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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

last modified: 2018-08-20 19:57:00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전쟁 이후

1. 개요

丁卯胡亂

1627년 1월 중순부터 3월 초순까지 만주에 본거를 둔 나라의 전신(前身)인 후금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전쟁.

2. 배경

1616년 만주에서 세워진 후금은 광해군의 적절한 중립 외교 정책으로 큰 마찰이 없이 지냈으나 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뒤 정권을 잡은 인조가 '친명배금' 정책을 표방, 후금과의 외교를 끊었고 요동을 수복하려는 모문룡 휘하의 나라 군대를 평북 철산의 가도에 주류시켜 이를 은연히 원조하였던데다 더 큰 원인이라고도 볼수있는 극악한 식량 부족에 시달려있었던 경제적인 문제도 겹치는 상황인지라 이를 타개함과 동시에 나라를 치기 위해 중국 본토 진입을 위해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정복하여 후환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또한 앞서 서술했듯이 후금은 명나라와의 싸움으로 경제교류의 길이 끊겨 심한 물자부족에 허덕여 이를 조선과의 통교로써 타개해야 할 처지에 있었고, 때마침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의 잔당들이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고, 조선의 군세가 약하니[1]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였다. 조선에 대해 온건하던 태조 누르하치를 이어 집권한 태종 홍타이치[2] 는 이런 여건들로 인해 더욱 결전의 뜻을 굳히게 되었다..

3. 전개

1627년 l월 아민이 이끄는 3만의 후금군은 앞서 항복한 강홍립 등 조선인을 길잡이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공략하고 이어 용천, 선천을 거쳐 청천강을 넘었다. 그들은 '전왕 광해군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걸고 진군하여 안주, 평산, 평양을 점령하고 황주를 장악하였다. 조선에서는 장만을 도원수로 삼아 싸웠으나 평산에서부터 후퇴를 거듭, 그 본진이 개성으로 후퇴하였고 인조 이하 조신들은 강화도로 피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내려가서 분조 활동을 했다.

참고로 정봉수라는 사람이(민간신분) 철산의 용골산성에서 적들과 맹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 항전은 나름 당하기만 한 전황상 의미가 매우 크다. 이후 이립이 의병을 모아 적의 진격을 늦추었다.

황주까지 이른 후금군은 2월 9일 부장 유해를 강화도에 보내 나라의 연호 '천계(天啓)'를 쓰지 말 것,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 등의 조건으로 화의를 교섭하게 하였다. 이에 양측은 화약 후 후금군은 즉시 철병할 것, 후금군은 철병 후 다시 압록강을 넘지 말 것, 양국은 형제국으로 정할 것,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나라와 적대하지 않을 것 등을 조건으로 하여 정묘조약을 맺고 3월 3일 그 의식을 행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측은 왕자 대신 종실인 원창군(성종의 아들 운천군의 증손)을 인질로 보내고 후금군도 철수하였다.

4. 전쟁 이후

사실 후금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3만이라는 적은 병력으로 침략해 왔기에 내부 고립의 위험이 있어 빨리 화약을 맺을 필요성이 있었고, 이로 인해 화약의 내용은 후금 입장에선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3] 그러나 화약을 통해 조선과의 교역을 열어 부족한 물자를 확보하고, 압록강 이남에 군대를 주둔[4]시켜 가도의 모문룡의 명나라 군대와 조선의 준동을 사전 차단함으로써 내몽고 지역 등 근처 유목부족들을 규합, 세를 불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으니 후금 입장에선 성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5]

이후 후금은 자신들의 세를 불려 나가며 1632년에는 '형제의 맹'에서 '군신의 의'로 양국관계를 수정할 것을 요구하면서 많은 세폐를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경제적 부담이 되어왔던 세폐에 대해서는 절충을 시도했지만, 오랑캐와 형제관계를 맺은 것도 굴욕적으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군신의 의'로 전환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절화의 태도를 굳히게 되었다. 그러다가 1636년 다시 후금은 국호를 이라 고치고 사신을 보내 청태종의 존호를 알리고 신사를 강조할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조선은 나라와 전쟁을 선포하고 만다. 결국 이후 12월 나라의 침략으로 병자호란이 발생하고, 이후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흑역사를 남기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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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괄의 난(인조 1년)으로 인해 북방 방어선이 사실상 붕괴되었다.
  • [2] 그는 아버지 누르하치와 달리 조선에 대해 침략과 같은 강경한 대처가 필요하고 보았다.
  • [3] 당시 화약을 주도했던 후금 관리는 이후 목이 잘렸다. 또한 이 당시의 후금이 품은 불만은 이후 병자호란이 터지는 계기가 된다.
  • [4] 화약 내용을 사실상 어기고...
  • [5] 그렇게 불려진 세는 병자호란에서 압도적인 규모로 표출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