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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2세

last modified: 2015-03-22 00:55:13 Contributors

프랑스의 역대 국왕
루이 7세 필리프 2세 루이 8세

이름 필리프 존엄왕(Philippe Auguste)
생몰년도 1165년 8월 21일 ~ 1223년 7월 14일 (57세)
재위기간 1180년 9월 18일 ~ 1223년 7월 14일
출생지 프랑스 고네스
사망지 프랑스 망트


Contents

1. 개요
2. 초기 생애
3. 플랜태저넷 왕가와의 대립
4. 내정
5. 평가
6. 대중문화에서의 존엄왕 필리프


1. 개요

프랑스 카페 왕조 7대 왕으로 루이 7세와 상파뉴의 아델라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별칭인 존엄왕[1]에서 짐작할 수 있듯 플랜태저넷 왕조의 앙주 제국에게 눌려 국가 자체가 희미해져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도 할 수 있었던 프랑스를 음모와 술수, 전쟁 등 온갖 방법을 통해 중앙집권화시키고 강대국으로 올려놓은 왕. 야금야금 왕권을 확대해나갔던 중세 프랑스와 카페 왕조의 상황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2. 초기 생애

아버지가 중병에 걸리자 카페 왕조의 전통에 따라 1179년 공동왕으로 즉위하였으며, 1년 후 아버지가 죽자 단독왕으로서 즉위하게 되었다. 그의 즉위 초기에는 샹파뉴 백작이 섭정으로 통치하였지만 점점 자라면서 그를 억제하여 친정을 펼치기 시작했다.

3. 플랜태저넷 왕가와의 대립

그 때부터 그는 인생 전체에 걸친 숙적이 될 플랜태저넷 왕가와 대립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대립각의 이유는 프랑스 왕국의 구 영향권을 되찾고 국력을 강화하려는 필리프 2세의 목표에 부합하는 타겟이 플랜태저넷 가문일 수 밖에 없었기 때문. 플랜태저넷 가문은 오랜 기간 동안, 결혼을 통한 상속권 등을 이용해 꾸준히 프랑스 내에 영토를 확보하고 있었던데다 헨리 2세 시기에는 아키텡 여공작 엘레오노르와의 결혼으로 강대한 아키텡 공작가의 넓은 영지를 잉글랜드 산하로 끌어들이면서 과장 좀 보태서 프랑스 문화권 영토의 거의 절반 가까이를 확보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는 필리프 2세에게는 분명한 타도 목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필리프 2세는 계략을 써 잉글랜드 왕이자 아키텡 여공작 엘레오노르의 남편인 헨리 2세부터 무너뜨리고자 헨리 2세의 아들들과 헨리 2세 사이를 이간질하여[2] 마침내 헨리의 아들들이 자신들의 아버지를 유폐시키게끔 유도해내었고 잉글랜드 왕위에 헨리 2세의 아들인 리처드 1세를 즉위시키는데 성공했다. 이후 리처드와 오래 전부터 쌓은 인연 및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3차 십자군 전쟁에 동참하였으나 지독한 현실주의자[3]였던 그는 종교적 열정이나 기사도와는 거리가 멀었고, 병까지 걸리자 아크레를 함락시키자마자 리처드의 비난을 무시하고 병을 이유로 프랑스로 귀환하였다.

프랑스로 돌아온 필리프는 잉글랜드의 국왕인 리처드가 시리아에서 살라딘과 충돌하느라 국가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틈을 이용해 자신의 목표인 플랜태저넷 가문 타도[4]를 위해 다시금 플랜태저넷 왕가를 분열시켜 약화시키려 하였고 그 계략의 타겟은 리처드의 동생 왕제 이 되었다. 그러나 리처드 1세는 살라딘과 평화 협정을 맺고 예상보다 빠르게 귀국하여, 자신이 부재 중인 틈에 필리프에게 빼앗긴 영토를 다시 되찾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자 필리프는 이번에는 아키텡 공작가를 선동하여 리처드와 싸움을 붙여 리처드의 발목을 잡았고 그러던 중 리처드가 브르타뉴에서 조카 우서와 싸우다 전사하자 리처드의 동생인 왕제 존이 존 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렇듯 플랜태저넷 가문을 우환에 빠뜨려 약화시킨 필리프 2세는 존의 실정을 명분으로 삼아 봉건법 위반에 따른 존의 대륙령의 몰수를 선언했으며[5] 노르망디로 상륙한 존의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이후 앙주, 멘, 푸아투, 투란 등 대부분의 노르망디와 아키텡 영토를 점령하여 왕령지로 삼았다.

이후 복수의 칼을 갈던 존은 당시 필리프 2세의 계략에 의해 자신의 영역을 왕실 직할지로 빼앗기게 된 페르디낭 드 부르고뉴[6]가 필리프에게 큰 불만을 품게 된 것을 알고 그와 연계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4세를 끌어들이고 이 외에도 불로뉴 백작가, 브라반트 공작가 등의 여러 영주 세력들을 끌어들여 대규모 연합군을 구성, 약 3만에 달하는 전력으로 프랑스를 침공하였다.

이 때 프랑스 남부 지방을 순회 중이어서 자신의 본거지이자 수도인 파리를 비우고 있던 필리프는 존이나 오토 4세의 예상과는 달리 재빠르게 남부 친국왕파 영주 세력들을 규합하여 1만 5천여명에 달하는 병력을 구성하고 굉장한 속도로 북쪽으로 진군, 느려터진 진군 속도로 파리 북부를 제압하고 랑시엔 인근에나 와있던 오토 4세의 연합군을 부뱅 평야에서 맞닥뜨림으로써 결전을 강제하였다.[7]

이 부뱅 평야에서 필리프 2세가 지휘한 1만 5천여명의 프랑스 군이 오토 4세, 윌리엄 롱제스피, 페르디낭 드 부르고뉴 등이 지휘한 3만 연합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었는데 이 전투를 뱅 전투라고 하며 이 전투에서 패한 연합군 측은 오토 4세를 비롯한 신성 로마 제국 수뇌부만이 도주에 성공하고 연합군의 나머지 핵심 수뇌 인원들의 상당수가 필리프에게 사로잡혀 감옥살이를 하거나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이 전투 이후, 프랑스와 카페 왕조의 위용은 전 유럽에 드날리게 되었으며 필리프 2세가 원했던 왕권 강화 계획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후 필리프에게 거의 모든 프랑스 내의 영지를 빼앗기게되고 잉글랜드 본토 외에 남은게 없게 된 존이 계속 잉글랜드 국내에서 찌질거리다 잉글랜드 귀족들이 도저히 참지 못해 들고 일어나 존 왕을 협박해서 얻어낸 것이 마그나카르타, 대헌장이다.


4. 내정

그의 치세 대부분이 플랜태저넷 왕가와 싸워 땅을 뜯은 것으로 점철됨에도 불과하고, 옆 나라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는 달리 내정 면에서 상당히 우월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자치 도시(코뮌)를 조성하였고[8] 영주 세력들을 견제할 수 있는 관료 집단들을 육성하였다. 그리고 행정 재판관인 프레보를 억제하여 봉건적 무질서를 극복하고 중앙집권체재로 나아가는 길을 확보하였다. 마지막으로 파리를 수도로써 크게 확장시켰으며 대학을 지원 및 보호하는 등[9] 도시 미관에도 신경을 써 카페 왕조의 권위를 크게 신장시켰다.

5. 평가

본격 플랜태저넷 분쇄기

말 그대로 제대로 된 정치가. 오늘날 프랑스의 토대를 세웠다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다. 현실적인 정치가로서, 낭만적이고 여러 서사시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정치나 국가 내정은 개판 5분 전으로 처리한 리처드 1세와는 달리 욕을 먹을지언정 정치적 술수와 계략을 동원하여 프랑스 왕실 직할지를 넓혀 왕권을 강화시키고 프랑스에서의 잉글랜드의 영향력을 크게 축소시켰다. 전쟁에서도 비록 그리 많은 전투를 하지는 않았지만 부뱅 전투와 같은 굵직한 결정적 전투에서 으레 승리를 거두며 거의 패하지 않는 지휘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국가 내정 분야에서도 선전하여 여러 선진적인 조치를 실시했으며 이는 이후의 1세기 간 카페 왕조가 경제적, 정치적으로 부흥기를 맞는 기반이 되었으며 [10] 옆 나라 독일이 14, 15세기가 될때까지 계속 깡촌으로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11][12]

다만 어떤 로마 동인녀의 눈에는 멋쟁이 리처드와 적대하는 찌질이A로밖에 안보이는듯

6. 대중문화에서의 존엄왕 필리프

일반적으로 라이벌 격으로 묘사되는 리처드 1세에 비하자면 중세, 근세의 기사 문학에서는 거의 항상 악역 배역. 낭만적이고 기사의 의무, 기사도 등에 가치를 무겁게 두며 행동한 리처드에 비해 현실적이고 이해타산적이며 종교에 열정적이지도 않은 권모술수의 숙련가라는 점에 있어서 좀 비열한 이미지가 강했던 모양새다.

필리프2세.png
[PNG image (Unknown)]
징기스칸 4 일러스트

코에이징기스칸 4에서는 다른 능력치는 좀 안습이지만 전투력 하나는 최강인 리처드 1세, 전투력도 물론 수위권이지만 정치, 지략 부분에서 압도적인 필리프 2세 형식으로 이를테면 유럽판 우에스기 겐신, 다케다 신겐의 포지션을 구성해놓았다.[13] 게임 내에서의 군주들 중에서 사실 필리프 2세의 능력치는 최상위권에 들어가는 수준. 정확한 능력치는 94/90/98이라는 후덜덜한 능력치이다. 아무도 모든 능력치가 칭기즈 칸, 티무르, 살라흐 앗 딘조차도 모든 능력치가 90대가 된것이 한쪽만 되었있는것을 감안한다면... 본인 뿐만 아니라 부하로는 원래대로 라면 예루살렘에 있어야 할콘래드, 브리엔느같은 A~B+급 부하들이 있고 가끔 로빈 후드가 등용 될 때도 있다. 하지만 아들 루이 8세, 손자 루이 9세가 있는데 능력치는 좋지 않다. 그나마 루이 9세는 PK에서 상향이 되었지만 옆동네의 하인리히 6세프리드리히 2세에 비해 초라해 보이는건 어쩔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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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오귀스트. 라틴어로 하면 그 유명한 아우구스투스. 다만 오귀스트라는 별칭은 그가 8월에 태어나서 붙었다는 말도 있다.
  • [2] 사실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의 아들 리처드, 존과 형제와 다를 바가 없었다. 비록 피로 이어진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들 형제의 어머니 엘레오노르가 한 때 루이 7세와 결혼해서 딸 몇 명을 낳았기 때문이다.
  • [3] 실제로 필리프는 성격이나 종교에 대한 열정이 상당히 냉정하고 시니컬했다고 전해진다.
  • [4] 정확히는 프랑스 내에서의 플랜태저넷 가의 영향력 분쇄
  • [5]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했으므로 플랜태저넷 가문의 대륙령, 즉 프랑스 내의 영지를 몰수하겠다는 그런 논리
  • [6] 플랑드르의 영주였다.
  • [7] 아마도 존이나 오토 4세는 필리프가 북부를 포기하고 남부의 친국왕파 영주들과 연계하여 장기전으로 몰고 가거나 병력을 규합하더라도 산지나 요새에 틀어박혀 공성을 유도했으리라 예상했던 듯한데 오토가 필리프의 군세를 맞닥뜨리고 예상치 못함으로 인해 당황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실제로 이후 오토는 결전을 원하는 필리프를 상대로 수 차례 휴전 협정을 맺고저 시도했다. 결국 실패했지만.
  • [8] 이 코뮌에서 징발할 수 있게 된 보병 전력은 이후 부뱅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요긴하게 쓰였다.
  • [9] 이 대학에 대한 지원도 결국 카페 왕조에 유익한 쪽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 법학이 발전하게 되면서 프랑스 왕들은 영주들의 단순한 암묵적 대표가 아니라 국가의 최고 통솔자라는 성문화된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으며 동시에 과거 로마 시대의 최고 원수의 의미를 지닌 임페리움의 직함도 겸할 수 있었다.
  • [10] 이 때 프랑스의 경제 성장률은 산업혁명 전까지 한번도 깨지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기에도, 부르봉 왕조의 전성기에도!
  • [11] 이 무렵 신성 로마 제국은 땅만 넓었지 인구상으로는 프랑스의 3분의 1도 안되는 빛좋은 개살구와 같은 국가였다. 필리프 2세 이전까지의 프랑스와 달리 꽤 강력한 황권 덕분에 대외적인 위상을 갖출 수 있었던 것뿐...지금의 독일 인구를 생각하면 놀라울 따름.
  • [12] 참고로 현대 독일의 위엄쩌는 인구는 14세기 이후 급속도로 발전한 독일 지역의 상공업 덕분이다. 13세기 이후 17세기까지 독일의 인구는 무려 3배 이상 증가하는 반면 프랑스의 인구는 불과 20% 정도 증가하는데 그친다하지만 30년 전쟁 크리...
  • [13] 모르는 사람에게는 설명하자면 노부나가의 야망의 다게다 신겐은 천상기, 창조뺴고 능력치 1위이다. 즉 필리프 2세가 총능력치가 1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