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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

last modified: 2016-02-11 00:16:26 Contributors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 지역의 도시국가, 그리고 이후에 같은 지역에 건설된 로마 제국의 도시를 뜻한다.

Contents

1. 명칭
2. 소개
3. 역사
3.1. 시작
3.2. 발전과 독립
3.3. 포에니 전쟁과 카르타고의 몰락
3.4. 재건된 로마의 식민도시 카르타고
4. 제도 및 사회
5. 종교
6. 역대 국왕 목록
7. 관련 인물
8. 이야기거리
8.1. 카르타고가 로마에게 패배한 이유
8.2. 카르타고의 항해
8.3. 카르타고의 무역
8.4. 카르타고의 농업
8.5. 카르타고 콤플렉스
9. 대중문화

1. 명칭

קַרְתְּ חַדַשְתְּ - 카르트 하다쉬트 (페니키아어)
Karthago - 카르타고 (라틴어)
Καρχηδών - 카르케돈 (그리스어)[1]
Carthage - 카씨지 (영어)


2. 소개

고대 페니키아인들이 현재의 튀니지 지방에 세운 나라. 기원전 814년의 디도 여왕(엘리사라고도 한다)이 세웠다고 한다. 과거에는 기원전 860년에서 기원전 814년 사이에 건국되었다고 추측되었으나, 고고학 발굴 결과 기원전 750년 경에 건국된 것으로 추정된다.

카르타고라는 이름은 페니키아어 카르트 하다쉬트음역한 것이다. 카르트 하다쉬트란 새로운 도시라는 뜻인데, 카르타고를 세운 페니키아인 지배층들이 팔레스타인의 도시 티레에서 이주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듯 하다. 뉴욕(New York)처럼 새롭게 새운 도시라는 뜻에서 '뉴-' 가 붙는 센스의 도시명라고 볼 수 있을듯.

3. 역사

3.1. 시작

페니키아인들은 바다 통상에 의존하는 자들이었고,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장기간의 원양항해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해안 곳곳에 1천명 남짓의 사람들을 남겨 보급역할을 하게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페니키아인들처럼 해안가에 진출하려는 그리스인들과의 경쟁을 통해 활발해졌으며 그 결과 지중해 전역에 이 두 민족이 건설한 많은 소규모의 해안 마을들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들 중 몇몇 마을들은 번영하기 시작하였고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하였는데 카르타고도 이들 중 하나였다.

이들 페니키아 도시들은 모두 이들의 어머니 도시였던 티레에 속하였으며 어느정도의 상납금을 티레에게 지불해야했다. 하지만 티레 본국은 페르시아와 같은 강력한 중동의 제국들과 싸우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티레가 멸망하자 그 역할을 시돈이라는 페니키아 도시가 대신하였으나 중동에 위치한 시돈 역시 티레와 마찬가지 이유로 외적의 침입을 자주받아 쇠퇴하였고 곧 카르타고가 이들을 대신하게 된다. 카르타고는 지리적으로 지중해의 서부와 동부의 중간지점에 위치하였으므로 지중해의 서부에 집중되어있는 광산과 동부의 높은 문화 생산품들을 교환하기에 적합하였다. 때문에 이곳은 번영하기 시작하였으며 페니키아 도시들의 맹주역할을 하면서 이들로부터 받는 상납금도 국고에 들어오게 되자 지중해의 가장 부유한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814년의 엘리사=디도 여왕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엘리사는 셈어로 '여신' 혹은 '아름답다'라는 뜻이며, 디도는 리비아어인들이 붙인 이름으로서 '방랑자', '여행자'라는 뜻이다. 어느 쪽이던 이 이야기는 상당히 신화에 가까운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티레의 공주인 엘리사는 아버지인 왕이 죽으면서 동생과 공동으로 통치하게 하였다고 한다. 엘리사에게는 피그말리온이라는 동생(혹은 오빠)와 아케르바스라는 숙부가 있었다. 엘리사는 아케르바스와 곧 결혼하는데 권력을 독점하고 싶었던 그녀의 동생이 그를 암살하자 엘리사는 티레를 떠나 도망치게 된다. 엘리사는 부하를와 재산을 배에 싣고 지중해로 나섯으며, 키프로스에서 창녀를 태우고 몇일 뒤 현재의 카르타고 땅에 도착했다.

엘리사는 현지의 왕인 리비아의 왕에게 가죽을 주면서 이 소가죽과 소가죽으로 둘러쌀 수 있는 크기의 땅을 교호나하자고 했다. 왕은 기꺼이 제안을 받아들였는데, 엘리사는 소가죽을 가늘고 가늘게 잘라다가 거대한 땅을 얻었다아뿔사 사기당했다. 이로서 엘리사는 카르타고를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언덕으 지금도 '부르사의 언덕'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부르사는 '암소'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리스어(…)이기 때문에 다소 이상하다. 그래서 페니키아어로 본토를 뜻하는 'bozra'가 이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엘리사의 이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야기거 전해진다. 엘리사가 통치를 하는데 리비아의 왕이 결혼을 요구하였고 이를 거부하기 위해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로마의 건국신화에도 엘리사는 등장하는데 디도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훗날 로마의 건국의 시조가 되는 트로이의 왕자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카르타고에 머물며 디도와 사랑에 빠졌고 아이네이아스가 떠나자 슬픔을 못이겨 디도가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왕이 죽으면서 저주를 내려 그렇게 오랫동안 원수가 되었다고도 한다.

3.2. 발전과 독립

8-7세기에 걸쳐 카르타고는 발전을 거듭하였고 기원전 650년에는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기원전 600년에는 그리스와 충돌하여 전쟁을 하였고 585년에 티레가 바빌로니아 제국의 포위공격을 받게 되자 티레로부터 정치적으로 완전히 독립한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여전히 티레에게 종속되었으며 따라서 티레에 꾸준히 상납금을 바쳐야 했다.[2]

어째서 카르타고가 티레를 대신하게 되었는지의 정확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가령 카르타고 옆의 우티카의 경우 카르타고보다 더 오래된데다가 카르타고와 비슷한 지형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우티카는 카르타고와 같은 영향력을 다른 페니키아 도시들에게 끼치지 못하고 맹주역할은 카르타고가 하게 된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티레와 시돈과 같은 대륙의 페니키아 도시들이 동방 제국들의 공격을 받을때 카르타고에 망명하면서 카르타고가 다른 도시들을 뛰어넘는 규모로 팽창했다는 설이 있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 이주민들이 다수의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세운 나라이다. 원주민들보다 그 수가 적었던 페니키아인들은 노예를 이용한 산업화된 농업경영과 상업활동, 특히 해양활동을 통해 번영을 누렸다. 이베리아 반도, 시칠리아 섬을 비롯한 서지중해 각지에 식민도시들을 세웠지만 이는 본토의 인구압력을 줄이는 것보다는 안정적인 무역 및 해군거점의 확보에 목적이 있었다.

전성기에는 북아프리카 해안가와 이베리아 반도,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 섬 대부분을 세력권 아래 두었지만 시라쿠사를 필두로 한 서부 지중해의 그리스인들과 끊임없이 항쟁해왔다. 기원전 550년 무렵 시칠리아에 대군을 보냈으며 시칠리아 전쟁에서는 밀고 밀리는 기나긴 전쟁 끝에 시칠리아의 서부 1/3 가량을 차지했으며 이후 피로스의 시칠리아 원정 때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하기도 했으나 피로스가 시칠리아에서 철수한 이후 영토를 되찾는다. 사르데냐까지 공격했으나 그리스와 사르데냐 연합군에 패배했다.

기원전 530년부터 마고 가문의 지배가 시작된다. "마고 왕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일설에는 마고는 장군이며, 부유한 귀족 가문이었다고 여겨진다. 이후 150년 정도 군사 지도자를 중심으로 "왕조" 격인 지배가 시작된다. 카르타고의 왕정이 어땠는지는 불확실하다. 옜날부터 왕정은 없었다. 옜날에는 왕정이 있었지만 폐지됐다. 왕정은 옜날부터 계속되었다는 3가지 설이 있는데 정설은 없다.

왕이건 그렇지 않건 마고 가문의 지도자들은 군정을 장악했고 군사 개혁을 실시했다는 점에서 카르타고의 지도자였다. 마고 가문의 시기에 카르타고의 용병제도를 창설했으며, 함대를 건설하여 카르타고의 군사력을 크게 증가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해양국가로서 카르타고는 해외 진출에 열성적으로 나섯다. 기원전 600년에는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카르타고인들은 아프리카를 일주했다. 기원전 425년 '항해자 한노'의 대항해가 있었다.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 침략을 반복하여, 기원전 405년 경에는 시라쿠사를 제외한 시칠리아 섬 전체의 지배를 확립하였다. 이 때를 전후하여 마고 가문의 지배가 끝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3세기에는 시칠리아의 지배권을 놓고 시라쿠사와 지속적으로 항쟁을 반복하였으나 대체로 카르타고의 우세였다. 이 무렵을 카르타고의 전성기로 보는 논자가 많다.

3.3. 포에니 전쟁과 카르타고의 몰락

로마와의 포에니 전쟁에서 3전 전패하여 몰락해버렸다.

1차 포에니 전쟁은 시칠리아를 주 무대로 싸웠으며, 한니발의 아버지인 하밀카르 바르카가 참전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한니발 바르카가 로마의 여러 군단을 패퇴시켜 전쟁을 승리 직전까지 이끌었으나, 카르타고 본국과 한니발의 동생들이 운영하던 이베리아 식민지까지 깨지면서 결국은 패배했다.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로마군들이 쳐들어오자 화평을 위해서 성안의 무기란 무기는 죄다 버리고 투항하나 자비심 없는 로마군들이 그대로 쓸어버린다고 선언하자 맨주먹으로 수 년을 버텼지만 결국 패배하여 멸망한다. 맨주먹으로 수 년을 버틴 것을 기적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당시 공성무기가 마땅치 않아 농성 상태의 적을 상대로 장기전이 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과장된 면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전쟁이 결정되자 공장을 다시 돌렸다는 말이 있는 걸로 봐서는 확실히 과장. 그 정도되는 국가가 무기공장 하나 없을까. 하지만 전쟁준비가 사실상 제로가 된 상태에서 포위당한 후에 농성전을 하면서 더 이상 재료를 조달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다시 재무장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긴 하다. 확실한 것은 공성전이 시작되자, 입구가 요새형태로 만들어져있던 카르타고 항구를 로마군이 배를 침몰시켜 막아버리면서 해상을 통한 보급은 막혔다는 것.

이후 카르타고인들은 학살당하고 고작 5만명 조금 넘는 수만 살아남아 로마로 끌려가서 노예가 되었으며, 카르타고는 불태워지고 소금이 뿌려져 완벽한 폐허가 된다.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카르타고인들을 해방 혹은 추방시킨 것으로 묘사하나, 이 역시 틀린 이야기.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다시 재건하기 전까지는 폐허 상태로 방치되었다.

카르타고인들은 무역뿐만 아니라 농업으로도 명성을 떨쳤는데, 노예를 대규모로 사용하며 과학적인 영농법으로 생산량을 크게 늘리는 플랜테이션 농법을 발명했다. 카르타고가 멸망한 이후, 이 농법은 로마 제국의 부유층들에게 이어졌으며(티푼디움 참고) 그들은 북아프리카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막대한 이득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로마 군대의 중추를 이루는 로마의 자작농들은 카르타고의 농업기술로 만들어진 북아프리카의 플랜테이션 농장과의 경쟁에서 패배하여 경제적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결국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로마의 자작농 병사들이 로마에 흘러들어온 카르타고의 농업기술에 몰락하고 마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벌어진 것이다.

3.4. 재건된 로마의 식민도시 카르타고


로마에 의해 재건된 카르타고.

로마 제국에서 옛 카르타고가 있던 자리에 재건한 도시. 원조(?)인 페니키아인의 도시 카르타고는 로마군이 철저하게 파괴했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카르타고의 유적은 모두 로마 도시의 것뿐이다. 다만 옛 카르타고 항구의 일부 흔적과 비르사 언덕의 주거지, 인신공양의식에 처해진 아이들의 유해가 묻힌 토펫 등 원래의 카르타고 유적이 약간은 남아있다. 제3차 포에니 전쟁 때 로마 병사들은 어린아이들의 영혼이 자신들에게 저주를 내릴까 두려워하여 다른건 다 불태우고 부쉈지만 토펫만큼은 손대지 않았다고...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기는 했지만 워낙 항구도시로서 입지가 좋은 땅이었기 때문에 로마에서도 카르타고의 공포가 희미해져가자 재건논의가 자주 있었다.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재건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암살당하면서 중지되었다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에 의해 재건되었다. 재건된 카르타고가 옛 카르타고와 어떤 공통점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냥 도시의 위치와 이름만 물려받은 것이다.

새롭게 건설된 카르타고는 로마 제국 시대에 아프리카 속주(지금의 튀니지 북부)의 중심도시로 부와 번영을 누렸다. 특히 로마 제국이 동, 서로 분열되었을때 서로마의 중요한 세수원 지역이었다. 이 지역을 반달족에게 빼앗긴 이후로 서로마 제국은 재정적 부담을 감당하지못하고 급격히 무너지게 된다.

참고로 흔히 로마 제국 말기 반달족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고 몰락한 것으로 여겨지나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카르타고는 반달 왕국의 통치하에 오히려 로마 시대보다 더한 번영을 누린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많은 사람들에게 오류를 불러일으키는 부분은 반달 왕국의 통치가 시작된 이후 북아프리카 지방에서 많은 토지가 버려진 사실인데,[3] 이는 로마 제국시기 제국에서도 가장 대규모 농장이 발달한 아프리카 속주의 특성상[4] 상당수의 자영농이 몰락하여 생산성이 떨어지는 내륙지역의 반사막 토지로 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달 왕국의 통치가 시작되며 구질서가 완전히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부분 무너지며[5] 농민들에게 쓸만한 토지들을 분배할 여유가 생겼고, 그 반동으로 생산성이 떨어지는 내륙지역의 반사막 토지들이 대거 버려진 것이다. 뭐, 굳이 농지면적만을 번영의 기준으로 잡는다면 반달왕국이 통치하던 시기 카르타고는 쪼그라 들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번영의 기준을 잡는 사람을 없을 테니. 그러나 카르타고가 극심한 타격을 받은 시기가 한 번 있긴 하다. 바로 벨리사리우스의 원정으로 비잔티움 제국에 편입된 직후. 막 통치자가 뒤바껴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급작스런 선페스트까지 겹치는 바람에 카르타고는 엄청난 타격을 받고, 이를 복구하기 위해 상당한 금액을 써야했던 비잔틴 제국은 심각한 자금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카르타고 수복은 제국에게 큰 이득이 되었는데, 훗날 페르시아 제국에게 아시아 지방을 대거 상실한 (동)로마 제국이 헤라클리우스 황제 시절 카르타고로 수도를 옮기려고 했던 것이나,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대반격시절 중요한 재원을 담당했던 것만 보아도 여전히 제국의 손꼽히는 중요도시이자 부를 축적한 번영하는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포에니 전쟁으로 멸망한 이후 로마에 복속되어 재건된 후에도 계속해서 번영을 누렸으나, 역사의 중심에서 빗겨나간 탓에 유명하지 않을 뿐이다.

카르타고라는 도시의 최종 소멸은 698년 아랍인의 침략이다. 로마 제국이 완전히 와해되고 속국들이 하나둘씩 제 갈길을 가는 와중에 중동 지방은 아랍 제국의 큰 파도가 몰아쳤다. 북아프리카 및 카르타고는 이집트와 달리 200여년을 더 버텼으나 유스티니아누스 2세 이후 비잔티움의 내란을 틈타 지속적으로 침입해온 아랍인들에 의해 도시가 결국 함락되었다. 후계 황제인 레온티우스가 구원단을 파견했지만 결국 격파되었고 이는 황제 자신의 실각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랍인들은 자신들이 점령한후 비잔티움 제국에서 해군을 보내 재탈환하는 바람에 다시 공성전을 해야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예를 따라 역습의 기회를 차단하기위해 카르타고 성벽을 허물고 시가지를 황폐화시킨후 근처에 튀니스를 건설했다. 1400년에 이르는 도시의 최후였다.

또한, 아랍인의 북아프리카 통치는 고대 세계 풍요의 종말을 뜻하였다. 지나치게 관개농업이 발달하여 큰 생산성을 누리던 북아프리카 지방은, 오랜 전란과 혼란기 속에서 수리시설이 황폐화되어 쓸만한 영지가 줄어들고 있었다. 여기에 태생이 사막 유목민족이었던 배두인족 출신의 아랍인이 들어오자 농업기술의 중요성을 모르는 지배자들에 의해 토착민들은 기술을 전달할 틈도 없이 노예가 되어버렸고, 사람 손을 타지못한 밭과 과수원들은 자연 속에서 살아남을 힘이 없었다. 결국, 급속한 사막화로 북아프리카 지방 대부분은 현재의 사막이 되었고, 로마 본국보다 풍요롭고 호화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북아프리카 지방은 과거의 유적속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다.[6] 결국, 중세를 지나 현대에 와서 석유가 발견될때까지 이 지역은 어업 외에는 별다른 산업이라곤 해적들과 노예상만이 있을 정도로 군사력말고는 별 볼일 없는 동네가 된다. 현재도 마찬가지.

4. 제도 및 사회

초기에는 왕정이었으나 하밀카르 1세의 사망 이후 실권이 장로회로 넘어갔으며, 보밀카르가 왕권 회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공화정이 된다. 정치체제는 전형적인 과두정으로 로마와 유사하게 해마다 두 명의 집정관[7]이 선출되었고 장로들로 구성된 원로원, 104명의 고관으로 구성된 백인회, 시민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민회가 존재했다. 군대를 장악하는 장군직은 민회에서 선출되었다.

부부가 묻힌 무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카르타고에서는 일부일처제를 실행했다고 여겨진다. 기후 문제인지 문화 문제인지, 몸을 드러내는 것 보다는 긴 옷과 모자로 몸을 가리는 경우가 많았다. 상류층에서는 여성이 지위가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가죽으로 만든 통화를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자세한 것은 불명이다. 다만 카르타고에서 발행한 동전들이 남아있으며 대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기도 하다.

유달리 동명이인이 많아 역사서에서 이름을 헷갈리게 하는 경우가 잦다(한니발, 하스드루발, 마고 등). 당장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만 한정해도 똑같은 이름을 가진 지휘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여럿 등장한다.

문화 쪽에서는 로마나 그리스와 달리 페니키아 문화의 영향이 강해 실용적인 것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고대 카르타고 서적 중 후대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항해일지나 농장경영서("마고농업서") 등의 실용서적들이다.

5. 종교

카르타고에서 가장 많이 믿어지는 신은 주신 '바알 함몬', 그리고 그 배우자인 '타니트'였다. 이외에도 아슈타르테, 멜카르트, 에슈문 등의 신이 언급되며, 널리 믿어진 것으로 보인다.

어린아이를 산채로 불에 태워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 의식이 유명하며, 희생된 아이들의 유골을 매장한 묘지인 토펫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다만 토펫에 매장된 유골이 제물로 바쳐져 죽은 게 아니라 질병 등으로 자연사한 아이들의 유해를 묻은 것이라는 견해도 일부 존재한다.

6. 역대 국왕 목록

  • <디도 왕조>
    • 디도 : BC 814 ~ BC 760 (미상)
    • 한노 1세 : BC 580 ~ BC 556
    • 말쿠스 1세 : BC 556 ~ BC 550
  • <마고 왕조>
    • 마고 1세 : BC 550 ~ BC 530
    • 하스드루발 1세 : BC 530 ~ BC 510
    • 하밀카르 1세 : BC 510 ~ BC 480
    • 한노 2세 : BC 480 ~ BC 440
    • 히밀코 1세 : BC 460 ~ BC 410 (시칠리아 왕)
    • 한니발 1세 : BC 440 ~ BC 406
    • 히밀코 2세 : BC 406 ~ BC 396
    • 마고 2세 : BC 396 ~ BC 375
    • 마고 3세 : BC 375 ~ BC 344
    • 한노 3세 : BC 344 ~ BC 340
  • <한노 왕조>
    • 한노 대왕 : BC 340 ~ BC 337
    • 기스코 : BC 337 ~ BC 330
    • 하밀카르 2세 : BC 330 ~ BC 309
    • 보밀카르 : BC 309 ~ BC 308

8. 이야기거리

8.1. 카르타고가 로마에게 패배한 이유

카르타고가 로마에게 패배한 가장 큰 이유는 카르타고와 로마 간 군사의 질적, 양적 차이가 컸다는 점이다. 카르타고는 용병에 주로 의존했지만, 로마는 사실상 국민개병제나 다름없는 시민군 제도였다. 물론 카르타고도 페니키아인으로 구성된 시민군이 있었지만, 페니키아인은 이주민족이었으므로 인구수가 원주민에 비해 적어서 시민군을 아껴야 했기 때문에 주로 용병을 써야 했다. 실제로 포에니 전쟁 이전 시라쿠사의 그리스인 참주들과 벌인 전쟁에서 시민군을 대거 동원했다가 큰 손실을 입은 후로 시민군은 거의 본토방위에만 동원되었다.

카르타고의 인구는 추산에 따라서 최대 70만명까지 잡기도 하지만, 전체 20만에서 외국인 노예를 포함하여 40만 정도로 추측하기도 한다. 이는 고대 지중해권의 도시국가 가운데서는 아테네, 로마와 비슷하거나 더 많은 숫자이다. 하지만, 로마는 여러 도시들을 동맹으로 묶어서 그들의 병력까지 동원힐 수 있는데 비하여 카르타고는 오직 자체 시민에만 의존하는 체계라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를 완전히 통일한 농업국가인 로마의 인구와 동원능력은 지중해 각지에 흩어진 교역도시들의 연합체인 카르타고에 비해 한참 우위에 있었다.[8] 여기에 더해서 카르타고는 연합체의 특성상 유사시 다른 교역도시들에게 강제징병이나 강제징수를 하기 어려운데다가 평소 이들에게 인심을 못얻은 탓도 커서 우티카 같은 만만치 않은 경쟁세력이 나중에 전세가 더 악화되자 오히려 로마를 편드는 악재까지 발생해 안그래도 부족한 전쟁동원능력이 더 떨어졌다.

전략전술 측면에서도 로마는 북방 켈트족과의 전쟁, 이탈리아 통일전쟁, 에피로스의 피로스의 침공 등으로 단련된 베테랑 장교들이 많았던 반면, 카르타고는 하밀카르나 한니발 등 몇몇 특출난 인물을 제외하면 미숙한 페니키아인 상류층이 전쟁을 지휘했다.

또한 카르타고는 전투에서 크게 패한 장수를 사형시키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패전으로 인한 전술적 교훈을 활용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고, 패전의 처벌을 두려워한 지휘관들이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해 결정적인 승기를 놓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그냥 한번 졌다고 죽이지는 않았다. 한니발도 자마 전투에서 패배하고 카르타고로 후퇴했지만 안 죽었으니까(...). 그런데 카르타고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받는 이 관행도 사실은 카르타고의 시민 인구가 적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카르타고는 시민 인구가 적다보니 큰 전투에서 패배하면 그 인구 타격의 '슬픔'이 로마보다 훨씬 크게 다가왔고 시민들의 분노도 맹렬했던 것이다.

해군의 경우 포에니 전쟁 이전에는 카르타고가 로마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겨졌다. 카르타고가 해상 무역을 주도하는 국가이기도 했고, 시민들이 육군은 용병에게 주로 맡기고 해군 지원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해전에서 연전연패하여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에는 대체로 제해권을 로마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우선 카르타고는 노잡이와 같은 선원 숫자가 부족하여 함대 규모가 로마에 비해 작았으며, 로마는 전함에 더 많은 수병들을 실었기 때문에 수병을 적게 싣고 주로 충각으로 들이받는 전법을 쓰던 카르타고 함대는 함상 백병전이 벌어지면 답이 없었다.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카르타고가 해상, 로마가 육상을 장악한 것으로 묘사하는데, 물론 긴장감은 이쪽이 더 크지만 사실과 완전히 다른 부분.

여러가지 이유를 종합하자면, 카르타고는 시민들의 인구가 적어서 졌다는 것이 궁극적인 결론이다.

8.2. 카르타고의 항해

카르타고 인의 항해술과 선박 제조 기술은 항해자로 이름이 높은 페니키아 인들 가운데서도 특출난 것이었다. 카르타고 인들은 선박을 제조할 때 목재에 일련번호를 붙이고, 일정한 규격에 따라서 제조된 목제로 건조를 하는 선진적인 생산 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다고 한다.

헤로도토스는 자신의 역사서에 기원전 600년 경에 카르타고 인들이 홍해를 따라 남하하여, 아프리카 대륙을 타고 남쪽으로 희망봉을 돌고, 북쪽으로 헤라클레스의 기둥(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3년에 걸쳐서 귀국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카르타고인들이 폭풍이 부는 계절이 되면 상륙하여 보리 씨를 뿌리고 해를 넘겨서 보리의 추수가 끝나면 식량으로 삼아 항해를 계속하는 패턴을 반복하였다는 이야기. 그리고 일출과 일몰의 위치가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 북쪽에 보이는 기록을 남겼다. 이에 헤로도토스 자신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라고 언급하였지만, 오히려 이 기록 때문에 카르타고 인들이 적어도 '남반구'에 도달했다는 강력한 증거로 여겨지고 있다.

기원전 425년 한노가 50개의 노를 가진 선박 60척에 3만명의 남녀와 식량을 싣고 출발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노는 카르타고 서쪽으로 항해하여 지브롤터를 지나, 서부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서 남하하였다. 현재의 카메룬에 이르렀다고 여겨진다.

히미르코 라는 항해자는 아일랜드까지 항해하였다. 카르타고 인들의 교역범위는 북부 프랑스와 브리튼 섬까지 퍼졌다.

이렇게 대외 교역에 나서게 된 원인으로는, 카르타고가 원래 원주민들의 땅을 '빌려서' 정착한 한계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즉, 원래부터 무역 거점 역할 정도 밖에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외 무역에 집중해야 했다는 것. 그러나 나중에는 원주민의 땅을 빼앗아서 농업에도 엄청난 성과를 올리게 된다.

8.3. 카르타고의 무역

카르타고 인들은 지브롤터 해협 바깥 쪽에 위치한 북아프리카의 도시들과 독특한 교역 방식을 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침묵 교역이라 불린다. 이 당시는 화폐가 없었으며,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언급된다. 단순히 흥미로운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1. 카르타고 상인이 배로 북아프리카의 해안 부근 마을에 간다.
  2. 카르타고 상인이 물건을 내려놓고, 배에서 신호 봉화를 올린다.
  3. 연기를 보고 원주민이 해안에 와서 물건 값으로 황금을 두고 떠난다.
  4. 카르타고 인은 배에서 내려와, 황금의 양이 상품의 값어치와 맞먹으면 가지고 떠난다.
  5. 만일 적절하지 않다면 카르타고 인은 배에 돌아가서 적절한 값어치의 황금을 놓을 때까지 계속한다.

만일 원주민이 황금을 주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가는 도둑질을 한다면, 다시 카르타고 인은 오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원주민은 희귀한 물자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교역 방식에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카르타고 인은 브리튼 섬 서쪽의 콘월 지방과도 무역을 하였다. 이 지역에는 주석 광산이 있는데, 지중해에서 청동을 만드는데 쓰이는 주석은 산지가 적어서 중요한 물질이었다.(구리는 키프로스 등에서도 난다.) 콘월 지방과의 무역은 독점 교역이었으므로 수익성이 높았다. 로마 등의 신흥국에서 무역 루트를 알아내기 위하여 카르타고 상선을 추격하기도 했으나, 카르타고 측은 일부러 배를 좌초시키면서 까지 무역 루트를 보하하려 했다.

8.4. 카르타고의 농업

카르타고는 농업 측면에서도 크게 발달하였다. 카르타고 인은 원주민으로부터 무력으로 토지를 빼앗고, 관할 구역마다 총독을 두었으며,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여 많은 수익을 올렸다. 이러한 카르타고식 농법은 카르타고가 멸망된 뒤 로마에 계승되어 티푼디움으로 발전한다.

8.5. 카르타고 콤플렉스

일본에는 카르타고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다. 통상국가로서 경제가 번영하였으나 군사적으로 패망하고 만 카르타고의 모습에서 일본인들이 '카르타고처럼 될 수도 있다'는 불안을 느낀다는 것이다.

평론가 자이젠 테루오(西前輝夫)는 Asahi Journal 92/05/01에서 『카르타고 콤플렉스가 낳는 「국제공헌」 강박증』이라는 칼럼에서 "'통상국가' 카르타고의 전철을 두려워하여 '국제공헌' 강박증을 낳는 것 같다."고 설명. 또 다른 평론가 모리모토 테츠로(森本哲郎)는 PHP연구소에서 출간한 『어느 통상국가의 멸망(ある通商国家の滅亡)』이라는 책에서 "이전에 번영했던 통상국가 카르타고와 현대 일본의 상황은 조사하면 할수록 비슷하다. 나는 이 원고를 쓰면서 카르타고의 비극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고 여기게 되었다."고 저술했다.

9. 대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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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리스의 지명 Χαλκηδών(칼케돈)과 헷갈리는 경우가 있다.
  • [2] 포에니 전쟁 때도 한 번도 안 거르고 상납금을 꼬박꼬박 티레로 보냈다고 한다.
  • [3] 정확히 따지자면 반달리즘으로 유명한 반달족이 통치했다는 게 가장 클 것이다. 대략 반달족? 걔네 때문에 북아프리카 막장됨!의 느낌.
  • [4] 한창 때는 아프리카 속주 영지의 절반 가까이가 황제의 개인영지였고, 이후 북아프리카 속주 농토의 6/1을 개인소유로 보유한 원로원 의원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러니 북아프리카 속주의 자영농자들이 죽어날 수 밖에.
  • [5] 영지고 뭐고 다 버리고 로마로 도망친 사람의 수가 적지 않았다.
  • [6] 물론 아랍인이 무조건 농경지를 황폐화시킨건 아니다. 재빠르게 아랍 문화권으로 편입한 기존 문명권의 사람들은 옛날과 비슷하게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다만 북아프리카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이 떠오를 정도로 심했다. 어느정도냐 하면, 로마인들이 세워놓은 목욕탕의 용도를 이해하지못해 노예시장으로 썼을 정도.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노예수용소로 변한 '목욕탕'이 원래는 유별나게 위생관념이 강했던 로마인들의 작품이라는걸 상기해보면...
  • [7] 로마의 콘술과 유사한 직책으로 카르타고에서는 수페트라고 호칭했다.
  • [8] 전 근대의 국가에서 인구수는 국력과 직결되는 수치이고, 제아무리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라고 하더라도 농업의 인구부양력은 상업 따위와는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넘사벽을 형성한다. 괜히 동아시아에서 농사는 천하의 근본(天下之大本)이라고 한게 아니다. 물론 본 항목의 카르타고나 후세의 베네치아 공화국처럼 상업으로 패권을 형성하는 국가도 있기는 하지만, 이 두 국가도 결국엔 주변국의 압도적인 생산성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