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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관

last modified: 2015-03-30 06:59:24 Contributors

Contents

1. 王冠
2. 삼국지연의의 등장인물
3.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1. 王冠




르네상스기 프랑스의 왕관


「왕관을 쓰려는 자, 무게를 견뎌라.」

"왕관에는 그걸 쓴 머리를 못쓰게 만드는 효과가 있지" -티리온 라니스터

이 머리에 쓰는 관. 한국 역사에서는 관, 면류관, 익선관 등이 사용되었다.

흔히 금관 같은 것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금이 꽤 고밀도이다보니 의 비중이 높은 왕관을 쓰게 되면 목이 남아나지 않을것 같다는 말이 있지만... 왕관도 사람이 머리에 쓰라고 만든 물건이다. 그렇게 무겁게 만들지는 않는다.

왕관의 무게는 신라 금관을 예로들면 '금관총 금관'이 692g, 유명한 '천마총 금관'이 1,262g이다. 영국의 유명한 제국왕관(Imperial State Crown)이 0.91kg정도.

비교를 위해 현용 방탄헬멧의 무게는 한국군의 경우 1.1kg 미군이 쓰는 PASGT 같은 경우는 1.5kg정도 된다. 군필자라면 알겠지만 이걸 24시간 쓰고 다녀도 별 문제는 없다.귀찮기는 하다 중세에 만든 진짜 튼튼한 철투구 같은 경우는 무거운건 3kg에 달하는 것도 있지만 그걸 쓰고도 얼마든지 전쟁했다.

물론 왕관의 경우는 아무리 왕이라도 조심조심 다뤄야 하기에 일상생활에 쓰고 있기에는 불편하겠고, 고귀한 신분에 귀찮기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잠깐 머리에 쓰는데는 문제 없다는 말.

신라 금관의 경우에는 예식용이라거나 묘에 안치하기 위한 관이라는 말도 있는데 평상시 썼다 안 썼다를 파악할만한 명확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애초에 평상시 왕관을 쓰지 않다가 중요한 의식에만 쓴다고 해서 왕관이 아닌 것도 아니고. 그런데 각종 사극에서는 집무중에도 그냥 쓰는 것처럼 굳어져 있다(…). 사실 어느 나라나 중요 행사용 왕관과 평상용 약식 왕관이 구분되는 경우가 흔했고, 중국의 익선관을 차용한 조선도 중요한 의식 때에는 면류관을 썼다.

한국의 왕관은 삼국시대까지는 상당히 독창적이면서도 예술적인 형태가 많았고 특히 신라의 것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물적,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러나 7세기 이후 중국풍이 점차 스며들었고 고려조선으로 넘어가면서는 모화사상으로 인해 중국식을 그대로 베끼는 지경까지 갔다. 결국 이러한 습속은 대한제국에서 폐지되었다.

어쨌든 무게를 덜어내면서도 간지를 연출하기 위해 보석을 박거나 도금하는 방식을 쓰는 예가 많았고, 굳이 왕관을 쓰지 않았던 나라도 있다고 한다. 그리스로마의 경우는 금속이 아닌 월계수로 만든 왕관도 사용되었다.



2. 삼국지연의의 등장인물

王瓘

위의 장수로 사마소조모를 시해하고 조환을 옹립하자 강유가 이를 명분으로 삼아 15만의 군사를 일으켜 기산으로 침공하려고 할 때 등애의 참군으로 종군했다.

촉군이 세 길로 나온다는 보고가 들어와 장수들과 대책을 의논할 때 등애에게 이전에 사마소에게 대항하다가 죽은 조모의 편을 들다가 죽은 왕경의 조카로 거짓 투항하는 계책을 올려 내응하려고 했는데, 등애는 강유를 속이지 못할까 걱정이라 했지만 목숨을 걸고 가기로 한다.

등애에게서 5천명의 군사를 받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야곡으로 나아가다가 촉군을 발견하자 위나라에서 항복한 군사라면서 촉군에게 거짓 투항을 했는데, 이 때 왕경의 조카로 사칭해서 삼촌의 원한을 갚겠다고 했다. 강유가 식량이 걱정이라면서 그 수레들을 천구에 있으니 기산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강유도 기산 영채를 공격하러 간다고 했다.

왕관은 강유가 자신의 계책에 걸린 줄 알고 수락하면서 왕관이 데리고 온 군사 중에서 3천명만 데리고 갔다가 2천명을 뒤에 남겨둬서 길을 안내해 기산을 치도록 한다고 하자 강유가 의심할까 두려워 수락했는데, 강유는 사마소가 조조에 비길 만한 간웅이라 왕경을 죽이고 그 삼족을 몰살하면서 그 친조카가 관외에서 군사를 거느리게 내버려 둘 리가 없다는 이유로 거짓 투항인 것을 간파했다.

하후패도 강유에게 왕관이 왕경의 조카라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고 얘기했으며, 등애에게 사람을 보내 글을 보고했지만 강유가 야곡으로 나아가지 않고 사람을 길에 매복시켜 왕관의 첩자를 막자 열흘도 지나지 않아 등애에게 보고하는 글을 지닌 자가 붙잡혔다. 결국 8월 20일에 오솔길로 군량을 날라 큰 영채로 돌아가 담산 골짜기로 맞이해달라는 내용이 드러났다.

강유가 글을 지닌 자를 죽이고 8월 15일에 등애에게 몸소 대군을 거느리고 담산 골짜기에서 맞이해 호응해달라고 한 내용으로 고치면서 그 부하를 위군으로 위장시켜 위군 영채에 글을 전했으며, 식량을 거느리는 위군으로 위장해 산골짜기에서 매복했다. 결국 등애는 그 내용을 보고 기뻐해 15일에 5만을 이끌고 담산 골짜기로 달려가면서도 산들이 겹쳐 길을 가리고 있는 것 때문에 매복한 군사가 있을까 우려해 나아가지 않았는데, 왕관이 군량과 말먹이 풀을 지니고 경계를 넘다가 촉군의 추격을 받는다는 거짓 보고에 속아 등애가 왕관을 구원하러 가려다가 촉군의 군사에게 격파되었다.

왕관은 등애와 비밀리 약속한 대로 군량과 말먹이 풀을 실은 수레를 갖춰놓고 일이 진행되기를 기다렸지만 일이 발각되어 등애가 패했다는 보고받자 사람을 시켜 상황을 알아보게 했다가 촉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고받자 심복들에게 군량과 말먹이 풀을 실은 수레를 모두 불태우게 했다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라고 했다.

그러면서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달려갔다가 촉군이 추격하면서 따라잡힐까 두려워 잔도와 여러 요충의 관을 불태웠으며, 한중을 잃을까 두려워 한 강유가 추격해 포위되자 흑룡강에 뛰어들어 죽었다.

3.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王觀
(?~260)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로 자는 위대(偉臺).

동군 늠구현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가난했지만 지기가 있어 조조가 그를 불러 승상문학연으로 삼았으며, 그 후 지방으로 나가 고당, 양천, 찬, 임의 현령으로 임명되어 치적을 쌓는다.

220년에 조비가 즉위하자 중앙으로 들어가 상서랑 정위감이 되고 다시 지방으로 나가 남양군, 탁군태수가 되었는데, 당시 탁군은 선비족의 침범이 잦은 곳으로 왕관은 이에 대항해 백성들에게 열 집 이상이 모여서 거주하게 하고 멀리 볼 수 있는 누대를 건축한다. 당시에는 이것을 원하지 않는 자도 있었지만 왕관은 군의 관리까지 파견해서 시간 제한은 두지 않고 그냥 건축만 완성하면 돌아오라고 했으며, 파견된 관리들 또한 시간 제한이 없으니 감독을 하지 않고 서로 격려해 활동하니 열흘 안에 모두 완성해 적이 그런 대비에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

226년에 조예가 즉위하자 조서를 내려 각 군의 치안상황을 극(劇 : 낮음), 중(中 : 중간), 평(平 : 높음)으로 나눠 보고하도록 했는데, 담당 관리가 평이라고 보고하자 이걸 본 왕관이 선비족의 침입으로 피해를 입고 있는데, 왜 극이라고 보고를 안하냐고 한다. 관리는 외부 관계 때문에 극이라고 보고하면 아들이 볼모로 수도로 끌려온다는 말을 했지만 왕관은
무릇 관리는 백성을 위해 일해야 하오. 지금 군은 외부와의 관계로 인해 극하니 백성들의 노역을 감소해야만 하오. 어찌 태수의 사사로움을 위해 한 군의 백성을 불행하게 할 수 있겠소?
그런데 이 왕관의 아들은 외동아들인데다가 나이도 어리고 몸마저 골골거렸는데, 왕관의 이러한 결정으로 업성으로 가게 되니 그가 공적인 일을 위하는 마음이 어떤 지를 알 만했다.

조예가 허창을 순시할 때 치서시어사가 되어 조정 고관의 재판을 담당했으며, 사람들을 대할 때 기분에 따라 대하던 조예와는 관계없이 뜻을 굽히지 않고 법에 따라 집행한다. 이 때 사마의가 그를 종사중상으로 임명할 것을 요청해 상서로 승진했으며, 밖에 나가 하남윤이 되고 소부로 전임된다.

239년에 조예가 죽고 조방이 즉위한 후에는 조상 일파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해 집의 목재와 사람들의 물품을 마음대로 가져오게 하는데(…), 왕관은 그러한 상황을 보고 빼앗은 것을 모두 몰수하고 관에 보고한다. 당시 소부는 사치품이나 공예품을 관리하는 곳이었는데, 이런 자리에 왕관이 있었기에 조상 일파에게는 눈엣가시였는데, 조상 일파는 그를 태복으로 전임시킨다.

249년에 사마의가 조상 일파를 주살하자 왕관은 중령군의 직을 대행해 조희의 영을 관장하면서 이어 관내후의 직위를 받고 상서와 부마도위에 임명된다.

254년에 조모가 즉위하자 중향정후로 봉해지고 광록대부, 우복야로 봉해졌으며, 256년에는 골골거리던 노육이 광록대부로 있던 왕관을 추천한다. 260년에 조환이 즉위하자 양향후로 봉해지고 식읍이 천호 증가해 2천 5백호가 되었으며, 260년 6월 11일에 상서우복야에서 사공으로 승진하지만 왕관은 이를 거절하면서 사퇴를 요청하나 거부되어 강제로 파견된 사자에게 인수를 받고 삼공의 지위에 오른다.

관직에 취임한 지 며칠 후 수레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 260년 10월에 세상을 떠나면서 묘지는 관이 들어가면 충분하고 명기[1]는 두지 말며, 흙으로 쌓지 말고 나무도 심지 말라고 유언했다. 시호를 숙후라고 하고 아들 왕리가 후사를 이었으며, 함희 연간에 왕관의 공으로 왕리는 교동자에 임명된다.

청아하고 소박하며 그 자신을 엄하게 하고, 부하를 통솔하는 것도 검소해 관리들마저 그의 풍모를 이어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또 진수는 청렴하고 정직하며 품행이 고결해 재상의 자리에 오를 만 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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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明器 : 죽은 자와 함께 묻는 물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