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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베켄바워

last modified: 2015-03-31 17:17:22 Contributors




1974년 서독 월드컵, 결승전. 세기의 대결이 펼쳐졌다. 축구 역사상 다시는 나오지 않을 라이벌 두 명이 격돌했다.

Contents

1. 프로필
2. 커리어
3. 커리어 (감독)
4. 개요
4.1. 클럽 커리어
4.2. 국가대표 커리어
4.3. 은퇴 후의 커리어
4.4. 플레이스타일
4.5. VS 요한 크루이프
5. 기타
6. 기록
6.1. 선수 기록
6.2. 감독 기록

1. 프로필

F.C. 바이에른 뮌헨 명예회장
프란츠 베켄바워
(Franz Beckenbauer)
생년월일 1945년 9월 11일
국적 독일
출생지 뮌헨
포지션 디펜더
유스팀 SC 1906 뮌헨 (1951 - 1959)
FC 바이에른 뮌헨 (1959 - 1964)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1964/65 - 1976/77)
뉴욕 코스모스 (1977-1980)
함부르크 SV (1980/81 - 1981/82)
뉴욕 코스모스 (1983)
지도자 서독 국가대표팀 (1984 - 1990)
마르세유 (1990/91)
바이에른 뮌헨 (1993/94)
바이에른 뮌헨 (1995/96)[1]
등번호 뮌헨시절과 70년대 서독국대에서는 5번

1966 Ballond'or
수상
보비 찰튼
2위
에우제비우
3위
프란츠 베켄바워
1972 Ballond'or
수상
프란츠 베켄바워
2위
게르트 뮐러
3위
터 네처
1974 Ballond'or
수상
요한 크루이프
2위
프란츠 베켄바워
3위
지미에시 데이나
1975 Ballond'or
수상
레흐 블로힌
2위
프란츠 베켄바워
3위
요한 크루이프
1976 Ballond'or
수상
프란츠 베켄바워
2위
프 렌센브링크
3위
보 빅토르
1966 독일 올해의 선수
수상
프란츠 베켄바워
1968 독일 올해의 선수
수상
프란츠 베켄바워
1974 독일 올해의 선수
수상
프란츠 베켄바워
1976 독일 올해의 선수
수상
프란츠 베켄바워

FC Bayern München XI[2]
FW
지오반니 에우베르
FW
칼 하인츠 루메니게
FW
게르트 뮐러
MF
로타어 마테우스
MF
슈테판 에펜베르크
MF
메멧 숄
DF
파울 브라이트너
DF
프란츠 베켄바워
DF
한스-게오르크 슈바르첸벡
DF
클라우스 아우겐탈러
GK
제프 마이어

FC 바이에른 뮌헨 명예의 전당
Der 'Kaiser' (황제)
프란츠 베켄바워
Der 'Bomber der Nation' (폭격기)
게르트 뮐러
Die 'Katze von Anzing' (안칭의 고양이)
제프 마이어
Der 'Macher' (창조자)
울리 회네스
Der 'Visionär' (공상가)
칼 하인츠 루메니게
Der 'Leitwolf' (늑대사령관)
로타어 마테우스
Der 'Chef' (지배자)
슈테판 에펜베르크
Der 'Samba-Stürmer' (삼바공격수)
지오반니 에우베르
Der 'Beständige' (꾸준함)
롤란트 볼파르트
Der 'Libero' (리베로)
클라우스 아우겐탈러
Der 'Mr. Europacup' (Mr. 유로파컵)
디터 회네스
Der 'Stratege' (전략가)
파울 브라이트너
Der 'Kaisers Bodygaurd' (황제의 기사)
한스-게오르크 슈바르첸벡
Der 'Titelsammler' (타이틀수집가)
비셴테 리사라수
Der 'Rekordmeister' (기록챔피언)
메멧 숄
Der 'Titan' (거인)
올리버 칸

FC 바이에른 뮌헨 역대 주장
르너 올크
(1965~1970)
프란츠 베켄바워
(1970~1977)
제프 마이어
(1977~1979)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유프 데어발
(1978년 - 1984년)
프란츠 베켄바워
(1984 - 1990)
베르티 포크츠
(1990 - 1998)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다."
"The strong one doesn't win, the one that wins is strong."[3]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4]

영원한 황제 (Der Kaiser)

펠레와 함께 축구역사에 황제로 기억되는 유일한 선수[5]

수비수의 개념 자체를 뒤바꿔버린 전설적인 수비수[6]

그리고 축구 역사상 가장 큰 이력을 남긴 인물[7]

2. 커리어

그야말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 커리어 끝판왕.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우승 : 1968–69, 1971–72, 1972–73, 1973–74
DFB - 포칼 우승 : 1965–66, 1966–67, 1968–69, 1970–71
레기오날리가 우승 (당시에는 2부 리그) : 1964–65
UEFA 유러피언 챔피언스 컵 우승 (현재 UEFA 챔피언스리그의 전신) : 1973–74, 1974–75, 1975–76
UEFA 위너스 컵 우승 (현재 UEFA 슈퍼컵의 전신) : 1966–67
인터컨티넨탈 컵 우승 (현재 FIFA 클럽 월드컵의 전신) : 1976

독일 국가 대표
FIFA 월드컵 우승 : 1974
UEFA 유로 우승 : 1972

개인 수상
발롱도르 수상 : 1972년, 1976년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수상 : 1966년, 1968년, 1974년, 1976년
20세기 최고의 팀 선정 : 1998년
FIFA 월드컵 올 타임 베스트 팀 선정 : 1994년
FIFA 월드컵 드림팀 선정 : 2002년
FIFA 월드컵 올스타 팀 선정 : 1966년, 1970년, 1974년
FIFA 월드컵 영 플레이어 어워드 : 1966년
UEFA 유로 올스타 팀 선정 : 1972년, 1976년
FIFA 훈장 : 1984년
FIFA 공로상 : 2004년
FIFA 선정 역대 최고의 선수 100인 : 2004년
FIFA 회장상 : 2012년
UEFA 회장상 : 2012년
Laureus 공로상 : 2007년
NASL 최고의 선수 상 : 1977년
Marca Leyenda 상 : 2012년
Bravo Otto 2위 : 1976년
Bravo Otto 3위 : 1974년, 1975년
레지오날리가 (당시의 2부 리가) MVP : 1965년

3. 커리어 (감독)

독일 국가 대표
FIFA 월드컵 우승 : 1990

마르세유
그앙 1 우승 : 1990-91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우승 : 1993-94
UEFA 컵 우승 : 1995-96

감독으로서의 개인 수상
월드 사커 선정 올해의 감독 : 1990년

4. 개요

4.1. 클럽 커리어


바이에른 뮌헨 선수시절 발롱도르 수상을 자축하는 베켄바워

제2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의 폐허가 된 뮌헨에서 태어나, 1959년 바이에른 뮌헨 유스팀과 계약하고 1964년 1군 데뷔전을 가졌다. 당시 바이에른 뮌헨은 분데스리가 2부리그에 속해있던 팀이었는데, 베켄바워의 1군 데뷔와 동시에 1부리그로 승격하는 데 성공한다.[8]

베켄바워의 가세와 동시에 1부리그에 진입한 바이에른은 본격적인 몸집 불리기에 나선다. 이 때 새로이 가세한 멤버들이 바로 게르트 뮐러제프 마이어. 공격에 뮐러 - 수비에 베켄바워 - 골리에 마이어라는 정신나간 조합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당대 최고의 3인방을 스쿼드에 갖춘 바이에른 뮌헨은 신흥강호를 넘어서 분데스리가를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1966년 바이에른은 DFB 포칼(분데스리가 컵대회)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이듬해인 1967년, 베켄바워는 거의 평생을 함께할 파트너를 얻는다. 바이에른 유스에서 올라온 강철 같은 스토퍼 슈바르첸벡으로 베켄바워는 그와 함께 철벽의 중앙수비라인을 완성시키고 DFB 포칼과 UEFA 컵위너스컵마저 제패한다. 베켄바워는 1968년부터는 바이에른의 주장 완장을 차기 시작했는데, 하늘의 뜻인지 바이에른 뮌헨은 그 해, 역사상 처음으로 마이스터샬레[9]를 들어올린다. 이후 1977년 분데스리가를 떠나기까지, 바이에른 뮌헨에 분데스리가 우승 4회, DFB 포칼 우승 4회 및 챔피언스 리그 3연속 우승[10], 클럽월드컵 우승 1회 등 수많은 트로피를 안겨주기에 이른다.

1977년, 20여년을 몸담았던 바이에른 뮌헨을 떠나 "또 다른 황제" 펠레와 마찬가지로 당시 축구 불모지로 꼽히던 미국에 진출한다. 미국리그에 진출하고 4시즌 동안 3번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베켄바워는 1980년 다시 독일로 돌아와 이번엔 함부르크 소속으로 마이스터샬레를 들어올린다. 그리고 1983년, 마침내 "카이저"는 영광에 가득했던 커리어의 마침표를 찍는다.

여기까지 읽어봤다면 알겠지만, 소속했던 모든 클럽팀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충격과 공포인데, 여기에서 끝났으면 좋겠지만...

4.2. 국가대표 커리어


1974 서독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황제의 자리에 오르다

베켄바워의 첫 메이저 국제대회는 1966 잉글랜드 월드컵이었다. 당시 독일(서독)은 결승전에서 잉글랜드에게 아쉽게 석패했다.[11] 결승전에서도 베켄바워는 보비 찰턴의 1:1 마크를 명 받아 당시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로 꼽히던 찰턴과의 맞대결에서 크게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결국 찰턴이 이끄는 잉글랜드가 승리를 거뒀으니 찰턴의 판정승이라고 볼 수 있다. 경기 후에 베켄바워 본인도 "찰턴이 나보다 아주 조금 나았기 때문에 잉글랜드가 승리를 거뒀다"라고 했다. 하지만 그 당시 찰턴은 준결승전에어 에우제비오가 이끄는 포르투갈을 상대로 결승골을 뽑아내고, 66년 발롱도르를 수상하는 등 당대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였고, 새까맣게 어린 베켄바워가 거의 대등하게까지 버텨냈다는건 대단한 의미가 있다. 베켄바워 본인은 해당 대회에서 4골을 터트리며 대회 득점 3위(응?)에 랭크되었으니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할 수 있다.

1970년 월드컵은 전대회 우승팀이자 독일로서는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잉글랜드와의 8강전이 명장면으로 꼽힌다. 베켄바워는 감독의 명에 따라 4년 전처럼 1:1로 찰턴을 마크했지만, 선수 생활의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던 찰턴은 공격가담과 패스전개로 유명한 베켄바워가 오로지 수비에 전념하게 만들면서 중원싸움을 압도했고 그로 인해 잉글랜드가 2:0으로 경기를 리드하고 있었다. 이때, 잉글랜드 역사상 최고의 감독중 하나로 꼽히던 앨프 램지는 노장 찰턴의 체력 안배를 위해 찰턴을 교체시킨다. 찰턴의 강력한 압박과 중원장악에서 풀려나 자유를 찾은 베켄바워는 최후방에서부터 경기를 집어삼켰고, 추격골을 성공시키면서 경기를 뒤집는 발판을 마련한다. 연이은 우베 젤러와 연장전 게르트 뮐러의 결승골로 결과는 3:2 독일의 연장 승리였다. 준결승에서 독일은 연장전서만 5골이 터지는 혈투 끝에 이탈리아에게 4:3으로 패배하며 3위에 그쳤으나, 당시 경기에서 베켄바워는 쇄골이 깨지는 부상을 입었음에도 연장전 전후반까지 풀타임 소화라는 실로 공포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12]

1972년 유럽선수권. 무트 쉰 감독은 지금껏 외면하던 황제의 기사 슈바르첸벡을 드디어 대표팀에 등용했고, 눈만 마주쳐도 뜻이 통하는 파트너와 함께한 베켄바워가 처음으로 국가대항전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1974년 독일 월드컵. 베켄바워에게 있어선 절실한 대회였다. 결승까지 올랐던 첫 번째 대회는 웸블리 골이라는 석연찮은 판정 끝에 패배했고, 두 번째 대회는 쇄골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음에도 연장 120분 풀타임을 뛰는 투혼을 발휘했으나 연거푸 벌어진 연장 혈투를 버티지 못하고 팀이 석패했다.

독일은 승승장구하며 결승까지 올라갔고, 이 월드컵의 결승전은 그야말로 결승전답게, 지금도 역대 월드컵 최강 스쿼드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두 팀인 소위 클래식 네덜란드클래식 독일이 제대로 맞붙은 대회. 거두절미하고, 베켄바워는 결승전에서 요한 크루이프네덜란드를 물리치고 드디어 월드컵을 들어올리는 데 성공한다. 72년 유럽선수권과 74년 월드컵 연속우승으로 독일은 최초로 대륙선수권과 월드컵을 나란히 우승한 국가로 그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즉, 국가대항전에서도 얻을 수 있는 트로피는 다 얻은 셈이다. 이쯤되면 그냥 공포다.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찍은 스탯은 103경기 14골.

4.3. 은퇴 후의 커리어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감독으로 다시 정상에 오르다

1983년 현역 은퇴하더니만 이 사람, 이듬해인 1984년부터 유프 데어발의 후임으로 독일 국가대표 감독직을 덥썩 맡는다(응?). 그러더니 자신의 첫 메이저대회를 1986 월드컵 준우승을 만들어 세상을 놀라게 하더니, 결국 1990 월드컵 우승을 질러버려 선수 및 감독으로 월드컵을 모두 제패한 2번째 축구인으로 그 이름을 올린다.[13] 사실 1986년이나 1990년이나 독일 국대 스쿼드가 결코 압도적이라는 평은 듣지 못한 때라는 걸 감안하면 베켄바워의 통솔력이 얼마나, 어떻게 작용했는지 감히 짐작할 수 있다.[14]

그리고 1994년. 카이저는 자신의 고향인 뮌헨으로 돌아와 바이에른 뮌헨 회장직에 취임한다. 그러더니 바이에른 뮌헨 감독을 맡기도 한다. 답답해서 내가 감독한다 더욱 곤란한 것은 감독 재직중에 분데스리가 우승 1회 및 UEFA컵 우승 1회를 추가시켰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트로피가 이 사람을 부르는 것인가, 이 사람이 트로피를 부르는 것인가 궁금해진다.

다만 1995/96 시즌 UEFA 컵 우승의 경우, 해당 시즌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이었던 오토 레하겔이 팀과 선수들과의 지속적인 갈등으로 UEFA 컵 결승전까지 올려놓고 해고를 당했기 때문에 베켄바워는 결승전 단 한경기만 지휘하고 UEFA 컵 우승감독에 이름을 올린케이스다.

1998년에는 독일 축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그리고 모두가 잘 아는 2006 독일월드컵 때에는 대회 조직위원장 직을 맡아 성공적인 대회를 진행시켰다.

즉 선수시절은 물론이요, 은퇴 후 감독이든, 축구행정가든, 가는 곳마다 성공대로를 달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이야 그 인식이 서서히 옅어지고 있긴 하지만, 스타플레이어 출신 감독은 성공하기 어렵다라는 말은 거의 불문율 수준으로 작용하던 때이고, 심지어 스타플레이어 출신 축구행정가는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라 생각되던 때였다. 그런데 이 양반은 이 2가지를 죄다 해냈다. 영웅신화라고까지 칭하면 다소 비약적인 찬사겠지만, 그야말로 은퇴 전후를 통틀어 축구판의 황제라 불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커리어다.

더 쉽게 비교해보자면, 똑같이 황제 소리를 들은 펠레 역시 현재 세계축구계에 나름대로 영향을 끼치고 있으나 특히 예측에 대한 영향은 절대적 펠레는 따지고 보면 명예직에 앉아 있을 뿐이지만, 베켄바워는 스스로 실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와 경력을 지니고 있다는 소리.[15] 오죽했으면 무소불위의 권력독재을 행사하고 있는 현 FIFA 회장 제프 블라터와 맞장을 뜰 수 있는 유일한 축구인이라는 말까지 듣겠는가. 1인자인 블라터가 1인자라 이거저거 해먹는 탓인지 여기저기 적이 많지만, 그와 대비되게 베켄바워는 축구실력과 국력 양면에서 뛰어난 독일을 등에 업고 유연한 대응을 바탕으로 적을 만들지 않고 실익을 잘 챙겨간다.

4.4. 플레이스타일


오오 간지 선 슬리퍼 오오

"리베로(or 스위퍼[16])" 포지션의 창시자. 이 한마디로 끝이 난다. 수비수이면서도 수비수가 아닌, 수비진영에서부터 플레이메이킹 임무를 수행한 전대미문의 플레이어.

베켄바워는 당시 이탈리아 축구를 대변하던 "테나치오"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수비수로서 대인마크에만 전념하지 않고, 자신이 볼을 키핑한 채 수비진영에서부터 완급을 조절하며, 필요에 따라 스스로 2선침투로 득점을 노리는 플레이를 시도했다.

즉 현대로 따지면 중앙 수비수 중 한명이 오버래핑을 해서 미드필더진, 또는 공격진에 공을 뿌려주는 빌드업을 행했다고 보면 된다. 이는 단순히 수비능력뿐만 아니라 패싱 능력, 창의성, 공의 키핑능력이 모두 필요하다.

그런데 이 뿐만 아니라 드리블마저 잘했고 프리킥도 잘 찼다. 수비수인걸 감안하고 가 아니라, 스페셜이나 유튜브의 당시 경기보면 수비하는 모습이 아니면 누가 봐도 공격형미드필더로 보일 정도. 골 넣을 땐 영락없는 현대형 공격수.

획기적인 개념이었지만 베켄바워가 카테나치오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하듯 아인슈타인상대성 이론처럼 하늘에서 벼락처럼 떨어진 개념은 아니었다. 실제로 약간 미흡하나마 이런 방식의 플레이가 이미 등장하긴 했었다. 그러나 베켄바워처럼 본격적인 수비수의 공격가담, 볼배급, 공수조율은 베켄바워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누가 해 보겠다고 하면 비웃음이나 사기에 족한, 그야말로 입축구와 같은 것이었다.[17]

리베로란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면 말이야 쉽다. 허나 그냥저냥 A급 수비수가 이를 시도했다면 현실은 시궁창이었을 것이다. 이것도 역시 베켄바워라는 플레이어의 기본 역량이 넘사벽 레벨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명제였겠지만. 실제로 베켄바워는 클럽과 A팀을 합쳐 690경기 95골을 터트렸다. 중앙수비수가 말이다.[18]

이로 인해, 적진이 아닌 "본진에서 필드를 조율하다 일거에 몰아닥치는" 그의 플레이스타일과 베켄바워 본인이 천부적으로 타고난 리더십카리스마가 한데 어우러져 그는 필드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아군에게는 "오오 황제시여" 하는 감탄사가 나왔으며 상대팀 입장에서는 "저 뒤에 괴물이 있어..." 하고 탄식하게 만들었다고 카더라. 데어 카이저, 즉 황제란 별명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베켄바워가 리베로 포지션을 창안하고 확립시킨 이후에도 수많은 걸출한 리베로들이 필드를 수놓았다. 몇 명만 추려보더라도 로타어 마테우스, 마티아스 잠머, 르난도 이에로, 그리고 한국의 홍명보 등등. 오오 리베로 오오...

포지션이 공격수도 미드필더도 아닌 수비수였음에도 경기를 쥐락펴락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실제로 그러한 능력을 행사했기에 그는 말 그대로 스탯으로는 절대 평가 불가능한 플레이어의 표본이라 할 수 있겠다.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명경기로 뽑히는 70년 월드컵 4강전의 서독:이탈리아의 경기를 보면 베켄바워라는 선수의 경기 장악력을 알 수 있다. 그 경기 전후반 내내 서독은 이탈리아를 말 그대로 가둬넣고 패고 있었고, 이탈리아는 전반 초반에 얻어낸 첫골을 빗장수비로 힘겹게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독의 공격은 베켄바워의 빌드업을 시작으로 이탈리아를 완전히 융단폭격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경기에서 베켄바워는 수비에서 상대편 진영까지 드리블로 공간도약으로 하고, 원거리 패스를 정확하게 공격진에게 배달하고, 자신이 어떤 선수인지 제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베켄바워의 어께 부상 이후 이탈리아를 압살하던 서독의 공격은 실종되었고, 결국은 결국 베켄바워가 필드에는 있지만 제 능력을 온전히 쓸수 없는 상황까지 겹치면서 급격한 체력 소모까지 이어지면서 서독은 결국 3:4로 아깝게 패배하게 된다.

베켄바워의 플레이에 관심있는 사람은 찾아봐도 좋을 것이다.

4.5. VS 요한 크루이프


불세출의 두 천재들.

한줄요약 : 70년대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VS 리오넬 메시

1970년 월드컵 이후의 1970년대는 다른 말 필요없이 크루이프 VS 베켄바워의 시대였다. 공격수와 수비수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것만 같은 두 선수가 당시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축구계 전대미문의 라이벌이라 불리는 까닭은, 둘의 커리어와 그 업적이 다른 듯 하면서도 너무나 비슷한 탓이다.

선빵(...)은 요한 크루이프가 먼저 쳤다. 아약스 소속으로 챔스 3연패(71, 72, 73)를 진두지휘했고, 크루이프 본인도 발롱도르 3회 수상으로 1970년대를 그 발 아래 두나 했는데...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황제가 아니었기에, 상술했듯 그에 바통터치하듯 챔스 3연패(74, 75, 76)를 똑같이 일구어냈고 베켄바워 본인도 발롱도르 2회 수상 등 그야말로 팽팽히 맞섰다.

너무나 흡사한 유럽에서의 업적으로 인해 세간은 당연히 그 둘을 라이벌로 묶기 시작했고, 누구도 상대적 우위를 점하지 못하던 가운데 결국 토탈사커의 구현자 크루이프와 리베로의 창시자 베켄바워 두 명의 희비가 엇갈린 대회가 바로 74년 월드컵인 셈이다.

"토탈사커"라는 유래없는, 축구판의 혁명이라고까지 불린 전술과 그를 구현해내는 전력으로 결승전까지 전승으로 달려온 크루이프의 네덜란드를 외나무다리에서 제압한 것이 바로 베켄바워의 독일이었으니. 물론 해당 대회 MVP는 크루이프에게 돌아갔으나, "개인적인 승리"를 거둔 크루이프"팀으로서의 승리"를 거둔 베켄바워 그 어느 쪽이 위인지는 각각의 판단에 맡긴다. 그래서일까, 크루이프와 자신을 비교하는 세간의 설레발에 베켄바워가 남긴 말이 또 생각난다.[19][20]

"크루이프가 나보다 나은 선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월드컵을 제패했다."
콩까지마

5. 기타

차범근과는 굉장한 두터운 사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차두리가 2010 남아공 월드컵 이후 셀틱 FC로 이적하려 했을 때 차두리의 워크퍼밋 조건이 충족이 안되자 베켄바워가 직접 추천서를 적어 주기도 하였다. 리그 수준에 비하면 추천인이 너무나 과분하다... 대입 추천서 받아오랬더니 오바마에게 받아온 격...

2014년을 휩쓴 아이스 버킷 챌린지에 수많은 축구인들이 지목했으나, 베켄바워는 정중히 거절하고 5000유로를 기부했다. 그 이유는 전후 폐허가 된 뮌헨에서 태어났기에 갓난 아기때부터 항상 차가운 물로 씻어야만 했고, 그것이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어 찬물을 견딜 수 없다고. 기부 후에 펠레 재거그리고 터 내처를 지목했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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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2014 브라질 월드컵을 앞두고 차범근과 SBS 광고에 출연.
이번 월드컵은 역시 따봉 따봉을 더럽힌 자는 반성하라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개최지 선정 의혹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90일 정지라는 처분이 내려졌다. 그는 2022년 월드컵 개최지 투표가 실시된 2010년 함마드 빈 함맘 전 카타르 축구협회장과 밀약을 맺고 카타르 선정을 도왔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영국 선데이타임스는 베켄바워가 독일 기업의 카타르 진출을 돕는 브로커 역할을 한 정황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가르시아 조사관이 두 차례 면담 요청을 했으나 모두 거부했다. 기사

하지만 베켄바워가 조사에 응하였고, 그 결과 결국 무혐의 처분을 받고 FIFA에서도 고소를 취하, 제프 블라터의 애꿎은 희생양이되었다. 기사 아무래도 행보 자체가 블라터의 오른팔인 미셸 플라티니와 정반대 행보를 보이고 영향력이 큰 레전드 오브 레전드다보니 견제를 했다고 볼 수 있다. FIFA 회장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법을 개정하면서까지 5선에 도전하는 블라터와의 기세싸움이라고 볼 수 있다. 베켄바워는 2000년대 초반부터 유력한 차기 FIFA 회장 후보로 꼽히는 인물이며, 집행위원으로서 2022 카타르 월드컵의 개최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정 개최해야한다면 1월에 해야한다는 입장이었기에 뇌물수수혐의는 더욱 뜬금없었다. 베켄바워는 블라터의 이러한 처사에 분노하여 강력한 재조사 입장을 들고 블라터와 정면대결을 펼치려는 상황이다. 기사


현역 시절부터 독일을 대표하는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의 대표 모델로 활약중이다. 베켄바워의 이름을 딴 스니커즈는 슈퍼스타와 함께 영원한 스테디셀러. 2006년 독일월드컵을 기념하여 베켄바워가 현역시절 착용했던 져지, 유니폼 등을 복각해서 한정 출시하기도 했다.

또한 역시 독일인답게 맥주를 좋아한다. 사실 옥토버페스트의 원산지인 바이에른주의 바이에른 뮌헨의 레전드인데 안좋아하면 더 이상하다. 바이에른 주를 대표하는 에어딩거(Erdinger Weißbräu) 맥주의 광고를 찍기도 했다.

전통의상인 디른들(Dirndl)을 입은 옥토버페스트 아가씨와 건배를 하는 내용. 미노년의 간지를 뿜어낸다.

6. 기록

6.1. 선수 기록

  • 바이에른 뮌헨 (1959/60 - 1976/77)
  • 뉴욕 코스모스 (1977-1980, 1983)
    • North American Soccer League (3) : 1977, 1978, 1980
    • Trans-Atlantic Cup (2) : 1980, 1983
  • 함부르크 SV (1980/81 - 1981/82)
    • Bundesliga (1) : 1981/82
  • 서독 국가대표팀

6.2. 감독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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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시즌 중도취임
  • [2] 2005년 FC 바이에른 뮌헨이 66,000명의 바이에른 팬들을 대상으로 투표한 결과 선정된 구단 역대 베스트11이다.
  • [3] 1974 FIFA 월드컵 서독 결승전에서 라이벌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네덜란드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 뒤 한 말이다. 베켄바우어는 세계 최고의 선수인 크루이프가 이끄는 네덜란드가 우승했어야 했다는 크루이프빠 사람들에게 이 말 한마디로 멋지게 응수했다.
  • [4] 어떤 매체에서도 역대 베스트 11을 뽑을 때 중앙수비 한 자리는 무조건 베켄바워가 뽑힌다. 반면에 그의 중앙수비 파트너를 누구로 두는지는 정말로 피 터지게 치열하다. 애초에 수비수를 떠나서 선수로서 크루이프와 70년대를 지배했고, 그의 위상은 펠레-마라도나-크루이프-디 스테파뇨와 동격으로 쳐지니 선수로서도 역대인 사람이고 수비수 전체만 따질 경우에는 알파이자 오메가인 사람이다.
  • [5] 호나우두 역시 황제 소리를 듣긴 하지만, 그건 대체로 국내 한정이다.아디다스를 무찌른 나이키의 황제라면 그건 맞는 말이다. 해외에선 대체로 "천재(il Fenomeno)" 정도로 통하는 게 일반적. 파사렐라도 황제 소리 듣는데 내가 바로 넥스트 베켄바워라는 느낌도 나고 캡틴으로 불리는 일이 일반적. 60~70년대 축구소년들의 주된 논쟁거리는 이것이었다. 펠레가 더 잘할까? 베켄바워가 더 잘할까?
  • [6] 수비수가 오버래핑해서 공을 배급하고 2선침투를 통해 직접 득점을 노리는 전술이 이론상으로 존재하긴 했으나, 베켄바워는 그것을 실현시키며 불멸의 전설로 남았다.
  • [7] 선수 생활을 통해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로 남았고, 감독 생활을 통해 월드컵을 우승했고, 축구 경영인 생활을 통해 바이에른 뮌헨을 세계 최강의 명문 구단 중 하나로 이끌었다. 조국인 독일을 위해서는 2006년 독일 월드컵을 개최시켰다.
  • [8] 지금은 유럽을 뒤흔드는 막강 클럽이 되어 있는 바이에른이 1963년 분데스리가 창설시 포함되지 않았던 것은, 당시 바이에른의 라이벌 TSV 1860이 직전년도 남부 오버리가(Oberliga Süd) 우승팀이기 때문이다. 독일축구연맹은 첫해 분데스리가에서 동일 연고지에 복수의 팀을 넣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결코 해당 오버리가에서 3위를 거둔 바이에른이 약팀이어서 진입하지 못한 게 아니며, 실제로 바이에른은 2등급인 남부 지역리그(Regionalliga Süd)에서 2년 만에 승격을 달성했다.
  • [9] 분데스리가 우승 트로피...라기보단, 접시 모양
  • [10] 독일 클럽 최초의 챔스 우승만도 벅찼을 텐데 그게 또 3연패다. 독일 축구팬들이 얼마나 열광했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 [11] 축구팬이라면 이야기쯤은 들어봤을 웸블리 골이 터진 바로 그 경기다.
  • [12] 사실 당시 독일이 교체카드를 모조리 쓴 탓도 있지만, 골절상을 입고서도 120분 풀타임을 소화한 베켄바워의 정신력도 알아줘야 하겠다.
  • [13] 첫 번째는 브라질의 마리오 자갈로. 단, 자갈로는 브라질 대표팀 주장은 아니었다. 주장과 감독으로 우승한 경우는 베켄바워가 유일.
  • [14] 흥미로운 것은 두 번의 결승전 상대가 모두 마라도나가 이끌던 아르헨티나였는데, 첫 대결은 마라도나에게 당했으나 두 번째에는 감독 베켄바워가 선수 마라도나를 쳐발랐다는 점이다. 패배는 한 번으로 족하다는 것인가 카이저!
  • [15] 명예직에 앉아 있을 뿐이라곤 하지만, '펠레는 브라질 대통령이 되려면 될 수 있었다. 안 했을 뿐이지'라고 공언하고, 또 이를 흰소리로 치부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세가 당당하다. 체육부 장관으로 역임하던 시절 나쁘지 않았기에. 세계 축구계로 봐도 펠레라는 이름자 하나만으로 많은 영향을 끼쳐 왔으며 또 현재에도 끼치고 있다. 그래도 아예 실권자인 베켄바워가 파워로는 위지만.
  • [16] 스위퍼와는 개념이 다르다. 어디까지나 박스 근처로 물러선 상태에서 최후의 방어선을 치는 스위퍼와 달리 리베로는 수비라인 근처에서 함께 움직이며 적극적으로 빌드업을 시도하는 포지션이다. 이 둘을 혼용하여 사용한 것은 한국 축구 기자들이 홍명보를 평하면서 행한 잘못된 기사에서 시작되었는데, 이 둘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그리고 홍명보와 베켄바워 둘 다 스위퍼가 아니라 리베로라고 칭하는 것이 맞다.
  • [17] 더군다나 스리백 포메이션에서라면...
  • [18] 다시 말하지만 쓰리백 포메이션에서의 얘기다! 야구로 비유하자면 10년동안 매년 30홈런을 친 포수랄까.사실 이건 잘못된 비유다. 수비력이 훌륭하지 않은데도 넘사벽급의 공격력으로 출전하는 포수는 꽤 있다. 마이크 피아자라던지 마이크 피아자라던지 마이크 피아자라던지...
  • [19] 베켄바워는 1974년 바이에른 뮌헨 주장으로 분데리스가 우승, 챔스 우승 그리고 독일 대표팀 주장으로 월드컵 우승이라는 역사상 유일한 전대미문의 업적을 달성했다. 그러나 발롱도르는 크루이프...당시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하나"라면서 탄식했다고 한다.스네이더 임마 너도 월드컵 우승했어야지 근데 그 때 메시는 챔스도 월드컵도 못 들었잖아...
  • [20] 그러나 베켄바워의 탄식에도 불구하고 크루이프가 발롱도르를 차지했던 것은 왜냐하면 베켄바워는 그 당시 최고의 전술과 시스템에서 최고의 선수였던 반면, 크루이프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전술, 토탈사커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이다. 저 토탈사커의 등장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가는 당시 시대의 영상의 파편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극단적으로 끌어올린 오프사이드 라인과, 그것의 완벽한 제어. 촘촘한 공수의 간격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에 상대 아르헨 공격진들이 우르르 오프사이드 트랩에 걸리는 모습이 당시 선수들과 기자들. 그리고 축구 팬들에게 얼마나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을지는 두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