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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웅천

last modified: 2014-12-01 23:12:41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학생시절
3. 프로 선수 시절
3.1. 태평양 돌핀스 시기
3.2. 현대 유니콘스 시기
3.3. SK 와이번스 시기
4. 지도자 시절
5. 커리어
6. 남은 이야기
7. 사족



SK 와이번스 No.78
조웅천(曺雄天)
생년월일 1971년 3월 17일
출신지 광주광역시
학력 광주남초-무등중-순천상고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9년 태평양 돌핀스 연습생[1]
소속팀 태평양 돌핀스 (1989~1995)
현대 유니콘스 (1996~2000)
SK 와이번스(2001~2009)

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41번(1990~1995)
팀 인수 조웅천(1990~1995) 팀 매각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41번(1996~2000)
팀 인수 조웅천(1996~2000) 황두성(2001~2007)
SK 와이번스 등번호 41번(2001~2009)
팀 창단 조웅천(2001~2009) 박종훈(2010~)

2000년 한국프로야구 홀드왕
조웅천(현대 유니콘스) 차명주(두산 베어스)
2003년 한국프로야구 구원왕
조용준(현대 유니콘스) 조웅천(SK 와이번스) 임창용(삼성 라이온즈)

1. 개요

前 프로야구 선수, 現 SK 와이번스의 불펜코치
연습생 신화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 KBO를 풍미한 대표적인 중간계투이다. 박재홍과 함께 인천 출신은 아니지만[2] 인천 야구의 프랜차이즈 선수라 불릴 만한 선수다.
13년연속 50경기 출장 등의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한때 KBO 투수 최다경기 출장 (813경기)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2. 학생시절

야구를 처음 시작할 때는 유격수였고 키가 작다는 이유로 광주상고로 진학하면서 퇴짜를 맞고 일반학생으로 진학하였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고 결국 자퇴를 하게 되고 지인의 소개로 순천상고에서 1학년부터 새로 시작하게 된다. 이때 학력문제로 항의가 들어와 2학년 때 3학년으로 초고속 승급을 하게 되었다. 현재의 효산고인 순천상고에는 딱 3년 동안만 야구부가 있었고 성적은 전부 1회전 탈락일 정도로 별 볼 일 없는 고등학교였다. 감독의 권유로 투수를 시작하면서 사이드암으로 방향을 잡고 나름 괜찮은 성적을 보였다.

하지만 3학년 때 슬라이딩 도중에 어깨를 다치면서 대학진학이 힘들어지고, 태평양에서 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테스트 후에 태평양에서는 연락이 없었으나 실업팀과의 2군경기에서 호투함으로서 태평양과 연봉 600만원에 연습생 계약을 하게 되었다. 중간계약이라 1년 동안 등번호가 없었다고 한다.

3. 프로 선수 시절

3.1. 태평양 돌핀스 시기


정식선수 전환이 되어 90년 시즌에 프로 등판경험까지 얻게 되었으나 2경기 3이닝 2실점에 그칠 정도로 별 의미는 없었다. 애당초에 프로라는 공간에 이 당시의 조웅천 같이 2군을 전전하면서 1군에 가끔 얼굴을 내미는 선수는 수두룩했다.

94년 시즌이 끝나고 정리대상에 올랐지만, 찬바람이 부는 쌀쌀한 봄과 가을에 성적이 좋아서 퇴출 보류. 구단직원이 "자를만 하면 잘 하냐"는 농담을 가슴에 품고 95년에 80.2이닝을 던지면서 패전처리 투수로나마 자리를 잡게 되었다. 6월 15일 프로 첫 승을 올리기도 했다. 태평양의 투수들이 줄줄히 부상이어서 당시 태평양 감독이었던 정동진 감독이 기회를 많이 주기도 하였다.

3.2. 현대 유니콘스 시기

96년 태평양이 현대에 인수되고 나서부터 중간계투인 마당쇠로서 역할이 주어지기 시작하였다. 이광환 감독의 '신바람 야구'로 LG가 승승장구하면서 투수 분업화가 리그 전체의 경향으로 자리잡은 것과 연관된 것. 플로리다로 전지훈련을 가면서 당시 감독이던 김재박 감독이 가내영과 조웅천을 중간계투로 점찍었다. 전체 경기의 절반이 넘는 68경기에 출전, 방어율 2.11에 94이닝을 던지고 6승과 3세이브를 올리면서 팀이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는 데 역할을 하였다.

97년 ERA 2.84 55경기에 92이닝, 98년 ERA 3.51에 52경기에서 51.1이닝, 99년 ERA 3.43에 51경기에서 44.2이닝을 던지면서 점차 소화이닝이 줄고 방어율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전형적으로 찾아오는 투수들의 위기상황. 투수들은 이 위기를 제구를 다지거나 새로운 구종개발로 해결하곤 한다. 조웅천의 경우는 97년에 플로리다 마무리캠프를 갔을때 배운 서클 체인지업을 잘 써먹지 못하고 있다가, 99년 김시진 당시 투수코치의 권유로 참가한 오릭스 가을 캠프에서 제대로 던지는 법을 익히게 되면서 재미를 보게 된다.

새로운 구종의 개발에 힘입어 00년에 74경기 94.1이닝 소화에 홀드 1위(16개)와 8승 6패 8세이브로, 막강 00현대의 다승왕 트리오(정민태, 김수경, 임선동)과 마무리 위재영을 잇는 허리로서 역할을 해내게 된다. 처음으로 신설된 홀드왕 부분에서 1위.

3.3. SK 와이번스 시기

이런 활약을 하던 조웅천은 뜬금없이 조규제와 함께 01년에 SK로 트레이드 되기에 이른다. 이는 00년 창단한 SK의 전력을 보완하기 위해 전년도(2000) 우승팀에서 보호선수 20명 외 1명, 준우승팀에서 21명 외 1명을 현금 트레이드 할 수 있도록 선수지원책을 마련한 것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최종적인 트레이드 결정은 급작스러운 것으로서 미국 전지훈련 중인 2월 9일에 관계자로부터 말을 전해듣고 짐을 싸서 SK의 전지훈련지인 시드니로 합류할 정도였다. 당시의 트레이드는 선동열 당시 KBO 홍보위원의 적극적인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트레이드는 조웅천과 조규제를 SK가 받고, 현대가 15억을 받는 것. 트레이드 이적 소식을 들었을 당시 조웅천은 자신의 스승격인 김시진 당시 투수코치 를 껴안고 울었다고 한다...

이러한 트레이드의 충격속에서 조웅천은 2001년에 방어율 5.63을 기록하며 프로생활 최악의 성적을 거둔다. 2002년 56경기 출장에 82.2이닝을 소화하면서 방어율 3.27에 9승 5패 6세이브 5홀드를 거두면서 성적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2003년 마무리보직을 맡으면서 65경기 77.2이닝 소화에 방어율 1.97, 6승 5패 30세이브 2홀드를 기록하면서 프로생활 최고의 성적을 거둔다. 마구마구에서도 이 해의 카드가 유일하게 레어카드이다.[3] 이러한 성적을 기반으로 SK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준우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세이브부문 1위.

그러나 이런 커리어하이 시즌의 말미인 2003년 11월의 삿포로 아시아선수권 겸 2004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 큰 실패를 겪게 된다. 대만전 9회말 4:2에서 심판의 석연찮은 판정으로 투수 임창용이 연달아 볼넷을 내주면서 조웅천을 마운드에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천즈위안에게 동점 적시타를 맞기에 이르고, 10회말에 가오즈강에게 끝내기 안타마저 허용하였다. 일본전에서 와다에게 틀어막히면서 아테네 올림픽 진출은 무산되었다.

사실 애초에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된 것이 김재박 대표팀 감독이 갑작스럽게 심수창을 엔트리에서 제외하고 제주도에서 여행 중이었기에 연습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던 조웅천을 호출한 게 문제였다지만.. 인터뷰에서 밝히기로는 조웅천 개인에게 유일한 국가대표 경기이기도 했기에 가장 지우고 싶은 순간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2004년부터는 다시 중간계투로 복귀하여 계속 필승계투로 활약하였다. 하지만 점점 노쇠화 징후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2006년 4월 21일 수원 현대전에서는 부상으로 무너진 선발진을 대신하여 선발로 등판하기도 하였다.

2007년 들어와서 김성근 감독 부임 후 새롭게 일신하여 정대현과 더블스토퍼로 나오면서 맹활약하였다. 64경기 74.2이닝에 방어율 1.57, 2승 3패 9세이브 16홀드를 거두면서 SK의 첫 페넌트레이스 우승과 첫 우승에 큰 역할을 하였다.

2008년 8월 27일 800경기 등판을 달성하였다. 참고로 이날, 스퀴즈번트로 생애 첫 타점도 기록하였다.

이 이전까지는 큰 부상 한 번 없었으나 2008년에는 오른 엄지손가락의 부상과 고질적인 어깨부상으로 제대로된 활약을 하지 못하였고 2009년에는 팔꿈치 통증으로 전지훈련에서 조기귀국하고 어깨통증에 시달리는 등의 복합부상으로 결국 은퇴를 결정하였다.

2010년 3월 28일 정경배와 함께 문학구장에서 은퇴식을 가졌다.

4. 지도자 시절

이후 시카고 컵스로 연수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연수를 마치고 국내로 복귀하였다. 2011시즌부터 SK 와이번스의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2013시즌에는 불펜코치로서 꽤 좋은 평가를 얻었었는데 1군 투수코치로 부임한 2014시즌, 완전히 평이 뒤바뀌었다. 이만수의 마구잡이식 혹사를 수수방관하고 있고 혹은 일조했다는 것이 그 이유. 성준은 재활하던 김광현의 기용과 관련해서 이만수와 싸우기 까지 하며 사태를 막아보려 했는데 조웅천은 불펜투수들 퍼지는 동안 뭐 했냐는 식의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4]

진해수, 박정배, 전유수등 자팀 불펜 투수과 관련된 논란이 거세지자 어쩔수 없다는 식의쉴드성 인터뷰를 했는데 이로인해 팬들의 집중 포화를 받았다.[5] 팀이 아래에 처진 상황이니 보직구분을 허물수 밖에 없었고 출장 경기수에 비해 이닝이 적으니 혹사가 아니라는 논리였는데, 이닝에 비해 저들의 투구수는 상당한 수준이었고 그 인터뷰를 한뒤 얼마 지나지 않아 박정배가 어깨 통증으로 2군에 내려갔기 때문에 혹사가 아니라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게다가 위의 세명이 문제가 되는건 혹사도 혹사지만 자꾸 맞아 나감에도 많이 기용한다는 것에 이유가 있었다. 특히 진해수는 점수차 상관없이 좌타자가 나오면 출장하는 식이였는데 초반에 비해 진해수의 피안타율이 점점 상승하고 있고 7월 30일 현재 진해수의 좌타자 피안타율이 3할을 넘긴것을 보면 이것은 전혀 쓸모없는 좌우놀이에 불과하다. 진해수뿐 아니라 박정배, 전유수등도 자주 불을 지르고 자책점이 치솟고 있는 상황에도 보직 없이 빈번하게 출장시키며 안좋은 상황을 가속시키는 것은 분명한 문제라고 말할수 있다.

한편으로는 sk 투수교체의 전권을 이만수 감독이 가지고 있지만[6] 정작 이감독은 혹사에 대해서 일언반구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만약 본인입으로 쉴드를 쳤다면 불타는 그라운드 시즌2가 나왔을 지도... 그러한 상황에서 조웅천 코치가 총대를 메고 팀상황을 변호하며 욕을 먹은 터라 투수 파트와 관련된 모든 비난을 그에게 돌리는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2015시즌 보직을 옮겨 2군 투수코치를 맡게 되었다. 빈 1군 투수코치 자리는 김용희 감독과 2군에서 부터 호흡을 맞춘 김상진 투수코치에게 돌아갔다.

5. 커리어

813경기 1092.2이닝 방어율 3.21, 64승 54패 98세이브 89홀드

KBO에 홀드 기록을 집계하기 시작한 것이 2000년이기에 선발이 아닌 계투, 그것도 세이브가 주어지는 마무리가 아닌 중간계투였던 조웅천의 기록은 누적기록에서 특별한 것이 없다. 다만 813경기라는 출장경기 수(역대 2위)만이 그의 커리어를 말해줄 뿐이다. [7] 만약 홀드 기록이 그 이전부터 있었다면 100개는 기본이요, 그 이상을 넘어설 수 있었을 것이다.

홀드 기록이 정말 잘 쌓이는 기록이라는 사실은 홀드 기록 집계 후 등장한 중간계투 전문 투수 정우람에게서 알 수 있다. 물론 정우람이 불을 지르지 않고 잘 막아내는 뛰어난 투수라지만 중간계투 6년만에 92홀드를 달성했으니. 마찬가지로 조웅천도 만약 2000년 이전부터 홀드 기록이 있었다면 200홀드를 바라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13년 연속 50경기 출장을 달성했을 정도로 꾸준한 중간계투였고, 2위인 류택현의 소화이닝인 560이닝과는 두 배 이상 차이난다는 점에서도 팀에 있어서는 공헌도가 컸던 편이다.

100세이브-100홀드를 달성하지 못한 게 아쉽다. 홀드는 11개 모자라고 세이브는 2개 모자란다.

조웅천의 공은 전성기에도 빠른 편은 아니었다. 전형적인 제구력으로 승부를 하는 선수로서 서클 체인지업이 주력구종이다. 싱커로 알려졌지만, 조웅천의 주구질은 팔을 역방향으로 틀어 부담이 되는 싱커가 아닌 팔에 부담이 거의 없는 체인지업이었다. 그 덕분에 롱런할 수 있었던 것.

6. 남은 이야기

선발이나 마무리보다 무시받는 중간계투의 처우에 대해 인식개선이 필요하다는 의사표현을 자주하였다. 선발과 마무리의 연결은 요즘 같은 분업 등판 속에서 중간계투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또한 등판일자가 고정되어 있는 선발이나 등판이닝이 고정되어 있는 마무리와 달리 중간계투는 언제, 어느 상황에 등판해야 할지 모른다는 점 등이다.

이러한 의식 속에서 중간계투로 롱런하기 위해서는 소모되는 어깨의 보호를 위해 공 던지는 횟수를 줄이는 것이 중요함을 말하곤 하였다. 연습투구 하나하나를 허비하면 안 된다는 것. 추가적으로 부상을 줄이기 위해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고.

조웅천 본인은 자신의 지론에 맞게 공 두 개를 던지면 몸이 풀리는, 중간계투로 특화된 신체이기도 하였다.

7. 사족

여담으로 아들이 효자(?)다. 불타는 그라운드 방영시 아들이 마구마구를 하고 있었는데 1회말다니엘 리오스를 03년도의 아버지로 교체했다. 참고로 조웅천의 유일한 레어카드(...) 더구나 상대 타자가 전혀 못 친다고 했는데 4점대의 방어율로 봐선 전혀 아닌 듯싶다(...) 하여튼 효자다. 근데 이와중에도 조웅천 본인은 자기 자신이 나왔으니 다 이긴 경기라며 드립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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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1990 신인지명 때 2차 5라운드로 태평양에 지명되며 정식선수가 되었다.
  • [2] 둘 다 고향은 광주광역시이다.
  • [3] 2013년 6월 26일 업데이트로 2000년에도 레어카드가 추가되면서 유일하다는 타이틀은 떼어놓게 되었다.
  • [4] 주사를 맞아가며 던졌다던 박희수와 어깨통증이 심했던 박정배의 경우 투수코치가 먼저 알고 휴식을 취하게끔 해줬어야 하는데 두 선수 모두 상태가 악화된 후에야 2군에 갔던것을 보면 관리가 미흡했던것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다.
  • [5] 대부분 sk팬들의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이만수 감독이었고 자팀출신 코치들에 대해서 대부분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는 것을 보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 [6] 이만수 감독은 인터뷰에서 코치들과 상의해서 투수교체를 한다고 말했지만 중계를 보면 전혀 아닌듯 하다. 심지어 투수교체를 하러 항상 마운드에 오르는 유일한 감독이기도 하다. 라디오볼에서도 이와 관련된 문제를 제기했었는데 정철우 기자는 이감독이 투수교체를 상의해서 한다고 맨날 말은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뉘앙스로 말을 하기도 했다.
  • [7] 이 기록은 역대 출장경기 1위에 있다가 2012년 4월 13일 류택현에 의해 경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