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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몽전쟁

last modified: 2019-07-10 23:02:23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배경
3. 제1차 침입
4. 제2차 침입
5. 제3차 침입
6. 휴식기
7. 제4차 침입
8. 제5차 침입
9. 제6차 침입
10. 제7차, 제8차, 제9차 침입
10.1. 제7차 침입 - 몽골의 상륙작전
10.2. 제8차 침입
10.3. 제9차 침입
11. 후일담
12. 결과
13. 평가
14. 관련 항목

1. 개요

麗蒙戰爭

1231년(고종 19)부터 1259년(고종 46)에 이르기까지 무려 9차례에 걸친 몽골고려 침입으로 촉발된 전쟁으로 '대몽항쟁', '항몽전쟁' 등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사실상 고려 국왕이 몽골 황제에 칭신하고 몽골이 요구해올때마다 왕족과 공물을 바쳤으므로 몽골 간섭기로 본다.

국가 지도부가 국민들을 고기방패로 삼아 30여년간 도망다니다 항복한 사건이였다.(여몽전쟁/평가 항목 참조.)

2. 배경

칭기즈 칸몽골 제국이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며 유목민족의 기상을 드높였다. 서역을 정리하자 몽골제국은 중원으로 눈을 돌렸고 1차 목표는 그동안 자신들을 괴롭혔던 금나라였다. 몽골은 남송과 연합하여 금을 남북으로 공격하니 금은 망했어요. 이 때 거란 잔당의 일부는 대요국(大遼國)을 세우고 여진족과 화합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실패, 다시 몽골에 쫓기게 되어 1216년(고종 4), 갈 곳 없어진 거란의 잔당들은 상대적으로 만만한 고려를 침략하였다.

이에 몽골은 동진국(東眞國)과 동맹을 맺고 거란의 잔당들을 소탕하기 위해 고려에 들어왔다. 고려도 거란 잔당 소탕을 위해 군사를 동원, 몽골-동진 연합군과 협력하여 강동성에서 거란의 잔당들을 소탕하였다. 이것이 동성 전투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었으니….

몽골은 이를 계기로 크고 아름다운 은혜를 고려에 베푼 듯이 행동하였고, 해마다 고려에 과중한 세공을 요구, 몽골 사신들은 고려에 들어와 깽판을 부렸다. 이러니 고려에선 당연히 반몽정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흘러 1225년(고종 12) 음력 1월 몽골 사신 저구유(저고여, 箸告與)가 귀국하던 도중 자객에게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몽골에서는 고려의 소행이라 주장, 고려에선 국경을 넘어서 금나라 사람에게 피살된 것이라 주장[1]하여 양국 간의 관계는 점차 험악해져 결국 국교단절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몽골은 고려에 대한 침략을 계획하였다.[2]

3. 제1차 침입

일시: 1231년 음력 8월 ~ 1232년 음력 3월

오고타이 칸은 금나라를 치기위해 배후의 위협을 미치 차단을 하기를 원했고 이에 권황제 살리타이(撒禮塔)에게 군사 3만을 주어 고려를 침략케 하였다.[3]

몽골군은 음력 8월에 압록강을 넘어 의주·철주 등을 단숨에 함락시키고 남하, 고려군은 이에 맞서 자주·동선역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안북성 전투에서 희대의 패착을 거두며 전황이 급속도로 불리해졌다. 귀주에서 엄청난 혈전을 벌여가며 1만명을 북쪽에 묶어두었지만 이는 전황에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결국 몽골군이 수도 개경을 포위하자 고종은 할 수 없이 살리타이가 보낸 권항사(勸降使)를 만나고 왕족인 회안군 정을 적진에 보내어(사실상 인질) 강화를 맺게 하였고 제1차 침입은 여기서 종료된다.

4. 제2차 침입

일시: 1232년 음력 8월 ~ 1232년 음력 12월

불리한 전황에서 고려는 잠시라도 피하고자 몽골과 강화를 했지만 이는 고려의 작전상 후퇴였고 당시 집권자인 무신정권최우는 앞으로 있을 몽골의 침략에 대비해 재추회의(宰樞會議)를 열어 강화 천도를 결정하였고[4] 1232년(고종 19) 음력 6월에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기고 몽골과의 장기 항전태세에 돌입, 이에 몽골은 살리타이를 다시 내세워 침입해 결국 서경의 홍복원[5]을 앞세워 개경을 함락시킨 후 남경(南京, 서울)을 공격, 몽골군은 한강을 넘어 계속 남하하였다. 초원에서 자란 유목민족의 특성상 해전에 약한 몽골[6]은 강화도를 치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권고하였으나 고려의 반응은 . 이에 열받은 몽골군은 다시 남하하여 처인부곡을 공격하다가 김윤후라는 스님[7][8]에 의해 수장 살리타이가 화살 맞아 죽는 바람에 퇴각하였다.

한편 몽골군이 철수하자 최우는 계획대로 때를 틈타 북계병마사 민희(閔曦)에게 가병 3천을 주어 앞서 배반한 천하의 개쌍놈 홍복원을 토벌하고, 홍복원의 가족을 사로잡았으며 북부 여러 주현(州縣)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최우 역시 천하의 개쌍놈 역적 집안 출신인지라 몽골의 2차 침입이 끝나고 최우가 북계병마사 민희를 보내 북계의 주현(州縣)을 회복한 것은 이미 전국을 약탈할대로 약탈한 몽고군이 되돌아가고 난 뒤의 일이이었다. 또한 1차 침입때부터 그곳에 주둔해있던 72명의 다루가치들도 모두 되돌아가고 난 후였다. 적군이 쳐들어왔을때 백성들을 지켜야지 이미 국토가 짓밟힌후 군대를 파견하는게 무슨 소용이 있나? 게다가 얼마후 다시 정규군을 강화도로 거두어 들인다. 이것은 최씨 정권이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민란을 감시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인 쇼였다. 동계는 1차 침입때부터 몽고군이 쳐들어올때마다 매번 빼앗기고 유린당하게 되는바, 저때 빨리 강화도에서 튀어나와서 제대로된 방어선을 구축하고 관군과 의병들을 조직해 침략에 대응했더라면, 그게 아니라면 몽골과 진지한 협상이라도 벌였더라면 뒤이은 몽골의 침략으로 최소한 전 국토가 유린당하는 화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홍복원의 가족들은 되려 최우로부터 관직까지 하사받으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리게 된다. 최우는 홍복원의 딸을 위해 직접 주례를 서기도 하며 아예 홍복원에게 벼슬을 제안하기까지 했는데, 이는 당시 몽골의 침략을 두려워한 최씨 정권이 친몽 세력들을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포섭하는 정책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이후 집권자들도 최우의 예를 따라 친원파 우대 정책을 연달아 펼치게 된다.)

이로 보아 결과적으로 적장을 죽이고 몽골군을 패퇴시킨 승리라 할 수 있으나 글쎄다….

이 2차 침입때 많은 문화재가 불타 사라졌고, 부인사에 소장되어있던 《고려대장경》 초조판(初彫板)이 몽골군에 의해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이때 좀 어이없는 사건도 하나 있었다. 충주성에서 관리들이 도주하자 양민과 노비들이 남아서 성을 지켰는데, 문제는 몽골군이 철수한 후 돌아온 관리들이 성안의 재물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백성들을 처벌하는 병크를 저지른 것. 때문에 일시적으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조정과 정예군이 대부분 강화도로 들어가 버린 탓에 2차 침입 이후부터 고려군은 몽골군에개 야전을 걸지 못하고 수성전만을 펼치게 된다.

  • 전투
    • 광주성 전투(1232년 11월 중순 ~ 12월/지휘관 : 이세화) ㅡ 이규보, 『동국이상국집』, 「후집」12, 이세화 묘지명, "이 해(1232년, 고종 19년) 11월에 몽고의 대군이 와서 수십 겹으로 포위하고 몇 달 동안을 온갖 계교로 공격하였는데, 이군(李君, 이세화)은 주야로 수비를 튼튼히 하고 수시로 응변하는 일을 그들이 전혀 예측 못할 정도로 하였으며, 혹은 생포하고 죽인 수효가 매우 많으므로, 오랑캐는 불가한 일임을 알고 드디어 포위를 풀고 갔다."

    • 처인성 전투(1232년 12월 16일)

5. 제3차 침입

일시: 1235년 윤달 7월 ~ 1239년 4월

몽골군에 의해 쑥대밭이 된 고려 강역.

금나라가 1234년에 멸망하자, 몽골은 1235년(고종 22) 남송을 공격하는 길에 누이좋고 매부좋고 탕우타이(당올대)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공격케 하였다. 몽골은 여러차례 큰 타격을 받으면서도 4년간에 걸쳐 고려 영토 전역을 유린했다. 경주(동경)에까지 당도해 그 유명한 황룡사를 불질러버리는 등 고려 전역을 불바다 및 피바다로 만들었다.

고려 조정은 강화도에 웅거하여 저항하였고 부처의 힘을 빌어 난국을 타개하고자 '장경'의 재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육지에선 몽골의 살육이 극에 달하자 결국 1238년 겨울, 고려 조정에서 몽골에게 강화를 제의했고, 몽골은 고려 고종의 입조를 조건으로 1239년 봄에 철수하였다.

철수 후 고려는 약조를 이행하지 않다가 몽골의 협박 독촉으로 왕의 신병을 이유로 입조가 불가능함을 알렸다. 그 대신 왕족인 신안공 왕전(新安公 王佺)을 왕의 아우라 속여서 칭하여 몽골에 보냈다. 그리고 2년 후인 1241년(고종 28)에 신안공 왕전의 사촌 형인 영녕공 왕준(永寧公 王綧)을 왕자로 가장시켜 또 한번의 사기를 쳐서 몽골에 볼모로 보냈다

고려의 정부군이 몽골군을 기습해 승리를 거둔 개주 전투도 이때 벌어졌다. 강화도에 조정이 틀어박힌 이후, 정부군이 직접 나서서 몽골군을 격퇴한 얼마 안되는 사례. 그러나 개주전투(1236) 당시 고려군이 몽골군에 입힌 피해와 전술적 타격은 기록에 나와 있지도 않고 단순히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무기를 노획했다는 기록만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소규모 군사 작전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무신 정권이 강화도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반대파의 지지를 얻기 위해 종종 쓰던 방식이었다. 같은해인 1236년 여름, 개주를 무리 없이 지난 몽골 북로군이 자주를 함락시킨 것을 보면 개주에서의 작전이 몽골 주력에 전혀 타격을 입히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개주에서 몽고군을 자극한 것이 화근이 되는바 그해 8월 13일 성이 함락당한 자주의 관민들은 몽골군의 학살과 방화를 피해갈 수 없었다. 자주를 함락시킨 몽병들은 사람들을 다 죽이고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또한 이후 4년 동안 전 국토가 몽병에 의해 처절하게 유린당한것을 보면 당시 고려 정규군이 개주에서 몽골군을 성공적으로 저지하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래서 볼 수 있듯 <고려사>는 고작 수 십명의 적병을 물리치거나, 한 두 명의 적병을 사로잡는 것도 전공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전투
    • 제2차 자모산성 전투(1236년 7월 18일 ~ 1236년 8월 13일/지휘관 : 최경후, 김지저, 김명회)

    • 개주 전투(1236년 7월/지휘관 : 희경, 명준) ㅡ 가을 7월. 몽고군이 개주(价州)에 이르렀다. 경별초 교위(京別抄校尉) 희경(希景)과 개주중랑장(价州中郞將) 명준(明俊) 등이 군사를 매복하였다가 협공하여, 살상(殺傷)한 것이 매우 많았으며, 안장 갖춘 말, 활과 화살, 의복 등의 물건을 취하였다.

    • 정주 전투(1236년 7월/지휘관 : 광대) ㅡ 장주낭장(長州郞將) 광대(光大) 등이 정주(定州)에 이르러 몽고군 2인을 사로잡았다.

    • 온주군 전투(1236년 9월/지휘관 : 현려) ㅡ 9월 정사일에 몽고군이 온주군(溫州郡)을 에워싸매 아전 현려(玄呂) 등이 성문을 열고 나가 싸워서 적을 크게 부수고 적장 2명의 목을 베었으며, 우리측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2백여 명이요, 노획한 병기가 매우 많았다.

    • 죽주 전투(1236년 9월/지휘관 : 송문주) ㅡ 몽고군이 죽주(竹州)에 이르러 항복을 권유하였다. 성안의 군사가 출격하여 패주시켰다. 다시 와서 포(砲)로써 성을 공격하여, 4면의 성문이 포에 맞아 부서졌다. 성안에서도 포로써 맞받아치니 몽고군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얼마 뒤 또 사람 기름, 관솔불, 쑥풀 등을 갖추어 불을 놓아 공격하였다. 성안의 군졸이 일시에 문을 열고 나가 싸우니 죽은 몽고군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몽고군이 온갖 방법으로 무릇 15일 동안 공격하였지만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자, 공격용 도구들을 불사르고 갔다. 방호별감(防護別監) 송문주(宋文冑)가 일찍이 구주(龜州)에 있을 때 몽고군이 성을 공격하는 전술을 숙지하였으므로 저들의 계획을 모두 먼저 알아차렸다. 번번이 여러 사람에게 알려 말하기를, “오늘은 적이 반드시 어떤 기계를 쓸 것이니, 우리는 마땅히 아무 방법으로 대응해야 한다.”라고 하고, 즉시 대비하게 하였다. 적이 오면 과연 그 말과 같았으므로 성안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신명(神明)하다고 하였다. 그 전공으로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을 제수하였다.

    • 고란사 전투(1236년 10월/지휘관 : 전공렬) ㅡ 별초로서 의업(醫業) 과거에 응시하였던 거인(擧人) 전공렬이 고란사 산길에 군사를 숨겼다가 몽고 측 기병 20명을 마주쳐서 2명을 죽였으며 병기와 말 20필을 빼앗았다.

    • 효가동 전투(1236년 12월/지휘관 : 박인걸) ㅡ 기유 야별초지유(夜別抄指諭) 이임수(李林壽)와 박인걸(朴仁傑)이 각각 100여 인을 이끌고 나뉘어서 몽고군 진영으로 향하였다. 무자일에 야별초 박인걸 등이 공주 효가동에서 몽고군과 싸웠는데 전사자가 16명이었다.

6. 휴식기


7. 제4차 침입

일시: 1247년 윤달 7월 ~ 1248년 3월

오고타이 칸(원 태종)의 대를 이어 구유크 칸(원 정종)이 즉위하자 몽골은 고려의 입조와 강화도에서 나올 것을 조건으로 아모간(阿母侃)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치게 하였다. 그러나 구유크 칸이 곧 죽고 후계자 문제로 분규가 생겨 고려의 선철군 후입조를 받아들이고 철군하였다. 1249년 2월에야 구유크의 사망 소식이 고려에 전해졌고, 최우는 어차피 약속을 이행할 생각이 없었기에 뻣대다가 그 해 11월 사망하고 만다. 뒤를 이어 최항이 권력자가 된다.

8. 제5차 침입

일시 : 1253년 7월 ~ 1254년 1월

후계 분쟁이 끝나고 몽케 칸(헌종)이 즉위하게 되자 1253년(고종 40년) 예케(한자: 야굴也窟 또는 也古)를 시켜 고려에 대거 침입하였다.

이에 고려는 전쟁을 각오하고 강도를 굳게 지키니 몽골은 이를 함락하지 못하고 9월부터 10월 초까지 동주(東州 : 철원)·춘주(春州 : 춘천)·양근(楊根 : 양주)·양주(襄州 : 양양) 등을 공격한 다음 충주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충주성엔 21년전의 그 김윤후가 있었다. 충주성은 결코 함락되지 않았으며 한달 이상 시간을 끌었다. 이때 (11월) 돌연 예케는 병을 이유로 귀국하였는데, 도중 개경에서 고려의 철수 요구를 받았다.

그는 어느 정도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여 고종은 강도를 나와 승천부(昇天府)에서 예케의 사신과 회견하였으며[9], 한편 충주성 전투도 70여 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몽골이 불리하게 되어 드디어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북부 지방에 있던 몽골의 군대는 철수를 주저하고 있다가 고려 왕자 안경공 창(安慶公淐, 혹은 안경공 강)을 몽골에 보내어 항복을 표시함으로써 완전히 철병하였다. 안경공 창은 1254년 8월에 귀국했다.

  • 전투
    • 충주성 전투(1253년 10월 중순 ~ 12월 말 /지휘관 : 김윤후) : 충주(忠州)에서 몽고병이 포위를 풀었다고 보고하였다. 이때, 포위를 당한 것이 무릇 70여 일이 되었으며, 병량은 거의 바닥났다. 방호별감(防護別監) 낭장(郞將) 김윤후(金允侯)가 사중(士衆)을 독려하며 말하기를, “만약 힘을 다한다면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관작(官爵)을 제수하겠다.”라고 하였다. 관노의 부적(簿籍)을 불태워 믿음을 보이고, 또 노획한 소와 말을 나눠주었다. 백성들이 모두 죽음을 무릅쓰니, 몽고군의 기세가 차츰 꺾여 마침내 다시 남쪽으로 가지 못하였다.

9. 제6차 침입

일시 : 1254년 7월 ~ 1254년 12월

그러나 몽케 칸(원 헌종)은 왕자의 입조만으로 만족치 않았고, 최항을 대동한 국왕의 출륙과 입조를 요구하면서 1254년(고종 41년) 음력 7월 자랄타이(한자: 차라대車羅大 또는 札剋兒帶)를 정동원수(征東元帥)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침입케 하였다.

몽케 칸은 안경공 창을 만나서 그가 고려 왕자가 아니라 친척임을 알았다.[10] 게다가 해군을 동원하기 시작했다(1254년 2월, 하동군의 갈도 약탈). 이런 상황에서 고려가 원의 앞잡이 이현(추밀원 부사)을 바다에 던져 죽여버리니 휴전은 깨질 수밖에 없었다.

자랄타이는 전국 각처를 휩쓸고 계속 남하하여 충주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다시 우회해 상주산성(尙州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계속 남하하여 지리산까지 내려가 진주를 앞에 두었다. 이때 자랄타이는 돌연 몽케 칸의 명으로 군을 개경으로 돌이켰는데, 이때 이 짧은 5개월 사이 고려가 받은 피해는 어느 때보다도 심하여 《고려사》에는 포로가 20만 6천 8백여 명, 살상자는 부지기수라고 하였다.

  • 전투
    • 2차 충주성 전투(1254년 9월 ~ 10월 /지휘관 : 김윤후) ㅡ 차라대(車羅大, 쟈릴타이)가 충주산성(忠州山城)을 공격하였는데, 비바람이 갑자기 일어나자 성중의 사람이 정예를 뽑아 용맹하게 공격하였다. 차라대가 포위를 풀고 드디어 남쪽으로 내려갔다.

    • 상주산성 전투(1254년 10월 /홍지대사가 몽골군 장수를 활로 쏘아죽임 처인성 어게인) ㅡ 차라대(車羅大, 쟈릴타이)가 상주산성(尙州山城)을 공격하자 황령사(黃嶺寺) 중 홍지(洪之)가 활을 쏘아 네 번째로 높은 관인(官人)을 사살하였다. 〈몽고군〉 사졸(士卒) 가운데 과반이 죽으니 마침내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10. 제7차, 제8차, 제9차 침입

일시 : 1255년 9월 ~ 1259년 3월

몽골군의 장기주둔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다. 사실상 6차 침입 이후의 연속전쟁에 가까웠다.

10.1. 제7차 침입 - 몽골의 상륙작전

일시 : 1255년 9월 ~ 1256년 6월
이듬해 몽골은 또다시 자랄타이를 대장으로 인질로 갔던 영녕공과 홍복원을 대동하여 대거 침입하여, 전라도 전역을 쑥밭으로 만들고 갑곶 대안(甲串對岸)에 집결하여 강도(강화도)에 돌입할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마침 전에 몽골에 갔던 김수강(金守剛)이 몽케 칸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하여 몽골은 서경으로 일시 철수하였다. 그러나 몽골군의 산발적인 습격은 끊이지 않았고, 전쟁은 계속 되었다.

  • 전투
    • 대원령 전투(1255년 10월) ㅡ 겨울 10월 을축 몽고군이 대원령(大院嶺)을 넘자 충주(忠州)에서 정예병을 출동시켜 1,000여 인을 쳐죽였다. 몽고군이 충주성을 지나쳐 근처의 대원령(계립령, 하늘재)를 지나다가 다인철소 천민들의 습격으로 후퇴한 전투. 이로 인해 다인철소의 천민들은 모두 익안현으로 승격해 일반 백성이 되었다.

    • 조도 해전(1255년 10월) ㅡ 몽골이 본격적인 해군 운용을 시작한 전투. 그러나 지역 해적에게 패했다.

    • 아주 해전(1256년 3월 /지휘관 : 충주도 순문사 한취) - 고려의 첫 해전 패전. 한취와 고려 해군 9척이 전멸.

    • 3차 충주성 전투 → 대림산성 전투 → 덕주산성 전투(1256년 중순) ㅡ 위기에 몰린 고려 민간인들이 월악산까지 숨어들었고 결국 기상악화로 몽골군 별동대 후퇴

    • 온수현 전투(1256년 6월 /지휘관 : 이천) ㅡ 해군 200명의 상륙작전. 몽골군 수십명을 죽이고 주민들을 구출함.

    • 압해도 해전(1256년 6월) ㅡ 자랄타이의 군대를 압해도(현 신안군)의 주민(해적)들이 포차를 실은 전함으로 철수시킴.[11]

    • 예도 전투(1256년 10월) ㅡ 몽골군의 애도(현 고흥군) 상륙에 별초군이 도륙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때 상륙한 몽골군은 고작 60명이었다. 민방위 별초가 예도(艾島)에서 무리를 이탈해온 고작 60명(!)의 몽골 병사들을 상대로 무용을 과시하고 있을때 몽골의 주력 병력은 이미 남해안과 서해안을 약탈할대로 약탈하고 돌아간뒤였다.

10.2. 제8차 침입

일시 : 1257년 5월 ~ 1257년 10월

1257년(고종 44년)에는 해마다 몽골에 보내던 세공을 정지하게 되자 몽골은 또 자랄타이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침략케 하였다. 그사이 최항이 죽고 최의가 집권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1257년 5월이었다.

그간 정부는 재차 김수강을 철병 교섭의 사신으로 몽골에 파견해서, 몽케 칸을 알현케 하여 그 허락을 얻으니 출륙과 친조를 조건으로 했다. 1257년 10월에 몽골군은 선철군 후입조의 설득에 따라 철수하게 되었다.[12]

하지만 최의는 그런 것 따위는 생각도 안하고 전횡을 부렸다. 결국 다음해 최의는 김준에게 살해당한다.

10.3. 제9차 침입

일시 : 1258년 4월 ~ 1259년 3월

몽골은 일단 군대를 북으로 후퇴시키고 고려의 태도와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약속했던 고려 태자가 오지 않자, 김준이 정권을 잡은 지 한 달만에 몽골군은 또다시 자랄타이를 앞세워 제9차 침입을 개시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김준도 몽골군에 대한 최씨 정권의 방법을 그대로 계승했다. 1259년 3월, 고려는 여러 차례 몽골군과의 전투 끝에 몽골과 강화를 맺게 되어 몽골과의 전쟁이 끝나게 된다.

11. 후일담

하지만 출륙(개경 환도)는 계속 지연되었다. 1259년 음력 6월 고종이 죽었고, 쿠빌라이 칸이 되는 쿠빌라이를 만나고 온 태자가 귀국하여 왕위에 올라 원종(元宗)이 되었는데, 몽골에 태자를 다시 인질로 보내어 성의를 표시하였으나 무신 집권자 김준의 반대로 강화도에서 나오지는 않았다.

심지어 김준을 살해하고 새 집권자가 된 임연은 1269년 6월 강화를 반대하여 원종을 폐위하고 안경공 창을 임시 즉위시키니 이것이 영종(후의 시호)이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몽골의 압력으로 11월 자리에서 물러나고, 임연 역시 몽골의 재침공을 두려워하여 때문에 죽는다. 임유무 역시 출륙을 반대하지만 그가 처형되면서 1270년, 무신정권은 끝이 나고 고려는 38년만에 환도 하게 된다. 이후 카다안의 침입 같은 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쟁은 종결이 나게 되었다.

12. 결과

전쟁고려 영토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고려는 엄청난 인명손실과 전국토가 유린당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몽골 침공 직전 350~400만에 달하던 고려 인구는 몽골의 9차 침략이 종결되는 1259년 기준 250~300만을 찍으며 감소하게 된다.[13] 1231년 몽골의 1차 침입이 시작된 이래로 여몽전쟁 30여년 동안 전체 고려 인구의 25~30%에 해당하는 100만명이 학살, 포로, 유민, 아사 등으로 손실된 것이다. 이 수치는 단순 수치로만 비교해도 러시아(키예프 공국)가(이) 몽골에 의해 입은 피해의 2배에 달하며, 인구비로 따지면 무려 4배에 달하는 수치다. 여몽전쟁 동안 고려가 겪은 인구 감소비는 아르메니아 학살, 홀로코스트, 벵골 대기근, 대약진 운동으로 인한 인구 감소를 훨씬 상회하는 기록이다. 한반도 역사상 이만한 인구 감소는 훗날 조선을 휩쓸게 되는 을병 대기근[14]에 의해 경신될때까지 단연 돋보적인 기록이 된다.

문화재 파괴도 엄청나서 현재 몽고침입 이전의 목조건물은 아예 없는 상태.[15] 임진왜란 시기에 백성들의 고초도 상당했겠지만, 그건 고작 7년이었고 이건 무려 수십년이다. 당장 제3차 침입 이후에는 고려 전역이 쑥대밭이 되는 통에 침략군인 몽골군도 현지징발이 매우 힘들어지는 사태까지 놓이는 일이 흔해서 본국에서 보급을 기다리는 사태까지 벌어졌기 때문에 전쟁을 하면 할수록 손해만 나고, 덤으로 완강히 버티는 산성 등을 함락할 때 상당한 인명피해까지 났으므로 몽골 입장에서도 나는 것 없이 힘만 빠지는 전쟁의 수렁이었다. 애초에 몽고군이 고려에 들어온 목적이 남송을 원정하면서 필요한 물자들을 약탈해가며 보충하기 위함이었는데, 후기로 갈수록 이미 황폐화된 나라에 뺏을 만한 것도 없고, 백성들이 끈질기게 항전하니 몽골로서도 손해보는 전쟁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항복하러 간 고려사절에게 쿠빌라이 칸당태종도 못한 것을 자신이 해냈다고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비판을 하자면, 몽골 침략기 동안 몽고군을 상대로 항전한 주체는 대다수의 고려 민중들이었다는 점이다. 또한 당시 쿠빌라이는 강력한 제위경쟁자이자 카라코룸을 장악하고 있던 동생인 아릭 부케의 도전에 맞서기에는 명분상 취약한 상태[16]였는데, 여기에 고려 공략에 동원되던 만주지역의 동방 3왕가로 대표되는 초원 이남지역 몽골 귀족들이 쿠빌라이에게 동조하면서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대칸으로 즉위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력 측면에서도 밀리지 않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수도인 카라코룸으로 공급되던 물자운송로를 끊어서 결국 아릭 부케를 항복시킬 수 있었다.

나중에 동방왕가가 반란(나얀의 난)을 일으키자 고려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국경까지 나아갔으며, 그 잔당들이 고려로 침범하여 고려가 2차로 전장이 된다. 동방왕가는 반란 이후로 세력이 꺾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회복'할 정도로 강력했다. 원나라 판도 안의 '동방왕가'들은 고려가 복속한 후로도 황해도 서흥-평산에까지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막강했다. 심지어는 원나라 조정을 뒤로제끼고 '공물'을 뜯어가기까지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13. 평가

여몽전쟁/평가 항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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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저구유 살해 사건 내막에 나라가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2] 물론 저구유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몽골이라면 치를 떨던 고려의 민중들은 좋아했다. 하지만 정부에선….
  • [3] 참고로 이때 몽고의 주력군 10만은 금나라를 향해 진출하고 있었다.
  • [4] 이 때 최우는 천도에 반대하는 반대파들을 죽여버렸다. 대표적으로 김세충이다. 야별초(삼별초)지유(夜別抄指諭) 김세충은 대표적인 천도 반대파였는데 성을 지킬 수 있다면서도 성을 지킬 계책에 대해 말하지 못해 최우에게 처형된다.
  • [5] '고려의 배반자'로 성문을 열어 몽골군에 협조한 천하의 개쌍놈이다. 그의 아들 홍다구도 몽골에서 출세하여 고려로 파견와서 김방경을 고문하고 내정에 간섭하는 등 부원배짓을 일삼았다. 부자가 쌍으로 개쌍놈들.
  • [6] 내륙 중의 내륙이자 장난이 아닌 추위를 자랑하는 몽골은 전통적으로 물에 대한 금기가 대단했다. 빨래 안 하는 것은 기본이고(워낙 기후가 건조해서 몸의 분비물이 적다고 한다), 고인 물에 오줌을 누면 사형.(...) 현대인 다 죽겠다 이놈들아?! 1999년 발간된 '신현덕의 몽골풍속기' 참조.
  • [7] 이설(異說)이 있다.
  • [8] 이후 처인부곡은 처인현으로 승격되었고 김윤후는 장수가 되었다.
  • [9] 이때 강화 성벽을 헐라는 몽골의 요구에 "송나라 해적들이 강화도를 털어요"ㅜㅜ 라며 나중에 하겠다며 박박 우겼다. 점령지에 달로화적을 두고 1만 군사를 주둔시키는 것도 반대했다.
  • [10] 물론 안경공 창은 자기가 친자가 아닌 줄은 몰랐다고 박박 우겼으며, 그와 함께 온 참지정사 최린도 왕의 사랑하는 자식(애자)인 건 친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콤비로 우겼다(...).
  • [11] 하지만 이에 감탄한 최항들이 청주 주민들을 도서로 옮기려고 했고, 잘 안되니까 강제로 청주를 불태워 버렸다.(...)
  • [12] 고종이 연로하여 목표는 고려 태자의 입조로 낮춰졌다.
  • [13] https://m.blog.naver.com/53traian/221289724648
  • [14] 이때 조선 인구의 1/3이 감소하게 된다.
  • [15] 물론 몽골군이 다 태운건 아니고 이후에 소실된 건축물들도 꽤 있다. 하지만 황룡사등 지금 볼 수 없는 건축물의 상당수를 몽골군이 태운것은 사실이다.
  • [16] 몽케의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몽케조차 혼낼 정도로 그동안 보여준 유목민의 전통에서 동떨어진 행태로 인해 워낙 명분에서 밀려서 몽골 귀족들의 지지가 없다보니 자파만으로는 대칸 선출회의인 쿠릴타이조차 열 형편이 아니었다.
  • [17] 1168~1232. 이규보와 쌍벽을 이룬 문인이자 과거 급제 동기지만 세자 시절부터 고종의 스승이었던 근왕파였다. 이를 바탕으로 재상(첨지정사 參知政事)에 올랐다. 최우의 강화 천도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했으나 석연찮게 2개월 이후 사망한다. 반면 천도에 적극 찬성한 이규보는 그의 뒤를 이어 재상직에 오른다.
  • [18] 東眞으로 13세기에 있던 국가였다
  • [19] 정확히는 잔당
  • [20] 여몽전쟁의 단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