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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현

last modified: 2015-04-04 12:29:08 Contributors

10년만에 친정팀으로 돌아가 현재 KIA 수석코치로 활약중

KIA 타이거즈 No.76
조계현(趙啓顯)
생년월일 1964년 5월 1일
국적 대한민국
학력 군산상고-연세대학교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8년 해태 타이거즈 1차 지명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1989~1997)
삼성 라이온즈(1998~1999)
두산 베어스(2000~2001)
번호 26번(해태 1989)
17번(해태 1990-1997)
27번(삼성 라이온즈)
14번(두산 베어스)
77번 (기아,삼성 투수코치)
71번 (LG 수석코치)
76번[1] (KIA 수석코치)
지도자 경력 KIA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2003~2005)
KIA 타이거즈 2군 투수코치 (2005)
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 (2006~2008)
삼성 라이온즈 1군 메인 투수코치 (2008~2009)
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 (2009)
두산 베어스 1군 투수코치 (2010)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 (2010)
두산 베어스 1군 투수코치 (2011)
LG 트윈스 수석코치 (2012~2014)
LG 트윈스 2군 감독 (2014)
KIA 타이거즈 수석코치 (2015~)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26번(1989)
조계현(1989) 이대진(1993-1999)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7번(1990-1997)
강만식(1982-1988) 조계현(1990-1997) 곽현희(1998-2004)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7번(1998 ~ 1999)
김훈(1997) 조계현(1998 ~ 1999) 남기헌(2000 ~ 2001)
두산 베어스 등번호 14번
조계현(2000~2001) 고영민(2002-2010)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7번(2006 ~ 2009)
김종모(2001 ~ 2004) 조계현(2006 ~ 2009) 김종훈(2010 ~ )

Contents

1. 소개
2. 고교 시절
3. 현역 시절
4. 코치 생활
4.1. KIA 타이거즈 시절과 삼성 라이온즈 시절
4.2. 두산 베어스 시절
4.3. LG 트윈스 시절
4.4. 다시 KIA
5. 연도별 주요 성적
6. 여담

1. 소개

해태 타이거즈에서 활동하던 투수이자 기아 타이거즈의 수석코치. 4월 23일 김기태 감독이 사퇴한 이후, 5월 11일까지 18일간 수석 코치 보직으로 감독 대행을 맡다 양상문 감독이 선임되면서 2군 감독으로 보직변경되었으나, 김기태가 기아 감독으로 부임하자 LG를 나와 다시 친정팀의 수석코치로 복귀했다.

한국 최고의 싱커볼마스터이자, 90년대 중반 최고의 콩라인. 93,94,96 3번이나 골든글러브 2위득표자가 되었다.

2. 고교 시절

야구명문 군산상고 출신이다. 고교시절인 1981년 1학년일때 이미 초고교급 선수로 이름을 알렸으며, 팀을 대통령기에서 우승시켰다. 1982년 북일고와 맡붙은 청룡기에서는 당시 또다른 초에이스급 선수였던 성수와 결승전에서 1:1로 12회 완투+ 다음날 다시 연장전을 계속하는 강행군을 하는 무지막지한 혹사를 당하면서도 결국 팀을 우승시켰다.

그러나 이런 무지막지한 혹사 때문에 성수는 완전히 야구인생이 맛이 가서 평범한 선수로 전락했다가 소리없이 사라졌고, 조계현도 어깨가 맛이 가서 파이어볼러에서 평범한 구속의 투수로 전락했다. 혹사와 관련하여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당시 한일고교야구 정기교류전이 있었는데 3차전 내내 혼자 마운드를 책임지다 시피하여 2승 1패를 거뒀다. 당시 감독이었던 경북고 수갑 감독이 라이벌팀 에이스를 일부러 굴렸다는 얘기가 있었을 정도. 혹사로 인해 연세대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타자로 전향도 고려했다고. 그러나 연세대학교 재학 후반부에 조계현은 팔색조 변화구라고 불리는 다양한 구질을 연마하여 변화구+컨트롤 위주의 기교파 투수가 되었고 이것 덕분에 그는 전성기 못지않은 투수 시절을 보내게 된다.

3. 현역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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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1988년 농협 입단 사진

실업야구 농협 야구단에 1년간 몸을 담고 나서, 이듬해인 1989년에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1988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실업 팀에 입단한 듯.

선수 시절.

선동열, 이강철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 마운드의 3인방 중 한 축이었으며, 통산 320경기에 등판해, 126승 92패 17세이브에 평균자책점 3.17을 기록했다. 전성기에는 유난히 LG 트윈스에 강해서, 1993년 ~ 1995년에[2] LG를 상대로 12연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특히 1993년 LG 김태원[3]과의 맞대결은 1980년대 선동열최동원 못지 않은 명승부였고, 엘지 해태의 3연전 모두 잠실야구장이 매진되기도 했다. 조계현의 LG전 연승은 1995년 이상훈과의 선발 맞대결에서 이상훈의 1-0 완봉승으로 간신히 마감됐다.

1992년까지는 셋업+마무리로 입단동기 이강철에 비해 큰 활약은 하지 못했지만 1993년 그가 만개했다. 선동열이 마무리로 내려가면서, 선발투수로 보직을 바꾸는데, 17승6패 방어율 2.15로 다승왕에 방어율 4위 등.. 게다가 한국시리즈 2승으로 해태의 V7를 견인했던것..

1994년은 그의 전성기였다. 그해에 해태는 LG의 맞대결에서 7승11패를 당했다. 하지만 그중에 5승의 조계현이였다. 81승을 올리며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신바람 야구 LG에게 유일한 저승사자가 있었으니 그건 조계현이었던 것!!

고로 2년 연속 다승 1위를 하였다.

95시즌은 부상으로 인해 2달가량 출장을 못하며 9승에 그쳤으나[4].. 이상훈의 트리플크라운을 저지하면서 1.71로 방어율왕에 올랐다.

96시즌 93이나 94랑 비교되지만 그해 못지않게 압도적인 투구를 보이며 1점대를 늘 유지하지만.. 마지막에 2점대를 찍고 그걸 만회하려던 최종전에서 부친상을 당해서.. 결국 2.07에 16승을 찍고 끝난다. 97년에는 전만 못한 기량을 보인데다가 이순철,이건열 등과 같이 항명사건에 가담했기 때문에 김응용에 찍혀서 결국 삼성 라이온즈로 현금 4억원에 트레이드되고 만다.

(출처 : 포토로)
순탄치 못했던 삼성 라이온즈 현역 선수시절

즉 완투형 투수로서 전성기에도 선동열의 도움을 비교적 적게 받으면서 타자와의 수를 즐기면서 완투를 즐기던 투수였던 것..


고교시절이나 프로 입단 초기엔 투 스트라이크 이후 유인구를 던지지 않고 곧바로 타자와 정면 승부를 했을정도로 공격적인 스타일이었으며, 이전 타석에서 홈런을 맞은 구질을 같은 타자에게 결정구로 사용할 만큼 파이팅이 넘치는 투수였다. 싸움닭이라는 별명은 이런 에피소드로 얻은 것.

1996년의 활약을 마지막으로 이대진, 김상진 등 신예 에이스들이 나타나면서 그의 입지는 좁아지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김응용 감독의 눈밖에 나서[5] 시즌이 끝나고 삼성 라이온즈로 현금트레이드됐으며 여기서 1998 시즌과 1999 시즌을 보냈지만 98시즌은 5선발 정도로 평범했고, 99시즌은 말 그대로 퇴물이나 다름없던 모습을 보여서 방출되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해태 시절 인연이 있던 김인식 감독의 부름을 받아 두산 베어스로 이적하였다.지금은 킬인식라 부르지만 사람보는 눈 하나는 타고났다

(출처 : 포토로)
서글펐던 과거 시절을 잊고 활기찬 모습을 선보였던 두산 베어스 현역 선수시절

두산 베어스에서는 예전만큼의 성적을 내지는 못했지만 팀의 정신적 지주로 활약하기도 했다.[6] 단 삼성 시절은... 잊자.


이름 가운뎃글자가 을 떠올리게 하는 '계'인데다 '변화구의 마술사', '팔색조', '싸움닭' 등의 별명을 얻은 탓에 팬들 사이에서는 투수코치로 있을 때 투수진이 망가지면 조닭이라고 부르며 깐다.[7]

4. 코치 생활

4.1. KIA 타이거즈 시절과 삼성 라이온즈 시절

(출처 : 포토로)
6년만에 친정팀 코치로 다시 시작된 KIA 타이거즈 코치 시절, 영영 못볼줄았던 그가 10년만에 돌아왔다.

(출처 : 포토로)
7년만에 다시 밟게되었으며 코치생활이 제일 길었던 삼성 라이온즈 코치 시절

은퇴한 후 2002년에는 KBS 해설위원으로 있었고 2003년부터 2005년까지 KIA 타이거즈의 투수코치로 활동했으며,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코치로 활동했다. 이 당시의 평가는 그리 좋지 못했는데, KIA 투수코치 시절에는 김진우에게 너클볼을 장착시키려다 제대로 망한 전적이 있고 삼성에서는 윤성환을 조련시킨 것을 제외하면 잉여 투수들을 올리고 털리느라 팬들로부터 까였다. 특히 조닭의 행보가 절정에 달한 2009 시즌에는 조현근-최원제-김상수 + 박성훈-차우찬, 소위 조원수박차라 불리는 화약고 미완성된 투수들을 심심할 때마다 올리고 털리는 일을 반복하여 팬들의 분노가 폭발했다.[8]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투수코치로 있을 때 성장한 윤성환은 조계현과 마찬가지로 빠른 구속보다 뛰어난 제구력으로 타자와 승부하는 타입이다. 하지만 윤성환은 다양한 변화구보다는 속구-커브의 투 피치로 타자와 승부할 때가 많다는 게 차이점.

이후 김용국과 함께 2009 시즌 후 삼성의 코치직에서 짤렸고 삼성 팬들은 만세를 불렀다. 그의 후임으로 오치아이 에이지가 온 후 삼성의 불펜진이 철벽 포스를 내뿜기 시작하자 조계현에 대한 평가는 더더욱 바닥으로 떨어졌다.(김용국은 나중에 류중일이 요청하여 복귀하긴 했지만....)

4.2. 두산 베어스 시절

(출처 : 포토로)
9년만에 코치로 돌아왔으나 초단기 코치생활에 흑역사를 안긴 두산 베어스 시절 코치님 여기서 시구하시면 안됩니다!!!

2010 시즌에 두산 베어스의 코치로 부임했는데, 선발-불펜 할 것 없이 두산의 투수진을 초토화시켜 놓는 위업을 달성했다. 용병들과 김선우를 제외하고 선발진이 모조리 개박살났으며, 패전조의 경우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결국 롯데의 양상문, 한화의 이상군, 기아의 이강철과 함께 KBO 최악의 사대천왕막장투수코치로 꼽혔으며, 두산에서도 2군으로 밀려난 후에야 겨우 두산 투수진이 기사회생했다.

하지만 2011년 5월 이후부터 다시 1군 투수코치로 올라왔다. 헌데 그전에 올라왔던 사람이 윤석환이었기 때문인지 이전보다는 평판이 조금 나아졌다. 예로 노경은-김강률 등의 투수들이 구위가 개선되며 호투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이에 일부 두산팬들이 호감을 표하기까지 했다. 노경은의 구속이 150km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이버 용병투수 르난도 니에베 역시 초반과 달리 불펜에서 각성해서 맹활약하였다. 페르난도의 초반 부진 이유는 성실하고 싹싹한 더스틴 니퍼트와 달리 투수코치들의 투구 조언을 잘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조계현이 그 자리에서 변화구를 몇 개 던져주니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마운드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을 꼽는다면 일단 투수들을 다독여 주고, 격려해 준다는 것.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기존의 윤석환이나, 달감독같은 경우 도망가지 말고 맞더라도 "걍 네 공 믿고 가운데 찔러넣어"를 주문하며 타자와 피하는 투구를 하는 투수들을 갈군다면, 조계현은 "괜찮어, 슬금슬금 던져, 변화구 가르쳐 준것도 쓰고..." 하면서 조용히 다독이는 편이라 한다.

어쩌면 직구앓이, 파워직구 위주의 두산 투수들에게 변화구를 가르치면서 슬금슬금 피하면서 승부하는 법을 가르쳐준 것이 두산 투수진에게 활력소가 되었던 듯. 2009년까지 직구위주의 공격투구를 했던 김선우가 2010 시즌 이후로 여러 구종을 장착하면서 팀의 에이스로 급부상했던 것도 조계현의 덕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대다수의 두산 베어스 팬들은 3~5선발 이후를 말아먹은 장본인으로 조계현을 꼽고 있다. 혹사로 기껏 발굴한 투수들이 나가떨어지는 것은 계속되고 있으며, 변화구를 잘못 장착시켜 두산 투수들의 구속이 일괄적으로 5km씩 감속했다는 비판도 있다. 결과적으로 두산이 2011 시즌을 말아먹는 데 한 몫 했다는 것이 대다수의 평.

4.3. LG 트윈스 시절

LG 코치 시절.

2011 시즌이 끝난 후 두산 베어스의 코치직에서 사임하고 DTD 올림픽대표팀에서 코치로 함께한[9] 김기태가 불러서 LG 트윈스의 수석코치로 임명되었다. 여태 맡았던 투수코치가 아닌 만큼 과연 어떤 활약을 할 지 우려기대를 받았다. 그런데 정작 시즌이 개막한 이후 별다른 언론 노출도 없었으며 투수 기용 및 관리에 있어서도 주로 차명석 1군 투수코치가 부각되는 등, 투수 쪽에 개입하기보다 성질 부리는 감독 달래기수석코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듯하여 까이지 않았다. 아예 잊혀진 수준

2012년 9월 12일 SK 와이번스전에는 5살 연하인 김기태 감독이 경기를 포기하는 것을 말리다가 맞을 뻔(..)한 사건이 있었다. 다음날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나타난 걸 보면 심각한 것은 아닌 것 같지만..


2013년 팀의 성적이 좋아지면서, 김기태 감독을 잘 보좌하고 있는 것 같다는 평가가 나왔다. 감독이 야수지명타자 출신인 만큼 투수 출신으로서 이것저것 조언해준 듯. 물론 투수진의 안정화는 차명석 코치의 공이 크지만...

2014년 4월 23일, 김기태 감독이 갑작스럽게 사퇴했지만 구단이 사퇴를 수리하지 않은 상태이고 여전히 엔트리에는 김기태 감독이 올라와 있어서 사실상 감독대행이지만 공식 직함은 여전히 수석코치인 어정쩡한 상태에서 팀을 이끌고 있다.

LG 프런트 측에서는 조계현에게 감독제의를 했으나, 김기태 감독과의 의리를 지켜 사양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 조계현이 사실상 감독대행역을 하면서도 처음부터 자신을 "수석코치"로 못박아 둔 것을 보면, 일부 조계현까들이 주장하는 대로 겸손을 가장한 언플은 아닌듯 하다. [10]어쨌든, 기대한 성적반등은 없었지만, 한달도 안되는 기간동안 백창수를 1군에 꾸준히 기용한 것만큼은 호평을 받고 있다.

2014년 5월 11일, 양상문 감독이 선임되고, 5월 12일 LG 트윈스 2군 감독으로 보직이 변경된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 투수코치로 차출됬다.

4.4. 다시 KIA

김기태가 2015년부터 KIA 타이거즈의 감독을 맡게 됨에 따라 김기태를 따라 친정 팀 KIA 타이거즈로 팀을 옮기게 되었다. 10년만에 고향 앞으로 보직은 똑같이 수석코치. 당초 KT 위즈에서 2군 감독으로 영입을 타진했지만 김기태가 KIA의 감독직을 맡게되면서 고민 끝에 KIA 타이거즈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조계현이 KIA로 옮기자 KT 위즈두산 베어스에서 2군 감독을 맡고 있었던 황병일을 2군 감독으로 내정하였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기록.

역대기록
년도소속팀ERA 경기 완투 완봉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1989해태 타이거즈 2.84 31 7 0 7 9 4 0 174 153 3 68 5 97
1990 3.28 30 10 5 14 13 0 0 178 1/3 144 8 78 3 130
1991 3.25 21 1 0 9 9 0 0 130 1/3 100 6 46 8 75
1992 2.94 37 3 1 10 6 12 0 156 123 13 54 5 98
1993 2.15 28 10 4 17 6 1 0 196 1/3 141 8 51 7 118
1994 2.61 27 14 5 18 5 0 0 210 171 12 62 6 135
1995 1.71 19 4 0 9 6 0 0 126 97 2 37 6 59
1996 2.07 27 11 3 16 7 0 0 191 2/3 145 12 45 7 116
1997 3.71 25 2 1 8 9 0 0 114 111 11 29 7 71
년도소속팀ERA 경기 완투 완봉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1998삼성 라이온즈 5.21 29 2 0 8 11 0 0 150 1/3 171 19 64 12 94
1999 11.51 12 0 0 0 3 0 0 20 1/3 36 5 12 3 16
년도소속팀ERA 경기 완투 완봉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2000두산 베어스 3.74 16 0 0 7 3 0 0 89 81 7 26 5 53
2001 5.28 18 0 0 3 5 0 0 87 99 7 33 5 38
통산 3.17 320 64 19 126 92 17 0 1823 1/3 1572 113 605 79 1100

6. 여담

모 성우랑 심히 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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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2014 마무리 캠프 때에는 임시로 81번을 달았다.
  • [2] 결정적으로 이 기간은 LG 트윈스전성기였다.
  • [3] 1993년에 조계현과 김태원의 맞대결은 세 차례 있었는데 각각 0-0 무승부(더블헤더 1차전), 조계현의 1-0과 2-1의 두 차례 1점차 승리였다. 당시 김태원은 141.1이닝 방어율 2.42라는 엄청난 호성적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조계현과의 맞대결에서 전혀 승리를 챙기지 못하는 등 불운이 겹쳐 시즌 8승에 그치고 말았다. 결정적 요인은 조계현과의 맞대결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 [4] 이건 이종범이없는 타선의 무기력함도 있었다.
  • [5] 하와이 전지훈련 중 이순철,송유석,김정수,이건열, 정회열 등과 같이 항명사건을 터뜨린게 원인이었다. 결국 이 선수들은 1996-1997시즌 사이에 대거로 정리된다. 단 김정수 만큼은 예외, 어느정도 사건수습을 했기 때문에 비교적 오래 살아남았는데 이 덕인지 2000년 김응용 감독의 추천을 통해 SK로 이적했다.
  • [6] 당시 김인식 감독에게 재활신 별명을 붙여주게 한 사례 중 하나
  • [7] 투구동작 시 다리를 반대쪽 다리 위로 꼬아서 내려오는게 닭싸움하는 듯한 모습이라 싸움닭이라 하기도 함
  • [8] 이후 위의 잉여 라인(...)에서 조현근최원제는 군대를 갔다 와도 여전히 성장하지 못했고, 최원제는 결국 타자로 전향했다. 투상수박성훈넥센 히어로즈로 트레이드되었다. 그나마 차우찬이 터지긴 했는데, 이쪽도 2011년부터 2012년까지 투구 밸런스를 잃으면서 또 헤매야 했다. 뭐가 터진 걸까
  • [9] 사실 삼성에서 1999시즌에 한솥밥을 먹기도 했었다.
  • [10] 수석코치는 대체로 두종류가 있다. 하나는 감독이 자신을 보좌하기 위해 데려오는 경우고 두번째는 감독을 중간에 잘랐을 때, 보험을 위해 프런트에서 선임하는 경우이다. 전자의 대표적인 경우가 조계현, 그리고 2011년 선동열이 KIA에 부임할때 데려온 이순철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계현이 김기태가 사라진 이후 감독대행을 계속 맡기도 좀 껄끄러웠을 것이다. 올해 LG를 맡아 감독이 되는건 자신의 커리어에 해가 될 가능성도 상당히 높았기도 하고.. 후자의 범주는 2009년 당시 조범현 KIA 감독 아래서 수석코치를 맡았던 김종모, 그리고 2006년 이순철이 LG 감독을 사임한 후, 감독대행을 맡았던 양승호가 있다. (김기태 자신도 박종훈 밑에서 프런트 보험용 수석코치를 했다.) 기아가 해당년에 우승한 후, 조범현의 발언권이 높아지자, 가장 먼저 한 것이 김종모를 자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