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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굴라

last modified: 2015-03-29 11:46:10 Contributors

Caligula

Contents

1. 로마 황제
1.1. 출생
1.2. 칼리굴라라고 불리게 된 이유
1.3. 황제가 되기 전 생애
1.4. 즉위
1.5. 외모에 대한 왜곡과 중병을 앓고 난 이후의 삶
1.6. 암살과 그 이후
1.7. 평가 및 얘깃거리
1.7.1. 수에토니우스 기록에 따른 기행들
2. 영화
3. 연극
4. 데몬베인의 안티 크로스


1. 로마 황제

로마의 역대 황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2대 티베리우스 3대 칼리굴라 4대 클라우디우스

레골라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Gaius Iulius Caesar Germanicus
출생지 이탈리아 안티움
사망지 로마 팔라티누스 언덕 내 궁전과 극장 사이 통로
매장지 이탈리아 로마 아우구스투스 영묘
이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황제 즉위 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즉위 후)
생몰년 서기 12년 8월 31일 ~ 41년 1월 24일
재위기간 서기 37년 ~ 41년

로마제국의 3대 황제. 칼리굴라는 별명으로 '작은 군화'라는 뜻이다. 본명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Gaius Iulius Caesar Germanicus).생전에는 사실 가이우스, 또는 가이우스 카이사르라고 불렸다.[1] 네로, 콤모두스 등과 함께 로마제국의 폭군 중 한 명으로 거론된다.

1.1. 출생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와 대(大) 드루수스(네로 드루수스)에 이어 게르마니아를 공략했던 영웅,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2]대(大) 아그리피나 사이에서 태어나 살아남은 세번째 아들이었다. 칼리굴라는 혈연적으로는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 아그리파의 피를 모두 이어받았다.[3]

서기 12년 8월 31일에 안티움에서 태어났는데, 이 해는 그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와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가 집정관직에 있을 때였다. 칼리굴라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데, 수에토니우스의 기록과 로마에서 발행된 에 따르면 안티움 태생이 맞다고 기록되어있다.[4] 실제로 칼리굴라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자신의 고향인 안티움을 좋아했고 자신이 이곳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했다고 한다. 심지어 수에토니우스는 가이우스(칼리굴라) 편에서 칼리굴라가 안티움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까지 세웠다고 주장하고 있다.

1.2. 칼리굴라라고 불리게 된 이유


(아버지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는 어린 시절부터 게르마니아 지역의 사령관으로 근무한 아버지를 따라 게르만 족과의 전선지대인 병영에서 자랐다. 부모는 칼리굴라에게 병사들과 똑같은 복장을 입히고 병사들 틈에서 자라게 했는데 외모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였기에 어린 시절부터 군인들에게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5] 특히 오늘날 우리가 통칭하는 "칼리굴라(Caligula, 작은 군화)"라는 별명은 게르마니아 주둔 군단병들이 가벼운 대화를 하는 가운데 생겨난 것으로 병사들이 가이우스를 부르던 애칭이었다.[6]


(복원된 로마 시대 군화 '칼리가')

당시 칼리굴라가 얼마나 군단병들에게 사랑을 받았는지 나타내는 증거도 있다. 아우구스투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단병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때였는데, 어떤 짓이라도 할 것 같던 군단병들이 가이우스의 모습을 보자 금세 진정하고 정신을 차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는 칼리굴라를 그들의 폭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이웃 도시로 보내려 했고, 이를 안 병사들은 로마인들인 자신들의 품에서 갈리아 지방으로 칼리굴라를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잘못을 크게 뉘우쳤다. 그래서 어떤 병사들은 마차를 붙잡아 세운 다음 게르마니쿠스에게 간곡히 용서를 빌기도 했다.

1.3. 황제가 되기 전 생애

이후 잠시 로마로 귀환한 아버지를 따라 이탈리아에서 살았던 칼리굴라는 다시 시리아로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 동방으로 갔다. 그리고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서기 19년에 시리아에서 사망한 이후, 어머니 대(大) 아그리피나와 함께 귀국하여 함께 살았고, 조부이자 할아버지였던 티베리우스의 근위대장 세야누스의 음모로 어머니[7]와 두 형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추방된 이후[8]에는 가족 중 남아있는 자신과 세 명의 여동생과 함께 증조모인 리비아 드루실라와 함께 살았다. 그러다가 증조모 리비아가 죽자 성년식도 치루지 않은 칼리굴라는 율리우스 가문을 대표하여 리비아 장례식 추도연설을 로스트라에서 가졌다. 그 뒤,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가 카프레아이(카프리 섬)의 별궁으로 부르기 전까지는 친할머니였던 안토니아와 함께 살았다.[9]

티베리우스의 부름을 받고 카프레아이에 도착한 날, 칼리굴라는 성인용 토가를 입고 처음으로 면도를 했다.[10] 그러나 칼리굴라가 한 성년식은 비공식적인 성년식이었고 성대하지 않았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이때 궁정의 신하들이 티베리우스에 대한 불만을 입 밖에 내도록 갖은 수단을 다 써보았지만, 양할아버지나 전체 가족들에게 지나치게 순종적이었기에 누군가는 칼리굴라를 가리켜 "그보다 더 나은 노예나 그보다 더 나쁜 주인은 없을 것이다."고 했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에게 그다지 관심(나쁜 쪽으로)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칼리굴라는 마르쿠스 실라누스의 딸 유니아 클라우딜라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형 드루수스 카이사르 대신 복점관에 임명되어, 책임감있는 행동과 모범적인 삶의 태도를 인정받고 사제직에 올랐다. 이 무렵, 세야누스가 몰락했고, 칼리굴라의 첫 아내였던 유니아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한편 수에토니우스는 칼리굴라가 아내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근위대장 마크로의 아내 에니아 나이비아를 유혹하여 자신이 황제가 되면 에니아와 결혼하겠다고 맹세했고 그 내용을 문서로 써주기도 했다고 들었던 소문을 검증없이 그대로 적었고, 이는 역시 루머인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를 죽였다는 증거로 제시되게 된다..[11]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었을 때, 로마인들과 "전 세계인들의"[12] 열광을 받으며 서기 37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아내도 자식도 없는 상태에서 황제가 되었다. 사실 가이우스(칼리굴라)의 등극 당시 인기는 로마 사상 최고였다. 로마인들 사이에서 소문에 의해 음침한 성격인데다가 말년에는 카프리 섬에 틀어박혀서 시민들에게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던 티베리우스 황제는 인기가 매우 낮았기 때문이다. 또한 살아있던 시절, 르만 족과의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여 전쟁 영웅으로 여겨진 게르마니쿠스의 인기와 후광,비극적인 가족사로 인한 아픔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가이우스(칼리굴라)의 인기는 더했다.

어쨌든간에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젊은 나이에 오리엔트 속주에서 병[13]으로 요절했고, 어머니와 두 형들의 비극을 경험한 로마 여론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향수도 더해진 까닭에 이들의 피를 이어받은 가이우스 효과는 상상 이상이었다.[14]


(칼리굴라의 흉상. 수에토니우스 말대로 대머리에 염소같은 괴물상은 아니다.)

1.4. 즉위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가 사망했을 때 상복을 입고 미세눔에서 티베리우스의 시신과 만나 함께 로마로 향했다. 이때 거리로 나온 군중들은 제단을 만들어 제물을 바치고 횃불을 밝혔으며 칼리굴라를 열렬히 환영했다. 로마인들은 잘생긴 칼리굴라에게 "가이우스는 우리의 별", "병아리", "아기", "귀염둥이" 등으로 불렀다. 그러다가 이들 일행이 로마에 도착하자 원로원과 우격다짐으로 원로원 건물로 들어온 수많은 군중들은 만장일치로 즉시 그에게 절대 권력을 부여했다. 전임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의 유언장은 안중에도 없었고, 티베리우스의 유언에 따라 가이우스(칼리굴라)와 공동 상속자이자 공동 황제로 지명된 티베리우스 게멜루스[15]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그 대신 칼리굴라는 성년식을 치루지 않은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자신의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선포했다. 또한 티베리우스를 기리는 장례연설을 할 때, 수많은 군중 앞에서 시종 눈물을 펑펑 흘렸다. 또한 원로원이 티베리우스의 유언집행을 보류하기로 하자 이를 무효화하고 시민들에게 예외없이 성실히 유산을 지불했다. 그리고 티베리우스때 무효화해서 욕을 많이 먹은 리비아 드루실라의 유언도 집행하여 환호를 받았다.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어머니와 형 네로 카이사르의 유골을 가져오기 위해 악천후를 뚫고, 판다다리아와 폰티네 제도로 달려갔다. 이 사건은 칼리굴라의 효성을 부각시켰으며, 칼리굴라가 경건한 태도로 유골을 직접 수습하여 유골단자에 담아, 오스티아를 거쳐 테베레 강을 거슬러 로마를 오는 내내 2단 갤리선의 고물에서 군단기를 들고 서 있던 모습은 인기를 더하게 했다. 더불어서 칼리굴라는 어머니를 위해 희생제를 올리는 날을 정하고, 키르쿠스에서 축제를 열도록 했다.[16] 그리고 9월을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의 이름인 "게르마니쿠스"로 바꿔 아버지를 기렸으며, 할머니 안토니아에게 증조모 리비아 드루실라가 살아생전 누렸던 모든 영예를 원로원 포고를 통해 수여했다. 또한 임기 첫 동료 집정관으로 삼촌 클라우디우스를 선택했다. 그리고 양자 티베리우스 게멜루스가 성인이 되자 "젊은이들의 지도자"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이러한 칼리굴라의 첫 7개월 간은 지나치게 절약하고 시민들의 쾌락을 배척했기에 인기가 없었고 말년에는 카프리 섬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은 티베리우스를 기억하기 싫어서인지 몰라도, 엄숙하고 큰 행사없이 제위를 계승한 티베리우스와 달리 성대한 축하 행사로 가득했다. 특히, 축제 3개월 동안(혹은 그보다 짦은 시간동안) 벌였다. 이 기간동안 16만 마리의 제물이 제단에 바쳐졌고, 새 황제의 이름으로 시민들에게 많은 양의 무료급식을 나눠줬다. 그리고 각종 검투사, 전차 경기도 많이 개최하여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또한 이 시기, 칼리굴라는 캄파니아 인근의 섬들을 방문했는데, 로마 시민들은 앞다투어 그의 무사 귀환을 빌었다. 더불어서 파르티아 왕 아르타바누스는 칼리굴라가 즉위하자 먼저 친교를 청하고, 시리아 총독과의 회의에 참석했다. 이때 파르티아 왕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기 전에 로마의 은독수리기와 군단기, 그리고 카이사르의 조각상 앞에서 경의를 표했다. 또한 그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거두어들이던 0.5 퍼센트의 경매세를 폐지하고 화재로 집이 파괴된 이재민들에게 즉각적인 보상 대책을 실행에 옮겼다.아울러 티베리우스 시대 당시, 왕위를 잃은 여러 왕들의 제위를 되찾아주어 그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즉위 7개월 만인 37년 10월쯤, 칼리굴라는 열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로마인들은 칼리굴라가 몸져누워 생사를 알 수없다는 이야기를 듣자 밤새돌고 궁을 에워싸고, 신들에게 칼리굴라를 병에서 회복시켜주기를 기도했다. 특히 이때 어떤 사람은 칼리굴라가 병에서 회복된다면 검투사가 되어 시합에 나가겠다고 맹세했고, 누군가는 신에게 칼리굴라 대신 자신이 죽겠다는 현수막을 걸어 무사안일을 빌었다. 그러다가 칼리굴라가 깨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들 모두는 환호를 하며 칼리굴라의 회복을 기뻐했다. 그러나 칼리굴라 본인은 회복된 이후, 의심이 많아지고 밤마다 환청이 들리고 불면증에 시달렸으며 정신이 이상해져 그 후부터는 미친 듯이 폭정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칼리굴라 시대 발행된 화폐)


(공동상속자이자 양자였던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일단 서기 38년에 칼리굴라는 중병에서 완쾌되자마자 양자이자 공동제위계승자인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죽였다. 그리고 소문에 의하면 여동생들과 근친관계를 맺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칼리굴라는 3명의 여동생 중 평소 끔찍하게 사랑했던 누이동생인 드루실라가 병으로 죽자 드루실라를 신격화하여 '디바 드루실라' 라고 부르게 했다. 동시에 이전과 달리 검투사 경기도 매우 과격하게 바뀌었으며, 이 외에도 매일 화려한 만찬을 벌이는가하면 자신을 태워다준 인부에게 대한민국 한화로 약 2000만원이나 주는가 하면 각종 여러 희귀동물들을 매우 비싼값에 구하는 등 너무 많은 터테인먼트를 벌이느라 티베리우스가 긴축정책을 펼치며 쌓아둔 국고가 1년 만에 바닥이 나버렸다, 이에 칼리굴라는 카이사르 집안의 잡다한 물건들과 노예들을 경매로 팔고, 매춘부들에게도 세금을 거뒀으며, 부자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물게 하여 귀족층과 부유한 사람들도 칼리굴라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또한 자신을 상속자 이름에 넣게 해서 부족금을 메우려고 하였다.

물론 로마 시에 도교 2개를 건설했고, 아우구스투스 신전과 페이우스 극장을 완공한 것, 갈리아 북부를 침공하여 브리타니아 야만족들의 침공을 저지하는 정책과 함께 그리스의 경제 부흥 성과를 위해 반도 지협에 운하를 뚫는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등의 모습은 괜찮았지만, 칼리굴라가 저지른 실책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칼리굴라는 점성가가 살아생전 티베리우스에게 한 예언[17]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나폴리 만에 배로 다리를 만들어 말을 타고 건너며 제우스알렉산드로스 대왕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며, 브리타니아까지 가서 병사들에게 해변에서 조개껍질을 줍게 하라는 정신나간 명령을 내리는 둥 이곳에서도 자신이 돌았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증명해 보이기도 했다…….

중병으로 약화된 육체와 정신력때문에 많은 실정을 저질렀고, 그 중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피를 이어받은 마우레티니아 왕 포톨레마이오스를 잔인하게 죽인 것은 그 중 하나였다. 그러다가 서기 41년 1월, 팔라티누스 언덕에서 열린 전차경주 대회장에서 자신의 근위대 대장인 카시우스 카에리아와 그 일당들에게 배신당해 목숨을 잃었다.[18] 이때 아내였던 카이소니아도 궁에서 경기장으로 이어진 지하 복도에서 함께 살해당했으며 어린 딸 율리아 드루실라는 던져져서 벽에 머리를 부딪혀 죽고 말았다. 재위 4년 만의 일이었다.

1.5. 외모에 대한 왜곡과 중병을 앓고 난 이후의 삶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칼리굴라의 흉상 비교. 이렇게 보더라도 칼리굴라는 수에토니우스 기록대로 괴물은 아니었다.)

수에토니우스는 칼리굴라를 괴물로 묘사했는데, 먼저 키가 크고 안색이 창백했다고 한다. 머리카락은 드문드문 나 있었고 정수리는 완전히 대머리에다 이마는 넓고 주름이 많았으며, 몸에는 털이 아주 많고 체형은 좋지 못했다고 한다. 더불어서 눈동자는 공허하고 목과 다리는 굉장히 가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칼리굴라가 몸에 털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대머리였기에 누군가 걸어갈때 자신을 내려다보거나 어떤 이유에서든 염소를 언급하면 그 자리에서 사형에 처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어렸을때부터 불쾌하고 괴상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늘 거울 앞에 서서 험악하고 무섭게 보이기 위해 노력하며 더 끔찍한 얼굴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동시에 소년시절부터 간질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19]

하지만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이 믿음직하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중병을 앓고 난 이후부터는 스스로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칼리굴라는 종종 갑작스러운 어지럼증으로 걷거나, 서 있거나, 생각을 하거나, 머리를 들고 있기를 힘들어할 때가 있었고 불면증은 가장 큰 고통이어서 기껏해야 3시간 밖에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마저도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그래서 칼리굴라는 침대에 앉아 있거나 긴 주랑을 헤매며 어서 태양이 뜨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고 한다. 또 칼리굴라는 멀리서 천둥소리만 들려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질끈 감았고, 폭풍우가 다가오면 침대에서 뛰쳐나와 그 밑으로 기어들어가 숨기도 했다.

칼리굴라는 전통적인 로마 의상이나 유행하는 옷차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옷차림에 있어서 남녀 구별이나 인간적인 품위를 추구하지 않았고, 자수로 뒤덮이고 보석이 주렁주렁 매달린 오리엔트 군주식 망토를 걸치거나 소매가 긴 튜닉에 팔찌를 차기도 했다. 또한 법에 의해 남성은 입을 수 없는 비단 옷을 입기도 했고, 슬리퍼나 반(半)장화, 군화, 여성용 신발을 신기도 했다. 더불어서 아주 가끔은 개선장군 복장을 하고 돌아다니거나, 금빛 수염을 붙이고 손에 제우스의 번개, 포세이돈의 삼지창 등을 들고 코스프레를 하기도 했다.


1.6. 암살과 그 이후




(칼리굴라가 암살된 장소인 통로(위)와 궁전)

칼리굴라가 죽던 41년 1월 24일 정오가 지날 무렵, 사실 칼리굴라는 극장 안에 있었다. 칼리굴라는 이때 점심을 먹을지 말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전날 저녁식사를 과식한 결과 속이 거북했다고 한다. 그러나 친구들의 설득에 어쩔 수 없이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이때 칼리굴라는 거리에서 귀족 남자아이들이 트로이 전쟁 춤을 연습하고 있자, 잠시 멈춰서서 이들을 격려하고 이들을 극장으로 데리고 가서 연습을 도와주고 공연을 시켜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 친구 중 한 명이 감기에 걸렸는데 얼른 가자고 불평해서 가야만 했다.

그 뒤, 이야기에 대해서는 2가지가 전해오는데, 첫 번째 이야기에 따르면 칼리굴라가 서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근위대장 카이레아가 뒤쪽에서 갑자기 나타나 "이걸 받아라"하고는 목 깊숙이 칼을 꽂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코르넬리우스 사비누스라는 장교가 칼리굴라의 가슴을 찔렀다는 것이다.[20] 다른 이야기는 좀 더 정확한 것인데 장교 사비누스가 먼저 군중을 시켜 군중들을 쫓아냈다고 한다. 그런 다음 사비누스는 황궁 통로에서 칼리굴라에게 그날의 암호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이때 칼리굴라는 웃으며 "유피테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뒤에서 경호를 하고 있던 카이레아가 "그래, 그렇다고 해주지."라고 외치며 고개를 돌린 칼리굴라의 턱을 칼로 베며 공격했다. 이에 칼리굴라는 몸부림을 치며 바닥에 쓰러져 게르만 근위병들을 큰 소리로 부르며 "나는 아직 살아있다!"라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카이레아는 가담자들에게 "다시 내려쳐!"라고 명령을 내려 상처를 입은 채 저항하는 칼리굴라에게 30군데의 상처를 입히며 칼로 찔러 죽였다. 이때 황제의 가마꾼들이 장대를 들고 칼리굴라를 지키기 위해 저항했고 그 사이, 칼리굴라의 외침을 들은 게르만 근위병들이 "황제를 보호하라!"를 외치며 암살자 몇명과 그 자리에 있다는 이유로 죄없는 원로원 의원 몇명을 죽였다고 한다.

이렇게 칼리굴라는 29세(28세)의 나이에 죽었다. 재위기간은 3년하고도 10개월 정도였으며 칼리굴라의 유해는 비밀리에 카이레아에 의해 라미우스 정원으로 옮겨져 숨겨진 다음, 황급히 만든 장작더미에 대충 태워져 얇은 잔디층 아래에 가매장했다. 그리고 백인대장이 황궁으로 가서 칼리굴라의 아내 카이소니아를 칼로 찔러 죽이고, 딸 율리아 드루실라는 벽으로 던져저 머리가 깨져 죽었다. 이후, 근위대에 의해 황제로 옹립된 삼촌 클라우디우스의 명으로 유배가있던 칼리굴라의 여동생들이 귀국한 이후, 칼리굴라의 유해는 수습되어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안치되었다.

칼리굴라를 살해한 이들은 병약한 육체를 가졌던 삼촌 클라우디우스에게 황제의 자리를 줬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는 칼리굴라 암살을 주도한 카이레아 등을 황제를 암살한 죄로 처형했다. 아울러 칼리굴라의 유해를 수습하여 다시 장례를 지내고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매장했다. 더해서 조카에 대해 원로원 의원들에게 '기록말살형'을 당하지 않도록 부탁하는 연설을 하고 기록말살형을 막았다. 그러나 원로원 역시 4년이 안 되는 기간동안 도미티아누스처럼 기록말살형을 할 만한 뚜렷한 정책을 펼치지도 않았던 칼리굴라를 그렇게 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딱히 기록말살할 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해서 근위대를 등에 업은 온화한 성격의 클라우디우스가 죽은 칼리굴라에게 그런 짓은 하지 말아달라고 원로원에게 당부했기에 그렇게 할 이유도 없었다. 어쨌든 후임자이자 삼촌인 클라우디우스가 형인 게르마니쿠스를 매우 존경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또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시대때 정치에서 배제되었다가 조카의 도움으로 집정관도 해보고 관직생활도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클라우디우스 입장에서는 나름 황숙으로 예의를 갖춘 조카 칼리굴라에게 그렇게 심한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1.7. 평가 및 얘깃거리

내란 당시 로마군의 피냄새가 향기롭다며 병사들 앞에서 대놓고 말한 비텔리우스, 본격적으로 암흑기에 들게 만든 장본인 콤모두스,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의 폭군 카스와 달리 폭군 대열에 포함되어 있어도 실제로는 그렇게 나쁜 황제로 평가되지는 않는다. 특히 칼리굴라의 악행이나 이상한 외모는 세상의 온갖 뜬 소문을 기록하고 어린시절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해 "공화정을 없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혐오"를 이어받은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서 나왔기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우선 결정적으로 로마 제정의 중요한 정책들은 하나도 바꾸지 않았다. 국고를 낭비하긴 했지만 그것이 심각한 부채로 이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칼리굴라의 악정이 이후 로마 역사에 큰 해가 된 것은 아니다. 칼리굴라가 한 일들은 순전히 무언가를 짓거나 큰 행사를 여는 등 돈을 쓰는 일 뿐이였으며, 이와 같은 일들은 선제인 티베리우스가 남긴 막대한 자금을 써먹었기 때문이다. 또한 돈이 궁해진 후에도 속주세를 인상하지는 않는 등, 아우구스투스가 결정한 사항을 교체한 경우는 없었다. 더불어서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도 힘겨워했던 파르티아와의 관계에서도 나쁘지 않았다.

칼리굴라의 엽기적인 행각이 워낙 두드러진 탓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유머감각이 있었고 머리도 좋았다고 기록되어있다. 웅변에도 재능이 있었으며, 특히 재치있는 말을 잘 하는 타입이었다고 한다. 특히 제 기능을 못하는 원로원을 비꼬아서 자신의 애마를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해야겠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나중에 칼리굴라의 폭군 이미지와 결합해서 칼리굴라가 정말로 말을 원로원 의원에 임명시켰다는 루머로 변질되기도 했다.

더불어서 유대인이자 "유대의 플라톤"이라고 불린 필로의 기록에 의하더라도 칼리굴라는 지극히 괴물같지 않은 나름 잘생긴 외모에 유머 감각과 지식수준을 가지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실제로 칼리굴라는 그리스인들을 편들어 비이냥거리며 유대인들을 놀렸지만 즉각 알렉산드리아 장관을 교체시켜 유대인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그리스인들의 횡포를 철저하게 막도록 지시를 내려 성과를 거두었다.



1.7.1. 수에토니우스 기록에 따른 기행들

수에토니우스는 사실 칼리굴라 시대를 직접 살아본 인물도 아니고 100년이 지난 이후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칼리굴라의 이미지(섹스와 폭력)은 모두 수에토니우스의 기록물인 "황제들의 삶(De vita Caesarum)"이라는 저서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수에토니우스는 지독하게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싫어했던 집안에서 이 시대 이야기를 들었고, 거리에서 100년이 지난 이후에도 떠도는 온갖 뜬 소문을 모으고 모아 책을 출간하였다.[21] 특히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들의 외모와 잔인함, 폭력 등과 카이사르 간질설, 카이사르 동성애자설 등 역시 수에토니우스의 책에서 처음 기록되었다. 또 다른 인물들의 동시대 저서에서는 나오지 않은 내용이 상당수 나와있기에 수에토니우스의 저서를 읽을 때 유념할 필요가 있다.


(수에토니우스의 저서인 황제들의 삶(De vita Caesarum)에는 카이사르를 포함하여 총 12명의 삶이 수록되어있다.)


  • 자신을 이라 생각해 베누스 등의 신들을 자신의 형제 자매라고 거론했다고 해서 미친 황제로도 유명하다. 콤모두스의 헤라클레스 코스프레가 로마 황제들 중에서는 유명한 편이지만, 시기상으로는 칼리굴라가 한 짓이 훨씬 앞선다. 유피테르를 본따 머리와 수염을 금색으로 염색하고 상반신을 벗은 차림에 번개를 들고 나타나거나, 넵투누스를 본따 삼지창을 들고 나타나 원로원 의원들과 시민들을 아연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칼리굴라가 정말로 그렇게 믿은 건 당연히 아니고 이는 컨셉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 근친상간을 했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칼리굴라에게는 여동생이 세 명 있었는데, 아그리피나(小), 드루실라, 리빌라였다. 그 중 드루실라를 가장 사랑하였으며, 나머지 누이들도 연회 때 자신의 아내가 앉는 자리에 앉히는 둥 수상쩍은 점이 많았다. 역사학자들은 이 셋 중 셋 모두, 혹은 아그리피나를 제외한 둘과 근친상간을 하지 않았나 의심하고 있다.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드루실라가 죽자 이후 사람들 앞에서 맹세할 때는 드루실라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다고 한다.[22]

  • 사자와 죄수들의 싸움을 하려고 했는데 죄수가 다 죽어버려서(…) 죄수가 없자, 강제로 경기장 맨 앞의 5줄에서 구경하던 관중들을 끌어내어 사자밥으로 던져 주었다. 나머지 관중들은 열광했는데, 이는 맨 앞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귀족층이나 돈 많은 부유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리굴라에 대한 기록의 상당 부분이 2세기 즈음에 여기 저기서 돌아다니던 루머를 기술한 게 허다한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 에서 나왔음을 고려하면 헛소문일 가능성도 있다.

  • 여러모로 전선 군단병들의 마스코트와 같은 존재였던 모양이다.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서는 게르마니아 변경의 로마군이 반란이 일어났는데 게르마니쿠스는 자신의 아내와 칼리굴라를 로마로 돌려보냈고, 이 사실을 안 병사들이 제발 칼리굴라를 다시 보게 해달라고 하면서 반란을 그만 두고 게르마니쿠스의 휘하에서 반란군을 토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재위 기간 동안 로마에 지진, 화재, 홍수 등의 자연재해가 나기를 신들에게 빌었다고 한다. 이유는 그런 게 터지면 멋지게 수습해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 근위대 대장인 카시우스 카에리아에게 살해당한 이유가 매우 웃긴데, 카에리아는 생김새가 여자같아서 칼리굴라에게 매우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안 그래도 평판이 안 좋은 마당에 자기 근위대 대장을 지속적으로 모욕하는 멍청한 짓을 저지른 점에선 어지간히도 머리가 안 돌아간 듯하다. 물론 그것 하나 때문에 암살을 결행하지는 않았겠지만.

  • 칼리굴라가 궁 안에 매음굴을 지었다는 루머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귀족들의 가족을 궁 안에서 살게 했는데, 이는 유사시에 인질로 삼기 위해서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특히 칼리굴라가 한 말 중에 "나를 두려워하기만 한다면 날 증오해도 상관없다." 라고 한 것을 보면 공포 정치로 귀족들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설도 있다.

  • 로마 시내에 있던 대전차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를 본떠 테베레 강 서안에 개인용 전차경기장을 만들면서 트랙을 구분하는 띠 모양의 가운데 부분을 장식하기 위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오벨리스크를 운반해왔다. 자르지 않고 통째로 가져오기 위해 길이 105m, 너비 20m에 달하는 대형선을 건조했는데, 임무를 마친 후 항구에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클라우디우스가 로마의 외항을 재개발할때 방파제로 재활용되었다.

  • 노골적이고 발정난 개처럼 여러 여자들을 희롱했다고 한다.

2. 영화

1을 소재로 삼은 영화. 대부분의 내용은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의거했다는 평이다. 감독에 토 브라스. 칼리굴라역에 맬컴 맥다월, 티베리우스 역에 터 오툴, 네르바역에 길거드 경이라는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한다. 여배우 둘이(그중 하나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여주인공) 감독과 싸우고 나가서 별로 이름 없던 배우가 캐스팅된다. 문제는 이 영화의 등급은 X등급, 즉 포르노 영화와 등급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유명 포르노잡지 트하우스가 제작에 참가해서 팬트하우스의 쟁쟁한 포르노 여배우들이 줄줄히 나와 시도 때도 없이 농도짙은 에로씬을 선보인다. 에로씬만 모아서 보면 어느 누구의 눈으로 봐도 빼도박도 못할 야동. 팬트하우스 섭외 담당자가 남자는 크기, 여자는 (어떤 부위로 무엇을 잡을 수 있다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으로 뽑았다고 한다.

하지만 단순히 포르노 영화라고 치부하기 힘들 정도로 잘 만든 영화이기도 하다. 탄탄한 스토리 라인, 캐릭터의 깊이 있는 내면묘사, 로마 시대를 잘 재현한 소품도 훌륭하고 굴지의 명배우 맬컴 맥다월의 광기 어린 연기가 관객을 압도한다. 게다가 포르노 영화 수준의 에로씬도 로마 시대의 타락상과 칼리굴라의 광기를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수긍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너무 예술적이어서 봐도 느낌이 없다" 라는 의견까지 있다. 상업성으로 서로 엇갈림이 커서 영화가 뒤죽박죽이 되어서 틴토 브라스 영화라고 하기에는 모호하다.

우선 감독인 틴토 브라스는 포르노 감독이 아니다. 에로티시즘 영화로 유명하지만 브라스는 줄거리가 있고 배우들 연기를 중요시하는 예술적인 에로티시즘 감독으로 추앙받는 감독이다. 그런 양반이니 줄거리와 배경을 더 깊게 파고들었고 결국 제작자가 원하던 포르노 위주 영화가 아닌 것에 서로 갈등이 커서 제작자가 도중에 잘라버렸다.

그 다음 감독은 무방비도시로 유명한 네오 리얼리즘 감독 베르토 로셀리니의 아들인 프랑코 로셀리니 감독이었다. 아버지에 가려졌지만, 프랑코도 아버지 영향이 커서 예술 영화 분야에서 감독으로 활동했고 그런 이에게 포르노를 만들라고 요구하는 것은 자폭행위였다. 당연히 프랑코 로셀리니는 광기어린 칼리굴라에게 촛점을 이뤄 영화를 감독했고 결국 프랑코도 중도에 잘렸다.

결국 제작자가 스스로 나머지 부분을 감독하면서 그냥 포르노가 되었고 두 감독이 만들어낸 부분과 아주 따로 영화가 놀아버린다. 사실 궁궐을 개조한 창녀촌 장면 등은 나중에 제작자가 팬트하우스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해서 삽입했고 유명 배우들이 나온 부분과 외설부분은 따로 찍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맬컴 맥다월의 물건 노출은 진짜다.

결국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작품성과 막장 포르노씬이 공존하는 독특한 포르노 영화라는 것이 중론인듯 하다. 감독판의 러닝타임 4시간짜리 물건이 존재한다는 루머가 있지만 헛소문이다. 틴토 브라스는 자신의 영화가 아니라고 하는데 이걸 감독판이 있을 리가 있나. 일반 상영판도 2시간반으로 상당히 긴 편이다.

미국 첫개봉 시에는 아예 등급 심사를 받지 않고 극장을 세내어 개봉했다고 한다.

하재봉이 이 영화를 무척 좋아했다. 성기 노출도 극찬했는데. 이 영화의 진짜 백미는 네르바의 자살 장면...괜히 세익스피어 전문배우가 아니다.

칼리굴라 황제의 대중적 이미지를 '섹스에 미친 미치광이'로 굳히는 데 결정적인 공훈을 세운 영화이기도 하다. 칼리굴라 지못미.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이 증언하시기를, 80년대 한국에 비디오가 처음 보급되기 시작했을 무렵 복사 테이프로 인기가 꽤 좋았던 물건이었다고 한다. 재봉도 이런 비디오로 재감상으로 보았다고 한다.

6월 항쟁이후에 잠깐 극장 개봉을 했었고 양지운이 더빙하는 영화 예고편이 TV에 방영되기도 했다. 물론 다 잘린 것. 무려 87분 정도로 잘려나간 버젼이나 보고나면 뭐가 뭔지 몰랐다고 한다. 하재봉이 국내 극장에서 보고 도저히 줄거리 파악이 못되었다가 2시간 반짜리 짝퉁 비디오로 다시 보고나서야 이렇게 많이 잘렸는지 경악했다고 책으로 회고했다.

칼리굴라의 왕비로 나온 배우가 바로 렌 미렌. 영화 에서 엘리자베스 2세로 나온 배우다. 충격과 공포.

시칠리아에서 촬영할 때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로케이션을 지켜봤는데 포르노 영화 촬영장이라는 것을 알고 시 분노했다고 한다. 결국 주변의 험악한 분위기에 사색이 된 배우와 스태프들은 모두 혼비백산해서 달아났다고 한다.

'칼리굴라 효과'라는게 있는데 이 영화와 관련된 일화에서 비롯된 심리학 용어이다. 미국 보스턴시에서는 이 영화 상영을 금지시켰고, 이것이 화자되어 다른 지역에 가서 보고 올 정도로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현상'을 칼리굴라 효과라 칭한다,라고 한다. 비슷한 것으로는 '미오 줄리엣 효과'가 있다.

3. 연극

칼리굴라를 소재로 한 연극. 흔히 칼리굴라 하면 떠오르는 위 항목의 영화와는 별개의 작품으로 알베르 까뮈가 쓴 희곡을 일컫는다. 다만 내용상의 문제로 공연을 제한하는 국가도 있다. 내용은 어려운 시절을 함께 한 누이동생이 급사하자 너무나 슬픈 나머지 인간의 유한성에 회의를 느낀 칼리굴라가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고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다루고 있다.

악역 전문 캐릭터이자 태조 왕건에서 박술희로 유명한 연극배우 김학철씨가 주로 칼리굴라 역을 맡았다. 흠좀무.

가끔 3번항목 비디오 테이프를 산다고 용팔이에게 속아서 이 연극 실황중계 녹화분을 샀다는 전설도 있다...

4. 데몬베인의 안티 크로스


왼쪽 1/3가량이 붉은색의 해골모양의 마스크를 쓰고 코트를 걸친 거한.


보통 클라우디우스와 함께 다니며 클라우디우스는 뚱보라고 놀리고 칼리굴라는 주먹으로 맞받아치는 기묘한 페어. 물론 둘의 실력은 비슷하기 때문에 주변의 일반인만 휘말려서 죽는다...그런데 정작 가장 큰 피해자는 블랙롯지의 평신도들.(어?)

평상시엔 과묵하고 침착한 성격이지만 피를 보면 이성을 잃고 난폭한 본성을 드러낸다.

전투방식은 마력으로 완력을 강화해서 싸우는 육탄계열. 방어력은 높은 편으로, 기신비상에서는 갑각류의 껍질같은것을 둘러 크투가의 총탄을 막아내기도 하였다.

본편에선 방심하다가 쌍마총의 첫 타켓으로서 왼팔과 오른눈을 잃었고 그걸 의수/의안으로로 대체했다. 이후 다이쥬지 쿠로에게 강한 원한을 품게된다.

사실상 안티 크로스중 가장 존재감이 없고 모든 루트에서 가장 먼저 죽는다. 심지어 하도우 루리 루트에선 하도우 루리가 처음으로 조종해 본 데몬베인에게 레무리아 임팩트 맞고 소멸(...)

코믹스에는 게임 이상의 안습가도로 클라우디우스와 함께 다이쥬지 쿠로메타트론을 궁지에 몰아넣때 등장한 산달폰에게 맞아 배에 구멍이 뚫린뒤 발광하다 완성직후의 헌팅 호러멋대로 가져간 산달폰에 의해 상반신에 더 큰 구멍이 뚫려 데우스 마키나도 소환못해보고 사망(정말 압도적으로 발렸다).


사실 딥 원 이라는 의혹이 있다(비늘피부, 물 속성 마도서, 단세포, 괴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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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실제기록에서도 그냥 가이우스라고 불림.
  • [2] 게르마니쿠스라는 칭호는 원로원에서 게르마니아 전쟁 승리에 대한 보답으로 부여했다.
  • [3] 칼리굴라는 자신이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것을 자랑스러워했지만, 평민출신이었던 아그리파의 피를 이어받은 것을 부끄러워했다고 수에토니우스는 기록하고 있다.
  • [4] 대(大)플리니우스는 칼리굴라가 모젤강과 라인강이 만나는 트레베리 인근의 암비타르비움 태생이라고 주장했으며, 가이툴리쿠스는 칼리굴라에게 아부를 하기 위해서 칼리굴라의 탄생지가 헤라클레스에게 바쳐진 신성한 도시 티부르라고 주장했다.
  • [5] 그런데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안티였던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소문을 들으니 나이 들어서부터는 몸에 털만 많은 괴상한 모습의 대머리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 [6] 칼리가(Caliga, 로마군인의 샌들)을 신고 있었기에 작은 군화라는 뜻의 '칼리굴라(Caligula)'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었다. 정작 자신은 칼리굴라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
  • [7] 서기 33년에 사망했다.
  • [8] 큰 형 네로와 작은 형 드루수스조차 각각 31년과 23년에 유배지와 황실 지하실에서 사망했다.
  • [9] 이때 게르마니쿠스 가족의 비극적인 모습에 로마 사람들은 이들의 가족이 죽고 추방된 것은 티베리우스 황제의 권력 유지를 위해 희생된 것이라 여겼다.
  • [10] 성년식을 가리킴
  • [11] 수에토니우스의 기록. 수에토니스는 더해서 가이우스(칼리굴라)가 에니아를 통해 마크로에게 환심을 산 뒤, 티베리우스를 독살했고, 늙은 황제가 아직 숨이 붙어 있을떄 티베리우스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베개로 숨을 막아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내용이 거짓말인 게 티베리우스는 자연사했고, 주치의의 말을 듣고도 자신의 건강은 내가 잘 알고 있다고 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 [12] 수에토니우스는 지중해 세계를 이렇게 기록했다.
  • [13] 오늘날에는 말라리아로 추정된다.
  • [14] 심지어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를 독살했다는 설까지 생겨났기에 인기는 더욱 상승했다.
  • [15] 소(小) 드루수스의 아들이자 티베리우스의 친손자. 할아버지 티베리우스가 사망할 당시에는 아직 성년식을 치루지 않았기에 법적으로 아이에 불과했다.
  • [16] 키르쿠스 축제에서는 어머니 대(大) 아그리피나의 조각상을 마차에 실어 지나도록 했다.
  • [17] "칼리굴라가 황제가 된다면 이것은 칼리굴라가 말을 타고 나폴리 만을 왕복하는 것과 같을 겁니다."
  • [18] 일설에 의하면 칼리굴라가 동성애자였던 카시우스 카에리아를 놀린 것도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하지만 당사자인 카에리아는 황제 암살 혐의로 처형되기 직전까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 [19] 수에토니우스는 최초로 카이사르 동성애자설, 카이사르 간질설을 올리기도 했다.
  • [20] 그러나 이 이야기는 현실성이 없다. 칼리굴라가 암살된 곳은 황궁 내 지하통로였다.
  • [21] 물론 수에토니우스가 관보를 분석해서 황제들의 업적을 조사했던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자면 칼리굴라의 고향이 안티움.
  • [22] 첨언하자면, 원래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맹세를 할 때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였다. 흔히 말하는 '누이를 신격화했다'는 에피소드의 원본.
  • [23] 슈퍼로봇대전 UX에서는 미야케 켄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