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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왕국

last modified: 2015-03-30 14:31:22 Contributors



Kingdom of Jerusalem (1099 ~ 1291)

1099년 제1차 십자군 전쟁을 통해 서유럽의 기독교도들이 레반트 지역에서 이슬람교 세력을 쫓아내고 세운 기독교 왕국. 그러나 1187년 수도이자 최대 거점이었던 예루살렘아이유브 왕조술탄 살라딘에게 점령당한 후 아크레로 수도를 옮겼다. 1291년 마지막 남은 도시 아크레가 이슬람 세력 맘루크 왕조의 술탄 칼릴에 의해 함락되어 항복하면서 멸망하였다.

Contents

1. 개요
2. 왕국의 계보
3. 관련인물


1. 개요

비잔티움 제국의 헬프신공에 응한 로마 교황이 성지탈환 및 수호를 천명하여 소집된 제1차 십자군은 레반트 지역에서 이슬람교 세력을 몰아냈으며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제1차 십자군은 당시 십자군을 지휘하던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를 예루살렘의 수호자로 임명하고 왕으로 추대하였으나, 고드프루아는 왕위에 오르는 것을 거부하였다[1].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이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여겼기 때문에 역사에서도 예루살렘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고드프루아는 주변 이슬람 세력의 소탕에 전념하다가 1100년 숨을 거두었고 그의 동생 보두앵이 왕위를 이어 보두앵 1세가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공식적으로 예루살렘 왕국과 예루살렘 국왕이란 칭호를 사용하였다.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성공에 따라 레반트 지역에는 여러 십자군 국가들이 성립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국 등을 꼽을 수 있다. 예루살렘 왕국은 이들 국가의 종주권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러한 십자군 국가들은 예루살렘 왕국과 국왕에게 봉사하고 성지를 수호해야할 의무가 있었다...만 원래 이해관계에 따라 제후들의 연합이 갈라지고 각각 십자군 국가를 창립했던 까닭에 상황에 따라 협력을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실상은 서로 디스질하고 현피도 뜨는 막장스런 관계였다(…). 게다가 현지 제후들은 이슬람과 협력이 없으면 세력유지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정책을 시행하였으나, 새로 들어온 십자군 원정대나 유럽본토의 교황 및 교회의 관계자들은 이슬람에 호전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어서 국가정책을 펼치는데 골머리를 썩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예루살렘 왕국의 정책도 어떨 때는 이슬람과의 화합을 도모하다가 갑자기 이슬람과 전쟁을 선언하는 등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십자군 국가들은 상당히 척박한 지역에 건설된 국가이기 때문에, 보급을 서유럽의 지원에 의존했는데 십자군 전쟁이 활기를 잃어가면서 자생력을 잃어가기도 했다. 또한 같은 기독교계 국가인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 악화로, 받을 수만 있다면 엄청났을 터인 비잔티움 제국의 지원조차 받지 못했다..

어쨌든 성당기사단구호기사단 등의 종교기사단이 맹위를 떨치고 국가 막장 테크를 탄 파티마 왕조와 콩가루가 된 셀주크 제국, 이슬람권이지만 예루살렘 왕국에 호의적이던 다마스커스 등 각종 이슬람권의 버프를 받아 그런대로 영토를 확보하고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슬람도 어느정도 상황이 정리되어 세력을 가다듬고 반격을 하기 시작하자 서서히 밀리기 시작하였다. 이를 대표하는 사건이 1144년, 에데사 백국이 이슬람의 사자 장기에게 털린 것으로 이에 깜짝 놀란 유럽에서 2차 십자군을 편성하여 예루살렘 왕국을 지원하였으나 애꿎은 물자와 인력만 날리고 망했어요. 게다가 이슬람 도시였지만 예루살렘 왕국에 우호적이었던 다마스커스가 장기의 후계자 누르 앗 딘(누레딘)의 손에 떨어지면서 오히려 상황만 악화되었다.

이후 예루살렘 왕 아모리 1세는 상황반전을 위해 약체화된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를 공격하였으나 역시 중요성을 내다본 누르 앗 딘이 부장 시르쿠를 파견하여 예루살렘 왕국의 행동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결국 이집트 원정도 실패하여 시르쿠의 조카인 살라흐 앗 딘이 이집트의 패권을 쥐게 되었고, 당시 이집트 원정을 주도하던 아모리 1세가 사망하면서 살라흐 앗 딘에게 관광당할 처지에 놓였다. 게다가 아모리 1세를 계승한 보두앵 4세가 나병환자였기 때문에 이래저래 왕국 사정은 막장이 되어 여러 십자군 제후들이 왕위 계승을 놓고 다투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그나마 천만 다행으로 보두앵 4세는 이슬람교도를 최대한 포용하고 살라흐 앗 딘과의 분쟁과 협상을 되풀이하는 정책으로 긴장 상태를 유지, 상황을 안정시키려 시도했지만, 제후들의 다툼과 계속되는 군사 원정으로 인해 나병이 악화되어 사망하게 된다. 이런 혼란기 속에서 살라흐 앗 딘은 누르 앗 딘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왕국을 계속 공격하였다. 그 사이 예루살렘 왕국은 보두앵 4세가 죽고, 그 뒤를 이은 어린왕 보두앵 5세가 1년만에 죽는 혼란기를 거쳐 뤼지냥의 기가 예루살렘의 왕을 계승하였다.

이 시기 티용의 르노가 이슬람 상단을 습격하여 살라흐 앗 딘을 도발하였기에 살라흐 앗 딘은 대병력을 거느리고 본격적인 예루살렘 왕국 정복에 나섰다. 기는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직접 전투에 나섰으나 하틴 전투에서 거하게 발리면서 시망. 사티용의 르노는 살라딘에게 목이 따이고 본인은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된다. 이벨린의 발리앙 등 소수남은 기사들이 예루살렘 방어를 위해 분전하였으나, 압도적인 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이벨린의 발리앙은 '자신의 백성들을 살려서 보내주지 않으면 양측의 성지를 죄다 때려부수고 도시 내의 이슬람 교인를 싸그리 죽이고 우리도 죽겠다' - '그렇다면 당신들을 전원 보내주겠다' - '내가 몸값을 마련하지 못할 모든 기독교인들을 대표해 인질이 되겠다' - '그럼 내가 그들의 몸값을 전부 내주겠다'(...) 라는 뭔가 ㅎㄷㄷ한 협상을 거쳐 예루살렘을 살라흐 앗 딘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예루살렘 왕국의 잔존 세력은 팔레스타인 해안쪽으로 밀려났으며, 사실상 티레가 유일한 예루살렘 왕국의 영토일 정도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시빌라가 전염병으로 두 딸과 함께 사망하자 기는 왕위계승에서 밀려나 키프로스로 가서 왕국을 새로 차렸다. 시빌라의 이복동생 이사벨 1세가 뒤를 이었는데 그의 외손녀 이사벨 2세가 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2세와 결혼하면서 사실상 예루살렘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에게 넘어갔다.

한편 예루살렘의 상실 소식을 들은 유럽에서 3차 십자군을 편성하여 지원에 나섰으나 예루살렘 탈환은 실패하였고, 대신 팔레스타인 지역 해안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3차 십자군 원정을 통해 탈환한 아크레를 수도로 삼아서 왕국을 존속시킬 수 있었으며 예루살렘 탈환을 노렸으나 끝내 실패하였다. 다만 제6차 십자군 원정 당시 프리드리히 2세가 외교교섭을 벌여 일시적으로 예루살렘을 회복한 적은 있었으나, 이것도 1244년에 다시 이슬람 세력에게 넘겨주었다.

이후 아이유브 왕조 이집트에게 샌드백처럼 얻어터지는 신세였으며 결국 세력권이 대폭 축소되어 수도 아크레 주변만을 간신히 유지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사실상 이름만 존재하는 국가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프리드리히 2세의 손자 콘라딘이 자손없이 처형되는 바람에 아모리 1세부터 모계로 이어진 혈통은 단절되었고 키프로스 왕 위그가 그 뒤를 잇게 되었다. 결국 1291년 위그의 아들 앙리 2세 때 아크레가 맘루크 왕조 이집트에게 함락당하면서 예루살렘 왕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여담이지만 상당수 망명객들이 키프로스로 갔고 예루살렘 왕을 지냈고 키프로스 왕국의 초대 왕 기의 동생 아모리의 후손이 키프로스 국왕이었으므로 키프로스 왕국이 멸망하기 전까지 예루살렘 왕을 자칭하였다. 키프로스계 명목상 예루살렘 국왕들은 여왕 샤를로트 1세가 삼촌 자크 1세에게 찬탈당한 뒤 두 명으로 늘어났고, 이 중 샤를로트 1세의 명목상 계승권(...)은 훗날 이탈리아 왕국을 성립시키는 사보이 가문으로 넘어간다. 다음으로 자크 1세의 후손들은 키프로스가 베네치아에 합병됨에 따라 예루살렘 국왕 칭호를 포기했다.

자칭 예루살렘 국왕들은 뤼지냥 계열만이 다가 아니어서, 이미 멸망한 왕국임에도 불구하고 모계 계승권을 주장한 명목상의 국왕들이 많았다. 뤼지냥 가문을 제외하면 카페 왕조의 분가인 앙주 가문이 예루살렘 국왕을 자칭했다. 이 계승권(?)은 훗날 발루아 가문까지 내려가며, 마지막으로는 로렌 가문으로 넘어가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에까지 이어진다.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말이다. 2015년 현재 예루살렘 왕국의 명목상 국왕은 사보이 가문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Vittorio Emanuele di Savoia, 1937~)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Karl von Habsburg-Lothringen, 1961~) 두 명이 있다.

2. 왕국의 계보

  • "성묘의 수호자"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 (1099 - 1100)
고드프루아는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 다고베르트 2세의 아들 시지스베르 4세의 후손이라고 전한다. 블로뉴 백작 외스타슈 2세와 하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 2세의 딸 이다의 장남으로 후계자가 없던 백부 하 로트리겐 공작 고드프루아 4세가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1076년 고드프루아 4세가 죽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는 로렌 공작령을 자신의 아들에게 주기 위해 처음엔 고드프루아의 상속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1082년 고드프루아에게 프랑스 아르덴에 있는 부용을 그에게 주고 승인했다. 그리고 고드프루아는 하인리히 4세를 위해 전쟁을 벌이며 충성한 댓가로 1089년 로렌 공작령을 돌려받았다.
1096년 제1차 십자군 참가를 권유받아 둘째 동생 블로뉴 백작 우스타슈, 셋째 동생 베르됭 백작 보두앵, 조카 보두앵 드 부르와 함께 참가했다. 안티오키아 함락 이후 보에몽이 안티오키아에 잔류한 후, 생질의 레몽과 함께 1099년 예루살렘 공략에 성공했다. 그해 예루살렘을 탈환하려는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을 아스칼론에서 격파했으나, 레몽과는 친구사이였기 때문에 아스칼론을 탈취하지는 않았다. 이 때 고드프루아는 이집트를 빼앗아 왕국을 만들고 난 뒤에 예루살렘을 교황령으로 만들자고 이야기가 진행되었으나, 이집트 침공을 계획하던 중 1100년 7월 갑자기 죽었다. 후계자가 없어서 그의 동생 보두앵이 뒤를 이었다.
레몽은 트리폴리를 갖기를 원하여 트리폴리 백작국을 만들었으며 결정적으로 레몽은 예루살렘 왕위를 거절했기에 고드프루아가 왕으로 선출되었다. 하자만 고드프루아는 예수 그리스도가 목숨을 잃은 장소의 왕이라 불리는 것을 성묘의 수호자라고 자칭했다. 따라서 정식 왕이라고는 부르기 힘들며 정식으로 왕을 선포한 사람은 그의 동생 보두앵 1세이다.

  • 보두앵 1세 (1100 - 1118)
보두앵은 볼로뉴 백작 외스타슈 2세의 삼남으로 고드프루아의 동생이다. 처음엔 사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다가 도중 환속하여 큰형 고드프루아의 아래에서 베르됭 백작이 되었다. 제1차 십자군 원정 때 고드프루아, 작은형 우스타슈, 조카 보두앵 드 부르와 함께 참가했다. 1099년 예루살렘 왕국이 성립되자 보두앵은 에데사에 에데사 백작국을 세우고 지배했다. 그는 에데사 백작국을 강화하고 아르메니아 귀족의 딸 아르다와 결혼해 아르메니아 토착민과 결속을 다졌다.
1100년 성묘의 수호자였던 형 고드프루아가 죽자 보두앵은 에데사 백작국을 보두앵 드 부르에게 물려주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예루살렘 왕 보두앵 1세가 되었다. 왕국 남부에서 이집트 파티마 왕조와 싸워 위세를 떨쳤고 십자군 귀족의 반대를 누르고 정식으로 그해 12월 예루살렘 왕이 되었다. 예루살렘 총대주교 였던 다임베르트는 예루살렘을 교황령으로 만들기를 원했으나, 이에 반대하고 예루살렘이 아닌 베들레헴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는데는 협력했다.
1101년 십자군은 람라에서 대패했으나, 그 후 아르수프, 카이사레아를 점령하고 1112년까지 트리폴리 백작국이 다스리던 아스칼론과 티레를 제외한 아콘, 람라, 트리폴리, 시돈, 베이루트 등 지중해 근해의 모든 해안도시를 점령해 영토를 넓혔다. 1118년 이집트 원정중에 식중독으로 사망했으나, 후계자가 없어 조카 보두앵 드 부르가 뒤를 이었다.

  • 보두앵 2세 (1118 - 1131)
보두앵은 레텔 백작 위그 1세의 장남으로 아버지로부터 부르를 영지로 받았다. 1096년 제1차 십자군이 발흥하자 고드프루아, 볼로뉴 백작 보두앵과 함께 원정에 나서 예루살렘 왕국을 세웠다. 1100년 볼로뉴 백작 보두앵이 보두앵 1세로 고드푸루아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국왕으로 즉위하자 보두앵은 에데사 백작이 되었다. 1104년 셀주크 투르크가 에데사 백작국을 공격하자 보두앵은 안티오키아 공작국의 도움을 받았지만 하란 전투에서 패하여 셀주크 투르크의 포로가 되었다. 그 사이 보에몽의 조카 탕크레드가 섭정이 되었다. 보두앵은 1108년 몸값을 치르고 풀려났지만 탕크레드는 에데사를 넘겨주길 거부했고 보두앵은 몇몇 이슬람 제후들과 연합하여 탕크레드와 싸워 결국 탕크레드를 축출했다. 그러나 1110년까지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영토 대부분은 모술의 이슬람 세력에게 빼앗겼다.
1118년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가 죽자 보두앵은 그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왕국의 왕으로 가게 되었고 에데사는 조슬랭에게 넘어갔다. 그 무렵 팔레스타인에는 기독교인 순례자를 돕고 보호하기 위해 종교기사단이 생겨났는데 1113년 구호기사단, 1118년 성당기사단이 창립되었다. 보두앵은 성당기사단의 본부를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 근처로 마련해 주었기 때문에 이 기사단의 이름이 성당기사단이 되었다.
보두앵은 1124년 또 투르크족에게 붙잡혀 인질이 되기도 했으나, 곧 풀려나서 성당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의 도움으로 왕국의 영토를 넓히고 1129년 성당기사단의 도움으로 다마스쿠스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보두앵은 딸 넷 밖에 없었는데 장녀 멜리장드는 앙주 백작 풀크 5세와 결혼시키고 이 두 사람을 후계자로 삼았다. 차녀 알리스와 삼녀 오디에르나는 각각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2세와 트리폴리의 레몽 2세와 결혼시켰다.[2] 보두앵은 1131년 8월 21일 병사하고 멜리장드와 풀크가 뒤를 이었다.

  • 멜리장드와 풀크 (1131 - 1153)
멜리장드는 보두앵 2세와 모르피아의 장녀로 태어났는데 원래 보두앵 2세는 에데사 백작국을 다스리던 시절 지역과의 연계를 강화하기 위해 아르메니아의 영주 가브리엘의 딸 모르피아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멜리장드는 아버지가 보두앵 1세의 후계자로 선출되는 13살까지 에데사에서 성장하였다. 보두앵 2세는 아들이 없었고 자연스럽게 장녀인 멜리장드는 왕위 계승자로 부상하였다. 보두앵 2세는 멜리장드와 그 후손이 예루살렘을 안정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강력한 귀족과 결혼하기를 원했고 프랑스의 루이 6세는 앙주 백작 풀크 5세을 추천했다. 풀크 5세는 멘의 에멩가르데와의 첫 결혼에서 얻은 조프루아 플랜터재넷은 영국 노르만 왕조 헨리 1세의 딸 마틸다와 결혼했는데 그 아들 헨리는 훗날 플랜태저넷 왕조 헨리 2세가 되었다. 1130년 멜리장드는 풀크 사이에서 장남 보두앵을 낳았고 1131년 보두앵 2세의 사망 후 남편과 함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왕국의 지배를 두고 풀크와 멜리장드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났고 풀크는 자파 백작 위그 2세와 멜리장드의 추문을 문제삼았다. 위그는 보드앵 2세의 충신이었으며 멜리장드의 사촌으로 왕실의 일원이기도 했다. 부부는 1136년 화해하여 차남 아모리가 태어났다. 멜리장드는 1143년 풀크가 사냥 중 사고로 사흘 동안 혼수상태로 있다가 사망하자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였다고 한다. 1144년 에데사 백작국이 이슬람의 마드 앗 딘 장기의 군대에게 함락되어 멸망하자 위기를 느낀 멜리장드는 교황에게 특사 위그 드 자발라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제2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고 프랑스의 루이 7세와 신성 로마 제국 콘라트 3세가 주도하였으나, 별다른 소득 없이 종료되었다.
1152년 성년이 된 보두앵은 정치에 직접 참여하려 하였지만 멜리장드를 따르는 귀족들의 반대를 받았다. 보두앵은 어머니와 대립하여 단독 대관식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왕국의 귀족회의에 왕국 분할을 요구했다. 멜리장드가 받은 영지는 예루살렘를 비롯해 사마리아, 나불루스 등 보두앵이 받은 영지보다 더 부유한 편이어서 보두앵은 결정에 승복하지 못해 남쪽으로 진격한 결과 결국 보두앵이 왕국의 전권을 얻게 되었다. 1153년 모자는 화해하였고 멜리장드가 정치적 조언을 맡기도 했다.
1161년 멜리장드는 뇌졸중으로 기억력이 감퇴되어 더 이상 국정에 참여할 수 없었다. 사망하기 전까지 그녀의 동생들인 트리폴리 백작부인 오디에르나와 베다니의 수녀원장 이오베타가 간호를 맡았다. 그해 9월 11일 멜리장드가 사망하자 그녀의 장남 보두앵이 뒤를 이었다.

  • 보두앵 3세 (1143 - 1162)
보두앵이 13살 때 아버지 풀크가 죽자 어머니 멜리장드와 함께 공동으로 왕국을 다스렸는데 멜리장드는 귀족중에서서 조언자를 구하여 어린 아들을 권력에서 제외시켰다. 당시 예루살렘 왕국은 북쪽의 십자군 가신국은 독립할 움직임을 보였고 보두앵 2세와 풀크가 그랬던 것처럼 강력한 군주가 십자군 국가들을 통솔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슬람 측에서는 이마드 앗 딘 장기가 모술과 알레포에서 다마스쿠스를 넘보고 있었다. 1144년 장기자 에데사 백작국을 점령하여 멸망시키자 유럽에서는 제2차 십자군이 발흥하게 되었다. 1147년 장기가 죽고 그의 뒤를 이은 아들 누르 앗 딘은 계속 다마스쿠스를 노리고 있었다.
1148년 프랑스 루이 7세와 신성 로마 제국 콘라트 3세가 이끄는 제2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으로 왔는데 어리석게도 이들은 다마스쿠스를 공략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원정이 대실패로 끝나자 십자군은 유럽으로 돌아가 버렸고 누르 앗 딘은 안티오키아 공작국을 공격했다. 안티오키아의 레몽[3]은 사로잡혀 참수되었다.
1152년 보두앵은 스스로 통치할 나이가 되자 정치에 관여하려 했는데 어머니 멜리장드를 따르는 귀족들의 반대를 받았다. 보두앵은 어머니와 돌립하여 단독 대관식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왕국의 귀족회의에 왕국 분할을 요구했다. 보두앵은 갈릴레아 등 북쪽의 빈약한 도시를 받았고 멜리장드는 예루살렘 그 자체를 비롯해 사마리아, 나불루스 등 더 부유한 영지를 분할받았다. 보두앵은 이런한 결정에 승복하지 못해 남쪽으로 진격하여 내전이 벌어졌다. 나불루스가 보두앵에 손에 떨어지자 예루살렘은 보두앵에게 문을 열었고 보두앵은 왕국의 전권을 얻었다. 양측이 합의에 도달해 멜리장드는 나불루스에 은거하고 보두앵은 간섭하지 않기로 했으며 1154년 모자는 화해하여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예루살렘 왕국이 모자 간 내전을 벌이는 동안 누르 앗 딘은 다마스쿠스를 복속하여 시리아는 누르 앗 딘의 깃발아래 통일되었다. 보두앵은 이집트 파티마 왕조가 약해진 틈을 타 남쪽으로 눈을 돌려 가자를 요새화하고 이집트를 압박했다. 1153년 보두앵은 아스칼론의 요새를 점령했고 1156년 누르 앗 딘과 협정을 맺었다. 보두앵은 비잔티움 제국과 동맹을 추구하여 마누엘 1세 콤네누스의 조카 테오도라 콤네나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아 1158년 결혼했다.
멜리장드는 1161년 죽었고 보두앵은 1162년 트리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에 중병에 걸려 베이루트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에는 독살의 의혹이 있는데 기록에 따르면 보두앵은 안티오키아에서 시리아 정교회 의사가 준 약을 먹고 나자 곧바로 이질에 걸렸다고 한다. 보두앵이 죽었을 때 왕비 테오도라는 아직 16살이었고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동생 아모리가 뒤를 이었다.

  • 아모리 1세 (1162 - 1174)
형 보두앵 3세는 1153년 이집트로부터 아스칼론을 점령하여 아모리에게 주었고 아모리는 야파와 아스칼론의 백작이 되었다. 아모리는 1157년 에데사의 조슬랭 2세의 딸인 아녜스와 결혼했으며 1162년 형 보두앵 3세가 죽자 뒤를 이었다. 그러나 귀족들은 아녜스의 행실이 나쁘다는 점을 이유로 결혼을 무효화 할 것을 요구했고 결국 아모리는 아녜스와 이혼하고 왕위에 올랐다. 아녜스는 이벨린의 위그와 결혼했지만 그녀가 낳은 시빌라와 보두앵은 왕위 계승자로서의 법적 지위는 보장받을 수 있었다.
1163년 아모리는 파티마 왕조가 연공을 바치지 않았다는 구실로 이집트를 기습공격했고 이집트는 나일 강의 댐을 허물어 물바다 작전으로 협상을 시작했다. 누르 앗 딘은 이 기회로 자신의 부관 시르쿠를 이집트를 공격하게 하는 한편 아모리가 없는 틈을 타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3세와 트리폴리의 레몽 3세를 포로로 잡았다. 아모리는 에데사 백국과 트리폴리 백국의 섭정을 맡고 1165년 보에몽의 몸값을 지불하고 빼내왔다. 한편 아모리는 비잔티움 제국에 사절을 보내어 자신의 신부감을 구하고 누르 앗 딘에 맞서 동맹을 맺으려고 하였다.
1167년 누르 앗 딘은 다시 한번 이집트를 침공했고 아모리는 칼리프 알아디드와 협정을 맺고 나일 강에서 시리아군에 맞서 싸웠는데 카이로로 퇴작했고 시르쿠는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다. 아모리는 알렉산드리아로 진격하여 공선전을 폈고 시르쿠는 협상을 통해 그 도시를 아모리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아모리는 알렉산드리아에 오래 머물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퇴작했다.
1167년 아모리는 비잔티움의 마리아 콤네나와 결혼했다. 이듬해 아모리와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는 동맹을 맺고 누르 앗 딘에 공동으로 맞서기로 했다. 아모리는 이집트가 누르 앗 딘과 내통한다는 의혹이 일자 마누엘은 이집트를 다시 한번 침공하여 많은 공물을 받았다. 한편 누르 앗 딘은 시르쿠를 이집트로 보내 1169년 이집트를 손에 넣었고 시르쿠의 조카인 살라흐 앗 딘이 이집트의 권력을 잡았다. 아모리는 살라흐 앗 딘의 등장을 유럽에 알렸으나 지원군은 없었다. 아모리는 비잔티움의 군의 도움으로 다미에타의 살라흐 앗 딘을 공격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1170년 살라딘은 예루살렘 왕국을 침공하였고 힘을 더 키워 이듬해에는 이집트의 술탄이 되었다. 아모리는 직접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여 살라딘의 위협을 알렸으나 역시 도움은 없었다. 이제 예루살렘 왕국은 남쪽으로 살라딘, 북쪽으로는 누레딘, 그리고 새로이 등장한 이슬람 분파인 아사신파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1174년 누르 앗 딘이 죽자 아모리는 즉각 바니아스를 공략했다. 그러나 그 원정길에서 아모리는 설사병에 걸렸고 고열로 시달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의사들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그해 7월 11일 죽었다. 아모리의 두 번째 부인인 마리아 콤네나는 이사벨을 낳았는데 나불루스를 유산으로 받았고 아녜스가 낳은 아들 보두앵이 뒤를 이었다.

항목 참조

  • 보두앵 5세 (1185 - 1186)
보두앵 4세의 누나 시빌라와 예루살렘 왕국의 귀족 기욤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로 외삼촌 보두앵 4세가 사망하자 뒤를 이었다. 즉위 당시 아직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강력한 귀족인 트리폴리의 레몽 3세의 섭정을 받았다. 보두앵 4세는 시빌라를 야파와 아스칼론의 귀족 기욤과 결혼시켰는데 기욤은 1177년 죽고 몇달 후 보두앵이 태어났다. 미망인이 된 시빌라는 예루살렘의 왕위를 노리는 야심적인 귀족들의 표적이 되었는데 결국 기 드 뤼지냥과 결혼했다. 원래 보두앵 4세는 처음에 기를 신임하여 많은 권한을 위임하였지만 기는 섭정을 수행하면서 이집트와 시리아를 오가는 이슬람 대상을 공격하여 살라흐 앗 딘을 자극하는 행동을 하였고 군사적 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분노한 보두앵은 1183년 기를 섭정에서 짤라 버리고 어린 조카 보두앵을 공동의 통치자로 세웠다.
보두앵 4세가 지병으로 1185년 봄 사망하자 어린 보두앵 5세는 단독으로 왕이 되었고 아직 7살에 불과한 어린 아이였기에 트리폴리의 레몽 3세가 섭정이 되고 에데사의 조슬랭 3세가 후견인이 되었다. 하지만 겨우 1년 만에 1186년 여름 아크레에서 사망했다. 보두앵의 사후 후계를 둘러싸고 왕국은 두 개의 파벌로 나뉘었고 결국 어머니 시빌라가 여왕으로 즉위했다.

각각 항목 참조

  • 이사벨 1세 (1192 - 1205)와 몬페라토의 코라도 1세(콘라드 1세) (1192)
아모리 1세의 딸이자 보두앵 4세와 시빌라의 이복동생으로 아모리 1세와 마리아 콤네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몬페라토의 콘라드 1세와 결혼했으며 1205년 사망 후 딸 마리아가 뒤를 이었다.
몬페라토의 코라도 1세(콘라드 1세)는 이사벨 1세의 남편으로 공동통치를 한지 얼마 안되어 아사신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 후 이사벨 1세는 샹파뉴의 앙리 2세 (1192 - 1197), 아모리 2세(1198 - 1205)와 공동통치했다.

  • 마리아 (1205 - 1212)와 장 1세 (1210 - 1212)
이사벨 1세와 콘라드 1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딸로 1212년 사망 후 딸 욜란데가 뒤를 이었다. 장 1세는 마리아의 남편으로 라틴 제국 섭정을 역임하기도 했다.

본명은 욜란데이며 마리아와 장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어머니 마리아는 이사벨을 낳자마자 열병으로 사망하면서 왕이 되었으며 갓난아기였기에 아버지 장이 섭정을 맡았다. 1225년 프리드리히 2세와 결혼했으며 1226년 딸을 낳았으나, 1227년 사망하고 1228년 아들 콘라드를 낳았으나 출산 직후 사망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첫 번째 아내 콘스탄체가 죽자 이사벨 2세와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국의 공동 왕이 되었다. 1228년 사망 후 외아들 콘라드가 뒤를 이었다.

  • 콘라드 4세 (1228 - 1254)
이사벨 2세와 프리드리히 2세의 외아들로 1254년 사망하고 외아들 콘라딘이 뒤를 이었다.

  • 콘라딘 (1254 - 1268)
콘라드 4세와 엘리자베스의 외아들로 1268년 탈리아코초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나폴리에서 참수당하면서 아모리 1세 사망 후 모계로 이어진 예루살렘 왕국의 혈통은 단절되고 동시에 신성 로마 제국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혈통도 단절되었다. 이에 키프로스 왕이자 콘라딘의 섭정이었던 위그 3세가 뒤를 이었다.

  • 위그 (1268 - 1284)
키프로스 왕으로 안티오키아의 공작 보에몽 4세의 손자이다. 1284년 사망하여 장남 장이 뒤를 이었다.

  • 장 2세 (1284 - 1285)
위그와 이벨린의 이사벨의 장남으로 1년 만에 사망하여 독살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사망 후 후계자가 없어 동생 앙리가 뒤를 이었다.

  • 앙리 2세 (1285 - 1291)
위그의 차남이자 장 2세의 친동생이다. 1291년 아크레가 함락되자 귀족들과 함께 키프로스로 망명했으며 1324년 사망했다.

1291년 아크레 함락; 왕국 멸망.

3. 관련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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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던 고드프루아는 성지 예루살렘의 왕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내새워 왕이 아닌 "성묘의 수호자"라는 호칭에 만족하였다.
  • [2] 말녀 이오베타는 베다니의 성 나자로 수녀원장이 되어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 [3] 보두앵 3세의 이모이자 멜리장드의 동생 알리스의 딸 콘스탄스와 결혼하여 안티오키아 공작이 되었다. 콘스탄스는 보두앵 3세의 사촌이니 레몽은 보두앵 3세의 사촌 매부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