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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last modified: 2014-10-19 07:28:01 Contributors


Elisabeth von Wittelsbach. 오스트리아의 황후이자 헝가리의 왕비.
1837.12.24 ~ 1898.09.10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문장

Contents

1. 소개

1. 소개

바이에른 공작 막스와 바이에른 공주 루도비카의 차녀. 애칭은 시씨(Sissi).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결혼하여 오스트리아의 황후가 되었다가, 후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이중국가 체제를 이루게 되자 오스트리아의 황후인 동시에 헝가리의 왕비가 된다. 그녀가 정치에 개입한 것은 단 한번이었는데, 1867년 헝가리가 독립 내각을 구성하는 것을 강력하게 지지한 것이다. 이는 일전에 헝가리 방문했을 때 헝가리인들에게 큰 감명을 받아 헝가리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이다.

원래 프란츠 요제프의 아내가 될 이는 그녀의 언니 헬레네(애칭은 네네(Nene).)였다. 그러나 정작 네네와 맞선을 보던 날 프란츠 요제프는 어머니와 언니를 따라온 어린 시씨를 보고 사랑에 빠져 시씨에게 구혼한다. 그리고 결국 시씨는 이 청혼을 받아들여 2년 뒤 황후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바이에른에서 자유롭게 생활해온 시씨는 오스트리아의 엄격한 황실 예법[1]에 잘 적응하지 못해 방황했다. 여기엔 시어머니이자 이모인 조피 대공비와의 갈등의 영향도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그녀는 17세에 결혼했다.) 조피에게 반발하지 못했지만, 자기주장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홀로 여행을 다니거나 정신병원을 시찰하기도 하는 등 이런 저런 다양한 활동들을 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황실의 공식적인 행사에는 참여하려고 하질 않아 황후답지 못하다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아내에게 약했던 프란츠 요제프는 아내의 행동을 막지 못했다.[2] 아이러니한 것은 시어머니 조피 대공비에게 미움 받던 그녀 역시 루돌프 황태자의 아내이자 자신의 며느리인 벨기에의 공주 스테파니를 미워했다는 것이다. 이는 조피 대공비의 사랑을 받으며 시씨와 갈등을 빚던 동서 샤를로테(벨기에의 공주이자 막시밀리안 1세의 아내)가 스테파니의 고모였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당시에 가장 아름다운 왕족 여성으로도 이름이 높았던[3] 시씨는 자신의 외모를 가꾸는 일에도 열의를 보였으며,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무리한 다이어트를 감행하기도 했다. 거의 거식증 환자 수준으로 적게 먹고 운동에 열중해 평생 키 173cm, 몸무게 46~49kg를 유지했다(…) 하루에 오렌지 6개만 먹는 날도 있었다고.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머리카락 무게를 빼면 실제 무게는 그것보다도 가벼웠다. 루트비히 2세의 친척[4]이었고 윗대에서 오랫동안 근친혼이 반복된 탓인지 그녀의 거식증이나 아들 루돌프의 자살이유를 유전적인 요인에서 찾는 설도 있다.

이 때문에 문제가 있었는지, 나이를 먹으며 늙기 시작하자 시씨는 모든 개방된 장소에서 자기 얼굴을 감추기 시작한다. 현재 남아있던 사진과 그림 대부분이 시씨의 가장 아름다웠던 리즈시절 시절의 것인 것도 모두 그러한 까닭이다. 그녀가 나이를 먹고 찍힌 사진은 거의 다 흐릿하거나 얼굴이 제대로 나오지 않은 것들이다.

시씨는 프란츠 요제프와의 사이에서 네 아이 - 조피,[5] 기젤라, 루돌프, 마리 발레리 - 를 낳았다. 첫째 조피는 여행 중 어린 나이로 죽었으며, 유일한 아들이었던 루돌프는 성인으로 성장해 황태자위에까지 올랐지만 세간에 '마이어링 사건'으로 알려진 밀월여행 끝의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기젤라와 마리 발레리만이 시씨의 사후까지도 살았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양육한 막내 마리 발레리에겐 다소 지나칠 정도로 애정을 쏟았지만 조피가 양육한 기젤라와 루돌프에게는 철저히 무관심했다. 이러한 편애는 아들 루돌프가 자살하게 된 원인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으며, 딸 기젤라를 자신을 위해 멋대로 정략결혼의 도구로 사용하기까지 했다.[6]

루돌프는 남매 가운데 시씨와 가장 닮은 아이였으나 아들의 결혼식에도 참여하지 않을 정도로 무관심한 어머니 탓에 두 사람 모두 살아서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러나 1889년 루돌프가 자살하자 시씨는 실의에 빠져서 이전보다 더욱 더 도피성 성격이 짙은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경호원을 대동하지도 않았고, 가명을 사용했으며 소수의 시녀들만을 데리고 다니는 여행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들이 결국 시씨의 죽음을 부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898년 9월 시씨는 비밀리에 스위스를 여행 중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신원은 노출당했고, 이 사실을 안 스위스의 한 신문에서는 오스트리아 황후의 여행 이야기를 실었다. 이 기사를 읽은 무정부주의자 루이지 루케니는 엘리자베트에게 접근했고 그녀를 암살한다.[7] 루케니는 가는 줄(needle)[8]로 시씨의 가슴을 찌르고 도망쳤는데, 시씨는 찔리고 나서도 한참동안 그 사실을 몰랐다. 단지 소매치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루케니는 암살 훈련을 받아 작은 상처를 통해 치명적인 출혈을 유도했던 것이다. 시씨의 가슴에 난 작은 상처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녀가 입은 검은 옷 때문에 자신도 시녀들도 눈치채지 못했다. 시씨는 스위스를 떠나는 배에 승선하고 나서야 자신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곧 혼절했다. 그녀는 유언도 남기지 못했는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였다. 그리고 시씨는 그 배 안에서 사망했다.

평생 애증이 뒤섞인 미묘한 결혼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말년에는 프란츠 요세프와 화해를 하였으나, 다 늙어서 좀 사이가 좋아지려고 하니 암살당한 안습한 여인.

시씨가 죽은 이후 프란츠 요세프는 더욱 실의에 빠져 지낸 나날이 많았으며, 사적인 자리에서는 측근들에게 종종 "난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는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와 독일 등지에서는 그녀의 일생을 다룬 뮤지컬 '엘리자베트'가 공연되었다. '죽음(사신이나 죽음의 신이 아닌 말그대로의 죽음이다.)이 엘리자베트를 사랑했다'라는 내용인데 부정적인 부분까지 살려가며 꽤 고증이 잘 되어있다. 2012년 2월부터 5월까지 '엘리자벳'이라는 이름으로 라이센스판 한국 공연도 올라왔다.

오스트리아를 관광할 때 모차르트와 더불어 지겹도록 접하게 되는 인물이다. 삶이 드라마틱하긴 했다지만 결국 부족한 황후이며 나쁜 어머니로 자신의 책임을 모두 방기한 인물이였다는걸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로 인기가 많다. 예뻐서 그런 듯. 특히 비엔나의 왕궁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시씨 박물관까지 있으며 그 안에는 시씨가 생전에 입던 드레스나 사용하던 물건들, 심지어 그녀를 살해한 도구까지 전시되어 있다. 시씨에 대해 잘 모르는 관광객들은 주로 대충 보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 현지인들은 상당히 진지하게 관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쇤브론 궁전에 가 보면 시씨가 거주하던 방과 생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기념품점에서는 시씨와 관련된 다양한 기념품을 팔고 있다. 예를 들면 드레스를 입은 시씨의 미니 동상 혹은 흉상이라든지 그녀의 초상화라든지. 모차르트 동상, 모차르트 쿠겔, "오스트리아에는 캥거루가 없다."는 내용이 쓰인 티셔츠와 더불어 기념품점에서 반드시 보게 되는 품목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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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사족이지만 허례허식을 혐오했던 마리아 테레지아 때까지만 해도 쇤부른의 예법은 이웃나라 프랑스프로이센에 비해 무척이나 자유롭고 편안했다.
  • [2] 시씨가 남편을 자기한테서 떼어놓으려고 일부러 정부를 소개시켜줬다흠좀무한 이야기도 있다. 프란츠 요제프 1세 항목 참조.
  • [3] 미녀 왕족들이야 많았지만 시씨와 비교하면 영... 그나마 시씨와 견줄만할 정도의 미녀 왕족으로는 에드워드 7세의 아내인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왕비정도.
  • [4] 시씨의 어머니비텔스바흐 가문의 일원인 루도비카 빌헬미네로 루트비히 1세의 동생이었다. 루트비히 1세의 손자가 루트비히 2세이며 루도비카의 딸이 시씨이므로 루트비히 2세와 시씨는 오촌지간이다. 시씨가 루트비히의 당고모뻘 된다.
  • [5] 조피 대공비가 첫 손녀가 태어나자마자 데려가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 [6] 아이러니하게도 기젤라는 못생긴 외모에다 비록 정략결혼이었지만, 남편인 바이에른의 레오폴과 금혼식까지 치를 정도로 시씨의 자녀들중 유일하게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렸다.
  • [7] 사실 루케니가 노렸던 건 엘리자베트가 아니었다. 루케니는 후일 재판을 받으며 타겟이 왕족이면 누구든 상관없었다고 증언했다.
  • [8] 시씨 박물관에 가 보면 전시되어 있는데 흔히 보는 과일 깎는 칼보다도 훨씬 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