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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코 단돌로

last modified: 2015-04-05 00:25:39 Contributors



영어: Enrico Dandolo
이탈리아어: Enrico Dandolo
라틴어: Henricus Dandolo
그리스어: Ερρίκος Δάνδολος

1107?~1205

Contents

1. 도제 선출
2. 제4차 십자군 선동
3.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4. 죽음
5. 평가
6. 대중 매체

1. 도제 선출

엔리코 단돌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유력한 법률가 가문의 비탈레 단돌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비탈레 단돌로는 요직에 있었으며 엔리코 단돌로도 공직 생활을 하면서 여러 차례 중요한 임무들을 띄고 외교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172년 비잔티움 제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사이에 불화가 생겼을때 사절단으로 비잔티움 제국으로 가서 황제 마누엘 1세와의 실패한 강화협상에 참가하기도 했다. 일설에 의하면 엔리코 단돌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이익을 너무 챙기려다가 분노한 마누엘 1세의 의해 실명을 당했다고도 하며 이 때부터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깊은 적개심을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머리에 부상을 입어 시력을 잃었다는게 정설이다.
엔리코 단돌로는 두 번이나 시칠리아의 굴리엘모 2세의 베네치아 공화국 대사로 파견되었고 언제나 베네치아의 이익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 1193년 6월 1일 제38대 도제였던 오리오 마스트로피에로가 수도원으로 은퇴하자 엔리코 단돌로는 베네치아 공화국 제39대 도제로 선출되었다. 이 때 이미 시력을 잃고 노인이었으나, 놀라운 정신력과 체력으로 야심만만하고 정력적으로 일했다.

베네치아 공화국 도제로서 엔리코 단돌로가 취한 첫번째 조치는 도제의 권리와 의무를 밝힌 '두카의 언약'을 맹세한 것이었다. 그는 또한 형법을 개정하고 민법전을 최초로 발행해 베네치아 공화국의 관습법에 확실한 사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또 화폐를 개혁하고 그로소 또는 마타판이라고 하는 은화를 발행함으로써 동방무역을 장려하기 위한 전반적 경제정책의 포문을 열었다. 그로소 주화에 나오는 단돌로의 초상은 망토를 걸치고 왼손에는 두카의 언약, 오른손에는 성 마르코의 깃발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2. 제4차 십자군 선동


1202년 빌라르두앵의 조프루아를 비롯한 일단의 십자군 기사들이 베네치아를 방문하여 십자군 원정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엔리코 단돌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베네차아 공화국의 이익을 취하기로 하고 십자군에게 베네치아의 선단을 빌려줌과 동시에 베네치아군도 출진하기로 하였다. 원래 십자군의 의도는 이슬람 세력의 배후인 이집트를 공격해서 성지를 탈환하는 것이었는데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집트와의 무역을 더 중시하고 있었다.

엔리코 단돌로는 원래 인원의 3분의 1밖에 오지 않아 베네치아 배의 수송비를 대지 못하고 있는 십자군에게 베네치아의 무역 기지였다가 얼마전에 헝가리 왕국에 반란을 일으킨 자라를 되찾아줄 것을 제의했고 십자군은 자라를 공격했다. 당시 헝가리 왕국은 기독교 왕국이었기 때문에 십자군이 같은 기독교를 공격한 것에 대하여 분노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제4차 십자군 전체를 파문해 버렸다. 십자군은 사절을 보내 상황을 설명하여 파문을 풀었지만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하는 베네치아 공화국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엔리코 단돌로는 자라를 정복한데 만족하지 않고 다시 한번 십자군을 베네치아 공화국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선동했다. 다음 목표는 바로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이자 당시 세계에서 제일 가는 부유한 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였다.

3.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비잔티움 제국의 망명 황태자 알렉시우스 4세는 자신의 삼촌 알렉시우스 3세에게 제위를 빼앗기고 눈이 먼 아버지 이사키우스 2세의 복위를 십자군에 제의했고 엔리코 단돌로는 십자군을 설득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게 했다. 1203년 6월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 연합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여 공성전을 시작했는데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좀처럼 정복할 수 없었다. 심지어 콘스탄티노폴리스 내부의 수비군이 십자군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역관광당할 뻔하기도... 이 때 장님에다 노인이었던 단돌로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병사들의 상륙을 지휘하고 자신이 직접 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징이었던 산 마르코 깃발을 땅에 꽂았다.

엔리코 단돌로는 늙고 앞이 보이지 않는 몸을 이끌고도 전장에서 항상 선두에 섰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할 때는 완전무장을 하고 산 마르코 깃발을 든 채 갤리의 뱃머리에 서서 부하들의 상륙작전을 격려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뒤 엔리코 단돌로는 자기 자신과 후대 베네치아 도제들에게 '제4차 십자군의 맹주이자 비잔틴 제국 절반의 통치자'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 칭호는 십자군이 전리품을 분배할 때 베네치아에 할당한 비잔틴 제국 영토 크기와 꼭 맞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십자군은 알렉시우스 4세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고 결국 알렉시우스 4세는 배상금을 감당하지 못한 반란으로 쫓겨났다. 1205년 초 십자군은 엔리코 단돌로의 선동으로 다시 한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고 이번에는 엄청난 약탈,학살, 파괴를 자행하고 라틴 제국을 세웠다. 이 때도 엔리코 단돌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주력했고 결국 베네치아 공화국은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의 8분의 3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후 베네치아 공화국은 십자군과 정복한 땅을 거래하여 크레타 등의 무역 기지를 얻었다. 그는 십자군 원정의 가장 유력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무르면서 모든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한편 베네치아의 이익을 추구했다. 그는 베네치아의 카날레 그란데 대운하 주변에 단돌로 가문의 저택을 짓기 위해 값비싼 대리석을 배에 실어 자기 아들 레니에르 단돌로에게 보냈다. 단돌로 저택이 있었던 베네치아의 산루카 구역이 19세기에 발굴 되었는데 무어 양식의 건축물 유적과 녹색 대리석으로 만든 고대풍 기둥 유적이 나왔다고 한다.

4. 죽음

엔리코 단돌로는 라틴 제국 초대 황제의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자신이 황제가 되면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영향을 미칠까 우려해 스스로 후보가 되지 않았다. 대신 동료 베네치아인들을 설득해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 1세를 제치고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5세를 황제가 되도록 만들었다. 십자군은 막대한 문화재, 보물, 성유물을 약탈하고 하기아 소피아를 서방 카톨릭 성당으로 개조해 버렸다. 이러한 일들을 마친 엔리코 단돌로는 1205년 노환 때문에 병을 얻어 자신의 고국 베네치아 공화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 2층 전실의 대리석 무덤에 안장되었다. 그의 무덤 위에는 도제의 모자와 산 마르코의 문장을 새겼다.


한국-그리스 친선협회회장이던 유재원이 쓴 터키 관련 책자인 <터키, 1만 년의 시간여행>를 보면 1261년 라틴 제국이 무너질 당시 비잔틴인들은 먼저 단돌로의 무덤에서 그의 뼈를 꺼내 아주 신나게 부숴버리면서 분풀이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뼈를 들에게 던져줬으나 개들도 먹지않았다고 한다. 비어있던 그의 무덤은 1453년 오스만 제국이 비잔티움 제국을 멸한 후 하기아 소피아를 모스크로 개조하면서 파괴되었다. 하지만 그의 무덤 위치는 오스만 제국에서 내내 알려졌고 19세기 이탈리아에서 그의 원래 무덤 위치에 석판을 세웠다.

5. 평가

엔리코 단돌로는 베네치아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놀라운 인물 중 하나로 중세의 베네치아를 빛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엔리코 단돌로가 도제가 되었을 때 베네치아 공화국은 내외적으로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그는 베네치아에 진보적인 민법과 헌법제도를 도입해 내부문제를 해결했으며 아드리아 해와 동방에서 베네치아의 이권을 추구하면서 빈틈없는 상거래를 통해 막대한 영토를 획득했다. 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매장된 것은 베네치아가 부강한 나라로 성장하는 데 콘스탄티노플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상징하고 있다. 엔리코 단돌로의 생년을 정확하게 알 수 없어서 정확한 나이를 알 수는 없지만 십자군 원정 당시 이미 팔순의 노인에다 장님이 된 상태에서 십자군을 이끌고 원정을 떠나 당시 가장 부유하고 큰 도시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비잔티움 제국의 8분의 3을 소유한 영주라는 위대한 칭호를 받았다. 그럼에도 베네치아 공화국에서는 이 위대한 도제를 기리는 기념물을 세우지 않았는데 이는 공화제의 정신에 해가 가는 일은 어떤 일이든 하지 않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전통에 의거한 일이었다. 그의 무덤은 하기아 소피아에 있는데 규모가 작고 평범한 무덤이다.

그러나 그의 야심으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의 많은 위대한 문화유산들이 십자군 약탈자들에 의해 파괴되고 엄청난 문명적 재앙을 겪게 되었다. 따라서 십자군들을 선동하고 지휘한 엔리코 단돌로는 이에 대한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게다가 같은 기독교도 종파로 나누어져 전쟁을 서로 벌이면서 기독교계의 분열을 더 부채질했다. 오죽하면 250년 뒤인 1453년 오스만 제국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약탈했지만 그래도 이들은 250년전 단돌로의 기독교 악마보단 사람이라는 평을 비잔틴인들이 남겼을 정도였고 비잔틴, 동방 정교회에선 악마 중 악마 단돌로로 악명을 남겼다.

다만 같은 종교나 민족끼리도 뒷통수치는게 일상인 세계사의 흐름을 생각해 볼때 외국이나 이교에 의한 비난은 큰 비중을 두기 힘들고, 정작 엔리코 단돌로의 가장 큰 오점은 유럽의 방파제였던 동로마를 몰락시키고 그 땅을 차지함으로써 베네치아를 유럽의 방파제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동쪽으로부터의 침략자들을 1000년간 방어해내던 동로마가 아군이라 생각했던 서쪽으로부터의 공격 한 방에 무너지자, 이슬람의 군대들은 금각만을 넘어 남유럽과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몽골 침공으로 이슬람 세력이 몰락하면서 100여년 간은 별 일 없었지만, 그 동안 동로마는 서유럽의 야망에 맞선 생존투쟁으로 이슬람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결국 몽골의 침입에서 회복한 이슬람 세계에 오스만 제국이 들어섰고,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이슬람 해적들과 오스만 군대를 막아내던 동로마는 이제 수도의 방위에 급급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전에 동로마의 권역이였고 이후 베네치아의 상권이 된 남유럽과 동지중해의 방어는 오롯이 베네치아의 책임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그 권리를 뽑아 먹을 능력은 있어도, 책임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애초에 그리스의 섬 상당부분과 남유럽의 영지를 통치하며 세입이 프랑스를 상회한다고 해도, 도시 국가 하나가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이란 한정되어 있다. 초기에는 스페인의, 후기에는 신성동맹 전체의 지원을 받아가며[1] 오스만과 일진 일퇴를 거듭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해전과 아드리아해 연안의 육전에 국한되었고, 남유럽 내륙으로 밀려들어오는 오스만 육군을 막을 방법도, 의지도 베네치아에겐 없었다. 더욱이 베네치아에게서 받은 지원금으로 군사력을 강화한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은 베네치아 자체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결국 크레타 공방전을 기점으로 베네치아는 동로마에게서 얻어낸 그리스의 영토를 전부 빼앗기게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동지중해의 지배권도, 상권도 빼앗기고, 소모한 국력을 회복하지 못한 끝에 신성로마제국의 꼭두각시로 다뤄지다가 오스트리아에 합병되기에 이른다. 당대의 베네치아의 영광을 위해 소신했던 엔리코 단돌로의 업적이, 후일의 베네치아의 멸망을 부른 셈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관련 저서들을 통해서 그 시점에서 오스만 제국이 그렇게 성장할줄 예측할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었겠냐고 열심히 실드를 치지만, 단지 오스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살았던 수백년전부터 이슬람의 파도를 막아오던 제국의 역활을 당대의 모든 사람들도 어느정도 인정하고, 1차 십자군의 직접적인 원인이 룸 술탄국에 의한 비잔티움 제국의 압박 때문이었다는 것만 봐도 현재가 아닌 당대의 관점에서도 상당히 근시안적인 발상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할것이다. 즉, 오스만 제국이라는 특정 국가가 성장할 것을 예측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근동의 이슬람 제국이 강력해지면 그 칼끝은 동지중해에서 가장 거대하고 부유한 도시인 콘스탄티노플과 비잔티움 제국, 그리고 그 너머의 유럽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은 당대에 이미 우마이야 왕조셀주크 제국의 사례로써 증명되어 예측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다는 것. 이슬람 세력이 몽골 제국 처럼 갑툭한 것도 아니고, 힘이 되는 대로 꾸준하게 비잔티움 제국을 압박하던 것을 뻔히 보던 시기 사람들이 이걸 짐작하지 못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며, 오스만이 이끄는 투르크 세력이 아니더라도 이슬람 세력의 중심부를 통일하는 세력이 나오면 비잔티움이 그 공세를 감당해줘야 한다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이야기였다. 비잔티움 제국과 여러 형태로 알력을 겪었던 프랑크 왕국에서도 우마이야 왕조의 공세를 막아낸 비잔티움 제국에 축하사절을 보냈고, 1차 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을 향한 이슬람의 공세역량을 분산시키는 데에 공헌했음을 생각해 본다면 당시 엔리코 단돌로와 베네치아 공화국은 어찌보면 수백년 전 사람들보다 더 근시안적이었던 셈. 뭐, 근동에서 강력한 이슬람 국가가 탄생할 것을 어떻게 예측하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분열과 혼란이 정리된 후엔 통일과 단합의 시대가 온다는 것은 상식 아닌가? 당장 십자군 원정 과정에서도 아이유브 왕조가 탄생하자 십자군 국가들이 버텨내지 못하는 것을 뻔히 봤을텐데?

6. 대중 매체

코에이 징기스칸 4 시나리오 1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부하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괜찮은 편이지만 나이가 엄청 많아서 오래 사용할 수 없다. 또 군주인 오리오가 단돌로처럼 나이가 많아서 운이 안좋으면 오리오 사망시 단돌로도 사이좋게 같이 사망하기도 한다.(...)

문명 5 BNW에서 베네치아 지도자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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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명목상으로는 서로 동맹이었지만, 정확히는 베네치아의 넘치는 국부로 신성동맹을 용병으로 삼았다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