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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장

last modified: 2015-04-07 02:12:02 Contributors

李鴻章



후기 나라의 상징[1]

중국의 역사적 인물들 중 한국에서 한자 발음대로 이름을 표기하는 사실상 마지막 세대로[2], 그의 다음 세대라 할 수 있는 위안스카이(원세개)부터는 현대 인물로 분류되어 대부분 중국어 발음으로 표기한다.[3]

Contents

1. 등장과 실각
2. 이야깃거리

1. 등장과 실각

휘성 합비 출신이다. 한족층 출신으로 전 세대의 개혁가이자 유학자인 증국번의 직계 제자다. 동네 시험부터 층층시하로 봐서 과정을 거쳐 , 이후 진사를 거쳐 진사 출신에서도 최고 등급이 임용되는 한림원의 관리에 임명되었다.
[4] 중국의 과거시험은 조선시대보다 더 경쟁률이 높고 대륙의 위엄 청나라 때는 만주인 우대로 한인들은 관료로 들어갈수 있는 문이 더 좁아졌기 때문에 그야말로 바늘구멍을 뚫고 나온것과 비슷하다.

홍수전에 의해 한족이 중심이 된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지만 그들의 혁신적 주장을 두려워 한 지배 향신층은 이를 기득권의 위험으로 보고 태평천국의 난 진압에 가담했다. 당시 청나라 정규군인 팔기군녹영은 이미 19세기 말 백련교도의 난때 무력함이 입증된 상태였으며, 태평천국진압에는 향신층이 조직한 의병들이 주로 나섰다.[5] 그중 유학자인 증국번이 의병을 조직했고 이를 "상군"(호남성군), "회군"(안휘성군)이라고 한다. 이홍장은 이들을 물려받으면서 태평천국을 진압, 군벌이 되고 청나라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는 문관출신이기는 하지만 태평천국 진압과 그 이후 염군[6] 진압에서는 발군의 군사적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모집한 의용군인 회군(淮軍)을 거느리고 상해 수비등에서 공적을 올렸고 전후 1등 백작의 직위를 수여받았다.

이후 서태후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아시아 최초의 근대화운동인 양무운동을 전면에서 주도하며, 막대한 예산을 들여 당대 아시아 최강이라는 북양함대를 조직한다. 정적이자 같은 양무파인 좌종당과 새방해방(塞防海防)을 두고 청나라에서 논쟁을 벌였는데, 좌종당은 영국-프랑스-미국 같은 해양세력보다는 북방의 러시아세력을 견제할 것을 주장했지만(새방), 이홍장은 러시아보다는 영불미가 더 위협이 될 것이라고 옳게 보았고(해방), 해군력에 힘을 쏟는다. 결과적으로 청나라는 영불미에 더 많이 털렸다는 점에서 이홍장의 안목이 옳았음이 간저적으로 증명.


하지만 청의 군사력이 청일전쟁에서 처참히 무너지면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실각했다.[7] 이후 일시적으로 재기용되기도 했으나 변법자강운동 당시 서태후와 연합할 것을 우려한 유신파들이 그를 멀리하였고 결국 다시 한직으로 밀려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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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 열강에게 분할당하는 청, 르 프티 주르날, 1898년

위의 유명한 기록화에서 만세 뒤에서 두 팔 든 채 손톱 세우고 우와앙 격분하는 인물이 바로 이홍장이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종이 호랑이임이 입증된 중국을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 열강들이 갈라먹는 상황을 속절없이 지켜보는 충격과 공포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조선에도 꽤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운요호 사건 이후 조선이 일본의 무력시위에 당황해 청나라 조정의 의견을 물었고, 이홍장은 조선에 일본과 통상조약을 맺을것을 권고하면서도, 일본이 "종주국"인 청나라를 대신에 조선에 주도권을 행사할까봐 서방열강과도 통상조약을 맺으라고 권고했다. 일부 청나라 관리들이 속국인 조선을 아예 병합해 성을 설치하자고 주장했는데, 이를 비현실적이라고 물리친 것이 이홍장이다. 당시 청나라의 국력도 문제였지만, 정치적으로도 조선은 별개의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의미.[8]과거 출신이라서 고리다분할 것 같지만, 새방해방(塞防海防)을 두고 좌종당과의 논쟁에서 보듯이 이홍장이 보는 국제인식은 대체로 정확했다. 문제는 청나라가 제대로 된 현대국가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근대적 문물을 전근대적으로 운용하다보니 엄청난 병크가 있었다. 예를 들어, 통설과는 달리 청일전쟁때 청나라군의 무기는 일본군의 무기보다 대체로 성능이 뛰어났음에도, 청나라군의 계급체계나 조직은 명나라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근대적인 것이었다. 서양 교관들이 아무리 청나라군대를 훈련시켜도 윗대가리들이 저렇게 멍청했기 때문에 일본군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결국 청나라는 일본보다 훨씬 강력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지휘부의 여러 병크 때문에 청일전쟁에서 참패했다.

청일전쟁이후 일본이 이홍장 아니면 전후협상을 안하겠다고 해[9] 시모노세키 조약에 노구를 이끌고 갔는데, 일본 극우파에게 저격당해 총알이 얼굴에 박히는 수모를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음날 다시 얼굴에 붕대를 감고 협상장에 나서는 위엄을 보여주었고, 결국 이홍장이 건강악화로 귀국해 국제여론이 악화될것을 두려워한 일본인들은 3억냥의 배상금을 2억냥으로 줄이고 당초 톈진 할양 요구에서 타이완 할양으로 대신하는 합의를 해주었다. 액수만 해도 청 중앙정부의 1년치 총수입을 뛰어넘는 금액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재기불능의 치명적 타격을 받아 일선에서 물러났다지만 역으로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만 했다면 중국오토 폰 비스마르크로 대접받았으리라 조명하는 사람들도 많다.

신축조약으로 청조가 사실상 반식민지화가 된 두달이 지난 1901년 11월에 사망했다. 유언으로는 "인재를 키우고도 나라를 망쳤으니 그야말로 후회스럽도다!". 이후에도 의식은 있는채 하루를 더 생존했으나 병이 심각해져 말을 하지 못했고 끝내 눈을 뜬채로 눈물을 흘리기만 하자 좌우에서 "공께서 하지 못한 일은 저희들이 이루겠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눈을 감았다고 한다.

2. 이야깃거리


실제로 둘 모두 일선에서 퇴진한 1896년 비스마르크와 만나기도 했다. # 면담 내용을 수록한 동아일보 기사
그의 꿀리지 않는 덩치에 주목할 것.비스마르크가 신장이 2m 가까이되는 거구였으므로, 사진으로 보면 이홍장도 적어도 신장이 185cm는 넘는 위너다! 영국 귀족과 찍은 다른 사진을 봐도 그는 전혀 서양인에게 피지컬적으로 꿇리지 않는다. 왼쪽은 영국의 솔즈베리 백작, 오른쪽은 커즌 오브 케들스턴 후작)


더욱 놀라운 점은 40이 넘은 나이에 영어를 만학으로 마스터 하여 비스마르크와 통역없는 대화가 가능했다는 점이다. 역시 과거에 급제한 진사의 위엄. 성공했다면 "중국의 비스마르크"가 됐을지도 모른다...

청일전쟁 이후 시모노세키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협상할 때는, 두명 모두 영어에 능했기 때문에 통역없이 직접 협상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안연이 공자에게 인을 물었다 버전으로 왜곡되기도 하였다. 이홍장과 비스마르크는 이홍장의 연관검색어(...).

영국에 파견되었을 때는 빅토리아 여왕이 셰퍼드 한마리를 선물했는데, 이를 보약으로 선물한 것으로 착각하고, 푹 고아드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10]

당시 조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만큼 조선 사람들도 적잖이 만나 봤는데, 흥선 대원군도 만났다. 다만 대원군과 이홍장이 대등한 입장에서 만난 것이 아니라 대원군이 청에 납치되었을 때 만난 것. 다만 이홍장은 대원군을 높이 평가했는데 1882년 임오군란 직후에는 "그의 성품이 간교하고 포학하다" 고 평가했다가 1884년에 올린 보고서에서는 "조선인들은 모두 문약하나 이하응은 효웅이다. 그의 재기는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다" 고 평가했다.

비록 청일전쟁으로 실권을 잃었다지만 특출한 외교적 수완은 계속 인정받고 있었기에 시모노세키 조약, 청-러밀약, 베이징 조약(신축조약) 등 굵직한 대외적 협정마다 70세가 넘은 노구를 이끌고 직접 나섰다. 앞서 말한 듯 독일을 다녀온건 물론이고. 평생을 현역으로 활약한 셈. 80세 가까이 이르는 인생을 황조 부흥에 전력 투구했으며, 그럼에도 결국 그 몰락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현장에서 두 눈으로 지켜봐야만 했던 역사상의 운아였다고 할 수 있겠다. 세대로 따지자면 편 전쟁 때 그는 약관 열일곱에 불과했다는 것을 상기할 것.


이홍장의 사후에는 위안스카이가 입지를 계승하여, 훗날 청조 멸망 후 중국 최고의 군벌로 부상한 북양군벌을 조직하게 된다.

저서는 이문충공전집. 시호는 문충(文忠).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이홍장에 대한 평가는 극히 안좋았다. 좋게 봐도 나라 말아먹은 무능정치인, 나쁘게 말하면 한간의 원조 정도. 하지만 어른의 사정인지, 혹은 양무운동이 체제변화를 배제한 경제발전이라는 중공정권의 현재 정책과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했는지, 1980년대부터 이홍장에 대한 대륙의 평가는 계속 올라갔다. 한국으로 따지면 김홍집과 여러모로 비슷한 면이 있는듯.

영화 황비홍에서는 나름 뛰어난 관리로 묘사되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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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중국 내부나 일반적인 외국인에게는 서태후가 더 유명했지만 국가를 불문한 상류층은 이홍장을 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볼만큼 그 위세가 대단했으며 말년에 그가 세계를 돌아다닐떄는 국가를 불문하고(심지어 청일전쟁을 치룬 일본조차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 [2] 중국어 발음은 리훙창이지만 당연히 한국에선 거의 안 쓰인다.
  • [3] 공식적인 기준은 1911년 신해혁명으로 그 이후 출생자는 중국어 원어 발음, 그 이전 세대는 우리식 한자 발음으로 표기한다. 신해혁명 앞뒤로 걸쳐있는 인물은 두가지 표기가 혼용된다. 원세개(위안스카이), 손문(쑨원) 등으로 리그베다 위키에서도 모두 통용된다.
  • [4] 여기서 진사는 과거시험 최종 합격자로 황제 앞에서 등수만 가리는 시험인 전시를 볼수있는 자격을 뜻한다. 조선시대 생원진사에 해당하는것은 '수재'나 '거인'에 해당하고 지방시험에서 합격해 북경과 남경에서 열리는 과거시험(회시)에 볼수 있는 자격을 '거인'이라고 한다. 거인이면 사대부 취급을 해주고 지방에선 유지로 행세가 가능했다 물론 회시를 거치지 않고도 하급직이나 납연(합법적으로 돈으로 벼슬임용)이 가능.. 진사 출신은 명청시대 과거 시험을 거친 최고 엘리트였다. 특히 진사 출신중 높은 등수로 합격하면 한림원으로 가는게 관례다.
  • [5] 그러나 주의해야하는게 관군이 아예 논것은 아니었다. 특히 몽골 팔기군은 높은 전투력으로 유일하게 실전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준가르부 정벌에서 막강했던 팔기군은 50년도 안되어 완전하 사그라들었다.
  • [6] 태평천국 이후 중원 일대를 쉽쓸었던 반청운동이다. 다만 태평천국처럼 특정한 이념은 없었고 마적과 별로 다를바도 없었다.
  • [7] 그런데 이건 이홍장의 잘못이 아니다. 당시 서구문물의 수입으로 중국 경제가 붕괴 직전에 이르자 불가피하게 경제 자립화를 위해서 군사력 강화를 중단한것이다. 그 시점에 하필 청일전쟁이 터진게 불운일뿐.
  • [8] 중국이 항상 한반도의 복속을 꾀하였다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실제 역사상의 중국의 주류 정권은 그저 주종관계만 요구할 뿐 한반도를 집어삼키려고 하지는 않았다. 강희제 시절에도 대만을 복속하면서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으나, 강희제는 조선은 중국과 풍속이 다르다며 병합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 [9] 당시 정식적인 발언은 이렇다. "전권위임대사라면 관직이 낮은 것은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관직이 높을수록 협상은 잘될것이며 특히 이홍장이나 공친왕이 직접 오시면 제일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조약을 실제로 이행할 권한을 가졌기 때문이지요."
  • [10] 서양에서는 중국인의 야만성의 한 예로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지만, 실제로는 문화차이에 의한 오해라고 보는게 합리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