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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팔가르 해전

last modified: 2018-08-24 16:59:22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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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Philippe Crépin, 1807작[1]

Contents

1. 개요
2. 배경
3. 전투
3.1. 르두터블과 빅토리의 혈전
3.2. 전투의 종료
4. 결과
5. 전투의 영향
6. 이후
7. 관련 항목

1. 개요

나폴레옹 전쟁 중이던 1805년 10월 21일 에스파냐 남서쪽의 트라팔가르 곶에서 벌어진 영국 해군프랑스, 에스파냐 연합함대의 결전. 보통 국내에선 트라팔가 해전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는 이상하게 나폴레옹이 영국 침공을 위해 영국 함대를 괴멸시키고자 했으나 패하여 좌절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영국 침공이 목적이긴 했으나 나폴레옹의 영국 침공은 트라팔가르 해전 이전에 이미 좌절된 상태였다.

2. 배경

이미 유럽대륙을 거의 재패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마지막 장애물 영국을 박살내고자 했다. 그러나 해군력으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온다는 결론은 천재적 전략가인 나폴레옹 본인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이집트 원정 당시 아부키르 만 해전의 패배를 경험하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영국 해군을 전부 섬멸할 필요까지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단 24시간이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에게 단 24시간만 주어진다면 영불해협을 건너 15만의 지상군을 영국에 상륙시킬 수 있다고 계산했다. 상륙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지상전에서 그때까지 불패를 자랑하던 천재적인 전략가이자 전술가인 나폴레옹 본인의 몫이었으므로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때는 이른바 나폴레옹의 전성기 시절이어서 후반기 보여주는 판단착오나 실수는 거의 없었다. 반면, 대불동맹군은 아직 나폴레옹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해답을 찾지 못하고 신나게 털리기만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24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프랑스 해군의 몫이었다. 나폴레옹은 해군으로 하여금 영불해협 근처의 영국 주력함대를 유인하여 영국해군의 전력을 분산시킨후, 영불해협에서 수송함대가 무사히 해협을 횡단할 시간을 벌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해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해군에 정확한 시간에 육군식으로 맞추는 요구를 했고, 범선 시대에 해군이 그런 정확한 타임테이블을 맞출 수는 없었다. 물론 수적으로 우세한 영국 함대를 분산시킨후 각개 격파후에 시간을 끈다는 자체는 좋았지만 전열함과 바다의 특성을 간과한 것은 나폴레옹의 착각이었다고 할수있다.

그래도 빌뇌브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1805년 4월에 성공적으로 서인도제도를 습격하는 데 성공했다. 지중해에 있던 호레이쇼 넬슨은 황급히 서인도제도로 달려갔다. 그러나 빌뇌브 함대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귀환하던 중 칼더 제독의 영국군 함대와 만나 교착에 빠졌다.(피니스터리 곶 해전. 1805. 7. 22) 그리고 자신의 연합함대의 부족한 실력을 현실적으로 잘알고있어서 처음부터 자신없던 빌뇌브는 영불해협으로 항진하지 않고 카디즈로 대피했다. 이 순간에 이미 나폴레옹의 영국 본토 진공계획은 무산되었다.

이윽고 나폴레옹은 빌뇌브에게 이탈리아 공격을 위해 육군 수송을 지시하며 나폴리로 향해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넬슨 함대가 유럽으로 돌아와 프랑스-에스파냐 주력함대를 격멸하기 위해 모든 준비를 마친 뒤였다. 애초에 단순히 겁쟁이라서가 아니라 정말로 자신의 함대 실력 수준을 잘알던 빌뇌브는 함대 수리및 보급문제로 출항을 보류 중이었으나 여기에 크게 화가 난 나폴레옹 1세 황제가 자신의 후임으로 프랑수아 로실리 제독을 보낸다는 정보를 접하고 출항을 결정한다. 그런데 하필 이날은 카디즈 항 앞바다의 바람이 약하고 파도가 높은 날이었다. 잠시후에 서로 마주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와 영국함대는 교전하게 된다.

3. 전투

10월 20일, 카디즈를 출항하여 항해하던 연합함대의 시야에 대규모 전열함들로 구성된 함대가 포착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넬슨이 지휘하는 영국 함대였다. 영국 함대는 전열함 27척과 프리깃 6척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프랑스는 전열함 18척과 프리깃 8척, 에스파냐는 전열함 15척으로 함대를 구성한 상태였다.

서로 대치 중이던 양군은 10월 21일, 넬슨은 영국은 제군들이 각자 의무를 완수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는 메시지를 깃발 신호로 보낸 후, 선제포격과 돌격을 시작하면서 전투를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에스파냐 함대의 진형 한가운데를 돌파, 단종진을 이룬 채로 전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차단하고 전투 현장에서의 숫적 우위를 확보하여 각개격파하고자 했다. 이 전술에 연합함대는 삽시간에 분단되어 전투지휘가 이루어지지 않고 효율적인 전투를 수행하지 못한 채 개별 선박 단위로 저항하다 격파당했다.

당시 함선들은 장교들과 선원들이 많은 경험을 쌓지 않는 이상 원하는대로 기동하기가 힘들었고, 함대전에서 일단 난전에 돌입하게 되면 당시의 신호체계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따라서 선원들의 숙련도나 장교들의 경험과 대응능력이 떨어지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가능하면 난전을 피하고 어떻게든 전열을 구성한 채로, 즉 단순하고 정적인 기동만을 하면서 큰 변화가 없는 형태로 전투를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영국 함대가 전열 가운데를 쪼개고 들어오면서 전투는 난투전 양상이 되었고 프랑스-스페인 함대는 거의 일방적으로 얻어맞았다. 이렇게 영국 함대가 이전의 상식인 단종진과 전열전술을 수행하지 않은 이유는 아래와 같다. 원래 영국은 전열전술에 집착하여 지나치게 경직된 함대 운용을 한 나머지 노르카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에게 크게 패하고, 희생양으로 책임자인 빙 제독을 처형한 뒤, 이 전열전술의 문제점에 대한 여러가지 연구를 하다 대안을 한가지 내놓는데, 이른바 중앙돌파 전술이었다. 즉, 이는 적의 전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무너뜨린 다음. 적을 신나게 두들기는 전술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유기적인 신호체계와 함대 운용교리의 정리가 필요했다, 그리고 중앙 돌파 전술은 난전시 깃발에 의한 신호가 무력해지는 것을 염두해 두었기 때문에 전열내에 적함이 없으면 마냥 노는게 아니라 지시가 없더라도 자발적으로 아군함을 지원하는 식으로 움직일수 있게끔 짜여졌고, 트라팔가르 해전 전날, 넬슨 제독은 각 함선의 지휘관들을 모아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이해하게 하였고 그 때문에 해군성에서 함장들에게 따지면 언제나처럼 자신이 모두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면서 그렇게 독립적으로 행동하도록 하였다. 이 중앙 돌파 전술이 채택되자 마자 해전의 양상은 아군함 2척이 적함 1척을 사이에 끼고 두들기는 양상이 자주 보이게 된다.

물론 전열전술이 전혀 쓸모없어졌다거나 영국 함대가 전열 전술을 전혀 사용 안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전열 돌파전술은 어디까지나 트라팔가르 해전같이 훈련도와 조직력이 떨어진 함대상대로는 유효하지만 전열이 제대로 구성된 함대를 상대로는 오히려 아군이 큰 피해를 입을수도 있다.

3.1. 르두터블과 빅토리의 혈전

그 와중에 프랑스 74문 전열함 르두터블(Redoutable)이 영국함대 기함 빅토리에 접현, 돌격해오면서 백병전투가 발생했다. 함선의 덩치나 승무원 수로는 배가 크고 갑판이 높은 빅토리가 압도했으나, 르두터블은 이때 당시 프랑스 함대 승무원 중 가장 정예의 수병들을 태우고 있었고, 르두터블의 함장 장 루카스 함장은 카다즈에 숨어있는 동안 포격전으로는 영국함대에 상대가 안된다는걸 알고 열심히 머스킷 소총 사격과 수류탄 투척훈련에 선상 백병전 훈련을 시켰기 때문에 육박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실제로 백병전에 들어가자 빅토리호의 수병들은 상갑판에 모여있다가 르두터블에서 가한 다짜고짜 200개 이상의 수류탄 던지기 공격에 200개 이상의 수류탄이 거의 한꺼번에 폭발하면서 빅토리 수병들 수십명이 짐짝 던져지듯이 나가 떨어졌으며 르두터블의 마스트 위에서의 머스킷 소총사격에도 막대한 피해를 입고 넬슨 제독도 마스트 위에서의 저격수에 피격당해 그 부상으로 해전 종료 직후에 전사한다. 넬슨의 전사원인은 르두터블의 함장인 루카스 함장이 적극적으로 수류탄 투척 훈련, 장루 머스킷 사격훈련을 시킨것도 있지만 넬슨은 장루 사격에 의한 화재를 염려하여 장루사격을 금지한 점도 있었다. 거기다 부하들이 저격을 염려해 수수한 제복을 입도록 권유했지만 거절하고 늘 입던대로 금실장식에 훈장이 여럿 달아놓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띄었다. 결국은 장루 저격수에게 저격당하게 된다.

빅토리가 일방적으로 당한 것은 아니라서 달라붙은 르두터블에게 죽어라 포격을 해댔지만 배들끼리 너무 가까이 붙어 빅토리의 3층갑판이 더높은 상태에서 턱밑에 붙은 르두터블의 상갑판을 포격 할수는 없었다. 거기다가 르두터블은 초기에 포격을 하다가 빅토리가 가까이오자 포문을 닫고 전투를 할 수 있는 수병 대부분을 갑판과 돛대에 집합시켰기 때문에 르두터블 내부에는 수병이 거의 없어서 빅토리의 강력한 포격에도 선체내부의 사상자는 거의 없었으며 이렇다 보니 백병전에서 병력의 숫자도 르두터블이 앞서게 되었다. 빅토리가 전체 승무원은 800명 이상으로 르두터블보다 200명 넘게 더 많았지만 함포사격하는 운용인원들 때문에 빅토리 갑판위에는 300명 정도의 수병이 있었는데 대부분의 수병이 갑판에 집결한 르두터블보다 백병전이 가능한 병력이 열세었다고 한다. 그래서 르두터블이 정말로 빅토리를 나포하기 일보직전까지 갔었다.

그러나 함대전에서 한척의 힘만으로 이길수는 없는 법이라, 뒤따라오던 98문 전열함 테메레르호의 일제포격 한방에 등선육박전을 준비하던 르두터블의 수병들은 말 그대로 대부분 전멸당하고 만다. 무려 수병 손실률 81%! 전투보고서에 따르면 일제포격 한방에 상갑판에서 대기하던 수병 200여명이 죽어나갔다고 한다. 르두터블의 정원은 643명이고 전투 후 전사자가 300명, 부상자가 222명이다. 참고로 프랑스-에스파냐 함대에서 르두터블을 제외한 가장 높은 손실률을 보인건 아킬레스호의 64%, 영국 함대의 경우 벨레로폰의 35%가 가장 높은 손실률이었다. 이렇게 큰 손실을 기록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르두터블 수병들이 최후의 저항으로 테레메르호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소총사격을 하며 저항했으며 테메레르에서도 일부 사상자가 나왔다. 거기에 르두터블에서 던진 수류탄 한개가 테메레르의 탄약고 안까지 굴러들어가 근처에서 폭발해 운이 없으면 테메레르호의 탄약고에 불이 붙어 화재가 번지고 폭발할 뻔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테메레르가 공격했던 르두터블은 프랑스 해군 테메레르급 74문형 전열함중 하나였다는 것(...). 테메레르가 테메레르를 조진 셈이다.

하지만 르두터블 수병들의 투지는 아직 살아있어도 르두터블은 배자체의 펌프가 모두 완전히 박살나고 침수가 심해서 배가 더 버티지 못할 상황이라 루카스 함장은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테메레르호에 항복한다. 이후 빅토리호에서 르두터블로 넘어간 영국 수병들이 제일 먼저한건 펌프로 달려가 물 퍼내는걸 돕는 일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르두터블이 너무 많이 두들겨맞아서 르두터블의 자체 승무원으로는 침몰을 막을 수 없는 처지이기도 했으며, 당시 적선을 나포하면 나포 포상금이 많이 나왔지만, 침몰시키면 보상금이 거의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프랑스 전열함들은 같은 대포 문수의 전열함일때 영국제 전열함보다 배가 더 크고 여유있으며 더 튼튼했기 때문에 사람만 많이 달라붙으면 침몰을 막을수 있다는 점도 있다.

그리고 르두터블의 함장인 루카스는 항복한 사실에 대해 양측 모두에게 절대로 전혀 비난받지 않았다. 사실 106문함과 98문함이 74문 전열함 한대를 상대로 싸운거라 오히려 빅토리호와 테레메르호가 둘이 협공하고도 르두터블에게 진다는게 말이 안되는 것이었다. 거기에 74문급 르두터블은 처음부터 106문함 빅토리 한척 상대하기도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었으며 여기에 더해서 영국의 명제독인 호레이쇼 넬슨을 전사[2] 시켰으니 프랑스 입장에서는 르두터블의 경우만 한정해서 생각할 경우, 전열함 1척을 잃은것에 비하면 엄청난 이득이 온 셈이다. 이후 포로 교환으로 귀국한 루카스 함장은, 비록 불가항력으로 패배했으나 최선을 다해 싸운점과 넬슨 제독을 전사하게한 전공을 인정받아서 레종 도뇌르 훈장을 나폴레옹 황제로부터 직접 수여받았다. 일설에는 루카스 함장이 훈장을 받은후 해군성에 살아남은 르두터블의 승무원들에게도 자신과 같은 대우를 받을수 있게 해달라는 청원서를 올렸다는 말도 있다.

여담이지만 루카스 함장은 나중에 바스크 로드 해전에서도 74문 레굴러스호의 함장으로 배가 좌초되었는데도 화공선의 공격을 막아내고 배를 다시 항해할수있게 만들면서 해군내에서 또다시 전공을 세웠으며 나폴레옹의 완전 퇴위후에 은퇴하고 지내다 병으로 죽었다. 그의 장례식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루카스 함장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그중에는 루카스 함장의 옛날 부하들이나 극소수의 영국수병들도 참석했다고 한다.

3.2. 전투의 종료


하지만 르두터블의 저항은 말 그대로 혼자만의 분투에 불과해서 전세를 뒤집기에는 크게 부족했다. 프랑스 해군 74문 전열함 푸귀에가 르두터블을 구하러 테레메르에게 포격을 하며 다가오며 싸우다가 결국은 테레메르에게 화력에서 밀려 나포되는 등 다른 연합함대의 군함들이 전투를 포기한것은 아니었지만, 개별적으로 저항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물론 초반의 돌격 이후에도 한동안 연합함대의 저항이 후부 대열을 중심으로 해서 지속되었고, 영국 군함이 크게 파손된 사례도 존재하지만, 돌격으로 인해 빌뇌브 제독의 기함인 80문급 2단층 전열함 뷔상토르가 초반에 빅토리의 포격에 완전히 불구가 돼서 행동불능, 전투불능에 신호까지 올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므로 전열을 돌파당한 초전부터 연합함대는 제독의 지휘에서 이탈한 오합지졸이 된 것이다. 특히 단종진 선두에 있던 약 30% 정도의 함선들은 중앙과 후부 대열에서 뭔일이 벌어졌는지 상황파악도 못하다가 뒤늦게야 함선을 돌려서 전투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왔는데다가 중앙과 후부의 전황이 자신들의 패배로 결정되었다는 것을 귀신같이 깨닫고 곧바로 후퇴한다.

이렇게 해서 16시 30분을 기해 사실상 연합함대의 조직적 저항은 소멸했으며, 그 소식을 들은 직후 넬슨은 전사했다. 전투는 17시를 기해 종료되었으며 프랑스-에스파냐 함대는 말 그대로 전멸했다.

4. 결과

프랑스-에스파냐 함대는 합쳐서 1척이 격침당하고, 22척을 나포당하는 괴멸적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나포한 함선의 태반은 곧이어 들이닥친 태풍에 의해 침몰하는 바람에 영국 해군이 크게 증강되지는 못했다. 그 중에서 당시 최대의 화력를 자랑하는 전열함 산티시마 트리니다드의 손실은 영국도 아까워했다.

그러나 이게 프랑스-에스파냐 함대의 대손실을 가려주지는 못한다. 일단 격침당하거나 침몰당한 함선을 제외한 나머지 함선들은 탈출에 성공했다지만 양국은 3,238명이 전사하고 2,538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약 8,000명이 포로로 잡혔다는 것이 더 뼈아픈 상처였다. 함선이야 다시 건조하면 되지만 숙련된 선원은 그렇게 쉽게 구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의 프랑스 함대나 에스파냐 함대는 트라팔가르 해전 당시의 선원 숙련도보다 크게 떨어지는 선원들로 함대를 구성해야 했다. 포로 중에는 함대 총사령관인 빌뇌브 제독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석방된 후 3계월이 지나 어느 호텔방에서 점심 식사 후 식사용 나이프로 자살을 했다. 식사용 나이프로 자살을 했다는 점에서 자살이 아닌 타살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당시의 나이프는 육류를 썰어먹기 좋게 끝이 뾰족한 식칼에 가까웠기 때문에 할려고 하면 충분히 가능했다.

이 해전에서 영국 해군이 승리한 것 자체는 사실 대단한 사건이 아니다. 프랑스-에스파냐 함대는 숫자는 많았지만 선원들이나 장교들이나 거의 경험을 쌓지 못해서 질적으로 크게 뒤떨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 해군 승무원과 연합함대의 숙련도를 비교해보면 질적 차이가 확연히 나는 것이 대포 사격술만 해도 영국 해군은 1분에 한 발씩 쏠 수 있었던 것에 반해, 프랑스 해군은 2분에 1발 그리고 에스파냐 해군은 3~4분에 1발을 쏘는 안습인 숙련도를 자랑했고 근거리에서 교전이 이루어졌던 당시인 만큼 명중율은 별 상관이 없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영국해군은 똑같은 포문이어도 상대방보다 3~4배 높은 화력을 낼 수 있었다는 소리이다. 대포의 점화방식도 차이가 나서 영국은 부싯돌, 프랑스의 경우 심지를 사용한 덕에 함선이 흔들거릴때의 발사 명중률은 격차가 더 컸으며, 사격교리마저 너무나도 차이가 났다, 당시 영국은 풍상에서 선체 사격을 선호했고, 프랑스의 경우 풍하에서 돛대 사격을 선호했으며, 전자는 선체를 직접적으로 타격, 후자는 마스트와 상부 구조물을 노려 전체적인 전투력 저하를 유도하는 식이었으나, 당시 대포의 정밀도를 보면 전자가 제일 효율이 높았다.[3] 거기다 조함술까지 비교하면 연합함대는 출항하는 데만도 만 하루가 지났는데도 완료를 못한 참 할말없는 수준을 자랑했다.

이런 영국 대 프랑스, 에스파냐 연합군의 현격한 전력차를 보여주는 것이 트라팔가르 해전 바로 직전에 벌어졌던 피니스테라(Finisterre) 해전에서 함대 최후미에 있던 함장 불러(Sir Edward Buller)가 지휘하는 80문짜리 2단층 전열함 몰타(HMS Malta)호는 짙은 안개 덕분에 멋모르고 적함대 대열에 들어갔다가 혼자서 5척의 적함을 상대하게 되는 압도적 전력 차에도 불과하고 오히려 84문짜리 스페인 전함 산 라파(San Rafael) 및 74문 짜리 스페인 전함 피르메(Firme) 호를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전사자 5명,부상자 40명이라는 경미한 피해밖에 안 입었다. 그 이유는 몰타호가 영국해군에서도 소수만이 훈련되어 있는 양현 동시 대포사격 훈련이 되어있던 배들중 한척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몰타호는 선체일부의 손상이 조금 심해서 전투후에 수리를 필요로 했다고 한다[4].

이런 형국이었으니 역으로 넬슨이나 다른 유능한 영국제독이 입장이 바뀌어 연합 함대를 지휘했다고 해도 승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 빌뇌브의 지휘를 평가해보면 원래 목표 자체가 그 당시 수준으로는 불가능이었고 미숙련된 함대를 가지고 카리브해를 왕복해서 넬슨을 오판하게 하고 넬슨을 따돌리는데 성공했던 점을 고려해보면 실력 자체는 결코 넬슨에 뒤떨어지지 않았고 넬슨이 기존 전열전술 대신 함대를 분열후 각개 격파하는 전열 파괴 전술을 쓸것이라는것을 충분히 예측을 했으니 명장급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유능한 지휘관에 속했다. 단지 그가 지휘해야 할 함대의 수준이 저급이었으니 다 알고 있어도 혼자서 도저히 어쩔수 없었긴 했지만 말이다.

5. 전투의 영향


트라팔가르 해전은 당장의 전역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고대하던 24시간 확보에 실패한 나폴레옹은 실망하지 않고 이미 영국원정군의 방향을 되돌려 오스트리아 전쟁을 단행한 상태였다. 이 단호한 결단과 민첩한 기동, 그리고 나폴레옹의 천재적 전략전술에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격파되었다. 대륙 동맹국들이 격파되니 영국이라고 별수 없었다.

또한 트라팔가르 해전 이후 나폴레옹이 직접 영국을 침공할 수 없게 됨으로써 대륙 봉쇄령 및 러시아 침공으로 이어졌으니 전략적 의미도 만만치 않게 있다는 주장도 있으나, 어차피 당시 프랑스 함대의 전력으로는 영국 함대와 전면 대결은 무리였고,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은 나폴레옹 본인이다. 당장 그가 총재정부 시절에 제출한 보고서에서도 '현재 프랑스의 해군 전력으로는 영국 침공은 불가'하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트라팔가르 해전이 없어 프랑스 함대 전력이 무사히 보전되었다 하더라도 1,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해군처럼 항구에만 틀혀밖혀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기본 중 기본인 본진 공략을 할수없는 나폴레옹이 쓸 수 있는 수는 극히 제한적이었으니 전투가 있었던 없었던 대륙봉쇄령은 시간문제이지 결국엔 시행되었을 것이고, 러시아 정벌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6. 이후

영국 트라팔가 광장에 가면 당시 넬슨이 탑승했던 기함 빅토리호의 마스트 높이와 같은 55m짜리 기둥 위에서 영불해협을 바라보는 넬슨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넬슨 동상 주위엔 네 마리 사자 동상이 있는데 이 네 마리 사자 앉은 모습이 너무 어색해서 프랑스 애들이 두고 두고 씹는다. 사자영국의 상징인데 너넨 너네 나라 상징 동물 앉은 자세도 모르냐고(...). 영국 정부도 이 옥의 티를 많이 아쉬워한다. 그 큰 네마리 청동 사자 상은 해전에서 승리 후 적 프랑스 함대를 가져다 녹여 만든 것이기에 더더욱(...)

영국 해군은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꾸준히 관함식을 열고 있으며, 자국의 공격원잠을 트라팔가급으로 명명하기도 했다.

2005년 6월 28일에는 트라팔가르 해전 200주년을 기념해 국제관함식이 열렸다. 40여개 국의 200척 이상의 군함들이 모여 엄청난 장관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충무공 이순신급 1번함인 충무공 이순신함이 참가했다. 이 관함식에는 트라팔가르 해전의 패전국인 프랑스와 에스파냐도 함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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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그림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으로, 영국 해군의 기함 HMS 빅토리호와 프랑스 해군의 르두터블(Redoutable)호가 혈전을 벌이는 가운데 극적으로 구원군인 테메레르가 접근, 반격을 가하는 장면이다. 자세한 설명은 아래 참조.
  • [2] 실제로 넬슨 사후 영국 해군 지도부는 그렇게 유능하다고 할 수 없는 제독들이 차지하게 된다. 트라팔가가 나폴레옹 전쟁 최후의 대규모 해전이었으니 망정이지….
  • [3] 단, 풍하에서 돛대사격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 쏜다는, 위치 상의 특성 덕에 전장이탈이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마침 주로 쏘게 되는 부분도 적함의 돛 부분이니 도망치기엔 더할 나위 없다. 양과 질 모두 압도적인 강자로부터 함대의 전력을 보존해야 하는 상황에선 합리적인 교리인 셈. 트라팔가르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의 문제는 단순히 포격대상이 선체냐 돛대냐가 아니라 기본적인 훈련도 자체가 너무 떨어져 있던게 근본적인 문제였다.
  • [4] 참고로 몰타호는 원래 나일 해전에서 최후반에 패배가 확정되며 간신히 도망칠수 있었던 빌뇌브 제독이 타고 있었던 프랑스제 80문 2단층 전열함 기욤텔이라는 전열함인데 나중에 영국해군에 나포되면서 몰타로 이름이 바뀌었다. (프랑스제 2단층 80문함은 영국제 98문함과 길이와 배수량 무게등의 크기가 실제로 비슷했다고 한다. 대포문수에서는 열세지만 프랑스제 80문 전열함의 경우 60문 정도가 36파운드 포와 24파운드 포라서 대구경 대포 탑재비율은 의외로 높았다. 나머지 20문은 8파운드 포나 12파운드 포. 영국제 98문 3단층 전열함도 60여문 정도가 32파운드포와 18파운드 포였으며 나머지 30여문은 8파운드 포나 12파운드 포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