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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티니아누스 대제

last modified: 2014-12-25 19:27:01 Contributors


중앙이 유스티니아누스 훈남대제, 바로 좌측이 벨리사리우스이다.


말년의 모습 뭔가 많이 후덕해졌다.
나의 대제는 이렇지 않아!

Contents

1. 개요
2. 재위 동안의 활동
3. 재정복 사업에 대한 평가 : 과연 무모한 확장이었나?
4. 그 외

1. 개요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
유스티누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1세 유스티누스 2세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동로마 제국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 제위 527-565년.

마케도니아의 빈농 가정 출신으로 군인으로 성공한 외숙부 유스티누스 1세의 행정을 돕다가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고 양자가 되었으며, 마침내 유스티누스 1세 사후에 단독 황제가 되었다.

2. 재위 동안의 활동


로마법 대전을 편찬했고 현재까지도 이스탄불에 남아있는 당대 최고의 건축물 중 하나인 성 소피아 대성당을 완성했으며, 벨리사리우스르세스를 파견하여 고트족반달족에게 점령당했던 이탈리아 본토와 카르타고를 포함한 북아프리카를 수복하여, 브리타니아, 갈리아, 스파니아를 제외한 서로마 제국의 영토을 다시 수복한다.

당시 라틴어를 쓰던 발칸 반도 출신이었기 때문에 라틴어가 모국어였고,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가 그리스어를 못한다고 까기도 했다.

약간 특이한 경우였지만 동서 로마 제국 간에 자주 논란을 유발시킨 일리리쿰 속주에는 테오도시우스 2세 이후로는 계속 동로마가 강력한 입김을 행사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 이전에도 동서 로마 황제들 중 선임 황제였던 측은 대부분 일리리쿰 속주와 그 군대를 장악했던 황제들이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의 양아버지이자 외삼촌인 유스티누스 황제도 유스티니아누스처럼 라틴어밖에 모르는 일리리쿰 속주민이었다.[1] 어쨌든 유스티니아누스가 라틴어에 더 익숙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그래서였는지 로마 역사와 과거의 로마 풍습에 상당한 애착을 보여서 유명무실화된 고대의 여러 관직이나 풍습을 살리기도 했다.[2]

그러나 이런 고대 애호가의 이미지와는 반대로 또한 기독교를 매우 선호하는 성향을 보여 유태인들을 가끔씩 괴롭히거나[3] 아테네의 아카데미아를 문닫는 조치를 내리기도 하는데, 이는 당시 기독교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로마인적인 생활과 얼마나 융합되어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고대 제국의 위엄을 그리워하면서도 독실한 신자로 사는것이 전혀 반대되지 않았다. 아테네의 아카데미아를 문닫게 한 조치는 일반인들을 위한 역사교양서에서는 까임 대상으로 자주 나오지만, 이런 서술은 아주 예전에 폐기된 학설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유스티니아누스를 이걸 가지고 지적했으면, 콘스탄티노폴리스에도 대학 새로 세웠는데 이런 유명무실해진 학교 계속 냅둬봤자 뭐하냐라고 대답했을 게 분명하다. 사산조 페르시아로 망명한 철학자들도 생각보다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일자무식인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삼촌을 도우면서 습득한 교양으로 동시대 최고의 교양인으로 불렸을 정도로 학식이 뛰어난 군주였다. 선대의 황제들이 쌓아올린 제국 재건책을 바탕으로 고토 수복에 나서 효율적으로 병력을 축차 투입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현명한 황제였다. 이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라고 불린다.

3. 재정복 사업에 대한 평가 : 과연 무모한 확장이었나?

한 때 그를 비판하는 의견이 대세를 탔지만, W. 트레드골드, J. 할던, 조지프 테인터 등 1980년대 이후로는 다시 재평가받는게 현재의 추세.

일단 조지프 테인터에 따르면 반달족 휘하의 카르타고 경제 지표가 오히려 로마 제국 시대를 상회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고, 훗날의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사산조 페르시아가 밀고 들어오자 카르타고로의 천도를 시도했을 정도였다. 아무리 자기 본거지였다곤 해도[4] 그렇게 사막화가 진행되어 피폐해진 지역으로 천도하려고 했을까? 이탈리아도 고트족이 나름대로 합리적인 통치를 했다. 일단 무조건 약탈만 한게 아니라 그럴 듯한 통치체제에 따라 통치했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경제지표도 그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진 건 아니었다. 문제는 이들 지역을 수복한 비잔티움 제국이 갑자기 증세를 하는 바람에 해당 지역의 경제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워렌 트레드골드에 따르면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계획을 망쳐놓은 건 중세 극초기판 흑사병. 즉 카르타고와 이탈리아의 경제력을 회복시켜 수익을 뽑아내기 전에 갑자기 몰아친 초대규모의 전염병 때문에 국고가 격감하고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자신도 사경을 헤매는 등[5][6], 전체적인 사업 추진력이 떨어졌다는 평가다.[7] 당시 서방에서 도시화율이 가장 높았던 곳이 동로마제국이다 보니 사산 왕조에 비해 전염병 크리도 훨씬 심각했다고 한다.

또한 반달족을 정복할 때도 아리우스파의 겔리메르가 왕위를 찬탈하자 뒤에서 을 뿌리고 종교갈등을 일으켜 반달족 내의 반란을 조작한 사람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였고, 그 시점에서 적당히 조공받고 끝내려는 수준의 원정계획을 끌어올려 반달족 완전정복을 계획한 것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였다. 벨리사리우스를 심하게 견제하긴 했지만 후에 이탈리아를 수복한 사람은 결국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확실한 지원을 받은 나르세스였다.

실제로 나르세스도 타기나에에서 고트족을 격파하고 카실리움에서 프랑크족을 캐바른 명장이다. 명장 둘이 투닥투닥 할 때는 나르세스를 후방으로 빼버리기도 한 만큼, 기본적으로 사람 중용하는 법은 알고 있었다. 비록 일관성 있게 장기간 중용하지는 못했지만 이건 왕권수호에 얽힌 보편적이고도 복잡한 문제인 군권과 실력과 인기를 가진 강력한 신하는 황제에게 그 자체로 위협이 된다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만의 특징이라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한국인의 눈에는 선조가 떠오르지

결국 벨리사리우스 개인 능력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대의 업적을 전부 벨리사리우스의 역할로 보려고 하는 건 힘들다. 이걸 시오노 나나미의 폐단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이게 한동안 대세학설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모든 걸 다 여사의 탓으로 돌리는 건 무리다. 적어도 군사 이외의 수많은 문화적, 통치체계 정비 등의 업적에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역할을 무시하기도 힘들고 실제 자신도 신학, 음악, 역사, 법학에서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판을 지나치게 키웠다는 비난도 있지만, 적어도 페스트가 창궐하기 전까지 서방에선 비잔티움의 약진이 두드려졌고, 동부전선도 사산 왕조를 돈으로 주물러 놓으면서도 경제적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즉 철저히 계산된 확장이었단 소리.

또한 이탈리아는 동로마제국이 서방세계에 간섭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들이 남부 이탈리아에서 노르만족이 등장하기 전까지 500년동안 교황에게 압박을 가하고 서방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무익했다고 평가하기도 힘들다. 실제로 남이탈리아와 시칠리아는 서방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중요 지역이었고, 이 지역이 노르만인에게 넘어가자마자 서방 세력들이 우루루 그리스로 밀려들었다. 물론 해당지역의 주민들은 상당기간 고생을 했지만(...) 제국수호에는 성공했다는 이야기다.

어쨌든 제국에 창궐한 전염병덕에 심각한 재정적 타격으로 인해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사후 그가 차지한 점령지 대부분을 잃고 만다. 허나 카르타고, 남이탈리아, 남부 이베리아 등 꿀땅 중요지역은 이후로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다음 치세의 스티누스 2세 때의 정치혼란에 포카스의 삽질까지 겹쳐지면서 대 사산 왕조 전선의 압력이 지나치게 가중돼서 죽네사네 치고박다가 이슬람 침입 크리를 맞고 다 떨어져 나갔지만 100년에 걸쳐 이뤄진 삽질(...)을 이 사람 탓이라고 보긴 무리.

4. 그 외


서커스단 단원의 딸이란 천한 신분 출신의 황후 테오도라를 극진히 생각했으며 실제로 공동으로 통치했다. 그가 사람 보는 눈이 있었던 것인지 상당수의 기록이나 역사가들은 테오도라 황후가 아마도 대제 수준이거나 적어도 그를 능가하는 명군주였다고 평가하는 듯. 532년 히포드롬에서 촉발된 니카의 반란이 일어나 황제가 궁을 버리고 도피하려 했을 때 테오도라 황후가 황제를 꾸짖으며 설득해 반란을 진압한 일도 있었다. 천한 신분의, 그러나 똑똑한 아내에게 공처가였다는 측면에서 벨리사리우스와 공통점이 있었다.(...) 벨리사리우스와 유스타니우스의 불화의 원인은 동족혐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테오도라 황후가 죽고 삶의 활력을 잃고, 말년에 노망크리가 일어나(...) 지나치게 종교문제에만 집착했다. 당시 정통파와 돌이킬 수 없는 불화에 빠져있던 이집트와 시리아 단성론파간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였으나, 그 방법으로 내세운 신교리가 정통파와 단성론자들 모두에게 전혀 지지를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하였다. 만년에 병이 깊어져 정말로 생사가 오락가락하자 장군들 사이에서는, 엄연히 그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유스티누스가 있었는데도 벨리사리우스를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이 황제가 병에서 점차 회복되어 일어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자신이 몸져 누운 사이 일어났던 일에 대경실색한 황제는 연루된 장군들은 모조리 처형하고 벨리사리우스는 한직으로 몰았는데, 벨리사리우스 입장에서야 엄청나게 억울한 일이었으나 동서고금 이런 문제에 있어서 황제들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던 것을 감안해보면 생각보다는 오히려 너그러운 조치였다.

다만, 저 시점에서 차라리 그냥 죽었다면 더 나았을 거란 주장은 일리가 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그 이후로도 정사에는 거의 손을 대지 못한 채 골골골....하는 상태였고 결국 그 때 이래로 죽기 전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아 꼴사나운 결말이 되고 말았다.
국고 관리는 사실 알려진 바와는 달리 유스티니아누스가 대단히 정력적으로 관리를 해서 어느 정도 커버하고 있었으나, 이 때는 유스티니아누스가 아파서 암 것도 못하는 주제에 후임이든 측근이든 아무 권한도 주지 않고 움켜쥐면서 국정을 머리 없는 상태로 방치하는 짓을 저질러, 후대에 낭비 황제로 낙인 찍히는 결과를 낳았다. 현대에 유스티니아누스 재평가가 이뤄지지만, 만년의 이 행태는 정말이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해서, 이 시점에 와서는 후임 황제가 한탄할 정도로 고갈이 나고 만다.

그가 죽자 시민들은 환호했다는데, 그의 죽음 뒤에는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유스티니아누스가 이렇게 골골골 하던 새에 변경 군대에게 봉급 체불을 엄청나게 저질러, 그들의 인내심이 거의 폭발 일보 직전에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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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사람은 유스티니아누스와는 달리 일자무식이었던지라 그리스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
  • [2] 이런 점과 라틴어를 쓴다는 점 때문에 때때로 '최후의 로마 황제'로도 불리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문학적 수사다. 유스티니아누스 이후로도 라틴어를 쓰고 일부러 공화정기 로마식 관직을 장교명으로 하는 황제들이 더 등장한다. 이걸 진지한 규정으로 오해하진 말도록 하자.
  • [3] 그래도 멸절하다시피한 사마리아인들보단 나았다
  • [4] 헤라클리우스는 즉위하기 직전 카르타고 총독이었고 그곳 병력을 토대로 포카스를 타도했었다.
  • [5] 무려 로마제국의 황제가 감염될 정도면 보통 병이 아니란 것이다. 이슬람의 공격을 받아 제국의 절반이 날아가고도 비잔티움의 경제력은 압도적으로 성장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결국 모든 것이 초강력 전염병 하나로 날아간 셈. 이슬람보다 더 악랄한 피해를 입힌 것이다.
  • [6] 결국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와 벨리사리우스 모두 감염되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 [7]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5세기 폭발적으로 성장한 원로원 계층, 즉 귀족층의 전횡을 최대한 차단하는 데 초점을 둔 행정 개혁을 시도했다. 매관매직과 수탈이 성행하던 행정체계를 바로잡은 덕분에 당대의 귀족층에게 질시를 당했지만, 이런 개혁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를 재정복한 후 유스티니아누스가 바로 착수한 것이 제국 동방에서 이루어진 식의 행정 개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