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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원

last modified: 2015-02-01 23:22:50 Contributors


이름 조성원(趙成遠)
생년월일 1971년 8월 24일
국적 한국
출신학교 홍대부고 - 명지대학교
포지션 스몰포워드
신체 사이즈 180Cm, 80Kg
프로입단 1994년 현대전자 농구단 입단
소속팀 현대전자/대전 현대 다이넷(1994~2000)
창원 LG 세이커스(2000~2002)
서울 SK 나이츠(2002~2003)
전주 KCC 이지스(2003~2006)
감독 천안 KB국민은행 세이버스(2008.4~2008.12)

2000~2001 한국프로농구 MVP
서장훈(청주 SK 나이츠) 조성원(창원 LG 세이커스) 김승현(대구 동양 오리온스)

1997~1998 한국프로농구 모범선수상
김병철(대구 동양 오리온스) 조성원(대전 현대 걸리버스) 김훈(인천 대우 제우스)

1998~1999 한국프로농구 챔피언 결정전 MVP
허재(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조성원(대전 현대 다이넷) 서장훈(청주 SK 나이츠)

Contents

1. 개요
2. 선수 생활
2.1. 현대 왕조의 주역
2.2. MVP
2.3. 몰락
2.4. 유종의 미
3. 지도자 생활

1. 개요

전주 KCC 이지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현대/KCC에서 총 3번의 우승을 이끌었으며, 2000-01 시즌 창원 LG 세이커스의 공격 농구를 주도했다. 별명은 '캥거루 슈터'.

2. 선수 생활

2.1. 현대 왕조의 주역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키가 작아서 어느 고등학교에서도 받아주지 않던 선수였다. 친구 따라서 꼽사리로 껴서 간신히 고교 진학에 성공했던 정말 무명의 선수. 그러나 고교 시절 기량이 일취월장하면서 고교 졸업 무렵에는 상당한 유망주로 주목받았다. 고려대학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고교 진학 당시 자신을 도와준 친구 2명이 대학 진학이 어렵게 되자, 고교 때 은혜를 갚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명지대학교로 진학한다.

명지대학교 시절 슈터로서 명성이 높았지만, 아쉽게도 팀 전력이 강하지 않아서 결승에 올라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미 슈터로서의 평가가 높았기 때문에 현대전자에 스카우트되어 실업 무대에 데뷔했다. 하지만, 이 당시 현대전자는 과거의 명성만 높았던 팀이라 역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나 상무에 입대한후 이상민 등과 함께 1996-97 농구대잔치에서 대단히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었다. 농구팬들 사이에서 조성원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게 이때부터이다.

제대 후 KBL이 출범한 1997-98 시즌부터 뛰기 시작하는데, 이상민, 추승균, 니 멕도웰과 함께 막강 현대를 이루면서 맹활약했다. 특히 4쿼터에 강해 별명이 "4쿼터의 사나이"로 불렸을 정도. 빠른 움직임과 외곽슛을 겸비한 선수로서 많은 운동량을 통해 활로를 찾고, 과감한 돌파를 통해 상대를 헤집거나, 정확한 3점슛으로 고비마다 상대를 침몰시켰다.
이 때의 주 공격패턴이
1. 상대팀의 공격이 막히고 속공 상황이 되었다.
2. 이상민이 공을 드리블하며 달려간다.
3. 이상민에게 수비가 붙는다.
4. 어느새 따라온 조성원에게 볼을 주면 그가 3점슛을 던진다.
5. 3점슛 성공에 환호하는 관객들의 함성과 작전타임을 알리는 부저소리가 겹쳐진다.
이것은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가 조성원 전담 수비수를 둬서 성공적으로 막아낸 몇 차례 빼고는 거의 알고도 못 막는 수준이었다. 그것도 이상민강동희가 막아내고 김영만추승균을 제압할 수 있어서 가능했지 다른 팀은 짤없이 털렸다. 일명 "이조추 라인"의 등장이었고, 이상민의 볼 배급, 추승균의 안정적인 활약, 조성원의 폭발력이 결합한 당대 최고의 조합이었다. 이당시 기아팬들에게 조성원은 4쿼터의 악마 그자체였다.

특히 큰 경기에 강한 강심장이었는데, 1998-99 시즌에는 챔피언결정전에서 평균 16.4점을 쏟아부으며 팀 우승의 주역이자, 자신은 챔피언결정전 MVP가 되었다. 그리고 비록 SK 나이츠에게 졌지만, 1999-2000 시즌에도 역시 17.5점을 쏟아부었다. 다만, 이 챔프전을 계기로 신선우 감독은 팀 재편을 결심하는데, 이유는 조성원의 작은 키였다. 키가 작기 때문에 SK의 장신 라인업에 밀렸다고 판단한 것. 하지만 이 결심은 결과적으로 팀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2.2. MVP

2000-01 시즌 개막을 앞두고 조성원은 전격적으로 양희승과 맞트레이드되면서 창원 LG 세이커스로 이적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김태환 감독과 조우하면서 조성원 생애 최고의 영광을 맞이하게 되었다. 김태환 감독은 LG를 완벽한 런앤건팀으로 재편해서 평균득점 100점에 이르는 공격농구의 끝을 보여줬고, 그 중심에 바로 조성원이 있었다.

조성원은 2000-01 시즌 정규시즌에서 평균 100점이 넘은 팀 공격의 최전선에 섰고, 자기 자신은 평균 득점 25.7점을 기록하면서 맹활약했다. 팀은 정규시즌 2위를 기록했고, 챔피언결정전에서도 조성원은 평균 20점이 넘는 분전을 했지만, 결국 삼성에게 무릎을 꿇으며 준우승을 차지했다.

비록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국내 선수 중에서 으뜸가는 공격력을 선보인 조성원은 2000-01 시즌 MVP를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이 때만 해도 조성원을 가로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2.3. 몰락

그러나 조성원의 작은 키는 분명 수비에 있어서 부담이었고, 창원 LG의 달리는 농구는 재미는 있었지만, 고비를 넘지는 못했다. 그리고 창원 LG의 불운은 그들이 우승할 타이밍에 우승을 못했다는 것에 있었고, 조성원의 작은 키는 분명 수비력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 한계는 잘 나갈 때는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어려움에 봉착할 때는 표면화되었다.

여기에 조성원은 그간 달리고, 또 달린 후유증을 겪게 되었다. 무릎 부상에 시달리면서 출전 시간이 점차 줄어든 것. 평균 득점도 비록 다른 국내 선수와 비교하면 준수한 편이지만, 팀의 핵심 공격 자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다소 부족한 평균 16점으로 2001-02 시즌 감소했고, 무릎 부상이 더 심해진 2002-03 시즌에는 평균 12점으로 줄어들었다. 이러면서 자연히 수비력 문제도 또 다시 대두되었다.

결국 더 많은 출전을 원하던 조성원은 트레이드를 요구, 마침내 김영만과 맞트레이드되는 형식으로 서울 SK 나이츠로 이적했다. 하지만 서울에 와서도 그다지 좋은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다. 조성원이 뭘 하기에는 이미 조성원은 점점 한계에 다다른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 활약도 두드러진 것은 아니었다.

2.4. 유종의 미

조성원의 이적 이후, 장신 포워드 라인업과 토털 바스켓볼을 추구했던 신선우 감독의 전략은 잠시 반짝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한계에 점차 봉착하기 시작했다. 결국 신선우 감독은 다시 예전 잘 나갈 때의 라인업으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고, 팀 적응에 애를 먹던 전희철을 조성원과 맞트레이드시키면서 조성원을 팀에 다시 복귀시킨다.

돌아온 조성원은 전성기의 폭발력은 아니었지만, 평균 15점을 넣으면서 팀에 큰 기여를 했고, 2003-04 시즌 우승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2004-05 시즌에는 전성기처럼 챔피언결정전에서 평균 17.2점을 넣으면서 분전했지만, 팀은 결국 졌다. 그리고 이 시즌을 기점으로 조성원의 정규시즌 성적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롤도 자연히 식스맨으로 바뀌었다.

결국 2005-06 시즌을 끝으로 조성원은 은퇴했다. 우승 세 차례를 팀에 안겼고,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KCC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은퇴할 수 있었다. 2006년 8월 29일 은퇴 경기를 가지고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3. 지도자 생활

과거 팀 동료였던 병식 감독의 부름을 받아 은퇴와 함께 여자농구 국민은행의 코치로 부임하게 되었다. 약 2년간 코치로 활동하다가, 최병식 감독이 물러난 후, 2008년 감독으로 승격해서 WKBL 감독으로 데뷔했다. 하지만, 최악의 성적을 찍으면서 자진 사임하는 흑역사.

그 뒤, 해설위원 일을 하다가 2011-12 시즌 개막부터 서울 삼성 썬더스의 코치로 부임했다. 하지만 한 시즌만에 김상준 감독이 짤리면서 같이 짤려서 다시 야인 신세...는 오래 가지 않았고 SBS ESPN 해설위원으로 복귀했다. 2013-14시즌이 끝난 뒤 KBS 해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