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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아인슈타인

last modified: 2018-04-14 16:42:13 Contributors

Contents

1.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1. 업적
1.1.1. 양자 가설
1.1.2. 라운 운동
1.1.3. 상대성 이론
1.1.4. 보즈-아인슈타인 통계
1.1.5. EPR 역설
1.1.6. 통일장이론
1.1.7. 반핵운동
1.2. 양자역학에 대한 반감
1.3. 이야기거리
1.3.1. 사생활
1.4. 어록
1.4.1. 종교관 관련


1.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타임지 선정 지난 세기의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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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39.44 KB)]
알버트 아인슈타인

< 1921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
1920 - 샤를 기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922 - 닐스 보어



[1]
메롱!
어떤 사진을 보던간에 아인슈타인은 빗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뉴턴, 나를 용서하시오. 당신은 가장 고결한 사고와 창조력을 지닌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건 당신의 시대에 국한된 일입니다.[2]

대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에 감싸여 있었도다.
주께서 "뉴턴이 있으라!" 하시매 모든 것이 밝아졌도다.
- 알렉산더 포프, 아이작 뉴턴의 묘비에.

그러나 그는 오래가지 않았으니, 악마가 "호!" 하며
"아인슈타인이 있으라!" 고 소리치매 모든 것이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
- 존 콜링스 스콰이어. 알렉산더 포프에 이어서.[3]

Albert Einstein[4][5] 석귀광
출생 - 사망 :: 1879년 3월 14일 - 1955년 4월 18일

유대계 독일인[6]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유명한 물리학자다. 대표적인 천재의 대명사.

문제는 사람들이 대부분 무엇 때문에 유명한지 모른다. 상대성 이론만 발표한 사람인줄 알기도. 너무 유명해서 그런지 온갖 루머가 난무하지만 신빙성이 있는 것은 드물다. 아인슈타인에 대한 책도 많지만 역시 믿을 만한 책은 얼마 안된다[7].

전자기학으로 유명한 위대한 물리학자 맥스웰이 사망한 년도에 독일 울룸 출생한다. [8] 아인슈타인은 인류 최고의 천재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게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보이는데 12~16살에는 미적분을 혼자서 공부했다고 하며, 특히 유클리드 기하학을 보고 그 논리성에 감탄공깽!했다고 한다. 이후에 김나지움에 진학하여 수학,물리에 심취, 당시 교육과정을 뛰어넘어 선생님들들도 쩔쩔매게 하는 질문을 하기로 유명한 학생이 된다.[9]
참고로 아인슈타인의 아버지는 전기공학자였고, 아인슈타인도 자연스레 전기기술자의 길을 걸으려 했다. 즉, 아인슈타인의 인생 전반에 걸쳐 전자기학(맥스웰)의 영향이나[10] 취리히 연방공대에 진학한 것도 가풍의 영향 때문. 한 가지 놓치기 쉬운 것이, 아인슈타인이 공과대학출신이라는 점. 순수 자연대학졸업이 아닌 응용학문을 대학에서 전공한 사람이다. 이는 물론 집이 이사한 것과 본토 김나지움 교육에 염증을 느껴 스위스로 간 이유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본인이 가업을 이으려 했기 때문에 이뤄진 현상. 한마디로 재능이 전공을 초월한 예 공대출신으로서는 전무후무한 위대한 물리학자가 되어 오늘날 자연대학(순수학문), 공과대학(응용학문)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1.1. 업적



인류역사상 최고의 물리학자


보통 핵폭탄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핵폭탄은 그가 제작한 것이 아니다. 그가 이뤄낸 물리학적 쾌거가 핵폭탄을 개발하는데 도움이 된 것 뿐 실제로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가장 큰 기여는 오펜하이머.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서너 달 간격으로 발표한 논문이 세 개 있고, 같은 해에 ETH Zurich에서 박사 학위를 받는다. 참고로 그 세 가지 각 논문의 주제는 양자 가설, 특수상대성 이론, 라운 운동인데[11] 이 세 편의 논문은 아이작 뉴턴으로 대표되던 근대의 물리학을 뒤엎으면서 천지개벽을 일으켰고, 그 각 논문은 현대 물리학의 주요 테마인 양자 역학, 상대성 이론, 계 역학의 시초가 된다. 엄마 이 아저씨가 물리과목 세 개나 더 만들었어 더 무서운 것은 그는 학교에서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닌, 특허청에서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 물리학 연구를 한 것이었다[12]. 즉, 공무원 생활하면서 인류 물리학사(史)에 이름을 남길 대업적을 남긴 거다. 매우 모범적인 변리사 성공신화다[13] 아인슈타인은 특허청에서 근무하면서 시간이 많이 남아 도서관가는게 그렇게 즐거웠다고 한다.우리나라 사람이었다면... 김나지움에 싫증을 느낀 것처럼 아인슈타인은 이미 한국을 떠나 어디로든 갔을 것 같다.

1.1.1. 양자 가설

양자 가설의 에너지가 양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현재는 광자라고 명명되었다. 이것은 이후 양자 역학을 이뤄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전까지는 빛은 파동이라는 설이 대세였는데, 이 이론에 의해 묻혀있던 입자론이 되살아나고 파동설과 결합해 양자역학의 기초가 완성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플랑크의 양자가설을 바탕으로 해, 빛에는 일정한 에너지 단위, 양자화 된 무언가가 있는데, 그것이 빛에게 입자적 성질을 가지게 한다고 했다.(E= n hf, n= 정수배)

양자화 된 그 무언가를 그는 '광량자'라고 불렀으며 빛은 광량자들의 모임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는 빛이 파동이라고 생각했던 기존의 학설을 반박함과 동시에, 이 가설에 사용되었던 플랑크 양자가설을 더 굳건하게 하였다. 빛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을 거의 못박은 셈.

이 이론은 많은 물리학자들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대표적으로 드브로이가 있는데, 그는 빛이 가진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에 자극받아 "혹시 우리가 입자라고 생각했던 전자가 파동이 아닐까?"라는 것을 느끼고 나온 것이 물질파다. 또 슈뢰딩거 역시 그의 아이디어에 착안하여, 슈뢰딩거 방정식;파동함수를 들고나온다.

1.1.2. 라운 운동

라운 운동이란은 1827년 영국의 생물학자 브라운이 발견한 현상으로,물에 작은 입자를 집어넣었을 때 외부의 특별한 간섭이 없어도 여기저기로 움직이는 현상이다.

브라운은 꽃가루로 실험했었기 때문에 자신이 당시에 유행하던 학설이던 생기(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기운)를 발견했다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아무 입자든지 작기만 하면 같은 행태를 보인다는 것이 관찰돼서 물리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아인슈타인의 업적은 이것이 물분자의 열운동에 의해 그 입자의 통계 역학적 임의 보행(Random walk) 운동하는 현상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예를 들어, 물통에 아주아주아주작은 입자를 하나 넣었다고 해보자 (물통은 정지해 있다). 그런데 그 입자는 물 속에서 물분자들과 충돌하게 되고 결국 스스로 이리저리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 입자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는 거의 랜덤이라서 랜덤워크운동한다고 하는 것이다. 물통에 들어간 입자가 충분히 크다면 역학적 평형관계를 이루게 되지만, 입자가 너무너무 작으면 이리저리 움직인다는 것. 아인슈타인은 이런 가설로부터 미소입자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식을 만들었는데, 이는 추후에 프랑스 물리학자 바티스트 페렝이 실험으로 검증해냈다.[14]

이 업적의 중요한 부분은 당시에는 생소했던 확산Diffusion이나 임의보행과 같은 개념을 도입하고 이론화 한 것이다. 즉, 무작위과정stochastic process이 물리학에서 중요개념으로 데뷔한 사건으로 그 중요성이 결코 같은 해에 발표된 광량자가설이나 특수상대론에 비해 결코 처진다고 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이 만든 확산-임의보행모델은 통계역학에서 중점적으로 연구되었고, 수학에서도 확률미적분학 등으로 발전했다. 그 영향력은 오늘날에는 경제학의 경제예측 및 시계열분야, 주식/채권을 분석하는 금융경제학에서도 연구대상이 되고 있는 정도. (이래서 경제학계에서 순수수학/이론물리학자들을 대거 채용한 적이 있었는데[15] 이들을 통칭 켓과학자라고 불렀다.)

1.1.3. 상대성 이론

E=MC²를 칠판으로 최초로 공개했을때 찍은 유일한 사진이라고 알려져 있다.

아인슈타인의 가장 유명한 상대성 이론은 1905년에 발표한 특수 상대성 이론(Special Theory of Relativity)과 이후 1916(혹은 1915)년에 발표한 일반 상대성 이론(General Theory of Relativity)으로 나뉜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 발표 이후 1922년에 1921년분 노벨물리학상겸손하게도 받아준다받는다. 참고로 노벨물리학상은 '광전효과'(광양자 가설)로 받은 것으로, 상대성 이론으로 받은 것이 아니다. 상대성 이론은 노벨상 따위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뛰어난 업적이라서여러모로 말이 많았고 노벨상감은 확실하니 상을 주긴 줘야겠고...해서 나온 궁여지책으로 이 광전효과는 이전까지의 빛의 입자설을 종합한 거 정도이며 분량도 A4 한 페이지 정도였다고 한다. [16]

캐유명해진 뒤로는 그가 일했던 스위스 특허국에 수많은 물리학자들이 그를 찾아오고는 했다. 어느 물리학자를 만난 후 아인슈타인이 "실제로 물리학자를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라고 하자 "당신은 매일 거울도 안 보십니까."라고 받아쳤다는 일화도 있다.

세 논문으로 아인슈타인은 유명해져 1908년에는 베른 대학에서 강의를 맡게 되고, 이듬해에는 취리히 대학 교수, 1911년에는 프라하 Karl-Ferdinand 대학 교수, 1914년에는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 소장과 베를린 대학 교수직을 맡는 등 출세길에 오른다.

"나의 일생일대의 실수는 주 상수를 방정식에 집어넣은 것이다."라는 말이 유명하다. 이것은 빅뱅 및 팽창우주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 어쩌구저쩌구 등(…여기에 대해선 빅뱅 참고)이 어우러지면서 '우주가 팽창한다'는 이론이 맞는 분위기가 되었는데, 아인슈타인 본인은 "나의 우주는 그렇지 않아!"라며 팽창우주론이 아닌 정적인 우주론(즉, 우주는 팽창하지 않는다)을 밀었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기 이론에 필요없는 우주 상수를 넣었다. 하지만 수학자들이 "이건 의도적인 실수입니다"라며 여러가지 주장을 들고 나오자 결국 팽창우주론을 지지하게 된다. 당시 상황에서는 억지였지만, 최근 우주 상수가 다시 각광을 받으면서 실수만은 아니었다고 보는 의견이 대세. 이 분쯤 되면 분야 자체가 분야인지라 일생일대의 실수도 엄청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수마저 업적이라는 거지. 아무리 봐도 얻어걸린것 같은데

1.1.4. 보즈-아인슈타인 통계

세상을 이루는 입자들 중 보즈 입자들의 분포에 관한 함수식이다. 물리학자 보즈는 광자의 분포에 대해서 통계식을 만들어냈는데 이를 아인슈타인이 보즈 입자 전체로 일반화시켰다.

이 식과 함께 맥스웰-볼쯔만 통계는 '근사식'이 되고 현대 통계역학의 기본 개념으로서 자리잡게 된다.

1.1.5. EPR 역설

Einstein과 국대스키Podolsky, Rosen 이렇게 세사람의 앞머리를 따서 이름 붙여진 양자역학의 역설이다.

양자얽힘에 관한 역설을 말하고 있는데 다들 한번씩 비문학 지문에서 읽어봤음직한 내용일 것이다. 얽혀있는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입자의 상호작용이 즉시 전달되는가 아니면 상대론에 따라 빛보다 느리게 전달되는가를 말하고 있다. 국소성의 원리에 대한 문제로, 아인슈타인의 주장에 따르면, 태양이 사라져도 곧바로 지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양자적인 규모에서도 어떤 현상이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한다.

양자역학을 싫어했던 아인슈타인이 보어를 까기 위해서 만든 역설이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소수의 물리학자들은 양자계의 상태에 대한 서술이 근본적으로 확률적이라는 펜하겐 해석을 인정하지 못했다. 양자적인 규모에서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모든 것이 확률적이며, 심지어는 관측이 거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코펜하겐 해석은 라플라스의 악마로 대표되던 고전적인 세계관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은 주사위를 굴리지 않는다.는 것도 코펜하겐 해석에 대한 이야기.

상대론의 확실함을 알고 있었던 아인슈타인은 이를 통해 양자역학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지적하였으며, 확률적인 코펜하겐 해석 대신에 국소성의 원리에 맞는 숨은 변수 이론을 주장했다.

현대의 실험에서는 '즉시 일어난다'는 보어쪽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EPR 역설 자체는 건재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딱히 보어의 말대로 실험이 됐지만 역설적으로 이해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상 자체는 일어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모순에 봉착하게 되는것이다. EPR역설은 당연히 제기될 수밖에 없었던 의문이었던 것. 아직까지도 비국소적인 실재론의 성립여부는 증명되지 않았다.

1.1.6. 통일장이론

아인슈타인에게는 꿈으로 남은 이론. 말년에 이 이론으로 씨름하다가 결국 완성을 시키지 못하고 작고하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유산은 남아 있어서 자연계의 기본힘을 모두 통일하여 설명하는 통일장 이론의 꿈은 후대 물리학자들에게 남아서 와인버그와 살람의 준모형과 같은 명맥을 만들기에 이른다.

1.1.7. 반핵운동

세계 최초의 핵무기 반대운동을 시작한 인물들 중 하나.

아인슈타인은 1939년 8월에 독일에서 진행되고 있던 핵무기 연구에 위험성을 느꼈다. 여기엔 여러가지 요인이 겹치는데,
  • 엔리코 페르미와 실라드 등이 아인슈타인에게 독일의 핵무기 연구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그를 설득했다.
  • 또한 나치 독일에서는 체코 등지에 우라늄의 판매를 중단시켰다.
  • 과학계에서는 독일의 과학자(나치 소속 과학자라는 의미가 절대 아님)인 토 한리츠 슈트라스만우라늄을 쪼개는 데 성공했다.
    당시엔 '우라늄을 쪼갤 수 없다'는 반응이 대세였다. 쉽게 설명하자면 큰 중성자에 작은 방사능을 쏘니까 못 쪼개는 게 당연하다(추가바람수정바람)는 것이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문제는 이 쪼개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 쪼개지는 과정에서 원자량의 일부가 에너지로 변환되는데,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다이너마이트 수백~천 톤의 폭발량으로 전환된다. 원자폭탄 이야기에 아인슈타인이 거론되는 이야기가 이 때문.
이를 토대로 아인슈타인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독일의 원자폭탄 보유에 대응하기 위해 연구를 진행할 것을 권유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맨해튼 프로젝트. 헌데 얼마 못 가 독일에서 핵무기 연구를 어이없는 방향으로 끌고 가거나 무산되는 등 삽질이 이어지자 아인슈타인은 "이럴 거면 그냥 관둬도 되겠습니다"라는 식의 편지를 다시 보냈다. 그러나...


이후 그는 당시 서한을 보낸 것을 평생 후회하며 핵무기 폐지를 위해 남은 일생을 바쳤다. 특히 1955년 영국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과 대대적인 핵군축과 평화를 촉구하는 러셀-아인슈타인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이 계기가 되어 전세계 과학자들이 과학적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핵무기 사용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군축과 세계평화를 논의하는 그워시 회의(Pugwash Conference)가 개최되었다. 이 모임은 21세기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17][18]

참고로 아인슈타인이 반전운동을 하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보고 버트런드 러셀은 "아인슈타인이 이해하지 못할 얘기 할 때는 그를 현명하다고 하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얘기를 하는 순간 그 사람에게서 지혜가 떠나버렸다고 생각한다."라고 평했다.

그에게 어떤 기자가 제3차 세계대전에 사용될 무기가 무엇이냐고 물어 보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 : 3차 세계대전에서 어떤 무기가 사용될지 모르지만 4차 세계대전에선 뭘 사용할 건지는 알겠군.
기자 : 4차 세계대전에선 무슨 무기가 사용될 것 같습니까?
아인슈타인 : 나뭇가지랑 작은 돌멩이.
3차 세계대전에서 문명이 다 망할 테니 4차에서는 저런 걸로 싸우게 된다는 의미.
미스틸테인메테오로 전쟁이 일어난다는게 아니다.

1.2. 양자역학에 대한 반감

양자 역학의 한 주춧돌을 놓은 인물이면서도 결정론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확률로 이해하는 양자 역학에 대한 반감이 깊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도 아인슈타인이 한 말이다. 이에 대해 그의 동료 닐스 보어는 "신이 주사위 가지고 뭘 하든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라(Stop telling God what to do with his dice)."라고 말했다. 단 주의해야 할 것은, 보어와 아인슈타인 모두 유대-기독교의 신을 믿지 않았기에 여기서 언급하는 신은 이신론(deism)적 의미에서의 신을 뜻한다는 것이다.[19][20][21]
정확히 말하면 그는 스피노자가 말한 진리, 즉 전 우주를 관통하는 크고 아름다운 법칙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1935년 이른바 EPR 역설을 꺼내서 양자 역학에 대한 정면공격을 시도했다.

1.3. 이야기거리

"사실 그는 수학에 매우 약했으며, 그래서 주변 연구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거나, 그가 초기에 내놓은 이론에 나오는 공식 계산은 전부 아내인 밀레바가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단 광양자 이론은 둘이 공동연구한 게 분명하다고 한다. 그녀는 아인슈타인과 같은 시기에 취리히 공대에 재학중이었고 거기서 사귀게 된 건데, 당시 그녀는 수학을 전공했다. 이래서인지 아니면 그녀를 고생시켰던 게 미안했던 건지, 노벨상을 받은 후 그 상금을 다 밀레바에게 줬다고 한다.[22] 실제로 학창시절 다른 건 몰라도 수학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될꺼야 아마 상태였다고도 하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물리학자 치고는 못했다는 거다.
아인슈타인은 고등학교까지는 수학과 물리학에서 좋은 성적을 얻고 있었다. 스위스에서는 1~6 으로 평가하는데 6이 최고점이고, 아인슈타인은 수학과 물리학에서 6 을 받았다. 간혹 이것이 독일의 점수체계와 헷갈려서 잘못 알려져(독일은 1~5 중 1이 최고점이다.) 낙제점을 받았다는 소리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고교때 수학천재설 따위가 등장하는데, 둘다 전혀 근거없다. 그냥 수우미양가중 수를 받은정도의 평범~약간우수쪽에 가까운 학생이었다고 보면 된다. 모든 천재가 떡잎때부터 뭔가 특별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중2병적 사고에 가깝다. 특히 시대를 뒤바꾼 대천재들중에는 오히려 30세 이전까지 평범가도를 걷던 경우도 상당히 많다.
문제는 수학이 직관적인 고교때와 달리 대학때부터 그저 형식적인 게 전부인 수학이 등장하면서 수학에 대한 모든 흥미를 잃었다는 것. 아인슈타인은 그런 형식적 기호놀음보다는 혼자 이론적-물리학적 상상에 잠기는것을 훨씬 선호하였고, 수학은 그저 눈엣가시정도의 방해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대학때 출석을 거의 하지도 않은것으로도 유명하다. 시험이 다가오면 친구들의 노트를 빌려 벼락치기한 후, 시험만 겨우 통과하는식이어서 사실 수학실력이 별로였던것은 사실이다. 이런 놀고보자 정신은 그의 경력에도 문제였을뿐 아니라, 후에 고도의 수학을 요구하는 일반상대성 이론을 전개하면서 그때 놀았던것을 크게 후회하며 여기저기 손을 벌려 역시 벼락치기로 공부했다고 한다. 다행히, 대학때 노트를 빌려주고 했던 친구이자 후에 아내가 된 밀레바와 친구인 마르셀 그로스만등은 후에도 수학에 약한 아인슈타인 곁에서 수학에 대한 도움을 많이 준 친구들이다. 어쨋건, 아인슈타인은 1900년에 ETH Zurich(취리히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수료하고 다행히도 졸업한다.

"주변 연구자의 도움을 받아야했다."는 것은 이로 미루어볼때 당연히 사실이 된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면, 그는 중력으로 휘어진 공간을 표현하지 못해 친구 수학자에게 도움을 청했었다. 이는 소위 말하는 비(非)유클리드 공간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19세기 중반 베른하르트 리만이 제창하고 난 후 19세기 말에나 가야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졌고, 중력을 기술하는 데 필수적인 미분기하학과 텐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된 것은 1900년 전후로, 당시만 해도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이상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이 1916년에 일반상대론을 설명하기 위해 쓴 논문에는 기하학에 익숙하지 않은 물리학자들을 위해 미분기하학을 설명하는 데 전체의 반 이상을 할애하고 있다. 따라서, 대학때 수학을 못했던것은 사실이나, 뒤늦게 자신의 이론전개를 위하여 여기저기서 도움을 받고, 공부를 하여 일반상대성 이론을 발표할 당시즈음에는 수학에서 전혀 약한모습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일종의 벼락치기형대기만성형 학자이다.

참고로 상대성 이론의 연구에도 수학적인 부분에선 부인 밀레바의 도움을 받았다는 설이 퍼졌었지만, 이건 가능성이 낮다. 광양자 이론 이후 아인슈타인은 그녀보다는 다른 동료들에게서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상대성 이론을 내놓을 즈음엔 밀레바는 그의 연구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사실, 밀레바는 졸업 시험의 수학 과목을 통과하지 못해서 졸업하지 못했다. 아인슈타인과 관련된 일화에 대해서는 Abraham Pais가 쓴 Einstein Lived Here(Oxford University Press, 1994)를 참고하기 바란다. 국내에도 번역서가 출반되었으나 역자가 비전공자인 관계로 과학 용어가 오역된 것이 많으니 주의할 것.

양말의 효용성 낮음에 대해 불평하였는데, 아마도 아인슈타인이 발톱을 깎지않아서 양말에 구멍이 자주 나서로 추측된다.

'뇌에 전화번호를 넣을 바에야 다른 지식을 넣는게 낫다'며 자신의 전화번호도 적어두고 평생 기억하지 않는 일화도 있다. 전화번호 가르쳐 달라고 할 때마다 일일이 수첩을 뒤적거렸다고 한다. 그리고 노년엔 자기 집 주소를 잊어버려서 비서격인 사람에게 주소 가르쳐달라고 전화를 했다는 말도 있다. 아인슈타인이 컴퓨터 두뇌를 가져서 다른 지식에 자리를 뺏겨서 생긴 일화인 듯.

여동생인 마야가 말하기를 마야가 태어났을 때 함께 놀 수 있는 동생이 태어났다는 말을 두 살 때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동생을 처음 보았을 때 바퀴는 어디 있냐고 물었다고 한다. 팽이로 동생의 머리에 구멍을 내려고 한 적도 있다. 마야 曰 "천재 오빠를 둔 동생의 두개골은 단단해야 해요."

한 번은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받고 인기가 높아지게 되자 큰 강당 같은 곳에서 대중들을 상대로 한 달 동안 강연회를 열었다. 강연회는 아인슈타인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운전기사에게 자신과 비슷하게 분장을 하게 한 다음 " 어차피 저 사람들은 내기 말하는 말이 뭔 뜻인지 모를거니까 나보다 말재주 좋은 네가 강의해라"고 했고 운전기사가 강의를 대신 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강의를 진행하다가 물리학 전공자가 질문을 걸어오면 "이건 내 운전기사도 풀 수 있는 문제다."하면서 운전기사 복장을 하고 있던 진짜 아인슈타인을 불러내 문제를 풀게 했다고. 다른 판본에서는 운전기사가 강연회에 함께 참석하다 보니 강의 내용을 잘 외우고 있어서 가능했다는 설도 있다. 물리학자 운전수 3년이면 상대성 이론을 이해한다

예술 분야에서 상당한 수준의 바이올린 연주자였으며, 모차르트의 곡을 선호했다고 한다. 평소의 취미 활동도 바이올린 연주. 재미있는 것은 모차르트의 곡들을 쾨헬 번호로 정리한 사람이 그의 6촌 지간인 알프레드 아인슈타인(Alfred Einstein).

자기 집 식탁보로 머플러를 짰다며 이웃집에 전화를 걸어서 자랑한 적도 있다고한다. 천재는 곧 괴짜라는 편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

외출을 나갔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자 쓰고있던 중절모를 벗어서 코트안에 감춰 모자가 비에 젖지않게 했다고 한다. 이웃사람이 그것을 보고 비오는데 왜 모자를 벗어서 머리까지 젖게 만드냐고 하자 "머리를 감는게 모자를 세탁하는 것 보다 간단한 일이다"라고 답했다고.

죽는 순간에 유언을 남겼다고는 하지만 당시 돌보던 간호사가 독일어를 몰라서 유언의 내용은 미궁 속 으로...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사후는 상당히 쇼킹하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을 화장하길 원했고 화장되었다. 가족들도 화장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사체 부검을 맡았던 프린스턴 병원의 병리학자 토머스 스톨츠 하비 박사는 부검시, 아인슈타인이 죽기 전에 미리 동의를 구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아인슈타인의 뇌를 빼내어 240조각으로 잘라내어 보관해 두었다.[23]

생각보다 의 크기가 크지 않아서 머리크기와 지능지수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반론의 산 증거[24]가 되고 말았다.(일반인과 유사한 수준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시되었다 - 서울국립과학관에서 열린 인체의 신비전) 다만 공간 지각 능력을 담당하는 두정엽은 일반인보다 15~30%가량 컸다.

사회주의자였다. 한국인들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위인들 중에 "어? 이 사람이 사회주의자였어?" 하는 반응이 나오는 두 사람이 헬렌 켈러와 아인슈타인. 1949년에 미국의 사회주의 저널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 창간호에 유명한 글 "왜 사회주의인가?"를 기고했다. 영어 전문 번역문

그의 스승이었던 헤르만 민코프스키는 아인슈타인은 게으른 개다 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1.3.1. 사생활

다음 사항들을 철저히 준수하시오.
  • 내 옷과 빨랫거리를 잘 관리하시오.
  • 세끼 식사를 제시간에 내 방으로 가져오시오. 존경하는 물리학 선배인 뉴턴 누구씨와는 많이 다른걸?
  • 내 침실과 서재를 깨끗하게 정돈하고, 특히 내 책상은 나만이 사용하는 것임을 명심하시오.
  • 사회적으로 필수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나와의 모든 개인적인 관계를 포기하시오. 구체적인 예를 들어,
    • 집에서 당신과 함께 앉아 있는 일
    • 당신과 함께 외출하거나 여행을 하는 일
나와 당신간의 관계에 있어, 다음 사항들을 준수하시오:
  • 나에게서 어떠한 친밀한 관계도 기대하지 말며, 나를 어떤 식으로든 비난하지 마시오.
  • 내가 요구할 경우 즉각 침묵하시오.
  • 내가 요구할 경우 일체의 항의 없이 즉시 내 침실이나 서재에서 나가시오.
  • 우리 자녀들의 앞에서 나를 깎아내리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마시오.
- 아인슈타인이 결혼한 후 그의 부인 밀레바에게 제시한 요구서[25].


아인슈타인은 다소 엉뚱한 곳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의 지도교수가 그의 자만심과 오만한 자세를 싫어하여 추천서를 써주지 않았기 때문에 마땅한 취직자리를 얻지 못했다. 그럴만도 한게, 아인슈타인은 심심하면 교수의 강의가 신통치 않다며 수업을 빼먹고 했었다. 거기에 더해 유대인이라는 데서 온 인종차별과 시민권 문제 등이 겹쳐 전공인 물리학으로 먹고살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보험회사에 취직한 뒤, 월급만으론 생활이 어려워 과외알바를 시작했다. 이 때가 1902년 봄. 아인슈타인은 베른 신문에 다음과 같은 광고문을 내었다. (아래 절반)

Privatstunden in
Mathematik u(nd) Physik
für studierende und Schüler erteilt gründlichst
Albert Einstein, Inhaber des eidgen(össischen)
polyt(echnikum) Fachlehrerdiploms,
Gerechtigkeitsgasse 32, 1. Stock.
Probestunden gratis.
개인 교습
수학과 물리학
전 학년 학생 대상으로 철저한 지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흠좀무
(스위스) 연방 이공학 교사 자격증 소지.
게레히티크카이츠 가(街) 32번지, 1층.
시범 강의 무료.

제자: 선생님 이거 교과서에 안나오는데요. 아인슈타인: 곧 나올거야.
이 아르바이트 문제로 상사와 싸운 뒤에 해고당했으며, 그런 시기에 아래에 나오는 리제를의 탄생, 아버지의 사망이라는 사건까지 겪게 되었다. 그러다 학교친구였던 마르첼 그로스먼의 소개로 특허청에 취직하면서야 간신히 암울한 시기를 탈출할 수 있었다. 오히려 시간이 남아돌아 연구할 여력이 생겨 전화위복이 된 셈.

심리학에 의하면 소위 말하는 '나쁜 남자'에 들어가는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이다. 일반적으로 너무 연구에만 매달려서 부인이나 가정에 소홀했다는 것만 알려져 있는데, 그 정도가 아니다. 아인슈타인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세계대전 도중 중립국에 도망쳐 있느라 첫 아내 밀레바와 떨어져 있는 동안 육촌 여동생아버지쪽으로 육촌 누나이자 이종사촌 누나이자 당시 미망인이었던 엘자와 친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26].

사실 밀레바와 결혼하기 전부터 아인슈타인의 집안 쪽에서 그녀에 대한 반대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밀레바가 아인슈타인보다 나이가 많고, 여자이면서 물리학을 전공했으며, 세르비아계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어머니가 밀레바를 '늙은 마녀'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엘자와 결혼하기로 결정하면서 밀레바를 비참하게 버렸고, 또 이혼을 한 후엔 밀레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에게 신경을 전혀 써주지 않아 밀레바가 많이 고생했다고 한다[27]. 게다가 아인슈타인과 밀레바 사이의 둘째 아들 에두하르트는 정신박약아였고, 발작을 일으켜 어머니를 목 졸라 죽이려 한 직후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일생을 마쳤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밀레바는 사망했다.

오죽하면 아인슈타인이 임종 직전에, 독일에 있는 장남에게 보고 싶다고 와달라고 했는데 그 얘기가 그대로 씹혔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인슈타인의 죽음 당시 첫 아들은 부모의 머리를 물려받아 버클리 주립대학에서 수력학 교수를 하고 있었는데 신문에 짤막한 부고 몇 줄을 내고 그대로 끝이었다고...

밀레바와 결혼하기 이전에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리제를이 있었다고 한다. 속도위반으로 태어나서 문제가 되었는지, 이 딸은 입양되어 혹은 어릴 때 죽었다고도 하는데 진위여부는 모른다.다만 후에 자신이 그녀라고 주장한 여성이 나오자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지인에게 이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 달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도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저 추측이다.

아인슈타인의 공식적인 사인은 복부 대동맥류 파열로 인한 내출혈이다. 이스라엘 건국 7주년 기념행사의 연설을 준비하다가 쓰러졌는데, 병원으로 실려갔을 당시 "인공적으로 수명을 연장하는 것은 품위없는 일이다. 주어진 일을 마쳤고, 이제 떠날 시간이니 우아하게 떠나고 싶다."고 하며 수술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까지 연구를 계속하다가 죽었다.

유명인물 치고는 유언이 알려져있지 않은데, 죽을 당시 미국에 있어서 주위에 찾아와 있던 '미국' 지인들이 그가 죽기 직전 내뱉은 독일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유언이 없는 것이 오히려 세간에 알려진 아인슈타인의 이미지에 맞는 지도 모른다.

1.4. 어록

※ 출처 : 위키쿼트

신은 난해하지만, 심술궂진 않다. (Raffiniert ist der Herrgott, aber boshaft ist er nicht.)
-1921년 4월,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을 처음 방문했을 때.

내 상대성 이론이 성공적으로 증명됐다면, 독일은 내가 독일인이라고, 프랑스는 내가 전세계의 시민이라고 선언할 것이다. 내 이론이 틀렸다고 증명됐다면, 프랑스는 내가 독일인이라고, 독일은 내가 유대인이라고 선언했을 것이다.
-1922년 4월 6일, 소르본 대학에 보낸 편지에서. 참고로 아인슈타인은 독일군으로부터 도망쳐서 미국으로 망명한 상황임을 기억하자.

삶은 자전거타기와 같단다. 균형을 잡으려면 계속 움직여야 하거든.
-1930년 2월 5일, 아들 에두아르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위대한 인물들은 항상 평범한 지성에서 비롯된 폭력적인 반대에 직면했습니다. 이 평범한 지성은 상투적인 편견에 맹목적으로 굴복하길 거부하고 대신 씩씩하고 정직하게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 사람을 이해할 만한 능력이 못 됩니다.
-1940년 3월 19일, 뉴욕 시티 대학의 철학과 명예교수인 모리스 라파엘 코헨에게 버트런드 러셀의 강사직 임명을 변호하며.

독일군이 원자폭탄 제작에 실패했다는 걸 알았다면, 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을 겁니다.
-1947년 3월 10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원자무기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하지만 너무 늦었다.

누구든지 자신이 진실과 지식의 심판자라고 가장하기 위해 기도하는 자는 신들의 웃음소리에 파멸했다.
-1953년에 출판된 "레오 벡 평전(Essay to Leo Baeck)"에서.

사랑에 빠지는 것은 사람이 하는 가장 미련한 짓이 전혀 아니라, 마치 중력처럼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이다.[28]
-1979년에 출판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인간의 측면(Albert Einstein: The Human Side)"에서.

(전략) 하지만 삶의 일상생활에서 예정되어 있던 순서가 방해받았을 때, 우리는 망망대해에서 어디서 왔는지도 잊어버리고,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초라한 널빤지에 올라탄 조난자들처럼 된다. 하지만 우리가 이걸 완전히 받아들이는 순간, 삶은 보다 쉬워지고 더 이상 실망할 게 없다.
-위의 책과 동일.

1.4.1. 종교관 관련

신앙심 없는 과학은 불완전하며, 과학 없는 신앙심은 맹목적이다.
-1941년에 출판된 "과학과 종교(Science and Religion)"에서.

신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있어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며 성경은 훌륭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어리석은 것
아무리 치밀한 해석을 덧붙인다 해도 이 점은 변하지 않는다
-1954년 1월 3일, 철학자 에릭 구트킨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무신론자가 아니며, 나 자신을 범신론자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처지는 여러 언어로 쓰인 책들이 가득한 거대한 도서관에 들어가는 어린아이와 같다. 아이는 누군가가 그 책들을 썼을 거라는 사실은 알지만 어떻게 썼는지는 모른다. 아이는 그 책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책들의 구성에 어떤 신비한 질서가 들어 있을 거라고 어렴풋이 짐작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내가 볼 때 지적으로 가장 뛰어난 인간의 경우에도 신을 향한 태도는 이 아이와 같다. 우리는 우주가 놀랍게 조정되어 있고 어떤 법칙들을 따르는 것을 보지만 그 법칙들을 희미하게 이해할 따름이다.우리의 제한된 정신은 천체를 움직이는 신비한 힘을 파악한다.
- 1999년, 「아인슈타인과 종교(Einstein and Religion)」, 프린스턴 대학교 출판부, 48p에 수록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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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사진에 대해 학교대사전은 "천재들은 왜 일찍 죽을까? 안 죽고 오래 살면 이런 노인 때 사진이 남기 때문이리라"라고 평한 바 있다. 그 예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전해지는 바로는 저 사진은 반드시 유명해질 거라면서 아인슈타인이 일부러 저런 포즈를 취했다고...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후일 NHK스페셜 '아인슈타인의 세계' 제작팀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원래는 자동차 뒷좌석에 남자 세 사람이 타고 있는 것을 아인슈타인 부분만 트리밍한 것이라고 한다. 어느 행사를 마친 후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차에 올라탄 아인슈타인을 보고 신문기자가 "아인슈타인 박사님, 포즈라도 취해 주십시오!" 하니까 별안간 저런 표정을 지은 것이라고...한 마디로 노인네의 변덕이었단 얘기.(이렇게 기술하면 뭔가 괴팍한 노친네처럼만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웃 초등학생의 수학 숙제를 도와주며 소일하는 자상한 모습도 있었다. 근데 아인슈타인한테 수학숙제 시킨 그 용자 대체 누구야 그 초등학생은 아인슈타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친절한 이웃집 할아버지로만 알았다고 한다)
  • [2] 그의 자서전(Autographical Notes)에서
  • [3] '악마'가 나왔다고 이상하게 해석하지 말기 바란다. 이 글은 일종의 패러디이다. 본래 아이작 뉴턴의 묘비에 시인인 알렉산더 포프가 "신이 '뉴턴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매 모든 것이 밝아졌다"는 묘비명을 써서 그의 업적을 찬양한 바 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뉴턴 역학의 세계관을 극복해 버리자, 현대 시인인 존 콜링스 스콰이어가 이 패러디를 덧붙인 것.
  • [4] '아인'과 '슈타인'으로 풀어서 해석하면 '돌 하나'라는 뜻이라는 말이 퍼져 있지만, 독일어 ein은 영어로 하나(one) 또는 부정관사(a/an) 둘 다의 의미가 있다. stein은 stone이라는 뜻. 따라서 einstein 은 one stone(돌 하나)보다는, 그냥 부정관사를 사용한 a stone 즉 '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한국식 이름을 지으면 석(石)씨가 된다 근데 독어는 애매하지만 영어로 따져보면 부정관사 a는 단수에 붙기 때문에 돌하나란 뜻도 맞다.
  • [5] 성씨항목에서도 보이듯 유럽 성씨중에는 조상의 직업이 많다. 즉 적절히 의역하면 그냥 석공 내지 최고의 석공이 된다. 프리메이슨?
  • [6] 사망 당시에는 스위스와 미국의 국적을 동시에 가진 이중국적자였다.
  • [7] 아인슈타인의 업적에 대해 정확히 알고 싶으면 Abraham Pais가 쓴 Subtle is the Lord를 참고.
  • [8] 하긴 그냥 유명한 것도 아닌 세계 3대 물리학자로 손꼽히는 맥스웰과 아인슈타인이 정확히 삶을 교체한것이니
  • [9] 흔히 전해지는 아인슈타인은 낙제생이다!는 와전된 것. 정확히 말하자면 아인슈타인의 초월질문에 선생님들이 "너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러니까 꺼져)"라는 대꾸가 이상하게 아인슈타인 본인이 이해를 하지 못하는 학생이었다 같이 와전된 것
  • [10] 게다가 아인슈타인 본인이 후에 광양자설 도입
  • [11]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물질과 에너지의 등가성에 대한 논문도 이 때 발표한다. 뭐 일반인들은 E=mc2 = 상대성 이론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도 꽤 있지만...
  • [12] 아인슈타인이 특허청에서 맡은 업무는 전자기현상을 이용한 기기에 대한 것으로, 주로 전자기학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사고 실험을 했다고 한다.
  • [13] 변리사가 하는 일이 바로 특허출원할 설계도 검토하면서 이게 특허 출원이 가능한 건지 아닌지 판정하고 특허출원이 된다면 도와주는 일이다.
  • [14] 참고로 이 현상은 분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 중 하나다.
  • [15] 그래서 대학원을 경제학으로 가기 위해 노리고 수학과를 지망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 편이다.
  • [16] 1919년 이혼소송 당시 만일 노벨상을 받으면 상금을 자녀 양육비로 첫번째 부인 밀레바 아인슈타인에게 주기로 돼 있었기 때문에 상금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이혼소송 재산분할 각서에 노벨상을 받으면 그 상금은... 이란 문구를 제정신에 끼워넣은 알베르트나 그런 각서를 받아준 밀레바나 둘 다 여러 모로 참 대단핟 노벨상 따위 그냥 내 ATM일 뿐이고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미리 수상 가능성을 암시하는 말을 들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극동 여행을 떠나 있어서 수상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 [17] 1회 회의는 1957년 7월 캐나다 퍼그워시에 10개국 22명이 참여하였다. 당시 방사능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핵실험 중지를 요구하였고, 매년 전 세계를 순회하면서 계속되고 있다. 과학적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핵과 각종 대량살상무기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안전책을 요구하고 있다. 따로 사무국은 없으며 개인참가형식이고 199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 [18] 2004년 한국에서도 개최되었다. 당시 60개국에서 모인 저명한 과학자 200여명이 참가했지만 언론의 무관심으로 그냥 묻혔다. 심지어 북에서도 사람이 왔는데...명색이 노벨상까지 수상한 단체의 행사인데, 노벨상이라면 환장하는 대형언론들이 지나가는 식으로 짦게 보도하고 넘어갔다.
  • [19] 그러니까 제발 아인슈타인이 기독교 신자라서 저런 소리를 했다고 주장하지 말자. 게다가 아인슈타인은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유대교에 얽매이지도 않았다.
  • [20] 뒷날 스티븐 호킹은 저기에 덧붙여 "신은 주사위를 던지기는 하는데, 우리 눈에 안 보이는 곳에 던져서 우리를 헷갈리게 한다."라고 말했다. 물론 호킹도 종교 신자가 아니다. (호킹은 종교에서의 흔한 신이 아닌 빅뱅이전의 신은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말했었다.)
  • [21] 관점의 차이 또는 해석의 차이로 보아햐 한다. 당시에 실험적 결과와 일치하는 양자역학을 거부할 수는 없다.
  • [22] 사실 혼자 미국으로 내빼면서 그 자리에서 이혼 위자료로 넘긴 것이란 말도 있다. 아인슈타인은 거의 아내를 노예취급했다. 요구사항 중 하나가 내가 꺼지라면 꺼져 같은 것도 있었다.
  • [23] 관련 다큐에서 보면 아인슈타인은 사후 하루도 안되어서 화장되었고, 그 뇌는 하비 박사가 적출해서 포르말린 용액에 보관했다고 한다. 최초 적출 상태 그대로 조각내지 않고 보관했었고, 주기적으로 관리되었다고 한다. 그후 비밀로 붙이다가, 아인슈타인의 손녀를 만나기도 하고, 뇌 연구가들에게 일부분이 제공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의 뇌는 그 이후 흑백으로 전후좌우 사진을 찍은 후 조각내졌다. 현재 이 뇌의 일부분만(슬라이드) 제한적으로 공개되며, 전체적인 조각은 다큐 이후로 비공개 상태이다.
  • [24] 뇌 크기와 지능이 아주 비례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와 호모 사피엔스정도의 차이가 있지 않은 한 그렇게까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 [25] 결혼 초기는 아니고, 관계가 나빠진 후에 보낸 메모임
  • [26] 촌수 개념이 없는 서양의 이야기가 우리나라로 오면서 사촌동생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영어에서는 항렬 같고 친형제 아닌 친척은 전부 다 cousin이니.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게 빅뱅이론에서(시즌8 09화) 하워드는 근친상간했다는 라지의 놀림에 대해 cousin(사촌)과 second cousin(육촌)을 구분한다.(She is my second cousin!) 엘자는 아인슈타인 아버지 사촌의 딸이었지만, 아인슈타인 어머니 언니의 딸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종사촌이자 6촌이 맞다. 그리고 1876년 생으로 되어있으니 사촌여동생이 아니라 누나.. 왠지 '미망인 사촌누나.TXT' 필이..
  • [27] 밀레바는 위인들의 그늘에 묻혀 천재성을 발휘할 기회를 잃은 대표적 케이스로 꼽히기도 한다. "아인슈타인의 첫 노벨상 수상 논문인 광양자이론은 밀레바와 공동으로 연구한 논문이었다"라는 주장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 반론도 있다(영문판 위키페디아, "Mileva Maric"항목 참조). 그녀는 아인슈타인과 이혼한 이후, 피아노 가정교사를 하며 두 아들을 홀몸으로 키웠다. 사실 그녀는 정 안 되겠다 싶었을 때 아인슈타인에게 경제적 요청을 한 적이 있지만, 도와준 적이 별로 없다고.
  • [28] 다른 표현으로 "사랑에 빠졌다고 해서 중력을 비난할 수 없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