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인천 상륙작전

last modified: 2016-08-01 16:35:47 Contributors

인천 상륙작전
날짜
1950년 9월 15일 ~ 1950년 9월 28일
장소
인천광역시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국제연합
대한민국
미국
네덜란드
뉴질랜드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북한
지휘관 더글라스 맥아더[1]
서 듀이 스트러블[2]
드워드 알몬드[3]
리버 스미스[4]
손원일
정일권
신현준
백인엽
김일성
최용건
병력 75,000명
함정 261척
불명
피해 규모 222명 전사 1,350명 전사
결과
국제연합의 승리
기타
국제연합의 반격 시작.

soldiers_climbing_sea_wall_in_inchon.jpg
[JPG image (Unknown)]
방파제를 넘는 미 해병대(1950년 9월 15일 오전 6시경, 인천, 신원미상의 종군기자 작품).

이 사진에서 가장 앞장서서 장애물을 오르고 있는, 소대원들을 이끌고 있는 제1해병사단 1/5대대 에이블 중대 3소대장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는 이 사진이 찍힌 바로 몇분 후,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을 공격하기 위해 첫번째 수류탄을 투척 후 곧바로 두번째 수류탄을 투척도중 적군 자동화기에 가슴과 오른 어깨를 피격당해, 막 투척하려던 수류탄을 땅바닥에 떨어트렸다. 자신이 떨어트린 수류탄 때문에 소대원들이 위험에 처하게 되자, 온몸으로 막아 대원들을 구하고 그 자리에서 즉사, 전사했다. 당시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는 인천 상륙작전에 참가한 소대장 중 유일하게 실전 경험이 없었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래서 이 사진은 인천 상륙작전의 기념비적인 사진으로, 쌍안경을 들고 있는 맥아더 원수의 사진과 함께 역사에 길이 남을 사진이 되었으며, 발도메로 중위는 그 전공을 기려 사후 미국 군인이 받을수있는 최고의 무공훈장인 명예 훈장(Medal of Honor)에 추서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딴 해상 수송선인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함'[5] 이 있다. 해당 함에 이름이 붙은 경위는 다른 이유도 많지만 그가 전사한 전장이 인천 상륙작전이라는 것과 그의 업적을 기린 배가 수송선이라는 것이 공통점이기 때문이다.

영어 : Battle of Inchon
러시아어 : Инчхонская десантная операция
프랑스어 : Bataille d'Incheon
독일어 : Landung bei Incheon
스페인어 : Batalla de Incheon
일본어 : 仁川上陸作戦
중국어 : 仁川登陆, 仁川登陸戰

Contents

1. 개요
2. 과정
2.1. 배경
2.2. 상륙작전의 결정
2.2.1. 인천의 험준함
2.2.2. 인천이 결정된 이유
2.3. 준비
2.4. 적의 예측
3. 상륙
3.1. 서울로 진격
4. 재평가?
5. 기타

1. 개요

드네임으로는 오퍼레이션 크로마이트 (Operation Chromite). 6.25 전쟁 중, 더글러스 맥아더의 지휘 아래 인천에서 UN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펼친 상륙작전. 한반도의 허리 부분을 장악한 이 작전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전황이 뒤바뀌는 한 계기가 되었다.

2. 과정

2.1. 배경

k27_10260171.jpg
[JPG image (Unknown)]

러쉬
6.25 전쟁이 개전된 이래 북한군은 국군을 낙동강 전선까지 밀어내는데 성공하나, 이곳에서 전선이 고착되게 된다. 인민군은 길어진 보급로와 계속되는 전투, 그리고 미칠듯이 쏟아부은 폭격으로 인해 정예부대의 전투력이 크게 고갈된 상태였다. 당장 1950년 9월 당시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에 투입한 병력은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강제 징집한 타칭 의용군 5만여 명을 포함해서도 10만 명이 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국군은 UN군의 참전 덕분에 적과 대등 또는 그 이상의 병력을 확보하고서 낙동강 전선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태까지의 실전경험을 살펴본 결과, 산을 저지선으로 삼을 경우 북한군이 샛길 등으로 산을 쉽게 넘어가서 아군을 역포위하는 문제가 있으므로 국군과 UN군은 낙동강을 주요 저지선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수비를 할 때는 아주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역공을 하려면 아군도 강을 건너면서 매복한 적에게 개활지에서 엄폐물 없이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문제점 때문에 반격도 쉽지 않았고, 북한군 역시 격심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공세의 기세를 늦추려 하지 않아 낙동강 전선의 국군 및 UN군은 마땅한 반격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실제로 낙동강 방어선에서 UN군이 반격을 시작할 경우, 38선까지 도달하는데만 10만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며, 그 기간도 상당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올 지경이었다.

2.2. 상륙작전의 결정

당시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전황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적 후방에의 상륙작전을 원했다. 이는 북한군이 빈약한 육상보급으로 현재의 전선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 보급선을 잘라버리면 일제히 총붕괴될 것으로 충분히 예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시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보급을 위해 사용한 육상 교통인 경부선 철도와 경부 가도는 필연적으로 서울을 통과했고, 따라서 인천에 상륙해서 서울까지 진격할 경우 이 보급선을 완전히 끊을 수 있었다.

덤으로 한국지형의 특성상 보급로가 끊어지면 전차등의 중장비는 몽땅 버리고 사람만 빠져나오기도 힘든 상황이 펼쳐지기 때문에 잘하면 단번에 쳐들어온 조선인민군을 몽땅 제거할 수 있는 기회도 만들 수 있었다.

2.2.1. 인천의 험준함

이에 참모들이 처음 생각한 곳은 군산시였다. 하지만 군산은 상륙조건 자체는 좋으나 적의 보급선을 하나도 끊지 못하며, 적의 병력도 하나도 포위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었고, 이런 점 및 맥아더 장군 자신의 소신으로 인해 맥아더 장군은 혼자서 끊임없이 인천 상륙을 주장했다.

하지만 참모들과 상륙작전을 실제로 수행할 미 합동참모본부(합참)와 해군본부도 인천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을 굽히지 않았는데,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 조수간만의 차가 최고 수치는 9m, 최소 수치도 7m라서 대한민국 2위를 자랑할 지경이므로 밀물 때 상륙하지 않으면 상륙군이 수백미터 이상을 엄폐물도 없이 질주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다. 그리고 밀물때 상륙한 상륙선은 다음 밀물이 올 때까지 좌초하므로 적의 반격시 탈출하기도 힘들다.

  • 썰물이 되면 나타나는 갯벌은 수백미터 이상의 폭과 길이를 가지고 있으며, 도보 및 차량통행이 거의 불가능하다.

  • 위 두 항을 이유로 선발대는 상륙 후 최소 9시간 동안 어떠한 지원이나 보급도 받을 수 없다 .

  • 상륙지 주변에 모래사장은 없다고 봐야 하고, 보통은 돌로 쌓은 높은 방파제와 축대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배타고 방파제에 다가가서 사닥다리 놓고 올라가는 전근대적 공성전을 벌여야 상륙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인데, 당연히 방어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 방어시설이 잘 갖추어진 항구를 직접 점령하는 것은 디에프 상륙작전이후 거의 금기시된 일이며, 설령 상륙이 성공적이더라도 적이 매복한 인천시내를 시가전을 치르면서 점령해야 하는 등 난제가 산적해있다.

  • 썰물이 되면 선박이 통행할 수 있는 수로가 비어수로라고 불리는 좁은 통로에 국한되므로 상륙작전을 하는 선박 및 지원포격을 하는 선박이 모두 좁은 단일 통로에 밀집한다. 이는 방어군의 해안포 입장에서는 그냥 고정표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비어수로의 유속이 매우 빨라서 주의하지 않으면 엇 하는 사이에 엉뚱한 곳으로 배가 떠내려가기 일쑤다.

이렇게 인천이 상륙하기 힘든 특징이라는 특징은 거의 모두 보유하는 바람에 일부 참모는 과장삼아 "성공율은 1/5000도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고 그들은 대안으로 전라북도 군산이나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앞바다로 장소 변경을 권하기도 하였다.

2.2.2. 인천이 결정된 이유

인천이 이렇게 상륙하기 빡셈에도 불구하고 상륙지로 결정된 이유는 일단 인천 이외에 맥아더 장군이 원하는 적 후방의 완전 단절이라는 조건을 만족할 만한 장소가 없었다.

  • 군산시의 경우 상륙하기는 양호하나 앞서 언급했듯이 적의 보급선을 하나도 절단하지 못하는데다가, 적의 병력도 하나도 포위하지 못한다. 이런 곳에 상륙하느니 해당 병력을 부산으로 증원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결론이 난지 오래였다.

  • 평양직할시 이남의 남포특별시도 기대할 수 있었으나, 이 지역은 적의 수도 바로 턱밑이므로 방어가 튼튼한데다가 결정적으로 원산시-서울특별시-낙동강 보급선은 막지 못하는 것으로 예상됐다.

  • 포승읍은 현재의 평택항 근처로, 이 곳이 바로 대한민국 1위의 조수간만의 차를 자랑하는 아산만 유역이다! 그나마 수도에서 정서방에 다다르는 인천과는 달리 수도와의 거리도 형편없이 먼 데다 조수 간만의 차도 극복하기 어려워 한반도 역사 동안 아예 버려진 땅이었다. 오늘날의 평택항의 개발이 이루어진 건 토목 기술 수준이 괄목할 정도로 좋아진 1990년대 이후의 이야기이다. 또한 북한군이 인천항을 폭파해서 못 쓰게 만들 시간을 준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당장 상륙작전시는 물론이거니와, 이후 북진때도 인천항을 주보급항으로 사용해야만 작전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난 지 오래였다.

  • 인천이 유일하게 유리한 점이 있다면 배치된 병력이 매우 적을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대략 1,000명 이내의 병력만이 상륙시 인천을 지키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위와 같은 이유를 들어 맥아더는 합참과 해군본부를 설득했고 결국 1950년 8월 28일,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은 최종승인을 받게된다. 다만 인천 상륙작전의 구상에 대해서는 맥아더 이전에, 심지어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이미 미군 내에서 충분히 유력한 작전으로 검토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Clay Blair의 『The Forgotten War』에 따르면, 1950년 6월 19일 미 국방부가 소위 SL-17 계획을 승인, 배포했는데, SL-17 계획은 북한군의 남침 시에 낙동강 선까지 후퇴하여 전선을 안정화하고 9월 30일까지 인천 인근에서 상륙작전을 하여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군을 고립시킨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1950년 6월 26일에 연합군 최고사령부(맥아더사령부)가 SL-17의 복사본 50개를 요구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으로 미루어보면 맥아더와 별개로 이미 미군은 북한군의 침공에 대응하는 작전 전반을 구상한 상태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곧 앞서 언급한 인천의 험준함으로 인해 해당 계획은 그냥 서류상에만 남았으며, 맥아더가 이 계획을 현실화하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한 것을 볼 때 인천 상륙작전은 맥아더의 작품이 맞다. 항상 그렇지만 누구나 착상은 가능하지만 실제로 그걸 이룩하는 사람만 진정한 공로자로 본다.

2.3. 준비

참가부대
  • 미군
    • 미 10군단[6] - 에드워드 알몬드 중장
    • 미 해병 제1사단 - 올리버 스미스 소장
  • 한국군
    • 제17연대 - 백인엽 대령[7]
    • 해병대 제1연대 - 신현준 대령

또한 9월 초, 대한민국 해군 참모총장인 손원일[8] 제독은 비밀리에 이희정 중령과 함명수 소령에게 해군 육전대(陸戰隊)를 편성, 영흥도 및 덕적도에 대한 탈환을 지시했고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인천 상륙작전의 기반을 닦았다. 이어서 9월 10일부터 본격적인 사전 준비포격 및 공중공격을 시작했다.

한편 아무리 무리해서 인천으로 계획을 잡았더라도 그러한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 중요했다. 따라서 상륙작전을 준비하는 듯한 공격이 다른 곳에도 실시되었는데 그곳이 삼척, 남포, 군산이었으며, 9월 4일부터 9월 14일까지 F4U 콜세어를 동원하여 폭격을 하였다. 상륙 이틀 전, 9월 13일에는 강원도 삼척으로 아이오와급 전함 미주리호[9](BB-63 Missouri)를 출동시켜 삼척 일대에 함포 사격을 가하여 적들의 눈을 돌리려고 하였다. 또한 같은 날 낙동강 전선의 총사령관인 미 제8군 사령관 해리스 월튼 워커 중장은 기자회견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은 10월 중순 즈음에 총반격을 감행할 것입니다"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라고 발언함으로써 기자들이 유엔군과 국군이 10월 즈음에 총반격을 한다는 기사를 앞다투어 내도록 유도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북한군 수뇌부에서는 후방에 남아있는 예비 부대를 모두 낙동강 전선에 투입해 전쟁을 빨리 끝내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미 해군 첩보수집 특공대에 배속된 임병래 중위의 공작조는 미리 인천에 잠입하여 인천의 장비배치도, 배치병력, 고지 등의 정보를 수집하는 활동을 벌였으며 월미도에서 북한군 군관 2명을 생포하였다.

상륙 작전 사흘 전, 9월 12일에는 영국 SAS 부대가 전라북도 군산에 잠입하여 북한군을 속이기 위해 미군의 군용장비를 일부러 버려두고 퇴각하였다. 또한 상륙 바로 전날 9월 14일 영덕 장사리에는 장사 상륙작전을 시행하는 기만 작전을 벌였다.

그러나 같은 날 9월 14일, 앞서 첩보 수집을 위해 투입되었던 임병래 중위의 공작조가 북한군에게 발각되자 위기에 놓였고 퇴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임병래 중위는 홀로 남아 북한군과 교전하였다. 그가 벌어준 시간 덕분에 특공대 공작조는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으며 그는 북한군에게 생포되었을 경우, 고문당하여 정보를 누설할 것을 염려하여 마지막에 자결하였다. 후에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전공을 기려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고 윤영하급 고속함 함명 PKG-722에 그의 이름을 붙였으며 미국 정부 역시 은성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2.4. 적의 예측

마오쩌둥은 북한에게 상륙작전이 벌어질 가능성에 대해 경고한 일이 있으며[10] 북한군은 인천에 유엔군이 상륙할 때를 대비해 서해안 방어사령부를 신설하고 18사단을 비롯한 여러 방어용 신규 부대를 편성하는 한편 월미도에 해군 인원들로 구성된 방어진지를 만드는 등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에서 9월 공세를 진행하면서 병력과 장비가 모자라자 이렇게 경기도 일대에 준비해 둔 방어 부대까지 빼서 동원했고, 그 결과 9월 15일 인천 미도에 한/미 해병대가 처음 상륙했을때 당장 인천 일대에서 방어에 임하고 있는 병력은 월미도의 해군 육전대 2개 중대 규모의 병력과 인천 시가지의 2개 대대 병력 정도밖에 없었다.

물론 북한도 이런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은 하고 있었는지, 소련의 도움을 받아서 주요 항구에 기뢰를 부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천에 기뢰를 부설하기 시작한 시점이 너무나 늦어서 몇 개 부설하지도 못했으며, 그나마 부설하던 작업원이 포착돼서 공격을 받고, 부설한 기뢰도 거의 다 발견돼서 조기에 제거되었다.

3. 상륙

인천 상륙작전은 크게 세가지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월미도 제압 : 해안포와 동굴진지가 갖추어진 월미도와 소월미도를 제압해서 상륙작전의 안전을 도모하고 인천항과 시가지등에서 날아오는 반격에 대항할 토대 및 방패막을 만든다.
  • 인천항 상륙 : 인천항에 직접 상륙해서 항구를 조기에 확보한다. 가장 어려운 임무이므로 미해병대중 가장 베테랑인 부대를 동원한다. 이때 높은 방파제를 돌파하기 위해 일본에서 나무사다리 수천개를 긴급히 제작해서 공수했다고 한다. 위 사진에서 사용하는 사다리가 바로 그 사다리이다.
  • 인천 남동부 상륙 : 인천항에서 적의 방어군이 방어작전에 임하고 있을 때 후방으로 우회해서 경인가도를 장악하여 인천을 고립시킴과 동시에 서울방면에서 오는 적의 증원군을 차단한다.

상륙 하루 전 9월 14일, 인천 방면에 주둔하던 북한군은 평양으로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 적 함정들이 인천에 접근 중. 다수의 항공기가 월미도를 폭격 중. 유엔군 상륙기도가 극히 농후함.
  • 휘하 전 부대에 전투준비를 명하였음. 적이 상륙을 기도하면 저지 및 격멸할 것임.

이를 들은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급히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지만 소련이라고 한들 별 도리가 없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 당일 새벽
제7합동기동부대 아서 듀이 스트러블 제독의 지휘 아래 항공모함, 구축함, 순양함 등 8개국 261척[11]의 함정이 인천 앞바다에 집결하였다.

9월 15일 00시 05분
클락 소위(Clark)와 한국인 부대가 팔미도의 등대를 점령하고, 등대를 켰다.[12]

9월 15일 05시 00분
미 해군이 월미도에 상륙 준비 사격[13]을 감행하였다.

9월 15일 05시 45분
미 제15항모부대의 F4U 콜세어 10대가 출격하여 해안가 지역에 폭격을 감행한다.

9월 15일 06시 33분
미국 해군이 녹색 해안(Green Beach)에[14] 함포 사격을 마친 후 미국 상륙주정 7대가 녹색 해안 상륙에 성공한다.
상륙한 이들은 사상자 없이 무사히 인천 월미도 105고지를 탈환하는데에 성공한다.

9월 15일 10시 00분
미군이 소월미도에 공격을 감행하였고 오전 11시 15분 즘 소월미도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15]

9월 15일 14시 30분
미 해군이 다른 상륙 지점 중 하나였던 적색 해안(Red Beach)과 청색 해안(Blue Beach)에 함포 사격을 감행한다.
미군의 함포사격이 진행 중일 때 미 육군 7사단, 대한민국 육군 제 17연대와 해병 제 1연대는 미군 상륙주정에 옮겨서 상륙을 대기하였다.

9월 15일 17시 32분
함포 사격 후 미 해병대 제1연대가 청색 해안 상륙에 성공한다. 또한 곧바로 그 뒤에 미 해병 제5연대가 적색 해안 상륙에 성공한다. 적색 해안에 상륙한 제5연대는 인천 시가지 소탕, 해안 경비를 맡으며 작전을 진행해갔다. 벙커에서 저항하던 북한군에 맞서 불도저로 벙커자체를 땅 속으로 묻어버리는 효율적인(?)[16] 전략으로 사상자 없이 빠르게 진격해갔다. 북한군의 잔존병력이 몇 없었기에 허를 찌른 격이 되어서 인천항의 주요 감제고지 탈환에 성공하고 인천항의 도크를 확보하였으며 북한군을 시가지 내부에 몰아넣어 모두 소탕하였다. 대한민국 해병 제1연대가 상륙하는 것을 끝으로 인천 상륙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 후 유엔군과 국군은 경인가도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인천 상륙작전을 완벽히 성공시켰다.

이때 총 지휘는 맥아더 장군이 했으며 국군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이 했다(홍은혜 여사의 회고집인 '우리들은 이 바다 위해' 수록). 손원일 제독은 단순히 기함에서만 지휘를 한 것이 아니라, 해병 전투복을 입고 해병대와 함께 상륙, 서울 수복시까지 해병대원들과 일선에서 함께 했다. 이로 인해 그는, 서울에 입성한 국군 최선임자라는 기록을 세웠다. '대한민국 국군은 서울을 수복했다'는 포고문 역시 그의 명의로 작성된 것이다.

3.1. 서울로 진격

그리고 인천은 다음날 아침까지 완전히 해방되었으며, 북한군의 이렇다 할 반격은 전혀 없다시피 했다. 그 결과 인천에서 유엔군이 입은 손실은 전사 21명에 실종 1명, 부상 174명에 불과했다. 비전투 사상자를 포함해도 부상자가 188명으로 늘어날 뿐이었다.

이후 미 해병 1사단을 주축으로 한 상륙부대는 9월 17일 오전에 내륙으로의 진군을 시작했으며, 이날부터 18일까지 산발적인 전투를 치러 영등포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북한군은 인천 방면의 증원을 위해 T-34/85 전차와 병력을 보냈으나, 부평근방의 경인가도에서 오히려 미리 매복한 미 해병대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추태까지 보이면서 혼란에 빠졌다.

이 시점에 와서야 북한의 김일성은 인천이 주공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으며, 경인가도에 지뢰를 엄청나게 부설하는 한편, 급히 진격방향을 바꿔서 김천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온 북한군 9사단 87연대가 필사적으로 영등포를 방어하는 사이에 서울로 동원할 수 있는 2선급 부대는 모두 동원했다. 하지만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중국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낙동강 전선의 주요 정예부대는 극히 일부만 빼내서 서울로 올렸기 때문에 병력에서나 장비에서나 상륙군에 대항하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돌아가는 동안 인천에 상륙한 부대는 2개로 나누어진다. 주공은 경인가도를 따라서 김포비행장을 탈환하고 영등포에서 격전을 치루며, 9월 19일에는 미 해병 1사단이 한강을 건넜으며 20일에는 주력부대의 추가 도하가 이루어졌다. 한편 수원으로 향한 부대는 경부가도를 차단하고 수원과 수원비행장을 탈환하는 목표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일단 김일성이 부족하나마 근처의 부대를 서울로 집중시켰기 때문에 미군과 국군은 연희고지 일대에서 북한군의 방어에 며칠이나 저지당하기도 했지만 결국엔 서울 시내로 돌입하는 데 성공,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9월 27일에는 중앙청을 점령하고 태극기를 게양하는 데 성공했고,[17] 27일 밤 서울 일대의 인민군이 전부 후퇴하면서 인천 상륙작전은 막을 내린다. 이 기간 전체를 통틀어 유엔군이 입은 피해는 전사 500여 명과 부상 2,000여 명이었으며, 그 대가로 사살 1만 5천여 명과 포로 6천여 명을 획득했다.

인천 상륙작전의 시기에 맞추어 낙동강 전선 일대에서도 대대적인 반격 작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북한군의 두 배가 넘는 병력을 유엔군이 확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격은 지지부진한 성과만 보였는데, 9월 20일 무렵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사실이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에게 알려지자 북한군은 붕괴되고 말았다. 한반도의 서부가 유엔군에게 장악당했으므로 보급선을 동쪽으로 이동시켜야 했는데, 이는 태백산맥의 험산준령 때문에 거의 불가능했다.[18] 어떤 전쟁이라도 최전선 전투부대의 보급선을 끊으면 승리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낙동강 전선 일대의 북한군 병력들은 2만이 넘는 정도의 병력만이 제대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북한군중 만이천명 정도가 포로가 되었고, 만 명이 좀 넘는 정도의 병력은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이 되었으며, 낙동강 일대의 북한군 병력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던 남한 내에서 강제징집된 인원들은 도망쳐서 원래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상당수가 대한민국 정부의 징집영장 크리를 맞고 다시 군대엘 갔다

이 작전으로 북한군이 입은 타격은 그냥 '전멸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 뒤는 쭉쭉 밀려날 수 밖에. UN군은 파죽지세로 저멀리 압록강까지 진격하게 된다. 뭐 이후 상황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안드로메다지만.

4. 재평가?

1990년대 이후 현대 전쟁학자들은 인천 상륙작전 자체는 흠이 없었지만 이후 대응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인천-서울 라인. 즉 한반도의 서부를 장악한 후, 바로 기동병력을 동쪽으로 보내 한반도의 허리를 장악했어야 했다고 평가된다. 그러면 북한군의 보급로와 퇴로를 장악해 당시 북한군의 주력을 싸그리 포위섬멸 할 수 있었다. 이 작전이 성공했다면 중공군이 개입하기 전 전쟁을 끝낼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맥아더 원수는 인천을 점령한 후. 바로 병력을 다시 배에 태워 원산 상륙작전을 계획했으나 그 과정에 시간이 너무 걸려 오히려 국군 기동병력이 원산시에 더 빨리 도착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아군의 진격이 적군의 후퇴보다 더 빠를 리가 없으니. 상당수의 북한군이 태백산맥을 넘어 후퇴, 재편성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것이 전쟁을 종결짓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최소한 도움은 되지 않았을 것은 확실하다.

일단 전쟁학자들의 의견 중 일부는 타당하다. 김일성이 서울에 병력을 집결시키기도 전에 위험을 무릅쓰고 빨리 서울로 진격했으면 서울 시가전이 그렇게 치열하지 않을 수 있으며, 원산 상륙작전의 경우 효용성 자체도 문제가 있고, 꼭 하더라도 이미 상륙한 부대를 다시 인천항에 집결시켜서 다시 배에 탑승시킨 다음, 동해안까지 빙 돌아서 항해한 다음에 상륙하는 시간낭비를 하지 말고 별도의 부대를 빨리 보내는 편이 바람직했다.

하지만 전쟁학자들의 의견에는 한가지 큰 문제점이 있는데, 당시의 강원도태백산맥의 험준함과 교통시설 미비를 전혀 감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도 강원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교통시설이 부족하며, 특히 대량의 물자를 육로로 운송할 수 있는 철도시설은 21세기의 시점에서도 크게 부족하다. 특히 서울에서 정동쪽 방향으로 진격할 경우, 경기도 경계를 넘어가면서부터는 도로라고 이름붙이기도 뭐한 험준한 비포장도로를 이용해야 하며, 지독한 산악지대를 횡단해야 동해안에 이르게 된다. 애초에 서울 탈환 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서 수원 방면을 맡은 부대의 일부가 서울 남쪽에서 한강을 도하해서 남산을 점령하고 시가전을 지원한 사실이 있을 정도였는데, 소수의 기동부대가 험준한 산골짜기를 횡단한다고 하면 적의 저항이 없다고 해도 속도도 느리며, 포위망을 구축했다고 해도 간신히 길만 막은 상태라 능선을 따라 도주하는 북한군을 완전히 포위섬멸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이는 북진작전에서 이미 산악지대에 아군이 맹진격하고 있었으나, 금천에 포위된 북한군이 장비를 버리고 인원만 탈출한 것을 막지 못한 것으로 이미 증명된다. 게다가 북한군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므로 재수없으면 기동부대가 역습받아서 괴멸당할수도 있는 것이다. 이미 산악전의 쓰라림은 국군이나 UN군이 엄청나게 겪은 일이었으며, 따라서 좋은 것을 알면서도 능력이 못 따라가서 시행하지 못한 것이다.

여담으로, WRD, 즉 워게임 레드드레곤의 캠페인중 하나인 인천상륙작전의 완벽한 클리어조건은 위에 나오는것처럼 5턴 안에 동해안까지 진격하는것이다.

5. 기타

네이버 웹툰 기사도의 작가로 잘 알려진 환쟁이의 블로그에 가 보면 인천 상륙작전이 관한 만화가 올라 와 있다.(#) 6.25 60주년 기념으로 연재한 만화중 인천 상륙작전에 대한 부분인데 상당히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군사마니아 August씨도 인천 상륙작전에 관한 게시글을 연재했다.(성공 뒤에 숨어 있던 순간)

태평양 전쟁 당시 여러 상륙작전을 벌였던 맥아더가 그런 상륙작전을 다시 한국전쟁에서 써먹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통일교 희대의 괴작 오! 인천이 인천 상륙작전을 다루고 있고,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시작 부분이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상당히 다르긴 하지만 인천 상륙작전을 담고 있다.

북한에서 자주 언급되는 헛소리 이야기 중 하나로, 인천 상륙작전은 사실인즉 9월 13일에 시작되었고 사흘동안 월미도에서 해군 병력으로 구성된 수비대가 안전한 철수를 위해 처절하게 싸워서 미일 연합함대의 군함 144척을 침몰시키고 수십만 미군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고 옥쇄했으며 맥아더가 패배를 덮고자 9월 15일로 날짜를 조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신승리 돋네. 그나마 양심은 있는지 어뢰정을 이끌고 연합군 함대를 아작냈다는 개소린 안한다. 그래봤자 일본놈들 극우 가공전기보다도 질이 나쁘다. 실상 월미도의 해군 육전대는 개전 당일 한미 해병대에 의해 단 두 시간만에 반도 넘는 190명이 전사(진지에 숨어 저항하다 불도저를 동원해 진지를 파묻어 버리는 바람에 생매장당한 인원도 상당수 있다.)하고 나머지는 포로가 되어 전멸했다. 월미도 수비대가 이러면서 거둔 전과는 아군 사살 1명(…). 게다가 북한쪽 기록에는 일본 해군도 참전했다고 되어 있지만 이건 사실무근으로, 구 일본 해군의 소해정들이 원산 등지의 기뢰 제거에 투입되어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인천에서 작전하진 않았다는 것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답이 없다.

여기서 해군 전투라면서 해군 군함이 안나오고 해안포부대가 주역으로 나오는 것을 궁금하게 여길 수 있는데, 이는 북한 해군의 함선 전력이 미미했기 때문이다. 원래 6.25 개전 당시 북한 해군은 어뢰정 4척 등 고속정과 상륙정 몇 척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개전 초 어뢰정 두 척을 UN 해군에게 상실한 뒤로 수상전을 사실상 접고, 위장어선을 이용한 기뢰 부설 정도의 임무만 종전시까지 수행했다. 따라서 아무리 정신승리를 하려고 해도 어뢰정 가지고 대형 군함을 잡았네 식의 막장을 쓰기는 어려워서 해안포 부대가 작품의 주역이 된 것이다.[19] 참고로 북이 한동안 NLL에 대해 아무 소리도 안 했던 것도 해군력이 빈약했기 때문이다. 해군이 씨가 말라서 어차피 바다 지키는 건 포기해야 하는데 알아서 넘어오지 않겠다 하니 이 얼마나 고마운 소리인가?

그런 이유로 북한에서는 월미도 승전을 대대적으로 기념하고 있다. 황건의 불타는 섬이라는 대하소설이 바로 이 월미도 승전을 다루고 있으며 영화 월미도[20] 역시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ZiS-3 야포와 자돌폭뢰(…)(일본군?)로 미국 신형 구축함을 격침시키는 장면이 압권으로 북한의 정신승리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알수 있는 작품. 해당 신형 구축함은 기어링급으로 추정되는데, 구축함이 포탄과 연료가 모두 바닥나(…) 멈춰있지 않은 이상은 76㎜ 구경의 소구경 야포로는 못 잡는다. 몇 발을 맞춰도 구축함은 큰 피해가 없고 오히려 야포만 함포에 걸려 박살나는 일이 보통인데, 그런 상식은 씹어먹고 만들어졌으니 정신승리 소리를 듣는 것이다. 게다가 야포탄 한 발만 맞아도 구축함이 폭발해 가라앉는다. 핵포탄? 더 놀라운 것은 최초로 찍은 판이 수령에게 충성하는 모습이 안 나오고 전투 장면에만 치중했다는 이유로 전부 다시 찍었다고 한다. 원작격인 불타는 섬도 주체사상 정립 후 개작했었던 걸 보면….

주성하 기자는 북한의 선전만 믿고 '월미도의 영웅'들에 대한 환상을 품고 월미도를 방문했다가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충격과 배신감을 느끼고 더욱 북쪽에 대한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대다수 북한 사람들은 다른 건 몰라도 우리가 월미도에서 미제놈들에게 한방 먹이지 않았는가 하고 자위생각하고 있다고. 그래서 자유북한방송을 통해 '환상 깨쇼'하고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다.

네이트 웹툰에서는 만화 미생으로 유명한 윤태호 작가가 '인천상륙작전'이란 이름의 웹툰을 매주 연재했다. 인천 상륙작전만 바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 일본 패망 이후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과정과 인천 상륙작전까지의 한국전쟁 초반의 전개 과정을 그리고 있다.

미 해군의 이오지마급 강습상륙함의 마지막 함정인 LPH-12는 인천 상륙작전에서 이름을 따와서 USS Inchon으로 이름지어졌다. 이 함정은 현재 기뢰전 지휘함으로 개수되었다.

그리고 작전을 참관하던 손원일제독이 작전중에 실종된 사건이 있었는데 다른 한국군 해병들과 같이 M1 개런드를 들고 돌격하고 있는 것을 발견 했었다고....

인천상륙작전을 북한이 언제 예측했는지에 대해서 북한의 공식기록은 김일성의 뛰어난 예지력(...)으로 개전 3일차에 이미 인천상륙이 있을 것을 알고 대비했다고 한다. 문제는 박헌영일당이 미제 간첩인지라 고의로 작전기동을 방해해서 안타깝게 사전대비에 실패했다는 이야기. 북한의 우상화와 역사왜곡이 어느 수준인지 극명하게 드러나는 서술이다.

----
  • [1] 미국 극동군 총사령관 겸 UN군 총사령관
  • [2] 미 해군 제7합동기동부대 사령관
  • [3] 미 육군 제10군단 군단장
  • [4] 미 해병대 제1사단 사단장
  • [5] USNS 1st LT. Baldomero Lopez, T-AK-3010, 말그대로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함이다.(#)
  • [6] 미 10군단은 맥아더가 인천 상륙작전을 위해 육군, 해군, 해병대로 구성된 혼성군단이다. 그야말로 주문제작된 군단
  • [7] 8월경 북한군 12사단 766부대를 궤멸시키고 사단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인천 상륙작전 참가를 위해 본인의 요구로 연대장을 맡게 되었다.
  • [8] 대한민국 해군의 초대 참모총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던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의 아들로, 그 자신도 일제에 의해 투옥된 전력이 있었다. 인천 상륙작전 성공 이후, 해군 출신으로 첫 국방장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중화민국서독 대사를 역임하였다.
  • [9] 2차대전의 종전으로 일본이 항복할 때 항복 문서를 작성하던 바로 그 미주리이다.
  • [10] 정확히는 마오쩌둥은 남포, 원산, 군산 중 하나라고 예상했고, 저우언라이가 인천이 상륙지점일 것 같다는 예상을 했다고 한다. 물론 맞은 것은 저우언라이었다.
  • [11] 미국 225척, 캐나다 3척, 호주 2척, 뉴질랜드 2척, 네덜란드 1척, 프랑스 1척, 대한민국 15척
  • [12]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Inchon#Bombardments_of_Wolmido_and_Incheon
  • [13] 로켓 사격. 그야말로 퍼부었다.
  • [14] 월미도 북서쪽 해안을 가리킨다.
  • [15] 이 때까지 미군의 사상자 없음. 북한군 사망자 108명, 북한군 부상자 137명
  • [16] 첫 도입은 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게 먼저 썼다
  • [17] 당시 작전 계획상 유엔군이 중앙청을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당일 새벽 3시, 박정모 소위가 이끄는 대한민국 해병 제2대대 6중대 1소대가 명령을 어기고 중앙청으로 진입, 새벽 6시 10분에 중앙청 국기게양대에 태극기를 게양한다.
  • [18] 억지로 소와 말, 사람등에 지우고 보급을 할 수야 있었겠지만. 사람이고 우마고 죄다 낙동강 전선에 동원했는데다가 차라리 그 인력을 전력으로 쓰는 게 나았을 것이다.
  • [19] 근데 개전 초에 어뢰정이 미 해군 순양함 USS 볼티모어를 격침시켰다는 구라는 치고 있다. 참고로 그 순양함은 한국전쟁에 참전은 커녕 본토에 있었다(…). 일각에선 이들이 동해상에서 작전하던 소련 해군 태평양 함대의 순양함을 오인 공격(…)하고(소련 해군측에서 어뢰맞아 가라앉았다는 배가 있었단 얘길 안 하고 있는 걸로 보아 빗나간 듯하다) 나서 거짓 보고를 한 것이라 여긴다.
  • [20] 북의 대남 선전 사이트에서 올린 것이나, 체제 찬양이나 이적 행위 목적이 없는 단순 감상은 처벌 사유가 아니다. 안심하고 보고 실컷 비웃어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