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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

last modified: 2018-03-28 04:36:33 Contributors

1950년 11월 한국전쟁중국이 개입하면서 벌어진 전투. 대한민국으로서는 북진통일의 꿈이 날아가버린 순간이었으며,미군에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악몽을 남긴 전투 중 하나이다.


장진호 전투
날짜
1950년 11월 26일 ~ 1950년 12월 13일
장소
함경남도 장진호
<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국제연합
미국
대한민국
영국
중국
지휘관 올리버 스미스 쑹스룬
병력 103,520명
(실참전 30,000명)
150,000명
(실참전 67,000명)
피해 규모 2,500여명 전사
219명 실종
5,000명 부상
동상자 다수
25,000여명 전사
12,500명 부상
동상자 다수
결과
중공군의 승리
기타
미국 해병대의
명성이 알려짐.

Contents

1. 개요
2. 경과
2.1. 방심, 그에 따른 예정된 재앙
2.1.1. 선견지명
2.2. 죄어오는 올가미
2.3. 죽음의 계곡
2.4. 풍전등화
2.5. 변화된 양상
2.6. 동장군
2.7. 탈출
3. 결과
4.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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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검은 점들이 전부 중공군이다. 뭐야 해병대는?

1. 개요

독일군소련군이 벌인 독소전쟁 도중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3대 동계 전투 중 하나로 꼽히며 또 가장 성공적인 철수 사례로 꼽히는 전투. 게다가 미국 해병대 창설 이후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미국 입장에선 해병대뿐만이 아니라 미군 정규 사단이 '포위섬멸작전'에 빠진 유일무이한 전투이다. 국지전에서 손해를 입거나 무리한 공세를 펼치다가 손해를 본 경우는 있지만 잘 짜여진 시나리오에 말려들어 수만 명 단위가 전멸(전원 사망이 아니다) 상황에 빠진 건 이 전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만약 중국군이 2차 대전 당시 독일군 정도의 기동력과 공군력이 있었다면 미해병대는 전멸했을 것이다. 또한, 미군 역사상 21세기 현재 기준으로도 극한지에서 치른 유일한 전투라서 더욱 그 전훈이 평가되어지고 있다.


Koto-ri가 바로 고토리이며, 현재 고토리역이 있는 곳. 현 북한의 장진군 황초노동자구에 해당한다. Hagaru-ri는 하갈우리. 장진역이 여기에 있다. Hudong-ri는 복동리. 현재의 사수역 일대.

철도를 이용할 수 없었지만, 전투무대가 유담리를 제외하고는 다 철도인 장진선에서 벌어진 특이점이 있다. 멀쩡해 보이지만 열차에 탑승하고 편하게 탈출하지도 못하는 철길을 매일 바라보던 미 해병대의 한이 서려있는지, 전투 기록에 철도에 관한 언급이 자주 나온다. 그래서 장진선은 철도의 중요성에 비해 미국에서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이 많은 듯.

2. 경과

2.1. 방심, 그에 따른 예정된 재앙

미국북한평양을 잃고 피신해 임시 수도로 정한 강계를 공격하기 위해 장진호 방면으로 미 해병대 1만 2천여 명을 전진시켜 주둔시켰고 미 육군이 그들을 지원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군은 계속해서 미군에게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경고를 날리고 있었으나, 미군은 그 경고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의 예상과 달리 중국군이 전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군은 중국군을 지나치게 얕보고 있었다. 이 당시 군 사령관들이 추측했던 중공군의 규모는 약 3만 5천 명 정도였지만, 실제 들어와 있던 중공군의 수는 무려 30만 명이었다.

미군이 중국군을 얕보고 있는 증거로, 당시 미국 제10군단의 작전거리가 원산 ~ 수동[1] ~ 신흥에 이르는 작전구역을 담당해서 480km나 되었다. 상식적으로 병참 문제 때문에라도 작전거리를 이렇게 길게 잡고 부대를 길게 배치하는 일은 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진격 작전은 미친 짓이었다(더군다나 이 작전의 실패로 인해서 휴전선이 지금처럼 남쪽으로 밀려내려온 걸 생각하면...).

게다가 도로는 무지하게 좁아터진 산길이었고, 장진선, 신흥선 등의 경우는 아예 강삭철도로 철도를 운행하는 지경이었으니 더 이상의 설명이 必要韓紙? 미 해병대의 언급에서 딱 매복당하기 좋은 곳이란 언급이 있을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제10군단의 일부 부대에는 차출 명령이 떨어져 있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지휘관병크가 터진다. 바로 중국군 포로가 실토한 정보인, 대군이 산 속에 숨어 있다가 일거에 포위한다는 작전을 무시한 것이다.

그리고 예정된 재앙은 서서히 10군단을 덮치기 시작했다.

2.1.1. 선견지명

하지만 높으신 분들 중에 얼간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행히도 미 해병 제1사단장 올리버 프린스 스미스 장군은 예외에 속했고, 항상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라는 말을 평소 신조로 삼는 사람답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부대를 장진호 축선상에 집중 배치하도록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을 계속해서 설득하고 관철시킨 것, 충분한 탄약을 하갈우리(현재의 장진읍 및 장진역 인근)에 배치해놓은 것, 진격명령을 명령 불복종에 가까울 정도로 지연시킨 것, 야전활주로를 건설한 것 모두가 바로 스미스 장군의 공이었다.[2]

2.2. 죄어오는 올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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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쑹스룬(宋時輪, 1907-1991), 한국전 당시. 동안이다. 생긴 것과는 달리 아주 불같고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인데 그의 불같은 성격은 중공군이 이 전투에서 미 해병대에만 집착하게 되어 나머지 부대가 무사히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미 해병대를 포위 섬멸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운 장군은 중공군의 송시륜(쑹스룬) 장군(1907-1991). 그는 당시 40대 초반이었지만 많은 중공군 장교들과는 달리 황포군관학교에서 제대로 군사학을 전공했다. 또한 홍군 초기부터 마오쩌둥의 부대에 가담하여 대장정에도 참여했고, 그 이후 20년간 국민당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계속 전투를 치룬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이론과 실전을 모두 겸비한 역전의 용사이자 전투에 잔뼈가 굵은 유능한 게릴라전 지휘자였다. 당시 중공군에는 계급이 없었지만, 한국전쟁 이후 1955년 계급이 도입되자 대장에 임명되었다.

홍군 출신답게 밤에만 이동하는 작전을 수립, 게다가 도로가 아닌 산 능선을 타는 기상천외한 작전을 사용해가면서 주변 부대를 산 정상에 배치하는 데 성공했다. 이 때 배치된 중국군의 병력은 12만 명. 중국군의 7개 사단 병력이 제10군단을 드디어 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는 최소한의 접촉으로 미 해병 1사단을 진흥리(현재의 삼거역 일대) - 고토리(현 장진군 남쪽 고토리역 일대) - 하갈우리 - 유담리(장진호 서부)에 병력을 배치하도록 유도했다. 게다가 마침 알몬드 장군은 스미스 장군을 밀어붙여 유담리까지 진격하도록 몰아붙였고 스미스 장군은 어쩔 수 없이 진격을 계속해 나갔다.

동시에 한쪽 날개를 담당하고 있던 미 8군에 대하여 나머지 18만 명의 병력으로 공격을 가했고, 인해 전술에 당한 미 8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 즉시 중국군은 배치된 12만 명의 병사 중 6만 명을 장진호에 집결시켰다. 작전은 성공했다.

운명의 11월 27일. 중국군의 제79사단과 제89사단이 완전 포위된 유담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공격으로 드디어 양쪽에서 많은 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또한 별도의 부대가 사수역 근방에 있던 페이스 지대라고 불리는 미 육군 혼성 2개 대대 + 1개 포병 대대를 공격해서 역시 포위하였다. 참고로 페이스 지대는 하갈우리로 철수하려고 하였지만 결국 실패하고 지대장은 전사, 대다수의 장비는 망실, 병력은 고작 300여명만 얼어붙은 장진호를 걸어서 간신히 하갈우리 원진으로 탈출했다고 하니 완전히 박살났다고 보면 된다.

27일 밤부터 중공군은 미 해병 중대 중 3개의 중대를 섬멸하고 중국군 3개의 사단이 미 해병사단을 유담리, 하갈우리, 고토리로 고립시켰다. 이 때 미군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일부 부대가 철수한 상태였지만, 하필이면 미 해병대 사단본부와 보급 기지가 하갈우리에 위치해 있었다. 게다가 고토리는 교통의 요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장진호로 가는 교통의 목과 같은 곳이어서[3] 여기를 점령당하면 북쪽의 장진 일대의 미 해병대는 섬멸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장진호 근방의 미 해병대는 고립된다.

2.3. 죽음의 계곡

드디어 고토리조차 위험해지기 시작했다. 이때 하갈우리의 사령부와 물자 창고를 지키고 있는 병력은 고작 1개 대대, 군무원 등 비전투 요원을 합쳐도 불과 4천 명 정도의 규모. 부대는 사령부에까지 총알이 날아오는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하갈우리에서의 활주로 공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토리부터의 보급로 확보와 지원 병력의 증원 문제 때문에라도 고토리로부터 하갈우리까지 이어지는 중국군의 방어진지를 무조건 뚫어야 했다.

첫 번째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방어가 너무 강력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애당초 통로가 하나밖에 없는데 거기로 안 올 거라고 생각하는 게 이상하지.

이후 코만도 부대와 미 해병군이 임시로 편성되고 드디어 두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부대는 중국군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집중사격을 받으면서 돌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더글러스 드라이스데일 중령은 스미스 장군에게 이 위험한 돌파를 계속해야 하냐고 무전으로 물어보았다. 아마도 스미스 장군 본인에게 제일 어려운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증원부대가 오지 않으면 사령부가 적에 손에 떨어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스미스 장군은 결국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반드시 돌파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런데 선두 부대가 드디어 하갈우리와 고토리 중간(부성역상평역 사이)에 도착했을 때, 하필이면 탄약차에 박격포탄이 명중하여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중간 부분의 길이 끊겼고, 선두 부대는 미친듯이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 이 탄약차 때문에 후속 부대는 중국군의 총탄 세례를 이겨내지 못하고 철수했으며 고토리로 되돌아가거나 포로 신세가 되어야 했다. 게다가 운이 없게도 고립된 후방부대가 하필이면 지원 부대의 주력이었다. 결국 이 돌파로 증원된 병력은 약 400여 명. 부대의 1/3을 잃는 엄청난 피해 속에서 이루어진 증원이었다.

훗날 드라이스데일 중령은 자신이 지나갔던 이 계곡에 Hellfire Valley, 일명지옥불 반도 죽음의 계곡이란 이름을 붙였다.

2.4. 풍전등화

이날 중공군의 공격은 더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이 비행장 공사장을 직접 방어하고 있던 부대에 정면 공격을 가하는 바람에 지뢰, 철조망, 조밀한 화망으로 이루어진 방어진을 결국 뚫지 못하고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후퇴했다. 또한 동부 고지를 잠시 빼앗겼지만 지원 부대를 이쪽으로 붙여서 다시 진지를 회복했다. 이 때까지 양군의 사상자는 미군 약 300여 명, 중공군 약 8,500여 명.

그러나 이런 30 : 1 정도의 우월한 교환비도 압도적인 수적 우세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드디어 미 해병 제1사단은 전멸 직전까지 내몰렸다. 대부분이 전멸을 예상하고 있었다. 1개 사단 전체가 전멸위기에 처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조차 없던 일이었다.

그런데…

2.5. 변화된 양상

12월 1일 유담리에 있던 병력이 하갈우리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흥남 지역으로 10군단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마침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일부지만 비행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바로 이 비행장이 전멸을 막았다.

드디어 보급품이 들어왔고 부상자가 이송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2월 4일 유담리의 병력이 유담리에서부터 23km 떨어진 하갈우리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많은 특파원이 하갈우리에 도착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당시 종군기자로 참가했던 마거릿 히긴스 기자[4]에게 "후퇴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은 스미스 장군은,

"후퇴라고? 지X! 후퇴가 아니오,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진격하는 중이란 말요!"
"Retreat, hell! We're not retreating, we're just advancing in a different direction."
라는 불후의 명언으로 대답했다.

이 말은 미 해병대의 불굴의 의지를 상징하는 말로 남게 된다.

스미스 장군의 저 명언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유명하지만, 당시 1연대장인 루이스 풀러대인배급 발언도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포위됐다. 이제 문제는 간단해졌다. 우리는 이제 모든 방향으로 공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사투를 벌이던 양군은 곧이어 더 무서운 적과 맞서 싸워야 했는데….

2.6. 동장군

그러던 중, 11월 초에 첫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기온이 서서히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장진호 주변의 위도는 북위 40°30',[5] 고도는 평균 1,200m지만 이 일대는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지역 중 하나로 겨울철 평균 기온이 영하 30도인 극한지대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스크바의 강추위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심심하면 영하 35도의 강추위가 양군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미처 방한복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던 미군은 두껍게 옷을 껴입었어도 동상자가 속출했다. 중국군이라고 미군보다 사정이 나을 건 없었다. 그리하여 양군의 사상자는 교전보다 이 강추위 때문에 훨씬 많이 발생하게 된다. 한마디로 한국전쟁판 모스크바 전투.

하지만 추위로 따지자면 장진호 전투는 모스크바 전투는 커녕[6] 그보다 더 추운 스탈린그라드 전투와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추웠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영하 30도 이하는 전투기간 내내 딱 한 번 기록[7]했지만, 장진호에서는 영하 30도 이하를 밥먹듯이 기록한데다가 시베리아 벌판에서 시속 60km의 칼바람이 내내 몰아쳐 체감기온은 그보다도 훨씬 아래였다. 참고로 스탈린그라드 기온측정 역사상 최저기온은 영하 32.6도이며 1월 평균기온은 영하 9.6도 정도인 반면에 장진군은 1월 평균기온이 영하 20.6도다. 철원의 1월 평균기온은 영하 5.5도 정도이니 얼마나 추웠을지 상상해 보자. 그나마 비교하자면 1940년 유례없는 추위를 기록해 수십만의 소련군이 떼로 얼어죽은 겨울전쟁이 비슷한 기온을 기록했을 정도이니 장진호 전투는 가히 인류역사상 가장 추운 전투 중 하나라고 할 만한 수준이었다.

우선 진지 구축을 하면 땀 때문에 옷이 얼어붙을 지경이었고, 이럴 경우 땀에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으면 그대로 얼어붙기 때문에 옷을 벗는 것보다 더 많은 체온을 손실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결국 이걸 막기 위해서 영하 35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속에서 훌렁 벗고 작업해야 했다고 한다.[8] 물론 이것도 한번에 옷을 벗는 것이 아니라 일하면서 한겹씩 옷을 벗은 후, 서서히 일의 강도를 줄이면서 다시 한 겹씩 옷을 입는 아주 번거로운 작업을 수행해야 했다. (반면, 이런 걸 모르고 그냥 무작정 작업했던 중공군은 동사자가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땅이 단단하게 얼어붙었기 때문에 일반 야전삽으로는 땅을 긁기만 해도 쉽게 부러졌으며, 중국군에게서 노획한 곡괭이가 그나마 제대로 땅을 팔 수 있는 장비였다고 한다. 만일 땅에 바위가 많거나 단단한 지형이라면 깡통에 폭약을 넣고 한 방향으로 터뜨리는 급조 성형작약탄만이 유일하게 땅을 팔 수 있는 도구였다.

추위로 인해 얼어붙은 땅바닥은 공중보급에 악영향을 주었다. 통상적인 낙하산에 보급물자를 묶어서 투하하면 적어도 40%는 땅바닥과 격돌해서 완전히 파손되었다. 덕분에 공중보급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태인 물자가 사방에 흩뿌려져서 회수하기 힘들다는 점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실제로 공중보급시 제대로 부대에 전달되는 양은 25% 정도였다고 한다.

추위는 사람뿐만이 아니고 장비에도 위력을 발휘했다. M1 카빈은 가스압이 추위로 인해 낮아져서 발사불능에 가까운 상태가 자주 생기는데다 백병전시 쉽게 개머리판이 박살나서 무용지물에 가까웠고, M1 개런드는 카빈보다는 추위에 잘 견디지만 윤활유를 많이 바르면 얼어붙어서 역시 작동불능이 되었다. 기관총과 차량, 전차는 최소한 2시간에 1번씩 작동시키지 않으면 얼어붙어서 작동할 수 없게 되며, 수냉식 기관총은 물을 넣으면 얼어터지므로 특수 부동액을 넣거나, 아예 냉각수를 넣지를 않았는데, 그렇게 사용해도 과열이 되지 않을 정도로 날씨가 추웠다고 한다. 과열문제로 골머리 썩던 중화기병은 기뻐했지만 그 기쁨은 1초만에 절망으로 바뀌었다.

박격포는 발사 자체는 잘 되지만 포판이 얼어붙은 지면과 충돌해서 박살나기 일쑤였고, 야포는 불발이 많아지고 추운 날씨로 인해 공기 밀도가 높아져서 사정거리까지 감소했다. 심지어 수류탄도 얼어붙어서 불발되는 경우가 발생하였다. 지뢰 또한 마찬가지여서,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중공군이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매설한 지뢰가 밤새 얼어붙는 바람에 지뢰밭 한가운데로 진입했는데도 지뢰가 터지지 않아 목숨을 건진 사례도 있다.

가장 가관인 일화 중 하나로 이런게 있다. 한 해병대 병사가 중공군이 사격한 PPSh-41기관단총에 온몸을 난타당하는걸 목격한 의무병이 그를 치료하려고 다급하게 다가가서 제발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는 그 해병을 붙잡고 상태를 보니, 추위 때문에 총탄의 위력이 약해진 나머지 온몸에 총탄을 무수히 맞았음에도 한발도 방한복을 뚫지 못했다. 겨우 그 해병을 진정시킨 다음에 상황을 설명해주자 대단히 머쓱해했다고 한다.

추운 날씨는 식사까지 방해했다. C레이션 깡통을 따뜻하게 먹으려고 모닥불에서 가열했더니 바닥은 다 타고 위는 여전히 얼어있었다는 말까지 나오는 판이었다. 그래서 캔디나 과자가 인기가 있었으며, 심지어 이것만으로 배를 채우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PX에 있던 물자를 소각하려다가 그 대부분이 캔디나 과자였기 때문에 장병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생리현상도 추위는 간과하지 않았다. 야외에서 설사를 한번이라도 하면 항문까지 동상에 걸리기 때문에, 이질과 같은 병이 있는 사람은 지옥 중의 지옥을 맛보아야 했다.

의료분야에서도 추위는 맹위를 떨쳐서 부상자는 잠시만 눈 위에 두어도 바로 동사했고 병사들에게 무기력증을 선사했다. 미군보다 물자가 부실한 중국군의 상태는 미군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전장에서 멍때리고 있다가 총 맞거나 그대로 포로로 잡히거나, 집단 투항을 하기도 하는 등 양쪽 군대의 사기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혈액과 모르핀도 얼어붙어서 의무병이 아예 모르핀 앰플을 계속 입 안에 넣고 있어야 했으며, 수혈팩은 겨드랑이에 끼고 체온으로 덥혀서 얼지 않도록 조치해야 했다.

이 강추위에 대해 '브레이크 아웃'이란 장진호 전투의 미 해병대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서적에서는 한가지 아이러니를 다루고 있다. 그것은 부상자들에게 감아놓은 붕대에 맺힌 피가 얼어붙어서 지혈 효과를 줬다는 것. 인터뷰 대상자가 "하여간 지혈은 정말 잘 됐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 단, 이것만 믿고 지혈을 대충 했다가 간신히 후방으로 후송시킨 부상병이 따뜻한 곳으로 옮겨지면서 도로 출혈이 발생해 목숨을 잃은 사례도 다수 발생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것이 얼어붙는 추위가 장진호 전투의 진정한 승자였다.

그러나 포위된 미군은 수적으로는 불리했지만 애초에 해병대 사단장이 상부의 지시를 약간씩 뭉개면서 전진속도를 줄이고 진격로 중간의 요지에 진지를 구축하는 등의 대비책을 마련하였고, 중국군에 비해 압도적인 화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처절한 전투 끝에 단계적으로 준비된 진지로 이동하는 방식으로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후방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당시 작전을 치룬 미 해병대 1사단장 올리버 프린스 스미스 장군은 미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의 북진계획에 반대한터라 보급선 확보 등의 활동으로 가장 신중하게 진격했었고 이때문에 가장 진격이 느리다고 질책을 받았다.

하지만 이렇게 느린 진격과 중간 진지 마련이 장진호 전투에서 빛을 발휘하여 미 해병대는 미 7사단,[9] 국군 수도사단3사단, 미 10군단의 퇴로를 확보하는 몸빵이 될 수 있었으며, 해병대 부대가 장비를 버리지 않았고, 최후에 비행장을 경호할 병력이나 남아있는 방어진지의 방어병력이 버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항공편을 통한 철수도 거부했다.

이 전투에서 부상자를 실어 나르기 위해 H-19 헬리콥터가 크게 활약했고, 수문교라고 하는 유일한 길에 놓여있는 끊어진 다리를 복구하기 위해서 M2 장간조립교를 공중투하해서 퇴각로를 확보하기도 했다.[10]

물론 미 해병대의 전통대로 이런 아비규환의 상황속에서 아군의 얼어붙은 시신을 대부분 챙겨갔다. 이 와중에 아군의 시신을 수색하다 동사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또한 유담리 등 상황이 긴급해서 도저히 후방으로 운반할 수 없는 시신은 현지에 가매장(미 해병대 역사상 5번 이내에 드는 사례)한 후 휴전이 성립되자 별도 회담을 통해 전원 회수 완료했다.

여하간 드디어 항공보급이 되자 스미스 장군은 지체없이 퇴각을 명령한다.

2.7. 탈출

스미스 장군의 작전은 다음과 같았다. 하갈우리에 있던 전투단에게 고토리로 가는 길을 뚫고, 후방을 책임진다는 막중한 임무를 내린 것. 이 작전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공군과 지상군의 손발이 맞아야 하는 중요한 작전이었다.

철수를 하면서 측면을 보호하고 동료의 시신까지 챙겨가는 악조건 속에서도 철수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중공군의 거센 공격을 방어하면서 드디어 성공적으로 철수했다. 12월 11일 전 사단이 마지막 원진인 진흥리(현 삼거역 인근)를 통과하면서 철수에 성공한 것이다.

3. 결과

이 전투에서 미 해병 1사단은 1만 2천명 중 사상자가 4천명이 넘어갈 정도로 막대한 손실을 기록했다. 미군이 치른 대규모 현대전 중에서도 상당한 희생을 치른 셈. 현대전에서 부대 전멸 판정(싹 다 죽었다가 아닌 '전투 능력 상실'을 뜻한다)이 대략 병력의 30%정도가 전사했을 때니까 1사단은 거의 궤멸당한 셈이다.



함흥에 묻힌 제1사단 전사자들. 출처 # #

한편 중국군이 이런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건 중국군이 국공내전으로 당시 전투 경험이 많았던 부대였기 때문에 전략, 전술적으로 미군의 약점을 찌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군이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이냐면 그것도 아닌 것이, 이 전투에서 미군의 최대 10배로 추정되는 대군을 투입했지만 미 해병대를 완전히 섬멸한다는 작전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으며, 미 해병대와 격전을 이어가는 바람에 10군단의 다른 사단들이 안전하게 철수하는 것을 눈뜨고 바라보기만 했기 때문이다.[11] 여기에 더해서 미군은 중국군보다 더 좋은 무기와 압도적인 물자 지원, 화력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에 중국군에게 2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강요한 데다가 북한의 강추위에 의해 대부분의 전력이 전투 후 동상으로 인해 발이 묶였다. 게다가 국공내전의 경험 때문에 보급부대의 중요성을 망각한 바람에 현지물자를 징발할 수 없는 가난한 북한의 산악지대에서 중국군의 보급상황은 바닥에 가까울 정도로 떨어져서 불필요한 희생을 늘렸다.

참고로 중국군의 보급상황이 얼마나 비참했나 하면, 3일동안 먹은 것이 얼어붙은 날감자 2개라든지, 수문교 재건을 방해하기 위해 파견된 중공군이 극심한 추위에 얼어붙어서 항복하려고 총을 버리려고 해도 총이 얼어붙어서 손에서 안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같이 열악한 보급으로 전투는 커녕 움직이는 것도 어려웠기 때문에 요지의 중요성과 방어진지의 견고함에 비해 의외로 미군이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쑹스룬 장군은 직접 향후 보급체계를 전면 개편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12]

이런 이유로 인해 하갈우리 원진 전투때는 중국군의 화력이 1선 병사에게 집중되고, 후방의 연료나 탄약에는 별로 사격을 가하지 않았는데, 이는 보급은 적에게서 구한다는 중국군의 기본 보급방침도 있었고, 만일 연료나 탄약에 사격해서 불바다를 만들면 당장 이길 수는 있지만 험악한 산골짜기에서 물자가 없는 미군 포로와 중국군이 함께 사이좋게 굶주리고 얼어죽을 것을 우려한 것의 합작품이라고 한다.

여하간 이 때문에 중국군은 더 이상 미군을 추격하지 못했고 결국 흥남 철수를 허용하게 된다. 더불어 이 작전에 참여한 중국군은 재편성 및 보급을 위해 한동안 최전선을 떠나게 되며, 총계 10만명에 가까운 인원이 후방에 잔류하게 됨으로서 중국군의 차기 작전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또한 중국군 수뇌부는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경험하고 더 이상 전쟁을 끌어봤자 미국을 이기는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 전쟁 전 북한의 영토를 유지하는 선에서 전쟁을 끝내자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보급부대를 무시하면 안된다는 판단을 내려서 상부에 보고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이러한 현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미국을 종이호랑이라 판단, 현지 사령관들의 부정적인 의견에도 불구하고 남한을 해방시키겠다면서 대대적인 남진을 명령한다. 그리고 1.4 후퇴 이후 연합군이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고 반격을 시작하자 큰 피해를 입는다. 이후 양자 모두 더이상 상대를 섬멸하고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은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국 휴전협상으로 이어진다.

4. 뒷이야기

엄청난 희생을 치룬 전투라서 그런지, 살아남은 이들은 미군 역사상 처음으로 동상을 입은 피해에 대한 보상금을 받았으며, 미 해군의 타이콘데로가급 이지스 순양함 CG-65의 이름을 이 전투를 치른 곳을 따서 초신(Chosin)이라고 지었다. 장진(長津)을 일본식 독음으로 읽으면 초신(ちょうしん)이 되는데, 당시 미군은 장진호에 대한 한국어 지도가 없어서 일본어 지도를 보고 초신이라고 불렀기 때문. 지금도 chosin이라고 부른다. 덤으로 이 계열 순양함 네임쉽(함급 이름의 기준인 1번함) 타이콘데로가의 어원은 미국 독립 전쟁 때의 격전지다.[13]

또한 한국전 관련 책에는 반드시 장진호 전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큰 충격을 안겨줬다. 'Chosin Few[14]'(장진호 전투 생존자 모임)라는 미 해병대 참전용사 모임도 있을 정도. 미군이 극한지에서 전투를 치뤄본 경험은 장진호 전투가 유일[15]하기 때문에 장진호 전투는 장차전 대비에서 중요한 경험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것도 한몫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명예 훈장 수훈자 131명 중 13명이 장진호 전투 생존자였던만큼 미군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 사진은 장진호에서 포위당한 채 사투를 벌이고 있던 미 해병대원을 찍은 사진으로, 추위를 피하기 위해 이것저것 몸을 감싸고 손에는 얼어붙은 깡통을 들고 있으나 다른 방향으로의 공격과 살아야 한다는 의지에 찬 눈빛이 인상적인 사진이다. 사진을 찍은 데이비드 더글러스 던컨은 1950년도의 US 사진가 공적상을 받았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때는 모든 것이 얼어붙을 것 같이 매섭게 추운 아침이었다. 그야말로 매일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감사 그 자체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저녁이면 그 밤이 샐 때까지 견딜 수 있을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인생이 짧게도 또는 영원같이도 느껴지는 세계다. 여기에서 해병대원에게 "크리스마스날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내일을 달라."라고 대답하는 세계인 것이다.[16]

이 전투가 얼마나 상황이 안 좋았는지, 전투 중에 미국 해병대 포병 부대가 중국군 보병 부대와 직접 교전해서 100여미터 남짓한 거리에 대고 가진 포를 쏴대서 중국군 보병을 격퇴한 사례도 있다.

여담으로 미군의 방한복인 M-51 (일명 개파카)가 제작되어 보급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장진호 전투로 참혹한 추위를 겪은 미군은 그 이전의 모델인 M-48 파카로는 더이상 안된다고 판단을 하게 되었다.

관련 서적으로는 당시 장진호 전투의 미 해병대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서적 레이크 아웃이 국내에 번역되어서 출판되었다. 단 당사자이자 동양인인 한국인에게는 거북한 느낌이 들 책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중공군을 계속 동양인을 비하하는 은어인 '국'이라고 부른다. 다만 상황이 상황이니(적=동양인) + 해병대니까(…)로도 볼 수 있고, 어차피 다큐멘터리이니 수정할 수도 없는 부분이다. 또한 당시 혼란에 빠진 미 육군이 철수하면서 부대가 사실상 와해될 상황이 되자 독전을 한답시고 미군 카투사로 있던 한국인 두명만 즉결처형하고 나머지 말 안듣는 미군들은 그냥 놔둔다든지 하는 장면도 있다.

전쟁후 한국군 내에 떠돌아 다니는 최전방의 추위에 대한 루머(예 : 총들고 가다가 얼어서 손이 총에 붙었다. 녹일려고 침발랐는데 혀도 붙었다)들은 의외로 여기가 출처일지도 모른다.

당시 미군 회고록에 보면, 부상병을 업고 장진호를 건너다가 업힌 사람이 얼음 위에서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는데, 하필 척추 부근에 총탄을 맞아서 "미안하다!"하는 병사에게 "괜찮아. 어차피 허리 밑으로는 아무것도 안 느껴져."라고 대답했던 이야기나 부상병들 실고 탈출하던 트럭들 운전수가 죄다 저격당하고, 시체를 끌어내리고 대타가 나섰는데 그도 죽고 이에 또 시체 치우고 대타 나서는 반복작업이나(트럭 한두대 탈출. 나머지는 죄다 흩어졌다), 능선을 타고 넘어가는데 걸으며 계속 엄마를 찾으며 울던 병사가 있어 뺨을 치며 정신차리라 했더니 그가 잠시 조용해졌다가 퍽 쓰러지는 소리가 나길래 뒤를 돌아보니 그가 절망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그 자리에 쓰러져서 사망(!)하는 경우들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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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 당시인 12월 7일과 8일 밤에 악천후 속에서 간간히 밝은 별 하나가 찬란하게 빛났는데, 어느 사이엔가 그 별은 미 해병대에게 '고토리의 별'[17]이라 불리며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 고토리의 별은 앞서 말한 장진호 전투 생존자 모임의 공식 로고가 되었으며, 하와이 주 카네오헤의 미 해병대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에도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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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미 해병대 교회 스테인드 글라스의 '고토리의 별'(The Star of Gotori).

정말 사소한 여담이지만, Warhammer 40,000에서도 이 장진호의 이름을 딴 초신 행성이 있다. 설정상에서만 존재하는 행성으로, 극한의 아이스 월드이며, 중공군 오크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할리우드에서 장진호 전투를 배경으로 한 영화 '혹한의 17일', '아! 흥남'(이건 한미 합작)을 제작중인데 계속 무소식이다. 혹한의 17일의 경우에는 각본가 프랭크 피어슨의 사망과 제작비 문제 등으로 지지부진하다는 얘기가 있으며, 아! 흥남은 2015년 1월에 크랭크인하여 강원도에서 촬영한다는 얘기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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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현 함경남도 수동구. 고원군에서 떨어져나왔으며, 평원선(현 평라선 평양 - 고원 구간)이 통과한다. 당시 철도상으로는 평원선만이 현 북한 일대에서 동서로 철도를 통해 병력과 물자 수송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철도였기 때문에 이 노선을 잃는다는 것은 좌우로 UN군이 갈라진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나름대로 중요한 곳이었다. 참고로 원산에서 평양까지 철도로 이동하려면 고원군을 출발하여 수동, 양덕, 성천, 순천을 거쳐 평양으로 가는데 이 거리가 대략 250Km 정도 된다.
  • [2] 스미스 장군은 장진호 근방을 헬기로 시찰 후 작전수행이 불가능한 곳이라고 말했다.
  • [3] 장진선과 폭이 좁은 도로가 유담리 - 장진읍 - 상평리 - 고토리를 지나가 황초령을 넘어 함주로 이어진다. 다른 길은 없다.
  • [4] 처음으로 퓰리처 상을 받은 여기자. 대한민국 해병대한테 귀신잡는 해병이라는 칭호를 준 사람이기도 하다(그런데 귀신잡는 해병대 일화에는 논란이 존재한다. 대한민국 해병대 문서 참조).
  • [5] 뉴욕하고 비슷한 위도에 있다. 참고로 뉴욕의 겨울 기온은 서울보다 조금 낮은 정도.
  • [6] 모스크바의 1월 평균기온은 영하 8.6도에 불과하다. 참고로 남한에는 모스크바보다 더 추운 곳이 없다.
  • [7] 이 기록은 스탈린그라드 전선의 돈 강 전선에 있던 부대가 기록한 자료다.
  • [8] 11월 말, 12월 초의 초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저렇게 추웠다. 당시 체감온도는 영하 50도 전후로 추정된다. 한반도 기준으로 제일 추운 12월 말부터 1월 중순 사이에는 영하 40도, 비공식적으로는 영하 45도까지 찍는다. 영하 45도에서 10m/s 정도의 바람이 불면 체감온도는 영하 70도까지 내려간다.
  • [9] 휘하의 미군 31보병연대는 장진호 전투 당시 장진호반의 우측면에 배치되어 미 해병대의 측면을 엄호하고 호반 북쪽진격을 시도하려고 했으나 11/27 - 12/1 기간동안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하갈우리로 철수시도를 했으나 철수로 양측면에 매복했던 중공군의 기습으로 부대가 와해되어 이 과정에서 연대기를 노획당했다. 연대장은 접근하는 중공군을 미군으로 착각하여 접근했다가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포로가 되었고 대타로 연대지휘를 책임졌던 휘하 대대장 페이스중령은 철수과정에서 전사했으며 다른 대대장급 지휘관과 중간 장교들이 전투 초기에 많이 부상을 입고 전사했다. 3천명의 연대원들중 탈출에 성공한 인원은 400명에 못미쳤다. 이후 몇일동안 해병사단의 수송대대장이었던 벨 중령과 소수의 그의 부하들이 수색에 나서 100-200명의 31연대원들을 구조해냈다.
  • [10] 여담으로, 이 장간교는 투하 후 중공군 포로들을 동원해 조립하였으며, 전사한 중공군의 얼어붙은 시신을 토대 대용으로 쌓아서 받쳤다는 흠좀무한 일화가 남아있다.
  • [11] 이 전투의 결과에 대하여 영문 위키피디아는 아예 중국군의 Pyrrhic victory, 즉 피로스의 승리로 기술하고 있다. 상처뿐인 승리라는 의미.
  • [12] 이것은 당시 중국군 군사전략이 인민전쟁 노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공군은 자국내에서 전쟁을 치른다는 기본 전제하에서 모든 면이 발달해서 이런 류의 전쟁을 전혀 상정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 [13] 미 해군 타이콘데로가급 이지스 순양함들의 함명은 모두 미군이 참전했던 격전지명에서 가져온 것이다.
  • [14] '선택받은 소수'라는 뜻의 chosen few와 발음이 유사하다. 미국식 작명 센스!
  • [15] 미군이 한 겨울에 치룬 전투는 서유럽의 벌지 전투 등 다른 곳에서도 있지만, 추위로 사람이 픽픽 죽어나가는 극한지와는 거리가 멀다. 비록 1945년의 벨기에는 기록적인 수준의 추위를 기록했지만 그래봤자 서유럽 날씨로 1945년 벨기에의 1월 평균기온은 -6℃ 정도에 불과했다. 가장 추운 날로 기록된 것이 화씨 10도 정도(약-12℃). 물론 이 정도로도 전투하기에는 꽤나 고생스러웠겠지만, -30℃를 밥먹듯이 찍은 장진호와는 전혀 다르고 극한지라고 하기도 힘들다.
  • [16] 이 일화는 어느 한 병사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자 그 병사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내일을 주십시오!라고 대답하는 일화로 퍼져나갔다.
  • [17] 해당 홈페이지에선 "kotori"로 표기되어 있다. 코토리? (기타 미국 내 관련 기념물들도 제각기 'G'와 'K'가 혼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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