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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중동전쟁

last modified: 2015-02-09 14:42:18 Contributors


전쟁 시기 1967년 6월 5일 ~ 1967년 6월 10일

Six Day War
6일전쟁이라는 별명으로 매우 유명하다.

Contents

1. 개요
2. 관련 항목


1. 개요

제2차 중동전쟁에서 압도적인 패전을 당하고도, 정치적으로 승리를 거둔 이집트가말 압델 나세르는 아랍세계의 주도권을 쥐고 이스라엘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며, 야심차게 전쟁준비에 나선다. 소련의 군사고문단과 최신 장비를 들여와 전쟁준비에 나서며, 한편으론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을 물밑지원하면서 전쟁준비를 착착 진행한다. 한편, 예루살렘 서안지구를 두고 충돌을 계속하던 요르단 및 골란고원을 거점으로 이스라엘과 무력충돌을 벌이던 시리아 역시 이집트와 동조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역시 아랍국과의 국경선에서 일부러 도발을 걸며 영토를 확장시키고 있었다. 원래 6일 전쟁 이전의 이스라엘 영토는 상당히 작았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러한 좁은 영토 때문에 적대적인 아랍 국가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영토 형상의 문제 상 임시수도인 텔아비브가 조금만 밀리면, 함락돼서 국토가 양분될 지경이었을 정도로 중부 이스라엘 쪽 땅이 취약했다. 이후 6일 전쟁에서 승리하며 얻어낸 땅을 합쳐도 남한 크기에 못 미쳤고, 가장 큰 적인 이집트와의 화해 및 현실적으로 인구문제 상 관리가 힘든 시나이 지역을 돌려주면서, 현재 영토는 남한의 1/4 도 안된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빠져나갈 구멍을 둔 도발을 행했다. 예를 들어 상호간에 비무장지대로 합의했던 곳에 경작용 트랙터를 끌고 들어가는 등의 수단으로 아랍 병사들의 선제공격을 유도했다. 아랍 병사들이 경고사격이라도 하는 순간에 국지전으로까지 전투가 확대되는 등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제2차 중동전쟁 이후로, 이스라엘은 자국의 정보력을 모조리 쏟아 부어 주변국의 상황을 면밀히 조사하며 전쟁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인적자원의 불리함과 좁은 영토 때문에, 장기적인 소모 방어전에 유리하지 않은 이스라엘은 선제타격론으로 대표되는 예방전쟁이 군의 주요 전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이집트는 실제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는 분석이 많다. 제2차 중동전쟁인 수에즈 전쟁에서 나세르는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에게 군사적으로 크게 패하고도 정치적으로 큰 승리를 얻었다. 때문에 나세르는 이번에 이스라엘에 대한 무력시위를 통해 강력한 압박을 줌으로써, 이스라엘의 국제적인 입지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례로 이스라엘의 항구로 향하는 선박을 봉쇄하라는 지시를 받은 이집트 공수부대는 대전차화기, 대공포, 해안포는 배치했지만, 실제 봉쇄에 중요한 기뢰는 전혀 부설하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당시 이집트군은 예멘에서 벌어지던 왕당파와 살레의 공화파 간의 내전에 정규군 절반이 파견되어 있었으며, 심각한 손실로 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1] 또한 당시 공군 원수인 압둘 하킴 아메르 원수의 무능함은 이루 말할 길이 없었다. 경직된 지휘체계와 무능력한 아메르로 인해, 이집트 공군은 공습으로부터 전투기를 보호할 쉘터 하나도 짓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 압둘 하킴 아메르는 이미 2차 중동전쟁 당시에 이스라엘의 공격이 임박했음에도, 모든 보고를 무시한 채 술과 노래로 세월을 보내며 태업을 한 무능의 대명사로서, 그 대가로 이집트는 수에즈 일대에서 참혹한 패배를 당해야 했다.

대(對)이스라엘 압박용으로 시나이 지역에 이집트군을 전개시켜 놓긴 했지만, 이는 블러핑 용으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압박과 아랍권 전역에 보여주기 위한 쇼였다. 특히 이스라엘을 집중 타격할 것으로 보였던 3국(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들 중에 그나마 이스라엘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은 요르단으로, 요르단 국왕 후세인은 대표적인 평화주의자였고, 이스라엘에 대하여 유화적인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지만, 당시 이집트가 주도했던 언론플레이에 전(全) 아랍권이 광분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친(親)이스라엘적 태도를 취했다가는 정권이 위태로운 처지였다. 요르단군은 이집트군의 전쟁개시에 따라 군사행동을 하기로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소나마 전쟁준비가 되어있긴 하지만, 실제 이집트는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기에 요르단의 준비는 헛된 것이었다. 그리고 시리아군은 쿠데타에 가까운 정권싸움 때문에(…) 이스라엘 공격(혹은 방어)에 대한 아무런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이러한 시리아군의 태도는 6일 전쟁 발발 이후로도 계속되었는데, 초기 이스라엘의 기습을 받고도 언론플레이로 거짓 승리를 보도한 이집트 덕분에 계속 정권싸움을 하고 있었고(…), 이집트군의 패퇴 이후에는 다소 방어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UN에 의한 정전협정이 발효되자 다시 정권싸움을 시작하였다.

이집트 정보부는 해안봉쇄가 시작되며 이스라엘 내부에서 선제타격을 준비한다는 것을 포착했지만, 이 정보 역시 경직된 조직 탓으로 상부로 전달조차 되지 않았다. 아무튼 형식적이지만 이집트의 해안 봉쇄가 시작되자, 이스라엘의 여론은 매우 심각해진다. 사실 이집트도 '아랍의 소리'란 라디오 방송으로 중동 여론을 선동하고 있었으며, 이 방송은 해안 봉쇄가 시작되자 이스라엘의 멸망을 부르짖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중동과의 협상을 준비하려던 장관이 실각하고, 선제타격론파가 정권을 잡는다. 그리고 이스라엘에는 동원령이 내려지기 시작한다.

미국이나 유럽은 실제로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적다고 예측하고 있었다. 다만 소련이 문제였다. 소련이 이집트를 지지한다면, 중동의 문제는 제2의 베트남이 될 판국이었다. 그러나 이집트는 소련에게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연막을 치고 있었고, 다른 아랍국들 역시 자신들의 정보를 서로 공유하고 있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지난 18년간 불리한 전세를 한 번에 역전시킬 선제타격론 교리가 연구되어 있었다. 만약 개전 48시간 동안 상대의 공군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면, 사막에서의 전쟁은 이긴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만약 이집트가 먼저 선제타격을 가해 이스라엘의 공군력에 큰 타격을 준다면, 좁은 영토와 부족한 인적자원을 가진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이 될 꼴이었다.

그리고 6월 5일, 사전에 철저하게 조사한 레이더 기지의 교대시간을 노려, 이스라엘 공군은 아랍 연합군 중 최대 전력을 자랑하던 이집트 공군에 대한 기습폭격을 가했다. 약 3시간에 걸친 폭격으로, 이집트 공군은 450여대의 항공기 중 300여대를 상실하고, 공군기지와 레이더 기지 등을 모조리 잃는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단 3시간 만에 이집트 공군력의 80%를 격파한 것이다. 이후 이스라엘 공군기들은 이집트 영토를 오가며, 그야말로 이집트군을 초토화시키며 돌아다니게 된다. 그 이후 벌어지는 일련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최종적으로 자국영토의 3배애 달하는 영토를 점령하는 기염을 토해 현대전사(現代戰史)의 전설을 만들게 된다.

이집트 육군은 이스라엘군의 번개 같은 진격을 받았다. 물론 이집트 육군에 바보들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 제2차 중동전쟁 당시 돌파되었던 구역인 시나이 반도 방면 이스라엘 국경선의 중앙부와 남부에 강력한 병력을 모아둔 상태였다. 이들은 해당 방면으로 이스라엘군의 공격이 들어오면, 반격해서 꺾어버리고 이스라엘의 좁은 남단부 영토를 관통해서 요르단과 직접 연결한 다음, 이스라엘을 본격적으로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은 이번에는 국경선의 북부에서 강력한 공세를 해서 돌파에 성공했으며, 이후 아부 아게일라 전투에서 패하면서 시나이 반도의 전군이 포위당할 위험성에 빠지자 패주(敗走)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하지만 이미 그 시점에 이스라엘군은 수에즈 운하에 도착한 뒤였다(…).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는 개전 뒤 1시간이 지난 후부터 요르단군과 이스라엘군의 교전이 발생했다. 서로 예비군을 주축으로 하여 지루한 대치전 양상을 보이다가, 7일을 기점으로 이스라엘군이 전차를 동반한 부대가 강습하며 엄청난 혈전이 벌어졌다. 물론 요르단군은 그 명성답게 가장 정예화되고 훈련도가 높은 군대라, 이스라엘군이 초반에 매우 힘들어했지만, 장비가 부실하고 제공권을 상실한 처지라서, 결국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이스라엘군이 점령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함락과 함께 서안에 남은 요르단군은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결국 패주하여 요르단강 동쪽으로 후퇴하게 된다.

시리아군은 뒤늦게 실전에 참가했는데, 이들은 이집트군이 신나게 깨지고 있는 줄은 상상도 못하고 이집트군이 자신들이 승리하고 있다는 자체주장을 정말인 줄 알고 출전(…)했다가, 개전 첫날 이집트군을 개발살내고 돌아온 이스라엘 공군의 기습폭격을 당해, 역시 2/3의 전력을 상실하는 엄청난 피해를 당했다. 일부 지상군은 이스라엘 국내로 공격을 시도했지만, 아랍국들 간의 상호불신과 지휘체계의 혼란으로 대부분 격퇴 당한다. 그러던 와중에 국제사회의 개입을 더욱 빨리 요청하기 위하여, 이스라엘군이 시리아 내부 깊숙이까지 진격했다는 거짓방송을 내보냈으나, 국제사회 개입보다는 전선에서 싸우던 시리아군이 그 소식에 먼저 붕괴되어 버렸다. 결국 그나마 끝까지 남아있던 기갑부대가 요르단강에서 수장당하면서, 아예 지상공격을 포기하게 된다. 이집트와 요르단을 박살낸 이스라엘은 마지막 남은 골칫거리인 골란고원 요새에 대한 전면공격을 결정하고 전력을 투입한다.

골란고원은 해발고도 500m의 바위산들로 이루어진 지역으로서, 엄폐물도 찾기 힘든 척박한 지역이었다. 여기에 두꺼운 콘크리트 요새를 다중 철조망으로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난공불락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스라엘군의 폭격에도 시리아군의 병력 상실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9일 밤 이스라엘군의 진격에 방어선이 뚫리자, 날이 밝기도 전에 모든 병력이 철수해버리고 말았다.

시리아의 이러한 졸전과 이스라엘군의 영토 확장 능력에 놀란 국제사회는 즉각 정전을 요구하였지만, 이스라엘은 이에 대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그러나 아랍세계에서 서방의 영향력이 강해질 것을 우려한 소련의 압박에 못 이겨 이스라엘은 정전(停戰)에 수락한다. 특히 소련은 전쟁 이전부터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적 옵션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이를 알게 된 소련 수뇌부는 소스라치게 놀라 즉시 군사행위를 중지시켰다. 이렇게 된 이유는 소련의 군사압박 역시 아랍권에 대한 립 서비스(lip service)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련 내 강경파 군부는 실제 군사행동을 준비하고 있었고, 이스라엘에 소련이 상륙작전을 실행할 예정이기도 하였다. 다만 소련상륙군에 이스라엘의 폭격이 가해지는 즉시, 소련의 직접 개입을 멈출 수 없는 상황이 되고, 그런 상황이라면 미군 역시 개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었다. 즉 제3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결국 6월 10일 오후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아랍 3국은 중동불패 이스라엘군의 전설을 하나 더 만들어줬다.[2]

6일전쟁의 발발원인은 실제 이스라엘의 예방전쟁적 성향보다는, 이스라엘로서는 이집트(정확히는 나세르 대통령)의 정치적 승리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세르는 언론과 군사적 선계공격의 가능성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궁지로 모는 정치적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선제공격과 승리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정부와 미국 정부는 이집트의 군사적 위협은 실제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고, 이와 같은 굴욕(?)을 견뎌낸다면, 평화를 이어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인내는 바로 이집트의 정치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더불어 이스라엘의 중동지역 내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나세르 역시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할 수 있다는 예상도 하고 있었지만, 이스라엘군의 공세에 이집트군이 어느 정도 방어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이집트군이 방어를 하는 사이에 국제사회의 중재가 개입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국제사회의 중재로 정전이 발효되면, 그것은 그것대로 세계에 대한 이집트의 정치, 외교적 선전에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으니까. 다만 이스라엘군이 예상보다 너무 강했고, 이집트군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무능했다보니, 전쟁은 이스라엘의 완벽한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이 전쟁은 요르단의 입지가 이스라엘이나 아랍 측 모두에게 크게 상승하는 영향을 주었다. 물론 요르단도 풍요로운 요르단강 서안을 날려먹은 데다가 관광수입 측면에서도 예루살렘베들레헴을 상실해서 큰 타격을 입었고, 영토 회복을 위한 모든 노력이 불가능해지는 등의 막대한 타격을 입었으나, 패전의 와중에서도 끝까지 가장 잘 싸운 국가로 인정받았기에, 제4차 중동전쟁부터는 이스라엘과도 암묵적인 우호관계를 맺고, 아랍 측에도 나름대로 군사지원을 하는 등의 양다리를 걸쳐도, 누구에게도 욕을 먹지 않는 위치까지 오르게 된다. 이런 위치는 앞서 언급했듯 제3차 중동전쟁 때까지 이스라엘과의 교전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도록 아랍 측에게 압박받은 것과는 천지차이로 달라진 것이다.

가말 압델 나세르는 종전 3일 뒤 대국민 방송으로 패전의 책임을 지고 하야할 것을 표명했지만, 이후 3주 동안 거리로 국민들이 밀려나와 외치는 "나세르여! 우리를 버리지 마십시오!"(..)라는 아우성에 "그렇다면 국민들의 의사에 따라 다시 복귀하겠다." 고 밝히고 다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나세르의 정적, 이스라엘, 미국 등은 이 같은 과정을 나세르의 정치적 쇼로 분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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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결국 8년에 걸친 내전 끝에, 공화파가 승리하여 왕당파를 몰아내고 북예멘 공화국을 확립하긴 했다만...
  • [2] 오죽하면 이때 활약한 세 다얀 장군과 라빈 장군이 이런 농담 따먹기를 했다는 전설이 있을까. "심심한데 전쟁 한판 또 할까?" "글쎄. 그건 좋은데 오후엔 뭐하고 놀지?" 이래서 제4차에서 처발리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