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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왕 에드워드

last modified: 2015-03-23 01:05:07 Contributors

Contents

1. 소개
2. 어린 시절
3. 왕이 되다
4. 고드윈과의 맞짱
5. 정치는 이제 귀찮아
6. 이모 저모

역대 잉글랜드 국왕
덴마크 왕조 웨식스 왕조 웨식스 왕조
하레크누드 참회왕 에드워드 해럴드 2세

왕호 에드워드
(Edward the Confessor)
별칭 참회왕 (the Confessor)
부친 애설레드 2세
모후 노르망디의 엠마
생몰년도 1003년에서 1005년 사이 ~ 1066년 1월 5일
재위기간 1042년 6월 8일 ~ 1066년 1월 5일
대관식 1043년 4월 3일

1. 소개

잉글랜드의 왕으로서 실질적으로 마지막 앵글로색슨 출신 왕이다.[1] 그와 그 뒤를 잠시 계승했던 해롤드를 끝으로 앵글로색슨의 지배는 끝나고 노르만 족의 잉글랜드 지배가 시작된다.

정치에 무관심했고 강력한 귀족들에 가려 통치를 잘 하지 못했으며 별명인 "참회왕"이 주는 이미지처럼 오로지 신앙심만 강했던 왕... 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그 반대였다는 평가도 있다. 실제로는 활력에 넘치고 야심도 있었던 왕이었다는 것. 무관심한 왕 이미지는 노르만 족이 잉글랜드를 정복하면서 앵글로색슨 족인 그에 대해 부정적 평가만 남겼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또 다른 평가로는, 그는 통치 전반기에는 적극적이었으나 후반기에는 무관심했다는 주장도 있다. 평이 여러 모로 엇갈리는 인물.

2. 어린 시절

옥스포드셔의 아이슬립이란 곳에서 애설레드 2세의 7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다만 에드워드의 생모는 부왕의 두번째 아내였으며 생모에게는 첫번째 아들이다. 출생 연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며 1003년~1005년 사이의 어느 해로 추정된다. 그의 어린 시절은 바이킹의 노략질과 덴마크의 잉글랜드 침략이 성행하던 시기였다. 덴마크 왕 벤 포크발드와 그의 아들 크누트 대왕이 덴마크 군을 이끌고 침략했고, 후일 스벤은 결국 잉글랜드 정복에 성공하게 된다. 이에 에드워드의 일가는 노르망디로 피신하기도 한다. 에드워드의 아버지 애셀레드 왕은 스벤 왕과 피터지게 싸웠으며, 두 왕 모두 죽자 각자의 아들끼리 대를 이어 싸웠다.

13~15세 쯤 되었을 1016년에 스벤의 아들인 크누트와 싸우던 에드워드의 배다른 형이 죽었고 크누트도 왕위에 올랐기에, 에드워드는 다시 피난길에 오른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얼마 후에 크누트와 결혼한다(...) 다시 말해, 자기 남편의 적의 아들이자 자기의 배다른 자식의 적과 결혼한 것이다. 전 남편인 애셀레드 왕과 결혼할 때처럼 이번에도 두번째 아내로서 결혼했다 재혼 전문. 같은 해, 크누트는 마지막 남은 에드워드의 배다른 형을 처형했고, 따라서 에드워드는 앵글로색슨 족으로는 유일한 왕위 후계자로 남게 되었다.

3. 왕이 되다

피난길에 오른 에드워드는 25년간 망명 생활을 했다. 주로 노르망디에서 피신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간 동안의 에드워드는 시골 촌 구석의 귀족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유일한 왕위 후계자였지만 그 자신조차도 잉글랜드 왕이 될 것을 기대하지 않았고, 그의 친모(크누트 대왕의 아내)도 그를 별로 밀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크누트 대왕 사이에서 아들을 새로 낳았고 그를 왕으로 밀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하레크누드로서 에드워드와는 씨다른 형제다.

1035년에 크누트 대왕이 죽고 하레크누드가 덴마크 왕에 올랐다. 당시 그는 덴마크에서 왕위를 지키는 것만 해도 빡셌기 때문에, 일단 잉글랜드 왕 노릇은 접어두고 섭정인을 잉글랜드로 보내는 선으로 그쳤다. 그 섭정인이 그의 배다른 형, 해럴드 1세다. 1037년 해럴드 1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3년 후에 죽었고, 1040년, 덴마크 왕으로서의 위치가 굳건해진 하레크누드가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불과 1년 뒤인 1041년, 병이 심각하여 곧 죽을 것을 깨달은 그는 에드워드를 잉글랜드로 불러 들였다. 하레크누드는 1년 뒤인 1042년에 세상을 떠났다.

하레크누드가 죽자, 잉글랜드에서 가장 강한 권력자였던 고드윈 백작은 에드워드를 왕으로 밀었다. 덴마크 출신 하레크누드의 지배를 받아온 잉글랜드 국민들은 앵글로색슨 족인 에드워드를 왕으로 열렬히 지지했고, 1043년 4월 3일, 에드워드는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그를 후원했던 세 명의 백작의 권세가 매우 강했기에 그의 실권은 약했으나, 그는 야심차게 강한 군주로서의 자리를 되찾아 나갔다. 역사가들은 집권 초기의 그를 야심차고 강력한 인물로 평가한다.

1045년 에드워드는 고드윈의 딸 에디스와 결혼하였고 고드윈과는 사위-장인 관계가 되었다. 이 무렵의 고드윈 일가는 잉글랜드 남부 전부를 지배하고 있어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집권기에 노르만 족, 프랑스인들을 주로 고용했기에 인기를 잃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그 정도는 아닌 듯 하다. 다만 몇몇 외국인들을 집에 머무르게 했고, 그들이 좋은 평을 듣지 못한 건 맞다.

4. 고드윈과의 맞짱

에드워드와 고드윈 가문, 누가 이기든 언젠가는 한번 부딪칠 사이다. 강력한 군주의 위치를 다시 확립한 에드워드와, 당대 제일의 권력가인 고드윈 가문은 권력에 대한 경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에드워드에게는 고드윈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다. 1036년에 에드워드의 동생 앨프리드는 잉글랜드로 돌아 왔다가 웨식스의 백작 고드윈에게 붙잡혔고, 고드윈은 그를 해럴드 1세에게 넘기기 위해 배에 태워 보냈다. 배 위에서 고드윈의 부하들은 앨프리드에게 만행을 저질렀다. 벌겋게 달아오른 꼬챙이로 앨프리드의 눈을 찔러 장님으로 만든 것이다. 얼마 뒤, 앨프리드는 그 상처가 덧나 사망했다. 이 일로 인해 에드워드는 고드윈에 대한 원한을 품게 되었다.

결국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1051년 9월, 에드워드에게 그의 프랑스인 처남이 찾아왔다. 그런데 처남의 부하들이 시민들과 싸움질을 하는 일이 생겼고, 이것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일이 커졌다.

에드워드: "님의 시민들이 내 손님에게 깽판 쳤으니 잡아가두셈"
고드윈: "ㄴㄴ 님 손님이 먼저 깝쳤었음. 걍 놔둘거임"
에드워드: "아오 빡쳐. 이번 기회에 손 한번 봐드리겠음"

에드워드를 따르던 레오프릭 백작과 시워드 백작은 병력을 소집했고, 고드윈 가의 두 아들도 자신들의 병력을 소집해서 대치했다. 그리고 양 측은 화끈하게 한판 붙었...기는 개뿔, 양측 모두 미적대며 싸우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니 곤란해진 것은 고드윈 쪽. 왕에게 대들었는데 부하들이 싸우려 하지 않으니 왕이 제대로 군대 끌고 오면 쳐발릴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에드워드는 신하를 보내 "님이 죽인 내 동생 알프레드 되살려 놓으면 봐주겠음"이라고 조롱했다. 고드윈은 저항을 포기하고 그의 아들들과 함께 플랜더스아일랜드로 도망쳤다. 고드윈을 내쫓은 에드워드는 내친 김에 자신의 아내인 고드윈의 딸도 수도원으로 쫓아버렸다.

1년 후, 고드윈과 아들들은 상당한 지지를 받으며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전을 두려워 한 레오프릭 백작과 시워드 백작도 이번에는 에드워드 왕 편을 들지 않았다. 에드워드 왕은 빡쳤지만 별 수 없었고, 그들의 백작 지위를 다시 인정해 줘야 했다. 그가 쫓아보냈던 아내도 다시 불러와야 했던 건 덤.

5. 정치는 이제 귀찮아

1050년대 중반 정도에 에드워드 왕은 고드윈의 세력을 견제할 정도의 세력을 키우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고드윈 가문도 세를 불려나갔다. 고드윈은 1053년에 죽었지만 해럴드를 비롯한 그의 아들들의 세력이 커졌고 1057년이 되어서는 머시아를 뺀 잉글랜드 전역이 이들 손에 들어간다. 이 무렵부터 에드워드는 정치를 점차 멀리하고 매일 사냥이나 다니게 된다.

1065년 해럴드의 동생인 토스티그가 백작으로 있던 노섬브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토스티그는 반란을 진압하고 싶었지만, 협상가로 파견된 그의 형 해럴드는 도리어 그를 비난했다. 심지어 반란군을 달래기 위해 그를 백작에서 내쫓고 모카 백작을 대신 임명하기도 했다. 토스티그는 반란을 진압해 달라고 왕 앞에서 징징댔으나요청했으나 해럴드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그의 편을 들지 않았고, 토스티그를 쫓아냄으로서 반란을 무마하는 쪽으로 분위기는 돌아갔다. 토스티그는 왕가와 친했으나, 에드워드 왕은 분위기를 거스르지 못했고, 마지 못해 토스티그의 추방을 명했다.

1066년 1월 5일, 에드워드 왕은 사망했고, 다음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되었다. 문제는 누가 왕위를 이을 것인가였다. 에드워드 왕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후계자가 명확치 않았다. 그리고 그는 누구를 후계로 할지 명확히 지정하지도 않았다. 그가 살아생전 누구를 후계자로 생각했었는지는 아직도 불명확하며, 당연히 당대에도 논란이 많았다. 노르만 공국윌리엄 1세는 자신에게 넘기기로 이미 약속했다고 주장했고, 해럴드 2세는 왕이 죽기 직전에 자신에게 왕국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정통성으로 본다면 가장 적임은 애설레드 2세의 증손자인 에드가 애설링이었다. 실제로 그는 나중에 벌어진 헤이스팅스 전투 직후 잠시 동안이나마 왕으로 지명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당시 에드워드 왕의 관심 밖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세력 또한 없어서 왕위와는 멀어졌다.

어쨌거나 고드윈 가의 해럴드는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에드워드 왕이 죽은 다음 날, 즉 왕이 매장된 바로 그날이었다.

6. 이모 저모

  • 외모면에서는, 키 크고 혈색 좋고 머릿결과 수염도 아름다웠으며 전반적으로 왕으로서의 위엄을 풍기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 1161년에 교황 렉산데르 3세로부터 시성(諡聖)되었다. 앵글로색슨 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시성되었고, 잉글랜드 왕으로서는 유일하게 시성되었다. 그런데 사실, 그는 불같이 화내는 경우도 잦았는데다가 사냥도 즐겼기에 성자로 지정된 것은 정치적인 배려 때문이었다는 평가가 대다수.

  • 에드워드의 깊은 신앙심은 25년간의 망명 생활 동안 생긴 것이라 알려져 있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이를 부정하는 입장이며, 중세에 그를 시성하는 과정에서 왜곡된 것이라 보고 있다.

  • 세계적으로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관련이 있다. 에드워드 왕이 1042년 ~ 1052년 사이에 사원의 재건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재건을 시작한 이유는 자신이 묻힐 왕족의 교회를 확보하기 위해서. 사원은 그가 죽을 때(1066년)까지 완공이 안되었으나 하여간 그는 그곳에 매장되었다. 재건은 1090년 경이 되어서야 완료되었는데, 1245년에 헨리 3세가 새 건물 지을 자리를 만드느라 허물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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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에드워드 왕 다음에 즉위한 해럴드 왕도 앵글로색슨족이긴 한데, 그의 재임기간는 9개월 좀 넘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