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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시우스 1세

last modified: 2015-02-14 19:04:37 Contributors



Flavius Theodosius
(서기 347년 1월 11일 출생, 395년 1월 17일 사망)

로마의 역대 황제
라티아누스 테오도시우스 1세 아르카디우스(동로마), 호노리우스(서로마)
발렌티니아누스-테오도시우스 왕조 발렌티니아누스-테오도시우스 왕조 발렌티니아누스-테오도시우스 왕조



이름은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테오도시우스 1세, 테오도시우스 대제로도 불린다. 로마 제국의 황제(서기 379년~395년 재위)로,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시조이며 동서 양대 로마 제국의 마지막 단독 황제이기도 하다. 이름부터 비범해서 테오도시우스는 그리스어로 하느님이(ο Θεος), 준(δώ) 사람, 즉 신이 내린 사람 이라는 뜻이다.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공인하고 이교도를 탄압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대제라는 칭호를 얻은 것은 물론 기독교를 공인한 게 크게 작용하긴 하였으나 군사와 내정 모든 면에서 보통 이상의 뛰어난 통치력을 발휘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적극적으로 자기 의사를 관철한 유능한 장군 황제였음은 분명하다. 로마 제국은 테오도시우스 사후 이런 황제를 다시 가지려면 마르키아누스[1]가 즉위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고 바로 그것이 제국의 쇠락을 가져온 여러 결정타들 중 하나였다.

Contents

1. 생애
2. 황제로서의 테오도시우스
3. 기타

1. 생애

지금의 스페인에 소재한 코카(Coca) - 당시에는 카우카(Cauca)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통칭 테오도시우스 백작(Count Theodosius)로 불리는 서로마 제국의 장군으로, 렌티니아누스 황제의 최측근 무장이었다.

서기 368년, 브리타니아 일대가 색슨 족과 스콧 족 등의 북방민족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위기에 처하자[2] 아버지 테오도시우스 장군과 함께 출전, 약관의 나이에 공을 세우고 374년에 모이시아의 장관(Dux)으로 부임하여 도나우 강 북쪽의 고트족반달족을 무마하는 등, 순조로운 커리어를 쌓았지만 아버지 테오도시우스 장군이 반역죄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처형되면서 군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378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렌스가 고트족의 연합군에 대패하고 전사하면서 동로마 제국이 마비상태에 이르자, 서로마 제국을 지키는 데에도 힘이 부쳤던 라티아누스 황제는 테오도시우스를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추대하게 된다. 이는 테오도시우스가 모이시아 장관 시절 보여주었던 군사적 역량을 그라티아누스가 중시하였고, 또한 당시 로마 제국군 내에서 테오도시우스 일가가 상당한 명망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379년에 황제로 즉위한 테오도시우스는 380년까지 고트족을 비롯한 게르만족과의 전쟁에서 착실히 전과를 거두며 381년에 고트족의 대왕 아타나리크와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트라키아 속주에 고트족을 대거 이주시킨다. 이때부터 동로마 제국군에 고트족 출신의 장군들이 대거 기용되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후일 "로마 약탈"을 진두 지휘하게 되는 서고트 족의 대왕 알라리크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동쪽의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대립 등, 고트족에 집중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테오도시우스의 선택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것이었다.

383년에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중왕 샤푸르 3세와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테오도시우스는 비로소 안정된 통치를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 무렵 서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그라티아누스가 브리타니아의 군사령관이었던 그누스 막시무스에게 살해당하면서 다시 내전에 개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이때도 테오도시우스는 마그누스 막시무스와의 타협을 선택, 그에게 갈리아,브리타니아,스파니아의 영유를 인정하고, 대신 그라티아누스의 동생 렌티니아누스 2세이탈리아아프리카를 다스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선에서 개입을 마무리한다.

하지만 이후 387년에 다시 한번 동고트 족을 크게 격파하면서 정세가 안정되고,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하면서 테오도시우스는 마침내 거병, 388년 사바 강 유역에서 막시무스를 격파하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추대한다. 다만,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끝내 무력한 황제로 삶을 마쳤기 때문에 이때부터 395년까지 7년간은 사실상 테오도시우스가 두 로마 제국을 함께 다스린거나 마찬가지다.

서기 391년, 이미 380년에 테오도시우스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사실상 제국의 국교로 삼았던 테오도시우스는 이를 결정짓게 되고, 이로부터 로마 제국은 명실상부한 기독교 제국으로 변모한다. 이교도의 탄압은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비기독교도의 공직 진출이 금지되고, 이단 종파의 탄압까지 나타나기 시작한 상황에서 이교도가 탄압받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조치에서 나온 이교도들의 불만이 다시 내전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서기 392년,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테오도시우스가 갈리아 방위를 맡겼던 아르보가스테스 장군에 의해 살해[3]되자 테오도시우스는 즉각 개입을 천명, 아르보가스테스는 이에 맞서 법학자 에우게니우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기독교 탄압을 천명한다. 이 대립구도는 394년 가을, 리기두스 전투에서 테오도시우스의 동로마 제국군이 반란군을 최종적으로 궤멸시키면서 끝난다.

하지만 그 직후인 395년 1월, 테오도시우스는 지병인 수종으로 사망, 그의 뒤는 그의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호노리우스가 승계한다. 둘다 범용하기 이를데없는 인물들이었고, 이로부터 제국은 권신들의 시대로 이행한다. 그의 사후 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으로 분열되기 시작한다는 서술이 때문에 등장하지만, 단 이에 대해서는 다음 사항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오도아케르에 의한 서로마 제국 멸망 당시까지 일단 공식적으로는 동서 로마 제국이 같은 로마 제국이었으나, 황제들이 주체적으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권신들이 정권을 농단하는 가운데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였고 때문에 사실상 독자생존이 어려운 서로마 제국이 방기되는 결과가 나왔던 것이지, 로마인 이야기에서 주장하는 것마냥 동로마 제국이 서쪽에 아무 관심이 없어서 내버려둔 건 결코 아니다. 완전히 개별적인 나라로 갈라졌다는 것도 오해며, 동서 로마 양쪽 궁정은 꾸준히 서로에게 적극적인 내정 간섭을 하거나 전폭적인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론적으로는 동서 어느 쪽이든 선임 황제가 다른 쪽의 황제를 지명하거나 승인할 수 있었고 여기서 유일한 예외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뿐이었다.

2. 황제로서의 테오도시우스

군사와 내치 그리고 외교에서 두루두루 업적을 보였다. 거의 붕괴 직전의 상태까지 갔던 동로마 제국 야전군의 재편성에 기어코 성공했고 야만족들을 이이제이 전술로 서로 싸우게 만든 다음 상당한 수효를 포이데라티로 만들어 아군으로 부리는 것까지 해냈다. 또한 사산조와의 뜨거운 감자인 아르메니아 문제를 잘 해결하였고, 아르메니아에서 친로마파가 친사산조파에게 탄압받아 구원을 요청했을 때도 그대로 묵살하는(...) 등의 뛰어난 판단력을 보여 동쪽 국경 문제도 해결하였다.

내치에서도 율리아누스 이래로 발렌스도 답습했던 감세 정책을 계속 밀어붙이는 한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가격통제 정책 등을 폐지하여 농민들의 지지를 얻는 등, 당시로서는 비교적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펼쳐 경제 상태를 크게 호전시켰다. 훗날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제국 재건을 천명하며 여러가지 대사업을 펼칠 수 있었던 재정적 기반은 테오도시우스에게 덕을 본 바가 크다.

그리고 대체로 이런 황제들의 경우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별로일 때가 잦지만 테오도시우스는 그렇지가 않았다. 어디까지나 최고 지휘관은 그였고 대부분의 경우 승리로 이끌었던 당당한 장군 황제들 중 하나다. 물론 굳이 말하자면 내정 능력의 경우 디오클레티아누스나 콘스탄티누스 같은 조직력이나 창의력은 보이지 않으며 군사에 있어서도 콘스탄티누스 같은 군사 천재와 비교는 영 무리지만, 직접 내치와 군사 그리고 외교에서 고른 업적을 보인 황제가 과연 로마사에서 그렇게 흔했는지는 의문이다.

그 업적이 종교 정책 탓으로 과대평가된 건 맞지만 이걸 바로잡는다고 그의 다양한 재능과 업적까지 폄하하는 것은 제대로 역사를 보는 자세가 아니다. 그의 시대에 기독교가 국교화되면서 기존의 비기독교에 기반해 있던 그리스 - 로마 문명이 결정타를 맞았다는 편협한 시각도 어떤 작가만 고수하는 이상한 오해. 콘스탄티누스의 공인을 전후하여 기독교집단의 지적 역량이 급속히 신장하여 이미 학문의 주도권을 상당히 차지한 상황이었고, 수도사들은 성서를 가장 중히 여겼을 망정 그리스 고전의 학습도 등한시하지 않았다. 그의 신하들 중에서도 그리스 철학자들을 우대한 이들도 적지 않고, 다른 탄압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교 박해가 가속화되고 공권력이 이를 옹호하거나 묵인하는 일이 벌어지는 안타까운 일은 생기지만, 그로 인해 학문 자체의 활력이 크게 저하되거나 그리스 고전들에 대한 반달리즘이 성행했다는 것은 어쨌든 상당한 오해다.[4]

물론 그가 서로마 제국 방면 야전군의 재편성과 재건은 끝내 해내지 못한 점, 그리고 그의 아들이 뛰어난 군주기는 커녕 가진 권력도 제대로 행사할 능력이 없는 암군들이었다는 점[5]은 큰 그늘이지만 하필 그런 작업들을 마무리할 때 병이 들어 죽은 것까지 그의 잘못으로 돌리는 건 너무 무리한 해석이다. 그의 후계 정책의 오류가 로마 제국을 영원히 분할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도 잘못된 것으로, 보다시피 서로마의 반란을 진압한 직후에 사망해버렸다. 죄를 묻는다면 찬탈을 하지 않은 스틸리코에게 물어야 할라나

흔히 "3대제"로 불리는 콘스탄티누스 1세, 테오도시우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인물들 중 가장 덜 알려진 인물이고 솔직히 업적도 앞과 뒤의 황제들에 비하면 좀 못하지만, 테오도시우스는 가족과 신하들을 죽이지도 않았고 재정 붕괴나 재정 악화도 초래한 적이 없는 데다가 그 두 황제보다 훨씬 더한 악조건에서 치세를 시작했고, 또한 성급히 화를 터뜨리는 버릇은 있었어도 잘못을 지적하고 직언하는 신하들에게 관대했다. 역사 애호가들에게는 3대제들 중 상대적으로 좀 재미 없고 기대에 못미치는 황제긴 하지만, 적어도 서민들과 주변 인물들에게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나은 황제였다.

3. 기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불태웠다는 얘기도 있는데 사실 이슬람의 칼리프 우마르도 유사한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 누가 더 책임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테오도시우스가 파괴했다는 주장에선 이미 몰락할 때로 몰락하여 이집트 정벌군 사령관 아므르 이븐 알 아스와 그의 장교들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대해 아는 바 없었으며 심지에 그에 관련된 소문을 들은 적 조차 없었고 따라서 광신적인 기독교 신자들이 4세기 말에 파괴했을거라고 본다. 우마르가 그랬다는 주장으로는 비록 기독교 시대에 쇠퇴하긴 했지만 이 도서관을 결국 불태워서 상당한 그리스 고전을 소실시킨 건, 642년에 알렉산드리아를 함락한 칼리프 우마르였으며 초기 선출 칼리프 시대의 칼리프들은 전원 호학에 개방적인 마인드를 가진 뛰어난 군주였지만, 우마르만은 예외였다고 주장한다.

확실한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겪었다는 사실이다.

기원전 48년 카이사르의 알렉산드리아 공성전 때 화재에 불탄 적이 있고, 기원후 3세기 후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치세에 반란군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이후 서기 391년 콥틱 교황 테오필루스에 의해 폐쇄당하고 장서는 세라페움이라는 별관으로 옮겨졌으며 기원후 642년 이슬람의 알렉산드리아 정복 이후 여러 이슬람 사료에서 도서관의 파괴가 기록된다.

한 마디로 기독교와 이슬람 시대를 거치면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영화가 저물어 갔다는 사실만 분명할 뿐이다, 여기에 우마르의 정복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는 사실 정도가 분명한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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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450년부터 457년까지 재위한 동로마 황제. 종전까지 훈족에게 바치던 연공을 중단하고, 군사력 증강에 힘썼다. 이 때문에 아틸라는 멀리 서쪽에 위치한 서로마 제국을 건드려 볼까 생각하게 됐고, 그후 서로마는 망했어요.
  • [2]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대음모(Great Conspiracy)라고 부른다. 소설 "눈 속의 독수리"에서 이 시기를 묘사하고 있다.
  • [3] 자살이라는 말도 있지만 정황상 아르보가스테스가 권력 의지가 강한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죽인 게 거의 확실하다. 자살이었어도 강요된 자살이었을 것이다.
  • [4] 히파티아 살해가 예시로 거론되지만 이건 테오도시우스 사후에 벌어진 일인데다가, 근본 원인은 기독교 자체가 아니라, 황제를 물론이요 자신을 섬겨주지 않는 자들은 기독교도든 이교도든 전부 가혹히 다뤘던 편집증적인 권력증 환자 키릴루스에게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키릴루스는 당대 기독교 사회 안에서도 평판이 실은 좋지 못했으며 히파티아 같은 사람이 키릴루스가 득세하기 전에는 그렇게 오래도록 주장을 펼 수 있었던 환경 자체가 중요하다. 결국 키릴루스 일파는 키릴루스 사후에 실각한다.
  • [5] 여건이 안 좋았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들들은 그들과 비슷한 나이에 치세를 시작했는데도 군사와 내정에서 볼만한 역량을 과시하였다. 변명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