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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전쟁

last modified: 2015-01-14 21:40:14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전쟁 이전
2.1. 발단 :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대립 시작
2.2.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59~BC 446)과 일시적인 평화
3. 전쟁 전기
3.1. 초기 전개(BC 432~BC 425)
3.2. 전략의 변경과 아테네의 공세(BC 425~BC 421)
4. 전쟁 중기
4.1. 아르고스 동맹과 스파르타의 위기(BC 421~BC 416)
4.2. 시칠리아 공격과 재앙(BC 415~BC 414)
5. 전쟁 후기
5.1. 제국의 위기(BC 413~BC 411)
5.2. 아테네의 반격과 전쟁의 패배(BC 411~BC 404)
6. 전쟁 이후
6.1. 평화 협정
6.2. 전쟁 이후

1. 개요

BC.432년부터 BC.404년까지 아테네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도시 국가들이 맞붙은 전쟁.

실존 역사학의 아버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로 유명하다. 참고로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의 지역 사령관 중 하나였다가 암피폴리스를 상실한 책임을 지고 추방된 뒤 그리스 전역을 돌아다니며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썼다고 한다.

본 전쟁 외에도 앞뒤로 전쟁을 하나씩 깔고 있는(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코린트 전쟁) 유래없는 전쟁. 참전국도 지중해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 기껏해야 꼬꼬마였던 로마 정도나 미참전이었다. 그야말로 고대 서방 세계의 세계대전급 전쟁이었다.

2. 전쟁 이전

2.1. 발단 :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대립 시작

전쟁의 발단은 아테네의 급성장과 이에 위협을 느낀 스파르타의 반발이라 하겠다.

아테네의 급성장은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페르시아의 세차례의 침공이 끝난 이후(BC479년) 그리스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공세를 방어한 여세를 몰아 이전에 점령당했던 이오니아 각 도시들을 해방시키고 더 나아가 키프로스와 이집트 일대에 반란을 유도해 이지역까지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때 그리스 국가들 중 중심이 될 만한 크기와 힘을 지닌 국가는 스파르타와 아테네 두나라였다. 물론, 그 밖에도 테베와 아르고스 정도가 상당한 힘을 지녔었지만 이들은 페르시아 편을 들었었기 때문에 중심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동맹을 맺고 이후 전쟁을 수행해 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국내문제로 인해 스파르타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었다. 이는 스파르타인의 핍박으로 인해 노예나 다름없고, 따라서 언제나 스파르타의 빈틈을 노리는 헤일로타이가 스파르타 시민의 대부분이라 스파르타인의 상당수가 본국감시의 목적으로 못박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아테네 중심으로 모여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게 된다.

이후 전쟁이 지속되면서 델로스 동맹은 차츰 아테네 제국으로 변화하고 그걸 지켜본 스파르타는 위기감을 가지게 된다. 그 결과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대해 의심하게 되고, 장벽 재건 반대, 아테네와의 동맹 파기 논의(페르시아 전쟁의 결과 이때까지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명목상으론 동맹관계), 아테네의 타소스 섬 공략때 아테네를 공격할 계획을 수립(헤일로타이의 반란[1]과 지진으로 포기)하는 등 이를 드러내 보인다.

이 결과 친스파르타 체제를 이끌던 키몬이 실각하고 반스파르타파인 리클레스가 아테네의 실권을 잡게 된다. 이후 스파르타와의 동맹을 파기, 스파르타의 숙적인 아르고스와 동맹을 맺는다. 헤일로타이 반란세력이 진압되면서 생존자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탈출하자 이들을 받아들여 코린트 만 북쪽 나우팍토스에 정착, 스파르타를 견제하는 용도로 삼는다.

이후 코린트와 메가라 양국이 국경문제로 전쟁을 벌이고 이 전쟁에서 메가라가 밀리게 된다.[2] 여기에 스파르타가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자 메가라는 스파르타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아테네의 동맹이 된다.(BC 459년)

그 결과, 아테네는 자연스럽게 코린트와 전쟁상태에 돌입하고, 여기에 얼마 안가 코린트와 동맹인 스파르타가 관여하게 되면서[3]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한다.

2.2.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59~BC 446)과 일시적인 평화

이 전쟁에서 아테네는 코린트 지협의 요충지인 메기라를 한편으로 끌어들여 육로로 오는 것을 봉쇄하고 펠로폰네소스 반도 주변 각지에 요새를 확보하는 등 유리한 판세를 잡았다.
그러나 동시에 벌어진 이집트 원정(BC 460~BC 454)에서 참패하게 되고 전쟁발발과 동시에 아이기나를 점령, 그 주민들을 쫓아내버리자 아테네의 대의명분은 심각한 손상을 입는다.

스파르타의 본격적인 개입은 BC 458년부터였다. 스파르타군은 보이오티아[4]의 타나그라까지 북상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스파르타는 아테네와 맞붙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후 아테네는 BC 457년 오이노피타에서 테베를 상대로 승리하고 보이오티아의 대부분을 친아테네계열로 바꿔버리는데 성공한다.

전황은 아테네가 이집트 원정의 참패로 인해 스파르타와 일시적인 휴전을 맺으면서 변하게 된다.(BC 451년) 스파르타는 휴전을 맺은 뒤에도 계속 기회를 노렸고, 테베가 다시 일어나 코로네아 전투(BC 447년)에서 아테네에 승리, 보이오티아 전체를 수복하였다. 이에 아테네가 대응하기 위해 북진한 사이 메가라에서 반아테네 쿠데타가 일어나 아티카로 가는 길이 열리자 펠로폰네소스 군대가 아테네로 진군했는데 극적으로 협정이 타결되어 30년간의 평화조약이 맺어졌다. 이 때 리클레스가 스파르타의 플레이스토아낙스 왕의 조언자 클레안드리다스를 뇌물로 매수했는데 이후에 클레안드리다스는 사형당하고 왕은 망명하였다.

이때의 평화조약은 기본적으로 양측의 세력권을 인정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서로 협의해서 풀어나가자는 것이였다. 이후 양국은 서로 상대방의 세력권이나 동맹국을 건드리지 않고 10여년을 지내게 된다. 사모스섬의 반란때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등 큰 문제 없는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에피담노스 분쟁(BC 436~BC 433)으로 이러한 평화는 위기에 빠지게 된다. 서북쪽 변방에 위치한 식민도시 에피담노스의 두 파벌을 코린트와 코르키라(코르푸 섬)가 서로 지지하면서 발생한 이 분쟁에서 아테네는 소극적이나마 코르키라의 편을 들었고, 이 결과 코린트는 다시 원한을 품는다. 코린트와 다시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고 본 아테네가 코린트의 편을 들 수 있다고 본 북쪽의 포티다이아 시에 성벽을 해체하라 요구하자 포디다이아는 반란을 일으키면서 또하나의 불씨가 생겨난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이전 전쟁에서 마지막에 아테네를 배신했던 보복으로 메기라에 대해 경제적 금수조치를 취하자 스파르타도 본격적으로 개입, 아테네에 이러한 조치를 취소할 것을 요구한다. 아테네는 이를 거부하고, 결국 스파르타는 다시 전쟁을 결의한다(BC 432년)

3. 전쟁 전기

3.1. 초기 전개(BC 432~BC 425)

전쟁의 시작은 테베의 플라타이아 기습공격에서 시작되었다. 테베는 오랫동안 플라타이아를 점령하고자 노력했지만 매번 실패해 왔는데, 동맹인 스파르타가 전쟁을 결의하자 다시한번 시도한다. 테베는 플라타이아이를 포위하였고 플라타이아이는 아테네로 구원군을 요청하고 결사항전을 시도했다. 허나 아테네의 구원군은 모종의 이유로 인해 늦어졌고 플라타이아이는 함락되고 말았다. 함락 후 테베군과 스파르타군이 시내에 진주하자 플라타이아이 시민들의 처리를 둘러싸고 아가리 파이팅이 크게 벌어졌는데 테베와 플라타이아이가 서로의 입장을 이야기하고 스파르타가 결정하는 구도로 진행됐다. 플라타이아이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페르시아에 빌붙었던 테베를 비꼬면서) 자신들은 신의를 지키는 국가였고 아테네가 페르시아 전쟁 당시 자신들을 도와줬던 걸 잊지않고있기 때문에 항복할 수 없었노라고 자신들을 변호했다. 이에 테베는 (테베는 플라타이아이의 모도시) 신의를 져버린 것은 네놈들을 말하는 것이라며 플라타이아이 주민들을 전부 죽이기를 요구했다. 결국 스파르타는 전부 죽이되 우리에게 도움을 줬던 전력이 있었던 사람들은 살려준다. 라는 조건을 내걸었고 대부분의 플라타이아이 시민들은 처형당하고 만다. 이후 아테네는 포위 직전 혹은 뚫고 도망치는데 성공한 플라타이아의 민간인을 자신들에게 대피시킨다.

스파르타도 본격적으로 움직여 아티카 일대를 공략한다.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을 동반한 스파르타군은 아테네 주변 농가를 정기적으로 유린하고 황폐화시키려 기도한다. 이에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군의 공격은 자신들 도시와 항구까지 이어진 장벽으로 막고 대규모 함대를 동원, 펠로폰네소스 해안가를 유린해 마찬가지로 괴롭히는 전략을 세운다.

그러나 아티카 일대의 농가는 대부분이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로, 논밭처럼 쉽게 파괴되지는 않았으며, 반복적인 공격으로도 쉽게 황폐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대략 세번째 침공때 이전에 파괴했던 나무들이 다시 자라 그것들을 파괴하다 왔다는 식의 기록이 있다. 여기에 더해서 스파르타 군 자신의 식량문제나 농사문제도 있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공략해도 결국 그건 일시적이고 부분적일 수밖엔 없었으며, 이에 대한 아테네의 반격 역시 스파르타의 동맹국들은 괴롭힐 수 있어도 스파르타 자체를 괴롭힐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전쟁은 시작부터 교착상태에 빠진다.

교착상태에 빠졌을 무렵, 아테네에 대역병이 나돈다. 이건 어찌보면 매우 당연한 일인데, 스파르타의 약탈을 피해 주변 농민들이 성벽으로 보호받는 좁은 곳에 밀집하기 때문에 위생상태와 영양상태가 모두 안좋아지므로 뭔가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면 대역병으로 발전하는 것은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역병의 결과 아테네는 주민의 1/3 가까이(대략 7~8만의 시민들)을 상실하는 심각한 타격을 받고, 교착상태가 지속되면서 아테네의 재정상황도 위기에 빠져 전략을 바꿔야 하는 요구를 받는다. 이때 리클레스도 역병으로 사망했다.

3.2. 전략의 변경과 아테네의 공세(BC 425~BC 421)

역병으로 인해 다수의 시민과 지도자인 페리클레스를 상실하고, 소극적인 소모전의 결과 재정위기에 빠진 아테네는 적극적인 공세를 경제적으로 수행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꾼다. 이전처럼 대규모 함대를 운용할 자금과 인력이 부족했던 아테네는 상대적으로 소규모 함대를 이끌고 대신 작전지역의 토착민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이를 통해 공세에 나가고자 한다.

에게해 섬들 중 유일하게 아테네 제국에 종속되지 않았던 멜로스에 공격을 가했으나 실패했다. 이와 동시에 소규모 함대를 펠로폰네소스반도 서쪽으로 보내 그지역의 스파르타 동맹국들에 타격을 가하고 아테네 동맹국들을 돕고자 한다. 데모스테네스가 지휘한 이 부대는 보이오티아를 후방에서 가격하려던 작전에는 실패하나 그 일대의 주요 스파르타 동맹국들에 심각한 타격을 가해 전선에서 이탈시킨다. 이후 아테네는 1차 시칠리아 원정군을 보내나 실패했다. 일단 목표가 소박하긴 했으나 나중의 대규모 시칠리아 원정의 1/4 규모라 병력이 부족하기도 했다.

한편, 당시 아테네의 강경파 수장이었던 클레온은 민회에서 깽판을 치며 평화협상을 나가리로 만들고, 전황이 지지부진한 것이 온건파 탓이라고 계속 디스했다. 그러면서 20일 안으로 스파르타인을 잡아서 대령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모두 미친 소리 취급했다. 이에 화가 난 온건파 장군 니키아스가 클레온에게 "님, 병력 드릴 테니 님이 한 번 해 보시죠?"라고 제안했다. 지휘 경험이 전무한 클레온은 속으론 가고 싶지 않았으나 시민들의 여론에 떠밀려 울며 겨자먹기로 갔는데... 대박이 터졌다! 필로스-스팍테리아에서 소규모나마(약 200명) 스파르타군을 최초로 포로로 잡는 대성과를 거두고 이를 인질삼아 스파르타 해군을 무장해제시킨다. 이는 스파르타 시민의 수가 너무 적어서 소규모 스파르타군이라 해도 스파르타 입장에선 대단히 귀중한 자원이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이 당시에 스파르타는 완전 시민을 탈탈 털어도 3천 5백 명 정도 나온다.

그러나 테베를 굴복시키고자 했다가 델리온 전투에서 소크라테스가 부상을 입는 등 참패를 당하고, 스파르타의 브라시다스가 트라케 일대로 파견되어 암피폴리스를 포함한 그지역 도시들을 제압하면서 성공적으로 보였던 아테네의 공세는 위기에 처한다. 이 일로 트라케 지역의 책임자였던 투키디데스가 추방당한다. 이후 이지역을 다시 제압하고자 파견되었던 강경파의 수장 클레온이 브라시다스와 같이 전사하면서 양측 강경파는 힘을 잃고 온건파인 니키아스의 주도로 평화협정(니키아스의 평화)를 맺는다.

4. 전쟁 중기

4.1. 아르고스 동맹과 스파르타의 위기(BC 421~BC 416)

평화협정을 맺었지만 양측의 골은 사라지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평화협정을 맺고 동맹까지 맺었지만 이는 표면상의 것이였고, 양측은 전쟁으로 얻은 성과를 포기하고자 하지 않아 평화협정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간접적으로 서로를 공격하고자 한다.

때마침 아르고스가 스파르타와 맺었던 30년 평화협정이 끝이 나면서 새로운 변수로 등장하고, 강경파의 새로운 지도자로 나타난 알키비아데스는 아르고스와 아테네의 동맹, 그리고 아르고스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만들어 이를 통해 스파르타를 무력화시키고자 한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중부 도시들인 만티네아, 엘리스 등이 이에 응했고, 스파르타는 북쪽의 다른 동맹국들과 고립되는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명목상으로라도 스파르타와 동맹인 아테네는 적극적인 지원을 할 수 없었고, 아르고스-만티네아-엘리스 동맹군은 만티네아 전투에서 스파르타에 참패, 새로운 동맹을 통한 스파르타 공략은 실패로 돌아간다.

이시기에 멜로스에 대한 아테네의 재공격이 있었고, 멜로스를 점령하고 그들을 모두 죽이거나 노예로 팔아버린다. 이때 투키디데스가 언급한 멜로스 협상단과 아테네인의 대화는 오늘날에도 무력과 정의에 대한 글 중 상당히 유명한 글이다. 멜로스인들은 만인에게 공유되는 불변의 정의에 의거 아테네의 항복 요구에 응할 수 없다고 했고, 아테네인들은 '정의는 힘있는 자가 정하는 것'이며, '약자는 힘있는 자가 만든 정의에 순응할 때 행복과 안정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멜로스는 함락되고 모든 시민들은 살해되거나 노예로 팔려갔지만 이 사건 이후로 그리스의 여러 국가들은 아테네에 등을 돌리게 되고, 페르시아와 협력해서라도 아테네의 오만을 꺾어야한다는 의견도 공감대를 얻어갔다.

4.2. 시칠리아 공격과 재앙(BC 415~BC 414)

1차 시칠리아 원정(BC 427~BC 424)때 아테네는 도합 1만 2천 가량의 인력을 투입하고도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으며, 마지막에는 동맹국들에게 문전박대를 당하고 돌아왔다. 이로인해 아테네는 시칠리아에 재원정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생겼다.

그리고 이 당시 시라쿠사는 스파르타에 식량을 수출하는 대표적인 수출국이였다. 여기에 더해서 시칠리아 일대의 반시라쿠사 세력은 아테네를 이용하면 시라쿠사를 견제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들은 아테네에게 다시 도움을 요청해 시라쿠사를 견제하고자 한다.

이에 아테네에서는 논쟁이 벌어지고, 알키비아데스, 니키아스, 라마코스에게 1차 원정군과 비슷한 규모인 전함 60척과 대략 1만 2천 정도의 인력을 파견하기로 하나, 온건파였던 니키아스는 시라쿠사의 국력을 과장해 아테네 시민들에게 겁을 주어 이 파견을 취소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테네 민회는 이러한 니키아스의 과장에 오히려 반발, 그 규모를 두배로 늘려버린다.(...) 전함 134척에 중장보병만 5천 이상, 함대 운용인력을 계산하면 2만 이상이라는 대규모 전력을 파견하기로 한 것이다. 여기엔 아테네 뿐만 아니라 아르고스 등 동맹국 병력도 상당수 존재했다.

이런 대규모 원정군이 시칠리아로 파견되자 처음에 아테네로 지원을 요청했던 반시라쿠사 세력도 아테네의 의도를 의심해 등을 돌려버렸고, 등을 돌리지 않은 도시들도 아테네 원정군에게 물자 및 자금지원에는 소극적이 되었다. 여기에 그런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하면서도 기병을 파견하는 것을 까먹는(...) 바람에 도착하고도 한동안은 기병이 확보될때까지는 소극적으로 움직일 수밖엔 없었다. 또한 강경파인 알키비아데스는 중간에 신성모독 혐의로 소환이 결정되자 시라쿠사로 도주해 버렸다.

그래도 1차 원정군은 시라쿠사군을 격파하고 시라쿠사를 포위공격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소극적인 니키아스는 애초에 그 자신이 원치않던 원정에 때마침 병까지 앓았다. 설상가상으로 라마코스는 포위망 건설 즈음에 전사해서 소극적이고 몸도 아픈 니키아스가 전권을 쥐고 지휘하는 모순이 발생했다. 설상가상으로 시라쿠사의 반격, 알키비아데스의 충동질로 인한 스파르타의 지원이 결합되어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원래 스파르타의 초기 지원은 매우 작은 규모였는데 스파르타와 코린트 각 2척으로 구성된 함대에 스파르타 완전시민 병사는 한 명도 없었고 지휘관 귈립포스마저 완전시민이 아닌 모타케스(열등자) 출신이었다.(참고로 귈립포스는 앞서 뇌물수수로 처형된 클레안드리다스의 아들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볼품없는 병력이 봉쇄를 뚫고 상륙에 성공하여 시칠리아 전역에서 지원병을 모으고 아테네군의 포위망 건설을 저지하기 시작했다. 결국 포위벽 건설은 실패로 돌아가고 니키아스는 아테네에 원정군이 위기에 빠졌다고 서신을 보낸다. 니키아스는 이를 통해 원정군을 철수 허가를 받고자 했다.

그러나 아테네의 답변은 정반대였다. 에우리메돈과 데모스테네스 지휘하에 비슷한 규모의 2차 원정군을 파견한 것이다.(...) 도착한 데모스테네스는 니키아스의 지휘가 너무 무기력하고 소극적이기 때문에 위기가 왔다고 판단하고 적극적인 공세를 가한다. 그러나 야간공격 와중에 서로를 오인하고 전투를 벌여 실패하자 아예 전 병력을 철수하고자 계획한다.

그러나 그걸 막은 것은 니키아스였다. 자신의 아테네에서의 위치가 위협받을 것을 우려해 철수를 반대한 것이다. 이에 더해서 때마침 월식이 일어났고 경건하고 신중했던 니키아스는 그 상황에서 움직이면 무언가 안좋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9일씩 세 번'을 기다렸고 철수할 기회를 놓쳐버린다. 당시 월식에 대해 역사가 필로코로스는 다른 해석을 했는데 도주하려는 자들에게는 달빛이 가려진 것이 오히려 길한 징조라는 것이다.

이로 인해 철수의 기회를 놓치고 시칠리아에 묶여있는 사이 시라쿠사 해군은 항구를 봉쇄했고, 뒤늦은 아테네 해군의 돌파시도가 실패하면서 아테네 원정군은 시라쿠사에 완전히 고립. 둘로 나누어져 주변 동맹국으로 탈출하고자 했던 원정군은 결국 시라쿠사군에 의해 완전히 괴멸된다. 지휘관인 데모스테네스와 니키아스는 처형, 아테네 및 시칠리아, 이탈리아 출신은 모두 살해되었고 나머지는 노예로 팔려갔다고 한다.

이 원정에서 아테네는 160척의 아테네 직속 함선을 포함한 총 216척의 함선을 잃었고 도합 4만에 달하는 인력을 모두 상실, 그외에 원정군을 꾸리는 데 들어간 모든 비용인 4천 5백 탈란트을 허공에 날렸다. 이 당시의 전쟁전 아테네 1년 수입은 1천 탈란트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거의 5년치 예산이 한순간에 없어진 것이다. 또한 이전까지 전쟁을 지휘한 데모스테네스, 라마코스, 니키아스, 에우리메돈이 시칠리아에서 사망, 알키비아데스는 망명해 버리면서 가장 경험많은 장군들도 모두 상실했다.

게다가 당시의 시칠리아와 아테네간의 거리 및 해당 패전에서 살아서 도망친 사람이 거의 없었던 관계로 아테네는 어느 정도 시일이 흘러도 패전 사실 자체를 몰랐다. 당장 아테네인들이 이 소식을 들은건 교역을 하러 온 사람이 "시칠리아에서 아테네군 전멸했는데 아테네는 괜찮아보이네?"하는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이발사에게 얘기하고 혼비백산한 이발사가 손님도 내버려두고 광장으로 가서 이 소식을 전한뒤에야 시칠리아 원정군이 전멸한걸 알았을 정도다. 결국 역병에 이은 이러한 피해는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것이였다. 그리고 이 불쌍한 이발사는 도저히 소식을 믿을 수 없었던 시민들에게 괴담을 퍼뜨리도록 사주한 배후를 말하라고 고문을 당한다(...)

5. 전쟁 후기

5.1. 제국의 위기(BC 413~BC 411)

시칠리아에서의 돌이킬 수 없는 패배의 결과 아테네는 모든 것을 잃었고, 모든 그리스인들은 아테네가 곧 멸망할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또한 시칠리아 원정으로 인해 평화협정을 아테네가 먼저 깼다고 여긴 스파르타는 적극적인 공세에 나선다.

여기에 지금까지 참전하지 않았던 새로운 세력이 참전한다. 페르시아가 개입한 것이다. 아테네가 차지하고 있던 이오니아 지역을 회복하길 바랬던 페르시아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개입의 여지를 엿본다.

아테네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던 종속국들은 아테네의 패배로 힘이 다했다 여기고 스파르타에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한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아직 바다로 나가기엔 너무 소극적이였고, 그 사이 이를 눈치챈 아테네는 그야말로 안간힘을 써서 대규모 함대를 파견했다. 물론 앞서의 피해로 인해 전쟁 초기 함대의 절반에 불과하였고 질도 떨어졌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이상 앞서 언급한 반란가능지역을 미리 선점해서 반란을 사전에 진압하고자 한다. 그러나 키오스와 밀레토스가 반란을 일으켜 떨여져 나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러나 아테네의 신속한 개입으로 인해 레스보스와 사모스의 반란은 저지되었다. 두 폴리스 모두 에게 해의 섬에 위치하며, 종속국들 중 몇 안되는 자체 함대 보유국들이므로 적어도 해상에서 아테네를 심각하게 방해할 그리스계 세력이 등장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이후 아테네는 키오스를 포위.

이러한 전황에서 페르시아는 스파르타의 편에 들어 전쟁에 개입한다. 스파르타 함대에 대한 재정지원과 지상군 지원을 시행한 것이다. 이에 스파르타는 다시 힘을 얻고, 로도스 등 새로운 반란세력을 합세시킨다.

이 과정에서 아테네 내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과두파가 잠시 실권을 잡으나 사모스의 아테네 함대는 계속 민주정을 유지할 것을 결의하고, 아테네 내의 중도파가 이에 호응해 과두파를 다시 추방한다. 이 혼란 가운데 아테네에겐 중요했던 에우보이아와 헬레스폰토스의 도시까지 반란에 가세했다. 이건 매우 심각한 사태인데 에우보이아의 경우 전쟁 초기부터 아테네의 재산과 가족을 에우보이아에 상당수 옮겨놓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고, 헬레스폰토스의 도시들의 경우 아테네는 흑해 연안에서 식량을 수입해 먹고살았기 때문에 중요한 식량공급로라서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탈취당하면 아테네는 굶어죽기 때문이다. 결국 아테네는 심각한 위기에 빠진다.

5.2. 아테네의 반격과 전쟁의 패배(BC 411~BC 404)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아테네는 최후의 힘을 동원해 반격에 나선다. 가장 중요한 식량공급로를 다시 되찾기로 결의한 아테네는 모든 함대를 동원해 헬레스폰토스로 파견해 스파르타와 맞선다. 키노세마 해전아비도스 해전에서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자금과 지상군 지원까지 받는 스파르타 해군을 연파, 키지코스 해전에서 완전히 전멸시키고 페르시아군까지도 몰아낸다. 이후 이지역의 반란국들을 다시끔 제압해 식량수송로를 다시 뚫는다. 그리고 이오니아 일대를 남하하면서 대부분의 반란국들을 제압해 전황을 다시 유리하게 끌고 간다. 이 결과 알키비아데스는 복귀한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아직 물러나지 않았고, 리산드로스를 해군 사령관에 임명해 새롭게 함대를 구축한다. 리산드로스는 페르시아 키로스 왕자의 마음을 사는 데 성공, 막대한 지금지원을 약속받고 그 힘으로 우수한 뱃사람들을 끌어들이며 대규모 함대를 구축, 노티온 전투에서 승리해 알키비아데스를 다시 추방당하게 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이로서 더 이상의 제대로 된 영향력을 가지지 못하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직후 도피처에서 암살된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제도상 리산드로스는 1년밖에는 지휘할 수 없었고, 리산드로스가 물러난 사이 아테네는 신전 지붕의 금을 긁어모으고 노꾼으로 자유를 약속한 노예들을 대규모로 탑승시켜가면서까지 최후의 대함대를 띄워 스파르타 해군을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대파. 일시적으로 다시 해상 지배권을 획득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이전과 달리 아테네 해군이 질적으로 열세였다. 리산드로스가 키로스의 지원금을 이용하여 높은 보수를 미끼로 아테네 해군 노잡이들의 이탈을 유도해왔고 아테네는 경험도 없는 자들을 노잡이로 충원할 수밖에 없었다. 덤으로 스파르타 해군의 60% 이상을 파괴한 대승이었으나 전투 직후 폭풍을 만나 생존자 구조와 시신 수습을 포기하고 철수하였고 이것에 아테네 시민들이 분노하여 스스로 경험있는 장군들을 처형하는 병크를 터뜨렸다. 이중에는 페리클레스의 동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 전투를 승리로 마치고나자마자 이렇게 사형당했다.

이에 놀란 스파르타는 법규를 어겨가면서까지 리산드로스를 복귀시켜서 해군을 재건하고,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아테네의 마지막 해군을 격파한다. 아이고스포타모이에서 아테네 해군은 나흘간 스파르타 해군에게 싸움을 걸었으나 리산드로스는 요지부동이었다. 스파르타군이 쫄았다고 생각하고 깔보게 된 데다 지칠 대로 지친 아테네군은 닷새째 되던 날 하선하자마자 음식을 찾거나 잠을 자러 뿔뿔히 흩어졌다. 이 때 리산드로스가 총공격을 명령하여 스파르타군이 신속히 기습해오자 아테네 수병들은 우왕좌왕하다 괴멸당하고 만다. 이후 아테네는 수륙으로 포위된 상황에서도 6개월을 더 버텼지만 결국 항복하게 된다.

6. 전쟁 이후

6.1. 평화 협정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이 아테네를 완전히 초토화하고 노예로 팔려갈 것을 두려워했지만, 그리고 테베와 코린트 등은 실제로 그렇게 할 것을 요구했지만 스파르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 스파르타는 아테네에게 아래 사항을 요구했고, 이것저것 가릴 여지가 없었던 아테네는 이를 수용한다.

  • 장벽을 해체할 것 : 스파르타의 지속적인 약탈에도 견딘 아테네의 성벽과 외항인 피레우스까지 연결되는 성벽을 파괴하라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말해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이다.

  • 함대를 해체할 것 : 아테네는 해군 방면에서 엄청난 능력을 거의 최후까지 발휘했으므로 함대를 해체하여 아테네의 공격능력을 상실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 제국을 해체할 것 : 델로스 동맹이 사실상 아테네 제국으로 변질되면서 동맹국에서 동맹의 존속을 위해 모금한 돈을 아테네가 함부로 자국을 위해 사용했으므로 해당 동맹의 해체로 아테네의 자금줄을 막으려고 한 것이다.

  • 정치제도를 민주정에서 과두정으로 바꿀 것 : 이것은 스파르타의 정치 체제도 비슷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며, 과두정으로 바뀌면 상대적으로 몇 안되는 과두정치가만 스파르타가 견제하기 쉽게 때문이다.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보유했던 제국을 손아귀에 거머쥐어 그리스 세계의 슈퍼파워로 등극하나, 스파르타의 특성상 페르시아의 지원 없이는 대규모 함대를 유지할 수 없었고, 이를 무리한 공물 징수로 극복하려 하였으나 반발을 사서 결국 제국을 상실한다.

그리고 페르시아는 스파르타의 승리로 이오니아 일대의 지배권을 다시 얻는데 성공한다.

6.2. 전쟁 이후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강요로 함대, 제국, 장벽, 민주정을 잃었다. 그러나 아테네는 딱 1년만에 테베의 지원 하에 민주정을 복구한다. 이후 나머지도 되찾고자 나섰고, 코린트 전쟁(BC 395∼BC 386)을 통해 장벽, 함대, 제국도 되찾아 다시 강대국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돌아온 아테네 제국에 반발한 동맹국들이 들고 일어나는 동맹시 전쟁을 겪어야 했으며, 전쟁 이전 아테네 민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4만여 시민은 전쟁 직후 1만 5천으로 감소, 코린트 전쟁 이후에도 고작해야 2만 5천 정도까지 복구되었을 뿐이였다. 민회에 참석할 수 없는 일반인들의 피해도 커서, 전쟁 이후 아테네는 대략 전쟁 이전의 1/3 정도의 인구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된다.

스파르타는 승리를 거두었고 제국을 얻었지만 이는 스파르타 입장에서는 오히려 독이였다.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 거두어들인 공물은 제국 구성원의 반발을 샀고, 이오니아 일대 도시들을 페르시아에 넘겨준 것은 대의명분에 심각한 손상을 끼쳤다. 원래 그리스가 동맹을 맺는 목적 자체가 페르시아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서였고 이들의 리더는 이 침략에 대비해 이끌어야 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동맹의 맹주가 알아서 동맹 구성원들을 적국인 페르시아에게 바친 것이니 이는 대의명분에 심각한 손상을 주는 행위였다.

이에 더해서 제국에서 들어오는 부는 스파르타의 계층분화를 가속화시켜 국가체제에 상당한 위기를 안겨 준다. 이후 벌어진 코린트 전쟁에서 스파르타는 지상전에서는 선전했지만 해전에서는 아테네에게 참패를 맛보았고, 결국 이오니아 전역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대가로 페르시아를 끌어들여 평화를 간청해야 했다. 그 뒤에 다시 일어난 테베와의 전쟁에서 스파르타는 패배, 남하한 테베는 스파르타에 헤일로타이로 종속되어 있던 메시이나를 해방시켜 스파르타를 반조각으로 만들어 버린다.

테베와 코린트 등 스파르타의 구 동맹국들은 아테네를 살려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전후처리에 불만을 가졌고, 스파르타가 독재화되어 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에 이들은 놀랍게도 아르고스와 아테네를 끌어들여(…) 스파르타와 코린트 전쟁(BC 395∼BC 386)을 벌인다. 이 전쟁에서 우위를 점한 뒤 테베는 다시 스파르타와 전쟁을 벌여 욱트라 전투에서 사선진을 통해 스파르타를 격파, 그리스의 패권을 잡으나 에파미논다스가 만티네아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패권을 상실한다. 이후 그리스 세계의 패권국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한편 북쪽에서 기회를 엿보던 마케도니아 왕국필리포스 2세가 왕위에 오르자, 군제개혁을 통해 군대를 부강하게 한 후 몰락해가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차례차례 격파하고 마지막 저항이었던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그리스 전체를 손에 넣었다.

페르시아는 이 전쟁으로 이오니아 일대의 지배권을 수복하나, 고질적인 내전으로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고, 알렉산드로스 3세에 의해 정복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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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때의 반란에 대해 명목상 동맹인 아테네의 지원군을 바로 돌려보냈다.
  • [2] 코린트는 메가라의 모도시였다. 코린트가 힘들여서 메가라를 세워놓았더니 배은망덕하게도 반기를 들었던 것.
  • [3] 코린트는 친스파르타 국가 중 가장 발언권이 세면서도 그 주도권을 나름 인정받는 지위였다. 따라서 스파르타도 애들 편을 안들어 줄 수가 없었던 것. 애초에 아테네가 싫기도 했고..
  • [4]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지방이다. 지역맹주로 테베와 코린트가 있고, 플라타이아이 또한 이 곳에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