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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last modified: 2019-01-20 01:21:31 Contributors

  • 동음이의어·다의어/ㅈ 문서: 조선/동음이의어

  • 이 문서는 14세기부터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에 위치했던 옛 나라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 자체에 대해서는 한반도를, 이 국호의 유래가 되었던 (지금의 한반도 북부와 중국의 동북 지방에 걸쳐 존재한) 고대 국가에 대해서는 고조선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자칭하는 현재 한반도 북부에 위치한 왕국에 대해서는 북한을, 조선소에서 배를 건조하는 일에 대해서는 조선업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한국의 역사
고려 조선 대한제국

대조선국
大朝鮮國
어기
존속기간 1392년 ~ 1897년(1910년) [1]
표어 대명천지
(大明天地/사방이 환하게 밝은 세상.)
위치 한반도
수도 한성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왕(王),대군주(大君主,1895년부터97년까지)
언어 한국어
민족 한민족
종교 유교(국교),불교,민속신앙
주요사건 1392년 건국
1446년 훈민정음 반포
1592년 ~ 1598년 임진왜란
1636년 ~ 1637년 병자호란
1897년 칭제건원
(+ 대한제국
1905년 을사조약 체결
1910년 한일강제병합)
통화 문(1633~1892)
양(1892~1902)
원(1902~1910)
성립 이전 고려
멸망 이후 대한제국/일제강점기


Contents

1. 개요
2. 국호
2.1. 이조?
3. 개괄적 역사
3.1. 학계의 시대 구분
3.2. 건국과 발전 - 15세기
3.3. 훈구 - 사림의 갈등과 사림의 집권 - 16세기
3.4. 양란과 붕당 - 17세기
3.5. 왕권 강화와 경제적 안정 - 18세기
3.6. 세도정치와 왕조의 황혼 - 19세기 전반
3.7. 개화와 망국 - 19세기 후반
4. 평가
4.1. 의의
4.2. 문치주의 - 관료제와 기록문화
4.3. 조선의 과학
4.4. 인권
4.5. 비판 및 대중의 인식
4.5.1. 성리학붕당
4.5.2. 전반기의 사대 혹은 사대주의, 그리고 조공무역에 대한 옹호론
4.5.3. 교조화되기 시작한 모화사상에 대한 비판
4.5.4. 결론
4.5.5. 소중화주의. 혹은 국학
4.5.6. 개화기의 "사대"
4.5.7. 일본에게 뒤쳐진 왕조
4.5.8. 문치주의 - 군사력에 집중하지 않은 이유
5. 정체(政體)
6. 경제
7. 백성들의 생활 수준?
8. 계급
9. 군사
10. 인구
11. 얘깃거리
12. 참고 자료
12.1. 관련 문서
12.2. 조선의 왕들
12.3. 조선의 왕비들
12.4. 조선의 궁궐
12.5. 조선의 유적들
12.6. 정치, 행정, 군사 제도
12.6.1. 법률
12.6.2. 신분 계급
12.6.3. 정치 행정 조직
12.6.4. 지방 행정 조직
12.7. 교육, 학술
12.7.1. 교육 기관
12.7.2. 역사
12.7.3. 사상
12.8. 조선의 000
12.9. 조선을 배경으로 한 작품

1. 개요



고려의 뒤를 이어 1392년부터 1897년까지 505년간 한반도와 부속 도서를 지배했던 왕국. 고려 말 황산대첩 등으로 무장으로서 명성을 얻은 이성계고려를 멸망시키고 고조선에서 이름을 따 세웠다.[2] 1897년에 고종대한제국을 선포하여 조선이라는 국호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그 외에는 별로 바뀐 게 없기 때문에 대한제국을 조선에 포함시키기도 한다.[3]

후삼국시대를 거친 고려와 달리 이성계의 쿠데타로 만들어진 왕조이기에 고려를 그대로 계승한 것을 봐도 무방하다. 다만, 고려 말 원나라(몽골)의 부마국 시기 중원에서 들어온 여러 문물들과 당시 변화된 정국이 이전 고려와 이후 조선의 차이를 크게 결정지었다.[4]

가장 큰 차이는 숭유억불. 조선 이전의 국가들은 중원에서 유래된 종교적 색채의 학문인 유교를 정치적인 학문 정도로 봤지 종교로까진 보진 않았으며, 삼국사기 중기 이래 천년간 우세했던 전통적인 불교가 국교로 대접 받았다. 그러나 고려 말 중원에서 성리학[5]이 들어오면서 여기에 크게 감화된 사대부들이 조선을 개국하면서 유교(성리학)를 원리로 삼고 이후 조선 멸망 때까지 국가교학(國家敎學)[6]으로 삼았다. 이전 한반도 내 국가들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이다.

또한 고려보다 한층 더 세련된 중앙집권화 관료제 국가를 완성했다. 이런 강력한 중앙의 힘은 유교적 이상에 따라 통치되는 이상적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삼아 건국 100년 만에 나라 곳곳을 유교로 체득시키는데 거의 성공한다. 그런 유교화가 가장 정점이었던 건 17세기조선 중기. 이는 다시 후기에 접어들면서 서학의 전파, 실학의 발흥 등과 함께 그 색채가 차츰 옅어져 갔으나, 산업화와 근대화가 진행된 남북한 모두에도 그 잔재가 어느 정도 남아 있다. 현재 '전통문화'라고 부르는 거의 대부분이 조선 시기(특히 18세기 이후의 중후기)에 형성된 것들이다. 그러나 외세에 의해 멸망한 가장 가까운 시기의 왕조라는 점에서 그 인식이 좋지 못하다.

2. 국호

태조 이성계는 처음에 국호를 정할 때, 명나라에 '권지고려국사'의 이름으로 사절을 보내 자신의 고향인 "화령(和寧)"과 고대에 존재하였던 국가명인 "조선(朝鮮)" 중에 하나를 택하여 달라고 청하였는데, 명이 조선을 택하여 국명이 확정되었다.

이 점은 두고두고 민족주의자들에게 까이고 있지만 반드시 이상한 일만은 아니다. [7] 조선 조정에서는 '화령'으로 국호를 채택할 의사는 전혀 없었다. 당연히 조선으로 선택해줄 수밖에 없다. 명은 조선이 원래 기자가 건너간 세운 나라로, 사대의 정신을 잇는다고 여겼다. 또한 명에서 한번 삼키려 들어 요동 정벌을 불러왔던 철령 지역을 국호를 쓰겠단 것만으로도 명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명의 "조선 낙점"은 그렇다 치고, 왜 고려 시대에는 거의 잊혀진 나라였던(고조선이 멸망한 것은 조선 개국 시대로 따지면 1400년 전) "조선"이란 명칭을 가져온 것일까? 여기에는 고려의 정통성에 대항하려는 신왕조 개창 세력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왕건의 고려왕조는 옛 고구려의 정통을 이었음을 표방했다. 조선은 그 고려를 무너뜨리고 건설된 만큼, 고려의 정통성에 대항하기 위해 고구려와는 다른 "정통성"을 찾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비슷한 예로 고려 시대의 반란자들은 자주 신라, 백제의 "정통성"을 끌어다 붙여서 고려에 대항하려 했었다. 하지만 신라나 백제는 이미 그 왕조가 자리잡았던 "연고지"에서나 상징성을 가질 뿐. 전국적인 정통성으로 끌어올리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그래서 그보다 더 오래된 고조선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명이 화령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대단히 재미있는 가설이 있다. 화령(和寧)은 함경남도 영흥의 지명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몽골 원나라의 옛수도인 카라코룸의 한명(漢名)인 화림(和林)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라는 것.[8] 화령부는 공민왕성총관부를 수복하면서 붙인 이름이니 그 자체가 친원적인 성향을 띈 것은 아니었지만.[9]

화령과 몽골이 관련되었다는 설은 이미 조선시대 실학자인 이익이 "설마 선대왕께서 몽고 오랑캐놈들 땅이름으로 국호 정해달라고 했겠어? 헛소리겠지." 라고 '성호사설'에서 한 단락을 할애해가며 따로 언급해서 깐 것을 볼 수 있다.[10]

이 사건만으로 조선의 사대가 맹목적이었다고 보긴 어렵다. 위화도 회군과 건국 때는 친명적 제스쳐를 취했지만, 명나라가 자꾸 간섭을 하려 들자 역으로 요동을 공격하려고도 했던 것이 바로 이 조선의 건국세력들이다. 상황이 꽤 심각해서 명나라 황제 주원장정도전을 잡아올리려고 했을 정도였다. 때문에 태조 치세때만 해도 조선과 명 사이에는 꽤나 험악한 공기가 흘렀었다. 하지만 정도전은 정안군 이방원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죽음과 함께 요동 공략은 취소되었다.

조선 외에 청구, 소방이란 표현을 쓰기도 했지만 공식 명칭은 엄연히 조선이다.

2.1. 이조?

일본이나 북한, 중국에서는 이조(李朝)라고 부른다. '이씨(李氏)의 조선' 또는 '이씨 왕조'라는 뜻. 대체로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 역사가 왕조가 바뀌어도 시대변혁이 없었다는 정체성론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말로써 조선을 까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그리고 위의 어느왕국은 김조라 부른다 카더라

일단 동양사에서 같은 국명을 가진 다른 나라를 구분하기 위해 이러한 명칭을 쓰는 예는 종종 있다. 예를 들어 남북조시대의 송나라와 조광윤이 세운 송나라를 구분하기 위해 유송/조송이라고 한다든가, 조조의 위나라를 춘추전국시대의 위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조위라고 부르는 것 등이 있다. 현재 국내에서도 세계사 교과서에서 베트남의 역대 왕조를 '대월국'이란 정식 국호 대신 왕의 성을 따서 '레 왕조', '리 왕조', '쩐 왕조'라고 부르고 있다.

중국 또한 성씨에 따라 왕조의 시대를 구분하는 경우가 있다. 중국에게 조선도 Korea, 고려도 Korea다. 그래서 남북한을 포함한 모든 Korean을 조선족이라 부른다. 재중동포의 중국공식명칭은 정확히 '중국'조선족으로 앞에 중국이 꼭 붙는다. 그냥 조선족이라하면 한국사람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Korean. 중국이 우리를 가리키는 욕인 가오리방쯔의 가오리 역시 고려왕조가 아닌 Korea. 그래서 중국에서는 정확히 구분하기위해 조선왕조를 이씨조선, 고려왕조를 왕씨고려로 구분하기도 한다.

확장해서 적용한다면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 등과 구분하기 위해 쓴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국내에선 보통 단군조선을 고조선이라 하고, 이후의 조선에 기자와 위만의 이름을 붙여서 구분한다. 참고로 현재 일본 사학계의 경우를 보자면, 단씨조선/기씨조선/위씨조선과 그 약칭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동학 창시자인 최제우나 열렬한 민족주의 사학자였던 신채호 선생도 그들의 저서에서 조선왕조를 가리켜 '이조'라고 썼다.

그러나 지금은 써야할 필요가 적다.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할 당시에는 정감록의 영향으로 성씨에 따른 왕조 구분이 영향을 미쳤음을 감안해야 하며, 신채호의 연구가 고대사에 집중되어 있어 단군 - 기자 - 위만조선과의 구분이 필요했음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게다가 당시에는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전으로 상해임시정부에서 국호를 한국으로 바꾸기 전과 바꾼 이후에도 임정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당대의 한반도를 조선으로 불렀기 때문에 왕조국가 조선과 당대의 조선을 구분할 방법이 필요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베트남의 경우에도 레 왕조와 리 왕조, 쩐 왕조 모두 국호를 같이 했다는 점을 볼 때 성씨에 의한 구분이 불가피하다. 대월과 베트남으로의 국호 변경은 교과서에도 서술되어 있다. 유송/조송 건의 경우도 중국의 논문서비스 홈페이지 등에서 조광윤의 송나라를 조송이라고 검색하면 수천 건에 달하는 송나라 관련 논문들 중에서 열손가락에도 못 미치는 숫자만이 검색되며, 그나마도 제목만 본다면 부정적으로 다루는 내용일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 학술계에서 조광윤의 송나라를 지칭하는 표현은 북송/남송/양송 이 세가지다

북한에서 조선을 구태여 이조(리조)라고 부르는 것은 현재 북한의 약식 국명이 '북조선'이기에 현재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조선왕조를 구분하기 위한 사정이 있으며, 중국의 경우는 성씨로 전후대의 국가를 구분하는 습관 때문이다. 여기에 '한반도 땅'을 중국에서 '조선'이라 부르는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한반도를 조선반도라 부른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

우리의 경우에는 국명이 대한민국이므로 일부러 조선을 '이조'라고 부를 이유가 별로 없으며, 역사학을 연구하고 배우는데 있어서도 고조선과 조선을 구분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으므로 어거지 써가며 쓸 이유가 없다. 굳이 성씨+약칭국명 체제로 가고 싶다면, 현재의 체계를 단조,위조,기조-고고(고구려)-부여백(백제)-신라(불필요)-대고(발해)-궁고(후고구려)-견백(후백제)-왕고(고려)-이조(조선)…으로 하여야 학문적 통일성에 하자가 없을 것이다.이 상황에서라면, 북한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김조(金朝)로밖에 안보인다.[11].

따라서 해당 용어가 사용된 의도 또한 좋지 않은 것을 볼 때[12], '이씨 조선'이라는 말을 금기시할 수까지는 없다 하더라도 국내에서는 사용을 지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코렁탕은 덤[13] 지만 어떤 총리 후보자께선 보수 언론인 출신임에도 당당하게 쓰셨다
다만 현재 북한의 정식 국호가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인데다가 한자문화권에서 (나라에 따라 다르지만)한국을 남조선이라고 칭하는 경우(물론 한국이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와도 수교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많이 줄어들었긴 하지만)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씨조선이라는 말을 버린다면 그들에게 혼란을 주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14]

결론적으로 이조라는 말은 의도가 좋지 않기때문에 쓰지 않는 것이 좋다.

3. 개괄적 역사

3.1. 학계의 시대 구분

한국사학계의 주류인 서울대학교에서는 전기 - 관학파 집권기, 중기 - 사림파 집권기, 후기 - 세도정치기의 3시기로 구분해서 보고 있다. 시대구분으로는 전기와 중기가 근세, 후기는 근대 태동기. 개항 이후는 근대로 보기도 한다.
이에 대항하는 쪽인 고려대학교에서는 근세 및 근대 태동기가 서양사의 고대 - 중세 - 근대의 3분법을 억지로 꿰어맞추기 위한 궤변이라고 서울대의 설을 열심히 까는 경향. 이쪽에서는 닥치고 임진왜란을 분기점으로 조선 전/후기로 시대를 구분하고, 개항 이후 대한제국 멸망까지는 개항기라고 하여 근대로 편입한다.

주류적 관점은 아무래도 서울대를 따라 3분법으로 파악하는 관점이 강하다. 그러나 과연 전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정치세력의 교체 외에 시대를 구분할만한 근원적인 변화가 있냐는 변화가 있냐는 문제점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고, 일부에서는 과연 훈구와 사림이 다른 세력이라는 결정적 차이가 있냐는 비판까지 제기되고 있어서 도전이 만만치 않다.

현행 검정 교과서(중학교 역사, 고등학교 한국사)에서는 조선의 시대 구분에 3시기 구분법을 쓰고 있는데, 양란을 기준으로 조선 전기와 중기를, 흥선 대원군을 기준으로 조선 중기와 후기(개화기)를 구분 짓는 방식이다. 그러나 사회, 문화 부분에서 관학파 및 훈구파와 사림파 집권기의 구분이 비교적 뚜렷하고, 병자호란을 대개 조선 후기로 넣는 등 두 사관을 절충한(혹은 어중간한) 관점을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리그베다의 이 항목에서는 각 시대를 세기를 기점으로 대략 100년 단위로 분리하도록 하되,[15] 18세기의 경우 고종의 즉위 전후의 변동이 심하기 때문에 그의 즉위를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한다.

약사인 만큼 주석은 최대한 생략해주시고 핵심 명사 위주로 작성해주시기 바랍니다.

3.2. 건국과 발전 - 15세기

고려 말 왜구의 침입홍건적 등 외적의 침입이 계속해서 이어지던 원명교체기의 혼란기에, 황산 대첩등의 무훈을 바탕으로 신흥무인으로 크게 성장한 이성계는 고려말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성장한 정도전 등의 지방 중소지주 출신의 신진사대부와 힘을 합쳐 위화도 회군을 거쳐 고려를 무너뜨리고 유교(성리학)에 기반한 새로운 국가 조선을 건국한다.

개국세력 내부 갈등으로 인해 두 번의 왕자의 난이 있었으나, 난을 통해 즉위한 태종(3대) 이방원은 본격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숭유억불을 진행하며 새로운 국가로써 제도를 정비하기 위한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대왕(4대)은 국가의 기틀이 되는 주요 제도들을 정립하였으며, 한편으론 고유의 민족 문화를 최고조로 발달시켰다. 그 중 백미는 훈민정음의 탄생. 또한 영토확장 사업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지금의 압록강두만강 아래 있던 여진인들을 강 너머로 쫓아 보내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호랑이 모양 한반도' 영토를 완성한다.

세종 이후에도 세조(7대), 성종(9대)을 거치면서 문물 정비와 제도 확립에 박차가 가해졌고, 성종 대에 이르러서는 제도적인 측면에서 완성된 유교 국가의 형태를 갖추었으며, 고려보다 한층 강화되고 세련된 중앙집권화 관료제 국가의 모습을 갖춰 갔다.

3.3. 훈구 - 사림의 갈등과 사림의 집권 - 16세기

이런 과정에서 기득세력인 훈구가 형성된다. 란 정변과 반란 진압 등에서 공을 세워 공신전을 소유하게 된 대지주 공신들과 그 자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계유정난이란 비정상적 집권 과정을 거친 세조의 치세부터 형성되었다. 이들의 세력화는 토지겸병 문제와 함께 국가 체제에 상당한 문제들을 초래하게 되었고, 지방농토와 중앙관직 진출을 놓고 지방에서 중소 지주로 실력을 행사하던 사림들과 대립각을 형성하게 된다. 훈구(관학파)가 중앙조정의 기득세력으로써 보수적이면서 현실 추구적인 성향을 보였다면, 사림은 훈구와 대립하며 유교정치의 이상적 구현을 추구했고, 조선 건국에 불참한 세력과 지방에 뿌리를 두었기에 중앙조정의 지배력과 왕권의 제약을 주장했다. 이들은 사림이 어느 정도 세를 갖추게 된 성종 시기부터 대신 - 대간의 구도로 대립하기 시작한다.[16]

연산군(10대) 시기,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과 강력한 왕권 강화를 꿈꾸는 연산군의 의중이 서로 꼬이며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라는 두 차례의 사화가 일어나게 된다. 사림이 화를 입었다 하여 '사화'라 일컬어지만, 사화와 관련해 피해가 컸던 건 사림보단 훈구 쪽이었다. [17] 두 차례의 사화를 일으킨 연산군은 이에 대한 역풍으로 신하들이 일으킨 중종반정을 맞이하여 폐위되고 만다.

이후 신하들에 의해 추대된 중종(11대)의 등극과 함께, 왕을 몰아낸 공신세력들은 추가적으로 훈구세력이 되어 더욱 강력한 권력과 특권을 차지하게 된다. 한편 연산군 시기 크게 배척을 받은 사림도 반정공신들의 협조를 받아 영향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된다. 하지만, 신하에 의해 왕이 쫓겨난 사태와 더불어 왕권은 건국 초에 비해 많이 약화됐으며, 본래는 관료를 지칭하던 양반이 지배계층으로 계급화, 고착화 되면서 조선은 초기 중앙집권화 법치국가의 모습이 약해지고 사족이라는 집단이 양반으로써 양인 위에 군림하는 반상제 체제의 형태를 띄게 된다.

사림 가운데 개혁파였던 조광조는 한 때 국왕인 중종의 신임을 받아 개혁정치를 추진했으나 훈구파의 반발로 말미암아 실각, 숙청당한다(기묘사화). 조광조 실각 이후 중종은 훈구 중 특정 권신, 척신에게 힘을 몰아주는 정치를 취한다. 이로 인해 중종 후반기와 이후 인종, 명종 시기는 ,윤원형 등의 외척과 그 일파가 정국을 주도하고 또한 각기 다른 척신 세력들끼리 서로 대립(을사사화)하던 시기였으며, 이 과정에서 사림의 중앙조정에서의 입지는 약화되어만 간다.

그러나 훈구 척신 세력들은 그들끼리의 싸움을 통해 차츰 소수화되는 데 반해, 사림은 거듭되는 사화에도 불구 훈구의 자손들도 흡수해 가며 그 세를 꾸준히 늘려간다. 중종 때부터 설립되기 시작한 서원향교는 이후 사림과 사족이 조선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데 큰 지지 기반이 된다. 이 후 이이를 위시로한 사림의 서인계열이 훈구척신파를 계승하면서 정치 주도권 싸움은 사림들 간의 붕당정치로 옮아가게된다.

3.4. 양란과 붕당 - 17세기

사림의 집권 자연스레 각자 학파와 친소관계에 따라 당을 이루어 서로 대립하게 되는 붕당 정치가 시작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림은 크게 이황, 조식 등의 동인이이, 성혼서인으로 나뉘어져 대립하였으며, [18] 두 당 간의 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져 정여립의 난을 계기로 축옥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못가 조선은 개국 200년만에 이웃 일본의 대규모 침략(임진왜란)을 맞게 되었다. 100 여년의 센고쿠 시대 동안 분열돼 있던 일본의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통일 과정에서 쌓인 여러 내부 문제들에 직면해 있었고, 이 문제들을 풀기 위해 대륙 침략 즉 한반도 침략을 감행한다. 히데요시는 20만에 육박하는 대군을 동원해 전격적인 침략을 단행하고, 오랜 전국시대를 거쳐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일본과 달리 200여 년간 평화 시대를 맞이하며 군제 운용이 헤이해져 있던 조선은 전쟁 초기 일본군의 침략에 파죽지세로 밀리고 만다.

일본군은 초기의 승기를 바탕으로 수도인 한양을 점령하고 평양성 까지 떨어뜨렸으며, 선조는 압록강 앞인 평안도 의주까지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이순신을 필두로 한 수군의 활약, 각지에서 재정비된 의병과 육군의 반격으로 전세는 고착세에 들어갔고, 조정의 요청에 따라 명나라가 지원군을 파병하면서 전세는 오히려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결국 일본군은 전선을 남해안으로 물릴 수 밖에 없었으며, 정유재란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본은 패퇴(철수)하고 조선은 마침내 전쟁에 승리하는데 성공하였다.그러나 농토 황폐화 등 전쟁 피해도 막심하였다.

당쟁은 임진왜란 이후 선조 말, 광해군(15대) 시기에 더욱 극심해진다. 임진왜란 직후 동인은 서인을 정계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동인은 서인에 대한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갈라졌으며, 북인은 이후 남인마저 실각시켜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 북인은 크게 초강경파와 상대적 온건파인 대북과 소북으로 다시 갈라졌다. 대북은 여러 옥사와 폐모론을 주도하며 소북을 밀어내어 권력 독점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으나, 이는 서인 주도의 인조반정을 초래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반정 이후, 대북은 숙청되었고, 소북은 당파로써의 힘을 잃고 여타 당파에 흡수되었으며[19] '서인 여당, 남인 야당'의 공존 형태의 붕당정치가 구현된다.

한편, 중원의 지배자인 명나라가 농민 반란 등으로 내리막을 걸으면서, 만주의 여진족들은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후금이라는 국가를 형성하고 명을 위협했다. 반정을 통해 정권을 잡은 인조(16대) 정권은 광해군의 양면 외교를 비판하며 대명의리론에 기울어져 있던 사대부들의 여론을 따라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친명배금을 표방한다. 그러나 이는 후금을 자극하여 정묘호란을 터뜨렸으며, 국호를 청나라로 바꾼 뒤에는 다시 사대(신종)을 강요하게 된다.[20] 조선에선 척화론이 크게 대두했으나 청은 13만 대군을 일거에 투입하여 조선을 굴복, 군신관계를 맺게 한다(병자호란). 국왕인 인조는 전도에서 당시 청 황제 태종 타이치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를 표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으며 다수의 백성들이 노예로 붙잡혀갔고, 내정간섭과 막대한 공물을 지불하게 되는 등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아야 했다. 이는 사족들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이 때의 충격은 이후 소중화주의와 예학의 강화, 그리고 북벌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청이 명을 멸망시키고 중원에 자리 잡기 시작한 효종(17대) 대에 이르러서는 내부 간섭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조선 왕조와 지배층인 사족들이 내세운 이념은 오랑캐에게 당한 굴욕과 원망을 언젠간 갚아주겠다는 북벌론. 그러나 이건 실현 불가능한 정치적 구호였고, 실상 북벌론이 지배적이던 효종 및 현종대의 군사력 증강을 보면 각종 성읍 수축 등 방어력 증대가 중점적이었다.[21] 시간이 지나면서 북벌론은 흐지부지되었으며, 오히려 후기에 들어선 청의 발달된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 운동이 전개되기도 한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다시 평화기에 접어들었으나, 소빙기로 인한 현종 대의 경신대기근과 숙종 중반기의 대규모 가뭄과 전염병 창궐로 인해 양란의 후유증 극복은 숙종 후반기에 접어들어서야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방납에 대한 폐단을 억제하기 위한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된다.

인조반정 이후 인조, 효종 대에 걸쳐 유지되던 서인, 남인 공존 체제는 현종(18대)대 예송논쟁을 통해 금이 가기 시작했다. 두 차례에 걸친 예송논쟁 끝에 숙종 집권 초 남인은 서인을 몰아내고, 만년 야당에서 여당으로 거듭나게 된다. 하지만 남인의 조정 장악은 일시적일 뿐이었으며, 숙종의 개입에 따라 환국정치로 심화된다. 세 차례의 환국정치로 인해 끝내 남인은 중앙조정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으며, 집권 서인은 남인을 배척하는 강경파 노론과 남인에게 우호적인 온건파 소론으로 나뉘게 된다.

3.5. 왕권 강화와 경제적 안정 - 18세기

환국정치를 통해 왕권은 크게 강화되었고, 이로 인해 숙종(19대), 영조(21대), 정조(22대) 시기로 대변되는 18세기에는 붕당 간의 갈등을 각 당의 인재를 동등하게 고루 등용한다는 탕평책 등으로 조절하는 전제에서 제법 강력한 왕권을 구축할 수 있게 된다. 탕평책은 숙종 시기 환국정치를 거치며 처음 등장한 단어로 경종 시대(20대)를 전후로 한 극한의 붕당 갈등을 조정하기 위한 영종,정조 시기 인사정책으로 활용됐다.

이 18세기 조선은 왕권의 강화 등과 함께 사회적으론 어느 정도 안정기를 구가한다. 화폐 경제가 마침내 상용화되고 이로 인해 상업이 발달 하였으며, 또한 청나라의 고증학이 전파되어 중앙조정에선 배척했지만 일각에선 실학이 발달해 갔다. 이런 모습 때문에 이 시기가 근대로 나아가는 시대였다는 자본주의 맹아론의 주장이 있다.

반면 중기의 반상제 체제는 점차 양인들이 국가에서 발행한 공명첩을 사들이거나 양반 족보를 사들이는 편법으로 양반층으로의 상승을 꾀하게 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18세기 부농의 증가와 더불어 양반 수는 폭발적으로 급증했으며, 부분적으로 면세 혜택이 있는 양반 수의 급증은 재정 감소와 조세 불균형을 초래해 당시의 조세 시스템을 더욱 악화시켰다.[22] 한편, 사림으로 대변되던 사족들이 중앙사족과 지방사족으로 이분화되어 조정의 관직이 한양과 그 주변에만 집중되어 가는 관직의 수도권 집중현상 또한 심화되어 간다.

이런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는 가운데, 붕당정치도 사실상 해체 단계에 들어간다. 영조 집권 후반기에는 소론이 사실상 실각하면서 노론 일당만이 실권을 갖게 된다.[23] 탕평이 실질적으로 발휘된 건 영조 전반기(완론탕평)일 뿐, 영조 후반기와 정조 시기의 탕평은 집권 일당인 노론을 견제하기 위한 왕의 견제책에 가까웠던 것. 영조는 후반기에 탕평이라는 미명하에 노론 내 척신들(풍산 홍씨, 경주 김씨)을 통해 노론 사림을 견제했고, 정조는 이미 실권을 상실한 남인과 소론을 적극적으로 기용해 노론 일당 이전의 붕당 정치로의 복원을 꾀하였다(준론탕평).[24]

정조 시기 노론은 강경파인 벽파를 중심으로 당의 의리를 앞세우며 남인, 소론의 등용을 계속 반대하였고, 벽파와 달리 왕(정조)의 뜻을 쫓은 노론 온건파와 남인, 소론을 시파라 일컬었다. 이러한 반대에 부딪친 정조는 결국 말년에 붕당의 복구를 포기하고 노론 시파이자 명문 가문인 안동 김씨의 김조순을 세자의 장인(척신)으로 지목하여 세자의 근위세력으로 삼는, 척신 정치로 다시 돌아서는 모습을 보였다.

3.6. 세도정치와 왕조의 황혼 - 19세기 전반

정조가 숨을 거두고 당시 세자인 순조가 어렸기에 왕실의 큰어르신인 정순왕후(영조의 계비이자 정조의 할머니)가 수렴청정을 맡게 되었고, 노론 벽파는 정순왕후의 지원을 등에 업고 시파에게 숙청을 가한다(신유박해). 그러나 정순왕후가 죽고 순조의 친정과 함께 시파(노론 시파)가 벽파에 반격을 가하며 그나마 남아있던 붕당마저도 사실상 소멸한다.

19세기 전반에는 김조순의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중앙의 권세가문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이것이 왕권을 능가하는 세도정치가 펼쳐진다. 붕당 정치 때 국가가 더 막장로드를 달리게 된 셈. 사실 조선 후기부터 심화된 권력의 수도(한양) 집중 현상은 이런 사태를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다. 이 때부터 순조(23대),헌종(24대),철종(25대) 60여 년의 기간 동안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조선의 사회체제는 한계에 다다른다.

경제적으로는 토지생산성이 하락하면서 더 이상의 인구부양이 힘들어졌고 농민층의 소득저하로 국가의 재정이 악화되었다. 특히 국가재정이 악화 되면서 사회보호망이였던 환곡이 부족한 재정을 채우는 기관으로 변질되었는데 이로 인해 농민의 삶은 도탄에 빠졌고 사회불안이 크게 고조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의식이 성장한 징후가 괄목하리만큼 곳곳에서 나타난다. 민중들은 착취체계로 변질되어 버린 조세 부역 체계와 탐욕스러운 수령들 그리고 이와 결탁한 아전, 토호들에게 시달렸으며, 이런 상황에서 민중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이나 1862년의 임술봉기, 주민란 등이 대표적. 한편으론, 서양의 양선들이 해안에 출몰하는 등 서구 열강이 조선에 점차 접근하기 시작한다.

3.7. 개화와 망국 - 19세기 후반

1863년 고종(26대)의 친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이 섭정을 통해 당시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해 세도정치 타파, 서원 철폐, 호포법 실시 등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으나, 그 개혁은 어디까지나 봉건왕조 질서를 지키기 위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으며, 당시 서세동점으로 대변되는 급변하는 세계 정세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하지만 흥선대원군도 섣불리 개혁을 하였다가는 멸망을 피치 못할 것을 생각하고 한 일이었다. 흥선군의 논지도 개화를 하되 준비가 된 상태에서 하자는 것이었다. 이후 강화도조약으로 나라의 문을 연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두 차례의 양요를 통상수교 거부정책으로 막아낸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친정으로 실각하였고, 왕후 민씨의 가문인 여흥 민씨를 중심으로 한 세도정치가 부활했으며, 민비 주도 하의 세도 세력은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는 차라리 양심적이다 싶을 정도로 나라를 철저하게 망쳐놓았다. 심하게 말하자면 이 시기에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하여 조선이 그렇게 쉽게 망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1876년 조선은 메이지 유신의 성공으로 근대화를 이룬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으며 개항을 하였는데, 이는 이전까지의 봉건왕조로서의 질서를 뒤엎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조선의 종주국인 청과 이웃나라인 일본은 임오군란갑신정변을 계기로 내정간섭을 시작했다. 조선은 이 과정에서 뒤늦게 근대화를 추구하였으나, 봉건 왕조 체제를 유지한 상태에서의 점진적 개화(도서기)였기에 부국강병을 실현시키지 못했다.

일본은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일어난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청으로부터 완전히 가져옴으로써 조선에 더욱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고종은 이것을 막기 위해 정치적으로 러시아를 끌어들였고, 국명을 대한제국으로 바꿨으며, 근대화와 중립화에 관한 여러 조치들을 하였으나 일본의 내정간섭을 막기에는 너무나 뒤늦은 처사였고 역부족이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이후 조선을 강제로 흡수, 1910년의 경술국치로 조선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4. 평가



 

4.1. 의의

서울대학교와 국정교과서가 받아들였던 시대구분에 따르면 조선은 멀게는 통일신라부터 고려 시대까지 시작되었던 중세를 끝내고, 근세를 열었다는 의의가 있다. 또한 한반도라는 국토와 한민족이라는 민족문화, 민족의식을 완성시켰다. 그 외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양인의 수와 지위의 향상(양천제), 그리고 신분제도의 점진적인 폐지 - 인권 항목 참조.
  2. 왕권과 신권의 조화(의정부서사제)와 성문법치국가.
  3. 문벌귀족사회에서 문무양반사회로
  4. 효율적인 중앙집권화 - 모든 군현의 지방관 파견
  5. 향촌자치강조와 농민통제책(호패, 오가작통법)

4.2. 문치주의 - 관료제와 기록문화




 
조선은 신진 사대부층으로 대표되는 사상가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나라로, 중국에서 먼저 만들어진 성리학을 국가 통치에 맞게 이상적으로 정비하여 100년이 넘는 기간동안 국가의 틀을 완성했다. 때문에 대당율과 관습법에 의존했던 고려조와는 달리 국대전으로 대표되는 성문법 체계가 완비될 수 있었고, 철저히 관료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나이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는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대비가 수렴청정을 했으나, 권한도 중국에 비하면 그리 강한 편은 아니었다. 다만, 명청대 중국 황제의 권력이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킹왕짱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기본적으로 왕조차 법 아래에 있었는데 이는 입헌군주제의 설명과 일치할 정도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은 입헌군주제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는 시각이다. 조선의 왕이 진짜 성문법 체계에 강하게 구속받았는지 여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일단 입헌군주제라고 한다면 군주의 통치가 헌법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 조선의 정치제도 구성에 대한 법률이나 관습법등을 광의의 헌법이라고 전제하더라도 왕이 구속되는 그 헌법 혹은 법률은 왕의 통치범위에서 벗어난 주체가 만든 법률에 제약되어야 한다. 즉 아무리 프로이센형 같은 외견적 입헌국가라도 외견적이나마 의회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런 독일제국 자체도 법실증주의에 의거해서 비록 왕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의회지만 그 의회에서 만든 법률자체는 군주의 권한 남용 방지에 기여했다는 의의가 헌법학의 의견이니만큼, 단지 왕이 법률로 제약받는다는 가능성이나 제약받아야 한다는 유교적 개념을 입헌군주라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으며 전근대적인 시스템을 현대의 정치개념이나 서구의 정치시스템에 가져다 붙이는 무리수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조선의 왕 역시 현실적으로나 명분상으로나 귀신도 부릴 수 있는 절대권력이었다. 하지만 관습법에 더해 성문법 체계를 체택하고 있었던 조선에서는 신하들이 '지금 선왕과 조상들이 정하신 법을 위반하겠다는 겁니까?"하고 대항하면 왕도 이를 감안해가며 움직였다.

세종실록에서는 '우리는 옛날(삼국시대)에 사람을 순장하는 것을 없앴는데, 쟤들은(명나라) 아직도 하는 걸 보면 존경할 수만은 없는 듯'하고 당시 최강국이었던 명나라를 디스한 바가 있었다.

기록 문화 역시 세계적 수준이었다. 국가가 주도적으로 방대한 역사 기록을 남겼다는 점. 조선왕조실록의 작성 체계 및 사관들의 프로정신.[25]

행정 부분에서는, 조선은 치안 전담 기구와 소방 전담 기구를 가지고 있던 얼마 없는 나라 중 하나였다. 금화도감을 만든 세종대왕이 괜히 깨우친 임금이 아니다. [26] 다른 나라에서는 군대와 경찰(치안), 소방 업무를 한 기관에서 담당하고 있을 때 조선에서는 건국 직후 포도청을 따로 만들어 경찰 업무를 담당했다.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조선 해군은 방어 위주의 성격이 강해서 그렇지 전력으로 따졌을 때는 당시 세계적인 수준이었다.[27]

영조, 정조 때 청나라에서 책 사오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음에도, 당시 청나라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인들이 사신으로 오면서 유리창(당시 북경의 서점가)의 책을 쓸어 담는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유입된 청과 서양의 문명은 실학으로 대표되는 정조 시대의 학문적 발전의 근간이 되었다.

4.3. 조선의 과학

과학 기술의 발전은 15세기 중반 세종, 문종 시대 및 18세기 후반 정조 시대를 제외하고는 보잘것 없었으나, 이 두 시기에 과학 기술 수준에 큰 진전이 있었다.

세종 ~ 문종 시대가 특히 두드러지는데, 이 당시 조선의 과학(천문학, 기상학)과 기술(특히 병기술)은 세계에서도 앞줄에 서있었다. 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와 같은 기발한 기구들을 많이 만들었던 사람으로 이천, 장영실을 들 수 있다. 또한 정산으로 당시 가장 정확한 역법에 도달했으며, 화차화포의 기술 역시 막강했다.

이런 기술은 성종 이후 크게 쇠퇴했으나, 양란을 거친 다음 군사 기술은 지속적으로 발달하였다. 거북선이야 최초의 철갑선은 아니지만 최초의 장갑함이라 할만하다. 적군이 기병들의 눈에 등을 던지는 것을 막기 위해 수정을 갈아서 고글인 풍안경을 만들었을 정도이며 한번 장전으로 2~3연발 연사가 가능한 조총도 제조하였다. 반면 수통사기로 만들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군관인 정평구가 '비차(飛車)'라는 비행기[28]를 만들어 큰 활약을 했다고도 하나, 기록만 있을 뿐 실체가 전해지지 않아 신빙성은 의심 받고 있다.

연산군 대에는 은광석에서 순수한 은을 추출하는 첨단 회취법인 연은분리법이 개발되었으나 은본위 경제체제가 발달되어 있지 않은 조선에서 그리 유용하게 사용되지는 못했고 이후 일본으로 퍼져 일본의 은 대량생산에 영향을 주었다.

산학과 역법은 베이징의 선교사들의 역법을 받아들이면서 최소 17세기까지는 일본에 우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조선 통신사의 이러한 우월성은 18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일본이 에도시대가 무르익으면서 역전되었다. 통신사에 대한 대접도 점점 더 하락하여 순조 11년인 1811년에는 더 이상 통신사가 가지 않게 되었다.

정조 시대는 조선 과학의 마지막 정점이었다. 수원화성은 당시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여 동양 성곽기술의 결정체라 할만 했으며, 그 기록 역시 상세하게 남겨져있다. 그러나 화성은 실용적인 용도로 사용되지 못했으며, 서양 과학기술의 도입 역시 크게 늦게 되었다. 북학파인 대용이 1766년 의산문답(醫山問答)으로 자전을 주장한 것은 최소한 200년 늦고, 실학자 한기코페르니쿠스지동설을 (중역으로) 받아들인건 발견 300년 후였으며(1857년의 '지구전요(地球典要)', 중국보다 15년 늦음), 아이작 뉴턴만유인력리엄 허셜의 근대 천문학을 (중역으로) 받아들인건 발견 180년 뒤(1867년의 '성기운화(星氣運化)')였다. 최소한 유럽보다 250년 이상 뒤쳐진 것이었으며, 그나마도 을 통한 독자적인 해석에 기반하였다. 최한기는 근대 의학 역시 신기천험(身機踐驗, 1866년)을 통해서 소개했으나 이것 역시 막 서양인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중국의 서적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실패한 개화와 일제 강점기의 억압적 교육정책을 바탕으로 한국의 과학은 한국전쟁까지 사실상 전무하다 싶은 정체상태에 놓였다.

4.4. 인권


흔히 조선시대인권을 시궁창으로 폄하하는경우가 많은데 당시 조선의 인권은 당시 기준으로 절대로 열악하다고 할수없었다.
(후의 국가인 북한보다 나은점도 있었다.)

계급 제도를 살펴보면 종종 조선의 인권 열악 상황이라고 이야기되는 노비만 봐도, 조선에서는 이들을 사람으로 여기고 어느정도 대우를 해 주었다.[29] 노비의 비율이 주변 국에 비해 과도하게 높고 그 인신예속적 성격 때문에 노예제 국가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고 하층계급의 형식상의 자유민적 신분과 노비의 형식상의 예속적 신분을 들어 노비에게는 사회적 발언권이 없었다는 주장도 종종 나오나, 노비에게 사회적 발언권이 없었다면 수많은 설화에서 나타나는 조선의 노비상이 나타나지도 않는다. 양반한테 예의 좀 차리라고 딴지를 놓는 백정 상길이.[30][31] 또 상전인 몽룡을 뻔질나게 놀려대고 빨아먹으며 아예 국문학 이론에 "방자형 인물"이라고 자기 이름까지 올려놓은 몸종 방자. 그리고 봉산탈춤에서 양반 3형제를 모시는 척 하면서 대놓고 비웃는 말뚝이.) 거기다 유럽을 포함한 여타 지역에서 노비와 비슷한 위치인 하층 계급민들의 실제 처지는 노비보다 비참한 경우도 있었고, 인간 대접을 못받는 경우 또한 있었다.[32] 그리고 공노비만 받았다는 한계는 있긴했지만 여성노비가 출산하면 100일간의 출산휴가를 주었고 남성노비[33]에게도 출산휴가를 주었다.

고려와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고려가 조선과 비교해 여성 인권이 높았던 것은 사실이나, 하층 계급민은 조선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 고려는 노비 외에도 양수척, 항, 소, 부곡민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하급 계층이 존재했고 이들에 대한 대우는 하나같이 비참했다. 오히려 조선시대에 들어 이들 하층계급민들이 노비라는 계층으로 흡수 통합되고 이들에 대해 '인간으로 대접'해 주면서 인권 측면에서 상향된 모습을 보였다. 즉 계급적 관점에서 인권을 논한다면 고려보다 조선이 확실히 앞선다. 대표적으로 조선 후기의 문인 정초부(鄭樵夫)는 노비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양반들에게서 문인으로 인정받고 심지어는 마원, 제갈량 등의 인물들과 함께 초목필지와 같은 당대의 교육 서적에까지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또한 그 후퇴했다는 여성 인권도, 남성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 종속물 취급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 대우해 주었다는 것은 여타 지역에 비해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거기다 이 역시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윤지당처럼 성리학을 자기화하는 여성성리학자들이 나타났고, 이들은 남성 양반들에게서도 자신들과 대등한 수준의 학문적 성취를 이룬 것으로 대접받았다. 또한 "출가외인", "칠거지악"이라는 예학적 제도들은 임진왜란 이후의 것이며, 그나마도 노론 출신의 양반가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 조선시대 여성의 인권수준이 타 지역 문화권과 비교해 어떠했는지는 구체적인 자료로 비교해야 하겠지만 내재적으로 한국사의 시각에서 볼 때, 여성의 인권하락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선전기와 후기의 여성인권 수준의 차이도 있는만큼 단순히 조선시대에 여성인권이 높았다거나 낮았다거나 하는 것을 단순히 조선시대라는 유구한 하나의 시대만으로 통틀어서 이야기하기는 힘든 면이 있지만, 적어도 고려시대에 비해서 적어도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성리학적 종법질서의 강화 등으로 여성의 인권하락은 가시적으로도 분명히 있었다.(다만 고려도 이미 말기가면 여성인권이 쇠퇴하고 있었고 고려가 정말 여성인권이 높은국가였는지에 대해선 생각해볼점이 많다,고려항목 참고)

당장 고려와 비교를 해봐도 고려에서는 여성이 호주가 되는 것이 가능했으나 조선시대에는 그것 자체가 불가능하였으며 이런 반인권적이고 양성불평등한 종중제도, 호주제도는 근대와 현대를 거치며 많이 희석되었음에도 90년대까지 남아있다가 헌법재판소에 의해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헌법의 철퇴를 맞게 되면서 겨우 사라진다. 역시 고려때 흔히 이루어진 남녀균분상속은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서면서 장자상속으로 이어지고 이런 조선의 유습을 일제가 조선민사령에 포함시키면서 존속시키다가 1970년이 되어서야 현재의 균분상속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이외의 일반적인 사회진출을 제외하고는 호적에서의 기록순서, 친속이나 외손 모두에 음서혜택이나 포상 보장등의 제도적 보장외에도 일반적으로 여성의 재가나 이혼이 자유롭고 제사나 상례 등도 모두 여성이 주재가능했다는 점, 경제생활이나 가정생활 등이 모두 남성과 어느정도 대등한 수준이었던 고려나 조선 초반을 감안하면 적어도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여성의 인권하락이 진행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며, 이후 이런 성리학적 지배질서가 일반 서민층에게까지 확산되고 200여년간 유지되면서 점진적으로 세계적인 여성인권 수준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34] 대한민국의 법제상으로까지 유지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런 인권하락 현상은 조선후기에 들어서 급격히 진전된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비단 조선후기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었으며 또 여성인권의 영역에서만 나타난 현상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조선후기의 인권하락과 별도로 이미 조선 전기에 성리학 질서의 성립을 위해 태종 시기부터 첩의 자손인 서얼을 문과는 물론 생원이나 진사과에도 응시하지 못하게 한 "서얼 차대법"이 제정된 바 있으며 역시 같은 시기의 "삼가 금지법"을 통해 실질적으로 국가가 과부의 재가, 혼인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명백히 소수자의 인권을 법적으로 하락시킨 이런 법률들은 그 당대에만 실시된 것이 아니고 그 후 조선의 법제로 명시적으로 제도화된다. 위의 삼가 금지법만 하더라도 성종 때에 이르러 "재가 금지법"으로 성문법으로 확정되어 공포되었으며, 양반의 정처를 대상으로 관리하여 국가가 명부를 만들어 통제하였다. 예를 들면 세 번 이상 시집간 여성의 경우는 별도로 공식 명부인 "자녀안"에 기록하고 통제하였다.
(다만 이미 고려말기부터 여성인권은 쇠퇴하고 있었고 조선시대때 여성인권이 쇠퇴했다지만 그건 지배층 한정이었을지도 모른다,실제로 서민들은 재가많이했다.)


예송논쟁 항목에서 보듯 조선의 지배층인 사림층은 왕이든 노비든 성리학적으로 따졌을 때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인간이라고 이미 주자학적으로 결론을 내렸고, 노비제를 언젠가는 사라져야할 것으로 보았다. 조선을 세운 정도전은 이러한 성리학적 입장에서 노비제 폐지를 주장했지만 같은 혁명세력의 반대로 접어야 했고 이후 유형원또한 노비제 폐지를 주장하기도 하였지만 이상과 현실은 너무나도 다른것이였다. 사대부들은 중요한 재산인 노비를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이것은 신분제가 완화되는 19세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정약용같은 인물도 노비제의 폐지를 반대했으며 소수의 실학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학자들은 노비제를 옹호했다. 이황같이 뛰어난 인격자가 노비를 300명이나 보유한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노비가 농노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인간적인 대우를 받은면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사고 팔리는 물건이였던 존재다. 과거의 인권 수준을 지나치게 고평가해서는 안된다.(물론 과거의 인권 수준을 지나치게 폄하하는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장애인들에 대한 정책 수준은 낮지 않았다. 세종실록에서는 당시 음악을 정비했던 박연이 맹인 악공에 대해 논의하면서 "세상에 버릴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라는 간지폭풍의 명언을 남긴 바 있다. 조선에서는 장애를 하나의 질병, 장애라는 말 그대로, 몸을 불편하게 하는 요소 등으로 인식했다. 기형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을 사회 차원에서 매몰차게 내버리지 않았다. 장애가 심한 자들에게는 세금과 군역을 면제하거나, 시각장애인 같은 경우 손재주가 우수한 사람을 뽑아, 따로 전문직으로 고용하는 등의 일거리를 주게 했다. 즉 지금의 한국에서 실시되는 시각장애인 안마사 제도와 비슷한 목적의 정책을 그 시절부터 실시 했었다는 얘기.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일단 양반이어야 하지만, 얼마든지 출세가 가능했다. 각 부 장관급인 판서는 물론, 왕 다음가는 의정 급까지 올라간 자들이 있다. 척추장애인 허조, 간질장애인 , 지체장애인 희수는 의정급에 올라간 인물이며, 청각장애인 덕수제학과, 조판서까지 오르는 등, 일단 과거를 볼 수 있고 그 중에 능력이 있다면 충분히 출세할 수 있었다.(이건 후의 대한민국초기보다도 나은점)[35]

사법 체계의 수준에 있어서도 동시대 다른 국가에 비해 훨씬 진보적인 측면을 보여준다. 그저 수사라면 일단 의심되던 인간은 끌고 가 고문의 맛을 보여주던 수준에 그치는 나라가 상당수 존재했던 당시, 조선은 범죄의 수사에 있어 꽤 과학적인 기법을 동원하였음을 <신주무원록>등의 저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신주무원록은 현대의 법의학 측면에서 봐도 놀라울 정도의 정확성을 가졌다. # 신주무원록의 과학성을 엿볼 수 있는 글

검시 체계도 무척이나 합리적이어서 초검과 복검, 삼검에 걸쳐 검시해 초검과 복검의 결과가 일치해야만 사건을 종결하였고 일치하지 않을 경우 삼검도 불사했다. 또한 살인사건에 대해서는 임금에게 장계가 올라가 허락이 떨어져야 사형을 집행하는 등 생사람을 잡지 않도록 고심한 노력이 돋보인다. 영조 이래 잔인한 형벌(압슬, 문신)을 금지한 것도 발전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이런 철저한 법정신을 보여주는 것이 조선시대 최고의 스캔들였던 어우동 사건인데, 이 때에도 왕과 신하들이 철저한 법리 공방을 벌인 후 법에 따라서 처벌이 이루어졌다.

4.5. 비판 및 대중의 인식



결론부터 말하자면, 21세기 현재 대한민국 대중이 조선이라는 나라와 그 역사에 가지는 이미지는 그냥 좋지 않다는 수준을 넘어서서 최악이다. 특히 19세기 조선은 예나 지금이나 그야말로 원죄 수준의 처절한 비난을 받는다. 수능만을 초점에 맞춘 입시 위주의 교육 아래, 학생들이 보는 조선사는 거세 당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며, 사극의 탈을 쓴 쓰레기들과 역사 교양서의 탈을 쓴 소설들의 범람 속에, 학생 이상 성인 등 일반 대중들이 보는 조선사 또한 개판인 건 마찬가지. 이러한 경향은 특히 온라인 상에서 더욱 심각하게 두드러지며, 몇몇 대형 사이트들에서는 조선에 뭔가 우호적인 의견이 나타난다면 그 의견이 사실이라 해도 국뽕이라는 비난이 쏟아져 나오는 형국이다. 그쯤 가면 거기가 한국 사이트인지, 아니면 일본이나 중국 등 다른 나라의 극우 사이트인지 분간이 안 갈 지경. 물론 그렇게 열심히 까는 사람들이라 해서 뭘 알고나 까는 거냐면, 그것도 아니다. 즉, 현재 학계의 연구와 대중의 인식 사이에는 당사자들이 일반적으로 느끼는 것 이상의 심각한 괴리가 존재하는 게 사실이며, 이는 시급히 개선해야 할 문제다. 다만 19세기 조선은 당시 상당수의 양반들도 답이 없다며 등을 돌린 시대이기 때문에 학계나 대중의 인식에 큰 차이점이 없다.

70년대 이전의 국사 교육은 "조선이 왜 500년만에 망했는가"[36][37]라는 질문과 스트레오 타입적인 답변이 있었다. 붕당(분열), 신분차별, 유교, 사대주의, 문치주의였다. 지금은 조금 생소해 보이는 문답이지만 식민사관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당시 국사교육은 기성세대의 역사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편견은 80년대 사극 등의 대중매체에 의해 강화되었던 측면이 있다.

숭례문이 불탔을 때 이씨 조선의 잔재가 없어졌다고 좋아하는 환빠만큼은 아니라도, 대한민국 일반 대중들이 가지는 조선("이조")의 이미지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대중들이 보통 가지는 조선에 대한 이미지는

  • 성리학붕당 정치 등 백성들의 삶은 안중에도 없이 자기들 이익 싸움만 한 지배층
  •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및 모화사상 일관
  • 일본에게 뒤쳐지게 된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왕조
  • 앞의 항과 같은 이유로 35년(햇수로는 36년)간의 식민지 체험을 하게 만든 원인을 제공하였음.

비단 식민사관의 영향만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이유도 한몫한다.

  • 과도하게 만주, 정복, 넓은 영토만을 강조하는 민족주의 사관의 영향으로 고구려, 발해 띄우기와 대조되는 과도한 폄하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알 수 있듯 북한과 관련된 좋지 않은 어감
  • 전근대 사회에 대한 현대인들의 몰이해
  • 외세(특히 일본)에 당한 굴욕

"조선이 왜 500년만에 망했는가?"가 아닌 "왜 조선이 500년을 견디어 냈는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도 있다.[38] 반면 80년대 이후 진행된 "자본주의 맹아론"과 민족주의 역사관에 다시 반기를 들며, 식민지 근대화론으로서 근대화의 측면에서 조선시대를 비판하는 시각도 있으며, 다시 이에 대해서 "조선의 힘"을 주장하며 근대를 넘어선 탈근대, 오래된 미래를 주장하는 입장도 있다.

세도정치시기 이래 조선은 국가의 모든 기강이 붕괴하였고, 철종이 죽기 직전에 벌어진 대규모 민란으로 왕조는 껍데기만 남아있던 상황이었다.[39] 결국 조선의 멸망은 "망할 때가 되어서" + "(지배층이) 개혁과 개화에 실패해서" + "일본이 쳐들어와서" 의 쓰리콤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느 쪽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그 평가가 180도 달라 질 수 있는 것이다.

4.5.1. 성리학붕당

각각 해당 항목 참고.

4.5.2. 전반기의 사대 혹은 사대주의, 그리고 조공무역에 대한 옹호론

국내에선 일반적으로 조선의 대중국 외교였던 사대를 치욕스러운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드넓은 땅과 헤아릴 수 없는 인구를 바탕으로 정치, 경제, 문화 면에서 세계 최첨단(最尖端)을 달리는 당대 최강의 선진국이였다. 그야말로 당시의 미국. 현 시점에서의 중국이야 짝퉁과 저질품 그리고 몰상식의 대명사처럼 한국인들에게 늘상 조롱받고 있지만, 한국이 중국을 능가한 시기는 역사상 광복 이후 불과 40여년(70년대 ~ 2000년대) 밖에 되지 않는다.[40][41] 무엇보다 사대는 조선 이전에도 빈번히 시행해 왔던 한반도 왕조의 일련의 정책이었는데 유독 조선만 매도하는 행태는 억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소위 '중화'나 '소중화'의 의미 역시 과거에 사용하던 뜻은 지금과 달랐다. 당시 동아시아의 보편적 국제질서를 따르는 문명권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사대"주의"라는 표현 자체가 일본이 창안해낸 단어로 한반도와 일본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쓰이지도 않는다.

또한 조선은 항상 명나라에게 머리를 숙이고 있던것은 아니였다. 당장 천자만이 할수있다던 원구단에서의 제사도 지냈으며(원단으로 이름을 바꿨다.)세종대왕 시절엔 상왕 태종에게 태상황이라는 칭호를 올리기도하고 황제국에서만 쓸수있던 묘호,릉호(황제의 무덤의 이름),황제의 아내의 시호인 후 등을 사용하는 등 꽤많은 왕실예법들을 제후국이라고 자칭하면서도 황제국체제에 맞춰쓴것을 알수있다. 게다가 조선조 초기에는 조선에서 요동을 공격하겠다는 등 자주 명과 트러블을 일으켰고, 소위말하는 사대주의에 빠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사대외교는 당시의 기본적인 국제외교의 전통이었고, 당시 작은 나라였던 조선이 명나라에서 실리를 추구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었다. 조공 시에도 조선이 명에 준 것보다 그 반대급부가 몇 배나 많았고, 연간 수 차례에 걸쳐 사신이 왔다갔다 하면서 많은 것을 뜯어냈다.[42]

이런 형식의 "사대외교"는 단지 세력강약이 바뀌었을 뿐 길게 보면 북송 때부터 시작된 체제였고, 명나라가 주위 이민족을 대하는 정책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토목의 변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관찰해 보면 잘 알 수 있는 문제이다. 또한 명나라와 비슷한 시기 유목민 세력을 몰아내며 세워진 조선은 몽골제국으로 인한 반동으로 이전 왕조들과는 비교될정도로 중국과 문화적으로 가까워졌으면서 중국의 영향권 안으로 깊게 들어갔다.[43] 더욱이 원나라 이후 중국의 통일 제국은 요동 반도를 거머쥐고 거의 사분오열 하지 않으며 주변 국가를 압도하는 국력을 자랑했다. 고구려고려 또한 당나라와 몽골의 (준)통일제국과 대적할 수는 없었다. 결국 과거처럼 중국이 분열된 틈을 타서 뭔가를 도모해 볼 만한 기회 자체가 조선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44]

다만 조선이 언제나 조공으로 이득만을 본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두자. 조선 초기, 조선을 믿지 못한 홍무제나 한창 팽창주의에 열을 올리던 영락제, 사냥을 좋아한 선덕제 등은 엄청난 양의 조공을 요구했고 이로 인해 조선은 크게 고생을 했다. 고려가 원에 했던 것과 같이 공녀로 바치기도 했다. 세종 때 명에 로 끌려간[45] 한씨 성을 가진 여성은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지만 영락제가 죽자 같이 순장되는 비극을 맞이했다.[46] 이런 과도한 조공은 선덕제가 죽은 이후에 사라진다.

일본과 비교하는 경우도 있는데, 일본은 엄연히 육지와 한참 떨어져 있는 외딴 섬나라였고 공군과 공중전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전에는 상대적으로 외침과는 관련이 없는, 안전한 지역이었다. 유라시아를 휩쓴 몽골족도 바다와 생전 처음보는 이 지옥같은 태풍라는 자연의 장벽 앞에서 일본을 정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정작 일본은 명나라에 조공을 하고 싶어 유구국을 점령하는 꼼수까지 부렸다.

여진족과 비교하기도 하는데, 왜란으로 사정이 말이 아니었던 조선과 전성기를 달리던 후금의 상황은 매우 달랐다. 조선이 건국 초기 최고의 국력을 떨치고 있을 때 여진은 그저 심심하면 조선에게 얻어터지고,[47] 심지어 가장 강성한 추장 만주가 일가족과 함께 몰살당하던 상황인 것을 기억하자. 또한 청나라 이후로는 한족에 흡수당해 사라진 것을 고려해야 한다. 이전 고려에게 상국으로 군림했던 금나라와 요나라도 처음엔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불렀다.[48]한때의 부모의 나라를 공격하는 무슨 이런 여포 같은 패륜이..

아무튼 조선과 명의 특수한 관계를 오랜 중국과 한반도의 관계로 인식하는것도 부적절하다. 한반도와 중국과의 관계도 당대의 입지와 힘에 따라서 상이했던건 바로 전 시대인 고려와 송나라의 예만 봐도 알 수 있다. 거란을 제어하는데 큰 전력이 되던 고려에 송나라는 웬만한 요구를 다 들어줄 수 밖에 없었는데, 고려 사신이 송나라에 조공차 가서 예의고 뭐고 다 팽개치고 송의 보물들을 이것저것 뒤져서 하사품을 이거줘 저거줘 하며 직접 요구하고 송나라는 그걸 진짜로 다 주는야 이 일도 많았다.[49]

조선 사대부들의 과대한 모화 사상에 대한 비판이 있는데 이는 당대 동아시아 최강국인 청에 대한 반발에서 설명된다. 하나는 명황제에 제사를 지내면서 청나라의 패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힘의 차이 때문에 드러내놓고 반발을 할 수가 없으니 이렇게 소극적인 태도로 반발을 한 것이다. 또 하나는 명이 멸망하였으니 이제 중화는 중국이 아니라 조선이 계승하겠다는 소중화 의식으로 설명된다. 외왕내제 형식으로 황제국을 자처했던 베트남도 명 황제에게 제사를 지낸 전례가 있다. 사실상 명나라와는 달리 청나라는 조선이 강제적으로 사대를 한 나라였으므로 이러한 반발이 나오게 되는 것. 또한 중국은 거의 모든면에서 조선보다도 더 선진적이었으므로 이러한 문화적 동경심이 모화사상의 바탕이었다. 당장 내일 미국이 중국에게 밀려 패권국 지위를 잃고 망한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대중의 정서와 정치 기조가 일제히 친중쪽으로 돌아설 수 있겠는가?

4.5.3. 교조화되기 시작한 모화사상에 대한 비판

그러나 앞의 옹호론의 대부분은 검토해보면 전반기에 치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조선 후기의 명나라에 대한 교조적인 모화사상에 대한 옹호론은 비판의 여지가 많다.

조선 후반기의 모화사상에 대해 청에 대한 반발과 명의 발달된 문물에 대한 동경심을 바탕으로 현재의 미국과 중국으로 비교하는 것은 아귀가 맞지 않는다. 현재의 미국의 헤게모니는 중국과는 도저히 비교가 될 수준이 아닌 데 비해, 명나라는 이미 명 4대 암군을 봐도 알 수 있듯이 후금이 등장하기 전부터 막장화가 심각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동맹국에 대해 적어도 동등한 관계를 약속하는[50] 미국은 소프트파워에서 경쟁국들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는 데 비해, 명 4대 암군 시절, 특히나 말기의 만력제, 천계제 시대의 명나라가 조선이 동경할 만한 나라라고만 여기기는 어렵다.

1937년의 만동묘 제사는 그야말로 답이 없다. 1937년이 언제인가? 중일전쟁이 일어난 해다! 명나라는 물론이요, 조선마저 망하고, 교조주의자들의 원수이던 청마저 망한 지 25년이나 지난 시점이다. 게다가 이 시점이라면 한국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역사관도 크게 바뀌어 있을 시점이다. 허생전 항목에서 박지원의 허생전과 채만식의 허생전의 역사관을 비교해보자. 이 때 신채호같은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 어린 학생들을 교육시키며 자주역사의식을 심어주고 있었다. 이건 일제에 대한 저항감으로 제사를 지냈다는 변호만으로는 납득이 힘든 부분이 많으며, 오히려 조선시대 지배층이었던 세력의 일부는 이때까지도 정신 못 차리고 있었다는 해석이 더 적절할 것이다.

명나라 황제가 임진왜란에 군대를 보내주어 도와줬다는 인식 자체가 수백년이 지나도록 유자들의 의식 속에 남아있었다곤 하지만, 이 의식은 임진왜란 때 명이 원조를 해 주기도 했지만 반대로 일본군보다 심한 약탈을 해서 조선 백성들을 고통받게 했다는 사실을 배제한 편협한 역사관이기도 하다. 게다가 모문룡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병자호란과 함께 교조화된 모화사상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되는 정묘호란 때 명군은 도움은 커녕 민페만 잔뜩 끼쳤다.

4.5.4. 결론

결론적으로, 분명 처음에는 생존 수단으로만 이용할 뿐이었던 대명 사대가 결국 시대착오적인 모화 사상으로 변질되어 정체성마저 그에 묶여버린 것은 분명 후기 지배층의 업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조선 초기까지 싸잡아서 비판할 만한 요소가 되기는 힘들며, 따라서 "조선=자주의식도 없는 사대의 나라"라는 수식은 편견이라고 할 수 있다.

4.5.5. 소중화주의. 혹은 국학

조선 후기의 정치 체계가 취했던 소중화주의, 교조적 성리학과 같은 폐쇄성과 독선이 큰 악영향을 주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는 없다. 이런 폐쇄성은 기존의 중화숭배 사상을 비틀어 자국문화만을 제일로 여기는 사상을 낳아 외부의 발전된 문물이 들어오는데 장애가 되기도 하였다. 사실 당시는 병자호란과 명의 패망으로 이미 서구열강이 들어오기 이전에 중화질서의 파괴를 한번 겪었고, 조선 후기까지 그에 대한 반동으로 지나치게 유교와 중화에 집착하는 일종의 국화와 정체성 혼란을 겪은 결과이기도 하다. 조선이 원래부터 이상했던 것도 아니라는 것.[51]

당시 문체반정을 주창한 정조 마저도 신하들과의 사사로운 서편에서는 고문을 내팽겨치고 써버렸으니…

만약 청에서의 서적 수입이 활발하게 진행되지 않았다면 조선말 오경석, 박규수 등의 개화사상파에 영향을 주기 힘들었을 것이다. 오경석같은 경우에는 역관으로 근무하며 중국에서 수많은 신(新)사상을 들여온 인물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자국문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뭉친 이들과 청국문화에 대한 동경을 가진 이들이 혼재 되었던 시대라는 것. 한 편으로는 당시 조선의 후진적이라고 생각되는 문물을 버리고 청국의 진보된 사상과 문물을 받아 들이자고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조선 언어 문학사용론, 한국적 진경산수화등이 유행하기 시작한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것이다. 다만, 이 북학사상파 역시 따지고 본다면 송시열, 이이명 등 선대의 노론 유학자들에 그 기원이 연연한다. 그리고 북학사상파들은 주로 노론 경화사족들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었으며 오히려 보수파들은 충청도 등 시골 지역에 많았다. 아니 애초에 중농학파건 북학파건 실학 연구가 흥한 동네가 오늘날 서울, 경기권이다.

4.5.6. 개화기의 "사대"

중국의 속국이라는 관념을 일종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분명 이 시기 조선이라는 정체의 업이긴 하다. 스스로가 사대를 정치적으로 너무 많이 이용해 먹어 자승자박을 해버린 게 문제. 특히 임진왜란이 끝나고 자신의 권력 안정을 위해 전쟁공신들의 역할을 깎아내리고자 명나라 군대의 전공을 드높이고 자국 군대의 공적을 깎아내린 선조의 병크가 크다. 이후 재조지은이라면서 명나라의 크고 아름다운 은혜가 없었으면 우리는 망했을거야라는 생각이 뿌리내려버렸고 기존의 실리적인 사대 대신 맹목적인 사대가 나타났다. 광해군 때는 신하들이 중국 핑계를 대며 왕의 명에 항거하는 웃기지도 않는 사태가 벌어졌다.

개화기에는 이양선이 교역을 요구할 때마다 교역을 거부하면서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기 때문에 멋대로 너희와 외교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라고 했으니 사실상 스스로 만천하에 자신들의 사대주의를 홍보한 셈. 오히려 청나라에서 조선이 외교와 국방에선 자주권을 누려왔다고 해명했다. 사실 조선정부 입장에서 본다면 서양의 개항요구를 거절하기 위한 핑계에 가까운 것이기는 했다.

그러나 서양사람들 관점에선 거의 자기들이 아는 '식민지' 비슷한 걸로 보일 수밖에 없었고(대표적인 경우가 거문도 사건), 이는 서양인의 관점에 영향을 받은 개화기 지식인들에게도 전해졌다. 갑신정변에서 제일 먼저 청나라와의 예속관계를 끊을 것을 주장한 것이나, 독립협회에서 영은문을 박살내고 독립문을 세운 것도 이런 영향이 크다.

갑신정변 이후 위안스카이가 조선문제에 깊이 개입하고 심지어 조선을 청의 속방으로 하자는 주장까지 하면서 준속국 상태에 이른 기간이 잠시 있긴 했는데, 그것의 영향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망하기 전 각국에 열강들에게 이권을 내주다가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겨 멸망한 것에 대한 책임은 두고두고 까여야 할 대목이 아닐수 없다. 고종과 그의 아내 민비, 그리고 매국노들을 탓하자. 게다가 쇄국이니 뭐니 해도 데지마에서 수백년간 유럽과 교류한 일본과 기껏헤야 하멜, 벨테브레이, 러시아 군인 몇명과 조우한 조선 왕조가 서구 문물에 대한 이해도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메꿀 수도 없을 정도의 격차였다. 애초에 일본 제외하고 비유럽권 국가 중에 자기네가 잘나서 식민지 안된 나라가 있기나 한가?

결론을 말하자면, 형식적으로 조선은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고 그것을 근거로 근대에 속국이라고 주장되었지만 거의 형식적인 절차였고 외교와 내정에 대한 중국의 간섭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의 자주국이라는 것이 현 사학계의 정설이다. 물론 19세기에 청이 간섭을 심하게 해서 내정간섭까지 받는 완전 속국이 될 뻔하긴 했다. 이는 청나라가 서구의 식민지 개념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열강들이 눈여겨보는 주변국에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우리도 이제 식민지있는 제국이라고 해야될텐데 마침 조공국들이 있네?' 라는 일종의 왜곡 시도였다. 게다가 청의 예속이 절정을 달리던 1894년조차 청은 일본이 조선의 내정개혁에 공동착수하잔 제의를 하자 조선의 개혁은 조선인들의 몫인데 헛소리말라고 거부했고 이홍장은 선교사들이 당신네 속국인 조선의 카톨릭 합법화를 허가해달라고 요청하자 조선은 자주적으로 정치를 해왔다고 못한다고 대답했다. 자기네도 아닌 걸 다 안 거다.

조선의 입장에서도 중국과 사대관계를 맺을수 밖에 없었다. 국력에서 압도적으로 밀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때의 중국은 근대 이후 유럽 국가들에게도 동등하거나 그 이상으로 취급된, 유아독존의 세계 최고의 초강대국이었다는 사실을 잊지말자. 지금의 중국을 보고 중국에게 사대하다니 역시 조선은 병신, 이러는 분위기가 있는데 그때의 중국은 지금의 미국과 같거나 더 거대한 나라다. 지금 미국과 친한 것을 두고 미국 식민지 운운하는 소리가 나오긴 해도 미국과 왜 친해야 하냐?란 정신나간 소린 안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한반도는 일제강점기 이전에도 오랫동안 주권이 없었던 나라였다고 하는 사관 자체가 일본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식민사관이다. 이런 조선이 가진 심각한 부정적인 이미지와 민족주의에 딸려오는 열등감 자체가 일제강점기의 교육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식으로 생각하면 중국도 이민족에 시달리며 번번히 나라를 빼앗겨온 역사일 뿐이다.[52]

4.5.7. 일본에게 뒤쳐진 왕조

조선 시대에 일본이 본격 한국을 만만하게 보기 시작해서 터진 임진왜란,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해서 급기야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던 사건들 탓에, 일반 대중들은 조선을 흔히 '그 전까지는 한반도 국가들이 앞서 있었는데 조선 때 뒤쳐졌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한국에선 일부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일본이 단지 산업혁명을 먼저 도입하게 되어 조선 식민화를 위한 군사력을 얻은 것일 뿐이다"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있는데, 이 또한 신빙성이 높은 주장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이걸 다르게 말하면 일본은 원래는 전혀 별 볼 일 없는 나라였는데 산업혁명 도입 이후에 조선을 강제 점령하여 그 자양분을 갈취하는 것으로 성장했다는 믿음이 된다. 물론 일본이 조선과 대만, 특히 조선을 통해 식민적 제국주의를 실현한 것은 맞지만 이 주장은 그런 수준을 뛰어넘는 비약이다.

1800년대 중반,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집권해 내정을 개혁하고 있던 시기였던 반면 대조적으로 일본은 에도 막부가 개혁에 실패하면서 막부의 무능함에 대해 내부 불만이 쌓이고 있던 시기였다. 이때 서양세력이 흥선대원군은 서구의 공격을 내부를 결속시켜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강화, 개혁을 속행하는 발판으로 삼았고, 에도 막부는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함으로 인해 반막부파에게 빌미를 잡히며, 반막부파는 서구의 힘을 빌려 막부를 타도하는데 이용한 것이다. 즉, 한국은 서양세력의 침입을 계기로 더욱 폐쇄적으로 바뀌었고, 일본은 서양세력의 침입을 개방의 계기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이 두 나라의 운명을 갈라버리게 된다.

국가 0 1000 1500 1600 1700 1820 1870
중국 5,960 5,900 10,300 16,000 13,800 38,100 35,800
인도(Maddison) 7,500 7,500 11,000 13,500 16,500 20,900 25,300
인도(Clark,1967) 7,000 7,000 7,900 10,000 20,000 19,000
인도(MaEvedy & Jones,1978) 3,400 7,700 10,000 13,000 16,000 20,000
인도(Biraben,1979) 4,600 4,000 9,500 14,500 17,500 19,400
인도(Durand,1974) 7,500 7,500 11,250
일본(Maddison) 300 750 1,540 1,850 2,700 3,100 3,450
일본(Hayami) 1,000 1,200 3,000 3,100
한국 160 390 800 1,000 1,220 1,380
인도네시아 280 520 1,070 1,170 1,310 1,790
인도차이나 110 220 450 500 590 890
기타 동아시아 590 980 1,440 1,690 1,980 2,360
프랑스 500 650 1,500 1,850 2,147 3,124 3,844
독일 300 350 1,200 1,600 1,500 2,490 3,923
이탈리아 700 500 1,050 1,310 1,330 2,017 2,788
영국 80 200 394 617 856 2,122 3,139
스페인 450 400 680 824 877 1,220 1,620

국가 0 1000 1500 1600 1700 1820 1870
한국 250 450 950 1,150 1,450 1,600 1,700
출처 : from the 2007 monograph 'Contours of the World Economy, 1–2030 AD' by the British economist Angus Maddison. (China, India, Japan, Korea, Indonesia, Indochina, Other East Asia)
【부흥】네이버 대표 역사 카페 (한국; 삼국, 고려) 인구를 조선에 비해 다소 낮게 추정해 본 표에는 더 높게 수정하여 기록함. 기타 카페 내의 여러 의견을 반영하여 수정함.
인구대사전 <표 3-4> 연도별 조선시대 인구 추정치, 1392-1910 (한국; 조선) 1600년은 임진왜란 직후, 1700년은 을병대기근 직후, 1820년은 홍경래의 난 직후로 세 경우 모두 직전보다 약 200만명 정도의 인구 손실이 있었음을 밝힘.

국가 1500년 경 1600년 경 1700년 경 1800년 경
영국, 아일랜드 440 680 930
프랑스 1,640 1,850 2,000
이탈리아 1,050 1,330 1,330
폴란드 350 500 600
중국 15,000 20,000 30,000
일본 1,200 2,770 3,070
한국 900 1,100 1,350 1,600
[53]

참고로 전근대시절 자료들은 교회나 신사, 사찰을 털면 되는 유럽, 일본같은 경우를 제하면 거의 전부 추계라 봐도 무방하다. 그냥 대충 이 정도 되나 하고 여기면 된다.

근대 이전 일본과 한반도 국가들의 국력을 비교해보면, 일본이 오히려 한반도의 국가들과 비슷하거나 능가한 적이 비일비재하다. 삼국시대 당시 삼국의 총인구를 다 합쳐도 일본[54]을 능가한다는 보장이 없을 뿐더러(남만주까지 합쳐도 4~5백만을 넘긴 적이 없다고 보고 있으며 보수적으로 잡아 대략 300만 수준이였다)(출처바람), 이 때 당시 한반도는 삼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다만, 한반도가 문명의 발전 수준이 당시로서는 넘사벽이라 그것으로 커버를 한 셈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의 경우 역시 잘쳐봐야 비슷한 수준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의 한반도의 인구는 학자들의 추계에 따르면 5백만을 넘긴 일이 없고 보수적으로 잡아 대략 300만 수준의 인구를 보유했다. 일본은 500년에 500만 정도였고 1000년에는 750만에 도달했다. 참고로 발해는 남만주보다도 더 끝으로 치우쳐져 있어 많아야 100만 정도, 보통 50만 정도였다고 추정한다.) 그랬다가 조선의 경우는 15, 16세기 들어 인구가 2배 이상 점프해 왜란 때까지 지속적으로 성장했다.(왜란 전에는 1400만이 넘어선 인구가 1050만~1200만으로 감소한다.) 그리고 이 시기 일본은 전국시대의 상막장을 겪느라 인구가 왜란 직전의 조선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1300년에 1100만명 정도였고 1500년에 1500만명을 넘었다. (정확한 수치는 자료마다 다른데 이헌창 저 한국경제통사에서 인용한 연구에 따르면 1600년경 조선이 1100만 명을 찍을 동안, 일본은 1200만 명을 찍었다고 한다. 반면, 1700~1800만 명 정도로 보는 견해도 있다.다름을 인정하고 편견을 없애는 리그베다 위키) 그랬다가 왜란 후 양국에 평화가 찾아오자 조선은 17세기 후반에 다시 성장을 시작하여 1600만까지 증가하고(을병대기근으로 1450만~1500만으로 다시 줄었다가) 또 다시 성장하여 18세기 중후반에 1750~1850만 명의 인구를 보유했고 같은 시기 일본은 2500만~3000만을 넘겼다고 한다. 조선은 대체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까지 인구가 증감을 반복하며 성장하여 18세기 중후반에 안정세였다가 19세기 홍경래의 난 이후에 1650만~1700만까지 감소하고 정체된다. 일본은 17세기 들어 인구가 1.5배 이상 뛰었고 그 이후에도 이전에 비하면 증가율은 훨씬 줄었지만 여하튼 완만하게 성장했다.

사실 전근대 사회는 지형과 기후가 비슷하다면 영토와 국력이 대체로 비례하는데, 애시당초 일본의 지리와 기후가 더 유리한데다[55] 영토도 일본이 더 크다. 이를테면 일본 열도의 산지의 비율은 일본 67%, 한반도 약 70%로, 일단 한반도의 산지가 일본의 산지에 비해 평균적으로 낮아 농지로의 가치가 많이 낮은 편은 아니었지만 대동소이 하며, 또 한반도 전체 면적은 일본의 혼슈보다 약간 작다. 그리고 큐슈시코쿠도, 면적으로만 보면 작은 섬이 아니다. 기후도 일본 열도가 한반도보다 대체로 기온과 습도가 높아 쌀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농업에 유리하다. 한반도에선 꿈도 못 꿨을 3모작이 일본 열도에선 무로마치 시대의 큐슈에서 이미 행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 전국시대 당시 관동 지방의 본격적인 개발과 함께 일본 열도의 전체적인 생산력은 확실히 한반도보다 앞서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축적된 잠재력이 개화된 에도 막부를 기점으로 일본의 국력은 크게 성장하여 조선을 확실히 앞지르게 된다. 조선 통신사의 기행문을 통해서도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일본의 모습이 나타난다. 물론 어느 정도는 에도 막부에서 보여주기식으로 펼친 바 있지만.참관수업

조선이 일본보다 더 유리하면서 동시에 불리한 것은 지리적인 점[56]이었는데, 만약 조선이 이를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 명과의 통상을 더 확대했더라면[57] 일본 열도에 대한 지리, 기후적 열세 정도는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일본과 조선의 지리적 특성상, 일본이 조선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일본보다 조선이 근대적 개항이 늦었고 그 결과는 두 나라가 식민국가와 피식민국가로 갈리게 되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58] 다만, 조선 극 후기 멸망 직전에 일어났던 사건들의 책임을 500년이나 이어온 조선 역사 전체에 지우는 것이 합당하다고 보긴 어렵다.

반대로 일본과의 격차를 지나치게 과장하여 교과서에서 강조되는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자생적 근대화의 징후들 즉 화폐 경제의 활성화, 시비법의 발전과 이앙법의 보급 등 농업 생산력의 발전, 상업의 성장, 서민 문화의 발전 등에 대해서 가마쿠라 시대 후기에 일어난 사건들이라 별거 아니다라는 논리는 일제강점기 시대의 초급적인 비교론을 답습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이러한 징후가 일본에 본격적으로 나타난 건 에도시대에 와서다. 각론으로 따져보자.

  1. 통화 문제. 가마쿠라 시대에 송나라에서 동전을 수입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단순히 동전 수입을 화폐경제 활성화로 치환할 수 없다. 간단한 예로 고려시기 상업거래할 때 은병이 흔히 쓰였지만 이를 두고 화폐경제가 활성화 되었다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즉 어느 정도의 상업적인 발전이 있을 수 있었으나 화폐경제라 부를 만큼 서민층에게까지 대중화 되었다고 볼 수 없다. 애초에 화폐의 수입이 화폐경제 활성화를 뜻한다면, 평안북도에서 전국시대 화폐인 명도전이 발견되었으니까 고조선은 화폐경제가 활발한 국가인게 된다. 실제 일본에서 화폐경제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건 에도막부 시기부터다.
그리고 그 일본에서도 회계적 단위로 쌀이 널리 쓰였다. 단적으로 석고제가 그러하다.

  1. 농업 문제. 시비법과 이앙법이 조선에 일본보다 늦게 널리 퍼진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시비법 자체는 고려시대에도 당연히 들어왔다. 고려 중기에는 콩 비료를 쓰는 녹비법을, 고려 후기부터 조선 시대에는 퇴비법(거름)을 썼다. 당장 농사직설을 보면 이런 소리를 할 수 없다. 반면 이앙법의 경우는 기후적인 영향이 크다. 고려 후기에 이앙법이 도입되었으나 전란으로 인해 크게 쓰지 못했고, 조선 전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후기의 이앙법 확대는 기후 변화로 인한 강우량의 증가와 지역 사회의 물 확보 노력이 배경에 깔린 것으로, 조선 전기에 이것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면 가뭄으로 큰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나마도 일제시기 농학자들은 한반도의 강우량이 일본의 2/3밖엔 안된다고 증언한 바 있다.)

  2. 상업 문제. 가마쿠라 시대 상인들이 이익 집단인 자(座)를 조직했다지만 관에서 통제를 하는 등 자유로운 상업활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국도 의 형태가 존재하였다. 다만 나라에서 농경 사회를 지향하고 상업을 지양하여 앗이가 더 강조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형태의 상업활동은 고려나 조선의 시전, 조선초기 보부상 통제와 비슷하다 볼 수 있다.

  3. 서민 문화 문제. 서민을 위한 가면극인 가 탄생한 시기가 가마쿠라시대인 것을 맞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가면극 자체야 한반도에도 이미 삼국 시대 신라부터 시작된 무신굿부터 시작하여, 고려 중기의 무신정변을 부른 , 용무도 있고, 일본의 "노"는 나라 시대부터 생겨 무로마치 시대까지 쇼군가의 후원을 받았다. 대부분 국가들의 극은 처음엔 종교적인 면이 강했고, 대중적인 문화로 정착되기에는 매우 나중에나 일어난 일이어서, 노가 대중적으로 향유된 것은 에도 시대에나 가서야 보인다. 게다가 "서민 문화"라는 표현 자체가 오해의 여지가 많다. 중요한 건 부농의 발달에 따른 서민의 경제력이다. 그렇게 꽃핀 조닌문화 역시 에도시기에 들어서이다.

이처럼 단순 대입식 역사 발전법은 많은 편견을 낳을 수 있다. 흔히 알려진 조선과 주변 동아시아 왕조와의 비교로는 고려-당(귀족정치) - 조선-송(문치붕당정치)라는 비교나, 조선은 헤이안 시대와 같아 무사(기사)의 사회를 치르지 않아 고대사회와 다를바가 없다는 일제 학자들의 견해 등이 있는데. 그렇게 따지면 중국은 봉건사회를 춘추전국시대에 치른 셈이 된다(...)

즉, 일본과 한국의 국력 격차는메이지 유신 때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연대적으로 조선 왕조 초기를 제외한 수백년을 통틀어 벌어진 장기적인 현상이다. 다만, 이전 글에서 서양과 중국, 인도를 비교한 글은 문제가 있는데 동아시아 삼국은 맬서스 트랩 때문에 1인당 소득은 대체로 그게 그거라 보이지만 19세기 서양은 맬서스 트랩은 진작에 벗어나 1인당 소득이 넘사벽이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조선 통신사의 수필이나 보고에 "오랑캐들 주제에 사치를 엄청나게 부린다", "오랑캐들이 의외로 많이 번영해서 쫄았다," "오랑캐인 줄로만 알았는데 나름 문명국이다. 본받을 것도 많은 것 같다" 등 일본이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록이 많으니 당대 조선인 본인들부터 후진성에 대한 인식이나 일본에 대한 큰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나 한문에 능통한 원로 학자가 번역한 《일동장유가》를 본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

오히려 《일동장유가》의 내용은 일본보다 발달한 문화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애초에 이게 통신사라는 게 생긴 이유다.) 일본 도심가의 사치를 비판하는 것으로, 매우 일관적인 어조로 쓰여있다. 이에 대해 사치를 비판하는 거 자체가 경제 논리를 모르는 꼰대짓이라고 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이 당시 일본 열도의 전반적인 상황을 생각하면 이를 마냥 근거없는 비난이라고 매도하기 힘들다. 에도 막부의 번영은 에도나, 도시 지역에 집중되었지 시골에 가면 조선 농민들은 부르주아로 보일 정도로 가혹한 일본 농민들의 삶이 있었다. 일본의 농민들은 4~50%의 수확량을 착취당하는 것은 예사고 많게는 7~90%를 착취당하기도 했으며 다이묘들에게 혹사당했다. 텐메이 대기근경신대기근의 양국 대처만 봐도 조선은 국가 시스템을 총동원해서 구휼에 나섰지만 일본은 유력자들의 기부에 의존하는 등 사실상 방치했다. 이런 번영은 정상적인 경제나 시장의 발전이 아니라 막대한 재정규모로 뒷받침되는 정부의 지원에 따른 것인바 바람직하지 않다는 비판은 충분히 제기할 수 있다.

디씨 역갤 등지에서는 도시화 떡밥과 관해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일단 도시화가 "좋은 국가"를 정의하는 척도가 되어준다는 생각부터가 근거없는 생각이다. 상술했듯 에도의 도시화는 일본의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가혹한 착취를 기반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러한 도시화도 무조건 화려하기만 하다면 그 이면의 희생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좋은 것인가? 국가의 삶의 질을 높이는 도시화라면 의미가 있겠지만, 역으로 주민 다수의 삶의 질을 격하시켜가며 이루는 도시화라면 그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런 식으로 따지면 북쪽의 김씨 왕조도 평양은 제법 크고 화려한 도시다. 또 도시 인구 규모를 드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가령, 도시 인구 랭킹을 따지면 중국, 남미의 도시들이 선진국 도시들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을 차지한다.

전술했듯 "국가"로서의 일본과 조선의 문제를 떠나 "국토"로서의 일본 열도와 한반도는 전자가 한 체급 더 크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생산의 절대량에서 따라잡혔다는 이유만으로 조선을 못난 왕조, 무능한 왕조로 몰아가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17세기에 일본의 생산량이 크게 성장하여 조선을 앞지른 것은 사실이나 이것은 포텐의 차이다. 물론 개화기의 대응 차이로 조선이 일본에 먹히는 신세가 된 것은 사실이나 단지 그 이유로 500년이나 되는 조선 왕조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무리수라 봐야 할 것이다.

4.5.8. 문치주의 - 군사력에 집중하지 않은 이유

고구려에 비교되거나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속수무책으로 당한 경험 때문에 만날 앉아서 글만 읽고 군사력은 안 기른 나라라는 인식도 아주 흔하다.

하지만 군사력은 결국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비용이고, 동시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냥 낭비가 되어버리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특히 삼국시대와 달리 전쟁 수행으로 생기는 리품을 통해 군사력을 유지하는 방법도, 마땅히 정복할 곳이 없이 그냥 국방만을 위해 군사를 유지했던 조선에게는 불가능했기에 그런 경향이 더 강했다. 따라서 필요한 만큼만을 투자하는 균형을 잡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전기 조선의 입장에서 본다면 군사력 필요는 정말 낮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도 막 고려에서 왕조가 교체된 초창기에는 명나라를 정벌해야한다는 의견이 있는 등, 상당히 군사력에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애초에 조선 자체가 무관이었던 이성계가 쿠데타를 통해 고려의 권력을 장악한 뒤 기반을 건설한 나라니만큼, 조선의 상층부는 그 누구보다도 칼 쥔 무관세력의 힘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59] 더욱이 왕자의 난으로 큰 혼란을 겪은 후에는 군사력(특히 사병)의 과도한 증가를 억제하고 남는 여력을 문치에 쓰게 된 것이 조선이다. [60] 또, 전반기 조선은 함경도 일대 및 남쪽 해안 지역 등 일부 위험한 국경지역을 제외하면 외적인 방위 부담이 상장히 적었다. 아니, 국경지역이라 해도 방위력 필요가 적은건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임진왜란의 경우 대비가 너무 열악했다고 디스당하는데, 당시 선조 정권도 일본의 침공 예정을 파악은 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예상한 것 이상의 대규모였을 뿐. 왜란 이전 최대규모의 왜구였던 고려말 왜구들을 가정한다 해도 수만여 정도이지 임란처럼 20만에 육박하는 규모는 아니었다. 명나라 북로남왜의 화를 기준으로 삼아도 마찬가지였다. 임란때 일본군의 규모는 그 이전의 경험으로 예측한 것의 몇배에 달했던 것. 거기다 진포 해전, 황산 대첩과 대마도 원정 이후 왜구들은 한반도보다는 중국 해안선을 주요 타겟으로 삼았고[61] 그나마도 무로마치 막부의 안정화로 더더욱 감소하였기에 조선이 체감하는 일본의 위협은 크게 줄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거기다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공언한 건 아직 일본 내 정리도 되지 않았던 시점... 이런 상황에서 히데요시가 그런 미친 짓을 할거라고 예측해낸다면 그 사람은 제갈량에 준하는 인재로 평가받았을 것이다.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가 '히틀러가 소련을 공격할 것이다' 라는 정보를 소련에 넘겼을 때 당시 소련 서기장 스탈린이 현실적으로 독일은 이미 영국과 전쟁 중이기에 그런 미친짓은 벌이지 않을 것이라 보고 많이 대비하지 않았다가 독소전쟁이 터진 것처럼 이런 사례는 역사속에 많다.

임란과 호란의 전란을 겪은 후인 조선 후기에는 군사력 증대와 관련된 실록 기사가 급증하며,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대부분의 조선시대 군사 시설 유적들은 대부분 이때 완비된 것이다. 대표적인게 남한산성(광해군 대에 축조, 인조 대에 대대적으로 보강), 북한산성(숙종 때 축조), 강화도 일대의 수많은 포대들[62]이 있다.

또한 인조~숙종시절 이어진 5군영의 설치는 조선의 재정을 압박하였다. 최대의 군영이었던 훈련도감의 경우[63] 1년에 5~8만석 정도의 경비가 들어갈 때도 있었는데, 호조의 재정규모가 11~12만석 내외라는 점을 생각하면 무시할 수 없는 규모. 물론 조선은 재정의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국가고[64] 호조의 재정은 조선 후기 전체 국가재정의 약 1/5 정도에 불과했으나, 어찌되었든 이러한 군사비는 무시할 수 없는 국가 재정의 부담으로 다가왔다. 비변사로 대표되는 군부의 세력 강화도 부담인 것은 마찬가지.

삼정의 문란군포 부분도 이러한 군사비의 증가가 어느정도 한몫을 했다. 물론 삼정의 문란이 국가체제를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 된 것은 세도정치때문이지만.

군사력은 또한 내부 치안도 담당한다. 그런데 조선은 이 점에 있어서 제법 우수한 편이었다. 물론 무뢰배, 검계 등 폭력집단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도적떼가 사라졌던 적도 없는 것은 사실이나, 애초에 이런 집단을 완전히 박멸하는 것은 근대 이전엔 어디에서든 무리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실록상 나타나는 이런 집단들은 그 규모가 잘해야 수십여 명 선을 넘지 않는데, 이는 인구 규모와 면적, 산이 많은 한반도 지형을 고려할때 상당히 안정된 편이다. 대신 그 자리를 호환이 차지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65]

도적떼, 해적떼의 존재에 대해 조선을 오늘날의 대한민국과 비교하여 좋지 못했느니 흉흉했다느니 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일 것이다. 시대적인 평균치를 놓고 따진다면 조선은 한반도 역대 왕조 중 가장 평화로웠던 국가가 맞을 것이다.
신라는 장보고가 하도 신라인들이 노예로 팔리다 보니 당에서 벼슬하다 돌아올 정도고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초창기부터 왜구의 대규모 공격을 받는다. 중국 대륙과 맞닿은 고구려는 말할 것도 없고 백제도 뭐... 고려는 거란, 몽골, 홍건적, 왜구 등이 정말 미친 듯이 날뛴다

5. 정체(政體)

조선의 정체(정치체제)는 국왕 중심제의 절대 군주제 국가이며 이는 바뀐 적이 없었다. 1897년 대한제국으로 전환한 이후로는 한수 더 강화되어 전제 군주제로 바뀌었다. 이는 1910년 대한제국 멸망 및 한일병합까지 계속되어왔으나 1905년 을사조약 이후로 조선통감부의 간섭과 개입이 있었다.

국왕의 호칭은 전하(殿下)로 불려왔다가 1894년 12월 17일 갑오개혁 이후부터는 대군주폐하(大君主陛下)로 바뀌어 불려졌으며, 1897년 대한제국 개국 이후에는 황제폐하(皇帝陛下)로 불렸다.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 및 한일병합으로 인해서 이러한 호칭도 사실상 사라져버렸다.

관료는 수상(首上)격으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 등의 직위가 있으며 대한제국 이후로는 영의정이 총리대신으로, 좌우의정과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은 각각 내부대신과 군부대신 등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이 역시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으로 모두 사라졌다.

6. 경제


조선시대 엽전 종류

조선의 통화(通貨)는 건국 초기에는 현물경제를 대체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실패하였으며, 상평통보로 불리우는 엽전이 통용되는 17세기 후반 전까지 현물 화폐가 거래되었다. 통화로 사용된 주요 현물은 베(삼베. 나중에는 목화의 대중화와 생산량/교역의 증가로 면포로 대체)와 이었으며, 포화(布貨)로서의 베는 다섯 새 굵기의 섬유로 짠 중등품인 오승포(五升布)가 기준이었다.

상평통보 유통 이후 통화단위는 이 되었으나, 세금은 대동법이 유지되어 미곡 중심의 경제가 지속되었으며 지방에서는 물물교환이 지속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대외적으로는 청, 일본과 은 거래를 활발히 하였으나 거의 멸망 때까지 이것이 경제 체질의 변화로 이어지진 못했다. 후에 대한제국기에 전환국이 설치되어 백동화가 주조됨에 따라 통화단위는 냥에서 (圓)으로 바뀌게 되었으나, 화폐의 가치가 지속적으로 폭락하여 일본 화폐가 더 많이 유통되었다.

7. 백성들의 생활 수준?

일본, 중국 등을 동시대 조선과 비교했을 때 전자의 경제적인 발달은 상당한 정도이나, 그걸 민생으로 끌고 가면 과연 백성들이 조선보다 무조건 잘살았는지로 곧바로 알 수는 없다. 일본 같은 경우는 상당한 세금량 등으로 인한 민란이 많이 일어난 지역이다. 에도 시기 발달된 도시도 알고보면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서 주변 지역(주로 피지배 계급들)의 착취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결국 저런 자료는 백성들의 삶을 비교하는 데 있어 증거론 쓰기 힘들다.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인 이영훈[66]에 따르면 1인당 GDP는 40달러 수준. 일제강점기의 통계 자료를 봐도 비슷하다. 앵거스 매디슨 통계를 언급하는 사람도 있지만 앵거스 매디슨의 경우 통계학적으로 봤을 때 추론의 오류(Error of Extrapolation)를 저지르고 있는데, "각국의 경제는 급작스런 변화상 없이 일정한 패턴 하에 전개되어 왔다"라는 전제를 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이 사람 자료를 받아들이자면 남한의 경제도 한강의 기적으로 고속성장한 게 아니라 대한제국 시기와 그 이전부터 꾸준히 발달했다는 결론이 나와버린다. 애초에 역사적으로 불태워지거나 파괴 혹은 여러가지 일을 당한 도시들이 이탈리아에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로 로마제국 버프를 받아 GDP가 상당히 높으며 역사적 사실이 반영된 각 시대의 통계 자료하고는 당연히 맞지 않은 편이다. 특히 앵거스 매디슨이 역사적으로 잘 모르거나 관심이 적은 지역들은 더욱 그렇다.본격 "자세한 것들은 모두 무시해도 된다."주의

8. 계급

일반적으로 조선의 지배 계급으로 생각되는 양반은 건국 초엔 계급이나 계층이 아닌 조정에 녹을 받고 일하는 관료를 지칭하는 용어에 불과했다.[67] 사실 조선 초기의 계급은 전대 고려와 유사한 양천제(양인+천인)였다.[68]. 초기만 놓고 보면, 전대 고려의 귀족적 요소들[69]이 상당부분 제거되었기에 고려를 포함한 전대 어느 시대보다도 신분간 편차와 차별이 많이 완화된 사회로 볼 수 있다.[70]

더해 신분간의 상하 이동도 전대에 비해 한층 개방적이었다. 일반 양인의 경우,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고 과거에 합격만 하면 양반이 되어 출세를 할 수 있었다.[71] 과거제도는 결국 양반층의 계급 세습을 합법화시킨 것이라는 통념과 다르게 조선대의 평민출신 문과 급제자 비율은 초기 40~50%, 이런 초기 과거급제자 출신들이 문벌을 짓기 시작한 중기에는 점차 낮아져 10%후반대까지 이르렀으나, 양란 이후 다시 비율을 회복해 후기에는 다시 40~50% 비율을 유지했으며, 말기에는 60%에 육박했다는 최근 연구 결과도 있었다.[72](한영우 교수 연구)물론 이들의 상당수가 명예직이나 하급직에 머물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과거에 급제한 것만으로도 출신 지역에서는 명사로 대우받을 수 있는데다, 여타 문명권에서 이런 법으로 규정된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놓아주는 것은 설령 보여주기용일지라도 드물었다. 다만 문과 합격자를 배출한 750개 가문 중에서 36개 가문이 합격자의 53%를 차지하는등 소수의 가문에 과거급제자가 몰려있었으며 1789년 당시 전인구의 2%를 차지하던 서울에서 43%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하는등 지역과 가문의 쏠림현상이 발생하였다.[73]이것은 교육 평등을 법으로 보장하는 사회인 현대와 달리 과거 합격을 위해선 필요한 경전을 구입하기 위한 재산과 이를 공부하기 위한 시간 그리고 출제경향을 위한 정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일반 양인이 문과를 급제하여 바로 양반이 되는 매우 힘들었던 것에 반해 무과라는, 좀 더 입관하기 쉬운 시험이 있었다. 무과에서도 유교 경전 시험이 있긴 했는데 문과처럼 깊게 파는 걸 요구하진 않았고, 그나마 문과에 존재하는 신분제약도 없었다.(서얼 차별같은 거), 다만 승마시험이 있었기에 시간까지는 아니더라도 재산은 꽤 있어야 했다는 실질적인 제약은 존재했다.[74]이렇듯 과거제도를 통해 소수의 귀족가문이 관직을 독점하기도 하였지만 새롭게 인재가 등용되는 측면 또한 분명 존재하였다. 에드워드 W 와그너 교수는 이러한 과거제도의 폐쇄성과 개방성을 조선왕조의 장기지속성의 주요원인으로 꼽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의 국가 체제가 어느 정도 잡혀가자, 신분 체계에 변화가 생긴다.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서 관료를 의미했던 양반이 차츰 세습계급에 가깝게 변모해 간 것. 과거 응시에 있어 재산과 관직이 있는 양반 가문들 및 지주층이 매우 유리했기 때문에 과거 합격과 관직은 세습적 성격을 띄기 시작했으며, 찍어내다시피 한 공신들을 축으로 이루어진 훈구파 성립은 이런 '양반의 계급화' 를 고착화시켰다. 관직이 없어도 공신들에게는 토지가 주어졌기 때문. 그 결과 양반의 자손은 관직이 없어도 양반과 다름없는 대접을 받게 되고, 이것이 과거를 보기 위해 유학을 공부하는 지방의 사족들에게 확대 적용되면서 양반은 점차 하나의 지배계층으로써 고착화되어 간다. 이로 인해 조선은 제도적으로는 양천제를 표방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양반,중인,양인,천인이라는 4계급 사회(반상제 사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양반'이 지배계급으로의 위치가 형성되고, 더 나아가 양반과 양인 사이의 중간 계층인 '중인'의 폭이 넓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반상제 체제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무너진다. 재정 확보가 절실했던 조정이 공명첩 등을 발행하면서 중인, 양인들도 재산만 있다면 양반으로 신분 상승이 이루어졌고, 더욱이 18세기 농업 생산력의 증진과 상업의 발달로 양인들 중 부농들이 나타나면서 이들이 돈을 이용, 편법으로 양반족보를 사들이면서 양반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일단 어떤 방식으로든 양반이 되기만 하면 어느 정도 조세 압박을 회피할 수 있었으니[75] 양인들이 부자건 아니건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꾀한 것. 이런 양반 수의 급증은 결과적으로 국가 재정의 부족을 초래, 이후 19세기 삼정의 문란을 야기하는 근본 원인이 된다.[76]

애초 관료를 일컫던 용어였던 양반은 세습계급화되어 양인 위의 지배계급으로 고착화됐으며,[77] 조선 전기에는 총인구의 5%에 불과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철종 시대에는 전 국민의 70%가 양반이 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일본 학자 사카타 히로시가 유학이라는 품계를 양반으로 잘못 기재한 통계적 오류이며, 실제 양반 비율은 1910년의 전국 호구조사에서 확인이 되는데, 총 가구(家口) 수 289만 4,777호 가운데 양반이 5만 4,217호로 전체 인구의 겨우 1.9%에 불과했다. 그나마 충청남도가 전체 가구 수의 10.3%로 가장 양반이 많았고, 충청북도(4.5%), 경상북도(3.8%), 한성(2.1%) 그리고, 전라북도(1%) 순이었다. 여타 도는 모두 1% 미만이고 양반이 많았던 고을은 경북 경주군(2,599호), 충남 목천군, 경북 풍기군(지금의 영주), 충남 공주군 순이었다. 경상북도와 충청도, 한성(서울)에 양반들이 집중되어 있고 그나마도 전 인구의 5%를 넘지 못했다. 조선후기의 화가 김득신(金得臣, 1754년~ 1822년)의 풍속도를 보아도 전형적인 양반-평민-노비의 모습이 보이는등 실제 양반이라 할수있는 대가세족(大家世族)은 큰 변동이 없었던것으로 보인다. 다만 단성호적을 살펴봤을때 서얼,잔반등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양반층은 1910년의 호적보다는 많은 10~20% 내외로 추정한다.

조선시대는 서얼계층이 양반으로 편입되고 부유한 평민들이 서원과 향교에 출입하는등 양반의 폭이 넓어지는등 신분간 편차와 차별이 완화되는 조심을 보였으나 한편으로는 노비의 비중이 크게 증가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에 전인구의 10%에 지나지않던 노비는 고려말을 거치면서 전인구의 30%가 넘게 되었는데 양란을 겪은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전인구의 50%가 넘게 되었다.조선 후기로 들어가면서 노비의 비중은 서서히 줄어드어 다시 인구의 30%정도로 변화하는데 이는 단성호적에서 잘 드러난다.

노비가 이렇게 많았던 것은 대토지를 보유한 양반관료계층이 농사에 필요한 노비를 늘리기 위해 경국대전에 종천법을 명시화하였고 갖은 꼼수를 부려 농민을 노비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양반들이 얼마나 노비에 집착이 심했는지 조선 초의 소송은 대부분 노비송사였고 족보를 조작해 양민을 자신의 노비를 만드는것도 서슴치 않았다. 특히 가뭄과 같은 재해로 농사를 망치면 굶주린 양민들은 자발적으로 양반집 노비로 들어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는데 문제는 한번 노비가 되면 그 신분을 벗어나는건 거의 불가능했다.임진왜란 후에는 그나마 납속책으로 노비신분을 벗어날수 있었지만 그 이전에는 노비가 양민이 되는건 하늘의 별따기 같은 일이였다.

양민의 감소와 노비의 증가로 조선은 만성적인 세금부족과 병역자 감소에 시달렸고 왕실도 바보는 아닌지라 이를 타개하기 위해 종천법을 종모법이나 종부법으로 바꿔 어떻게서든 노비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지배계층인 사대부들의 반발로 실패에 그첬고 일천즉천법이 주류를 이루었다.당시 사대부들은 많게는 수천명에서 적게는 수십명까지 노비를 가지고 있었는데 세종의 8번째 아들인 영응대군은 무려 만명에 가까운 노비를 거느리기도 하였다.다만 이것은 금계필담의 내용이라 다소 과장된것으로 보인다.야사집을 제외한 상속문서를 살펴본다면 홍문관 부제학이었던 이맹현은 노비 757명, 퇴계이황이 367명의 노비를 자녀에게 상속하였으며 중소가문인 전의 이씨가문이 18세기 중반까지 노비를 100명 이상을 보유한것으로 추론할때 유력한 사대부가는 천여명정도의 노비를 소유했을것으로 예상된다.

조선 시대 신분을 소재로한 안드로이드 게임이 존재한다.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hooncom.WANG

9. 군사

조선 초기의 군사제도는 1)오위(五衛)·금군(禁軍)으로 대표되는 중앙군과 2)익군체제(翼軍體制)·진관체제(鎭管體制)로 대표되는 지방군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중앙군은 고려의 제도를 대부분 받아들여 십위체제(十衛體制)를 유지하다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사병을 혁파하고 군사제도를 정비하여 1457년(세조 3)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지휘하의 오위제도(五衛制度)로 정착되었다. 오위는 의홍위(義興衛)-중위, 용양위(龍驤衛)-좌위, 호분위(虎賁衛)-우위, 충좌위(忠佐衛)-전위, 충무위(忠武衛)-후위로 구성되어 있고, 각 위마다 5부(部)로 편성되고, 부마다 서울의 5부와 각 도의 진관군사가 소속2)되었다. 오위는 졸(卒)-오(伍)-대(隊)-여(旅)의 조직으로, 1오는 5졸, 1대는 5오, 1여는 5대로 하는 5진법에 의하여 편성되었다.

또 다른 중앙군의 하나인 금군은 국왕을 직접 호위하는 군대로 오위에 속하지 않았고, 내금위(內禁衛)·겸사복(兼司僕)·우림위(羽林衛) 등으로 인원수는 적었으나 왕권강화와 직결되어 필요에 의해 설치되고 법제화되었다.

지방군은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곳에서 대체로 육수군(陸守軍)과 기선군(騎船軍)의 두 가지 형태가 있었다. 육수군은 다시 번상(番上)하여 시위하는 시위패(侍衛牌)와 지방의 여러 영(營)이나 진(鎭)에 부방하는 영진군(營鎭軍)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영진군은 각 도의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와 그 밑의 절제사(節制使)·첨절제사(僉節制使)가 지휘했다.

다른 지방군의 하나인 잡색군(雜色軍)은 영·진이 주로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설치되어 내륙지방에 방어할 군사가 없어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향리·관노·무역백성(無役百姓)·공사천(公私賤) 등을 망라하여 편성한 것이다. 잡색군은 마병(馬兵)과 보병(步兵)으로 나누어 25인을 1대(隊)로 편성하여 수령이 지휘하도록 하였으나, 평상시 군사훈련에도 참가하지 않아 유사시에 대비하여 전국적 군사조직체계를 갖추었다는 데 의의가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군사조직은 1455년(세조 1)에 진관 체제로 정비되었다. 먼저 전국적으로 내륙지방에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위의 여러 읍을 좌·우·중의 3익으로 분속시켜 군익도를 편성하는 한편 군익도체제가 불편한 곳에는 별도로 독진(獨鎭)을 두어 이원체제로 운영하게 했다. 1458년(세조 4)에는 행정구역상의 도(道)와 혼동하기 쉽던 군익도의 조직을 주진(主鎭)·거진(巨鎭)·진(鎭)으로 재편하여 각 진의 독자성을 살리면서 군사기지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하였다. 진관체제는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의 주진 아래 첨절제사(僉節制使)가 여러 진을 통할하는 몇 개의 거진을 두고, 여러 진의 절제도위(節制都尉)[78]·만호(萬戶) 등이 진을 중심으로 스스로 적을 방어하는 책임을 지는 자전자수(自戰自守)의 체제를 가지게 되었다. 1464년에는 번상군(番上軍)·영진군·익군 등으로 통일되지 않았던 명칭을 정병(正兵)으로 통일하여 균일한 국방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정병 외에도 봉족, 혹은 보인이라는 역종이 있었는데 이는 군대에 나가지 않고 대신 물품[79]을 내거나 일을 도와주어 군대에 나간 정병 집안의 생계를 돕는 역할을 하였다.

16세기에 이르러 진관 체제는 진관에 속한 정병이 군역과 요역을 함께 지면서 각종 폐단이 발생하자 포를 내고 군역을 지지 않는 방군수포(放軍收布)로 변질되고, 외세의 침입을 각 진관의 소수 병력으로 자전자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쟁이 일어나면 도내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합심방어하는 제승방략체제(制勝方略體制)를 강구하게 되었다. 제승방략체제는 많은 군사력을 동원하여 적을 막는 총력방어태세로서의 이점이 있으나, 후방지역은 군사가 없어 방어선이 무너지면 적을 막을 방도가 없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왜란 때 이일의 상주전투, 신립의 충주전투에서 패전한 뒤 후방군이 없어 일본군이 한성으로 쉽게 진격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의 군사제도는 중앙의 오군영(五軍營)과 금군, 지방의 속오군(束伍軍) 체제로 특징지을 수 있다. 오군영은 조선후기에 수도 및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훈련도감(訓鍊都監)·어영청(御營廳)·금위영(禁衛營)·총융청(摠戎廳)·수어청(守禦廳) 등이다.

훈련도감은 1598년(선조 31) 10월 서울 수복 후 포수(砲手)·살수(殺手)·사수(射手)의 삼수병(三手兵)을 중심으로 기민(飢民)구제와 정병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임시군영이었으나, 왜란 후에는 오위를 대신하여 후기 중앙군의 핵심군대로 자리잡았다. 훈련과 조직은 명나라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속오법(束伍法)에 따라 개혁하여 과거의 대부대 단위 전투형태에서 초단위(哨單位)의 소부대단위 전투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속오법은 부(部)-사(司)-초(哨)-기(旗)-대(隊)-오(伍)로 연결되는 편제로, 대개 120~125인의 병력이 군사조직의 기본단위인 1초를 이루었다. 다른 군영과는 달리 정기적으로 급료를 받는 받는 직업군인 위주로 편성되었다.

어영청은 번상하는 향군으로 편제된 중앙군으로 인조반정 뒤 후금에 대한 대비책으로 설치가 논의되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을 계기로 중앙군으로 정착되었고, 1652년(효종 3) 어영청으로 개편되었다. 금위영은 1682년(숙종 8) 병조에 직속되어 있었던 정초청(精抄廳)의 정초군과 훈련도감에 속하여 있던 훈련별대(訓鍊別隊)를 합쳐, 6도 향군을 근간으로 조직·편제되었다. 총융청은 1624년 이괄의 난 이후 경기도 일대의 방어가 중요하게 되어 경기도 내의 정군·속오군(束伍軍)·별마대군(別馬隊軍)으로 조직·편제되었고, 군사는 2만여 명에 달하였다. 수어청은 1626년에 남한산성을 개축하고, 이를 중심으로 경기도 남방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친위군은 호위청(扈衛廳)과 용호영(龍虎營)으로 정비되었다. 호위청은 1623년 인조반정을 주도한 김류(金瑬)·이귀(李貴) 등이 반정에 사용한 사모군(私募軍)을 거의 그대로 궁궐숙위에 충당함으로써 설치되었다. 용호영은 조선전기의 금군을 모아놓은 금군청(禁軍廳)을 1755년(영조 31)에 개칭한 것이다.

조선후기 지방군사제도의 두드러진 변화는 속오군 조직의 등장과 영장제도의 설치였다. 속오군은 훈련도감과 같이 왜란시 임시로 설치된, 양반에서 공·사천에 이르는 총동원체제로 서 지방의 핵심군으로 국난을 타개하였다. 이러한 속오군은 병자호란 후 양(良)·천(賤)으로 편제되어 본역 외에 속오역을 지는 일신양역(一身兩役)의 폐해가 발생하였고, 1729년(영조 5)을 전후하여 천례화(賤隷化)되었으며, 말기에는 수포(收布)·수세군(收稅軍)으로 존재하여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영장제도(營將制度)는 문신수령이 가지고 있던 군사권을 무신이 담당하도록 한 것으로 1627년(인조 5)에 후금에 대비해 속오군을 강화할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수령의 반발·재정부족·유능한 무장 결핍 등의 이유로 병자호란을 계기로 문신수령 중심의 훈련체제로 바뀌었다. 이밖에도 해안과 내륙지방의 요지에 방어영(防禦營)4)을 설치하여 방어사가 집중적으로 지키게 하였다. 또한 산성의 중요성이 높아져 별장을 배치했으며, 해안·강안의 요해처에 도(渡)·진(津)을 설치하여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10. 인구

태조 시기600~650만
세종 시기800만
성종 시기911만
중종 시기1000~1100만
선조 시기1400~1500만
인조 시기1200만
숙종 시기1600~1700만
영조 시기18,660,000명 (1758년)
고종 시기1800~2000만[80]
처 요망

14세기태조5,500,000~5,700,000명
15세기태종5,700,000~6,200,000명
세종6,200,000~7,100,000명
세조7,300,000~7,900,000명
성종7,900,000~9,100,000명
16세기연산군9,100,000~9,700,000명
중종9,700,000~11,700,000명
명종11,700,000~12,800,000명
17세기선조11,500,000~14,100,000명
광해군11,200,000~11,500,000명
인조10,600,000~11,200,000명
효종10,900,000~11,400,000명
현종11,400,000~13,200,000명
18세기숙종13,100,000~16,500,000명
영조16,800,000~18,700,000명
정조18,000,000~18,400,000명
19세기순조16,200,000~18,600,000명
헌종16,500,000~16,600,000명
철종16,500,000~16,900,000명
20세기고종16,800,000~17,300,000명
출처 : 인구대사전 <표 3-4> 연도별 조선시대 인구 추정치, 1392-1910

전근대의 인구자료를 정확하게 통계낼 수는 없으므로 위 자료는 모두 추정치이다.

11. 얘깃거리

요재지이》 등에서는 근처에 신선들이 사는 움직이는 섬이 있다고 나온다. 그 외에 조선에서 온 히로인이 등장하는 등, 중국에서도 은근히 인기있는 곳이었던 듯. (나쁘게 나온 곳이 없다)

이미 모에하렘을 깨우치고 (구운몽), 호질 등에서 현실은 시궁창의 이치를 깨달았던, 어떤 의미에선 앞서가던 나라. 일지매에서는 여자들이 뻑갈법한 여자 뺨치는 미모의 성격 더러운 미남 캐릭터를, 임꺽정을 통해서는 느와르물의 뿌리를 보여주었으며, 홍계월전에서는 남장여자 용자물을, 방한림전에서는 남장여자 동성결혼을,[81] 금오신화에서는 인간과 귀신의 귀접현상을 연상시키는 끈적한 사랑을 그려냈다. 심지어는 실제로 후타나리마저 존재했으며 (예:사방지) 민담에 따르면 결박 플레이를 즐긴 사람도 있었다. 게다가 수간을 즐긴 사람들도 실록에 존재, 또한 성군 세종의 며느리 봉씨는 레즈비언이었다. 그 외에도 작자 미상의 춘화에는 3P 플레이가 나오고, 성애신이 엄청나다(…)

한편으로는 각종 흉흉하고 음침한 이야기도 많았다. 조선 초기 일본인만 골라 죽인 살인마 이야기라든가 조선 중기에 어린아이가 잔혹하게 살해당한 이야기 등이 기록되는 등등… 하여간 기록하나는 정말 넘치도록 남긴 시기였다.

조선의 왕은 엄청난 업무량을 감당해야하는 고노동 직책이었다. 조선의 국가 분위기상, 늘 끊임없이 공부하고 강론받고 하는 등의 자기 수련을 해야했다. 게다가 정책 하나 정하려면 먹물 좀 꽤나 먹은 양반들이 키배로 덤비는데, 조정에 있는 양반들도 수두룩 빽빽인데, 지방에서도 꽤나 한다 하는 먹물들이 상소로 태클을 걸어왔다. 위에 설명했듯이 왕이 그냥 추진하면 추진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이상적인 정치로 신하들 뜻을 존중해야하니.. 이를 논리적으로 논박해야하는 등의 부담도 심했다.[82] 게다가 왕은 늘 몸가짐을 바르게 해서 모범이 되야했기 때문에 누가 없는 자리에서도 딱히 편하지 못했으며, 밥 먹는 시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해야했다(...) 한글 만들고, 과학 기술 점검하고 농업 정책 연구하는 등의 업적을 남긴 세종의 건강이 여러모로 좋지 않았던 것이 이해가 간다.

여담이지만 희대의 먼치킨(…) 국가이기도 하다. 평범한 지나가던 선비 A가 신궁 수준의 활솜씨를 떨친다던지, 지나가던 스님요괴를 불공으로 날려버리기도 하고, 평범한 아낙네가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거나, 농부환상종한테 플래그를 꽂는 등… 특히 중국, 일본에선 대요괴인 구미호가 조선에서는 위에 열거한 사람들한테 나왔다 하면 목숨 건지기에 급급하다.

12. 참고 자료

12.2. 조선의 왕들

12.3. 조선의 왕비들

12.5. 조선의 유적들

12.6. 정치, 행정, 군사 제도

12.6.1. 법률

12.6.3. 정치 행정 조직

  • 내금위 - 지금의 대통령 경호실에 해당
  • 내명부 : 궁녀 관리 부서
  • 내수사
  • 내시부 : 환관 관리 부서
  • 비변사
  • 삼사 - 항목 2 참고.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 사간원
    • 사헌부 - 지금의 감사원에 해당
    • 홍문관
  • 서운관 → 관상감(세종대왕 때 개칭) : 지금의 기상청에 해당
  • 정원 - 지금의 대통령비서실에 해당
  • 의금부 - 지금의 검찰+국가정보원에 해당
  • 의정부 - 지금의 국무회의에 해당
  • 춘추관 - 조선 시대에 둔 시정의 기록을 맡아보던 관아. 지금의 국가기록원에 해당
  • 충훈부 - 조선시대 공신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던 관서. 지금의 국가보훈처에 해당
  • 한성부(판윤) - 조선왕조 수도(首都)의 행정구역 또는 조선왕조 수도를 관할하는 관청의 명칭. 지금의 서울특별시청에 해당

12.6.4. 지방 행정 조직

12.7. 교육, 학술

12.7.3. 사상

12.8. 조선의 000

12.9. 조선을 배경으로 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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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1897년부터 1910년까지는 대한제국
  • [2] 고조선은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현재 고조선이라고 일컫는 거지, 본래 명칭은 조선이었다. 마찬가지로 후백제, 후고구려의 명칭도 백제, 고려였지만 편의상 후백제, 후고구려로 일컫는다.
  • [3] 국호를 조선으로 한 것은 1393년 음력 2월 15일이며,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었고, 1910년 8월 29일 일본 제국에 강점되기 때문에 약간(13년간)의 차이가 발생한다.
  • [4] 예를 들어 궁에 고자인 내시가 일하는 걸로 확립된 게 고려 말 중원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다. 이전까진 내관이라 하여 하급 문관이 내시의 역할을 대신했으며, 사고로 인해 (가령 개에게 중요부위가 물렸다건가...) 고자가 된 인물만을 내시로써 사용했다. 그외 적자와 서자, 정부인과 첩의 개념이 확고히 정립된 것도 고려 말.
  • [5] 당시 원나라 유학 중 가장 성행하던 학문. 북송주희(주자)를 거치면서 완성됐으며, 불교와 도교의 심성론과 종교적 요소를 유학에 도입하였다. 그로 인해 유학에 종교적 성향이 강화됐다.
  • [6] 성리학은 절대로 종교가 아니며 단지 종교적인 요소를 반박하지 않았을 뿐이다. 실제로 당대 사대부들도 위급상황에는 자주 도교나 불교에 의존하였다.
  • [7] 베트남도 원래 국호가 남월이었던 것을 19세기청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 월남으로 바꾼 일이 있다.
  • [8] 백과사전에서는 라코룸을 화령이라고 한다고 하지만 원사 지리지에 나와 있는 정식 명칭은 화령로(和寧路)였다. 정확히는 화령로가 화령로도총관이 관할하는 상위 행정구역이었고, 그 아래에 화림, 즉 카라코룸이 있다. 사실상 둘을 병용하기도 했고.
  • [9] 물론 공민왕 역시 카라코룸을 욕보이기 위해서 화령을 썼을 가능성은 낮게나마 존재하긴 한다만, 그보다는 원래 이 지역이 고려의 화주(和州)였다는 역사적 배경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 [10] 성조(聖朝, 이성계)께서 천명을 받아 화령과 조선으로써 명나라에 주청하니 이에 황제가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였다. 무릇 화령의 뜻은 일찍이 듣지 못하였다. 혹자는 "영락제 연간에 아로태(阿魯台)을 봉하여 화령왕(和寧王)을 삼았는데, 그 후에 화령과 올량합(兀良哈)이 모두 와랄(瓦剌)에게 병합되었다. 영락제가 북방을 정벌한 것은 아로태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한 것이니, 화령은 원나라의 옛 땅이다. 원나라의 위소(危素)는 "원태조(칭기즈칸)가 창업한 땅이라 하여 《화령지(和寧誌)》를 지었으니, 족히 그 증거를 삼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오랑캐의 지명으로 국호를 주청할 리는 없을 듯하다. 《동사(東史)》를 상고하건대, 고려 우왕(禑王) 9년에 태조가 변방을 안정시킬 계책을 올린 가운데, "동쪽 경계에 있는 화령의 땅은 도내(道內)에서 가장 땅이 넓고 풍요합니다."라고 한 말이 있다. 그 다음해에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화령부(和寧府)에 오매, 임언충(任彥忠)을 파견하여 간곡히 효유하여 보냈는데, 길이 막혀 반 년을 머물렀으니, 대개 화령은 쌍성(雙城)에서 요동(遼東)의 개원부(開原府)로 직통하는 요충지이다. 그러니 그 땅은 실로 성조가 창업한 땅으로서 이른바 '적전(赤田)'이 이곳이니, 국호를 화령으로 주청한 것은 혹 이 연유가 아니겠는가? - 성호사설 권15, 화령
  • [11] 3대에 걸친 왕조에 버금가는 세습독재를 펼치고 있으니 어울리는 명칭일지도.
  • [12] 인터넷 상에선 환빠나 일빠들이 자주 쓰는 단어기에 이런 용법에 이를 빡빡 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 [13] 대한민국에서는 6.25 직전에 법률로 "'조선'은 지명으로 쓰지 못하고 '한', '대한'으로 고쳐 쓴다"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다분히 북한의 국호를 의식해서 제정한 법률이므로, '조선'이라는 용어를 역사 공부 차원이 아닌 현실에서 남용한다면 (예, 조선해협, 조선반도) 오해를 받을 여지가 있다. 다만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의 경우에는 조선이란 단어를 일상에서도 종종 사용하는 걸 볼 수 있다.(예 : 외래어 남용하는 손자에게 할아버지가 조선 사람이 조선 말을 써야지 등)
  • [14] (예)한국인: 조선은 14세기말에서 20세기초까지 존재했던 왕국이야./중국인, 일본인, 베트남인, 말레이시아인, 싱가포르인: 무슨 소리야? 지금도 있잖아? 참고로 몽골에서는 Солонгос(솔롱고스)라고 부르기 때문에 '조선'이라는 명칭과 연관성이 적으며, 냉전기 우방이었던 대만은 '南韓', '北韓', '韓國'을 쓰기 때문에 논란에서 제외 대상이다.
  • [15] 조선 건국은 1392년이므로 실질적 개국 초기는 1400년이며, 조선 변동의 기점이 되는 임진왜란 역시 정확히 개국 200년만인 1592년에 발생했다. 또한 세도정치의 기점이 되는 정조의 죽음은 정확히 떨어지는 1800년이다. 사림이 성장하여 훈구와 충돌한 무오사화도 1498년 발생했으며, 숙종 최후의 환국인 갑술환국은 1694년 발생했다. 실제로 민음 한국사의 시대구분이 이 방법을 따르고 있다.
  • [16] 다만 이 때의 사림 세력은 훈구파와 비하면 중앙조정에서 그 기반이 약했기에, 훈구의 자손들을 사림으로 끌어들이거나 사림에 호의적인 훈구의 지원을 받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 [17] 무오사화에서 처벌받은 사림은 적었으며, 훈구도 함께 타격을 입었다. 갑자사화의 경우, 사림 이전에 훈구가 대놓고 집중 타겟이 됐다. 당시 사림의 세력이 훈구에 비해 작았던 것도 이유로 들 수 있다.
  • [18] 당시 동서분당의 원인으로는 구 훈구파에 대한 처우의 문제가 컸다. (이에 따르면 동인은 강경파에 서인은 온건파에 해당한다.) 참고로 초기의 동인과 서인은 결코 대등한 세력은 아니었다. 동인이 다수 소장파에 해당했으며, 서인은 소수파에 불과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인의 외연이 더 넓어져 그나마 동인에 대항할 만큼의 세를 갖추게 되었던 것.
  • [19] 대개 남인 혹은 서인으로 전향했다.
  • [20] 정묘호란 당시 침략한 후금의 군세는 3만여 정도였고 개전 초반부터 협상을 요구했기에 형제관계를 맺고 교역을 활성화시키는 정도로 끝났다. 그러나 병자호란은 조선의 완전한 신종을 추구했으며, 이는 조선이 친명배금 정책을 상당부분 포기했더라도 반드시 불거져야했던 충돌이었다.
  • [21] 강화도 포대가 완비된 것도 이때.
  • [22] 이는 19세기 삼정의 문란이 야기되는 근본적 원인이 된다.
  • [23] 이후에도 소론, 남인 인사들이 탕평의 이름으로 기용되긴 했으나 노론에 맞설 만큼의 실권이 없었다.
  • [24] 당시 정조가 적극 기용한 남인들 중에 정약용으로 대변되는 실학자들이 몇몇 포진해 있었기에, 이것이 정조가 실학자들을 후원해 국가 개혁을 꿈꾸었다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정조 항목 참조.
  • [25] 하지만 오히려 기록파기에도 제일 열심히 노력했던게 조선이다. 성리학적 가치관에서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관점의 기록이 존재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
  • [26] 조선시대는 세종대왕으로 요약이 가능 하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세종때 만들어진 제도를 조선 후기까지 죽어라고 우려먹었다. (...) 나중에 이것 저것 제도가 개정되고 추가된 것은 기존의 제도로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나라가 헬게이트가 돼버려서다. (...) 역시 깨우친 임금. 단 인권과 같은 문제는 유교 및 성리학의 가르침에 경도되었던 정도전과 같은 집권층의 기본 사상적 경향이 가장 중요했으며, 세종대왕에 이르러 개국 초기의 어수선함을 극복하고 제반 제도를 안정화시킨 것이다.
  • [27]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조선해군의 주력이었던 판옥선은 해안 방어의 목적을 주로 하고 있으니 제발 유럽 해군 vs 조선 해군이 어떻게 되냐는 질문은 하지말자. 시간낭비다.
  • [28] 일각에서는 최초의 비행기라느니 주장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작동 원리를 보면 비행기가 아니라 행글라이더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 [29] 노비를 가축과 같이 생구(生口)라고 불렀다는 점에서 가축과 같은 취급을 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가축이나 노비만이 아니라 같은 집에 살고 있으나 가족이 아닌 사람, 예컨대 식객 등도 생구라고 불렀다. 오히려 가축을 사람처럼 여겼다는 의미도 될 수 있다. 동물권? 실제로 왕이 우유로 만든 타락죽타락한 사람들이 먹는 죽을 즐겨 먹자 대간들이 어찌 불쌍한 송아지의 젖을 훔쳐 드시옵나이까~~!라며 들고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이건 좀 대간이 지나치게 나간 면도 있지만.
  • [30] 박상길이란 이름의 백정에게 양반 둘이 고기 한 근씩을 사러 왔는데, 똑같이 한 근을 주문했는데도 두 양반이 받은 고기의 양이 다른 것이다. 적게 받은 양반이 어이가 없어서 따졌더니, 박상길 曰 "크게 자른 고기는 '박 서방'이 자른 고기고, 작게 자른 고기는 '상길이 놈'이 자른 고기입죠." 큰 고기를 받은 양반은 아무리 천한 백정이어도 자기보다 나이가 많고 처자식도 있는 입장이라 예의를 갖춰 대했는데, 작은 고기를 받은 양반은 새파랗게 어린 양반이 "상길아 고기 한 근 줘라~" 라면서 하대를 했다는 것이다.
  • [31] 그러나 이런식의 지배층의 대한 희화하는 어느 문화권에서나 발견되는 것이므로 이런 몇몇 풍자의 사례로 조선시대를 평등하였다, 혹은 하층민들의 사회적 발언권이 충분하였다고 주장하는건 근거가 부족한 이야기이다.
  • [32] 개항기의 서구인들의 시각에는 그들이 '서구화되지 않은 모든 국가'를 미개국으로 인식해 버리는 경향이 있음을 인식하고 읽어야 한다.
  • [33] 즉, 남편에게도 출산휴가를 준 것이다.
  • [34] 근대 이후의 전반적인 세계 여성 인권은 "세계 인권 사상사" 참고
  • [35] 그런데 이전 서술에는 "유럽에서는 장애인은 도태된 생물 혹은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겨 일찍부터 이들을 사회적 차원에서 격리해야된다는 주장들이 있어왔으며, 이것이 나중에는 정점을 찍어 장애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일도 일어난 것에 비해 대단한 인식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다."라고 되어 있었는데 자국 역사에 자부심을 갖는건 그럴 수 있다쳐도 타 문명권에 대해 근거없는 사견을 담아 비교하는건 피하자. 애초에 유럽이란 범주 자체가 너무 넓고 무슨 국가를 말하는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영국만 예로 들어도, 종교적 인식을 바탕으로 장애인들을 신과 가까이 있는 위치 또는 저주를 받은 것 등의 인식을 갖고 있었지만 장애인들이 사회적으로 엄청난 차별을 받은건 아니다. 이전 서술자는 아무래도 장애인들을 학살한 나찌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은데 그러면 애초에 시대가 맞지 않는다. 유럽 전역에서 장애인들을 격리시키고 아무렇지도 않게 죽였다는 서술은 분명 그른 것이다. 조선을 추켜세우기 위해 애먼 유럽 국가들을 싸그리 비하하진 말자. 그리고 영국, 프랑스 등 주요 유럽 국가에서도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위 관직에 오른 사람들은 많으니 조선에서 든 예조차도 그렇게 적절하다고 보기가 어렵다. 더욱이 당시에는 장애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조차도 현재에는 장애로 분류되는 등 기준이 다르다는 것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 [36] 보통 일반적인 나라는 500년을 버티지 못한다.
  • [37] 조선이 임진왜란에서 패배했다면 꼭 200년만에 멸망했을 것이다.
  • [38] 다만 양란때 나라가 바뀌거나 했어야 했는데 그상태 그대로 500년이나 지속되서 이모양 이꼴이 됬다는 입장도 존재한다.
  • [39] 그나마 한 세대 뒤인 동학농민운동 때처럼 수령을 죽이지 않고 다른 고을로 번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중앙통제권은 유지되고 있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하간 양란을 마주한 조선도 이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조선이 두 전쟁을 거치고도 망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 [40] 남북한을 포함해 대략 1970년대에 중국을 국민소득 면에서 확고히 앞질렀다고 본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이후로 잃어버린 10년을 겪은 중국은 크게 발전했다.
  • [41] 하지만 이 뛰넘었다는 것은 개인당 평균 소득이나 소비경제 및 소비문화가 앞섰다는 것이지 국력으로 뛰어 넘었다는 것은 아니다. 한반도에 있는 국가가 대륙의 통일국가보다 더 강한 국력을 가졌던 적은 유사이래로 한번도 없다.
  • [42] 일례로 명의 대신들은 조선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조선 측에서 가져오는 것 이상의 엄청난 비용을 지출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겨서 조공 관계를 폐지하자고 주장했지만 명의 황제는 위에서 설명한대로 그렇게 하면 큰 나라의 위엄이 서지 않는다면서 조공 관계를 지속한다.
  • [43] 유목에 근간한 원나라 시기 고려가 바치는 조공은 한족 국가에 바치는 조공에 비해 가혹했으며, 일본 원정에 동원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만주족의 근간도 유목왕조였기 때문에 호란 이후 중국 전역을 지배하기 전까지는 조선에게 막대한 공물을 뜯어갔으며 이것도 조선으로는 피눈물 나는 일이었다.
  • [44] 사실 청의 베이징 접수 이후 남명으로 어느정도 가능할 뻔 했지만... 남명이 망했다.
  • [45] 이때 사람들은 명에 공녀로 가기 싫어서 심사장에서 미친 척에 병신흉내에 난리가 아니였다. 이를 보고 사신이 '원나라 때 고려에서는 서로 여자를 들이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요샌 왜 이럼?'이라고 한탄하는 기록도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려 시대때 죄다 원나라로 가길 원한건 아니었고. 고려 시대에 비해 조선 시대때 상대적으로 더 가길 싫어했을 뿐, 고려 시대때도 대부분의 백성들은 강제로 낮선 타지에 끌려간다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표했다.
  • [46] 순장이란 악습은 한반도에선 삼국시대에 이미 없어졌다. 이러한 악습은 중국 내에서도 사라져야 할 풍습 취급을 받았지만 유목민족들은 이를 꾸준히 유지했고, 중국의 황제가 죽었을 때 함께 순장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이민족들이 종종 나타났다. 요나라 같은 경우에는 순장의 여부가 주요 정쟁의 소재가 될 정도다. (황후보고 같이 황제 가는길에 따라가라는 신하들과 신하들이 먼저 순장되어라 하는 황후의 대립이 의외로 빈번했다. 속내는 정치적 투쟁이었겠지만.) 여진인이 주류인 금나라는 좀 덜했지만, 몽골인이 세운 나라인 원나라 전후로 대대적인 순장이 다시 나타났다가 명나라 초기에 없어졌다.
  • [47] 일례로, 조선은 여진이 강성해질 기미가 보이면 항상 예방전쟁을 행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으로 명의 경제적 손실과 조선의 심각한 전국토 황폐화로 명의 견제와 조선의 예방전쟁을 받지 않아 누르하치가 후금을 크게 키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누르하치 하의 따오르는 후금이 그리 쉽게 당하진 않았겠지만, 적어도 후대의 청나라로 발전하기는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조선이 여진을 상대로 행하던 예방전쟁의 수준도 과대평가 해서는 안되지만, 말이 예방전쟁이지 정벌이라고 부를 정도로 장난이 아니었다.(...)
  • [48] 고려도 예방전쟁이라면 조선보단 못했지만 꽤 하는 수준이었다. 예로 대마도 정벌이라던가.
  • [49] 조선시대의 예절과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보면 상상도 못할일이다. 실제로 조선 시대의 사관들은 송나라를 무시한 고려를 깠다.
  • [50] 물론 국력 차이가 있으니 실질적으로 목소리가 더 큰 건 사실이지만.
  • [51] 다만 단순히 하늘에 대한 제사 이상의 의미를 지닌 소격서를 유교가 아닌 도교식 제사라며 폐지하자고 주장을 한 조광조 같은 인물도 있던 걸 보면 이런 교조적인 성리학사상이 이전에도 이전에도 없던 건 아닌 듯 하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중종을 제후왕으로 깎아내리는 사대주의적 발언까지 했을 정도로 조광조는 교조적이었다. 물론 조광조는 지나친 교조주의와 이 발언 포함 왕에게 무례한 발언으로 결국 중종에게 사사된다.
  • [52] 이제와선 동북공정이니 뭐니 하는 역사왜곡을 하지만 실제로 쑨원같은 혁명가들도 '청'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 식민지라고 주장했다.
  • [53] 출처는 이헌창 저 한국경제통사, 단위는 둘 다 만 명이다.
  • [54] 당시의 일본은 시코쿠와 큐슈, 그리고 혼슈의 절반이 좀 넘는 정도를 지배하던 시절이다.
  • [55] 당장 일본 도쿄한반도의 남쪽인 부산광역시위도가 거의 같다. 비도 더 많이 온다. 일본에서는 비가 드물어야 풍년, 한반도에서는 비가 많이 와야 풍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
  • [56] 해상 무역로의 장점도 뛰어난 편이긴 하나, 육지로 이어진 무역로라는 점은 생각보다 엄청난 이점이다.
  • [57] 다만 절대량적 측면에서, 조선과 명의 공무역적인 성격을 띄는 조공무역에서 조선을 따라갈 나라는 없었다. 중개무역으로 번영했던 류큐도 조선의 1/4에 불과하다. 의외로 조선왕조 자체는 상업을 증진시키려는 노력을 꽤나 했다. 몽골침략과 명의 해금정책으로 국내무역이 개판이 되어서 그렇지...
  • [58] 다만 알아두어야 할 부분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 역시 운이 크게 작용했다는 부분이다. 일본도 물론 근대화를 반대하는 세력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허나 일본은 그것을 내전이라는 형식으로 끝내버렸고, 이 내전에 서양 열강은 포이의 항쟁, 로호에 의한 2차 아편 전쟁, 남북전쟁 등으로 간섭할 겨를이 없었다. 반면 우리나라는 근대화에 있어서 임오군란을 위시로 중국과 일본의 간섭이 상당했다는 점에서 시대적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 [59] 비단 조선만이 아니라도 군사력을 중심으로 정변을 일으켜 세워진 나라는 초반에 군권을 확실히 제약해 둘 필요를 겪었다.
  • [60] 비슷하게 군사력을 버리고 용병으로 대체한 고대의 상업 국가들은 문치 대신 상업에 힘을 투자한 차이점이 있다. 근본적으로 조선이나 고대 유명 상업 국가들이나 군사력을 버린 이유는 쿠데타 위험 때문이다. 다만, 상업 국가들은 쇼미더머니의 힘으로 용병을 고용하면 된다는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유교적 관점에서 1:1의 대등한 관점으로 용병 계약을 맺는 건 상상도 못할 일.
  • [61] 대마도 원정이 조선측 피해만 컸고 효과가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교전 자체만 따지면 조선측이 의외의 피해를 입은 격이긴 하나 대마도 원정 이후 왜구가 직접적으로 조선을 공격하는 사례는 성종때까지 크게 감소한다. 효과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수준.
  • [62] 인조대부터 꾸준히 축조되어 현종조에 지금의 수준까지 올라왔다.
  • [63] 북벌론이 한창일 때는 훈련도감 5천+훈련별대 1만 3천까지 증가했었다.
  • [64] 근대적 재정의 주요 개념 중 하나가 '재정의 일원화'이다. 반대로 말해 근대 이전엔 재정부처 한곳에서 국가의 모든 재정을 총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건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근대 이전 유럽도 그렇다.
  • [65] 사실 이것도 군사력이나 무기 문제가 아니라 시대가 갈수록 인구가 증가하면서 인간이 호랑이의 영역이었던 곳까지 진출하는 과정에서 증가한 경우이다. 거기다 호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살생을 제한하는 불교를 기반으로 하는 고려에 비해 거기에 대한 터부같은 것이 없고 오히려 인간 중심적이었던 유교를 국교로 한 조선에서는 호랑이를 제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호랑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게 된 것이다.
  • [6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8&aid=0000230240
  • [67] 양반이라는 이름 자체가 무신 관료를 일컫는 무반(武班)과 문신 관료를 일컫는 문반(文班)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 [68] 양인은 일반 평민이고, 천인은 노비로서 인간이 아닌 사물이나 양인의 재산으로 취급 받았다.
  • [69] 고려도 제도적으론 양천제를 표방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양인 내에 권세와 지위에 따라 귀족, 향리가 지배계층으로 존재했다.
  • [70] 고려가 귀족사회로 일컬어지지만 전대의 통일신라나 삼국시대처럼 귀족이라는 계급이 확고불변한 계급은 아니였다. 사실 고려도 그 이전 시대에 비하면 신분간 상하 이동에 대해 개방적인 모습을 보였다. 자세한 건 고려 항목 참조
  • [71] 이는 고려도 보장하긴 했으나 '실질적'인 면에서는 조선대의 유연성이 더 높았다. 고려의 지배층들(후대에 문벌귀족이라 불리는)의 결집도가 높았던 데다 고려의 직접적 행정력과 법제적 기반이 조선처럼 전 국토에 미치지 못한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 [72] 조선사 전체로 확대하면 평민 급제자 수는 전 과거 급제자 중 1/3에 이른다.
  • [73] 조선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 일조각, 2007
  • [74] 참고로 고려는 무과시험이 거의 없었다. 근데 군공을 세우긴 더 쉽긴 했는데, 이는 조선에 비해 전쟁과 변란이 많았기 때문이다.
  • [75] 조선 초기의 조세는 조용조 체계였는데, 이중 전결에 매기는 '조' 를 제외한 나머지 둘은 인두세다. 그런데 양반은 이런 인두세가 면세다.
  • [76] 양반 수의 증가 등으로 재정이 악화되자 조정은 인두세가 아닌 재산세 중심으로 조세를 개편하였으나 이 또한 완전치 못했으며, 결국 18세기에는 고을별로 세금액을 규정하고 그만큼 거둬가는 총액제가 실시된다. 이에 부족한 세금은 피지배계층인 상민층에게 집중되어 갔고, 이후 19세기 세도정치까지 겹쳐 삼정의 문란을 이끌게 된다.
  • [77] 관료를 지칭하는 건국 초에는 그 수가 2천여명에 불과했다. 당시 조선의 평균적인 추정 인구치가 4~500만인 점을 감안하면, 전체 인구의 0.1%도 안 됐던 것.
  • [78] 거의 각 현의 현감이 겸임하였다.
  • [79] 보통 베나 무명을 내었다고 한다.
  • [80] 대한제국의 인구는 호구조사에서 1200~1300만인데 이는 정확한 자료가 아니다. 이전 시대의 추정치와 비교해보면 당연히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 [81] 다만 서로를 향한 감정이 '애정'이라기보다는 '우정'에 가깝다는 점은 감안되어야 할 부분이다.
  • [82] 다만 정조의 경우는 신하들을 가르치고 논박하는 것을 꽤 즐긴 편이었다고 한다(...) 타고난 키배꾼 呵呵
  • [83] 훗날 일제 강점기 및 대한민국 도청 소재지로 굳어진 곳도 다수 있다. 사실 감영이 현재의 도청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 [84] 돈의문 밖에 있었다.
  • [85] 서울시가 서울특별시가 될 때 경기도청은 서울에서 수원으로 이전하였다.
  • [86] 상주에 있다가 선조 34년(1601년) 대구로 이전. 현 경북도청 소재지.
  • [87] 현 전북도청 소재지
  • [88] 순조 때 2차례, 철종~고종
  • [89] 충주에 있다가 선조 35년(1602년) 공주로 이전
  • [90] 이시애의 난 이후 예종때 쓰다가 성종 1년(1470년) 다시 영안도로 복귀. "“함흥 사람 이중호 등이 이시애의 당류(黨類)가 되어 차마 악역(惡逆)을 저질렀으므로 그 죄가 깊고 중한데, 그 고을 이름을 그대로 두었으니 악(惡)을 징계하는 뜻에 어그러짐이 있습니다. 영흥(永興)은 본래 계수관으로 우리 태조가 탄생하신 땅이고 어용을 봉안한 곳이니, 청컨대 길주(吉州)의 예에 의하여 함흥은 호를 강등하여 군을 삼아 전일에 나누어 붙인 토지와 인민(人民)을 각각 본고을에 돌려보내고, 영흥은 승격하여 부(府)로 만들어 부윤(府尹)을 차정(差定)하고, 다시 토관(土官)을 설치하고, 인하여 영흥(永興)과 초면(初面)의 대관(大官)인 안변(安邊)의 호를 들어서 본도를 개칭(改稱)하여 영안도(永安道)라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성종 1년 기사)
  • [91] 연산군 4년 함경도로 굳어짐.
  • [92] 함흥에 있다가 선조 33년(1600년) 영흥으로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