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요하네스 브람스

last modified: 2015-03-16 01:41:09 Contributors


Johannes Brahms
1833년 5월 7일 ~ 1897년 4월 3일

최불암이 가장 존경하는 음악가라카더라.[1]

Contents

1. 생애
2. 요하네스 브람스와 바그너의 대립에 관하여
3. 주요 작품

1. 생애

1833년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출생했다. 요하네스 브람스의 아버지인 요한 야콥 브람스는 호른과 더블베이스 연주자였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5살부터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과 첼로를 배우면서 음악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7살부터는 오토 프리드리히 빌트발트 코셀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다. 어린 요하네스 브람스가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자 요하네스 브람스의 부모는 요하네스 브람스를 앞세워서 미합중국으로 건너가 천재 신동 음악가로서 돈을 벌려 했으나 코셀이 극렬히 반대하여 결국 성사되지 못한다. 코셀은 자신을 가르쳤던 스승 에두아르트 마르크센에게 요하네스 브람스를 보내 가르침받게 했고 요하네스 브람스는 마르크센에게서 작곡법과 음악론을 배우면서 음악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확고히 한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11살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다고 전해지나 젊은 시절에 작곡된 요하네스 브람스의 여러 곡은 대부분 파기된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진 요하네스 브람스는 학교를 결국 중퇴하고 집안 살림을 돕고자 연회장, 술집, 식당을 전전하면서 피아노를 연주했고 때로는 개인으로서 피아노를 다른 사람에게 교습하기도 하는 동안 틈틈이, 합창단을 지휘하고 합창 음악을 편곡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은 요하네스 브람스의 음악계에 후일 훌륭한 합창 음악을 창작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던 중 1853년, 요하네스 브람스는 헝가리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을 하노버에서 만나면서 생활이 전환된 후 요아힘과 연주 여행하면서 바이마르에서 프란츠 리스트를 만났고 요아힘은 편지를 써서 로베르트 슈만에게 요하네스 브람스를 소개했다. 요하네스 브람스와 슈만 부부는 뒤셀도르프에서 만났다. 로베르트 슈만은 젊은 요하네스 브람스의 재능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이 젊은 음악가를 세상에 소개하고자 (자신의 생애 마지막 평론이 된) 평론 「새로운 길」을 발표하여 요하네스 브람스를 전 유럽에 알렸으나 이듬해인 1854년, 로베르트 슈만은 정신이 발작해 라인강에 투신한 일로 본 근교에 소재한 정신병원 엔데니히에 입원하게 된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작곡에 몰두하면서 곤경에 처한 슈만 부부를 돕는 일에도 진력했다. 로베르트 슈만은 1856년에 결국 죽고 요하네스 브람스는 과부가 된 클라라 슈만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그 여자와 로베르트 슈만 가족을 평생 돕는 일변으로는 1857년에서 1859년, 요하네스 브람스는 공식 직위를 처음으로 얻어 데트몰트 궁정에서 피아니스트로서 근무하면서 작곡에도 몰두할 수 있었다.

그 후 1859년에서 1862년 가을까지 고향인 함부르크로 옮겨 합창단을 지휘하고 합창곡을 작곡하다가 1862년 9월 빈으로 이주해 1863년 징아카데미합창단의 지휘자로 초빙 된 요하네스 브람스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많은 뛰어난 작품을 작곡하였다. 1865년 2월부터 어머니의 사망을 추도하는 작품에 착수해 1868년에 대작 "독일레퀴엠"을 완성하고 같은 해 칸타타 "리날도"를 작곡한다. 1869년에는 로베르트 슈만의 셋째 딸 유리에를 향한 자신의 실연을 노래한 "알토랩소디"를, 1871년에는 프로이센의 對프랑스전 승리를 기념하는 "승리의 노래"를 작곡하는 등, 관현악부 성악곡을 많이 만들었다.

1872년 가을부터 1875년까지는 빈 음악인 협회장으로서 있으면서 그 합창단과 관현악단의 정기 연주회를 지휘하였다. 1876년, 20여년에 걸쳐 작곡한 "교향곡 제1번"이 초연된 후 요하네스 브람스는 자신의 여러 대표작으로 남은 여러 작품을 잇달아 발표하게 된다. 1877년에는 요하네스 브람스의 전원 교향곡이라 불리는 "교향곡 제2번"이 완성되었다. 1878년에는 "바이올린 협주곡"과 "바이올린 소나타"를 발표했고 이듬해인 1879년에는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에 감사의 표시로 작곡한 곡이 바로 "대학축전서곡"이다. 1883년에는 "교향곡 제3번"이, 1885년에는 "교향곡 제4번"이 완성되었다. 1890년까지 요하네스 브람스는 "피아노 협주곡 제2번", "비극다운 서곡", "현악 5중주곡"을 작곡했다.

1890년에 이르러 요하네스 브람스는 체력 한계와 창작력 쇠퇴로 결국 작곡을 접게 되었으나 이듬해인 1891년, 클라리넷 연주자 리하르트 뮐펠트의 연주를 듣고 다시 창작력과 영감을 회복한 후 말년까지 클라리넷을 목적한 독주곡과 클라리넷이 중심이 되는 여러 실내악 곡을 작곡하게 된다. 1896년, 오랜 친구로 지내던 클라라 슈만이 병으로 쓰러지자 요하네스 브람스는 사망을 대상으로 해 생각하면서 기독교 성서에 토대한 "4개의 엄숙한 노래"를 작곡했다.

결국 1896년 5월 20일, 클라라 슈만이 죽었고 요하네스 브람스의 건강도 악화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오르간을 목적한 "11개의 코랄"을 작곡했다. 결국 이듬해인 1897년 4월 3일, 요하네스 브람스는 간암이 악화해 결국 거거한다.

요하네스 브람스의 음악은 흔히 고전주의로 불리면서 당대 낭만주의를 배격한 듯하지만 기실은 그렇지 않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고전주의다운 형식 체계를 지키면서 낭만주의다운 정서를 결합해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냈지만, 요하네스 브람스는 당대 작곡가들처럼 화려하고 찬란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지는 않았다. 이것은 요하네스 브람스가 북독일 출신으로 북독일 지역의 소박하고 강건한 스타일에 많이 영향받았다는 사실을 그 이유로 꼽을수 있으리라. 요하네스 브람스의 음악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순수하고 소박하여 사람의 마음을 더 끌리게 한다. 요하네스 브람스의 음악은 후에 드보르작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영향을 끼친다.

2. 요하네스 브람스와 바그너의 대립에 관하여

요하네스 브람스는 바그너와 대립했다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외부 여러 요인과 개인에 국한된 몇 가지 사건이 복잡하게 얽혀서 된 듯하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바그너의 악극을 좋아하고 그 사람의 악극 공연을 보러 다녔을 정도였지만, 두 사람은 음악 스타일에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원래 두 사람은 서로 높이 평가했었다. 요하네스 브람스가 헨델의 작품을 지휘하는 연주회에 바그너가 우연히 참석했고 바그너는 요하네스 브람스를 극찬했다. 그 극찬에 고무된 요하네스 브람스는 "바그너를 대적할 작곡가는 없을 것"이라고 하기까지 했으나 그 후 두 사람의 사이 좋은 관계는 깨지고 만다. 요하네스 브람스의 연주를 다시 감상할 기회가 있었던 바그너는 이번에는 "전통 안에 갇힌 인재"라면서 요하네스 브람스를 평가절하했고 심지어 아내 코지마에게 보낸 편지에서 "요하네스 브람스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나 작곡할 위인"이라고까지 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요하네스 브람스를 대상으로 바그너의 태도가 돌변한 이유는 자세히는 모르나 후세 음악학자들은 바그너의 여성 편력 때문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위대한 음악가들의 자필 서명이나 편지를 수집하는 취미도 있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높이 평가하던 바그너의 자필도 수집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바그너가 당시 유명했던 패션 디자이너 골드박에게 보낸 러브레터가 요하네스 브람스의 수중에 우연히 들어간게 화근이 되어 버렸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자신의 후견인이나 다름없던 당대 저명한 음악 평론가 한슬릭에게 이 러브레터를 보였고[2], 바그너를 공격할 거리를 찾던 한슬릭에게 좋은 무기를 쥐어준 꼴이 되었다. 한슬릭은 바그너의 여성 편력을 문제삼아 공세했고 바그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빈 공연을 결국 포기해야 했다. 한슬릭이 자신을 어떻게 공격할 수 있었는지 사유를 알게 된 바그너는 격분해서 요하네스 브람스를 마구 공격했다.[3]

바그너는 요하네스 브람스의 독신을 헐뜯었고 심지어 요하네스 브람스를 고자·내시라고 하기까지 했다고 하며, "오늘은 길거리의 엉터리 시인이며, 내일은 헨델의 할렐루야가 발쟁이로, 또 어떤 때는 유대인 깡깡이쟁이로 쏘다닐 것"이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바그너의 요하네스 브람스를 대상으로 한 독설은 후세에 독신주의자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 사회를 연구하는 문화학자들의 좋은 연구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바그너가 요하네스 브람스의 명예박사학위 수여까지도 고깝게 볼 정도로 두 사람의 사이는 악화했지만, 이렇게 된 데에는 한슬릭의 탓이 크다는 분석도 있다. 바그너의 진보성을 띤 음악을 고깝게 보던 한슬릭은 바그너를 대상으로 한 대항마로 요하네스 브람스를 내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비슷한 현상은 오늘날에도 찾아볼 수 있다. 언론과 평론가 그룹이 별 상관도 없는 두 사람을 라이벌 구도로 만들어서 싸움을 붙이는 현상이 이와 유사하다.

바그너와 요하네스 브람스를 추종하는 사람들 간의 골은 깊어져서 이것은 후에도 계속 영향을 끼쳤다.[4] 요하네스 브람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바그너를 열렬히 추종했던 안톤 브루크너의 음악을 평가절하했고 젊은 말러가 "탄식의 노래"로 베토벤상을 받는 것을 가로막은 것도 한슬릭과 요하네스 브람스를 추종하는 사람들이어서인지 말러는 평생에 요하네스 브람스 음악을 평가절하했다.[5]

3. 주요 작품

----
  • [1] 최불암 시리즈에서도 클래식 음악 관련 에피소드에 최불암이 브람스 드립을 치는 에피소드가 있긴하다.
  • [2] 별 생각이 없었던 듯하지만.
  • [3] 바그너는 성격이 조금 다혈질이었다.
  • [4] 바그너에게 마누라를 도둑맞은 한스 폰 뷜로가 요하네스 브람스 진영으로 돌아선 것은 유명하다.
  • [5] 요하네스 브람스의 교향곡 4번을 텅빈 음악이라 혹평했다고 하지만, 말러가 뉴욕필에 재직하던 시절 요하네스 브람스의 교향곡 1번과 3번을 각각 두 차례 지휘한 바 있기도 하다.
  • [6] 종류가 1번부터 21번까지로 장난 아니게 많기에 일일히 열거하지 않음을 양해해주시길 바란다. ㄷㄷ, 다만, 특히 유명한건 5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