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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볼프강 폰 괴테

last modified: 2015-02-13 21:44:14 Contributors

Johann Wolfgang von Goethe


"너 괴테 알아?" "축구선수요?" "그건 괴체지"

Contents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문학으로의 입문
2.3. 괴테의 여인들
2.4. 다재다능
2.5. 만년
3. 이야기거리
4. 작품
4.1. 소설
4.2. 희곡
4.3.
4.4. 여행기

1. 개요

독일 문학의 종결자

요한 볼프강 폰 괴테(독일어: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년 8월 28일 ~ 1832년 3월 22일)는 독일작가이자 극작가, 연극감독, 철학자, 과학자 시인이며, 한때에는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이었다.

2. 생애

2.1. 유년기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1710~1781)는 서민 출신이지만 꽤 규모가 큰 세탁업 공장을 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등교육을 받아서 왕실고문관까지 올라 서민층으로서는 엄청난 출세를 거둔 사람이었다. 어머니인 카타리네 엘리자베트 텍스토르(1731~1808)도 서민층이지만 프랑크푸르트 시장인 요한 볼프강 텍스토르[1](1693~1771)의 딸이라서 어린 괴테도 유복하게 자랄 수 있었고 덕분에 고등교육도 마음껏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를 낳았을 때 나이가 18살이었고 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21살이었다...

괴테는 늘그막에 회고하길 "아버진 존경하지만 너무나도 엄격하고 까다로운 면이 많아 어린 나에겐 언제나 엄하고 무서운 분이셨다. 그래도 아버진 책임감이 강하고 약속을 꼭 지키던 분이라 정말 멋진 분이었다. 어머니는 가정적으로 너무나도 훌륭하시고 나에게 자상함을 일깨워주신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2.2. 문학으로의 입문

이런 풍족함 속에서 부족함 없는 교육을 받아 16살 나이에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과를 졸업해 22살 때 변호사 사무소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법학보단 글쓰길 좋아하여 24살때 희곡 <괴츠 폰 베를링힝겐>을 쓰며 문학에 발을 내민다.

그리고 나이 겨우 스물 다섯인 1774년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하나로 평생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유럽에 유명세를 떨친다. 솔직히 그조차도 '나를 언제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작가로만 기억한다'고 불만을 가질 정도로 이거 하나로 엄청나게 떴다. 그의 인생을 건 대작 파우스트(거의 60년을 매달리면서 무수한 수정과 편집을 번갈아가며 썼다!)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인기만은 못 따라갔다고 하니...

그래도 그 덕에 죽을 때까지 돈이 없어 고민하거나 굶주린 적 없이 살게 된다. 그에게 산더미처럼 오는 편지로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고 싶다고 오는 예비 작가들도 만나보고 문학에서부터 철학이나 과학이나 여러모로 큰 관심을 보였다. 그 중에는 빌헬름 텔, 군도로 유명한 극작가 실러도 그에게 작품을 보이면서 주목을 받아 괴테의 도움으로 극작가로 대박난 경우. 게다가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귀족으로서 칭호까지 받으며 고위 재상이란 정치인으로도 일하게 된다.

2.3. 괴테의 여인들

이렇게 곱게 펼쳐진 인생에서 무수한 여인들과 동거 및 사랑에 대한 글도 많이 남겼다. 오죽하면 그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그와 사귀었던 여인들도 같이 연구해야지 괴테를 알 수 있다고 할 정도이다.

그는 자신의 연인을 자신의 작품에 등장시키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 대표주자가 파우스트의 그레트헨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샤를롯테이다. 그레트헨은 괴테가 십대 때 첫 눈에 반한 첫사랑의 대상이었고[2], 샤를롯테는 괴테의 친구의 아내로서 괴테와 불륜 관계에 있었다(...).[3]

나이 차도 엄청나서 나이 19살때는 26살이나 연상인 주잔네 폰 클레텐베르크(1723~1774)란 여인과 사귀기도 했으며 밑에 언급된 무려 55살 연하에게 청혼까지 한다. 첫 결혼은 16살 연하인 크리스티아네 폰 불피우스(1765~1816/당연히 나중에 성은 괴테)와 했으며 그녀에게 아들인 아우구스트 폰 괴테(1789~1830)를 얻었다. 그런데 그녀와 결혼한 건 동거한지 18년이나 지난 1806년에야 결혼했고 결혼 9년만에 크리스티아네는 병으로 죽었다.

아내가 죽은 뒤에도 여자들과 사귀었는데 1823년에는 무려 55살이나 연하'''인 울리케 폰 레베초프(1804~1899)라는 여인에게 청혼했다. 울리케와는 2년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이긴 했지만 이런 청혼에 친구이던 칼 폰 아우구스트 공작은 미치도록 웃으면서 "일흔 넷에 19살 여인을 사랑하다니 이건 심하다구!"라면서 놀려댔다. 하지만 괴테는 진심이라 의사까지 찾아가 이 나이에 결혼해도 되겠냐고 진단까지 받았다. 의사는 매우 건강하니 걱정말라는 답변을 했다고. 이에 울리케의 어머니인 레베초프 부인는 "괴테 씨야 너무나도 유명하고 그런 분이 우리 집안과 한 집안이 되는 건 나쁘진 않지만 아무래도..." 곤란한다는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아들인 아우구스트가 결사반대하는 통에 결국 이 결혼은 이뤄지지 못했다. 솔직히 자신보다 15살이나 어린 여자를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용자가 세상에 얼마나 될까. 그래도 괴테는 이 사랑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다. "여기에서 나는 사랑을 하고, 그리하여 사랑을 받으며 행복했노라(Hier war ich gl cklich, liebend und geledt)"

2.4. 다재다능

온갖 시와 글외에도 여행기도 쓰고 연극 감독으로서 궁정무대를 통솔하기도 했는데 연극무대 경영·연출·배우 교육에도 재능이 상당해 자신의 희극들을 유감없이 연극으로 잘 묘사해 연극으로도 상당한 대박을 거둬들였다. 오죽하면 그의 연극 연출, 경영, 교육을 두고 다른 연극인들이 '이 분야로도 한 우물을 파도 될텐데'라는 말까지 했다.

거기에 식물학 및 과학에도 굉장한 연구를 했으며 과학자들을 후원하고 책도 냈는데 식물학자들에게도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식물학자인 베르너 라이히트아젠이란 사람이 그에게 "식물학자로 연구하셔도 되겠습니다. 이건 농담이 아니라 괴테씨의 열정과 지식을 봐도 그만큼의 가치가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라는 편지까지 썼다.

더불어 바이마르 공국 재상으로서 프랑스군과 전쟁을 대비하고 정치인으로서 재능이 상담함을 보여줬다. 물자비축 및 비상 체제로 들어가 자신이 재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다했다. 다만 발미전투[4]에선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1735~1806)의 참모로서 전쟁에도 참전했지만 그에게 군인이나 전략가로서 재능은 없었다. 사실 공작이 군인으로 유능하고 화려한 참모진이 있었기에 굳이 그가 참모로서 책임을 다 할 필요도 없었고 사실상 참모라는 이름으로 기록 서기관이라는 놀림이 있었지만 글을 잘 쓰는 재능으로 당시 참전 기록에 대하여 세세한 묘사를 했다.

하여튼 이런 업적들을 봐도 여러 모로 진정한 엄친아.

한때 베토벤과도 친분을 쌓은 적이 있으나, 얼마 안 가 헤어졌다고 한다. 여기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감수성이 풍부하고 사교성이 뛰어난 괴테와, 예술가라는 자부심이 강하고 사교성이 바닥인 베토벤의 성격이 서로 맞지 않았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리고 괴테를 존경하여 그의 시 마왕을 오페라로 작곡한 슈베르트가 악보와 편지를 보내오자 괴테는 음악은 시와 글보다는 못하다면서 냉정하게 외면했다고 한다(…).

2.5. 만년

83살까지 장수하면서 아들과 아내 모두를 먼저 여의었기에 그걸 늘 서글퍼했다. 10살 밑이던 후배 실러와도 친구처럼 지냈는데 1805년 새해 연하장을 실러에게 쓰던 괴테는 실수로 새로운 해를 마지막 해라고 잘못 쓰고 기겁하고 다시 연하장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괴테는 뭔가 느낌이 안 좋다고 실러를 걱정했고 예상대로 그 해 실러는 46살 한창 나이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괴테는 실러가 죽었단 소식을 듣고 '그래? 어쩐지 예감이 안 좋았어'라고 말하곤 조용히 서재로 들어가 홀로 울며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마지막에 그의 곁을 지킨 식구는 과부가 된 며느리인 옷틸리에 폰 괴테(1796~1872)와 손자인 베르터 폰 괴테(1818~1885), 프라이헤르 폰 괴테(1820~1883), 손녀인 알마 폰 괴테(1827~1844) 이렇게 4명이었다. 그는 며느리에게 잘 대해주었으며 당연히 재산을 그녀에게 모두 물려준다. 살아있을 때에 이미 부와 명예, 모든 것을 누렸기에 그의 80살 생일 때는 고향 마을에서 그날을 경축일로 기리며 잔치를 열었을 정도였다. 죽기 전에 온 여러 유명인사들에게 인사를 하고 며느리 손을 잡으면서 이제 마음껏 살라는 말을 한 다음, 이런 유언을 남겼다.

"좀 더 빛을… 조금 더 빛을…"[5]

또는 하인에게 "창문을 열어달라고 전해다오… 빛이 더 들어오게…."라고 번역한 것도 있다. 또는 다 틀렸다. 사실은 "오줌이 마려우니. 요강 좀 가져와라"...는 게 유언이란 주장도 있지만 이건 글쎄?

3. 이야기거리

베토벤과도 한때는 매우 친하게 지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각자 성격이 너무 정반대되기 때문인지 트러블도 있었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며 산책하고 있었는데, 맞은편에서 황족 및 귀족 몇명이 걸어오고 있었다고 한다. 자유분방하고 반항적인 기질의 베토벤은 저들에게 길을 비켜주지 말고 이대로 뚫고 가자고 했으나, 괴테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그들에게 길을 비켜주며 모자까지 벗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고 한다. 이에 베토벤은 괴테가 너무 속물이라며 큰 실망을 표했고, 괴테도 베토벤이 너무 교양미가 없다고 여겼다.

도플갱어를 봤다고 적은 바 있다고 한다. 환각인지 몰라도 그는 일기장으로 홀로 말을 타고 사람이 없는 숲길을 가는데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 반대편에서 말을 타고 가는 걸 보고 놀랐다고 적었다. 그런데 8년뒤에 그 길을 자신이 갈 때 8년전 자신과 닮은 사람이 입던 재킷을 입고 가던 걸 기억해내고 8년전에 내가 본 게 지금 이 모습인가 하며 신기하다고 적어뒀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래전 위인전에 나온 이야기인데 사실 여부는 글쎄?

안녕 절망선생에서는 '아무 말에나 by 괴테라고 붙이면 멋진 말이 된다.'면서 깠다.(…) 명언이 굉장히 많은 위인으로 손꼽힌다.

미드 시리즈 환상특급에선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어하던 이가 운명을 건드려선 안된다는 경고를 무시하고 괴테가 되려고 하지만, 과거로 가서 괴테의 대필 작가로 푸대접을 받는 신세가 되는 게 나온 바 있다.

독일 유명 작가이던 하우프트만(1862~1946)이 작가로 이름을 떨치던 시절, 무슨 생각을 하며 공원을 산책하다가 잔디밭으로 들어가 걷고 있었다. 미처 그걸 깨닫지 못하고 그냥 걷는데 공원 관리인이 마구 화내면서 나오라고 소리쳤다. 하우프트만은 자신이 잘못은 했지만 그렇게 큰소리로 망신주는 것이 화가 나서인지 "내가 누군지 아시오!" 라고 맞받아쳤다. 그러자 관리인이 잠깐 말문이 막히다가 대꾸하길 "아, 당신이 그 유명한 괴테 씨라는 거 압니다만 그래도 지킬건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이 말에 하우프트만은 우울하게 순순히 바깥으로 나와 집으로 돌아갔고 일기로 "난 유명하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괴테라는 거인은 죽어도 100년이 되어가도록 내가 따르지 못한다." 라고 적었다고 한다.

독일문화원의 명칭에는 이 사람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주한 독일문화원을 가면 간판의 독일어 표기가 Goethe Institut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홈페이지 도메인까지 www.goethe.de일 정도다.

4. 작품

4.1.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4.2. 희곡

파우스트
오누이

4.3.

《프로메테우스》

4.4. 여행기

《이탈리아 기행》[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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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괴테 이름은 외할아버지 이름을 그대로 쓴 이름이다.
  • [2] 그레트헨 본인은 괴테를 돌봐주는 동생 정도로 생각했고, 그레트헨이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 이를 알게 된 괴테가 이를 수치스럽게 여겼기에 끝은 별로 좋지 않았다.
  • [3] 그런데 롯데그룹의 이름인 롯데는 이 샤를롯테에서 따 온 것.... 롯데시네마의 프리미엄 상영관명도 샤롯데다.
  • [4] 1792년 9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거느리는 7만 8천에 이르는 프로이센 군이 프랑스로 쳐들어간 전투였는데 그 절반도 안되며 군인도 부족한 의용군이 대부분이던 프랑스군이 프로이센군의 파리 침략을 막아낸 전투이다. 사실 병력 수와 달리 전사자는 굉장히 적은 전투로 프로이센군은 겨우 184명이 전사하고 2천명 정도 부상자를 낳았으며 약 5만명 가까이가 동원된 프랑스군은 3백명 정도가 전사했다. 그렇지만 프랑스로선 프로이센의 파리 침공을 막아낸 사실상 승리였다.
  • [5] 이는 사운드 호라이즌의 천사의 조각상에서 차용되었다.
  • [6] 단순한 여행기를 넘어 문학적, 예술적 가치가 상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