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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스 11세

last modified: 2015-06-29 18:55:04 Contributors


인간이 목숨을 걸 만한 명분에는 네가지가 있다. 가족, 신앙, 조국, 주권이 그것이다.
이것들을 위해서라면 누구나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물론 황제인 나 자신도 신앙, 수도, 백성을 위해 기꺼이 한 목숨 바칠 것이다... 그대들은 위대하고 고결한 백성들이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 영웅들의 후손이다.
나는 그대들이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조상들에 못지않은 용기를 보여 줄 것이며, 예언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히려는 이교도 술탄의 음모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믿는다.
- 콘스탄티노플 함락 전날밤, 콘스탄티누스 11세가 그리스인 지휘관에게 고했던 연설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
요한네스 8세 콘스탄티노스 11세 제국 멸망
팔레올로고스 왕조 팔레올로고스 왕조 오스만 제국

1404.2.8 ~ 1453.5.29

시대를 잘못 만나 망했어요 테크를 탄 비운의 황제.

그리스어[1] -> 콘스탄티노스 11세 드라가시스 팔레올로고스(Ο Κωνσταντίνος ΙΑ’ ο Δραγάσης ο Παλαιολόγος
라틴어 -> 콘스탄티누스 11세 드라가세스 팔라이올로구스(Constantinus XI Dragases Palaeologus)

Contents

1. 생애
1.1. 즉위
1.2.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제국의 멸망
2. 사후

1. 생애

1.1. 즉위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황제. 팔레올로고스 가문 출신. 별칭은 '드라가시스 (Δραγάσης)'로 어머니가 세르비아의 드라가슈(Dragaš) 가문 출신이라 붙은 별칭이다. 팔레올로고스라는 성보다도 어머니의 성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마누일 2세의 8번째 자식으로 태어나 1443년에 모레아 전제군주국의 군주가 되었다. 모레아 전제군주로서의 치세동안 남부 그리스의 경쟁세력을 모두 격파하고 1443년 전 지역을 세력권에 넣었다. 그러나 이를 경계한 라트 2세의 대군에 의해 영토를 모조리 토해내야 했으며, 모레아까지 황폐화되었다. 1448년에는 비잔티움 황제 요안니스 8세가 후사없이 사망했고, 동생인 데메트리오스와 제위 계승 분쟁이 있었으나 무라트의 지지를 받아 제위에 올랐다. 거기에 대관식조차 콘스탄티노플이 아니라 모레아 공국령 미스트라에서 치렀는데, 이전까지 콘스탄티노플이 아닌 지방 도시에서 즉위식을 올린 황제는 몇 명 있었으나[2] 콘스탄티노스가 예외적이었던 것은 그들은 모두 콘스탄티노플에서 다시 한번 즉위식을 거행했던 반면 콘스탄티노스는 그런 게 없었다는 것.[3]

그가 제위에 올랐을 때, 이미 동로마 제국은 완전히 몰락하여 로폰네소스 반도 일부를 제외하면 그 영토가 수도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에만 겨우 남아있는 도시국가로 전락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 주변의 영토는 이슬람교 국가인 오스만 제국에게 완전히 장악당했기 때문에 제국이 부흥할 가망이라곤 전혀 없었다.

시대를 잘못 만난 대표적인 예이다. 그 개인으로서는 비잔티움의 제위가 곧 죽음과 같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즉위한 이후로는 최선을 다해 통치하였다. 훌륭한 인품과 교양을 지녀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으며, 존망의 기로에 선 제국을 구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외교를 펼쳤다. 동방 정교회를 로마 가톨릭에 종속시키면서[4][5] 서유럽에 지원요청을 했고 당시 교황이었던 니콜라오 5세는 그 제의를 받아들였으나, 지원군은 고작 궁수 200명뿐이었다.[6]

1.2.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제국의 멸망

그리고 오스만 제국에게는 로마제국 황제와 콘스탄티노플외의 모든 지역을 포기하고 오스만 제국의 제후로 들어갈테니 멸망만 시키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지만[7] 메흐메트 2세는 그의 제국을 위한 새로운 수도로 콘스탄티노플을 점찍어두었기에 이러한 요청 역시 묵살되었다.[8] 결국 오스만 투르크의 공격에 온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었고,[9]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할 생각이 없었던 황제는 끝까지 자신을 따르던 근위대와 함께 밀려오는 튀르크군에게 돌격하여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해진다.[10]

한편 콘스탄티노스가 전사했다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오스만 제국측 사료나 후대에 서유럽 역사가들이 쓴 사료를 보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는 순간 목을 맸다거나 겁을 먹고 도망치려다가 끔살당했다거나 하는 등의 내용도 보인다. 이에 영국의 도널드 니콜(Donald Nicol, 1923~2003)은 대체 어느 것이 진상인지 알아내려 했으나 도저히 분간해낼 수 없었고, 다만 비잔틴인 역사가들은 그가 영웅적인 최후를 맞이했다고 묘사하는 반면 오스만 투르크측과 서유럽의 사료에는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는[11] 것만 확인했다고.

2. 사후

당시에 "로마 제국은 창시자와 이름이 같은 황제의 치하에서 멸망한다"는 예언이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이 소문은 들어맞고 말았다. 흥미롭게도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도 로마의 첫번째 왕 로물루스와 로마의 첫번째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12]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13]에 이후 튀르크의 지배를 받게 된 그리스에서는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죽지 않고 대리석상으로 변해 잠들어 있으며, 튀르크의 지배가 무너지고 그리스가 해방될 날 다시 부활하여 앞장서게 될 것이라는 전설이 생겨났다.

그리고 제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패전한 오스만 제국에게 그리스가 이스탄불의 영유권을 요구하면서 마치 이 전설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느 먼치킨이 등장해서 세브르 조약이고 술탄이고 연합국이고 그리스고 모조리 뒤집어 엎어버리는 바람에 망했어요.

그리스 정교회와 동방 가톨릭 교회 가운데 일부에서 순교성인으로 공경하고 있으며,[14] 아테네의 미트로폴레오스 대성당 앞 광장에서 칼을 치켜들고 서 있는 그의 동상을 만나볼 수 있다.


터키에서 그를 대한 시각은 콘스탄티노플 정복전을 영화화한 2012년작 터키 영화 '페티 1453(Fetih 1453)'을 보면 알수 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메흐메트 2세는 300레오니다스처럼 묘사한 것은 그렇다 쳐도 콘스탄티노스 11세를 하렘에서 여색과 환락에 빠져든 탐욕스런 폭군으로 왜곡하여 묘사하고 있다. 결혼도 못하고 즉위식조차 못 올렸을 정도[15]로 국가를 위해 노심초사한 황제인데 말이다. 우습게도 300도 미국에서 흥행 성공하듯이 이 영화도 터키에서 2012년 흥행 1위를 차지했다. 하긴 그리스랑 터키 사이가 안 좋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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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고전 그리스어로는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세스 팔라이올로고스가 되지만, 이건 당시기준으로도 거의 2000년전 발음(...)
  • [2] 라틴 제국을 멸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한 미카일 8세는 니카이아에서 즉위했고, 1341년부터 1347년까지의 내전 중에 즉위한 요안니스 6세는 아드리아노플에서 즉위했다.
  • [3] 이는 동서 교회의 통합 문제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노스는 로마 교황의 군사적 지원을 얻고자 동서 교회의 통합을 꾀했고 당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도 그에 동조적이었으나, 그걸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성직자들도 많았던 것. 즉 한참 뒤에 반발이 줄어들거나 교회 통합은 없던 일로 한다는 황명이라도 떨어졌더라면 하기아 소피아에서의 대관식도 가능했을 테지만, 콘스탄티노스 11세에게는 그럴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 [4] 즉, 기독교 수장 자리를 교황에게 양보하겠단 소리.
  • [5] 다만 이건 미카일 8세때부터 지속적으로 나왔다 결렬되고 다시 이야기가 나오기를 반복해 온 것이므로, 콘스탄티노스 11세를 '오오 종교를 뛰어넘은 결단 오오' 하고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한편 재미있는 사실은, 비잔틴 제국은 물론 카이아 제국의 공격을 받던 라틴 제국도 교황한테 형님 도와주세요 하고 달려갔었다는 것.
  • [6] 사실 이당시 교황령의 군사력도 비잔티움 제국만큼 약하다보니 제대로된 지원을 해줄리가...
  • [7] 막대한 공물을 바쳤는데도 오히려 거절당하며 사신이 추방되었다. 참고로 제후로 들어가겠다는 제안은 이때가 최초가 아니라, 요안니스 5세 치세인 1371년에 처음으로 나왔던 것.
  • [8] 또한 콘스탄티노플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역도시라 오스만 제국으로선 포기할수 없는 도시였다. 게다가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켜 화근의 씨를 완벽하게 없애겠다는 목적도 있었다.
  • [9] 애초부터 게임이 안되는 싸움이었다. 비잔틴 군은 용병을 포함하여 닥치는대로 긁어모은 병력이 고작 8천명인데 비해 오스만군은 무려 10만명이나 동원한 것이다. 게다가 유럽 국가들은 지원요청을 받아도 지원군을 보내기가 어려웠거나 일부는 아예 무시하기도 했기에, 승패는 싸우기 전부터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 [10] 전해지는 말로는 마지막으로 적군에게 돌격하면서 자신의 몸에 달고 있던 황제로서의 상징물을 죄다 떼어냈기 때문에, 황제의 시체를 찾을 때 표식이 될 수 있는 물건이 양말뿐이었다고 한다. '내 시체를 받아줄 기독교인은 없는 것인가'라는 유언을 남겼다고도 한다.
  • [11] 이는 종교 문제 등으로 비잔틴 제국과 서유럽의 관계가 오랫동안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비잔틴을 까는 김에 황제까지 까자!' 라는 심보였다는 것.
  • [12] 서로마 최후의 황제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작은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 [13] 튀르크인들은 황제로 추정되는 인물의 시체를 찾아 그 목을 베어 매달았지만, 그 시체가 확실히 황제가 맞는지에 대한 그리스인이나 유럽인들의 기록이 없다.
  • [14] 성인으로 공식적으로 추증된 것은 아니다. 이들 교회에서 성인으로 여기는 경우는 대개 충분히 살 수 있었는데도 종교적인 신념을 이유로 죽음의 길을 택한 것이지, 중과부적으로 어쩔 수 없이 전사한 경우가 아니기 때문.
  • [15] 평생 결혼도 못해본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1448년에 제위에 오르기 이전. 모레아 전제군주국의 군주였던 시절에 두 번 결혼했다. 하지만 두번째 아내도 1442년에 죽었고, 제위에 오른 뒤에는 세번째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