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프랭크 토마스

last modified: 2015-04-01 03:52:15 Contributors


이름 Frank Edward Thomas, Jr.
생년월일 1968년 5월 27일
국적 미국
출신지 컬럼버스, 조지아
포지션 1루수/지명타자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9년 드래프트 1라운드 7번
소속팀 시카고 화이트삭스(1990~2005)
오클랜드 어슬레틱스(2006)
토론토 블루제이스(2007~2008)
오클랜드 어슬레틱스(2008)

시카고 화이트삭스 영구결번
No.35

1993~1994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MVP
데니스 에커슬리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프랭크 토마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모 본
(보스턴 레드삭스)

1995년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홈런 더비 우승자
켄 그리피 주니어
(시애틀 매리너스)
프랭크 토마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배리 본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내가 선수 생활을 시작할 때 30홈런 100타점을 때려내면 대단한 선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40홈런과 120타점을 목표로 했고 그것을 이뤄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선수들이 60개씩 홈런을 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나에게 평범한 선수라고 했다.

1990년대를 풍미한 메이저리그 최고의 강타자이며, 스테로이드 시대를 약물 없이 뚫고 지나온 청정타자다. 약물 시대를 지나오면서 그가 응당 받아야 할 존경과 인정을 못 받는 등 가장 많은 피해를 본 선수 중 하나. 2000년대 들어서 한 때 평가가 낮아지기도 했지만, 2000년대를 풍미했던 마크 맥과이어, 새미 소사, 라파엘 팔메이로, 배리 본즈 등 이 시기를 지배했던 타자들이 모두 약빨이었음이 드러나면서 2010년대 넘어서면서부터는 가치가 더 올라 오늘날에는 깨끗한 강타자로 다시금 존경받고 있는 선수. 그리고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공격 기록의 상당 부분에 이름을 남긴 선수이다. 별명은 빅 허트(Big Hurt).

야구를 좋아해서 자기 지명해주는 팀은 무조건 계약하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시즌인 1986년 드래프트에서는 뽑히지 못했다. 결국 미식축구로 유명한 오번 대학(Auburn University)에 미식축구 선수 장학금을 받고 진학했다. 195cm, 124kg의 거구인 토마스는 대학팀의 타이트엔드였지만 야구가 좋아서 결국에는 1989년 프로 지명을 받아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입단했다.

마이너리그를 빠르게 졸업하고 1990년 메이저리그 맛을 본 후, 영광의 7년을 보내게 된다. 이 시기 프랭크 토마스는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는 성적을 거두는데, 3할 - 20홈런 - 100득점 - 100타점 - 100볼넷을 7년 연속 기록한 것. 1991년부터 1997년까지 이 기록을 세웠는데, 놀라운 것은 1994년에 파업으로 113경기만 치렀는데도 이 기록을 달성했다는 것이 기록을 달성한 유일한 선수라는 점이다. 그가 이 기록을 세우기 전에 이 기록을 가진 사람은 6년 연속 기록한 테드 윌리엄스였다. 이 시기 토마스의 맹활약을 바탕으로 팀은 1983년 이후, 10년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에도 성공했다. 자연히 1993년과 1994년[1] 아메리칸리그 MVP는 토마스의 차지. 이 때 그의 별명인 빅 허트도 생겨났다. 화이트삭스 경기를 중계하던 캐스터인 켄 해럴슨이 상대에게 또 큰 상처(Big Hurt)를 줬다고 붙여준 별명. 전성기 그의 포스는 2001~10년의 알버트 푸홀스와 맞먹는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1997년, 팀에 악동 알버트 벨이 5년 5500만 달러의 사상 최고 연봉을 받고 입단하면서 문제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라이벌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4번타자 벨을 빼온 가장 큰 목적은 결국 지구 우승이었다. 1996년 85승 77패로 아깝게 와일드카드를 놓친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우승을 위해 지름신이 강림하여 라이벌팀의 4번타자를 빼왔고, 97년에는 벨이, 98년에는 토마스가 다소 부진하긴 했지만 둘이 합쳐 60홈런 200타점을 2년 연속으로 합작한 무시무시한 클린업의 위력을 보였다. 문제는 이런 빠따를 받쳐주지 못한 투수진의 부진과, 입단 때부터 자기보다 고액 연봉자가 나오면 연봉인상 해주거나 FA가 된다라는 독소조항을 달고온 벨이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자 2년만에 팀을 떠나버린 것.야심차게 영입한 벨-토마스 원투펀치는 2년만에 해산됐지만 토마스의 기량은 녹슬지 않아 99년 부상으로 결장하면서 끊어지긴 했지만 8년 연속 100볼넷 100타점이라는 무시무시한 OPS 머신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98~99년 들어서면서 체중이 늘어나면서 기량하락이 시작되어 98년에는 3할 타율이 무너지고, 99년에는 3할을 쳤는데 홈런이 줄어버렸다. 폴 코너코가 이적하면서 지명타자로 전환한 2000년에 재기선수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부활하는 듯 했다.

다만, 벨의 이탈과 함께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2000년 95승을 거두며 플레이오프에 올라가지만 디비전시리즈에서 0-3 스윕을 당하고 만다. 문제는 토마스 본인이 3경기동안 단 한개의 안타도 치지 못하는 역적질을 하면서 팀의 허무한 탈락의 원흉이 된 것. 거기다 불운이 한번 더 터지고 만다. 2001년 4월 27일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경기때 평소 폴 코너코가 뛰던 1루수 자리에 선발로 나온 프랭크 토마스는 2회초 2사 만루에 들어선 스즈키 이치로가 때린 1루 강습 타구를 다이빙 캐치로 잡으려다 실패하고, 그대로 일어나지 못한채 실려나가고 말았다. 결과는 오른팔 삼두근이 끊어지는 중상. 결국 시즌 아웃되고 말았다.

결국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고, 2002년 부상에서 회복하여 돌아왔지만 타율이 7푼가까이 떨어진 .265로 시즌을 마감했다. 이때부터 화이트삭스는 팀의 중심을 토마스가 아닌 TKO트리오의 일원인 폴 코너코, 매글리오 오도네즈, 카를로스 리등 신예 강타자들로 바꾸려고 했다. 이때부터 그동안 맹활약 했음에도 벨보다 낮은 연봉을 받는걸 불만족했던 토마스가 폭발하여 팀과 사이가 틀어졌다. 그래서 토마스는 2000년 시즌이 끝나고 구단과 계약을 했지만 자기의 기량이 떨어지면 연봉이 줄어드는 기량 감퇴 조항을 달았는데 이는 메이저리그 역사에 있어서 손꼽히는 최악의 선택 중 하나였다. 부상으로 날린 2001년을 빼면 2002~03년에는 타율은 떨어졌지만 홈런 생산은 그런대로 유지했다.

아직 잔여계약이 남아있어 시즌을 뛰긴 했지만 결국 타격 정확도를 회복하지 못한 토마스는 2004년, 2005년에 또 다시 부상으로 부진했고, 단장과의 갈등도 더 심해졌다. 문제는 이 2005년이 화이트삭스가 88년만의 월드시리즈 우승의 감격을 누린 시즌이라는 것. 정작 프랜차이즈 스타인 토마스는 부상으로 인해 포스트시즌에서는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고, 이 시즌을 끝으로 화이트삭스를 떠났다. 화이트삭스에서는 은퇴까지 종용했지만 토마스는 2006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데 성공한다. 단돈 50만불을 받고 입단한 오클랜드에서 지명타자[2]로 39홈런 114타점을 터뜨리면서 클라스를 제대로 보여준다.[3] 토마스의 가세덕에 팀을 지구 우승을 이끌고 디비전 시리즈에서는 요한 산타나를 상대로 홈런 두방을 터뜨리는 등의 활약으로 리그 챔피언쉽 시리즈까지 이끌었다. 하지만 이 때의 활약은 정말 마지막 불꽃이었고 선수생활 마지막을 보낸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는 07년에 0.277타율에 26홈런 95타점을 기록했고 500홈런을 넘겼지만, 08년에는 부상으로 부진을 거듭하며 결국 쓸쓸하게 은퇴하기에 이르렀다.

화이트삭스의 공격 부분 중 상당수가 그가 1위다. 홈런, 득점, 2루타, 타점, 총루타, 볼넷, 출루율, 장타율 부분에서 토마스는 모두 1위 기록을 가지고 있다. 아울러 통산 3할과 500홈런을 기록하고 은퇴한 역대 7번째 선수. 또 한 가지 더 500홈런과 1600볼넷을 얻고 은퇴한 여섯 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 다만 화려한 공격력에 비해 수비력이 좋지 않았다. 젊을때는 그나마 리그 평균 1루수보다 조금 못하는 정도였지만 나이가 점점 들고 몸무게가 130kg까지 늘어나면서 1루수에서도 밀려나 지명타자로 주로 활동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약물에 대해 가장 깨끗한 선수다. 약물 조사를 담당했던 미첼 위원회에 자진해서 나가 조사에 응했고, 1995년부터 약물 검사 도입을 주장했던 선수였다. 그랬기 때문에 약물로 만들어진 홈런 기록이 밝혀진 이후, 토마스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더 높아졌다. 또한 약쟁이라 불리는 선수들이 30대 중~후반에도 전성기를 맞은 반면 토마스는 30세를 기점으로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이 찾아오면서 기량이 떨어졌기 때문에 약물과는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있다.

2014년 명예의 전당 투표 후보로 등록된 첫해, 83.7% 득표율로 당당히 첫턴 입성에 성공했다. 같은해 첫 턴 입성에 성공한 그렉 매덕스톰 글래빈에 묻혀 주목을 덜 받는 감이 있어 아쉽지만, 첫턴 입성은 그야말로 "명예 중의 명예"이다.

frank_thomas_CellularField.jpg
[JPG image (Unknown)]


화이트삭스와 안 좋게 결별했지만, 은퇴 후에 화해해서 2010년 은퇴 선언도 화이트삭스에서 했고, 그의 등번호 35번은 2010년 8월 30일 성대한 행사 속에서 영구결번 되었으며 그의 사진이 US 셀룰러 필드 외야에 남게 되었다.[4] 영구결번식에서 토마스는 기념 연설 도중 눈물을 흘렸을 정도. 2011년에는 화이트삭스가 그의 동상을 홈구장인 US셀룰러필드 외곽에 건립하기로 결정했을 정도로 극진히 모시는 중. 토마스가 명전에 입성하자 토마스는 당연히 화이트삭스 모자를 선택했고, 화이트삭스 구단도 이에 관해 별도의 페이지를 만들어 기념할 정도.

여담으로 그의 겉모습에서 풍기는 무서운 이미지 별명인 '빅 허트'(Big Hurt)와는 달리 실제로는 성격이 상당히 온화한걸로 알려져 있다. 지역사회에 봉사활동을 비롯해 자선사업 활동에 적극 나서는 선수로 유명하다. 하지만...


저건 공을 치라고 드는 물건이 아닌데요

대기타석에서 몸을 풀때 연습용 배트가 아닌 쇠파이프를 휘둘러대는 것으로 유명하다. 투수들이 저거 휘두르는거 보고 지릴뻔
----
  • [1] 94년 내셔널리그 MVP는 제프 배그웰이 받았는데 프랭크 토마스와 생일이 같다.
  • [2] 빌리 빈 단장은 머니볼 철학에 걸맞게 지명타자로 주로 마이크 피아자나 스캇 해티버그등 경험많고 선구안이 좋지만 나이때문에 재계약에 실패한 노장들을 저렴한 가격에 후려쳐서 영입한뒤 체력안배를 해가면서 쓰는데,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영입이 프랭크 토마스였다.
  • [3] 2006년에 시카고 화이트삭스 戰 원정경기에서 셀롤러필드에서 친정팀 상대로 2홈런을 때려내기도 했다. 당시 화이트삭스 팬들은 그가 타석에 등장하면 다들 기립박수 쳤었다.
  • [4] 프랭크 토마스 사진 위의 the catch는 마크 벌리퍼펙트 게임 9회에, 드웨인 와이즈가 홈런성 타구를 잡아낸 위치를 나타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