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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2세

last modified: 2015-03-27 16:44:11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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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 요제프 2세 레오폴트 2세

1741. 3. 13 ~ 1790. 2. 20
(재위 : 1765~1790)

본명은 요제프 베네딕트 우구스트 요한 안톤 미하엘 아담. 프란츠 1세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 냉정하고 시니컬한 성격이었다. 황태자 시절 황태자비였던 파르마의 이사벨라와의 일로 인해 어느정도의 인간불신도 있었다. 장남인 관계로 일찍부터 후계자 교육을 받아 여러 분야에서 학식이 뛰어났고, 총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1765년 아버지 프란츠 1세가 급사한 뒤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계승하여 요제프 2세가 되었으나….

아버지처럼 허수아비 신세는 아니었지만 선임 통치자인 어머니의 공동 통치자로서 2인자, 즉 콩라인이었다. 일단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으나, 정작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해 필요한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와 보헤미아 국왕 등의 지위는 모두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식상 오스트리아의 공동 통치자였으나 결국 가장 중요한 일들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권한이 있었다. 남편도 허수아비 아들도 허수아비.

그의 재위기간 25년 중 15년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생몰연도와 겹쳤고, 결국 그는 어머니의 그늘에 가려져 통치자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래도 나름 반항하여 어머니와 자주 충돌했고 폐위시키겠다는 협박도 부렸으나 오히려 어머니에게 역으로 폐위당할래? 라는 협박을 받기도….대체 누가 황제야[1]

모자간의 대립은 정치관 차이에서 온 것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영토를 확장시키기보다는 제국의 안정을 중시하였고, 아들의 젊은 혈기와 성급한 성격에 대해서 항상 우려하였다. 반면에 요제프 2세는 프로이센을 본받아 전제적 계몽주의를 수용하여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펴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모자간 불화가 있었다고는 해도 이 동안 요제프 2세는 주로 제국 의회에서 마리아 테레지아가 발표할 문을 작성하곤 했다. 이 연설문에는 자기 자신의 정치사상이 그대로 들어가 있었다.

요제프 2세는 뛰어난 지식인이었으며 특히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악기 연주와 작곡을 취미삼아 하기도 했고, 목관악기 위주로 구성되는 소규모 취주악단인 하르모니무지크의 창단을 처음 지시한 인물이기도 했다. 모차르트에게 독일어 대본으로 된 오페라를 작곡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고, 젖뉴비 시절의 베토벤은 그가 사망했을 때 장송 칸타타를 작곡해 바쳤다. 음악 황제라는 별명도 있었다.

1780년 11월에 마리아 테레지아가 죽자 마침내 그는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 전제적 계몽주의에 입각한 개혁정치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에서 보여준 오스트리아의 국가적 한계를 체험한 그는 개혁을 단행했다. 1781년에 농노를 해방하고 상공업을 장려했으며, 예배의 자유를 보장하였고 독일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도록 했다. 그리고 예술과 학문을 부흥시키고 중앙집권제도의 강화 및 행정제도의 개편 등에 있어 다방면에 걸친 개혁을 단행했다.

요제프 2세는 가톨릭의 기득권을 어느 정도 제어하기도 했다. 사형제도를 폐지하고 신체의 일부를 절단하는 등의 잔인한 형벌을 금지했다. 그리고 어머니와는 다르게 유태인에게도 다소 유화적인 정책을 취했다. 프리메이슨을 지원하기도 했다. (자기가 프리메이슨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요제프 2세의 개혁정치는 제대로 된 기반 없이 성급히 행해졌던 것이었기에 상당수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역으로 국내의 혼란이 가중되는 결과를 빚기도 하였다. 중앙집권책과 독일어 공용화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지방간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자치가 행해졌던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가톨릭 사제들에게도 큰 반발을 사 국내의 지지를 잃어버렸고 후술하듯 각 지방의 반란이 잇달았다. 현실감각 없는 이상주의자 군주의 전형적인 사례 중 하나.

대외적으로는 그의 재위기간 중에 폴란드를 분할했으나 이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한 일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사후 그는 독자적으로 대서양으로의 해양 진출을 꾀하며 네덜란드 지방[2]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고, 1788년 러시아예카테리나 2세와 함께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전쟁에 나섰으며, 바이에른의 병합까지 시도했다.

그러나 요제프 2세의 대외정책도 실패로 얼룩졌다. 오스만과의 전쟁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카란세베스 전투 같은 삽질의 결과 벨기에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헝가리에서는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바이에른 병합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독일 제후국가들의 반대로 포기해야 했다. 네덜란드에 대한 통제력 강화는 역으로 현지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이후 네덜란드 지역이 혁명의 영향을 거세게 받으며 독립을 선언하면서 그의 네덜란드 정책도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은 요제프 2세에 대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우려가 옳은 것이었던 셈이다. 그가 섣불리 추진했던 개혁들은 대부분 실패하고 오스트리아를 약화시켰다.

그러던 중 말년에는 프랑스에서 터진 혁명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데 주력하였다. 결국 1790년 1월에 을 중단한다고 선언했고 49세의 나이로 2월에 빈에서 승하하였다. 유언은 "온 유럽에 항구적인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하노라." 였지만 그럴 '기미'라도 보이게 된 것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이후였고[3], 확고히 된 것은 두 차례의 대전이 지난 약 200년 뒤였다.

파르마 공작의 딸 이사벨라[4]와는 정략결혼한 사이였지만, 요제프는 그녀를 무척 사랑했고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사실 레즈비언으로, 그녀가 사랑한 인물은 남편이 아니라 시누이 마리아 크리스티나였다. 그녀가 22세에 출산 직후에 걸린 천연두로 인해 요절한 뒤, 크리스티나에게 보낸 러브레터들을 발견한 요제프는 이후 더욱 냉소적이고 인간불신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그 후 카를 7세의 딸 마리아 요제파와 재혼했지만 부부 사이는 좋지 않았고, 그녀 역시 천연두로 일찍 사망했다. 이후 하나 남아 있던 딸마저 8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요제프는 더욱 냉정한 성격으로 변해 다시 결혼하지 않았다. 그의 사후, 토스카나 대공인 동생 레오폴트 2세가 제위를 이었다.

차갑고 냉정하며, 거의 인간불신에 가까운 성격이었다지만 대체로 가족들과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특히 거의 자식뻘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나이차(14살)가 많았던 막내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와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루이 16세불임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았을 때엔 여동생을 위해 루이 16세를 만나려고, 팔켄슈타인 백작[5][6] 이라는 가명을 댄 채 직접 프랑스로 갔다.

이 때 부르봉 왕조와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해 무척 걱정하며 수십개 조항에 달하는 권고문을 남겼다.[7] 그와 대화를 나누었던 프랑스 지식인들은 그가 계몽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표했다고….


모차르트의 생애를 다룬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는 어느 정도 비중있는 조연으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음악을 즐기는 소탈한 계몽군주라는 면이 부각되어 점잖은 모습을 보인다. 인간불신이 심했던 냉철한 면모는 전혀 보이지 않고 친절하고 사람좋은 높으신 분이라는 이미지로 나왔다. 다만 지루한 음악을 들을때는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게 하품을 하기도..... KBS판 더빙 성우는 박상일.

마리 앙투아네트(영화)에서는 니 휴스턴이 연기했다. 여기서도 여동생에 대해 걱정하고, 제부인 루이 16세에게 성교육(?)을 해줘서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도록 유도해 주었다. 오빠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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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마리아 테레지아에게는 자식이 많았기 때문에 요제프를 폐위시키고 다른 자식을 앉힐 선택권이 있었다. 반대로 옆동네 프랑스 부르봉 가문은 남자후손들이 천연두 크리로...
  • [2] 이라고 되어 있지만 지금의 벨기에이다. 이 지역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스페인에서 오스트리아로 종주권이 이동했다.
  • [3] 보불전쟁을 제외한 이 시기의 100년 평화는 제1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진다.
  • [4] 원래는 스페인의 인판타였으나, 7년 전쟁에 오스트리아가 패배한 후 스페인 왕녀 지위를 잃고 파르마 공녀로 격하되었다.
  • [5] 일단 가명이었지만, 누구나 그가 요제프 2세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의 방문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동맹이 위기에 놓일수 있는 중대사였다. 국민들의 관심을 받는 법을 잘 알았던 요제프 2세는 국빈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파리에 숙소를 마련하고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사람을 대했기 때문에 이는 대단한 이슈가 되었다.
  • [6] 게다가 일반 백성이 아닌 이상 팔켄슈타인 백작이 요제프 2세라는 것을 모를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팔켄슈타인 백작이라는 작위 자체가 요제프 2세가 가지고 있던 작위중 하나였기 때문. 아버지인 프란츠 1세가 물려준 작위 중 하나이다.
  • [7] 이 중 한 구절에서 혁명이 언급된다. 프랑스의 불안한 정세를 경고하며 왕과 왕비가 잘 처신하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