 내부에서 따돌림당하기도 했으나 전두환이 감싸줘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장세동이 욕을 먹으면서도 전두환을 따르는 이유가 이것이라고 한다. 가입 후에는 점조직으로 관리하였기 때문에 하나회 회원들도 자기 동기 중에서 누가 하나회 회원인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초급 간부 시절에는 몰라도 하나회가 요직을 독점한 탓에 나중가면 진급이나 직책으로 어느정도 파악이 가능했다.

윤필용, 유학성, 서종철 등 군 상층부의 지원을 받은 하나회 회원들은 초급장교 시절부터 노골적인 인사특혜를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국방부, 특전사, 보안사, 육군본부 등 진급이 빠른 노른자위 보직을 옮겨 다녔고 특히 1960년대 말부터는 육군본부 진급과와 보안사 내사과(진급에 필요한 인사자료를 검증하는 부서) 실무자를 대물림하면서 자신들의 보직을 챙겼다. 야전부대 지휘경력이 필요하면 서울 근교의 제9보병사단(고양)이나 9공수여단(부천) 등에 잠시 다녀오는 식이었다. 특히 9사단의 경우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실전부대로 쿠데타나 대규모 시위 발생시 정치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부대이다. 박정희 정권이 하나회 장교들을 9사단에 집중 배치한건 단순히 서울과 가까워서만은 아니었다. 이처럼 권력과 밀착된 위치인 대통령 경호실, 중앙정보부 파견 근무도 이들의 몫이었다.

3.1.1. 야전군 지휘 경험의 부족

하나회의 리더 전두환의 군경력들을 살펴보면 1사단장으로 근무했던 적을 제외하고 제대로 된 전방부대에서의 근무 경력이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 5.16쿠데타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관을 시작으로 육군본부, 특전사, 중앙정보부, 수경사, 경호실, 보안사 등을 뺑뺑이 돌았다. 다른 하나회 핵심 장교들도 비슷하다. 대부분 실전부대 근무는 서울 근교의 충정부대에서 잠깐뿐이다. 대표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까지 노태우의 전체 군 경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력을 대충만 살펴봐도 초급장교 시절과 베트남 파병, 그리고 8사단 21연대장 시절을 제외하면 전방다운 전방에서 근무한 적은 하나도 없고 철저히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근교와 후방에서만 근무한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연수나 교관직, 구대장직 등의 교육훈련기관이나 해외파병 이외에는 모조리 경기도권을 벗어난 적이 없다. 특히 대위 시절에는 보병 병과 대위라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중대장 경력이 없다. 일단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하려면 기본적으로 1차 중대장과 2차 중대장을 거치고 거기에 참모보직을 하나 이상 해야 한다. 물론 장기복무가 아닌 군장학생의 경우에는 참모보직 대신 특전사 중대장이나 수도권의 향토사단 중대장으로 보임되는 3차 중대장을 하고 전역하기도 한다. 그리고 장성까지 진급하려면 저 두개의 중대장 중에 하나 이상은 반드시 전방에서 중대장을 해야 한다. 그런데 2차 중대장은 커녕 중대장 자체를 거치지 않았는데 장성까지 진급한 것은 뭔가 이상한 이력이다. 보병 병과 소위라면 거의 무조건 거치는 소대장의 임기를 다 채우지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했으며 보안사, 육본, 청와대 등이 전체 경력에서 꽤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보병 병과 소위가 소대장을 하지 않는 경우는 소위때 자대를 육군 특수전사령부로 받았을 경우 정도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부대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면 소위때는 가지 않는 부대이다.

3.1.1.1. 이로 인한 병크
이러한 야전 경험의 부재는 당시 전투병과 장교라면 의무적이었던 베트남 전쟁 파병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전방부대에서 다양한 훈련과 여러가지 상황을 직접 겪어봐야 경험이 쌓일텐데 하나회 장교들은 이런게 전혀 없었다. 후방 사령부에서 펜대만 굴리면서 야전부대 지휘에 관해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실전에 투입되니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당시 베트남 파견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면 1계급 진급과 무공훈장 수여가 관례였다. 그런데 당시 9사단 29연대장으로 1년 근무한 전두환이 귀국하자 훈장심사에서 그의 상관들이 결사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야전에서 실전지휘는 엉망이었고 온갖 볼썽 사나운 행동으로 장병의 사기들을 떨어뜨렸다는 것. 당시 전과를 조작하기 위하여 암시장에서 베트콩 무기를 구입하여 상부에 전리품으로 보고하는가 하면, 식수가 부족한 상황에서 혼자 온수 샤워를 즐기고 한가롭게 테니스를 치는 등 부적절한 처신이 많았다고 한다. 결국, 진급과 훈장수여는 무산되고 대신 대령임에도 장군(준장) 보직인 제1공수여단장으로 발령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한마디로 온실 속에서 성장해서 군인으론 무능하고 정치적 감각만 발달한 군내의 민폐집단. 이랬기에 이들은 대부분 진급은 말도 안되는 속도로 거의 개돌수준의 진급속도를 자랑했지만 계급값은 하나도 못했다. 일례로 전두환이 1978년에 육군 소장으로서 제1보병사단장에 발령된 나이가 47살. 2013년 기준으로 육군 대령에 진급하는 나이가 43~50살이며 소장에 진급하는 나이가 55살 전후임을 감안할 때 말도 안되는 나이에 이 위치에 도달한 것이다. 기동전사 건담에는 세 배 빠른 붉은 사나이가 있다면 박정희 정권당시에는 10년 빠른 대머리 사나이가 있다.

다만 전두환의 진급속도가 빠른 것이기는 하나 지금의 기준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창군 후 국군은 거의 무(無)에서 조직을 꾸려야 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군수뇌부도 나이가 30대에 불과했는데, 6.25전쟁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 대장은 당시 33세였다. 창군된지 얼마되지도 않아 6.25라는 대규모 전쟁을 치르면서 군조직이 급속도로 확대된 탓이다. 때문에 60년대만 하더라도 30대에 장군을 다는 경우도 많았다. 유명한 육사8기[2] 가운데 가장 빨리 진급한 이들을 보면 이미 40세에 사단장(소장)에 진급했다.[3] 세월이 흐르면서 인사가 적체되면서 진급 연령이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전두환이 육사11기 동기생 중에서 진급이 가장 빨랐던 것은 사실이지만 윗기수 육사10기보다 빨리 진급한 것은 아니었다.

3.1.2. 박정희 대통령의 비호

하나회의 리더인 전두환은 5.16쿠데타 때부터 박정희의 친위 세력을 자처했다. 1961년 5.16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서울대 문리대 ROTC 교관으로 파견 나가 있던 전두환은 육사 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을 조직하였고, 이 공로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관에 보임되었다. 이 때문에 박정희가 군 수뇌부와는 별도로 군 나 자신의 친위세력을 심어둔다는 의미에서 하나회를 방조 혹은 적극적으로 육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윤필용 사건 이전부터 박정희는 전두환, 손영길의 준장 진급을 축하한다고 고급승용차를 하사하였고, 노태우, 김복동에게는 '하나회'의 최초 명칭인 일심회의 '일심(一心)'이라고 새겨진 지휘봉을 내려주었다. 이는 다른 장성들에게는 하지 않은 대단한 특혜였다. 하나회의 존재가 박정희에게 알려진 이후에도 박정희는 전두환을 최고 요직 중 하나인 보안사령관에 임명하는 등 계속해서 신임을 보였다.

그런데 이것은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될 당시에 전두환은 대위였는데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할 당시 박정희에게 특별히 총애받은 두 명의 대위가 있었다. 하나는 차지철이였고 다른 하나가 전두환이였다. 박정희는 이 두 명의 대위에게 전역하고 국회의원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는데 차지철은 이를 흔쾌히 응한 반면 전두환은 단칼에 거절했다. 전두환이 박정희의 정계진출 권유를 거절한 이유는 이랬다. "각하, 군 내부에도 각하를 추종하는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애초에 전두환은 군 내부에서 박정희 지지세력을 만든다는 이유로 전역을 거부했던 것이다.# 이랬기에 박정희는 군대에서의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전두환을 옹호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박정희 대통령에게 충성 경쟁하던 인간들이 널렸는데 대통령이 존재 자체에 격노할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면 실제 김영삼 대통령의 하나회 제거 이상의 강도로 하나회를 박살냈을 것이고 핵심 구성원인 전두환, 노태우도 최소한 군복을 벗어야 했을 것이다. 독재권력을 가진 대통령의 노여움을 산 일개 사조직이 나중에 자신들의 보직을 이용하여 나라를 뒤엎었다는 게 말이 되는지 의문이다.

3.1.3. 윤필용 사건

하나회의 존재가 처음 불거진 것은 이른바 윤필용 사건이였다. 당시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윤필용과 가까운 군내 후배들을 조사하면서 하나회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이다.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이 하나회의 존재에 대한 보고를 받고 박정희 대통령이 격노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이는 실제 사실과 명백하게 다르다. 오히려 박정희 대통령에게 하나회 제거를 건의했던 강창성은 제3관구사령관으로 좌천되어 권력핵심에서 완전히 밀려나버렸다. 이후 하나회 소속 장교 중에 희생양으로 손영길 준장만 예편되고, 나머지 하나회 회원들에겐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박정희가 직접 나서서 측근 강창성을 내치고 하나회를 살린 것이다. 이후에도 위에 서술된 것처럼 전두환을 위시한 하나회 장교들은 권력과 밀착된 핵심보직을 옮겨다니면서 승승장구했다.

하나회 제거를 건의했다가 오히려 박정희에게 내쳐졌던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은 12.12 군사반란으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 무려 4회 - 거의 7개월이나 삼청교육대를 들어갔다 나왔다 해야만 했고, 후유증으로 드라마 제5공화국이 방영되는 무렵에는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은 6·25전쟁에서 훈장을 받은 국가유공자로 본래는 국립묘지 안장 대상이지만, '금고 2년 이상 선고받은 자'는 안장 대상에서 제외하는 규정을 만들면서 80년에 신군부에서 탄압받는 과정에서 4년형을 선고받은 그도 국립묘지 안장이 부결되었다. 이 규정에 따르자면 비록 사면은 받았어도 실형은 선고받은 신군부 인사의 국립묘지 안장을 막을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탄압받은 강창성까지 대상이 된 셈이다.

3.2. 노태우 대통령 취임 이후

하나회의 위세는 전두환 시기에 절정에 다다랐으며, 당시 전두환은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자신이 노태우를 조종하는 식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었다(그를 위한 법적 장치로서, 현행 헌법 제90조의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들 수 있다). 이 때문에 노태우의 당선 후 노태우와 전두환의 갈등속에 분열과 일부 숙청이 벌어졌고, 노태우는 집권 후 하나회 안에서도 자신이 9사단장 및 9공수여단장 시절 데리고 있던 직계부하들, 일명 9-9라인 인맥들 위주로 중용했다. 이에 대비되어 전두환은 1공수여단장, 1사단장을 지내어 전두환 인맥은 1-1인맥이라 불리고, 둘 다 같은 숫자가 겹치니 1땡인맥, 9땡인맥이라고 읽기도 한다(다만 9-9인맥 전체가 하나회는 아니었다). 아무리 하나회라도 자기들 회원으로만 여단, 사단 지휘부를 꾸릴 순 없으므로 노태우의 여단장, 사단장 시절 부하에는 비하나회거나 아예 非육사 출신도 일부 있었으며, 이들도 9-9인맥에 들어갔다(물론 다수는 하나회 소속이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11일 만에 보안을 유지하다 전격적으로 하나회 출신인 군 수뇌부를 교체하고 대대적인 군 장성 물갈이를 하면서 완전히 해체되었다. 해체 후에도 하나회 소속이던 장교들은 진급과 보직 등에서 꾸준히 인사상 불이익을 받으면서 차례로 한직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우습게도 한국논단은 하나회가 애국단체라면서 부활시키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김영삼이 하나회를 없앤게 가장 못난 짓이라고 비난하고 심지어는 북한에 아부하는 행위라고 글을 썼다가 김영삼 측근에게 항의를 들은 바 있다. 그렇기에 한국논단은 매국 언론으로 등재되는 근거로 많이 활용하게 되었다.

4. 12.12 사태 당시 핵심 인물

이하의 하나회 구성원은 어디까지나 정규 육사로 일컫는 11기 이후만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당시 국방부 군수 차관보 유학성 중장, 1군단장 황영시 중장, 수도군단장 차규헌 중장 등 11기 이전 출신 인사들은 "신군부이자 하나회의 후원자"라고 하면 맞지만, 하나회 회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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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0사단장 소장 정호용(사진은 특전사령관 시절)
    육군참모총장으로 예편한 뒤 내무부, 국방부 장관, 국회의원 역임.

4.1. 보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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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실장 대령 화평
    청와대 비서실에서 핵심 측근으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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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사처장 대령 삼수
    청와대 비서실에서 핵심 측근으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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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공처 대공2과장 중령 이학봉
    청와대 비서실에서 핵심 측근으로 근무.

4.2. 수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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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경비단장 대령 장세동(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직속부하)
    3공수특전여단장, 대통령 경호실장, 국가안전기획부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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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3경비단장 대령 김진영(수경사령관 장태완 소장 직속부하)
    육군참모총장 역임.

  • 33 헌병 대장 중령 최석립(33 헌병대는 청와대 경호실 배속부대이나 10.26 직후 전두환이 본부장으로 취임하게 된 합동수사본부에 임시로 배속됨)
    육군 헌병감 역임.

  • 헌병단 부단장 중령 신윤희(수경사 점거)
    육군 헌병감 역임.

4.3. 육군본부

  • 범죄수사단장 대령 우경윤(육본 헌병감 김진기 준장 직속부하로 정승화 육참총장 불법연행에 직접 관여)

  • 헌병감실 장교 대령 성환옥(육본 헌병감 김진기 준장 직속부하)

4.4. 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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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사단장 소장 박준병
    육군 보안사령관 등 역임 후 대장으로 예편. 전 국회의원.

  • 71방위사단장 준장 백운택

4.5. 공수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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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공수여단장 준장 박희도
    특전사령관, 육군참모총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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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공수여단장 준장 최세창
    합참의장, 국방부 장관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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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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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호실장 직무대리 준장 정동호
    육군참모차장, 국회의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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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호실 작전담당관 대령 고명승
    국군보안사령관, 제3야전군사령관 역임.

육사 11기부터 36기까지의 하나회 회원 全 250명의 명단은 2005년 2월 동아일보의 자매지인 <신동아>에서 최초 공개되었다. 이 명단은 전술된 기존의 하나회 명단인 '백승도 명단'의 오류를 바로잡은 하나회 명단의 '완결판'이라 한다. 하나회 회원 연명부 및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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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숙청

김영삼 대통령의 숙군(肅軍) 작업은 그야말로 김영삼답다는 소리가 나올 만큼, 김영삼의 대통령 시절 다른 업적들(금융실명제 등)과 유사한 행보를 보여 준다. 기존 행정 조직이 아니라 철저히 측근들하고만 의논하며 철저히 비밀을 유지하다가, 결정적인 시점에서 깜짝쇼를 하듯이 터트리는 것. 사실 김영삼은 '민주정의당의 배신자'라 불릴 정도로 기존 민정당의 주류 세력(이른바 '민정계', 특히 군 출신)들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숙청했다. 사실 3당 합당이 이루어진 이유도 김대중과 후보 단일화 문제로 싸우기 귀찮았던 김영삼과, 노태우 이후 마땅한 대통령 후보가 없던 민정당의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져 이루어진 것이었다.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후에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반란죄 및 횡령, 살인죄로 체포하고 법정 최고형인 사형까지 구형하였다. 노태우의 경우 징역 22년,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김영삼 임기 말에 특별 사면되었다. 사면 자체는 김영삼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으나 임기 막바지였기 때문에, 당시 대통령 당선인이었던 김대중의 요청에 의한 사면이라는 게 대체적인 정론. 기사 또한 군 출신 인사들이 많았던 민주자유당민간인 정당신한국당으로 싹 갈아엎어 버린다. 하나회라는 조직이 극단적으로 반발할 경우 쿠데타 가능성까지 언급될 정도의 조직이었던 만큼, 하나회 숙청에 있어서는 이러한 기습적인 방식이 더 알맞기도 했다. 12.12 군사반란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하나회 세력을 조용히, 천천히 물갈이하려다가 역으로 전두환을 위시한 쿠데타 세력에 당한 전력도 있었으니.

1993년 당시 김영삼은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하나회 출신인 서완수 기무사령관에게 "앞으로는 대통령과 독대하지 말고 국방장관을 통해 보고하라"고 말했다. 한편, 동년 3월 5일 육군사관학교 49기 졸업식 연설에서 국군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아주는 일에 앞장서겠다는 말을 통해 에둘러서 군을 엎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임무에 충실한 군인이 조국으로부터 받는 찬사는 그 어떤 훈장보다도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잘못된 것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군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는 일에 앞장설 것을 여러분에게 다짐합니다. (이하 중략)

그리고 용산구 국방부 내부 주차장에 하나회 척결을 주장하는 전단이 살포된다. 비하나회파가 뿌린 것으로 추정되는 이 전단에 대해서 권영해 국방장관은 조사를 명령하는 것과 함께 김영삼에게 보고를 했다.

김영삼이 본격적인 숙청에 들어간 건 취임 11일째인 1993년 3월 8일. 이 순간까지 군 수뇌부는 물론 청와대 비서진들까지도 김영삼의 의도를 모르고 있었다. 김영삼은 몇몇 최측근들과 일을 의논하다 3월 6일 오후 늦은 시각 국방부 장관 권영해(육사 15기)를 3월 8일 오전 7시 30분까지 오라고 한후 당일 독대했다. "군인들은 그만둘 때 사표를 제출합니까?"라고 김영삼이 묻자 권 장관은 "군대엔 사표 내는 일 없이 인사명령에 따라 복종하는 각오가 언제나 돼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김영삼이 "아 그래요. 그럼 됐구만"이라고 말하더니 "내가 육참총장하고 기무사령관을 오늘 바꾸려고 합니다"라고 선언했다. 장관이 극비리에 육군본부, 기무사, 수방사, 특전사 등의 동향을 점검하도록 지시를 내린 상황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김영삼과 권영해가 수뇌부에 대한 인선에 들어갔고, 하나회 출신 육군참모총장이었던 김진영과 기무사령관이었던 서완수를 군 통수권자 권한으로 전격 해임했다. 그렇게 공석이 된 자리에는 非하나회 출신인 김동진 연합사 부사령관(육사 17기)과 김도윤 기무사 참모장을 각각 육군총장과 기무사령관에 임명했다. 기무사령관 교체시에 작은 해프닝이 있었는데, 서완수 사령관이 해임된 뒤 김도윤 참모장이 취임하는데 원래 기무사령관은 중장이 보임한다. 그러나 너무 빨리 교체되는 바람에 진급시킬 시간이 없어 물러날 때까지 김도윤 기무사령관은 소장으로서 직무를 수행했다.사실 이미 취임했는데 그 후에야 진급한다는 것도 웃긴 일이긴 하지만 중장이 보임된 건 다음 기무사령관에서였다. 여기까지 과정이 단 네 시간. 여기에 이르러서도 이 일이 군 수뇌부 교체 정도가 하나회 숙청 과정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김영삼 자신과 몇몇 측근에 불과했다. 한 가지 웃긴 점은 김영삼 대통령의 명령을 하달받고 시행할 것을 공지한 사람이 바로 김영삼에 의해 잘리는 김진영 육군참모총장이었다. 이 공지를 요약하자면 "군 내 사조직을 해체하라"였는데, 김진영의 출신이 출신이다보니 이를 들은 하나회 구성원들은 그 대상을 하나회가 아닌 학군장교(ROTC) 그룹으로 여겼다.

1993년 4월 2일에는 당시 대령이던 백승도(육사 31기, 당시 교육사 근무. 2004년 준장 예편)가 하나회 명단을 용산구 군인 아파트에 뿌리는 일을 벌였고, 이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하나회의 깊은 뿌리가 제대로 알려지기도 했다. 장성급까지의 하나회 구성원들은 어느 정도 드러나 있었고 그래서 그들을 대상으로 숙청이 진행되었는데, 이 하나회 명단 살포와 그 후 명단 확인 소동 등이 일어나면서 하나회 소속 영관급 장교들까지 전부 드러나게 되었고, 이후 이들 하나회 출신 영관급 장교들은 이전과 반대로 하나회 출신이라는 이유로 진급에서 지속적으로 불이익을 받으며 차례차례 밀려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당일로 안병호 수방사령관(육사 20기)과 김형선 특전사령관(육사 19기)까지 경질 후 교체되었다. 이 교체에는 한 가지 일화가 있는데, 육참총장과 기무사령관이 목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은 다음은 자기 차례라는 것을 직감했는지 특전사령관은 아예 포기하고 퇴역하면 운전병이 없어질 거라며 운전연습을 하고 있었고, 수방사령관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이곳저곳에 줄을 대고 있었다 한다. 물론 결과는 사이좋게 모가지. 이런 교체 의도를 권영해 국방부 장관이 알게 된 건 겨우 발표 하루 전이었을 정도로 이러한 진행은 김영삼과 측근들에 의해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그리고 불과 며칠 후인 4월 8일에 각 야전군사령관급 인사로 하나회 출신 장군들이 자리에서 밀려났으며, 또 바로 며칠 후인 4월 15일에는 사단장급 인사까지 벌여서 하나회 출신 장군들을 자리에서 몰아냈다. 4월 동안 벌인 이런 기습적인 세 번의 교체로 군 주요 보직에서 하나회 인사들은 순식간에 밀려나고 만다. 이 과정에서 떨어진 별 40개가 넘었는데, 이는 전두환이 12.12를 일으켜서 상급장성들의 목을 다 날리고 하나회로 군을 장악한 이후 처음 있었던 대규모의 숙청작업이었다.

한편, 1차 숙청 과정 이후 하나회 출신들은 군 내 주요 자리에서 밀려난 상태였다. 1993년 7월 9일 하나회 소속인 합참 작전부장 이충석 소장(육사 21기)이 합참 회식 자리에서 물컵으로 탁자를 몇 차례 내려치면서 정부가 군을 막 대한다며 불만을 토로해 회식 자리가 서둘러 마무리된 일이 있었다. 이를 하나회 청산에 대한 하나회의 저항이라고 간주한 대통령과 주요 지도부는 아예 하나회에 대해 이전의 득세를 모조리 다 없던 것으로 할 만큼의 대대적 탄압을 하기로 한다. 이후 하나회 출신의 주요 장성들은 진급에서 멀어진 것도 모자라 아예 강제 전역까지 당하는 2차 숙청을 당했으며 그렇게 하나회 출신 장군들은 군을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그 뒤 하나회 출신은 계급을 막론하고 하나회 출신이라는 이유로 진급과 직위에서 계속 배격당했고, 그렇게 하나회는 이전의 권력을 완전히 잃고 망하고 만다. 더 웃긴 일은 2차 숙청 이후에 하나회 회원들을 배격한 장관은 하나회 출신이면서 김영삼의 경남고 후배인 이병태(육사 17기. 예비역 중장) 장관이었다는 것. 그는 1992년 대선 때 김영삼 후보의 군 문제 담당 자문역을 맡았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후 청산 대상인 하나회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고위공직인 국가보훈처장에 임명되었고, 전임인 권영해 장관의 후임으로 국방장관에 기용되었다.

하나회 숙청 과정에서 공군참모총장이었던 이양호가 합참의장이 되고 국방부 장관까지도 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만, 이 합참의장은 린다김 사건으로 대표되는 율곡사업 비리에 연루되었으며 후임 공군참모총장인 조근해 전 참모총장은 생도 임관식 예행연습을 위해 공군사관학교로 이동 중 헬기 추락사건으로 순직하고 만다. 참고로 당시 사고 기종은 하필이면 국군의 주력 헬기로 쓰이던 UH-60 블랙호크였다.

하나회 숙청 과정에서 하나회 출신들에 대한 자진신고를 받았는데, 하나회라는 군 내 사조직의 특성상 명단이나 체계가 따로 있을 필요가 없어서 하나회 출신들과 잘 어울리고 진급이 잘 되던 장교들은 나도 하나회인 것 같다며 자신신고를 해 오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하나회 명단이 살포된 후에야 그들은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훗날 인터뷰에서 "내가 하나회를 해체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사실 하나회 자체가 군을 실제로 동원할 수 있는 군 장성들의 사조직이었던 만큼, 그들이 해체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군 김대중 비토(veto)설'이다. 이 주장은 5공 때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해서,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에 나설 때마다 흘러나왔다. 심지어 하나회가 완전히 숙청된 이후인 1997년 대선까지도 김대중 비토설이 흘러나왔다. 하나회 해체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자칫 잘못하면 애써 이루어낸 민주화가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도 있었던 절체절명의 순간이기도 했다. 실제로 남미 등의 나라를 보면 오랜 군부독재 후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과거 기득권 세력이 쿠테타를 일으켜 군사정권으로 회귀하는 현상이 자주 보인다. 대표적으로 아르헨티나, 칠레 등. 다만 칠레는 군사정권으로 돌아간 건 아니고 기존의 독재자가 여전히 사회 전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례다. 처벌? 물론 그런 건 없다. 자세한 내용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참조.

실제로 하나회 출신 군 수뇌부를 제거하는 상황 때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군 지도부가 쿠데타 상황까지 경계하며 보름 동안 밤샘 대비를 하기도 했고, 실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숙청 과정에서 쿠데타설이 돌기도 했다. 아무튼 김영삼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평가가 대세이다. 김영삼은 노태우 대통령 이후 민정당 측이 대통령 후보를 물색하다가 사람이 안 나와서 모셔간 사람이기 때문에(물론 여기에는 김영삼의 계산도 작용했다), 대통령 취임 이후 여당인 민자당을 전부 휘어잡을 명분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생각보다 쉽게 하나회를 해체했다. 만약 김영삼이 다른 당이었거나,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상태에서 하나회 해체를 시도했다면 12.12 군사반란 시즌 2를 찍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하나회를 숙청하고 빈자리에 주요 인사를 하는 과정에서 비밀 유지를 위해 김영삼은 국방부나 군 관련 인물을 배제한 채 최측근들하고만 일을 논의했는데, 이런 인선 과정에서 김영삼의 아들인 김현철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후 김현철은 권력 실세로 우뚝 섰다.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권력 실세가 된 김현철은 이후 부패권력의 상징이 되어 몰락하고 만다.

하지만 김현철 본인은 하나회 숙청 과정에서 브레인이었다는 설을 부인했는데, 본인에게 가장 큰 업적이 될 수 있는 일을 부인한 것을 보면 정말 몰랐던 것이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하나회 척결은 금융실명제 실시 등과 더불어 김영삼 대통령의 주요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6. 부작용과 이에 대한 반론

노태우는 2011년 발간한 회고록에서 하나회 숙청을 김영삼이 군을 잘 몰라서 한 일이라면서, 하나회 숙청으로 전투력 약화, 3류급 인사들의 지도부 발탁, 하극상 사건 등 부작용이 잇달았다고 주장했다. 노태우씨, 너나 잘 하세요 한국논단, 노태우 등의 주장에 억지가 많이 섞여 있긴 하지만, 하나회 숙청에 따른 부작용도 분명히 존재했다. 하나회의 구성원들은 주로 육군사관학교 성적이 우수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하나회에 가입했다가 하나회 영관급 숙청 때 대거 전역하면서, 1990년대 육군의 허리에 해당하는 영관급 장교단에 상당한 인적자원 공백이 생겨버린 것. 몇몇 군사전문가들은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에서 국군의 대응이 이런 문제도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하나회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독일의 항공클럽처럼 군사적인 능력이 출중한 사조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곳은 베르사유조약으로 독일군이 전투기를 가질 수 없자 파일럿 육성을 위해 꼼수로 만든 집단으로 괴링이나 '날으는 서커스단'처럼 1차대전 에이스들은 전쟁 후 대부분 여기에 소속되어 있었다. 오히려 위에서 설명한대로 전방등 실전에서 복무한 경험은 적었고 국방부, 수방사, 기무사 등을 맴돌면서 편하고 중앙에 가까운 보직을 독차지하였고, 기껏 파견나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경기도 등지로 파견 나간 것이 고작이었다. 대부분의 정치군인들이 그렇듯 이들도 군사적 능력은 대부분 개판이였고 정치적으로 뇌물, 아부하는 능력만 뛰어난 이들이 대다수였다

오히려 전방에서 복무하면서 군사적 능력을 쌓은 비 하나회 군인들은 대부분 대위나 영관에서 전역하는 판국이였다. 해체과정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장성임명은 대대로 하나회에서 임명하고 이걸 하나회 보스 대통령이 인정하는게 관행이었고 이렇게 요직과 진급을 장악했기에 하나회 소속이 아닌 장성은 하나회 소속 대령 눈치를 보는 사태에 이른다. 즉, 군대 내 계급이 붕괴되었다는 소리. 이로 인한 부작용은 더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강릉무장공비사건도 자세히 살펴보면 박정희가 유신을 위해 '노재현'이나 '하나회' 같은 정치군인을 기용하고, 역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채명신 등을 내치면서 한국군은 게릴라전에 대한 대처능력을 상실해 버렸고 이것이 곪아 터진것이 강릉무장공비사건으로 볼수 있다. 예를 들어 위장용 식수(飾樹)를 여유있게 가져가지 않는 점과, 인식되기 쉬운 노란색을 계급장으로 쓴 어리석은 행위가 있다. 노란색은 원래 시인성이 높은데, 검은색 계열과 겹치면 명시성이 최고로 높다. 우비가 전부 노란색인 것도 가장 눈에 띄기 쉽게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것부터가 정치군인 집단이 끼치는 악영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노태우는 12.12 군사반란 9사단의 29, 30연대를 반란에 동원했는데 당시는 박정희 암살로 인해 2급 비상사태(전투명령만 있으면 곧바로 전투상태에 들어가는 작전 명령)가 선포된 상황에서 전방사단의 병력 절반이상을 빼내가벼렸다. 결국 노태우의 주장인 전투력 약화, 3류급 인사들의 지도부 발탁, 하극상은 모조리 노태우가 소속된 하나회의 악영향이고 결국 노태우는 적절히 자기디스를 해버린 셈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들은 불법조직이다. 당연히 불법조직을 해체하고 그 조직원을 처벌하는 것이 원칙이다. 만약 부작용 때문에 불법조직을 놔둔다면 조폭을 시작으로 탈레반이나 IS같은 테러조직, 그리고 윗동네의 김씨조선도 현지 치안을 위해서 존속시켜야 한다는 요상한 논리도 성립한다.

7. 기타

본문 맨 앞의 기념사진에 나온 인물 중 총 11명은 하나회 소속이 아니다. 앞줄 가장 오른쪽에 있는 김기택 준장이 이런 경우로, 신군부 세력의 서울 통과를 사실상 방조했고 위의 사진에 나와 있듯 사진 촬영에도 참여했기 때문에 반란군이라는 측면도 있다. 반대로 군사반란 당시 수경사령관 장태완 소장에게 경복궁의 수경사 30경비단에 모여 있는 반란군 장교들의 명단을 적은 쪽지를 건넨 점과 반란 성공 직후 신군부에게 배제되어 수훈명단에는 빠졌다는 점에서 진압군의 성격도 갖고 있다. 둘째 줄 왼쪽에서 3번째 인물인 권정달 대령 또한 하나회 출신은 아니지만 12.12 군사 반란 이후 보안사령부 정보처장으로서 언론 통폐합과 검열을 주도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불러온 1980년 5월 17일의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에 깊숙이 관여했다. 이 공로 민주정의당 초대 사무총장과 11대, 12대 국회의원으로 5공화국의 권력핵심부에 진입했다. 그러나 장영자, 이철희 부부 금융사기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무총장을 사퇴했고, 노태우 정권 출범 이후에는 권력에서 완전히 소외되었다. 둘째줄 왼쪽에서 7번째 인물인 우국일 준장도 하나회 소속은 아닌 사람인데 보안사 참모장 자격으로 사진 촬영에 나왔다. 한편, 전두환은 자기부대 참모장인 우준장에게도 반란 거사 계획을 일체 비밀로 했기 때문에 우준장은 쿠데타 계획을 전혀 모른 채 전두환 사령관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었다. 나중에 우국일은 전두환 일파와 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쿠데타가 끝나고 6일 후인 12월 18일 합동참모본부로 전출명령을 받고 보안사를 떠난다.

김영삼 정권의 하나회 숙청을 김영삼이 자신의 대선자금 관련 비리를 덮으려고 벌인 거 아니냐는 주장도 있지만, 앞선 내용에 있듯이 하나회 숙청은 1993년에 벌어진 일이고 김영삼의 대선자금 문제가 불거진 건 1995년이다. 12.12 사태와 5.18 관련자들을 잡아들인 일이 김영삼의 대선자금 비리를 덮으려고 벌인 일일 가능성이야 존재하지만, 1993년에 일어난 하나회 숙청 건을 1995년의 일과 연계시키려는 주장은 무리수. 하나회 숙청은 오히려 김영삼 전 대통령 본인의 하나회에 대한 혐오에 의한 것에 가깝다. 3당 합당으로 인해 그 진실성에 의혹을 보내는 이가 종종 있지만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민주화 운동가였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형선고에 비하면 약하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 본인도 전두환 정권 당시 가택연금을 당하는 등 하나회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은 사람이다. 당시 한국에서 경찰이나 형사가 가장 많은 곳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자택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다.

한편, 당시 정황을 2012년 3월 팟캐스트 라디오 '저공비행'에서 유시민이 언급했는데 내용은 이렇다. "하나회 숙청이 있잖아요, 제가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게 사실인줄은 모르겠는데 들은 얘기로...군에서 인사안을 가지고 왔대요. 대통령한테 보고를, 비서실장이... 대통령이 보니까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군 인사는 대통령 권한이므로). '이거 누가 짜온거야' 했더니 '아, 군에서 짜온겁니다' '군에서 왜 이렇게 짜왔어?' '아 지금까지 군에서 관례화 되어있어서...' 딱 비서실장에게, '어이, 국군 통수권자가 누꼬?' '가...각하십니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다 짤러!' 그날 밤에 별이 오십 개 이상 날아갔다는 거 아니에요" 흠좀무.


하나회 숙청이 벌어진 지 10년이 훨씬 넘게 지나고 기자들조차 당시 상황에 대한 정확한 확인없이 기억만 가지고 기사를 쓰다 보니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 건이 백승도가 하나회 명단을 뿌린 일이 계기라거나 하나회 소속 장군이던 이충석이 술자리 난동 부린 게 계기라거나 하는 식의 말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하나회 숙청 란에 있듯이 하나회에 대한 숙청은 김영삼이 취임 직후부터 명단 살포나 술자리 난동 건이 있기 이전에 시작한 일이다. 명단 살포와 술자리 난동 건은 하나회 숙청의 확대와 심화를 부른 계기이지 하나회 숙청 자체의 계기가 아니다.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이 이 하나회 숙청의 브레인이라는 말도 있지만, 김현철은 스스로 부인했다. 자기도 몰랐다는 것이다. 조언자는 김희상 당시 국방비서관이었는데, 김현철은 김희상도 정확한 날짜는 몰랐을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여담으로 김영삼이 평소에 맺힌 것이 있었기 때문에 한 방에 날려버린 것이라는 주장을 한 것도 김현철이다. 이런 김현철의 언급에서 보면, 과거의 원한은 반드시 푸는 것과 절대적인 보안을 유지하면서 과감하게 일을 저지르는 김영삼 특유의 정책시행이 잘 드러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루트를 탄 것이 금융실명제 발표인데, 이 모두가 김영삼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라는 것이 정설이다.

하나회 선후배로 맺어진 군 인사들이 5·6공 시절 정치 테러를 사주했다는 말도 있다. 보안사가 정보를 제공하고 정보사령부북파공작원들을 동원해 테러를 가했으며 이 두 조직의 수뇌부는 하나회 선후배로 이어져 있었다는 것. 이들이 관련된 사건으로 6공 시절 크게 불거진 일이 중앙경제신문 오홍근 부장에게 정보사 소속원들이 벌인 테러사건이다. 오홍근 테러사건 참조.

하나회 명단 살포 사건의 경우 사건의 원인과 배경에 대해 말이 많다. 백승도 스스로는 의기에 의해 벌인 일이라 하나, 하나회를 제거하려는 군내 세력이 백승도를 하수인으로 쓴거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한편, 백승도는 명단 살포 사건을 일으킨 몇 년 후 "내 의도는 하나회 소속 영관급 장교들마저 계속 진급에서 누락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회에도 건전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선별적으로 구제돼야 한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관련 기사 기타 자세한 사항은 실록! 하나회 참조.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김재홍씨가 쓴 관련 시리즈 칼럼도 읽어볼만 하다. , , , , , ,

한편, 정부는 2011년 11월 10일 단행한 '후반기 장성 진급 및 보직 인사' 가운데 중장으로 진급시킨 육군소장 5명 중 2명인 최익봉 소장, 김현집 소장은 하나회 출신이어서 눈길을 끌었다. 한국일보 기사 그러나 2012년 3월 9일 특수전사령관에 취임한 지 4개월이 된 최익봉 중장이 과거 여군 부사관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것이 밝혀져 보직 해임되었다. 이 기사 내용은 국방부가 출입기자들에게 최익봉 중장에 대한 징계위원회 결과에 대해 밝힌 브리핑 자료내용으로 여기엔 화간인지 강제 성폭력인지, 단순 보직해임인지 불명예전역인지, 사건전개과정 등 자세한 내용이 전부 누락돼 있다. 기사만 보면 얼핏 50대 사단장과 20대 하사의 주책로맨스로 보이겠지만 작성자가 취재한 내용에 따르면 이 둘은 절대 로맨스가 아니었다. 최익봉 전 중장은 지금 모 기업 임원으로 들어가 잘 먹고 잘 지내고 있다. 어쨌든 군에 현역으로 남아 있는 하나회 출신은 2014년 8월 3야전군사령관에 취임한 김현집 대장이 유일하다.

현역 군인외에도 하나회 출신 인사들은 여의도 정치 바닥 이곳저곳에 자리하고 있다. 예를 들면 19대 국회의장을 역임한 강창희(육사 25기. 예비역 중령)가 있으며 박근혜 대통령 주변에도 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 황진하(육사 25기. 예비역 중장)를 포함한 많은 인물들이 포진해 있다. 그외 정당에는 2010년 4월 30일 국회 국방위에서 있었던 천안함 침몰 원인 규명 회의당시 '군번줄 발언'으로 구설에 오른 자유선진당의 이진삼(육사 15기. 예비역 대장)도 있다. 청와대 출신 인사로는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위기관리실장을 역임한 안광찬(육사 25기. 예비역 소장)이 있다. 강 의장과 황 의원, 안 실장은 12.12 사태때 쿠데타군을 막고자 했던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을 지키다가 반란군의 흉탄에 전사한 특전사 비서실장 故 김오랑 중령과 동기이다. 심지어 강 의장과 김오랑 중령은 1978년 소령때 육대에서 교육을 받던 중 같이 찍은 기념사진도 존재한다. 기사

정치권외에도 성우회, 재향군인회, 육사 동문회를 비롯한 국내 주요 예비역 장성모임 등에서 하나회 출신 인사들이 아직도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2년 터진 전두환 육사사열 논란등의 배후에 있다는 주장도 있다. 관련 기사 거기에 이들 단체가 원로라는 이름으로 국내 군에 아직도 많은 영향을 미치니 군내 하나회의 영향이 아직 완전히 제거됐다고 보기는 힘들다. 전역 후에 사조직 만든다고 뭐라하는 사람은 없긴 하니 그러면서도 선배란 이름으로 참견질 조언까지 하니.

8. 서브컬쳐에서의 하나회

  • 이원호밤의 대통령 4부, 개백정에서 등장하여 일개 깡패인 김원국에게 패배한다. 애당초 무협지니. 사실 하나회도 정치 깡패지만 말이다.

  • 창천항로의 스토리 작가 고 이학인이 스토리를 쓴 남북한 현대사물 '봉황의 성골'에서 주인공이 이 조직에 입문을 강요받는다. 주인공 대신 악역포스의 주인공 친구가 가입해서 대립각을 세우는 스토리로 진행되었다. 중간에 전두환이 직접 출연한다. 정치군인의 길을 거부한 주인공과 그를 고깝게 보는 친구, 그리고 우연하게 고등학교 때 판문점 견학에서 북한 측 관람 탑에서 우연하게 눈이 마주쳐서 인사하는 것으로 알게 된 북한 공작원과 함께 묘한 분위기를 그리며 이야기가 진행되었는데 결국 연중되었다.

  • 기동전사 Z건담에서의 티탄즈가 하나회를 모티브로 했다는 말이 있었으나 실제로 참고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토미노 요시유키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 하나회에 대해 듣고 실제로 그런 조직이 있었다는 사실에 꽤나 흥미로워했다고.

  • 일본 가공전기 소설가 모리 에이의 한국군 vs 북한군 소설 '일본조선전쟁'은 김영삼 대통령이 '유능한 하나회 장군들을 숙청'하는 바람에 한국이 북한에 패하고 적화통일 당한다는 괴이한 줄거리다.그냥 분대장이 전군 지휘를 해도이기는 게북한군인데,아니 불쌍하니 소대장이 지휘하는 전군이라고하자

  • 미국 드라마 상의 비슷한 조직으로는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의 HR(Human Resource, 인사부)이 있다. 이쪽은 뉴욕 시경 내부의 부패 경찰(일선 제복 경찰에서 형사, 경찰 고위 간부들까지 포함)들로 이루어진 불법 사조직이자 범죄조직.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부패한 걸 넘어서 살인 청부를 받거나 업소의 상납금을 뜯어 먹거나 마약을 생산하는 등 경찰 옷 입혀 놓은 폭력단이나 다름 없는 개막장 집단이다. 특히 경찰은 군보다 더 민생과 밀접한 존재라는 게 더 악질. 의외로 조직의 두목은 경찰의 높으신 분이 아니라 시장 정치 고문인 부패 고위 공무원. 시즌 1 시작되자마자 등장한 유서 깊은 조직으로 시즌 2에서 한 차례 FBI에 쓸려 나갔다가 두목(엉뚱한 사람을 두목이라고 덤터기 씌워서. 이 양반 아버지가 하필 고인이 된 마피아 두목인지라 아무도 의심 안했다) 몇몇 조직원들이 간신히 살아 남아서 레드 마피아와 붙어 다시 재기하지만, 시즌 2 막바지에 한 집념의 여형사의 분노를 산 탓에 시즌 3부터 본격적으로 털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두목이 마지막 역습의 기회를 날려먹고 쇠고랑을 찼으며, 뒤이어 FBI에 끌려가지 않으려 뉴욕 시내 갱들에게 수배서를 뿌리고 조직원 총동원으로 교통 통제를 벌이는 최후의 발악을 벌였으나 결국 모조리 실패하고 FBI 건물로 성공적으로 연행, 조직은 완전히 풍비박산 났다.
    여담인데 하나회와 마찬가지로 계급 체제가 완전 개판. 두목 바로 밑의 넘버 2(패트릭 시몬스)가 일개 순경(Police Officer)인데(어깨에 순찰용 무전기가 있다) 형사인 조직원들이 눈치를 보며 본인도 형사들한테 말 깐다. 그리고 조직 계보로 봐도 같은 HR 소속의 경찰 간부보다 위에 있다.

9.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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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육사10기부터 처음 4년제로 모집되었으나 10기는 6.25전쟁 발발로 바로 전선에 투입되었는데, 이들의 희생이 크자 11기부터는 4년 과정을 완전히 마친 후 임관하는 것으로 정책이 바뀌었다.
  • [2] 1948년에 입교하였는데 당시 창군된 국군의 초급장교 수급을 위해 무려 1200명 이상을 선발했다.
  • [3] 아래에도 언급되는 강창성도 육사8기 출신인데 전두환보다 4살 많았지만 전두환보다 10년 일찍 소장으로 진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