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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도 국경분쟁

last modified: 2015-03-28 19:44:58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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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은 아루나찰프라데시, 좌측은 카슈미르 면적의 14% 정도 되는 악사이친 지역이다.

Contents

1. 개괄
2. 배경
3. 전쟁의 양상
4. 전쟁의 여파


1. 개괄

Sino-Indian War, 中印戰爭(중인전쟁).

1962년 10월부터 12월 사이에 중국인도 사이에 벌어진 전쟁. 편의상 중인전쟁으로 불린다.

사단 규모의 병력이 동원된 명백한 전쟁임에도 국경분쟁 정도로 칭해지는 이유는 비교적 속전속결로 끝난 이유도 있지만, 당시 중국과 인도 모두 대외적 이미지 차원에서 이것을 크게 비화시키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양국의 복잡한 역사적, 지리적 이해관계가 맞물려 터진 사건이며, 당사국그 사람들이 25억이나 된다는 게 함정들에게는 현대사에서 중요한 비중으로 다뤄지는 데 비해 타국에서는 중국-베트남 전쟁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전쟁 중 하나이다.

2. 배경

영토 문제의 발단은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국을 지배하던 인도 제국을 지배하던 영국아편전쟁의 결과로 홍콩을 할양하는 조건에서 영토 문제를 일단락 지었다. 청은 열강이 더 이상 자국의 땅을 넘보는 것을 원치 않았고, 영국도 필요 이상 중국을 침범하면 이 알토란 같은 땅을 넘보는 다른 열강들과 복잡한 대립각을 형성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문제가 되는 티베트 땅은 자원적으로나 전략적으로 양국 모두에게 큰 가치는 없었다.

이후 청이 신해혁명을 통해 무너진 기회를 틈타 영국은 1914년 맥마흔 라인을 선포하여 일방적으로 영국령 인도 제국의 국경선을 선언하였다. 영국이 기회주의적으로 중국령을 먹튀한 이 사건으로 인해 중국과 인도의 관계는 두고두고 불편한 앙금으로 지속된다. 게다가 영국은 인도를 독립시켜 준 뒤에도 이 라인을 인증했고, 중국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역시 여기서도 영국이 만악의 근원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인도 제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3개의 나라로 쪼개졌는데, 이 가운데 인도에 자리잡은 힌두교 세력은 인도 공화국으로서 1950년 새로이 출범했다. 그러나 과거 인도 제국의 일원이었던 파키스탄과 분열 과정에서 전쟁을 치렀고, 이후 파키스탄이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보이면서 국방에 대한 불안이 고조되었다.[1]

때문에 인도는 소련과 미국 양국에서 아슬아슬한 외교적 줄타기를 하게 되었는데, 국제사회에서 소련의 헝가리의 민주혁명 진압(1956)부터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1979)까지 소극적인 자세를 취한 점으로 보았을 때, 이 시기 동안엔 중립을 유지하되 친소련적인 성향을 띠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949년 네루 총리가 중국 공산주의 정권의 수립을 재빨리 승인하고 중국의 티베트 지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하는 등 공산주의의 전파에 방관자적 입장을 취한 점으로 미루어 소련이 국익에 미치는 영향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단, 인도는 기본적인 정책의 골자는 '비동맹주의'로 하였으므로, 파키스탄에 대한 심리적·상대적 관점에서의 친소련 노선으로 볼 필요도 있다.

비슷한 시기, 중일전쟁 종전 직후부터 중국은 국민당공산당 간의 내전에 빠져들었고, 4년간의 내전 끝에 중공이 승리하여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가 될 때까지는 아직 자국 내 안정을 찾기 힘든 상태였다.

이후 중국은 티베트를 무력 병합하는 한편,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UN군을 몰아붙이는 저력을 발휘해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1950년대부터는 국내외 상황이 어느 정도 수습되어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불안정한 국경을 확정지을 필요를 느꼈다.

그런 한편으로 중국은 이념적 노선이 다른 소련과 알력을 겪었고,[2][3] 당시 친소 노선을 걸으며 맥마흔 조약에 따른 국경선을 확정하려는 인도와 불편한 관계를 지속하게 된다.

이렇듯 당시 중국과 인도 모두 정부수립 10년이 안 된 신생 국가로서 불안정한 국내외 사정을 어떻게든 타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인도 양국의 직접적인 감정적 앙금은 두 나라 사이에 위치한 티베트로부터 비화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정부 수립 직후 즉각적으로 티베트를 무력으로 병합했고, 인도로서는 티베트가 가능한 한 중국과 인도 사이의 완충지대로 남아주길 바라며 끊임없이 제동을 걸었지만 결국 소련과의 관계 등을 고려했는지 1949년에 중국의 티베트 종주권을 인정한다. 곧이어 1954년에 '중국의 티베트 지역과 인도 사이의 무역과 교섭'을 체결함으로 이 문제는 공식적으로 문서화되었다.
그럼에도 인도는 맥마흔 라인을 근거로 들어 티베트 지역에 대한 영토 확장의 욕심을 드러낸다.

이런 와중에 1959년엔 티베트의 국가 원수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피신해 망명정부를 수립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달라이 라마의 망명정부 수립으로 두 국가간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어 갔다.

1960년에는 중국에서 벌인 2년간의 대약진 운동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고 중국에 대한 소련의 기술, 군사적 지원이 완전히 끊기면서 중국은 위기에 빠진다. 상대적으로 인도의 입김은 더욱 강해져갔다.

그리고 1960년대 들어 본격적인 냉전이 도래하면서 중동,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의 역할이 부각되었고, 중국과 인도는 제3세계 국가들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반제국주의를 표방한 중국은 1961년 비동맹회의 참여를 거부했는데, 이것은 중국이 제3세계의 종주국으로서 야심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전쟁의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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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인도는 차츰 기존의 잠정적 국경선을 넘어서 새로이 초소를 건설, 국경의 확장을 노리기 시작했다. 이로 말미암아 8월에 국경수비대 간의 소규모 총격전이 일어났으며,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당시 중국은 대약진운동의 부진으로 인한 내부 혼란 수습 및 미국, 소련과의 불편한 역학관계 때문에 또 다른 비상사태가 터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결국 이 사태는 당시 양국의 지도자인 저우언라이와 네루 간의 회담을 통해 당장 전쟁으로 비화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양국은 11월 7일 관할선을 정해두는 것으로 사태를 일단락했다.


하지만 문제는 해결되긴커녕 오히려 복잡해져만 갔다. 중국이 예상 외로 소극적 입장으로 나서자 인도는 자신감을 얻었다. 당시 친소적 중립이었던 인도는 친미 성향을 보였던 파키스탄과 반소주의를 표방하기 시작한 중국 사이의 밀월 관계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따라서 이참에 자국의 군사력을 떨쳐 파키스탄을 비롯한 주변국에 엄포를 놓으려고 했다. 인도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당시 미국은 인도에서의 중국과 소련의 입김을 줄이기 위해,[4] 소련은 중국의 영향력 감소와 제3세계 국가들의 지지 여론 형성을 위해 인도에 호의적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즉, 인도 입장에서는 중국을 압박하기에 최고의 호재 조건이었다.

1961년, 인도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영국으로부터 항공모함 '비크란트'를 인도받았다. 이같은 아시아 국가 초유의 항공모함 도입을 보더라도 당시 인도가 얼마나 국방력 증강에 의욕적이었는지는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1962년 봄, 소련군 군사고문단의 협력을 얻은 인도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본격적으로 맥마흔 라인에 사단을 전진배치했다. 국경의 위협을 감지한 중국군의 방어 태세 또한 보다 견고해졌다. 이제는 양측 모두 전쟁을 막을 수 없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양국간에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이 고조되어 있었다.

마침내 7월부터 인도군이 산발적 공세를 개시, 10월 20일에는 국경의 전 방면으로 인도의 주력군이 침공을 개시하면서 바야흐로 1개월간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중국과 인도 공히 약 3개 사단을 동원, 규모면에서도 국경수비대의 소규모 교전을 벗어난 정규군간의 정면 충돌로 비화된 것이다.

대부분의 서방측 군사전문가들은 인도군의 우세를 예상하였다. 일단 보급로부터가 차이가 났는데, 티벳을 관할하는 청두(성도)군구의 수도이자 보급기지인 청두와 분쟁지는 거리가 3000km인데다가 도로는 거의 없었고, 날씨가 나쁘면 아예 그런 도로도 불통되는 지역이었다. 이에 반해 인도의 수도 뉴델리로부터 분쟁지는 수백 km밖에 안떨어져 있었는데다가 양호한 도로가 구비되어 있었다. 그래서 중국군의 보급은 등짐과 야크에 의존할 정도였다고 한다. 중화기는 꿈도 못꾸고, 지원화력은 박격포정도...뿐만 아니라 티벳지역에는 당시 중국 공군기지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군은 제공권도 장악할 수 없었다. 이렇게 보면 당연히 인도의 우세가 예상되었지만...

그리고 인도는 보기 좋게 일방적으로 역관광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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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군사박물관에 전시된 중인분쟁 당시의 중국군 병사군장. 10년전의 한국전쟁에 비해 달라진 점은 일단 전투복색이 올리브색으로 바뀌었고 (한국전 당시는 황토색), 소련의 라이센스를 받은 AK-47이 도입되었다. 라이센스 도입 직후 중소분열로 파기되지만 중국은 아랑곳 없이 계속 카피품을 생산하였다.


중국은 생각보다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중국 인도 모두 상대국의 전력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는 있었으나, 중국이 인도를 상향평가한 것에 비해 인도는 중국을 지나치게 하향평가했다. 중국군의 훈련 수준은 인도군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5]

게다가 중국군 지휘관들은 중일전쟁, 국공내전, 한국전쟁을 거치며 실전경험이 많았고, 특히 한국전쟁때는 천조국의 압도적인 제공권을 위에 두고도 산악지대에서 수없는 기동전을 치러본 적이 있었다. 그런 불리한 상황에서도 중공군은 천조국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는데 천조국군에 비해 물량이나 화력, 게다가 병사의 자질조차 비교도 안되는 인도군이 이런 중국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병력은 물론 전술, 지형적으로도 우위를 점했던 중국은 수세를 간단히 공세로 전환하여 파죽지세로 인도 영내를 향해 밀고 들어갔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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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전쟁에서 중국군은 B-29를 복제한 소련제 Tu-4를 가지고 폭격기, 정찰기, 수송기, 심지어는 조기경보기로 사용했다. 히말라야 지역에서 제대로 수송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 짝퉁 B-29는 큰 활약을 했고, 아마도 이 전쟁은 최후로 B-29가 활약한 전장인 것 같다.)

그나마 중국군의 공세 시기에 인도군도 1개 중대의 선전[7]으로 최소한의 체면치레는 했지만, 이후에는 제대로 된 저항을 보여주지 못한 채 무력하게 패퇴하였다.

출처 확인이 필요한 카더라 통신으로, 중국군이 인도군 3개 여단을 박살내며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인도에서 1개 여단이 증파되어 온다는 첩보가 날아들었고, 그 여단이 청 말기에 베이징에 쳐들어와 원명원을 불사른 8국 연합군 부대 중 하나의 후신이라는 소식을 접한 마오쩌둥이 "100년을 묵힌 치욕이다. 무조건 전멸시켜라!"는 지시를 하달, 그대로 실현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신빙성이 의심된다. 역사적으로 원명원은 1860년 2차 아편전쟁 때 불탔고, 여기에는 막 영국군에 편입된 옛 동인도회사의 인도인 부대들이 참가했다. 즉 100년짜리 원한이라는 말 자체는 맞다. 문제는 8국 연합군 운운한 부분이다. 8국 연합군이 투입된 전쟁은 의화단 사건이며 이 때는 1900년이라 100년짜리 원한 운운하기에는 시간이 안 맞다. 게다가 이 때 불탄 것은 원명원이 아니라 이화원이다.주석동지 개념을 봐선 둘이 얼마든 헷갈릴 수 있긴 하다

아무튼 개전 7일만에 중국군은 파죽지세로 160km를 진군했고, 인도 동북부 아삼 지방의 브라마푸트라 평원까지 진출한다.
전쟁이 유리한 상황이었지만, 중국은 전과 마찬가지로 이 국경분쟁을 본격적인 전쟁으로 확대할 뜻을 보이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은 전략적 요충지인 아시아와 인도양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압박을 가했고, 다른 제3세계 국가들도 양국의 충돌 격화를 말리고 있었다. 자칫하면 양국과 이해관계로 얽힌 제3세계 국가들끼리도 대립이 일어날 판이었다.

중국 정부 역시 이러한 분위기를 고려하여, 군사적인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정치적 판단 하에 인도에 휴전을 제의했다. 하지만 인도 정부는 그 제의를 거부했고, 그에 따라 중국군은 11월 18일 대대적인 공세를 재개하여 인도 정부를 압박하기에 이른다.

전쟁이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중국군은 뉴델리의 20km 근방까지 진주해 있었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 전쟁 막바지까지 여전히 전투는 변두리에서 진행 중이었다. 인도 영내 깊숙히 밀린 건 사실이지만, 인도도 중국 못지 않은 거대한 영토를 지닌 국가다. 국경에서 좀 밀렸다고 수도 함락 위기까지야.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인도의 네루 총리는 비동맹주의를 잠깐 잊고 비밀리에 미국에게 중국군을 폭격해 줄 것을 요청한다. 상당히 친소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던 인도가 말이다! 미국은 위와 같은 이유로 태평양에 있던 자국의 항공모함을 인도양으로 급파한다. 이는 소련 지도부에도 곧바로 전달되지만, 놀랍게도 소련은 인도를 이해해 주었다.[8]

이렇게 되자 중국은 전쟁에서는 이겼음에도 오히려 대외적으로 불안해지는 상황을 우려했는지,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하고 군대를 모두 철수한다. 심지어 붙잡은 인도군 포로를 조건없이 모두 석방하고, 무기와 차량, 탄약 등의 모든 압류한 장비들을 돌려주기까지 하였다. 오오 대륙의 기상

그리고 중국-인도 국경선 전초기지를 기존 위치에서 20km 후방으로 재배치, 인도와 더 이상의 국경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것으로 중국-인도 양국간의 전쟁은 일단락을 짓는다.

그러나 아직도 인도와 중국의 국경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과제 중 하나이며,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인도와 중국 국경은 카슈미르 주처럼 미확정(점선)으로 표시되어 있다.더불어 중국은 악사이친[9]를 비롯한 인도 영토를 손에 넣긴 했다. 하지만 중국은 아루나찰 프라데시를 돌려주면 아크사이친을 돌려준다고 하지만... 인도가 지배하는 아루나찰프라데시[10]를 돌려줄 마음이 없다고 못박았다. 게다가 시킴이나 같이 티베트계들이 살던 작은 나라들이나 지역들이 티베트가 중국에게 먹히는 걸 보고 인도에게 알아서 합병하면서 여길 지들 땅으로 여기는 중국 속을 더 긁어버린다. 비슷한 처지의 부탄은 아예 노골적인 반중, 친인도 나라가 되었다.

중국이 인도가 먼저 도발했음에도 대인배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당시 국제정세 자체가 중국에 유리한 입장이 아니었다. 대외적으로 1958년에는 진먼 포격전으로 중국은 타이완, 미국과 긴장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소련과는 이념대립[11] 때문에 첨예한 대립이 시작되었다. 내부적으로는 1958년부터 무리하게 시작한 대약진 운동[12]과 이를 비판하던 지식인들을 탄압하면서 도저히 인도와의 국경분쟁을 확대시킬 수 없던 입장이었다. 중국이 대인배라서가 아니라 대내외적으로 볼 때 분쟁에 휘말려서는 안 되는 상태였던 것이다.

4. 전쟁의 여파

1965년 미 국방부 평가에 의하면 인도군의 피해는 전사 1,300[13], 실종 1,600, 부상 1,000, 포로 4,000의 피해[14]를 낸 명백한 졸전인 반면, 중국군은 전사 700, 부상 1,600, 포로 0의 가벼운 피해를 입으며 승리했다.[15] 이와 같은 교환비는 중국군이 초기에 방어 포지션에서 적지 않은 손실을 인도군에게 강요한 후, 충분한 준비를 거쳐 확고한 수적 우위를 점한 채 공세를 가한 덕분이었다.

당시 서로 3개 사단씩을 투입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인도군이 투입한 병력은 2~3개 대대로 이뤄진 여단 단위로 분산되어 운용되었고 그마저도 3개 여단 이상은 일시에 투입되지 못했으나, 중국군은 개전 초기에 대대급 부대로 고수방어를 펼쳐 인도군의 공세역량을 흡수한 후 일시에 2~3개 사단[16]을 집중 투입하는 전형적인 기동전을 구사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다음으로, 국제적인 여건에서 냉전 구도를 초월한 미국, 소련, 중국의 새로운 이해관계가 정립되었다. 인도는 이 전쟁에서 미국에게 직접적인 군사지원을 요청, 미국과 동맹관계를 만들 하였으나, 중국이 일찍 발을 빼면서 동맹 관계까지는 가진 않았다.[17] 그럼에도 인도는 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려는 미국, 소련의 정책과 이해를 같이 하여 일정한 협력을 얻었다.[18]

파키스탄은 기존에 친미적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중국-인도 국경분쟁에 미국이 NTR 항공모함을 파견하여 인도를 도우려고 한 점과 그럼에도 친소 중립을 유지하던 인도에게 소련이 계속 군사지원을 하는 모습을 보며 외교적 역량 부족을 실감했다. 그 반작용으로 중국과 파키스탄은 보다 굳건한 밀월관계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중국-인도 국경분쟁 이후 인도는 중국-파키스탄이라는 적대국의 연맹과 국경을 맞대는 상황에 직면한다. 그리고 이것은 훗날 인도가 방글라데시를 적극적으로 우군에 끌어들인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파키스탄은 인도가 졸전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전력에 자신감을 얻었고, 중국을 끌어들인 여세를 몰아 1965년 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도발한다. 이 전쟁은 나중에 방글라데시가 독립하는 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도 간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중국-인도 양국 사이에 끼어있는 네팔과 부탄은 완충지대로 자리잡아 중계국으로서의 입지가 상승했으며, 덕분에 티베트처럼 어느 한 나라의 영향력에 휩쓸리는 것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네팔은 마오이즘을 표방하는 친중국파와 힌두교를 내세우는 친인도파간의 분쟁으로 인해 현재도 내부사정이 상당히 혼란한 편이다. 사정이 복잡하긴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중국과 인도의 대리전쟁을 수행한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중국에 흡수된 티베트는 인도의 선전에 한 줌의 기대를 걸었으나 보기 좋게 무산되었고, 그 결과 중국은 티베트를 점유함에 있어서 어떠한 주변국의 도전도 단호히 물리치는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티베트는 여전히 중국령이며, 달라이 라마의 인도 망명정부 역시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1979년에 있었던 중국-베트남 전쟁은 중국-인도 국경분쟁과 유사한 성격을 보여주는데, 문화대혁명과 베트남 전쟁 이후 혼란한 상태에 있던 중국-베트남간 국경선을 정리하기 위해 중국군이 먼저 도발해 일어났다. 하지만 초기 중국군의 호언장담과 달리 베트남의 저항은 실로 완강했고, 급기야 중국군은 먼저 공격해 놓고 깨져서 철수하는 추태를 부렸다. 그야말로 중국-인도 국경분쟁과 비교될만한 점이며, 전쟁 결과 중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을 도와주고도 뒤에 가서는 욕을 먹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한편, 중국과의 전쟁을 통해 긴 국경선을 기존의 재래식 군대로 방어하는 데 한계를 느낀 인도 정부는 군대의 기계화에 박차를 가한다. 비록 안습하긴 하지만[19] 항공모함과 전차군단의 전력화에도 심혈을 기울였으며, 1998년 최종결전병기인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여 현재는 인도, 중국, 파키스탄 모두 핵무기 보유국이다.[20]

만약 다시 한번 중국과 인도간에 국경선을 확정짓기 위한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때야말로 헬게이트가 구현될지도 모른다.

인도에서 쿠미온 연대의 활약을 다룬 영화를 제작한 바 있다. 차마 이겼다(...)고 하기 어려운 일인지라 남녀(...)주인공이 수만의 중국군[21]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죽으면서 서로 손을 맞잡는다. 이후 인도군의 낙하산 기록영화 부대 투하 장면과 함께 갑자기 끝 정신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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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인도는 대외적으로 비동맹주의를 표방했기 때문에 유사시 기댈 나라가 없었다.
  • [2] 중국-소련 국경분쟁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1960년대 들어서 중소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자세한 설명은 중국-소련 국경분쟁 항목을 참고하기 바란다.
  • [3] 1960년에는 소련의 군사고문단이 중국에서 전면 철수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같은 시점에서 인도에 소련 군사고문단이 파견된다.
  • [4]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미국은 냉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대외적으로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임계점에 도달한 사건이 바로 베트남 전쟁이었다.
  • [5] 키건의 <세계전쟁사>에는 "중국군이 티벳 지방에서 1년 이상 고산지대 적응훈련을 마친 상태였던 반면에 인도군은 고산지대 적응훈련을 받지도 않은 부대를 투입했다."고 나온다. 이러고도 인도가 이기길 바라면 그야말로 놀부가 화낼 지경.
  • [6] 중국군 지휘관들이 오랜 기간에 걸친 항일전쟁과 국공내전한국전쟁 참전을 통해 전술 체계를 고도화한 점도 결정적인 승리 요인 중의 하나였다. 인도군 역시 독립 전에도 대영제국의 일원으로 참전했고 독립 후에도 파키스탄과 맞서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갖고 있었으며 소련으로부터 군사적 노하우를 획득했는데도 이렇게까지 일방적으로 밀린 이유를 생각해보자.
  • [7] 실질적으로 관구사령부라고 봐도 무방한 쿠마온 연대(Kumaon Regiment) 13대대 C중대가 선전의 주인공이다. 이들은 전멸(중대원 88%가 전사하고 생존자 14명 중 9명이 중상을 입은 상태로 투항)할 때까지 저항, 중국군에게 이 전쟁에서 발생한 피해의 1/3인 500여 명의 사상자를 강요한 것으로 공인되었고 중대장 샤이탄 싱 소령은 인도의 국민 영웅이 되었다. 인도 측 주장은 1천 명 이상 사살이라지만(…). 여담이지만, 맥스 브룩스좀비 아포칼립스 소설 세계대전Z에 등장하는 인도의 라지 싱 장군의 모델이 샤이탄 싱 장군일지도 모른다.
  • [8] 게다가 소련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벌이기 전까지 인도에게 군사적 원조를 지속할 정도였다. 소련에게 있어서도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테고 말이다.
  • [9] 정작 인도에서는 여길 중국에게 빼앗기고도 1년 넘도록 몰랐을 정도로 외면하던 땅이었다. 황무지 투성이라 사람이 안 살았기 때문이었다. 면적은 33,500km²로 남한 면적 1/3 정도지만 평균적으로 해발 5,000m 정도의 그야말로 고지대로 인구는 없다. 1년의 대부분 기간 동안 기온은 영하이며 강수량이 없다시피 한 지역이다.
  • [10] 면적이 남한 면적과 비슷하며 악사이친과 달리 꽤 풍요로운 땅이라 인구는 악사이친과 비교하면 정말로 가득한 곳이다.
  • [11] 이라 쓰고 실질적으로 누가 공산주의 국가들의 수장이 되는가 하는 싸움.
  • [12] 그 유명한 갓 핑거 저 새는 해로운 새다 사건이 바로 1958년에 있었다.
  • [13] 이 안에는 심지어 여단을 지휘하는 준장 각하도 포함되어 있다.
  • [14] 이보다 적은 피해를 입은 것으로 간주하는 보고서도 있다.
  • [15] 인도군은 영국군의 일원으로 1, 2차 대전에 참전하여 '현대전'에 대한 경험이 풍부했으며 이후 파키스탄과의 전쟁과 대립을 통해 지속적으로 국지전에 참여한 베테랑 군대였다. 하지만 군대 편성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으며, 상대적으로 중국 인민해방군은 중일전쟁, 국공내전,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군단, 집단군 등의 운용을 습득하여 전술적 기량이 보다 뛰어났다.
  • [16] 물론 중국군 사단도 대부분 2개 연대 이하로 편성된 감편 사단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강력한 사단은 아니었다.
  • [17] 중국이 일부러 미국과 적이 되는 상황을 피하려 철수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얼마 후 발발한 베트남 전쟁에서 중국은 보란듯이 북베트남을 지원해 미국과 대립각을 형성했다.
  • [18] 단, 소련의 군사지원단은 전쟁이 터진 1962년 철수했다.
  • [19] 안습하다고는 하지만 2차대전 이후 아시아에서 항모를 가장 많이 그리고 효과적으로 굴린 나라다.
  • [20] 다만 중국이 공식적인 핵 보유국의 지위를 갖고 있는 것과 달리, 인도와 파키스탄은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비핵국에 아직 머물러 있다.
  • [21] 네팔인을 분장시켰는지 꽤 그럴듯하다. 얼굴도 아리안이 아닌 완전 중국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