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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공산당

last modified: 2014-12-30 07:00:33 Contributors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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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명칭(한글) 일본 공산당
한자명칭 日本共産党
영문명칭 Japanese Communist Party: JCP
설립일 1922년 7월 15일
대표 시이 가즈오
의석수(중의원) 21석 / 475석
의석수(참의원) 11석 / 242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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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개요
2. 역사
3. 현황
4. 대외 정책
5. 북한과의 관계
6. 기타
7. 역대 선거결과
7.1. 중의원 선거
7.2. 참의원 선거
8. 카쿠산부


1. 개요

일본의 공산계열 정당. 현재 당 대표(위원장)는 시이 가즈오. 2000년대 일본 도쿄 중의원에서 자유민주당, 민주당, 일본 유신회, 공명당, 다함께당 이어 6번째로 많은 의석수(8석)를 확보하고 있으나 그 영향력은 미미하다. 현재로서는 일본 사회민주당과 이 공산당을 제외하면 일본 진보[1] 정당은 전무한 상태. 그리고 일본 공산당은 마오이즘을 신봉하는 일본 공산당(좌파)와는 별개의 정당이다.[2]

우파들이 대분열하여 약진한 2013년 개원된 새 의회에서도 일본 민주당, 일본 미래당, 일본 사민당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관서에서 1석만을 잃은 8석으로 위엄을 보였다. 참의원도 꾸준히 당선자를 내고 있다. 2013년 현재 총 240석 중 11석.

다른 정당이 우경화를 외치고 있을 때, 여기는 반대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 원전 폐기, 자위대의 국방군 전환 반대, 간접세 증세 반대 등을 주장한다. 또한 당의 강령 중에 천황제 폐지, 자위대의 해산이 공식적으로 2004년까지 존재했을 정도이다. 2004년 당 대회에서 두 존재를 인정하기는 하였으나 점진적인 자위대의 군축 및 평화 헌법 9조 수정에 의한 군대 전환을 방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천황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국민의 뜻에 따라 결정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일본에서 대표적으로 세계화에 반대하는 정당으로, 예전부터 차량 유세 등에서 자본의 위험성을 강조해왔다.

한국에서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를 방문하여 둘러본 뒤 헌화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일본에 약탈된 한국의 문화재를 반환하는데 힘쓰는 등의 모습 등을 보여왔다.# 일본 공산당은 침략전쟁 당시에도 당 기관지에서 일제의 중국침략을 고발하는 등의 기사를 쓰는 등 전쟁 반대, 식민지 독립 등을 호소해왔다.

부락민 해방동맹과는 1965년부터 노선의 차이로 불편한 관계을 유지하고 있다.반당 수정주의자, 우익 사민주의자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부락민 차별 자체를 찬성하는 게 아니므로 이 점은 가려서 봐야 된다.

일본 공산당은 또한 주일미군 철수 및 미일동맹 해체를 통한 독자노선을 주장하고 있으며, 2004년 강령개정 당시 목표를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 진전 및 주요 생산 수단의 소유 • 관리 • 운영을 사회 손으로 옮기는 생산 수단의 사회화로 명시하고 있다.#[3] 물론 무장투쟁 노선은 이미 50년대에 쓴 맛을 본 후 포기한지 오래다.

2. 역사

현 일본의 정당 중 가장 오래된 정당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불어닥친 사회주의 붐에 따라 1922년 창당된 것이 시초인데, 침략전쟁에 반대하였으며 1925년 치안유지법 제정을 기점으로 일본의 군국주의화가 가속화되자 이후 극심한 탄압[4]을 당하다가 패전 이후 1945년 GHQ 미 군정당국에 의해 치안유지법 폐지와 함께 합법화된 정당으로 다시 출발하였고 일본 사회당과 같이 큰 활동을 했다.

그러나, 동아시아 정세에서 중국 공산당국공내전에 승리하고, 1950년 5월 인민광장 사건으로 공산당이 GHQ와 충돌한 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1951년 마오쩌둥식 공산당 전술을 모방하여 전국의 농촌 지역에 해방구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미군기지, 경찰서, 법원 등을 습격하고 경찰관을 살해하는 등 무장 투쟁과 마오이즘적 선전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런 무장투쟁노선은 별 호응을 얻지 못 한 채 1952년, 1953년 두 차례에 걸쳐 치러진 중의원 선거와 1953년에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공산당은 각각 한 석만 얻는 참패를 당했으며 이런 참패의 영향으로 무장투쟁 노선은 사실상 폐기처분 되었다.[5] 거기에다가 때마침 재통합한 일본 사회당에게 밀려 군소야당으로 큰 세를 나타내지 못했다가, 1960년대 중반 자주노선을 표방하고 사회당이 지리멸렬한 틈을 타 사회당의 지지기반 일부를 뺐으면서 리즈시절을 맞게 된다.[6]

이 때를 즈음해 극좌단체 적군파가 결성되면서 일본의 도시게릴라 운동이 활발해지고 요도호 사건, 아사마 산장 사건 등의 병크를 일으키며 일본 사회를 충격과 공포에 빠뜨리는 사건이 일어난다.[7]

반면 공산당은 지방선거에서 사회당과 연합전선을 짜며 연이은 승리를 거두었고 중, 참의원 선거에서도 선전해 1972년 중의원 선거와 1979년 중의원 선거에서 대승하며 전성기를 이어왔다.[8] 이른바 1970년대의 "자-공" 시대이다.

하지만 1979년 통일지방선거에서 패배하고[9] 1980년 일본 사회당에서 공산당과 결별하기로 방침을 정하며 사실상 왕따로 전락하게 된다. 당시 사회당에서 정권교체 가능성이 높다 보고 연립정부 구상을 하고 있었는데 공명당, 민사당에서 사회당과 공산당과의 결별을 하지 않으면 연립정권을 짤 수 없다고 결별을 요구했다. 이는 공명, 민사당과 공산당의 사이가 매우 적대적이라[10] 공산당과의 연대에 부정적이었던 사회당 우파의 세가 강해진 영향도 있었다.[11] 이렇게 되면서 80년대 내내 선거에서 의석수가 계속 줄어들었고 특히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12]

90년대 중반 일본 정치권이 혼미를 거듭하며 그 동안 왕따 신세였던 공산당은 중흥기를 맞았고 비례대표제 하에서 1996년 중의원 선거와 1998년 참의원 선거에서 연달아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 중의원 선거에서 지역구 선거에서 전멸한 걸 시작으로 당세가 다시 쇠퇴하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2003년 자유당이 민주당으로 합류한걸 계기로 양당제가 고착화되며, 지지기반 상당수가 민주당(일본)으로 이동하면서 사실상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안습. 그래도 2013년 들어 유신회와 민주당이 동시에 죽을 쓰면서 선거에서 상승세이긴 하다.

3. 현황

90년대에는 당원이 계속 감소하다가 최근 일본의 경제난 여파로 인해 청년 당원들이 증가하고 있다.[13] 하지만 마오이즘 신봉,[14] 60년대 폭력적 무장투쟁, 그리고 적군파 등 극좌 테러단체 이미지 연상으로 대중들의 인식은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우익 성향의 대형 미디어매체에서 심심하면 북한과 연계가 있다고 두들겨 패는 통에...

2013년 6월 23일 치러진 도쿄 도의회 선거에서 17석을 확보하여 민주당을 꺾고 도쿄 제 1야당에 등극했다. 흥미롭게도 당선된 17명의 의원 중 11명이 여성이다. 도쿄 도의회 선거가 대체로 참의원이나 중의원 선거의 전초전으로 평가받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공산당이 제23회 일본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약진할 가능성도 있어보인다.

그리고 정말로 약진했다. 비례대표에서 목표로 하던 5석을 획득하고, 선거구에서도 12년만에 의석을 획득했다. 도쿄 (개선수 5)에서 3위, 오사카 (개선수 4)에서 4위, 교토 (개선수 2)에서 승리했으며, 특히 교토에서는 창가학회 등에서 공산당을 떨어트리기 위해 막판에 민주당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었음에도(...) 이러한 결과가 나왔다. 결과적으로 공산당의 참의원 개선+비개선 의석은 총 11석으로, 향후 6년간 (2016년 참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 3석 확보만 한다면) 공산당 단독으로 법안 제출이 가능해졌다. 덧붙여서, 총 의석 수가 10석 이상이기 때문에, 당 대표가 총리를 상대로 1대1 토론을 하는 당수토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2014년 중의원 선거에서 보여준 모습은 진격의 공산당
유신이 망하고 민주가 약진한 것 이외에는 의석변동이 거의 없었으나 공산당만은 혼자서 2배이상의 의석을 확보하면서 2000년 이후 처음으로 20석이상을 확보했다. 물론 상당수 지역구에서 팀킬했다는건 안 자랑(...)

이번 선거에서 공산당이 타 야당과 차별화 된 점은 소위 블랙기업에 대한 대책을 주요 정책으로 어필했다는 것으로, 이것이 공산당이 약진할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닌가 하는 분석도 있다.

그외에도 반 개헌의 중심이 된 이유도 있다. 아사히 TV에 따르면 이번 선거에서 큰 정부 작은정부에대한 각당의 의견은 명확했으나 집단적자위권에대해서는 자민,공명,차세대의 찬성에 비해 민주당은 미묘한 입장 표현 유신회는 하시모토(집단적 자위권 용인) 와 에다(개별적 자위권으로 충분한 입장) 공동대표의 입장차, 사민-생활의 약소화에 대비해 공산당은 명확한 반대와 명분때문에 집단적 자위권 반대론자의 중심이 된것이라 하였다.

4. 대외 정책

공산당 홈페이지의 영토분쟁 관련 입장을 보면 "한국에 대해 식민지 지배에 관한 진심어린 사과가 우선되어야만 영토분쟁 해결을 위한 테이블을 마련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했을 때도 이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일본 국회에서 채택하자 사민당과 공산당만이 반대표를 던질 정도로 영토분쟁에 관해서 호전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일단은 일본의 제도권 내의 정치세력 중에서는 가장 전향적인 편.

반대로 러시아와의 쿠릴 열도 분쟁에 있어서는 일본에서 가장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정당이다. 일본측에서 주장하는 이른바 북방 4개 도서 중 하보마이와 시코탄 두개는 애시당초 쿠릴열도가 아니라 홋카이도의 부속도서이므로 당연히 일본 땅이라는 입장이고, 나머지 쿠나시르와 이투르프 두개의 섬 뿐만 아니라, 쿠릴 열도 전체를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건 홋카이도의 지역정당인 신당대지(다이치)도 그렇다.

5. 북한과의 관계


당명이 일본 공산당이다 보니 한국에서는 북한과 깊은 연관이 있고 북한을 지원해주는 악의 조직 마냥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북한과의 관계는 당내외 정치적, 사회적 입장 때문에 교류는 전혀 없다. 북한 조선노동당과는 창당 때부터 티토주의적 노선으로 창립 이념부터 차이가 있었고 친밀도만 보자면 일본 공산당 보다는 일본 사회당이 북한과 더 친밀했다. 그러나 의지하고 있던 일본 사회당부터, 연대관계인 유럽지역 사회주의 정당이 북한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이들 때문에라도 아예 교류가 없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방북단을 보내기도 했지만 북한이 무슨 생각을 한건지, 1968년에 일본 공산당 방북단이 묵고 있는 객실에 도청기를 숨겨놨다가 딱 걸렸다. 이를 계기로 방북은 종결, 관계가 급격히 악화됐는데 1983년에 북한의 아웅산 테러 사건이 벌어지자 일본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일체의 교류를 단절한다고 알려졌다. 그 후 90년대 들어서 산케이 신문과 후지 TV 등 메이저 언론사가 북한의 일본인 납치에 일본 공산당이 관여되어 있다고 의혹을 제기하자, 일단은 북한과 교류가 단절됐다고 알려진 일본 공산당은 발칵 뒤집힌다. 이들은 언론에 정면으로 맞서는 한편, 그 동안 무시로 일관해왔던 북한에 대해서 어느 정도 비판적인 입장을 표출하기 시작한다. 특히 발사체가 일본 상공을 지나간 1998년 북한의 대포동 1호 발사 실험 사건 이후부터는 극도로 험악해져서 그 이후부터는 북한을 비판할 때 과격한 발언들이 속출한다.

6. 기타

당 기관지로 아카하타(赤旗)를 갖고 있다. 이쪽도 꽤 연원이 깊다. 흔히 '적기 신문'이라고 불리는 것. 공산당원이라면 구독이 반 쯤 의무화 되어 있다. 일요판과 평일판이 다른 것으로도 유명한데, 평일판이 주로 당 소식 등을 다루고 있다면, 일요판은 말 그대로 일반 신문처럼 나온다. 당원이 아닌 사람 중에는 일요판만 따로 사는 사람도 있단다. 여담이지만, 정치자금 수집력이 낮은 일본 공산당의 주된 자금원이 바로 이 신문팔이 수입이다.(...) 참고로 잘 나가던 시절의 일본 사회당(현 사민당)의 자금원은 노조 활동비였다.

전국적으로 지지율의 편차가 거의 없이 10% 대의 고정 지지율을 얻는 편으로 지역구 소선거구제에서 고전하고 있다. 지역구에서 낙선한 사람들이 비례대표로 석패율제의 힘을 입어 생환하는 편. 그나마 잘 나가는 지역은 칸사이, 그 가운데서도 교토다. 과연 그 외에는 대도시권에서 그나마 지지도가 있는 편이다.

시이 가즈오 위원장이 쓴 <지금, 일본 공산당>이 2013년 5월에 한국에 번역되었다. 내부에서 바라보는 시각이라 어느정도 가감의 여지는 있지만 일본 공산당이 해온 행적과 정책 방향을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2000년대 후반 일본의 경제난 때문에 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가진 청년들이 폭발적으로 공산당에 입당했다고 한다.#

1945년 일본 제국이 패망한 뒤에는 일본인민공화국을 세우려고 했었다. 덴노를 폐지하고 전쟁을 금지하는 공화국을 세우기 위해 "일본인민공화국 헌법 초안"을 발표했으나 GHQ로 부터 무시되었다. 국수 민족주의적인 중국이나 북한과 같은 방향으로 가려 했던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이들은 일본 제국의 탄압을 호되게 받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소련과는 동일한 노선이다. 한국에서도 광복 직후에 조선인민공화국을 세우려 했으나 일본인민공화국과 똑같이 미국으로부터 무시당해 실패했다. 만일 세워졌다면 덴노가 폐지되고 국가원수로 주석이나 대통령을 세우고 농업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군사 관련에 대해서도 군대(/자위대) 그런거 없이 국경경비대급의 준군사조직만 조직하여 "아시아코스타리카"로 만들었을 것이고, 주변국(중국, 한국, 소련, 미국 등)의 간접적인 압박으로 독일처럼 과거사 청산을 확실히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7. 역대 선거결과

7.1. 중의원 선거

연도의석수정수득표율
194654663.85%
194744663.67%
...
1969144866.81%
19723849110.49%
19761751110.38%
19793951110.42%[15]
1980295119.83%
1983265119.34%
1986265128.79%
1990165127.96%
1993155117.70%
연도의석수정수득표율(지역구/비례대표)
199626[16]50012.55%/13.08%[17]
20002048012.08%/11.23%
200394808.13%/7.76%
200594807.25%/7.25%
200994804.22%/7.03%
201284807.8%/6.1%
20142147513.30%/11.38%

7.2. 참의원 선거

연도개선의석/비개선의석득표율(지역구/비례구)
...
19958/610.38%/9.53%
199815/815.66%[18]/14.60%
20015/159.87%/7.91%
20044/59.84%/7.80%
20073/48.70%/7.50%
20103/37.29%/6.10%
20138/310.64%/9.68%[19]
1996년~1998년의 리즈시절 이후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그러다 2013년 참의원 선거에서 8석을 확보하면서 반전되었다.

8. 카쿠산부

カクサン部

일본 공산당의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특설 사이트이자 캐릭터 시리즈. 카쿠산, 오텐도SUN, 포켄 스승 등의 아기자기한 캐릭터들이 그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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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래도 지방선거에서는 나름대로 힘을 쓰고 있어서 2014년 기준으로 기초의원 의석수는 공명당과 작은 차이로 2위, 자민당이나 민주당의 약 2배다.
  • [2] 1966년에 일본 공산당으로부터 제명 당한 후쿠다 마사요시가 창설한 정당으로 자신들이 진짜 정통 공산당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참고로 그의 제명 사유는 중국정부의 지령을 받으며 별도의 활동을 벌인 것. 2001년에 후쿠다가 노환으로 사망한 이후 거의 활동 중단 상태다.
  • [3] 강령 내용을 확인해보면 "지금 미국 제국주의는 세계의 평화와 안전, 나라의 주권과 독립에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다. 그 패권주의, 제국주의의 정책과 행동은 미국과 다른 독점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사이에도 모순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또한 경제의 '세계화'를 명목으로 세계 각국을 미국 중심의 경제 질서에 통합하려고 하면 경제적 패권주의도 세계 경제에 심각한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
  • [4] 특히, 1931년 만주사변을 전후로 탄압이 심해져, 일본 공산주의자로 유명했던 사노 마나부 같은 인물조차 '전향'을 강요당하고 전향할 수 밖에 없던 정도였다.
  • [5] 이때의 무장투쟁 노선 포기가 나중에 신좌익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는 후문이 있다.
  • [6] 이 때 공명당도 주요정당으로 부상하게 된다.
  • [7] 일본의 신좌익과 적군파는 일단 직접적으로 일본공산당과 관계가 있지는 않다고 알려져있다. 신좌익이라는 말 자체가 구좌익인 일본공산당과 결별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들은 일본 공산당 중앙당사가 있던 요요기(代代木)의 이름을 따서 반요요기파 라고 불렸다.
  • [8] 단, 1976년 중의원 선거에서 록히드 사건등의 호재에도 타 정당에게 의석을 빼았기는 바람에 참패했다. 단, 득표율은 소폭 감소에 그쳤다.
  • [9] 단, 6개월 뒤에 펼쳐진 중의원 선거에서 사상최다 의석수를 기록했다.
  • [10] 공명당은 공산당과 지지율이 겹쳐 있는 데다가, 공산당의 폭로 때문에 이미지가 나빠진 적이 있어 공산당에 앙심을 품고 있었다. 공명당의 지지모체인 창가학회와 공산당이 1974년에 신사협정을 맺은 적이 있는데, 공명당이 거세하고 반발하여 조인 즉시 사문화되었고, 공산당 위원장 미야모토 켄지의 전화를 창가학회가 도청한 사건이 발각되면서 둘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민사당은 민주사회당이라는 당명과는 다르게 반공주의를 표방하던 정당이었기 때문에 (칠레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를 '하늘의 계시'라고 하는 수준) 사이가 좋을래야 좋을수가 없었다.
  • [11] 이 결별에는 사회당의 친북 성향과, 방문단을 보냈더니 도청이나 하는 북한에 대한 배신감이 팽배한 일본 공산당과의 입장 차이도 있었다고 한다.
  • [12] 다만 소련의 붕괴가 일본 공산당 의석수 저하와 직접 관계가 있는 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 당시 일본 공산당의 의장 후와 테츠죠는 소련의 붕괴를 환영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었다.
  • [13]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경향이 있는 20대를 주력 지지층으로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심지어 니코니코 동화 생방송에 일본공산당 소개 방송을 개설하기도 할 정도.
  • [14] 1960년대에 무장혁명노선을 포기하면서 같이 버렸다. 이 때 마오이스트들도 같이 짤렸는데 그 짤려나온 사람들이 만든 정당이 일본공산당(좌파)
  • [15] 원내 4당, 지지율 3당. 공명당의 약진 때문.
  • [16] 소선거구 2 + 비례 24
  • [17] 사민당을 꺾으며, 자민, 신진, 민주의 뒤를 이은 제4당
  • [18] 공명당을 꺾은 제3당
  • [19] 유신회 민나노당이랑 공동3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