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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카미 테츠하루

last modified: 2015-03-13 11:57:18 Contributors


현역 시절 호쾌한 타격 모습


명예의 전당 헌액판


생애 말년의 카와카미

이름 카와카미 테츠하루(川上 哲治)
생몰년도 1920년 3월 23일 ~ 2013년 10월 28일
국적 일본
출신지 쿠마모토, 쿠마모토현립고등학교 졸업.
포지션 1루수, 투수
투타 좌투좌타
선수경력 요미우리 자이언츠(1938~1958)[1]
감독, 코치경력 코치 요미우리 자이언츠(1959~1960)
감독 요미우리 자이언츠(1961~1974)

1941년 일본프로야구 MVP
스다 히로시
(도쿄 교진군)
카와카미 테츠하루
(도쿄 교진군)
미즈하라 시게루
(도쿄 교진군)

1951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고즈루 마코토
(쇼치쿠 로빈스)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벳쇼 타케히코
(요미우리 자이언츠)

1955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스기시타 시게루
(주니치 드래곤즈)
카와카미 테츠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벳쇼 타케히코
(요미우리 자이언츠)

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감독
미즈하라 시게루(1950~1960) 카와카미 테츠하루(1961~1974) 나가시마 시게오(1975~1980)

요미우리 자이언츠 영구결번
No.16

일본의 프로야구선수이자 감독. 포지션은 1루수로 좌투좌타이다. 혹자에 의하면 일본프로야구 최강의 먼치킨으로 평가받는 선수. 그리고 일본프로야구 최초의 기록의 사나이로 불린다.

별명은 타격의 신(神).

1938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이하 거인)에 입단하여 1939년 수위타자 자리에 오르며 거인의 주축선수로 도약하기 시작한다. 1943~1945년 전쟁으로 인해 잠시 야구계를 떠나 있었지만, 이후 1946년 프로야구가 재개되며 다시 복귀, 일명 빨간 배트로 불리며, 오시타 히로시의 푸른 배트와 후지무라 후미오의 장대 배트와 함께 전후 일본 프로야구의 열기를 주도하였다.

특히 그의 진가는 선구안에서 발휘하는데 1950년 559타수 29삼진, 1951년 374타수 6삼진이라는 말도 안되는 선구안을 보여주며 타격의 신이라는 별명으로 맹활약한다. 그 외에도 1950년에는 사상 첫 개인통산 100홈런을, 1951년에는 3할7푼7리라는 최고타율 신기록을 수립.(이 기록은 1970년 장훈이 3할8푼3리로 경신했다가 다시 1986년 랜디 바스가 3할8푼9리로 경신한다.) 1956년은 사상 처음으로 개인통산 2000안타를 기록한다.

하지만 그의 먼치킨스러움이 돋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감독시절.


전임이던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이 니시테츠 라이온즈(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 난카이 호크스(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게 4년 내리 일본시리즈를 내주고 1960년 시즌에는 만년 하위팀 다이요 훼일즈(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게 센트럴리그 우승을 뺏긴 후 감독직을 사임하자 후임으로 카와카미가 거인 감독이 되었으며, 스파르타 훈련과 취재진의 접속차단을 통한 정보유출 방지를 통한 신비주의 전략을 사용하였는데, 이에 기자들은 카와카미의 이름을 따서 구 소련의 대 동유럽 정책에 빗대 철(哲)의 장막[2] 이라고 비아냥 대기도 했다. 그런 매스컴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카와카미는 엄청난 지도력를 발휘하여 14년의 감독생활 동안 무려 11번의 일본시리즈 우승이라는 실로 경악스러운 대기록을 남겼다. 물론 그 동안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일본시리즈 9년 연속 우승이라는 대업도 남겼다. 일본시리즈 8번 진출에 8번 모두 준우승에 그친 어떤 분과는 참으로 비교된다(...)

덧붙여 장훈 선수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하며 그걸로 인해서 아무에게도 안 보여줬다는 어린 시절 모닥불에 심하게 데여 흉하게 망가진 오른손을 카와카미 에게만 보여줬고 카와카미는 "이런 손으로 어떻게 선수 생활을 했느냐" 며 눈물을 보였다고.

1974년 1866경기 1066승 739패 61무 라는 기록을 남기고 그는 감독직에서 물러났으며, "나는 영원히 요미우리 맨으로 남고 싶다"는 말과 함께 타구단의 감독 요청을 일체 거절하고 세상을 떠나는 날 까지 영원히 요미우리 맨으로 남았다.

하지만 카와카미도 감독 생활 중 흑역사가 하나 있었다. 1970년 신인 드래프트 1위로 요미우리에 지명된 좌완 투수 유구치 토시히코가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카와카미와 2군 감독 나카오 히로시의 강한 질책에 시달린 끝에 우울증 진단을 받고 정신병원 에서 요양 중 1973년 3월 22일 병상에서 변사체로 발견된[3] 일명 유구치 사건에 대해 카와카미가 입장을 밝혔는데...

거인이야 말로 이번 사건의 진정한 피해자이다. 큰 돈을 들여 애정을 갖고 키운 선수 였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성을 태운 교통사고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한 마디에 카와카미는 물론 요미우리는 매스컴의 맹 비난을 피할 수 없었고, 1973년 신인 지명선수 7명 중 무려 상위 지명자 4명이 요미우리 입단을 거부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는 등 요미우리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기도 했다.

2013년 10월 28일, 카와카미는 도쿄의 병원에서 향년 9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그 해 봄까지 카와카미는 노령임에도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자택에서 넘어져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은 후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어 요양하던 중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과 작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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