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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바레시

last modified: 2015-03-23 22:17:58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플레이스타일
3. 선수 시절
4. 국가대표
5. 감독시절



1. 개요



프랑코 바레시
(Franco Baresi)
생년월일 1960년 5월 8일
국적 이탈리아(Italy)
출신지 레시아 트라바글리아토
포지션 센터 백(Centre-back)
유스팀 AC 밀란(1972~1977)
선수 경력 AC 밀란(1977~1997)
감독 경력 AC 밀란 유스(2002~2008)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쥬세페 베르고미
(1986~1991)
프랑코 바레시
(1991~1994)
파올로 말디니
(1994~2002)

AC 밀란 영구 결번
No. 6


AC 밀란의 영원한 카피탄[1]
프란츠 베켄바워, 파올로 말디니, 가에타노 시레아, 니엘 파사렐라, 비 무어, 리아스 피게로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대한 수비수


최후의 리베로[2]

2. 플레이스타일


다른 리베로형 수비수들, 예를 들어 베켄바워나 시레아, 최근의 네스타 등과의 선수들과 비교했을 때는 상당히 평범한 대인마크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 받는다. 하지만 엄청난 공간 제단 능력과 동료 이용하는 플레이 그리고 타이밍을 포착하는 탁월한 능력등을 통해서 역사에 남는 수비수이자 리베로가 되었다. 그가 범접할 수 있는 테크닉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때다 싶을때는 순식간에 드리블로 공간을 도약하여 자신의 진형 최후방에서 상대 진형 최전방 까지 넘어가는 그런 플레이를 보여줬다. 94년 월드컵 결승전은 프랑코 바레시가 어떤 선수인지 하나로 응축한 그런 경기라고 볼 수 있겠다.
pk 실축 말고요.

https://www.youtube.com/watch?v=boPQNpPvJq0


3. 선수 시절


그를 상징하는 별명은 Piscinin

유스시절, 선수시절 전부 밀란만을 위해 헌신했으며 2번의 강등에도 불구하고 팀을 지탱했으며,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구단주 취임 후 아리고 사키 시절 오렌지 삼총사를 비롯한 말디니, 코스타쿠르타, 타소티, 에바니등과 함께 역대 최강의 팀으로 꼽히는 밀란 제너레이션을 구축하고 팀의 주장으로 전세계를 호령하였다.

1974년 형인 쥬세페 바레시를 따라 인테르에서 입단테스트를 하지만 키가 작아 입단 테스트에서 떨어지게 되고, AC 밀란에서 전설인 오바니 트라파토니[3], 지아니 리베라 앞에서 플레이를 펼쳐보이고, 150만 리라 + 키가 1cm 자랄시 100만리라 추가 라는 해괴망측한 계약을 체결하고 AC 밀란 유스팀에 입단한다.[4] 그 후 밀란의 전설인 스웨덴 삼총사 중 한명인 스 리드홀름의 지도하에 기량이 급성장하고, 1977년 18세의 나이로 세리에 A에 데뷔하고, 곧바로 천부적인 재능과 실력으로 주전을 차지하고, 78-79 시즌 스쿠데토를 들어올리는데 커다란 공헌을 한다.

하지만... 당시 밀란 구단주인 리체 콜롬보SS 라치오와의 경기에서 승부조작을 했다가 발각되었고, 팀은 세리에 B로 강등당하게 됨으로써 주전 선수들이 타팀으로 이적하지만 바레시는 에바니, 타소티등과 남아 팀을 지키면서 세리에 A 승격을 이끌지만, 승부조작의 여파로 선수들은 계속 떠나고, 팬들도 등을 지면서 이듬해 재차 세리에 B로 강등돼고 만다. 바레시를 눈여겨 보고있던 삼프도리아인테르가 바레시를 영입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는 모든 조건을 뿌리치고 팀에 남아 다시금 세리에 B 우승을 차지하며 팀을 세리에 A로 복귀시킨다. 이 때의 모습을 본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속에서 바레시는 20대 초반의 나이로 상처입은 명문팀의 주장이 된다.

팀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바레시에게 하늘이 축복을 내렸는지 1986년 당시 신흥 언론 재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중위권 팀이 돼어버린 몰락한 명문 AC 밀란을 매입하면서 막대한 자금을 풀기 시작하면서 다시금 강호로 떠오른 밀란은 유럽을 다시금 정복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코파 이탈리아에서 아리고 사키가 이끄는 2부리그 팀인 파르마 FC에게 개박살 나면서 자존심을 구겼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베를루스코니는 사키의 철학에 매료되어 당시 밀란 감독이자 전설인 스 리드홀름을 경질하면서 까지 사키를 감독으로 임명하였고, 이듬해 마르코 반 바스텐, 카를로 안첼로티, 루드 굴리트, 베르토 도나도니등을 폭풍영입하면서 스쿼드를 보강하였고, 사키는 바로 리그우승으로 회답면서 바레시는 9년만에 스쿠데토를 들어올리고, 기세를 몰아 88, 89년 UEFA 챔피언스 리그를 2연패하면서 유럽을 지배한다.

사키가 떠난 이후에도 밀란의 파죽지세는 계속 되었고, 파비오 카펠로 부임 이후 90-93년동안 세리에 A 58경기 연속 무패기록을 세우지만 89년 챔스 이후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계속된 불운으로 우승컵을 놓치고[5] 결국 94년 세계 최강팀 중 하나라 꼽히는 FC 바르셀로나 드림팀 1기를 상대로 4:0 승리를 거둠으로써 3년만에 챔스 우승을 거둔다.

이 이후에 밀란 제네레이션은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밀란은 상당히 과도기적인 방황을 지속하게 된다.

그 시절에 당한 참패가 바로 산시로에서 유벤투스에게 6:1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털렸을 때이다. 바레시 역시도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경기라고 말할 정도였던 이 대참사에서 바레시는 슬슬 유망주티를 벗어나 전성기를 향해 달리고 있는 크리스티안 비에리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털리고 말았다. 그 경기 이후 바레시는 슬슬 은퇴를 결심하게 되고 96-97 시즌이 끝나고 은퇴를 선언한다. 많은 밀라니스타들이 그의 은퇴를 슬퍼하고 기념해주었다. 당연히 영구결번이 선언되었다.

4. 국가대표


국가대표팀 커리어가 상당히 다이나믹 하다. 유로 80에 만 20살의 나이로 이탈리아 국가 대표팀에 발탁되어 국제 메이저 대회에 데뷔하지만 동포지션에는 이미 아주리 군단에는 당대 최고의 리베로인 가에타노 시레아가 있었다. 우리 시대로 치면 제법 뛰어난 공격전개와 훌륭한 수비능력을 보여주는 유망주가 아주리 군단에 데뷔했는데 하필이면 경쟁상대가 전성기 네스타(...) 인 격. 이후 1982년 월드컵에도 참가하지만 베아르조트 감독의 선택은 당연히 절정의 기량을 펼치는 시레아였고 바레시는 조국의 44년만의 3번째 우승을 후보로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이때 당시 만 20세가 안된, 훗날 당대 최고의 파워 디펜서로 이름을 떨치며 대표팀에서는 바레시와 파트너였고, 인테르에서만 뛴 레전드인 쥬세페 베르고미가 브라질 전에서 강렬한 월드컵 데뷔를 하며 결승전까지 뛰며 우승이 한 축이 된 것을 생각하면 역시 그에겐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도 영원히 콩라인인 말디니보다 어디야.

유로 84에서는 이탈리아가 애초에 본선을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넘어가자. [6]

86년 월드컵에서는 바레시 자체가 시레아가 공고한 대표팀에 들어가서 후보를 하기를 좀 꺼려한 것도 있었고 베아르조트 감독도 이런 바레시를 굳이 불러야할 필요성을 못느껴 엔트리에 탈락한다.

그리고 86년 월드컵 이후 베아르조트 감독과 시레아가 국가대표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바레시의 국가대표 인생도 만개하기 시작한다. 이 당시의 바레시는 절정의 나이였고 밀란 제네레이션이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척보면 딱아는 후배 파올로 말디니도 국가대표에서 중용되면서 유로 88에 당당히 주전으로 참가하고 자국에서 열리는 대망의 1990 월드컵에서는 키퍼 왈테르 젱가, 센터백에 바레시와 국가대표 주장인 베르고미 조함 그리고 좌우 풀백에 파올로 말디니와 리카르도 페리 라는 말도안되는 진형으로 단일 월드컵 최장기간 무실점. 517분 무실점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한다. 하지만 아주리는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에게 그들의 최초의 실점이자 통한의 동점골을 허용했고, 승부차기에서 패배하여 3-4위전으로 빠져서 3위로 대회를 마무리하고 만다. [7]

유로 92는 지역예선에서 탈락하며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지역 예선 도중 당시 주장이었던 베르고미가 자신의 교체 투입에 불만을 품고 비신사적인 테클을 함으로써 국대에서 사실상 강제 은퇴 당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주장직을 수행한다.[8]


이후 1994 미국 월드컵. 주장으로 나선 바레시는 조별예선 2차전인 노르웨이전에서 부상을 당한다. 이후 아주리 군단은 바죠의 크레이지 모드와 팔리우카, 말디니 코스타쿠르타 등이 혼신의 방어를 펼쳐 기어의 결승전에 오른다. 준결승전에서 코스타쿠르타가 경고누적으로 결승전에 뛰지 못하지만 바레시는 결승전에서 복귀한다. 이때 결승전으로 보면 바레시는 엄청난 퍼포먼스로 브라질의 공격을 차단한다. 결승전 MoM은 말디니였지만 바레시가 보여준 엄청난 수비는 단연 압권. 경기를 보다보면 바레시와 말디니에게 완전히 막힌 호마리우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결승전 자체가 하나의 바레시 스페셜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혼신의 수비 때문이었을까. 결승전 패널티킥에서 첫 키커로 나서지만 실축하고 만다.[9] 하지만 당시 마라도나조차 우위를 접하기 힘든 베르토 바죠의 맹활약을 봐왔던 팬들은 바죠의 홈런을 보게 되고 바레시의 실축은 그대로 잊혀졌다.[10][11] 바죠의 실축 이후에 얼굴을 감싸 안고 서럽게 우는 바레시를 보고 많은 아주리 팬들이 가슴 아파했다. 어쨌든 94년 월드컵 이후 국가대표를 은퇴한다.


5. 감독시절


2002년 풀럼 FC 단장을 맡았고, 그 이후 AC 밀란유스팀을 지도했다.[12] 현재는 지도자에서도 은퇴한 상태.


더 많은 클래식 해축팬, 아주리 팬들, 밀라니스타들의 추가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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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또다른 카피탄 파올로 말디니 고별 홈경기인 08-09시즌 AS 로마전에서 밀란의 울트라스는 "우리들의 영원한 캡틴은 바레시다!"라는 문구를 내걸 정도.이건 칭찬이 아니다.이 광경을 본 당시 로마 감독이던 치아노 스팔레티는 격분했고, 유명한 축구계 전설들까지 이 걸게를 까댔다.
  • [2] 여기에 마티어스 잠머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바레시를 최후의 리베로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잠머는 리베로로서의 전성기에 유리몸이 겹쳐 너무 빨리 은퇴했다는 점을 든다.
  • [3] 선수 시절 은퇴시즌을 제외한 전 시즌을 밀란에서만 뛴 밀란의 전설. 감독으로써 밀란을 지휘한 적은 없고, 막상 지휘한 팀은 라이벌 유벤투스(...). 그리고 그 유벤투스는 트라파토니 시절 국내무대와 유럽무대에서 깡패짓을 하면서 황금기를 구사하였다.
  • [4] 당시 키는 164cm였으며 후에 176cm까지 자란다.
  • [5] 91년 결승전 상대이자 우승팀인 마르세유는 리그 승부조작 및 약물도핑혐의로 우승 박탈등의 중징계를 받지만 챔피언스 리그 우승컵은 그대로 들고 있다.
  • [6]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이 있는데 84년 아주리 군단 A매치 데이터를 보면 가에타노 시레아와 프랑코 바레시가 동시 기용된 경기도 종종 있다. 영상 자료를 찾을 수 없어 자세한 진형은 알 수 없지만 만약에 둘다 모두 리베로로 기용했다면 더블 리베로 진형이라는 사상 초유의 전형이 나오게 된다. 더블 플레이메이커도 힘든 판국에 더블 리베로라니. 지금은 옛날 같은 위상이 아니라지만 여로모로 수비 초강국 이탈리아의 위엄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하겠다.
  • [7] 당시 우승팀인 서독은 5승 2무였고, 이탈리아는 6승 1무였다. 단한번의 무승부가 우승을 좌절시킨 샘.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압도적인 수비라인과 자국 버프, 그리고 서독의 지독한 아주리 징크스를 생각하면 아주리가 결승전에 진출했다면 그들의 4번째 우승은 16년 일찍 당겨졌을 가능성이 높다.
  • [8] 하지만 베르고미는 98년 월드컵에 엔트리에 복귀한다. 사실 혹시나 하는 상황을 위한 후보로서 뽑힌 것이었는데 조별예선에서 네스타가 부상으로 아웃되면서 노장인 베르고미가 대체로 뛰게된다.
  • [9] 사실 연장 종료 직전에 다리 경련으로 실려나가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바레시를 첫번째 키커로 투입한 아리고 사키의 결정이 의문이지만 아마도 주장으로서 분위기를 가지고 오라는 의미였을듯.
  • [10] 참고로 바죠는 패널티킥 최강자라 불릴만큼 패널티킥 성공률이 매우 높았다. 문제는 중요한 무대에서...
  • [11] 우리나라로 치면 주장인 홍명보와 공격의 중심인 황선홍이 실축한 꼴이다.
  • [12] 2002~2006 프리마베라(20세 이하), 2006~2008 베레티(19세 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