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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

last modified: 2015-03-23 20:11:04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까지의 삶
2.2. 대 전쟁
2.3. 후계자 시절
2.4. 황제
3. 평가


이름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Titus Flavius Vespasianus)
출생지 로마
생몰년도 39년 12월 30일 ~ 81년 9월 13일 (41세)
재위기간 79년 6월 24일 ~ 81년 9월 13일 (2년 82일)

로마의 역대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플라비우스 왕조 플라비우스 왕조 플라비우스 왕조

1. 개요

로마 제국의 14대 황제이자 두 번째 세습왕조인 플라비우스 왕조의 두 번째 황제. 황제로서 풀네임은 티투스 플라비우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Titus Flavius Caesar Vespasianus Augustus).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장남이자 도미티아누스의 친형. 그의 시대에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콜로세움)이 완공되었고, 로마시대 대참사 중 하나인 수비오 화산 폭발(폼페이 매몰)이 있었다. 참고로 신약성경에 나오는 '디도 장군'이 바로 티투스이다.

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까지의 삶

39년에 로마에서 기사계급출신의 직업군인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와 페렌티움 출신의 기사의 딸이었던 도미틸라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타고난 이름(본명)은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였으며, 형제로는 아우 도미티아누스, 여자형제로는 도미틸라가 있다.

티투스는 팔라티누스 황궁에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후계자들과 함께 학문을 배웠다. 특히 그는 동갑내기이자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 리타니쿠스와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친구였던 브리타니쿠스가 네로에 의해 독살되었을 때, 티투스는 바로 옆에서 그의 독을 시험하느라 오랫동안 마루에 엎드려 있었다. 이 일을 티투스의 인생에서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이었고, 후에 그가 황제가 되자, 티투스는 젊은 나이에 죽은 옛 친구 브리타니쿠스의 상을 건립해서 죽은 친구를 기렸다.

성년식 이후, 61년부터 63년에 걸쳐 병사장(트리브누스 미리튬)으로 취임해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함께 브리타니아,게르마니아에서 군인장교로 복무했다. 64년에 로마로 돌아와 아레키나 테르트라와 결혼했으나 곧 사별하고 다시 65년에 마르키아 프루니라와 재혼했다. 새 아내였던 마르키아 프루니라는 생가가 제위 후계자였던 네로의 반대 세력에 속했기에 그는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했고 거기다 그 해 원로원 의원 피소가 주도한 네로 암살 의혹 사건으로 반강제적으로 아내와 이혼해야 했다. 이들 사이에서는 딸 율리아가 있었는데 티투스는 마르키아 프라니라와 강제적으로 이혼한 이후에는 평생토록 정식 결혼을 하지 않았다.

2.2. 대 전쟁

티투스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마 이스라엘 전쟁일 것이다. 네로 시대에 이스라엘의 민족주의 정당인 심당(질럿, 혁명당)에서 일으킨 이 전쟁은 가장 큰 반란 사건 중 하나였다. 이때 아버지였던 베스파시아누스가 67년 유대 전쟁을 진압하는 지휘관으로 임명되면서 팔레스타인으로 파견될 당시 형제 도미티아누스과 달리 티투스는 아버지를 따라갔다. 티투스의 직책은 중무장 보병 지휘관이었으며, 재무관으로서도 병영에서 활동했다.

68년, 네로의 자살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끝나고 새로이 갈바가 황제에 오르자, 이스라엘인들과의 전쟁을 지휘 중인 아버지의 대리인으로 갈바에 대한 충성서약을 위해 로마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그 사이에 오토가 황제가 되었고, 다시 비텔리우스가 오토와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오토가 자살하고 로마군의 피냄새가 향기롭다고 한 돼지비텔리우스가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티투스는 로마제국 서방지역이 혼란에 빠져 있으므로 상황을 봐서 충성여부를 판단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팔레스타인으로 다시 귀환한다. 그리고 다시 군단장으로 복귀한다. 같은 해,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시리아 속주 총독 키아누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자, 티투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사실대로 아버지를 지지했고, 무키아누스가 본인 기준에서는 명백한 반역자 비텔리우스를 토벌하기 위해 로마로 향하고 난뒤, 아버지마저 로마로 진군하자 유대 전쟁 총사령관으로 새로이 취임해서 유대 전쟁을 총지휘하게 된다.[1]

70년에는 유대 전쟁의 최고 지휘자로서 끝끝내 난공불락의 요새에서 결사항쟁하던 열심당의 예루살렘을 함락시켰고 예루살렘 성전까지 부숴버렸다.

73년, 여전히 항복하지 않는 열심당 최후의 보루, 마사다 요새를 제외한 팔레스타인의 유대 반란을 진압했다. 이때 티투스는 항복한 이스라엘인들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었지만, 항복하지 않다가 잡힌 포로들에 대해서는 하루에 약 500명씩 십자가형으로 처형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인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티투스는 예루살렘의 공격을 몹시 주저했다고 진술하고 있다.[2]

하지만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다. 이 한 가지 사건으로 유태교는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고, 유대교인들과 그리스도교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이 생겨나게 되었다.[3] 왜냐하면 과거 예루살렘 성전이 있을 때에는 이스라엘인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다 같이 이 곳에서 예배를 보았지만, 성전이 파괴된 뒤에는 둘 사이를 묶어 줄 가시적 공통 제도가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2.3. 후계자 시절

71년 개선하여 로마로 돌아온 티투스는 성대한 유대 전쟁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때의 개선식 모습은 로마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티투스 개선문에 남아 있다. 이후, 그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개인 군대인 황실 근위대의 지휘를 맡았다. 이후, 아버지와 공동 통치를 하며 호민관 권한을 부여받았고, 2년 뒤인 73년에는 감찰관을 아버지와 함께 지내면서 몇 차례에 걸쳐서 집정관을 지냈다. 이처럼 티투스는 제위 계승자이자 아버지의 닝 메이트로 정치가 겸 행정가로의 역량을 키워나갔다.

이때 일화도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양모 가공업자들에게 매긴 진짜 오줌이다 오줌세에 관한 것이다. 당시 로마의 양모 가공업자들은 양모 특유의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공공화장실의 오줌을 공짜로 이용했다. 이런 양모업자들의 무임승차에 대해 베스파시아누스는 아버지가 세금 징수업자였던 것을 이어받았는지 몰라도 과감하게 오줌세를 거뒀다. 이에 양모업자들은 어차피 안 쓰는 오줌을 이용한다고 세금을 때리는 세상이 어디 있으냐고 하며 크게 반발했고, 티투스 역시 안 쓰는 오줌 쓴다고 심하다 같은 생각이었기에 아버지에게 이를 따졌는데 이때 베스파시아누스가 은화 한 줌을 아들 코앞에 쥐어 주며 "자 맡아봐라. 오줌 냄새가 나느냐?" 라고 촌철살인급의 대답을 하며 해프닝으로 반발을 수습했다고 한다. 티투스가 현대인이었다면 돈에 각종 잡균이나 오물이 묻어 있어 위생적으로 더럽다는 사실로 역공할 수 있었을 텐데

2.4. 황제

79년 6월 24일에 황제로 취임했다. 이때 믿지 못할 수에토니우스는 로마인들이 티투스가 "제2의 네로"가 될까봐 걱정했다고 한다. 이유는 그가 유대전쟁을 치루던 과정에서 만난 이스라엘공주 베레니케에게 홀딱 빠져 그녀와 정식 결혼하려고 한 일화때문이었다고 한다.[4] 당시 로마의 속주였던 이스라엘의 공주가 누구였는가 애매모호하지만 헤로데스왕 계열의 여인으로 추측된다. 인민들의 반발을 우려했다고 하지만 티투스의 즉위는 아무 소란도, 걱정도 없었다.

티투스가 베레니케와의 사랑을 포기했다는 소식은 로마시민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로마인들은 티투스가 성격이 소탈한데다가 국가를 위해 사랑까지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그를 열렬히 사랑해줬다.[5] 하지만 티투스는 죽기 전까지 오래 살지도 못했지만 끝내 결혼하지 않았다.[6]

더해서 검투사 시합을 빈번히 개최하거나 선제 베스파시아누스를 야유하는 희극이 상연되어도 어떤 심한 책망을 하지 않았기에, 인기는 높아졌다. 관대한 황제 이는 시민과의 관계에 국한되지 않았다. 티투스는 원로원과의 관계도 양호했다.[7] 실제로 티투스는 짦은 제위기간이긴 했지만 어떤 죄를 묻더라도 '반역죄'로서는 처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고, 이를 죽기 전까지 지켰다. 더해서 티투스는 자신이 아무 것도 좋은 것을 하지 못한 경우에는 주변인들에게 '하루를 잃어 버렸다'고 한탄까지 했다.

이처럼 티투스는 선정으로 국민, 원로원들로부터 환영을 받았지만, 온갖 대사건들이 잭팟 터지듯이 줄줄이 일어나, 재해대책을 세우고 사태를 수습하느라 쉴 수가 없었다. 대표적으로 폼페이의 참사가 그의 재위 2달만에 일어났다(...) 이 사건들은 하나만 터진 게 아니고, 말 그대로 연달아 줄줄이 대사건들[8]들이었다.

그의 치세 중 가장 큰 대사건으로는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인한 폼페이 시(市)의 매몰 등이 있었다. 이때 나폴리 근교의 폼페이·헤르쿨라네움·스타비아이 등의 도시들도 멸망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화산에 초토화되었다. 따라서 그는 베수비오 화산에 피해를 입은 파니아지방에 지원을 보냈으며 신속한 대처로 위기를 수습했다.

80년에는 로마에서 대화재, 페스트의 만연이라는 불행한 사건 등이 잇달았다. 4일 간 벌어진 대화재는 티투스에게 강제적으로 로마 재건 및 리모델링을 하도록 했다. 더군다나 페스트까지 돌아서 질병퇴치 및 구제사업에 진력해야만 했다. 따라서 티투스는 황제로서 여가를 즐길 시간도 없이 재해대책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는 직접 재해현장에 나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진두지휘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로마시민들은 그에게 '인류의 총아'로 경모했다.

같은 해, 오늘날 우리에게 콜로세움으로 더 잘 알려진 라비우스 원형경기장 건설 사업을 마무리되었다. 따라서 티투스는 준공 기념으로 100일이 넘도록 검투사들과 맹수, 죄수들에겐 지옥이었던 축하행사를 벌였다.

하지만 열성적으로 재해지 구호에 힘쓰던 티투스는 축하행사 와중에도 재해대책에 몰두해야만 했고, 치세 2년 만에 열병으로 쓰려져 죽고 말았다(81년 9월 13일).[9]

3. 평가

치세 2년 내내 고생만 하다가 2년만에 죽었던 황제. 거기에다 나이도 로마인들이 생각하는 꽃다운 41세.

평판이 좋은 황제였으나 동시대 로마인들 중 빈정대기 좋아하는 사람은 이렇게 평했다.

치세가 짧으면 누구라도 좋은 황제가 될 수 있다.
갈바 : ??
오토 : ??
비텔리우스 : ??

네로 황제 사후 난립한 단명 황제들이 어떤 치세들을 했는지 살펴보면 그야말로 자기나라 역사도 모르는 어불성설에 불과한 말이지만, 실제로 이렇게 평했었다 하니... 이로서 우리는 옛날에도 자기나라 역사조차 안배웠던 무식한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수 있다

훗날 로마의 전기작가인 에토니우스이례적으로 티투스를 가리켜 잘생기고 교양도 있으며,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예루살렘 궁궐을 부궜다고 하여 이스라엘의 이스라엘인 사이에선 로마와 티투스를 아돌프 히틀러 급으로 증오받고 있다. 이런 이유로 로마에 티투스의 문이라는 건물과 이름이 들어간 다리를 지날 때, 자칭 정통파 이스라엘인, 즉 하레디들은 여길 지나는 것조차도 금기시한다고 한다. 하지만, 해외 이스라엘인들도 각자 생각이 다르다고 한다. 개인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티투스는 이스라엘인을 마구 학살하지도 않았으며 이스라엘 멸망 이후 분열된 이스라엘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던 점도 있으니 히틀러급으로 보는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하면서 조금은 좋게 보는 시각도 꽤 된다. 실제로 열심당의 최후 항전 당시, 열심당들은 항쟁을 하면서 가축을 죽여 피를 마시고 저항했고, 함락되자 남녀노소가 모두 자결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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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여러 가지로 필요한 결정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일단 맡고 있는 유대 전쟁을 확실히 끝장내야 했으며, 티투스에게 유대 전쟁을 맏긴 것은 후계자로서 티투스의 인지도를 올리고 - 실제로 이 전쟁에서의 승리로 티투스는 티투스 개선문을 받는다 - 민중의 지지를 받게 하는 데 필요한 전략이었다.
  • [2] 이스라엘인들의 성전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라고 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 요세푸스의 진술에는 약간의 과장이 있긴 하다. 그러나 티투스는 로마 역사가들에게도 사려 깊은 통치자로 기억되고 있고, 전후처리 과정에서 항복한 이스라엘인들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었다.
  • [3]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티투스의 성전 파괴는 그를 아직까지 증오하는 원인이 되었다. 더해서 유대교에 있어서는 치명적인 손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이스라엘인들에 대한 하나의 징벌이었고 생각하기도 했다. 특히,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하지만 복음서 자체가 성전파괴사건 이후에 씌어졌음을 감안해야 한다).
  • [4] 티투스는 황태자가 된 후 돌싱이었으므로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경기장에서 둘이 함께 있는 걸 본 시민들은 그들에게 야유를 보냈고, 티투스는 끝내 사랑을 포기해야만 했다.시오노 나나미의 주장에 의하면 로마인들은 이 커플에 대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로마인들이 대체로 외국인에게 관대했음에도 이런 전력과 함께 외국인이 로마의 정치에 관계하는 것에는 선을 그었기에 야유가 쏟아졌다고 한다. 실제로 티투스는 로마에 방문한 베레니케를 일부러 멀리하며 노력했지만, 매년 공주 생일에 선물도 보내고 관심을 가지며 사랑 자체를 포기하지 않았다.
  • [5] 이것은 친인척인 도미티아누스와는 대조되는 부분인데 도미티아누스는 거만하고 의심많고 사치스럽다고 엄청 까였다.
  • [6] 사실 후계문제에 대한 걱정은 없었는데 어차피 티투스에게는 12살 차이가 나는 형제 도미티아누스가 있었다. 따라서 아버지의 플랜 아래에서 그가 죽으면 도미티아누스에게 자리를 물려주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티투스가 형제가 성숙되기도 전에 너무 일찍 죽어버렸다는 거지만...
  • [7] 이 부분 역시 친형제와 대비되는 부분이다. 도미티아누스는 수 많은 고소 등으로 사이가 극악이었다.
  • [8] 2011년 3월에 일어난 도호쿠 대지진 같은 사건이 연달아 계속 터진다고 생각해보자. 끔찍하다. 그리고 이때 에다노 관방장관이 나흘간 잠도 못 자면서 사태수습을 하느라 얼굴이 반쪽이 됐던 걸 생각해보자. 이런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으니 이를 수습해야 했던 티투스의 건강에도 끔찍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역대 로마 황제의 재위 기간이 20년을 넘긴 경우는 정말 드물었다. 체계가 완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로마 황제는 모든 인사와 중요 서류 결재를 맡아야 했는데, 이것은 당연히 엄청난 격무이고 신체적으로 무리가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제정을 슬금슬금 구축해가는 대사업을 진행하면서 44년간 황제 자리를 맡은 아우구스투스는...
  • [9] 수에토니우스는 그의 사인을 말라리아, 또는 빨리 황위를 얻고 싶었던 도미티아누스에 의한 독살 가능성이 있다고도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