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적백내전

last modified: 2016-02-29 09:28:43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발단
3. 전개
4. 절정과 반전
5. 결말
6. 영향
7. 이 시기를 소재로 한 대중문화작품
7.1. 소설
7.2. 만화
7.3. 영화
8. 기타

1. 개요


적벽대전이 아니다

러시아 혁명 직후의 러시아에서 벌어진 전쟁. 원어로는 Гражданская война в России(Russian Civil War)로 표기하며, 21세기 기준으로 공식 명칭은 러시아 내전이다.

전쟁의 시작은 혁명이 일어난 1917년 10월 25일. 실질적인 끝은 흔히 1920년으로 보지만, 백군 일파인 몽골의 미친 남작 운게른 슈테른베르크 같은 경우 1921년까지 버텼으며 공식적인 종결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프리아무르 임시정부가 망한 1922년 10월 25일으로 본다. 최후의 이 사라진건 1923년 6월~10월 쯤이며, 일본이 사할린에서 철수한 걸 따지면 1924년이다.

2. 발단

적백내전의 초기 배경.

1917년 공산주의 혁명(10월 혁명) 이후 대부분의 군대는 셰비키의 휘하에 들어갔지만, 군대에 남아있기보다는 집에 간 병사가 훨씬 많았다. 공산정권이 지주의 토지를 분배하고 있었으므로, 농민 출신의 병사들은 집에 가야만 자기 몫의 토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농촌을 장악하러 간 공산당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로마노프 왕조를 복권시키려는 군벌과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군벌들도 여전히 남아있었고, 혁명 시점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은 러시아의 중심 도시들만 장악했을 뿐인데다가 장악하지 못한 지역이 남아있고 때문에 농촌까지 완전히 지배하려는 레닌에 반발한 반공산진영과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내전이 발발한다.

공산군은 붉은 색을 상징으로 썼으므로 적군(Красная Армия. Red Army), 반공산군은 흰 색을 상징으로 써서 백군(Белая Армия. White Army), 혹은 백위대, 혹은 백색운동이라고 해서 적백내전이라 불리며 백군 외에도 두마(의회)를 폐쇄한 볼셰비키 혁명에 실망한 네스트로 마흐노를 중심으로 남 우크라이나에 활동하는 무정부주의 무장단체를 흑군. 시몬 페틀류라가 이끌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봉기를 녹군, 보프 반 혁명봉기군을 청군으로 칭했다. 색깔놀이 하냐 사실 우리나라의 청군과 백군, 일본에 있는 홍(적)군을 제외하면 운동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에 폴란드, 코사크, 각 지역의 부농들의 사병이나 타타르인과 중앙아시아지역의 이슬람교 등 종교적 봉기세력과 발트, 캅카스 지역의 민족주의 새력 봉기까지 겹치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직들이 적군에 대항했고, 1차대전이 끝나기 이전에는 독일군이 계속 이들을 간접적으로 지원했고, 레닌은 한숨을 돌리기 위해 굴욕적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트로츠키 등의 반대 속에도 강행했다.

게다가 연합국 역시 종전을 전후하여 볼셰비키 정권을 무너트리고, 다시 독일군과 계속 싸우는 정권을 세울 목적으로 반볼셰비키 세력을 지원하면서 전쟁은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된다. 이쯤이면 대략 사면초가.

3. 전개


1917년 말~ 1918년 초까지의 전황.


1918년 중엽 ~ 1919년 초반기까지의 전황

적백내전 초기에는 중앙 라다를 중심으로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적군에 반기를 들었고 [1]돈 쿠반 지역의 코사크도 반기를 들어 러시아 제국의 편에 서서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싸웠던 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적군이 강제로 무장 해제시키려고 들었다가 오히려 역으로 자극시켜 그들이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등의 불리한 전황이 계속되었다.

게다가 협상국(간섭군)은 러시아에 지원했던 장비와 물자, 그리고 협상국 내에 남아있던 러시아 지원용 물자를 백군에게 넘겼다. 이를 통해 백군은 오히려 적군보다 우월한 장비를 보유하게 되었으므로 전투효율이 크게 향상되었으며, 콜챠크의 시베리아 백군은 차차 서쪽으로 점차 모스크바를 향해 오고 있었다.

그때매 워낙 다급한 나머지 적군은 백군이 차르를 되찾고 자신들을 역적으로 선포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1918년 7월엔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니콜라이 2세아나스타샤를 포함한 그 가족들을 전원 처형하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4. 절정과 반전


1919년 적군 최악일 뻔했던 전황 모스크바에서 남쪽에서 거의 60km 앞까지 적이 진격해 함락이 눈 앞이었지만 얼마안가 반격하게 되어 털릴 뻔했다.

허나 1918년 말엔 적군이 사방에 공세를 하나 얼마안가 막히게 되었고, 그 후 백군이 동쪽에서부터 거센 반격을 한지라 한때는 적군이 이대로 망하는 게 아닌가 할 정도였다. 내전 초 부터 시베리아는 물론이고 거의 유럽 러시아도 절반 이상 날아간 시점이었다. 유데니치의 에스토니아 백군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함락이 눈 앞이라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긴 적도 이 때. 게다가 백군은 전차와 항공기를 장비하는 등 적군보다 장비도 좋은 편이었고, 각 부대의 훈련 및 부대 내부의 상하명령체계도 잘 잡힌 편이었다.

허나, 적군이 가장 몰렸을 때도 모스크바 등지의 주요 도시와 거점은 적군이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으며, 각 거점도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 점은 사방에서 몰려들고는 있지만 각지에 분산돼서 통일된 명령체제가 없는 백군보다 확실하게 유리한 상황이다.

이에 더해 레프 트로츠키가 1918년 6월에 강제 징병을 실시하였다. 그 이전까지 적군은 혁명의 지지기반이었던 도시 노동자였으나, 이후로는 빈농에 대해서도 강제 징병제를 도입하였다. 징병제에 대한 농민의 반대는 결처분으로서 억누르고 이를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무리수가 발생했지만 최종적으로는 5백만에 육박하는 병력을 편성, 물량 공세를 펼칠 수 있었다.

그리고 고질적인 지휘관 부족 및 군사적 능력 보충을 위해 과거를 묻지 않고 구제국 장교들을 대거 영입했다(228호 명령). 대표적인 경우가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상급대장이다. 이 사람은 붉은군대에 가담했던 외아들이 반혁명군에 처형당했던 개인적 이유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그를 움직인 것은 바로 폴란드의 소련 침공이었다. 그래서 아예 트로츠키의 군사고문으로 활동하다가 20년대에 은퇴한 후 무사히 자연사했다. 특히 신생 폴란드가 소련을 침공하여 벌어진 소련-폴란드 전쟁 이후 독일에게 나라를 팔아먹었다던 "빨갱이"들이 오히려 조국의 수호자가 되는 기묘한 상황에 처하자, 제발로 붉은군대에 찾아와 가담하는 장교도 많아졌다. 그 외에 로파트킨 대장도 적군에 가담을 하지는 않았지만, 백군의 참가권유를 거부하게 만드는 등 붉은 군대의 전투력을 개선하자 전황은 공산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무엇보다 붉은 군대는 통일된 군사력에 철도도 장악하고 있으니 부대를 이곳 저곳으로 재배치하는데 확실히 유리했다.

이에 반해 백군측은 적군에게 대항한다는 것만 빼면 머리부터 발 끝까지 다른 집단의 합이었으며, 심지어 서로 싸우기도 하는 등 통일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원래 백군의 각 부대는 장비도 좋고 부대 내부의 상하명령체제도 확실했지만 각 부대를 통합지휘할 최고사령관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설령 니콜라이 2세가 죽지 않고 백군이 탈환해가더라도 차르 복위는 언감생심. 아마 주변부는 죄다 독립하고 혼란스러운 임시정부로 돌아갔을 공산이 크다. 게다가 백군은 주로 러시아의 주변부를 장악했기 때문에 장악한 면적에 비해 인구가 적었으므로 백군은 최전성기에도 25만 이상의 병력을 동시에 운용해본 일이 없다. 이래서야 장비가 좋아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설상가상으로 백군 부대가 패하면 가지고 있던 좋은 물자와 장비를 적군에게 내주게 되니 안 그래도 강한 적군이 더 강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백군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적군은 기왕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도 깨졌으니 우크라이나, 폴란드, 핀란드, 그리고 발트 3국 같이 러시아에서 독립을 시도했던 국가들을 흡수하고 더 나아가서는 독일 등지까지 팽창하려는 야심을 보였고, 이는 조약 체결 때부터 레닌의 계획대로 정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발트해 국가들은 연합군(소비에트에게 있어서는 간섭군)과 함께 적군을 몰아내고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폴란드군이 기적적인 반전에 성공하는 등 도처에서 대패하여 실패로 돌아갔고, 우크라이나 이외에는 영국이 집적거렸던 코카서스 지역만을 다시 점령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적군이 패배한 이유는 백군측과는 달리 발트3국이나 폴란드 등은 이미 자체 정부가 수립되었고, 일치단결해서 저항했기 때문에 아직 훈련도나 장비가 그렇게 좋지 않은 적군이 이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초반의 불리함을 막은 것만 해도 대단한 셈이다.

그러나 연합군 입장에서 보자면 1차 대전에서 다 함께 연합해서 싸우던 와중에 난데없이 혼자 제멋대로 독일하고 화해하더니 조약까지 맺고 전선 이탈해놓고, 이제와서 조약이 잘못 됐다면서 도로 물리려 드는 소련은 밉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국과 영국이 해군을 파견하거나 일본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리에 의해 7만명을 동원하여 시베리아를 공격하는 등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러시아의 주요 항구들을 점령하였으나 기나긴 전쟁을 이미 치른 터에 새로운 전쟁을 하기엔 어려운 처지였던데다 간섭군 내부에서도 불협화음이 터져나왔다.

미국의 경우 일본이 러일전쟁을 정산할 요량으로 원래 주둔해야 할 블라디보스토크를 벗어나 북진하자 크게 반발,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갔다. 태평양 전쟁 프리퀄? 여하간 1920년까지 백군의 조직적 저항은 완전히 분쇄되었고, 이에 명분을 잃은 간섭군은 동시베리아의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철수하고 만다.

5. 결말

결국 1921년에 외몽골에 잔존해 있던 운게른 슈테른베르크까지 공산군에게 분쇄되었고, 마지막 외부 간섭군이자 블라디보스토크에 벽돌 건물까지 지어가면서 장기주둔할 속셈이었던 일본군도 철수했으며, 1924년에는 사할린 북부에서도 철수하면서 러시아의 영토는 소비에트 정권이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이 때 몽골이 정식으로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두 번째 산국가가 된다. 다만 내몽골은 현재까지 중국령(네이멍구 자치구)이다.

최후의 백군은 태평양 연안의 아야노마이스키 구에 주둔하던 나톨리 페펠리야예프의 군대였다. 이들은 1923년 6월 17일에 분쇄되었다.

간섭국 중 일본 육군은 당초 블라디보스토크보다 더 진격하지 않겠다는 연합국과의 약속을 무시하고, 더 나아가 사할린, 연해주, 만주 철도 등을 시베리아 오지의 바이칼호수 동부까지 점령했고, 최종적으로는 바이칼 호수 서쪽의 이르쿠츠크까지 점령지를 확대했다. 일본군의 병력은 다른 연합군에 비해 수십 배 많았으며, 다른 연합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시베리아에 주둔을 계속하면서 점령지에 괴뢰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러시아 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프랑스과 같은 연합국들도 일본의 땅 욕심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으나, 광대한 시베리아를 통제하기는 불가능했고, 따라서 교통의 요지만을 점령하는데 급급하여 그 빈 공간에는 붉은 군대와 이에 동조하는 파르티잔이 매복해있다가 게릴라 전법으로 공격했다. 일본군은 단독 혹은 백군과 협동으로 이들을 진압했고, 자군이 당한데 보복으로 나중에도 그랬듯이 민간인을 학살하고 게릴라전의 배후 마을을 불태웠으나, 이는 오히려 일본군이나 반혁명세력에 대한 지지만을 더욱더 떨어트렸다. 그리하여 점점 민심은 공산당 정부쪽으로 향했고, 1920년 반혁명세력이 시베리아에서 수립한 알렉산드르 콜차크 정부가 붉은 군대의 공세로 붕괴하자 일본군도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민족주의 세력을 비롯한 부농, 무슬림 등의 소련에 강제 병합된 공화국, 독립국의 반소 세력은 30년대 초까지 산발적인 싸움을 계속한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서 잔존세력은 전부 다 적군에게 박살나게 된다.

6. 영향

이 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전훈은 소련식 기동전에 대한 가 정립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이 때 러시아 내외의 반볼셰비키 세력을 제거하면서 얻은 경험으로 첩보 능력이 발달해 냉전 때의 소련의 악명높은 보전 능력에 일조하기도 했다. 제수용소가 처음 설치된 것도 이 시기의 일로, 역시 트로츠키에 의해 만들어졌다. 정치장교 역시 트로츠키의 작품이다.[2] 공산주의의 부정적 이미지는 다 만든 듯 그리고 화룡점정은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암살함으로서 찍었지. 소비에트 내의 합의적·민주적 분위기가 약화되고, 일사불란한 군대식 관료체제가 대세가 된 것도 이 시기로 여겨진다. 그래서 연구자에 따라 적백내전이 볼셰비키의 성격을 바꾸었고, 이것이 소련의 관료독재화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반볼셰비키 세력들이었던 러시아 귀족들과 기존의 지주층, 러시아 정교 사제들이 해외(주로 유럽)로 쫓겨났다. 이들은 당연히 극도의 반소·반공 정서를 가지고 있었고, 유럽의 반공정서 형성에 기여했다고 하며 일부 학자들은 나치스를 지지했던 반공주의의 기원을 여기에서 찾기도 한다.

한편 소련은 소련 나름대로 이때 외국의 침공을 받은 경험이 충격으로 남아 두고두고 자본주의 국가들의 침공을 두려워하게 만든 트라우마가 되었다고 한다. 특히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에 대비하기 위해 광적으로 공업화에 집착하였다. 또한 사회주의혁명의 확산 실패와 적백내전의 위기는 트로츠키의 사회주의 혁명 확산론을 좌절시키고, 자국 공업화 및 생존을 주장한 스탈린의 주장을 강화시키기도 했다.

또한 이 전쟁은 일제강점기 당시 만주-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진영의 분열을 일으키는 데에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자유시 참변(…).

다만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 전엔 이 적백내전으로 인해 독립군이 뜻 밖의 소득을 거두기도 했다. 위에 언급된 체코 병력은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해 선박으로 귀국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이 상당량의 군사 장비를 북로군정서 등 독립군 측에 매각한 것. 템뿌리기 이는 청산리 전투 등의 후에 벌어질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7. 이 시기를 소재로 한 대중문화작품

7.1. 소설

7.2. 만화

  • 코르토 말테제 시리즈 : 이 시리즈 중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배경이다.

7.3. 영화

8. 기타


이 당시 개발된 무기 중엔 테크니컬의 조상뻘 되는 무기도 등장한다. 타찬카(Тачанка)라고 불리는 민간의 건초 달구지나 이동용 마차를 징발해 루이스 경기관총 같이 당시로는 거치식으로만 사용 가능하던 초기 기관총을 달아 이 끌게 한 물건으로, 러시아에선 네스터 이바노비치 마흐노에 의해 개발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마흐노의 마차'라는 별명이 있다. 생각보다 기동성이 좋아 쏠쏠하게 써먹었다고 한다. 이삭 바벨의 소설 기병대에도 타찬카의 기동성에 우왕ㅋ굳ㅋ하는 장면이 나온다.

흥미로운게 위키백과에서 영어 항목보다 독일어, 루마니아어, 러시아어 항목이 더 충실한 항목이다. 특히 독어 항목이 충실하다. 아무래도 이웃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니까. 당장 임진왜란도 위키백과에서 한국어 항목이 가장 충실하다.

김경천, 한용운이 이끈 소수의 조선 독립군은 적백내전에 참전한 적이 있다. 적군 편에서 싸웠는데. 백군에 일본군이 있기 때문이였다.
----
  • [1] 같이 백군에 맞서 싸웠으나 백군간의 갈등이 만만치 않았다.
  • [2] 당시 적군에는 구제정의 장교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이들 중 볼셰비키의 이념에 공감해서 지원한 사람은 극소수였고 많은 수는 기회주의자거나 잠재적 반역자였다. 실제로 내전 시기에 구제정 장교들에 의한 적군에의 반란 내지 사보타주 행위는 결코 적지 않았고, 이런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 정치장교의 배치는 필수적인 사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