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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

last modified: 2015-04-02 22:17:56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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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개요
2. 생애
3. 평가


1. 개요

Adam Smith
/ˈæd.əm smɪθ/
'아담 스미스'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지만, 발음상 '애덤 스미스'에 더 가깝다.

1723년 6월 5일 ~ 1790년 7월 17일 (67세)

스코틀랜드 출신의 정치경제학자, 윤리철학자이다. 후대의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국부론》의 저자이다. 고전경제학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애덤 스미스는 일반적으로 경제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며[1], 자본주의유무역에 대한 이론의 기초를 제공했다.

2. 생애

애덤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파이프 커칼디의 세무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일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1723년 6월 5일 커크칼디에서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는 애덤 스미스가 세례받기 약 6개월 전에 사망했다. 4살 경에 집시 무리에게 납치되었지만 그의 삼촌에 의해서 구출되어 어머니 마거릿 스미스(결혼전 성은 더글러스)에게로 돌아왔다.

14살에 글래스고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친구였던 프랜시스 허치슨으로부터 윤리철학을 공부하였다. 1740년 스퍼드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으나 옥스퍼드의 생활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으며, 1746년에 자퇴하였다. 1748년에 케임스 경의 후원으로 든버러에서 공개강의를 하게 되었고, 강의에 대한 호평이 계기가 되어 1751년 글래스고 대학 논리학 강좌의 교수가 되었다. 1750년경 데이비드 흄을 만났으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1759년 유럽에 명성을 떨치게 된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을 발표하였다. 명성을 얻자, 돈이 궁했는지 1764년부터 스미스는 귀족인 타운젠트 공작의 장남의 개인 교사가 되기 위해 파격적인 조건을 받고 교수직을 사임하게 된다. 개인교사로서의 스미스의 임무는 이 소년과 여행을 같이 다니면서 이 소년의 견문을 넓혀주는 것이었다. 2년에 걸쳐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며 여러 나라의 행정 조직을 시찰하고 중농주의 사상가들과의 접촉을 통해 이들의 사상과 이론을 흡수하였다. 이렇게 여행하는 동안 그는 심심풀이로 책을 쓰기 시작했고 1766년 여행을 끝내고 고향에 돌아와 할일 없이 책 한 권 냈으니 이것이 바로 국부론이다.

그는 국부론에서 정부는 개인의 경제 생활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각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내버려두면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여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복지를 증진시키고 국가의 경제 발전이 보다 많이 이룩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그는 국가의 기능을 최소한으로 축소시켜 정부의 역할을 소극적인 경찰관의 지위로까지 낮춘 야경 국가론을 펼쳤다. 또한 국제적인 경제 질서에서도 자유 방임주의를 주장하여, 당시 각국의 정부가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보호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수입을 제한하고 있는 것을 자연 상태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비난하고, 자연의 법칙에 맞는 경제 질서는 국제적 분업에 입각한 자유 무역이라고 강조하였다.

이 책도 스미스 생전에 베스트셀러가 되긴 했지만 정작 <국부론>보다는 1759년에 쓴 <도덕감정론>이 더 유명했다. 그러나 스미스는 늘그막에 지인들에게 말하길 이 책들은 졸작이라고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 그래도 살아생전 인정받아서 대학교수로 역임되었고 글래스고 대학의 학장이 되면서 부와 명예를 누렸다.

그는 학자였지만 남을 낯설게 여기고 작은 키에 말을 더듬었으며 얼굴을 계속 흔드는 버릇이 있었으며 우스꽝스러운 장난도 잘 치곤 했다. 하루는 친구들과 궁궐을 지나는데 근위병이 위엄있게 서있자 갑자기 지팡이를 쳐들고 근위병 쪽으로 가더니만 총을 쳐들고 늠름하게 움직이는 근위병 뒤에 붙어 스미스가 지팡이를 들면서 그 행동을 따라하는데, 친구 하나는 "원숭이가 사람 따라하는 꼴 같다." 라며 솔직하게 말을 했을 정도였다. 근위병도 짜증나는 얼굴로 바라보긴 해도 뒤에서 막거나 하는 게 아니며 스미스가 꽤 이름있던 학자라서 궁귈에서도 알려졌기에 그냥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이러다보니 그를 교수로 임명하던 것도 말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도 교수가 되면서 열심히 일을 했고 학장이 되기까지 끊임없는 연구를 거듭했기에 반대하던 이들도 결국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갔는데 바로 여성공포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 어머니 마거릿과 같이 살다가 당연히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로 홀로 살았다. 죽기 전에 '미발표된 많은 글들을 태워달라'고 친구에게 요청했는데 죽기 전에 친구에게 아무래도 안 되겠다며 내 눈앞에서 태워달라고 요구하여 할수없이 친구들은 20권 분량이나 되는 막대한 글을 불태웠기에 영원히 누구도 보질 못하게 되었다.

3. 평가

스미스는 중상주의를 반대하고 자유시장과 자유 무역의 옹호자로 자리매김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다음으로 잘 나타나는데, "애덤 스미스는 자유방임주의를 교조적으로 옹호하지는 않았다. (중략) 그는 정부의 선의와 역량을 거의 믿지 않았고, 정부를 통제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자들이 누구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지 궤뚫어 보고 있었다. (중략) 그럼에도 그는 만약 더 나은 수단이 없다면 개인이 하지 않을 것 같거나 할 수 없거나, 하더라도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여러 과제를 정부에 맡길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 제이콥 바이너[2]

스미스는 자신의 역작이라 할 수 있는 <도덕감정론>[3][4] 이 책에서는 묵가사상에 대한 맹자의 비판이 확장적으로 나와 있는 버전이라 할 수 있다. 맹자의 경우 '금수와 같다'라는 문맥적 비판에서 그쳤지만, 애덤 스미스의 경우는 사례를 들고 있다. 그 사례로 로마제국의 5현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한 비판인데, 박애를 너무 중시한 나머지 지역과 민족, 복합적인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정책을 핀 나머지 로마제국의 혼란과 멸망을 초래했다는 비판이다.[5] 도에서 시장에 참여하는 사람의 올바른 태도와, 사람의 본성에 대해 굉장히 심오하고 철학적으로 고찰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국민을 위해 언제나 합리적인 결정만 내려야 하는 국가의 엄중한 역할에 대해서도 꾸준히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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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막상 그가 생존해있을 당시 경제학이라는 학문은 존재하지 않았고, 철학의 하위분야로 여겨졌다. 경제학이 독립된 학문으로 여겨지게 된 것은 20세기 때의 일
  • [2] "Adam Smith and Laissez-Faire", 1927,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35(2)
  • [3] 만일 애덤 스미스가 현 세상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어리둥절할 것이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도덕감정론을 내기 위해 미리 저술한 책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 [4] 도덕감정론은 기존의 합리주의 입장에서 보았을때 상당히 모순되는 책이다. 합리주의 하에서 도덕은 이성의 영역이지만 애덤 스미스는 도덕을 감정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실 맹자의 성선설을 받아들였던 케네의 영향을 스미스 자신이 많이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도덕이 이성인가 감정인가에 대한 질문은 조슈아 그린과 뇌과학자들의 트롤리 사유 실험에서도 나타나 있다.
  • [5] 사실 묵가에 대한 맹자의 비판은 시대상으로나 내용면에서 다시 비판을 받았는데, 사실 스미스의 주장을 일정면에서 함축하여 보면 한 사람의 구실을 못하게 되는 금수와 같다는 맹자의 주장과 다를게 없다. 맹자에 대한 비판가들은 맹자의 비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맹자는 비판과 더불어 동심원의 확장이라는 개념으로 겸애를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