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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데르 세베루스

last modified: 2014-12-31 02:21:00 Contributors


로마의 역대 황제
엘라가발루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세베루스 왕조 세베루스 왕조 군인황제 시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Alexander Severus) 본명 알렉시아누스 바시아누스(Alexianus Bassianus : 208?~235) 제위 기간 222~235

전 황제 엘라가발루스의 이종 사촌 동생.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의 권고로 엘라가발루스에 의해 카이사르로 임명되었고 양자가 되었다. 이후 무책임한 엘라가발루스에 대한 반동으로 인망이 동생에게 쏠리자 위기감을 느낀 엘라가발루스가 근위대에게 알렉산데르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엘라가발루스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던 근위대가 도리어 엘라가발루스를 죽이고 알렉산데르를 옹립했다.

즉위 했을 때는 나이가 14살에 불과해서 실질적인 통치자는 여전히 율리아 마이사였지만, 율리아 마이사가 꽤나 통치에 능했고 그 자신도 대단히 차분하고 얌전하며 예의바른, 말하자면 상식적인 성격이어서 제국은 이후 안정을 찾아갔다. 유명했던 법학자였던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와 파울루스를 근위대장에 앉혔고, 원로원과도 원활히 소통하여 문치를 펼쳤다.[1] 또한, 호민관 및 평민 안찰관 공직이 폐지된 것이 바로 이 황제 치세 때다.

늘 공직자 명단을 항상 끼고 다니며 거기에 나와있는 수천명의 공직자와 장군의 이름을 일일히 다 외웠고, 역사를 익히는 것도 열심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지나치게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려는 경향을 보였고, 그 자신 여기에 불만을 터뜨렸으나 끝내 극복하지 못하는, 즉, "마마보이"의 증상을 보여 불운의 싹이 트게 된다.

이 문제 많은 어머니 율리아 마이아는 율리아 마이사와는 달리 나서지 않을 때를 구분하지 못하는 데다 통치 능력도 형편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고, 그나마 딸을 컨트롤하던 율리아 마이사가 죽자 이 점이 재앙으로 다가오게 된다.

마마보이 황제는 근위대를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했고, 결국 울피아누스가 황제 면전에서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런 때에도 율리아 마마이아는 아들이 성인이 되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늘 간섭을 일삼았으며, 일껏 들인 명문가 출신의 며느리마저도 심히 질투해서 내쫓고 만다. 물론 알렉산데르는 여기에 대해 큰 불만을 느꼈지만, 마마보이들이 동서고금 그렇듯 어머니의 의사를 거역하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강력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아르다시르 1세와 맞붙게 되는데, 황제에게 군사적인 재능까지 반드시 요구하는 로마 원수정 체제의 고질적 문제점이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물론 황제가 나름 정상적인 성장을 하면서 경력을 쌓았다면 상관이 없겠으나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지기 때문.

마크리누스 이후로 주둔지를 잃고 방치되어 있던 동방 군단들의 문제점은 심각했다. 마크리누스가 파르티아에 넘겨줘서 주둔지도 없던 2개 군단의 병사들은 황제의 소집에도 늦장을 부리는 태업을 하고 있었고, 군율을 잡겠다고 이를 엄하게 처벌했다가 병사들이 파업을 일으켰으며, 거기서 병사들을 전우(콤밀리테스)라 부르면서 "군단병 노릇을 하기 싫으면 그만둬라" 라고 했더니 병사들이 자진 해산해서 2개 군단이 흩어지고 깨어졌다가 뒤늦게 복구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2]

하지만 로마군의 물량은 그런 동방 군단 2개가 잠시 해체되었다고 해서 바로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고, 3로로 진격한 나눠서 진격한 로마군 중 이렇다할 성공적인 작전을 벌인 분견대는 하나도 없었으나 사산조 페르시아 또한 막대한 인적, 재산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때 로마군 쪽의 병크가 강조되지만 사산조 페르시아도 생각보다 그렇게 잘 싸운 건 아니었고, 여러모로 로마 못지 않은 쪽팔린 모습을 보여주었다. 병림픽 때문에 사산조는 그후로 오랫동안 로마 제국 안을 넘보지 못했고, 사산조와의 국경은 이후 상당 부분 동안 안정되었다.[3]

다만, 게르만족 침입을 막으러 갔을 때 문제가 되었다. 막상 가서는 그 게르만족들에게 돈을 주면서 회유하려 들었다가 그에 불만을 가진 부하들에게 비참하게 살해되었다. 다만 이건 알렉산데르의 오판이라고 할 수는 없다. 먼 게르만족과 가까운 게르만족이 그렇게 하루아침에 교체되어 문명이 떨어진 이민족으로 교체되었다는 건 아주 큰 오해며, 이 과정은 수백 년 동안 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먼데서 오는 게르만족도 꾸준히 "로마화"되고 있었다. 이른바 시오노 나나미가 말하는 "로마 제국의 매력"또한 적어도 4세기까진 여전했다. 제일 문명화가 뒤떨어진 프랑크족 출신의 로마 군인들도, 오늘날의 관념으로는 같은 민족일 다른 프랑크 야만족들을 제국군 측에서 사정없이 쳐죽였으며 그들은 오히려 이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음은 프랑크인인 자신을 자랑스러워했으나 어디까지나 로마 군인임을 먼저 내세운 묘비에서도 드러난다.[4]

따라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정착책은 로마인 이야기에서 말하는 바와는 달리 상당 부분 현실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어머니 말을 따라 정책을 결정하는 예의 고질적인 마마보이 근성을 또 다시 드러냈으며, 이것이 현지 군단들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상황과 맞물려 크나큰 파국으로 따라왔다. 바로 어제까지 싸우던 야만족들에게 자기네들이 응당 받을 수도 있었던 하사금이 대폭 주어지고 통과시켜야 한다면 누가 좋다고 그런 명령을 따를 수 있겠는가?

때문에 병사들은 막시미누스 트락쿠스를 옹립하면서 황제와 황제의 모친을 참살했다. 젊은 나이에 여자에도 별 관심이 없었던 황제라 자손이 없었고, 그 덕분에 세베루스 왕조는 끊어지고 만다. 그 뒤를 이은 건 그 악명 높은 군인 황제 시대.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야만족 러시가 일어난다.

착실하지도 못하고 자기 절제 능력은 알렉산데르보다 훨씬 뒤떨어졌던 네로가 그래도 어머니에게서는 어떻게든 벗어나서 자립하는 모습을 보여줬음을 생각해볼 때, 이는 매우 안타까운 대목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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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단, 황제가 담당하던 로마 시민 상고심이 사라진 건 이 황제 때였고, 카라칼라의 로마 시민권 확대 탓에 로마 시민이 너무 많아진 게 이유였다고 한다. 물론 로마 시민은 카라칼라의 개혁 이전에도 이미 그 수가 급속도로 불어나는 추세였던지라 어차피 없어질 운명이긴 했다.
  • [2] 이 해프닝은 공화정 말기의 내전때 카이사르의 심복 군단이 10 군단병들이 "우린 카이사르 심복이니까 좀 개겨도 되겠지. 설마 우릴 안 잡겠어"라는 심정으로 임금 인상을 목적으로 파업을 일으켰을 때 카이사르가 "전우(콤밀리테스) 여러분들, 여러분들이 그렇게 원하면 제대시켜 주겠다"라고 한 방 먹여서 다들 데꿀멍해서 알아서 기어들어온 에피소드를 멋도 모르고 그대로 따라했다가 피 본 케이스다. 카이사르때야 전장에서 10여년동안 같이 구르면서 끈끈해질 때로 끈끈해진 사이라 병사들이 데꿀멍했지만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생전 처음 보는 애송이가 갑자기 황제랍시고 전우 운운했다.
  • [3] 그래서 양쪽 다 이후 서로의 승리를 선전했고 이는 서로에게 모두 근거가 있었다. 로마측은 페르시아에게 큰 타격을 주어 국경을 안정화시킨다는 목표를 달성했으며 페르시아 또한 침공해 들어온 로마측을 어떻게든 격퇴해서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 [4] 3~5세기 동안의 변화가 일순간에 일어났으며 그 모든 게 부정적이기만 했다고 하는 건 아주 예전의 사관에 불과하다. 로마인 이야기는 이런 사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때문에 바로 이런 부분을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