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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마세나

last modified: 2015-07-11 20:56:50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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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André Masséna (1758.5.6 ~ 1817.4.4)

프랑스 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이자 나폴레옹이 임명한 26인 원수 중 한 명. 초대 리볼리 공작이자 초대 에슬링 대공.[1]

말이 필요없다. 프랑스 혁명전쟁에서 나폴레옹 다음가는 장군을 뽑으라고 하면 이 남자다.[2]

나폴레옹의 데뷔전이라고 할 수 있는 툴롱 전투 이전부터 마세나가 이끄는 군대는 승리를 거듭했고 당대 유럽에서 마세나보다 훌륭한 야전기록을 세운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한다. 별명은 승리의 여신이 가장 아끼는 아이.

다만 문제는 돈을 너무 밝힌다는 것이었다(…).

Contents

1. 마세나의 출생과 군 경력
2. 마세나와 혁명전쟁
3. 나폴레옹 전쟁과 그의 말년
4. 그 후

1. 마세나의 출생과 군 경력

마세나는 니스[3]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상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마세나가 6세가 되던 1764년,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재혼했기 때문에 마세나는 아버지의 친척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마세나가 13세가 되자 그는 상선에서 사환으로 일했다. 그는 지중해 및 프랑스령 기아나에도 다녀왔으며, 그렇게 4년동안을 배에서 보냈다. 1775년에 그는 니스로 돌아와 프랑스군에 입대했고, 귀족이 아닌 사람이 오를수 있는 최고의 지위[4]에까지 올랐다. 그 후 1789년 그는 군대를 제대했으며, 그해 8월에 결혼했다. 그랬다가 혁명으로 인해 다시 군대에 들어와서 1791년 장교가 되었고, 1792년에는 대령이 되었다.

2. 마세나와 혁명전쟁

프랑스 혁명전쟁이 발발할 당시, 마세나의 부대는 피에몬트 근처에 배치되어 있었고, 마세나는 전투를 대비해 자신의 부대를 훈련시켰다. 그해 10월, 마세나의 부대는 4개의 지원병 부대에 포함되었으며, 나중에는 이탈리아 방면군에 배속되었다.

마세나는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줄줄이 공석이었던 관계로 그는 빠르게 진급했으며, 1793년에는 여단장으로 진급했고 그해 12월에는 사단장으로 진급했다. 2년간 그는 이탈리아에서 큰 활약상을 선보였고, 사오르지오 공격 및 로아노 전투에 참가, 1796년에는 나폴레옹의 지휘하에서 2개의 사단으로 구성된 전위대를 지휘했다.

근데 이건 시작에 불과 했다.

제2차 이탈리아 전쟁 당시 마세나는 훌륭한 활약을 했다. 그해 봄에는 몬테노테와 데고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지휘를 했으며, 여름에는 로나토와 카스틸리오네, 바싸노, 칼디에로, 아르콜라 등의 중요한 전투에서도 지휘를 했다. 가을에서는 리볼리 전투와 만토바 함락에도 참가했다.

1799년에 마세나는 헬베티아 방면군의 후임사령관으로 부임, 카를 대공과 2번에 걸쳐 피터지는 싸움을 했다. 첫번째 전투에서는 패배를 당했지만 두번째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두었다.[5] 그 후 러시아가 제2차 대프랑스 동맹에서 발을 빼게끔 만드는 일련의 전투들에도 참가함으로 전선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냈다.

1800년에 마세나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제노바 공성전에 참가했고, 압도적인 적의 공세에 맞서 꿋꿋이 싸워냈다. 그러나 결국에는 6월 4일에 항복을 할 수 밖에는 없었다.[6] 제노바를 잃어버렸지만, 마세나는 나폴레옹이 마렝고 전투에서 어느 정도 우세를 점할 수 있게 시간을 벌어주었다.

3. 나폴레옹 전쟁과 그의 말년

1804년에 마세나는 나폴레옹의 신임을 얻어, 다시 지휘권을 잡았다. 그 해 있던 첫 원수 임명에 그의 이름이 올랐고, 그는 프랑스 원수가 되었다.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 마세나는 자신을 털어버린 원쑤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싸웠고, 베로나를 함락, 칼디에로에서 싸웠다. 나폴리 왕국 공략전에도 참가했으며 1807년에는 대육군 우익을 지휘하여 폴란드를 휩쓸었다. 1808년에 나폴레옹으로부터 다른 원수들 처럼 자신이 승리를 거둔 지역의 이름을 딴 리볼리 공작위를 하사받았다.

마세나는 1809년에 대육군 제4군단을 지휘하여 에크뮐과 에베르스베르크에서 싸웠다. 아스페른-에슬링 전투[7]에서, 마세나의 군대는 아스페른을 점거한 뒤 이틀간 몰려오는 적들과 피범벅이 되도록 싸웠다.[8] 그 후 벌어진 바그람 전투에서 승리한 공으로, 1810년에는 에슬링 공의 작위도 하사받았다.

반도전쟁 당시, 나폴레옹은 포르투갈 침공군 사령관으로 마세나를 임명했고, 마세나는 시우다드 로드리고와 알메이다를 성공적으로 점령, 포르투갈로 쇄도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웰링턴이 쌓아놓은 본격 우주방어 기지를 뚫지 못하고[9], 나중에는 부싸코에서 웰링턴에게 발렸다. 물자가 다 떨어진 마세나는 전군에 후퇴 명령을 내렸고, 스페인 국경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재앙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으니, 사부갈과 푸엔테스 데 오뇨로에서 패배한 뒤로[10] 그의 자리는 오귀스트 마르몽으로 교체당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에는 마르세유에서 지방군 사령관으로 쭉 지냈다.(...)

4. 그 후

마세나는 나폴레옹이 쫓겨나고 루이 18세가 집권했을 때 퇴역했다. 나폴레옹이 이듬해 복귀했지만, 마세나는 나폴레옹의 휘하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했고, 되려 나폴레옹에 대해 충성을 보이는 것에 싫증을 냈다. 마세나는 1817년 파리에서 사망했으며, 페르 라셰즈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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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정식명칭은 1st Duc de Rivoli, 1st Sovereign Prince de Essling.
  • [2] 정확히는 혁명 프랑스 안에서만. 그마저도 요새는 다부에 비해 좀 저평가이며, 프랑스 혁명전쟁 전체로 치면 러시아군 전략의 아버지인 알렉산드르 수보로프와 나폴레옹 리즈시절 최대의 호적수 중 하나인 카를 대공이 있다.
  • [3] 당시에는 사르디냐 왕국의 부속이었다.
  • [4] 당시는 귀족만이 사관이 될 수 있었으며, 평민들은 부사관에 그칠 수 밖에는 없었다. 부사관이 되는 것만 하더라도 당시로서는 영예였다.
  • [5] 이때는 카를 대공이 없었다. 대신 알렉산드르 코르사코프가 지휘하는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상대로 이긴 것. (그러나 수보로프가 잔여 병력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철수할 때는 손도 대지 못했다.)
  • [6] 다만 오스트리아군이 편의를 봐 줘서 그와 그의 7,000명의 군대는 무사히 프랑스 영토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 때문인지 나폴레옹의 신임을 잠시 잃었다.
  • [7] 이 전투에서 장 란 원수가 전사했다.
  • [8] 아스페른 마을을 점거했을 당시, 마을을 철저히 약탈 했다고 한다. 이 일로 마세나는 후세까지 두고두고 까이게 되었다(...)
  • [9] 이것은 포르투갈이 처음 구상하다 예산문제로 완공하지 못한 것을 웰링턴이 착공하여 완수한 물건이다.
  • [10] 사실 전술적으로만 본다면 이 전투에서 마세나는 웰링턴의 측면을 노출시키며 거의 승리할 뻔 했다. 그러나 마세나가 웰링턴의 측면을 공격할 것을 명령한 순간, 베시에르 휘하 장군인 르픽이 지휘권 문제로 마세나의 공격 명령을 거부하면서 승기를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